소설리스트

제91장 (92/129)

제91장. 실기(失期)-가족을 잃다

정천맹의 맹주를 맡은 독괴는 군사인 제갈천의 정례 보고를 받고 있었다.

“최근에 절강고가가 이상한 행보를 보이고 있어 조사가 필요한 듯 보입니다.”

“절강고가라면 백도 사십 중문에 든 문파가 아닌가?”

“맞습니다.”

“그들의 일이라면 협의회가 맡는 것이 좋지 않겠나?”

언제나 대문파들에 비해 불이익을 받는다고 소리 높이는 이들이 바로 협의회다.

겉이야 백도 사십 중문이 협의를 위해 모였다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거대 문파들에 대항해 자신들의 이익을 지켜 내기 위해 결성된 단체였을 뿐이다.

그런 곳에 소속된 문파의 일에 나서 봐야 고생만 하고, 엉뚱한 소리만 듣기 쉬웠다.

“그렇긴 합니다만… 현재 보여 주고 있는 행보가 워낙 의아해서 말입니다.”

“도대체 어떻기에 군사가 그리 말하는 겐가?”

“그것이, 최근 들어 절강고가가 외부의 시선을 완전히 차단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외부의 시선을 차단해?”

“예. 절강고가가 위치한 구룡산 근처로는 다가가기조차 어렵다는 보고입니다.”

“타인의 접근을 그토록 염려한다는 건 그만큼 구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반증이겠지?”

“저도 그래서 조사를 해봐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혹여 마공이라도 연성 중이라면…….”

백도 문파가 마도 문파가 되는 일이다. 그럴 동안 정천맹이 아무것도 몰랐다는 것이 창피하긴 하겠지만, 그런 전례가 없던 것도 아니니 크게 문제 될 건 없다.

또한 그렇게 마도로 넘어갔다고 해서 그쪽으로부터 크게 환영을 받을 만큼 강호가 만만한 세계가 아니니 해당 문파도 잃는 건 많고, 얻는 건 적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정천맹이 굳이 손을 쓸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렇다 한들,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있겠소?”

“사실은 인근에서 팔대 금마공에 해당하는 무공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이 함께 도는지라…….”

팔대 금마공.

무림이 이어져 오는 동안 연성이 금지된 가장 고약한 마공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 지독함이 오죽했으면 마공을 익히는 마교를 비롯한 마도에서조차 똑같이 팔대 금마공으로 지정해놓고 있을 정도였다.

“무, 무엇이 튀어나왔는가?”

“혈미공입니다.”

“혀, 혈미공!”

혈미공.

혈 자가 들었다고 피에 미친 마공은 아니다. 하지만 파괴력은 그보다 훨씬 크다.

이 무공은 원래 미용에 관심이 많은 한 여고수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주안술의 일종이었다. 하지만 우연하게도 그 안에서 얼굴근육을 통제해 전혀 다른 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걸 발견하면서부터 마공의 이름이 붙었다.

언제 어디서 자신과 똑같이 생긴 사람과 마주칠지 모르는 상황을 무림은 용납지 않았다.

“예. 현재 소문이 난 수창에 밀영들을 집중시켜 소문의 진위를 파악하고 있었습니다만, 그 와중에 절강고가의 이상 행보가 발생해서…….”

“수창과 구룡산의 거리가 가까운가?”

“이백 리 안쪽입니다.”

경공을 연마한 무림인에게 이백 리는 공간의 제약을 주지 못한다.

“흠… 시기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때와 절강고가가 이상 행보를 보이기 시작한 시점이 묘하게 비슷합니다.”

“하면, 자네 생각은……?”

“아니라면 다행이겠지만, 만에 하나를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제갈천의 답에 잠시 생각을 가다듬던 독괴가 물었다.

“어느 정도의 대응 수위를 생각하고 있나?”

“군사전의 발의 아래 맹주님의 동의로 움직일 수 있는 곳은 정의검대뿐입니다.”

정천맹의 무력 집단 중 장로회의 동의를 받지 않고 움직일 수 있는 곳은 제갈천의 말대로 일백 명의 고수들로 구성된 정의검대뿐이었다.

“그 말은 아직 장로들에게 알리지 말자는 소리인가?”

“확인되지 않은 일을 알려 봐야 괜히 소란스럽기만 하지 않겠습니까?”

독괴를 비롯한 많은 정천맹의 요직이 새사람을 맞았다. 그 이후로 능력 부족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흘러나왔다.

이번 일이 오해로 밝혀지면 자칫 그 문제가 정식으로 불거질 수도 있었기에 제갈천은 꽤나 조심스러웠다. 그런 마음이 전달되었던지 독괴는 다행히 고개를 끄덕여 왔다.

“그 일은 군사에게 맡기지. 하면 정의검대는 언제 출발시킬 생각인가?”

“준비가 마무리되는 대로 출발시킬까 합니다. 적어도 사나흘은 걸리지 않겠습니까?”

어쩌면 전투가 벌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대충 몸만 가도 되겠지만, 그런 상황을 대비해 충실한 준비를 갖출 시간이 필요하다고 제갈천은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군사가 알아서 출발시키게. 내 미리 출병령은 내려놓겠네.”

“감사합니다, 맹주님.”

“아니야. 금마공에 관계된 일이라면 충분히 조사해보는 것이 옳은 일. 타인의 입은 신경 쓰지 마시게.”

“예. 알겠습니다, 맹주님.”

고개를 숙이는 제갈천에게 푸근한 미소를 지어 보인 독괴가 물었다.

“다른 안건도 있나?”

“아, 예. 이번엔 불연대에 관한 보고입니다.”

“불연대? 왜,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닙니다. 그들은 너무 잘하고 있지요. 이번 보고도 좋은 소식입니다.”

“그렇다니 다행이군. 말해보게.”

독괴의 재촉에 제갈천이 말을 이었다.

“예. 현재 불연대는 제갈세가의 석학들이나 여의검존의 평가 공히 완성 단계에 이르렀답니다.”

“상당히 빠르군.”

“여의검존 대협의 합류가 가장 큰 이유입니다. 그분의 가르침을 받은 이후 성취가 월등히 빨라졌습니다.”

“다행스러운 일이야. 그럼 언제쯤 완성될 거라던가?”

“이르면 이달 말, 늦어도 다음 달 안에는 마무리가 될 것이랍니다.”

“하면 이르면 보름, 늦어도 달포 안엔 검마를 칠 준비가 갖추어진다는 소리로군.”

“그렇습니다.”

“소림엔 알렸나?”

“보고가 끝나는 대로 알릴 생각입니다.”

“조만간에 소림의 무승들이 몰려나오겠군.”

“검마를 상대하려면 그래야겠지요.”

제갈천의 답에 고개를 끄덕이던 독괴가 물었다.

“무당과 팽가는 여전히 부정적인가?”

“예. 안타깝게도 무당은 완연한 거절입니다. 팽가는… 여전히 핑계만 댈 뿐입지요.”

“무극검과 도왕. 백도 최고의 고수들을 보유한 두 곳이 침묵이라니……. 답답한 노릇이로군.”

“그래도 맹주님이 계시고 여의검존께서도 합류를 하셨으니, 큰 힘이 될 것입니다.”

“그야 그렇겠지만…….”

솔직히 상대가 검마인 이상 독괴는 그다지 소용이 없다. 독공은 물론이고, 그 어떤 독물로도 검마가 도달했다고 알려진 현경의 고수를 중독시킬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의검존은 다르다. 그의 검술은 완성된 불연대와 함께 검마의 목을 충분히 위협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독괴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있었다.

그것을 눈치챈 제갈천의 음성이 들려왔다.

“상대는 검마뿐이 아닙니다. 그땐 여의검존 대협이나 불연대보다 맹주님의 활약이 반드시 필요해질 것입니다.”

“다른 상대?”

“예. 검마에게 붙어 호가호위했던 배신자들과 부화뇌동했던 이들을 정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백도의 탈을 쓰고 마도와 협잡을 일삼아 정천맹의 위신을 갉아먹은 쥐새끼들을 박멸해야 할 테니 말입니다.”

제갈천의 말에서 피 냄새가 물씬 풍겨 왔다. 그 말은 단리세가를 포함해 검마 척결에 동참하지 않았던 곳들을 정리해야 한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흠… 무당과 팽가도 있는데 그게 가능하겠나?”

“그 두 곳이야 어쩔 수 없다고는 해도 나머지는 일벌백계로 삼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맹주님.”

평소보다 굉장히 독한 말을 쏟아내는 제갈천을 바라보며 독괴는 속으로 혀를 내둘러야만 했다. 역시 독심제갈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정례 보고를 마친 제갈천이 돌아가자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이철이 할아버님을 뵙습니다.”

“오~ 어서 오너라.”

갑작스럽게 방문한 손자를 환한 미소로 반기는 독괴에게 당이철의 뒤를 따라 들어온 당호란이 인사를 올렸다.

“호란이 할아버지를 뵙습니다.”

“오냐, 오냐. 우리 란이도 왔구나. 그래, 어서 오너라.”

사람들에겐 피도 눈물도 없는 괴팍한 노인네라고 소문이 났지만, 손자들에겐 꽤나 끔찍한 독괴였다. 그 탓에 당호란과 당이철 외에도 그의 손자, 손녀들은 독괴를 상당히 잘 따르는 편이었다.

“건강하신 거죠?”

“그럼, 우리 란이가 이렇게 걱정을 해주는데 아플 수가 없지.”

“피- 할아버지는…….”

당호란의 새침에 독괴의 입에서 커다란 웃음이 터져 나왔다.

“크하하하! 우리 란이는 삐치는 모습도 예쁘구나.”

“할아버지!”

뾰족한 음성을 토하는 당호란의 모습에 독괴는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

“이크, 잘못하다간 이 할아비 수염을 모조리 뽑겠다고 나설라. 자, 안 웃는다. 되었지?”

“소리만 안 냈지, 입은 지금도 웃고 계시잖아요. 그리고 수염 뽑은 건 십 년도 더 전에 어렸을 때의 일이라고요.”

“그래그래, 알았다. 자- 이제 되었누?”

간신히 웃음을 갈무리한 독괴의 물음에 당호란은 입만 삐죽여 보였다.

“쳇.”

그런 당호란에게서 시선을 돌린 독괴가 당이철에게 물었다.

“그래, 이렇게 보니 반갑긴 하다만 어쩐 일로 세가를 또 나온 게야? 집으로 돌아간 지 이제 겨우 보름 조금 넘은 것으로 들었다만…….”

“그게, 재미있는 사실을 알게 돼서요.”

“재미있는 사실?”

“예. 일전에 저희가 산적에게 잡혔었다는 말씀 드렸었나요?”

“네 아비의 서찰로 알고 있었다. 녹림에서 나섰었다고?”

“예. 녹림 총표파자도 끼어 있었다니까요.”

“그래. 한데, 재미있는 일과 그 일이 무슨 연관이라고……?”

독괴의 물음에 마치 준비라도 해간 듯 당이철은 막힘없이 설명을 이었다.

“그게, 그때 우리를 구해준 사람 있잖아요.”

“뭐, 관부의 고위 관료 출신이라던……?”

“예. 소흥 왕부 출신이라던 관리요.”

“한데, 그가 왜?”

“속내를 파다 보니까…….”

“어허, 관인의 뒤는 캐는 것이 아니다.”

제 손으로는 닭 모가지 하나 비틀 힘이 없는 관인이 관병 수만을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괜히 그런 권신을 건드렸다간 제아무리 당가라도 무사할 수 없었다. 그만큼 관인의 뒤는 비밀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렇게 파다 보니 검마가 나왔는데요?”

당이철의 말에 야단을 쳤던 독괴의 눈이 퉁방울처럼 튀어나왔다.

“누, 누구?”

“검마요. 검마가 한동안 소흥 왕부의 일을 봐줬더라고요. 솔직히 말하면 우린 안면이 있는 그를 찾아가 휘 형의 숙원을 풀어줄 생각이었거든요.”

“휘라면 모용가의 아이 말이냐?”

“예. 할아버지도 아시는군요.”

물론 알고 있었다. 여의검존이 나타나며 모용세가의 후계 구도에 문제가 생긴 것이 표면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기에 검마와 그 아이가 관련이 있어?”

“휘 형과 관련이 있다는 게 아니고요. 휘 형이 그가 아는 사람을 좋아했거든요.”

이제 모용세가는 소가주를 쳐내야만 하는 명분까지 손에 쥔 셈이 된다. 물론 이 사실을 독괴가 모용세가에 알려 주었을 경우지만…….

순간 독괴는 모용세가에 빚을 지워두는 것에 대해 이해득실을 따져 보고 있었다.

“할아버지, 지금이 재미있는데…….”

당이철의 볼멘 음성에 정신을 차린 독괴가 물었다.

“재미가 있다니, 어떤 것이 말이냐?”

“그게, 검마가 반한 사람이 있거든요.”

“검마가 반해? 누구에게?”

“놀라지 마세요. 백도 문파의 여식에게 반했다니까요.”

“백도 문파의 여식에게 반했다? 그게 어디냐?”

생각 이상인 독괴의 반응에 살짝 겁을 먹은 당이철이 불안한 음성으로 답했다.

“저, 절강고가요…….”

“절강고가!”

놀랄 수밖에 없다. 마공을 연성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곳의 여식에게 검마가 반했다는 것이 예사롭지 않게 들렸다.

어쩌면 그 마공을 빼앗아 익히기 위해 검마가 절강고가의 여식에게 접근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생각이 그에 이르자 독귀는 두 손자, 손녀를 놔두고 곧바로 군사를 호출했다.

군사전으로 돌아가던 길에 긴급 호출을 받은 제갈천은 한달음에 달려왔다.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대단히 화급한 일이 터졌을 공산이 높다고 판단한 까닭이었다.

그렇게 헐레벌떡 달려 들어온 제갈천에게 독귀가 손자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빠르게 나열했다.

“그 말씀은 지금 절강고가 인근에 검마가 있을 수 있다는 소리로군요.”

“어쩌면 안에 들어 있을 수도 있지.”

“검마와 모종의 합의를 맺었다면 무사들로 하여금 주변을 가로막을 이유가 없습니다.”

“하면……?”

“검마와 한배를 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로 막을 쳐 놓아야 할 정도로 중요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죠.”

제갈천의 의미심장한 말에 독괴가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하면 역시……?”

“예. 아무래도 짐작하시는 위험 상황이 벌어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럼 어찌할 생각인가?”

“일단 대응은 달라질 것이 없어 보입니다.”

“정의검대로는 검마의 일검조차 감당하지 못해. 알잖은가?”

“그렇긴 합니다만, 우리가 쓸 수 있는 패는 그뿐입니다.”

“다른 곳을 움직이지.”

“아시겠지만, 그러려면 장로 회의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조심스러운 제갈천의 답에 독괴가 물었다.

“장로 회의에 이 사안을 상정하면 통과될 가능성은 어느 정도라 보는가?”

“반반입니다만… 부결될 가능성이 조금은 더 높지 않나 싶습니다.”

“이유는?”

“현재 정천맹을 유지하는 대부분의 문파들이 백도 사십 중문에 소속된 이들입니다. 그들을 대표해서 나온 장로들이니 비슷한 결정을 하겠지요.”

“하면, 자네는 올리지 말자는 말이로군.”

“허가가 나와도 한참 때가 지나서 나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제갈천의 말에 곰곰이 생각하던 독괴의 결정이 내려졌다.

“자네의 말대로 하지. 다만 정의검대의 뒤로 다른 전투 집단도 보내볼 수 있도록 만들어 보게.”

“어찌……?”

“우선 장로 회의를 소집해 절강고가의 문제를 논의하게. 논의에선 검마의 이야기는 함구하게. 불연대가 완성되기 이전인 만큼 검마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모든 사안은 불연대의 완성 이후로 미루어질 테니까 말이네.”

“그 말씀은 절강고가의 문제를 부각시켜 다른 무력 집단의 출발을 강구해보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러하네. 내 짐작이 맞는다면 검마는 절강고가 안에 있을 확률이 높아. 그렇게 되면 정의검대는 죽은 목숨일세. 그들을 살리려면 그에 걸맞은 강력한 전투 부대의 투입이 관건이라 그 말일세.”

“하오면……?”

“혈미공. 의심이 아니라 확신으로 이야기해야 하겠지.”

“하, 하나, 그리했다 만에 하나 잘못되는 날엔 어찌하려 하십니까?”

크게 당황하는 제갈천에게 독괴가 답했다.

“그건 내가 책임을 지지. 최악의 경우엔 내가 맹주좌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대충 수습이 되지 않겠나?”

“맹주님…….”

“자- 다른 방법이 없으니 서둘러보게.”

독괴의 독촉에 잠시 말이 없던 제갈천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남궁세가에 대비책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

“알아듣게 이야기해보게.”

“실은 최근에 남궁세가주와 최악의 상황에 대해 토론해본 적이 있었습니다.”

“최악의 상황?”

독괴의 물음에 제갈천이 죄스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여의검존과 함께 투입된 불연대가 격파되면…….”

그들이 깨어지면 함께 파견된 다른 이들이라고 무사할 리 없다. 그러니까 제갈천은 정천맹이 중심이 된 백도가 검마에게 패배하는 상황을 말하고 있었다.

“자, 자네…….”

“마, 만에 하나입니다. 그런 상황이 오면 안 되겠지만… 아니, 오지 않겠지만 책사의 임무를 맡은 이상 대비는 해야 했습니다. 이해하여 주십시오, 맹주님.”

간곡한 제갈천의 말에 독괴는 비난의 말을 삼켰다.

“좋네. 우선 그 대비책을 들어보지.”

“감사합니다. 이건 최악의 경우 백도의 명맥이라도 이어보자는, 정말 충정에서 시작된 계획임을 믿어주셔야 합니다.”

얼마나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지 사설이 긴 제갈천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독괴가 재촉했다.

“알았으니 설명이나 해보게.”

“예. 하면… 우리가 주목한 것은 과거 검마에 의해 일어났던 남궁세가의 혈사가 중간에 중단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중간에 중단이 되었었나?”

“예. 남궁세가주의 말에 의하면 검마는 남궁세가로 출가한 조카 손녀의 만류로 손을 멈추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은 밀영들의 보고로도 확인이 되었습니다.”

“한데 지금 그 말을 꺼내는 이유가 뭔가?”

독괴의 물음에 제갈천이 그의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주목한 것은 바로 그녀입니다.”

“그녀라니?”

“검마의 검을 멈추게 만든 사람 말입니다.”

“남궁세가로 출가했다는 검마의 조카 손녀 말인가?”

“예. 그녀를 제대로만 이용한다면 최악의 상황에서 백도의 명맥은 이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녀를 방패로 쓴다는 말인가?”

“표현은 좀 그렇습니다만… 틀린 말은 아닙니다.”

제갈천의 답에 독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무인이 타인을 방패막이로 써 자신의 목숨을 이어간다는 것도 치욕스러운데, 더군다나 그 타인이 여인이란다. 한마디로 여인의 치마폭 뒤로 숨어 명을 연장하라는 이야기이니 치욕도 그런 치욕이 없었다.

“설마 그렇게 살아남을 곳이 있다고 보는 겐가?”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내야 하겠지요. 그리고 우리가 살아남자는 것이 아니라 백도의 명맥을 이어갈 동량들을 구해보자는 것입니다.”

“백도의 동량들이라…….”

“그렇습니다. 백도의 명맥을 이을 각파의 어린 후계자들 말입니다.”

그렇다면 응해올 이들이 많아질 것이다. 자신들이 아니라 어린 후계자들이라면 내일을 도모하는 방편도 될 테니까 말이다.

“한데, 그 이야기를 지금 꺼내는 이유는 뭔가?”

“그 방패를 지금 쓰자는 말입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얼른 이해하지 못하는 독괴에게 제갈천이 설명을 이었다.

“정의검대를 위험으로 보내고 거짓으로 장로 회의를 속이는 대신, 그녀를 이용해 검마의 손발을 묶자는 것입니다.”

“그가 과연 의도대로 움직이겠나?”

“지난 일들을 돌아보면 검마는 가족을 대단히 중요시합니다. 자신의 눈앞에서 조카의 안위가 위협을 당한다면 그는 분명히 응해올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중요하게 생각해도 그렇지, 자신의 목숨을 버릴 정도는 아닐 텐데. 그는 흉악함을 근본으로 삼는 마도인이지, 지킬 것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릴 수 있는 백도인이 아니란 말일세.”

“알고 있습니다. 하여 저도 과한 요구를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린 그저 그가 절강고가에서 물러나기만을 바라자는 것이지요.”

제갈천의 말에 독괴가 중얼거렸다.

“절강고가에서 물러나라……?”

“예. 그렇게만 되면 절강고가의 문제는 순식간에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야 그렇겠지만… 과연 물러날까?”

“필요하면 혈미공은 가져가도 좋다고 한다면 검마가 망설일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

“흐음… 혈미공의 반출을 동의한다라…….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군.”

“하지만 자칫 혈미공에 미련을 두게 되면 검마의 선택이 그쪽으로 기울 수도 있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독괴에게 제갈천이 쐐기를 박았다.

“팔대 금마공에 비견될 마공들을 수두룩이 알고 있는 것이 바로 검마입니다. 하나 정도 더 늘었다고 문제가 되겠습니까?”

문제가 커질 것이다. 혈미공은 공격력이 무서운 게 아니라 사람의 얼굴을 복제해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문제 삼아 버티면 제갈천의 말대로 검마는 폭발할 수도 있었다. 만에 하나 그렇게 되면 남는 것은 정의검대를 비롯한 협박자들의 죽음뿐이다.

결국 독괴가 물러났다.

“실행은 가능한 건가?”

“남궁세가에 연통을 넣으면 곧바로 이곳으로 보내올 것입니다.”

제갈천의 답에 잠시 갈등을 하던 독괴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실행하게.”

“옳으신 선택을 하신 겁니다. 중요한 건 우리 백도 무인들의 목숨이니까요.”

제갈천의 말에 독괴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런 독괴를 둔 제갈천은 그의 마음이 변할까 두려운지 서둘러 물러나갔다.

홀로 남은 독괴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아~ 이 죄를 어찌…….”

손자와 손녀들이 기다리는 방으로 돌아가는 독괴의 어깨엔 이전과 달리 자부심이 사라져 있었다.

* * *

제갈천의 전갈을 받은 남궁세가는 재빨리 움직였다.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남궁태를 가주의 명으로 가두는 극악 처방을 써가며 아랑을 마차에 태워 정천맹이 위치한 낙양으로 보냈다.

그 마차를 호위해 나선 것은 가주전의 창궁검대였다. 남궁세가 무력 집단 중에선 두 번째에 꼽히며, 주 임무를 가주의 호위에 두고 있던 창궁검대가 나서야 할 정도로 아랑의 이송에 남궁세가는 최선을 다했다.

창궁검대주 남궁필은 묵묵히 수하들과 함께 앞서 나가고 있었다.

“대주, 저년을 호송하는데 우리까지 나서야 하는 겁니까?”

얼굴에 불만이 가득한 한 대원의 말에 남궁필이 엄한 음성을 토했다.

“말을 삼가하도록. 이 호송에 많은 이들의 목숨이 달렸으니…….”

“그것도 그렇습니다. 계집의 치마폭에 숨어 목숨을 연명하다니요. 어떤 놈 머리에서 나온 건지 이해가 안 갑니다.”

“어허, 세가의 윗분들이 함께 결정한 일이다. 잘못하면 그분들을 싸잡아 욕하는 것이 되니 말을 가려 하라.”

남궁필의 주의에 찔끔한 대원이 한발 물러나자 근처에 있던 조장급 대원 하나가 끼어들었다.

“그건 구진의 말이 맞는 게 아닙니까? 차라리 죽었으면 죽었지, 무인의 생명을 계집의 치마폭에 맡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자네까지 왜 이래?”

남궁필의 힐난에도 불구하고 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사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더구나 저년을 앞에 들이민다고 검마가 검을 내려놓으리라곤 생각지 않습니다. 마도인이 겨우 조카 손녀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포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 말입니다.”

“그건…….”

솔직히 남궁필도 가능성이 많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로서는 수뇌부의 계획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탓에 수하들만큼이나 이번 결정에 불만이 많았다. 다만 자신의 임무가 있으니 드러내놓지 못할 뿐이었다.

“대주님도 그리 생각하시는 거 아닙니까?”

“생각과 말이 같아야 한다지만,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아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러한 때이고. 우린 임무만 수행하면 된다. 나머지 생각은 임무를 완수한 연후에, 그때 해도 늦지 않다. 내 말 알아들었나?”

남궁필의 말에 불만을 토로했던 이들은 물론이고 다른 대원들까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말씀하신다면… 예, 알겠습니다.”

수하들의 답에 남궁필은 어두운 표정으로 말을 몰았다.

그로서도 이해가 가지 않는 명령이었다. 여인의 치마폭에 숨어 목숨을 구걸하는 일을 만들다니……. 더구나 그 여인의 호송을 위해 자신들을 동원하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처사였다.

차라리 이런 일을 하느니 검마와 붙어 시원하게 검이라도 휘두르다 죽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마저 드는 남궁필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호송이니 마차 안에 타고 있는 여인을 살갑게 대할 리가 없었다.

음식을 건네는 이조차 작은 창문으로 음식만 넣을 뿐 안을 살피는 일도 없었다.

그렇게 이동하길 십여 일. 고속 이동한 끝에 정천맹에 닿은 마차는 곧바로 내원으로 옮겨져 독귀와 제갈천이 배석한 상태에서 문이 열렸다.

“이, 이게 무슨!”

당황하는 제갈천과 눈살을 찌푸리는 독괴의 앞으로 이미 숨이 끊어진 아랑의 시신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