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0장. 망각(忘却)-썩어버린 도끼
가주전에서 물러나온 고일천은 자신의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고덕을 만났다.
“어쩐 일로 혼자십니까?”
복잡한 심사 때문인지 건네는 말이 곱게 나오지 않았다. 자신도 그걸 느꼈는지 고일천은 곧바로 뒷말을 이었다.
“혼자 돌아다니시기에 드리는 말입니다.”
하지만 기껏 한다는 말이 세가 내부를 돌아다니는 것이 못마땅하다는 표현처럼 되어버렸다. 그 탓에 고덕의 답에 신경을 써야 했지만, 다행히 주먹이 날아오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별다른 뜻은 없네. 다만 영존께 상의할 일이 있어서 가는 길일세.”
“무슨……?”
“이현 소저와 잠시 저자로 나갔다 올 생각일세.”
미쳤냐는 물음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다행히 입 밖으로 빠져나가진 않았다.
“그, 그렇습니까?”
“그래. 너무 오랫동안 세가를 벗어나지 않았더니 갑갑해서 말이야.”
“호, 혹시 현이도 아는 일입니까?”
“아니, 아직 모르고 있네. 놀라게 해줄 생각이거든.”
놀라긴 할 것이다. 당황하여 기겁할 만큼…….
“그래도 함께 나가실 생각이시라면 먼저 현이와 상의해보시는 게…….”
“동생이라고 챙기는 모양이군.”
새카맣게 타들어가는 자신의 속내는 모르고 빙긋이 웃으며 말하는 고덕의 면상을 한 대 갈겨 주고 싶은 것을 고일천은 꾹 눌러 참아야만 했다.
“세상에 형제라곤 둘뿐이니까요.”
“보기 좋은 모습이야.”
“하면… 먼저 상의를 하시는 겁니까?”
“아니, 이번 일은 생각대로 할 걸세. 가끔 놀라게 해주는 것도 필요해서 말이야. 그럼 이만…….”
틀린 말은 아니지만 방향은 잘못 잡았다.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었던 고일천의 표정은 검게 죽어버렸다.
“자네, 무슨 걱정 있나?”
고덕의 물음에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지만 화를 낼 수도 없는 상대. 결국 핑계를 만들어내야 했다.
“그, 그게… 친우와의 신의 문제로…….”
당황한 탓에 튀어나온 말이 모용휘와의 일이다. 아마도 머릿속에 가득했던 일이라 무의식중에 튀어나온 모양이었다. 한데, 그 말을 당황스럽게도 고덕이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신의라……. 상대가 친우라고?”
“예.”
“그럼 답은 나왔군.”
“예? 무슨 말씀이신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한 고일천의 물음에 고덕은 별것 아니라는 듯이 답했다.
“상대가 진짜 친우라면 의문은 필요치 않지. 친우는 내가 믿는 사람이지, 날 믿게 해줘야 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머릿속에서 천둥이 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 그런가요……?”
“당연하지. 친우라면 그 정도는 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 하지만 현실은…….”
“현실 타령은 하지 마. 친우가 현실과 무슨 상관이야. 그런 걸 따질 사이라면 그건 친우가 아니라 그냥 아는 사람 중에 조금 가까운 사람인 거지.”
“현실을 따지면 친우가 아니다……?”
“당연하지. 아직도 그걸 몰랐단 말이야?”
오히려 자신에게 되묻는 고덕의 맑은 눈을 바라보며 고일천은 자신이 도대체 무슨 걱정을 했던 것인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깊은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정중히 포권을 취하는 고일천에게 고덕은 고개를 저어 보였다.
“뭐, 다 아는 이야기를 가지고 가르침은 무슨……. 여하간 잘 해결 보게. 하면 난 이만…….”
몸을 돌려 가던 길을 재촉하는 고덕의 뒷모습이 외원과 내원을 가르는 월동문 안으로 사라지자, 고일천도 자신의 숙소로 향했다.
* * *
고일천이 돌아간 뒤에도 상황에 따른 대비책을 세우느라 이찬, 양승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있던 고유장은 이 모든 일의 원흉인 사람의 방문을 받았다.
“외, 외유 말씀이십니까?”
“예. 멀리 갈 생각은 없고 복건을 다녀올까 합니다.”
절강고가가 위치한 구룡산이 절강과 복건의 경계와 그다지 멀지 않다지만, 지금은 복건은 고사하고 집 밖으로 나간다는 것만으로도 기함할 상황이었다.
“그러지 마시고 세가 안에서 지내시는 것이…….”
“너무 오랜 시간 머물러서인지 답답하기도 해서 말입니다.”
고덕의 답에 고유장의 표정이 난감해졌다. 이건 내보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말릴 수도 없으니 진퇴양난이었기 때문이다.
“복건엔 어쩐 일로……?”
딱히 궁금해서 던진 물음은 아니었다. 그저 그 이유 속에서 반대할 명분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물었을 뿐…….
“형님을 찾아뵐까 합니다.”
“형님이라면……?”
“제 친형님이 복건에 살고 계십니다.”
다시 말해…
“제 여식을 가족분들에게 인사를 시키실 생각이십니까?”
“인사라기보단 그저 소개를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녀를 닮았다고 걱정은 하겠지만 고이현의 밝은 모습을 대하면 형과 형수는 꽤나 좋아할 것이다. 그래서 소개해주고 싶었다.
“흠…….”
고유장의 입에서 절로 침음이 흘렀다.
이유가 그렇다면 반대만 할 수도 없다. 무언가 결정을 내리기 전에 행해지는 사전 정지 작업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결국 고유장이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저도 인사를 드리면…….”
“그럼 함께 가시렵니까?”
생각보다 동의는 쉽게 나왔지만 고유장 자신이 원하는 답은 아니었다. 그 탓에 다시금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야만 했다.
“형님을 이곳으로 모시면 어떠실지……?”
이미 강호 세가의 행태에 마음이 상할 대로 상한 형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다시 절강고가로 와 달라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어려울 듯합니다.”
단박에 거절하는 고덕의 모습에 고유장은 아쉬운 표정으로 물었다.
“하면 복건으로…….”
“예, 그리하고자 합니다.”
“흠…….”
고유장의 침음이 깊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가주가 안되었던지 조용히 지켜만 보던 이찬이 끼어들었다.
“대협, 소인이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누구……?”
벌써 세 번째 만남인데 또 저런다. 두 번째야 그럴 수도 있겠거니 했지만, 세 번째도 동일한 반응이니 무신경도 이만하면 국보급이다.
“저번에도 말씀드렸었는데… 이찬이라 합니다. 총관을 맡고 있습지요.”
“아! 그렇군. 내 기억력이 별로 없네.”
솔직히 저 말투도 기분 나쁘다. 본 나이야 한참을 더 먹었다지만 겉모습은 이제 약관을 막 지난 청년의 것이니, 마치 그 나이 또래의 청년에게 하대를 듣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더구나 기억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도 없다.
“그러실 수도 있지요.”
희미하게 웃어 보이는 이찬에게 고덕이 물었다.
“한데 할 말이 있다고?”
“예, 그것이… 솔직히 말씀드려 지금 세가는 비상 상황입니다.”
이찬이 정면 돌파를 시도하자 고유장과 양승의 얼굴에 걱정스러움이 떠올랐다. 하지만 굳이 말리진 않는다. 그들로서도 정면 돌파 외에는 방법이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비상 상황? 혹 무슨 일이라도 있나?”
그 비상 상황을 만들어준 인사의 반응으로는 참으로 어이없는 것이었지만, 이찬은 그런 티를 낼 수 없었다.
“실은… 대협에 관계된 일입니다.”
“내가 관계된 일이라……. 혹, 정천맹에서 문제를 삼던가?”
“솔직히 말씀드리면 정천맹은 아직 대협이 이곳에 계시는 줄도 모릅니다.”
“내가 이곳에 있는 것도 모른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통타를 당했어도 정천맹은 정천맹이다. 그들의 정보 능력상 지금쯤이면 자신이 이곳에 있는 것을 알고 있어야 했다.
“예. 저희가 정보를 통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보를 통제한다면… 내가 이곳에 방문한 것을 숨기고 있다는 뜻인가?”
“송구하나 그렇습니다.”
이찬의 답에 고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기분이 상했다는 증거였지만 불행히도 이찬을 비롯한 누구도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렇게 숨기고 있었다면서 뭐가 문제라는 거지?”
은연중에 말투가 싸늘해졌지만 이찬은 미처 느끼지 못했는지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 상황에서 외유는…….”
“정보가 새어나갈 테니 꼼짝 말고 처박혀 있어라, 뭐 그런 말인가?”
“송구합니다.”
고개를 숙이는 이찬을 노려보던 고덕의 시선이 연신 헛기침만 해대는 고유장에게 돌려졌다.
“같은 생각이신 겁니까?”
“험, 험. 그것이…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만 사실 세가는 그간 수많은 압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모두 대협을 도모하기 위해 협조하란 것이었지요.”
“압박을 받고 있었다는 말은 협조를 하지 않았었다는 뜻이로군요.”
“그들의 말에 따르기엔 미진한 점이 적지 않아서…….”
나름 사실 파악에 중점을 둔 행보다. 명분에 쉽게 휘둘리는 것이 백도 문파임을 감안한다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고마운 일이군요.”
“대협을 감싼 것이 아니라 사실에 근거한 판단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고맙다는 것입니다.”
거듭된 인사에 고유장은 그저 황망한 표정일 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고덕이 물었다.
“그 상황에서 제가 이곳에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아직 모르는 상황에서도 최후통첩이 와 있습니다. 한데 알게 된다면… 솔직히 감당할 자신이 없습니다.”
“하면, 차라리 밝히시는 것이……?”
고덕의 물음에 고유장이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솔직히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만… 문제는 대협과 현이의 결정입니다. 두 사람이 각자의 길을 걷기로 결정을 내린다면…….”
소문을 낸 절강고가의 입장만 우스워질 것이다. 참기 어려운 온갖 추문을 감수해야 하며, 심하면 백도에서 축출될 수도 있었다.
고덕 자신 같아도 그런 위험을 감수할 것 같진 않았다.
“결국 결정부터 내려야 한다는 말이군요.”
“세가의 입장을 이해해달라는 말씀뿐이 드릴 말이 없습니다.”
고유장의 말에 고덕은 잠시 망설이다 답을 이었다.
“이현 소저의 답은 모르겠으나 내 답은 내일까지 드리지요.”
“고맙습니다, 대협.”
매우 기뻐하는 고유장의 모습에 고덕은 씁쓸한 미소를 보이며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 * *
고덕이 가주전에서 물러나던 시기, 고일천은 자신의 숙소에서 모용휘와 마주 앉아 있었다.
“도대체 무슨 말이기에 그런 표정이야?”
모용휘의 물음에 고일천이 당황했다.
“내, 내 표정이 왜?”
“마치 전쟁에 나가는 사람의 표정 같잖아. 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걱정 어린 모용휘의 물음에 마음을 다잡은 고일천이 답을 이었다.
“조금. 근데 휘.”
“왜?”
“난 네가 내 친우라 믿어. 그래서 가감 없이 묻는다.”
“도대체 무슨 말인데 그리 거창한 거야?”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용휘의 물음에 고일천이 말했다.
“여의검존께서 생환하셨다고 들었다.”
“누구? 여의검존이면… 백조부님?”
“그래, 축하한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을… 그분이 돌아가신 지가 언제인데……. 도대체 그런 유언비어는 어디서 들은 거냐?”
“믿을 만한 정보통이 준 소식이다. 지금 여의검존께선 정천맹에 머물고 계시다.”
시종일관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고일천의 모습에 점점 얼굴이 굳어진 모용휘가 물었다.
“정… 말이냐?”
“네게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나는…….”
“그 말은… 설마 내가 널 속이고 있다는 말이냐?”
“아니, 그렇지 않아. 그런 생각이었다면 이렇게 말을 꺼내지도 않았겠지.”
“그러면……?”
“그 정도의 소식을 네가 모른다면 혹시 모용세가에도 이 소식이 전해지지 않은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고일천의 말에 모용휘의 고개가 저어졌다.
“그 정보가 사실이라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야. 백조부님의 생환이면 세가엔 기적 같은 일이다. 알잖아. 무림 세가에 절대 고수의 존재가 어떤 것인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절강고가도 절대 고수의 부재로 인해 뼈저리게 느끼는 것이 하나둘이 아니었으니까.
“하면 네 생각은?”
“너… 정말로 내가 고의적으로 숨기고 있었다는 생각은 않는 거냐?”
“알았다면 내게 숨겼겠냐?”
“그것이 아버님의, 가주의 명이었다면……?”
“그래서 검마의 이름을 알아낸 네가 내게 먼저 달려왔고?”
고일천의 말에 모용휘는 피식 웃어버렸다.
“나쁘지 않다, 이 기분.”
“지금 상황은 기분이나 따질 때가 아니야.”
“그렇긴 하지. 무슨 이유에서건 소가주인 내게 함구할 정도라면 내 지위도 공고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가 될 테니까…….”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고일천의 물음에 잠시 머뭇거리던 모용휘가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실은 얼마 전부터 정추에게 도전을 받고 있었다.”
“동생에게 무슨 도전?”
“뭐긴, 비무지.”
“비무… 그까짓 것 해주면 되잖아?”
형제끼리의 비무는 여느 무림 세가라면 비일비재한 것이 일반적이다.
형제끼리의 비무는 형이 동생을 이끄는 동시에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동생의 모습을 보며 형도 자신을 채찍질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그게… 소가주의 지위를 걸란다.”
황당한 소리다. 소가주를 비무로 정하다니, 무슨 비무 대회도 아니고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세가의 정통성을 훼손하는 행동이라며 가주에게 치도곤을 당할 일이었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정추 그 녀석, 여전히 후처 소생이란 태를 벗지 못한 거냐?”
“후후… 벗지 못한 게 아니라 안 벗는 거 같다.”
“안 벗는다면… 설마 그 녀석이 정말로……?”
“네가 생각하는 것이 맞을 거다.”
“미친! 그런 녀석을 그냥 두었단 말이야? 왜 그랬어. 아버님께 고해 정신을 차리게 만들었어야지.”
고일천의 말에 모용휘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어렸다.
“그게… 아버님도 아신다.”
“아셔? 그럼 그 녀석, 혼이 나고서도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는 거냐?”
“혼이라……. 아버님은 그 일로 정추를 혼낼 생각은 없어 보이셨다.”
모용휘의 말대로 그 일에 대해 모용세가의 가주인 모용황은 줄곧 방관자의 입장을 고수했다.
생각해보건대 모용세가 특유의 가풍과 어울리지 않는 자신의 성품을 부친은 항상 탐탁지 않게 생각했었다.
어쩌면… 어쩌면, 이번 일은 그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설마… 이번 일, 너만 제외된 것일 수도 있는 거냐?”
“나만은 아니겠지. 내가 이렇게 까맣게 모를 정도라면 날 지지하는 장로들까지도 알지 못할 수 있다.”
그 말은 소가주의 지위가 크게 위협받는 상황이란 뜻이다. 그것도 부친의 묵인 내지는 협조하에…….
“휘…….”
고일천의 음성이 한층 무거워졌다.
“일단 네 집의 전서구를 좀 써야겠다.”
모용휘의 청에 고일천이 물었다.
“어디로 보낼 생각인데?”
“정천맹으로.”
“그곳엔 왜?”
“정천맹의 장로로 나가 계신 분이 경 숙부다.”
모용경은 휘를 끔찍이도 아끼는 사람 중 한 명이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병으로 잃은 휘를 가장 많이 보살펴 준 것이 바로 그였던 것이다.
“숙부께 여쭤볼 생각이냐?”
“그래. 경 숙부라면 내 물음에 답을 피하진 않을 거다.”
“하지만 가주의 명이 있었다면……? 숙부도 가주의 명을 피하지는 못해. 알잖아?”
모용경은 가주인 모용황과 형제다. 그것도 한 피를 나눈. 두 사람의 교감이 모용휘와의 관계보다 가볍다고 볼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의 정면 돌파라면 자칫 정보만 새고 소득은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상황에 몰릴 수도 있었다.
“그래도 내겐 믿을 수 있는 분들 중 한 분이야. 그분이 날 배신했다면… 그만큼 내가 모자란 것이겠지.”
“휘…….”
모용휘를 부르는 고일천의 음성엔 어려움에 처한 친우를 걱정하는 마음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런 고일천의 모습에 피식 웃어 보인 모용휘가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이 몸은 모용휘야. 난 절대로 쉽게 죽지 않는다. 너도 알잖아?”
“그래, 알지.”
솔직히 그래서 더 걱정이 들었다. 세가를 위해서, 또는 어머니가 다르다고는 해도 철없는 동생을 위해서 자신의 것을 충분히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그런 친우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전서구로 보낼 서찰을 쓰며 환하게 웃어 보이는 모용휘였다.
* * *
그날 밤, 절강고가의 내원에서 날아오른 전서구는 담장을 벗어나지도 못했다.
“어떤 놈이 전서를 보냈나 볼까?”
한 전각의 지붕 위에서 허공섭물로 끌어당겨 잡은 비둘기의 발에서 서찰을 풀어낸 고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니 숙부가 도와달라? 뭐야, 겨우 애들 소꿉장난인 거야? 가만… 그런데 여의검존이면…….”
기억을 더듬었지만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이런 경우는 두 가지뿐이다. 기억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는 놈이었든지, 아니면 만나서 서로 칼을 맞대 보지 않았든지……. 이번엔 아무래도 후자 같았다.
“이러면 곤란한데…….”
제대로 정보를 확보하지 못한 이가 상대로 나서는 것만큼 답답한 일은 없다. 작게는 기분이 나쁘고, 크게는 손해 보는 느낌 때문이다. 놈은 당연히 자신의 정보를 알고 있을 테니까…….
물론 그놈의 도전에 패한다거나 그 탓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는다. 막으면 부수고, 기분이 정히 내키지 않거든 안 보면 그만이니까 말이다.
결국 그날 모용휘가 정천맹에 머물고 있는 모용경에게 보낸 전서는 전달되지 않았다. 전서를 싣고 날아가야 할 비둘기가 고덕의 배 속으로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사실도 모르고 모용휘는 답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 시각, 모용휘가 답을 애타게 기다리던 이는 정천맹의 숙소에서 약관의 청년을 만나고 있었다.
“네가 어쩐 일이더냐?”
“아버님의 심부름을 왔습니다.”
모용정추의 답에 모용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제 너도 강호행을 할 때가 되긴 했지. 그래, 형님의 심부름으로 왔다고?”
“예. 여기… 아버님이 숙부께 보내신 밀지입니다.”
“밀지……?”
“예.”
모용정추의 답에 서둘러 서찰을 펼쳐 본 모용경의 표정은 시시각각으로 변해갔다.
“흠… 정추 너도 형님과 같은 생각인 거냐?”
“예, 같습니다.”
단 한순간의 머뭇거림도 없는 모용정추의 답에 모용경은 짧은 신음을 흘렸다.
“형제를 베는 일이다. 어찌 그리 주저함이 없는 게냐?”
“결정이 서지 않았으면 모르되, 이미 결정이 선 일을 가지고 주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숙부님.”
“허허, 마치 네 나이 때의 형님과 같은 소리를 하는구나.”
“아버님도 이런 소리를 하셨었단 말입니까?”
“그래. 아주 오래된 옛날이야기였지만…….”
추억에 잠기려는 모용경을 이어지는 모용정추의 말이 가로막았다.
“옛이야기는 중요치 않지요. 문제는 숙부께서 절 도와주실 것인지에 대한 여부입니다. 물론 도와만 주신다면 그 공은 잊지 않겠습니다.”
행동이 마치 자신을 따르지 않으면 그나 가족에게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듯한 노골적인 위협이었다.
더러운 것은 그 위협을 이겨 낼 방법이 모용경에겐 없다는 것이었다.
“널… 돕겠다.”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숙부.”
착잡한 표정의 모용경과 하얗게 웃는 모용정추의 얼굴 위로 창가로 든 달빛이 파랗게 부서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