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9장. 유희(遊戱)-신선놀음
최근 들어 절강성의 서남부에 위치한 구룡산은 긴장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정도가 어찌나 심한지 절강고가가 구룡산에 자리를 잡은 이래로 가장 농도 짙은 긴장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물론 그 긴장은 구룡산을 근거지로 삼은 절강고가가 유발한 것이다.
그렇다고 절강고가가 누군가에게 공격을 받았다거나 도발을 당한 것은 아니다. 또한 누군가를 공격하기 위한 준비 때문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구룡산은 긴장에 휩싸였다. 구룡산 도처에 절강고가의 무사들이 배치되어 사람들의 접근을 차단했고, 뛰어난 고수들이 순찰을 돌았다.
그 철통같은 경계망 안에 자리한 절강고가는 오늘도 긴장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점점 정체불명의 인원들이 접근하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총관인 이찬의 보고에 고유장은 심각한 표정이었다.
“역시 정천맹과 협의회인가?”
“대부분은 본가의 경계조에게 발각되면 자진 철수하기 때문에 출신까지는 알아보지 못했습니다만…….”
“하긴 확인할 필요도 없겠지.”
“요샌 괜한 조처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조심스러운 이찬의 말에 고유장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벌써 소문이 났을 걸세.”
“그렇긴 하겠습니다만… 문제는 이후입니다.”
“더 심해지겠지?”
“어쩌면 정식 문의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땐…….”
“숨길 수 없겠지.”
가라앉은 고유장의 답에 이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때도 숨겼다가 후일 사실이 밝혀지면 우린 꼼짝달싹 못하고 한통속으로 몰릴 겁니다.”
“후~ 답답하군.”
고유장의 한숨에 이찬이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이대로 두고 보실 생각이십니까?”
“그럼 총관이 돌아가라고 해볼 텐가?”
고유장의 말에 이찬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제, 제가 어찌…….”
“그럼 내 말은 들을 거라고 생각하나?”
“그래도 무시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무시야 하지 않겠지. 하지만 거절하며 버틴다면?”
“방법이… 없군요.”
“맞네. 방법도 없는 일을 벌이고 감정까지 상하면 좋을 게 없겠지.”
긴장, 답답, 당황, 복잡, 자괴……. 수도 없는 감정이 뒤죽박죽 섞여 탄식만 해대는 두 사람의 귀로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열려 있던 창문으로 시선을 주니, 짐작대로 환하게 웃는 고이현과 고덕이 전각 앞을 지나고 있었다.
그 둘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찬이 말했다.
“여전히 사이는 좋… 아 보이는군요.”
“그렇지. 불행하게도…….”
“아직 결정은 못 내리신 겁니까?”
여전히 멀어져 가는 고이현과 고덕의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던 고유장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 역시 불행하게도…….”
답답함이 사무쳐 포기에 가까워졌던지 이찬의 표정에 갑자기 독한 빛이 올라왔다.
“차라리 맺어주면 안 됩니까?”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었던지 고유장의 시선이 이찬에게 돌려졌다.
“저 둘을 말인가?”
“예. 이렇게 하루하루 피를 말리느니 차라리 결정을 보고 입장을 확실히 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이판사판이라는 마음이 드러난 까닭인지 소매마저 걷어붙이며 열변을 토하는 이찬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고유장이 말했다.
“그게… 아직은 아니라고 하더군.”
“예?”
가주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한 이찬의 반문에 고유장이 다시 말했다.
“아직 마음의 결정을 못 내렸다고 하더란 말일세.”
“누구… 검마가 말입니까?”
자신의 물음에 가주가 답이 없자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였던지 이찬이 열을 올렸다.
“아니, 그런데 왜 붙어다닌 답니까? 전 제 집사람과 만난 지 칠 일 만에 혼례를 올렸습니다. 한데 그는 벌써 한 달째가 아닙니까? 그 시간이면 결혼해서 애를 만들고도 남았을 시일이라 그 말입니다. 한데 아직도 결정을 못해요? 우리 아가씨가 어디가 어때서요? 사람들에게서 구룡모란이란 별칭으로 불릴 정도로 아름다우신 게 우리 아가씨입니다. 그뿐입니까? 절강이화의 한 명으로 꼽힙니다. 한마디로 절강성에서 최고로 아름다운 두 명 중 하나라 이겁니다. 사내라면 한번 보기라도 소원하는 게 우리 아가씨인데 어디서… 자기가 검마면 검마지, 무슨… 이건, 이건… 그렇지. 항의, 항의해야 합니다. 가주님.”
한참 열을 올리는 이찬을 바라보던 고유장이 미안한 음성을 토했다.
“그게… 현이도 같은 생각이라네.”
“예? 아, 아가씨도요?”
“그렇다더군. 가문에 큰 영향을 주는 일이 될 테니 조금은 더 두고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틀린 말은 아니다. 문제는 그렇게 기다리는 시간 동안 가문의 사람들이 모두 피 말라 죽을 것 같다는 것이었지만…….
“마, 맞는 말씀이지요. 하, 하면 어, 얼마나 더……?”
“낸들 알겠는가? 답을 줄 때까지 기다릴밖에…….”
가주의 답에 이찬의 고개가 맥없이 푹 수그러졌다.
“알겠습니다. 하오면 소인은 이만…….”
“알았네. 가서 일 보게.”
가주의 허락에 가주전을 물러나온 이찬을 향해 밖에서 기다리던 장로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그들의 절박한 시선에도 불구하고 이찬은 고개를 저어야만 했다.
그 모습에 기다리던 장로들 중 한 명의 입에서 고함이 터졌다.
“아니, 왜?”
답답한 김에 버럭 소리를 지르고 나니 자신이 서 있는 곳이 가주전의 문 앞이라는 것을 상기한 장로가 황급히 입을 막았다.
사람들의 불안한 시선이 가주전을 향했지만, 안에선 아무런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제야 소리를 질렀던 장로에게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고, 다른 이들은 힐난의 눈빛을 보냈다.
“이, 일부러 그런 거 아니오.”
변명을 하는 장로에게서 시선을 돌린 장로들이 이찬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안에 들리지 않을 작은 음성으로 이야기를 나누자면 어쩔 수 없었던 탓이다.
“그래, 가주께선 왜 계속 그냥 두신다던가?”
수석 장로인 양승의 물음에 이찬이 답했다.
“아직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했답니다.”
“누가? 가주께서?”
“아니요.”
“하면… 검마?”
“예.”
이찬의 답에 양승의 입에서 대번에 욕설이 튀어나왔다.
“이 똥물에 튀겨 죽일… 험험. 아니, 왜? 우리 아가씨가 어디가 어때서?”
“그야 저도 모르지요. 그리고…….”
“또 뭔가?”
“아가씨도 아직 결정을 하지 못했답니다.”
“아니, 아가씨는 또 왜?”
“그게… 가문에 큰 영향을 줄 결정인데 조금 더 지켜보아야 하지 않겠냐고 하셨답니다.”
답을 들은 장로들의 반응은 이찬이 가주에게서 그 소리를 들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틀린 말이 아닌데 뭐라 할 것인가 말이다.
“그야 그렇지만…….”
“하아~”
사방에서 땅이 꺼질 것 같은 장로들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더 이상 하문하실 말씀이 없으시면 저는…….”
“아! 그렇게 하게.”
양승의 답에 그와 장로들에게 포권을 취해 보인 이찬이 물러나자, 남겨진 장로들도 답답한 표정으로 천천히 흩어졌다.
* * *
제법 널찍하게 만들어진 절강고가의 가산(假山)엔 비단잉어가 뛰어노는 연못이 있고, 그 위에 고풍스러운 정자가 들어서 있었다.
그 정자 위에 올라앉은 고덕은 고이현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래서 모용 오라버니가 가슴앓이를 많이 한다고 하네요. 공자께서 호 언니하고 연결 좀 시켜 주면 안 돼요?”
고덕을 향한 호철랑의 마음을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렇다고 이제 와 사실대로 이야기해주는 것도 우습다 생각한 고덕은 그저 곤혹스런 미소로 변명을 지어낼 뿐이었다.
“사람의 마음이 누군가가 들어서서 도와준다고 되는 건 아니지. 그리고 호 소저와는 그런 일로 다리를 놓을 관계도 아니고…….”
“둘이 친한 줄 알았는데요?”
“친하긴… 하지. 하지만 그런 개인사에 관여할 정도는 아니란 말이야.”
고덕의 변명이 서툴렀는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고이현이 물었다.
“공자는 언니의 생명을 구해줬다는 사람을 알고 있는 거죠?”
“누, 누구?”
실수다. 놀라는 게 너무 티가 나버렸다.
“역시 알고 있군요.”
“몰라.”
잡아뗐지만 이미 늦은 모양이다.
“애써 숨긴다는 건 호 언니가 그 사람을 좋아한다는 걸 아는 거군요.”
“그, 그건 아니야.”
“피, 거짓말 너무 티 나요.”
고이현의 말에 입을 닫았다. 더 떠들어 봐야 긁어 부스럼을 만들까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또 문제였던 모양이다.
“이거 수상한데요? 갑자기 말을 않는다는 건 혹시…….”
꿀꺽.
저도 모르게 마른침이 넘어간다. 이런 종류의 긴장감은 정말 처음 겪는 일이라 적응이 되지 않았다.
“친해요? 많이 친해서 호 언니에게 다른 사람을 소개시켜 줄 수 없는 거죠?”
잠시지만 멈추었던 숨이 다시 쉬어졌다.
“비슷해.”
“그랬군요. 그래서 호 언니가 자꾸 공자님 눈치를 봤던 거군요.”
“그랬나……?”
알지 못했다. 당시에 자신의 눈은 온통 고이현에게 향해 있었으니까…….
“예. 호 언니가 얼마나 눈치를 봤으면 전 그때 호 언니가 좋아한다는 사람이 공자님일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을 잠시 동안 했었다니까요.”
그 말을 해놓고 까르르 웃은 탓에 고덕의 얼굴이 완전히 굳어버린 것을 고이현은 보지 못했다.
“그러면 모용 오라버니만 불쌍하게 되었네요.”
여전히 호철랑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이야기에 고덕은 입을 닫았다. 뭐라 할 말도, 할 수 있는 말도 없었기 때문이다.
호응이 없는 것이 흥미를 잃게 했는지 드디어 고이현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움직였다.
“참! 공자님은 마교 출신이라면서요?”
참으로 당돌한 아가씨였다. 천마신교의 부교주 출신 앞에서 당당히 마교라 부르다니……. 어이가 없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했던 고덕은 그저 헛웃음을 지었다.
“후후, 한때는 그랬지.”
“그런데 정말 마교엔 사람을 잡아먹는 마두들도 있어요?”
“그런 놈은 없었다. 있었다면 무사할 수 없었겠지.”
“그럼 아이들을 잡아다 피를 빼서 무공을 연성하는 사람들은요?”
“그런 형태의 수련법은 금지된 지 수백 년도 넘었다.”
“그러면 그 이전엔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뜻이네요?”
“그야…….”
뾰족이 답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아니라고 할 수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답하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음… 하여간 나쁜 사람들이 지금은 없다는 말인가요?”
조금은 실망하는 듯 보이는 고이현에게 고덕은 순순히 답했다.
“어딜 가도 나쁜 사람이 없는 곳은 없다. 다만 드러내놓고 그따위 짓을 저지르는 놈은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지.”
“그럼 숨어서 하는 사람은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이네요?”
“왠지 신나 보이는군.”
“마교 하면 원래 그런 사람들이 많아야 이야기가 되는 거 같잖아요.”
자신의 말에 쓴웃음을 지어 보이는 고덕에게 고이현이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근데 정말 사실이에요?”
“뭐가?”
“해남검문을 멸문시킬 때 사람들을 모조리 말뚝에 박아 죽였다면서요?”
자신도 들어본 적이 있는 소문이다. 뿐인가? 자신의 이름엔 그보다 더한 소문들이 가득 따라다녔다.
“그런 일을 할 정도로 열성적이지 않았다.”
“그럼 다른 일들도 아니에요?”
“뭐, 여자들은 산 채로 배를 가르고, 아이들은 목을 베어 줄을 세워놨다던가 하는 거?”
“예, 그런 거요.”
“왜 난 네가 그게 사실이었으면 하는 걸로 느껴지지?”
“멋있잖아요?”
“뭐?”
당황하는 고덕에게 고이현이 배시시 웃으며 답했다.
“그런 무지막지한 악인이 나한테만 솜사탕처럼 달콤하다면… 생각만 해도 멋있지 않아요?”
밑도 끝도 없는 철없음이 어이가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
“미안하게 됐군.”
“그럼 아니에요?”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있을까?”
“악명이 높아지잖아요.”
당연하다는 듯이 답하는 고이현을 바라보며 고덕이 물었다.
“내가 변태로 보이나?”
그 물음에 고이현은 답 대신 혀를 내밀어 보이며 웃었다.
“헤…….”
“그래도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죽이지 말아야 할 사람을 죽이기도 했고, 무고한 사람들을 베기도 했다. 그래도 괜찮나?”
“안 괜찮지요. 그런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 하니까요. 하지만… 그건 날 만나기 전에 있었던 일이잖아요.”
“그야 그렇지…….”
“그러면 됐어요. 앞으론 그러지 않으면 되니까요.”
“그거뿐인가?”
“다른 못된 버릇도 있나요?”
“글쎄…….”
솔직히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고집불통이었고, 성질은 못됐다. 거기에 잠버릇은 험했고, 코도 심하게 골았다.
하지만 왠지 그런 것들을 곧이곧대로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자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이현은 허리에 손을 얹고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내가 사람 하나 만들어 보는 거죠, 뭐.”
“풋-”
절로 삐져나오는 웃음을 막지 못했다. 그런 고덕의 웃음에 고이현은 사나운 눈길을 주었다.
“왜요? 내가 못할 거 같아요?”
“아, 아니.”
“그런데 왜 웃었어요?”
“예뻐서…….”
고덕의 답에 고이현은 언제 눈을 흘겼나 싶게 풀썩 풀어진 표정으로 배시시 웃어 보였다. 앙증맞게 들어가는 보조개와 반달처럼 휘어지는 눈매, 잔주름이 가득 잡히는 콧등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빠왔다.
아직은, 아직은 그녀가 그곳에 있었다. 아직은…….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있었다.
“정녕 저리 둘 생각이냐?”
모용휘의 물음에 고일천은 심란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다. 현이의 생각은 물론이고, 아버님의 생각까지도…….”
“몰랐을 땐 어쩔 수 없었다 해도 저자의 정체를 안 이상 이건 막아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만…….”
“그 생각은 나도 같다. 하지만 저자를 무슨 수로 거부해야 할지 모르겠다.”
“도움을 청하면 되잖아?”
“정천맹과 협의회에 말이냐?”
“그래. 그들이면 최선을 다해 도울 것이다.”
모용휘의 말에 고일천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자신들의 안위를 지키기에도 벅찬 이들이다. 목소리만 크고 의기만 앞선 이들에게 세가의 미래를 맡길 생각 따윈 없다.”
“그렇긴 하다만……. 저자와 엮여 좋은 결말을 본 곳이 없으니 걱정이다.”
“나도 그것이 걱정이다.”
“원한다면 아버님을 설득해보마.”
친우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모용세가는 백도 팔대세가이면서도 사람들로부터 자주 손가락질을 받는다. 협의보다는 이해타산을 앞세운다고 말이다.
오죽하면 당금 모용세가의 가주인 모용황의 무명이 진산반(診算拌)이다.
보고, 세고, 마땅치 않으면 버린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무인의 무명이라기보다는 지독한 상인에게나 어울릴 법한 호칭이었으니, 그의 성품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런 이가 아들의 설득이라고 소득은커녕 손해만 가득할 일에 발을 담글 리 없었다.
“됐다. 다른 이들의 힘을 빌어 해결할 일도 아니다. 넌 세가에서 외부에 발표할 때까지만 모른 척만 해주면 된다.”
원래는 모용휘를 포함한 그 누구에게도 비밀이었다. 하지만 무슨 생각인지 집요한 추적과 탐색 끝에 고덕의 정체를 파악해 위험을 알린다며 허겁지겁 달려온 친우였다.
이미 알고 온 이에게 끝까지 숨길 수도 없는 노릇인 데다 동생과 자신의 안위를 걱정한 성의가 고마워서라도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야 어려운 일은 아니다만……. 정말 괜찮겠냐?”
“글쎄… 결과는 나와 봐야 알겠지.”
고일천의 답에 모용휘는 시무룩한 표정의 친우를 걱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자신이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진. 짜. 친구가 겪는 어려움이 진심으로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단 대비는 해둬라.”
“무슨 대비?”
“내가 알아낸 일이야. 다른 곳에서 알아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특히 당가는 조심해야 할 거야.”
지난날 함께했던 젊은이들 사이에 당가의 사람들이 있었던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이철이나 당 소저가 그 사실을 알았다고 우릴 곤경에 처하게 하진 않을 거라고 믿는다.”
“그들을 믿지 못한다는 게 아니야. 다만 지금 정천맹주가 누구인지 잊지 말라는 말이지.”
“아!”
현 정천맹주는 독괴 당조성이다.
그는 오랜 세월 움켜쥐고 있던 가주의 자리를 정천맹주로 나가면서 장남에게 내려 주고 태상가주로 물러났다.
결국 현 당가 가주의 자녀들인 당이철과 당호란은 독괴의 손자와 손녀였던 것이다.
뒤늦게 그 사실을 인식한 듯 탄성을 터트리는 고일천에게 모용휘가 걱정을 이었다.
“지나가는 말로라도 이철이나 당 소저가 가족들에게 그 말을 한다면 맹주의 귀에 들어가는 건 시간문제일 거다.”
그렇지 않아도 절강고가의 갑작스런 긴장 국면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상황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면 문제는 곧바로 확대될 가능성이 높았다.
“산 넘어 산이로군.”
고일천의 말에 모용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산도 보통 산이 아닐 거다. 지금 정천맹의 분위기상 이 사실을 알면 곧바로 제재를 가하려고 들 테니까.”
“그렇겠지. 그 때문에 우리가 이 난리를 치고 있는 것이니까.”
어두운 표정인 고일천의 답에 모용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몇 마디의 위로가 아니라는 걸 그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조용히 고덕과 고이현이 함께하는 정자 쪽으로 시선을 주던 두 사람에게 세가의 무사가 한 명 다가왔다.
“소가주님.”
“무슨 일인가?”
“가주님께서 급히 찾으십니다.”
“아버님께서?”
“예.”
“어디 계신가?”
“가주전에 계십니다.”
“알았네. 곧 가지.”
고일천의 답에 무사는 곧 돌아갔다.
“아버님에게 잠시 다녀와야겠네. 그동안 내 방에서 기다리면 어떻겠나?”
“그렇게 하지.”
모용휘의 답에 고일천이 발길을 옮겼다.
“그럼 이따 보세.”
인사를 남기고 내원으로 들어가는 고일천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돌린 모용휘는 정자 위의 두 사람을 바라보며 낮은 한숨을 쉬었다.
“하~ 아무래도 소저의 사랑은 이루기 어려운 모양이구려…….”
작게 중얼거리는 모용휘의 머릿속으론 지난날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층계를 올라가던 호여랑의 모습이 가득했다.
부친의 부름으로 가주전에 든 고일천은 자신 외에도 꽤 많은 이들이 미리 들어와 있는 것에 순간 긴장했다.
“찾으셨습니까? 아버님.”
“그래. 함께 상의할 일이 있어 불렀다. 참, 휘는 어쩌고?”
“잠시 제 방에서 기다리라고 하였습니다.”
“그 아이의 성정은 믿는다만, 밖으로 새어나가진 않겠느냐?”
“말을 옮길 친구는 아닙니다. 하지만 다짐은 따로 받아두었습니다.”
고일천의 답에 미리 와 있던 양승이 걱정 어린 음성으로 물었다.
“모용세가의 사람입니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수석 장로님께서도 오랜 시간 보아온 친구가 아닙니까? 믿을 수 있는 친구입니다.”
“모용세가 사람 같지 않다는 생각은 해왔습니다만……. 그 사람들의 전례가 마음에 걸리는군요.”
입안의 혀처럼 살갑게 굴다가도 하루아침에 안면을 바꾸는 것이 취미라는 모용세가다. 양승은 그런 모용세가의 가풍을 경계하는 것이다.
“그럴 것이었다면 애초에 정천맹으로 갔지, 이곳부터 달려오진 않았을 겁니다.”
“그야 검마가 이곳에 있는 줄 몰랐으니 그런 게 아닐는지요.”
이찬의 걱정도 작지 않았던지 그가 끼어들었다. 그런 그에게 고일천이 답했다.
“믿으셔도 됩니다. 제가 보증합니다, 총관님.”
너무나 확고한 고일천의 믿음에 이찬과 양승이 주저하자 고유장이 말문을 열었다.
“내가 그 아이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네가 그리 말하니 믿어야 옳겠다만, 상황은 그렇지 못한 듯하구나.”
“하지만 아버님!”
“잠시… 잠시 총관의 말을 먼저 들어보도록 해라.”
고유장의 말에 이찬이 다시 나섰다.
“오늘 협의회로부터 최후통첩이 날아왔습니다.”
“최후통첩이라면……?”
“협의회의 결정에 따라 검마를 무림 공적으로 선포하고 척살대에 무사를 파견하라는 것입니다.”
“무림 공적에 척살대라……. 이전보다 오히려 더 강경해졌군요.”
“예. 그 까닭에 정천맹의 준비가 완료되어간다는 추측을 조심스럽게 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불연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맞습니다. 소림의 새로운 병기라는 불연대가 완성 단계에 이른 것으로 추측됩니다.”
“제갈세가의 석학들이 개별 교육에 조언을 한다고 들었는데 효과가 컸던 모양이군요. 예상보다 완성 시기가 빠른 걸 보니 말입니다.”
“그게… 실은 공교롭게도 협의회의 최후통첩과 함께 한 가지 정보가 도착했습니다. 사실 이 정보 때문에 소가주님을 청한 것입니다.”
“무슨 정보이기에 저를……?”
“불연대를 직접 지도하는 절대 고수가 생겼다는 정보가 입수되었습니다.”
“절대 고수요? 설마 맹주께서 독공을 가르치는 겁니까?”
“설마요. 불연대는 모두 소림의 제자입니다. 독공을 가르칠 수야 없지요.”
“하면…….”
“저희도 이 정보를 맨 처음에 접했을 땐 결국 무당이나 팽가가 힘을 실어주나 보다 했습니다.”
“하면, 아니란 말씀입니까?”
“예. 파악한 대로라면 예상외의 인물입니다.”
이찬의 답에 고일천이 긴장된 표정으로 물었다.
“그가 누구입니까? 굳이 절 불러 이리 말씀하시는 것은 제가 아는 사람이라는 뜻입니까?”
“비슷합니다. 이번에 파악된 정보로는 그 절대 고수가 여의검존이라고 합니다.”
그 말에 고일천이 경악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여의검존! 설마 모용세가의 그 여의검존 말씀이십니까?”
고일천이 단박에 알아들을 수밖에 없는 이름이다. 모용휘가 필생의 목표로 삼았다는 인물이 바로 백조부인 여의검존이었기 때문이다.
“맞습니다. 역시 대번에 알아들으시는군요.”
“하, 하지만 그분은 이미 사십 년 전에 돌아가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알려져 왔었지요. 하지만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어, 어떻게……?”
“그것까지는 파악하지 못했습니다만, 여의검존이 살아서 귀환한 것은 확실합니다.”
“하, 하지만 휘는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았다면 가장 반겼을 이가 휘인데, 저리 한마디도 없을 사람이 아닙니다.”
“그에 대해선 짚이는 바가 있습니다.”
“짚이는 바라면……?”
“정천맹은 불연대의 완성까진 여의검존의 생환을 발표할 생각이 없을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휘가 모르는 것이 설명되지는 않습니다. 아시다시피 휘는 모용세가의 소가주입니다. 차기 가주가 될 사람이 그런 중요한 일을 모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고일천의 말에 이찬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불안하다는 것입니다.”
“그, 그게 무슨……?”
불안한 표정으로 물어오는 고일천에게 이찬이 답했다.
“알면서 입을 다물 경우엔 한 가지 상황뿐입니다. 소가주님.”
“서, 설마 휘가 절 속이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소가주님의 말씀대로 모용휘 소협이 여의검존의 귀환을 모를 수는 없습니다. 한데도 그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다면… 답은 이미 나와 있는 겁니다.”
이찬의 말에 고일천은 당황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모용휘가 모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 그렇다면 정보가 잘못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 정보는 정천맹에 심어놓은 우리 측 요원이 보낸 것입니다. 소가주님.”
틀릴 수가 없는 정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고일천은 그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제게 그 정보가 잘못된 것인지 아니면 휘가 속이고 있는 것인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전 전자를 택할 것입니다.”
“소가주님, 지금은 의리 같은 감정을 따질 때가 아닙니다.”
답답한 듯 말하는 이찬에게 고일천이 확고부동한 음성으로 답했다.
“그런 생각을 가진 모용세가를 비난하신 분이 바로 총관님이십니다. 한데 이제 와서 의리보다 실리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것은 우리가 배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저들의 진정성을 의심해보자는 겁니다.”
“그것이 배신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소가주님!”
답답한 듯 언성이 높아진 이찬을 직시하며 고일천은 말을 이었다.
“의리가 어줍지 않은 감정이라고 말씀하실 생각이십니까? 하지만 전 그것이 협의의 기본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의(義)가 무엇입니까? 옳은 것, 바른 것이 의 아닙니까? 작게는 친우와의 의리를 지키는 것이, 크게는 사람과의 도리를 지키는 것이 의의 초석이 된다고 난 믿습니다.”
“하지만 소가주님…….”
설득을 위해 말을 이으려는 이찬을 고유장이 말리고 나섰다.
“그만……. 잠시 기다리게.”
자신의 명에 이찬이 한발 물러나자 그의 시선이 고일천에게 향했다.
“네 말이 틀리지 않다. 가장 기본적인 것들이 틀어지면 큰 것도 지키기 어려운 법이지. 하나, 그것을 알면서도 널 불러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너의 믿음이 틀렸을 때 돌아오는 화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 점은 알고 있느냐?”
“그건… 알고 있습니다.”
“하니 네게 시간을 주마.”
“가주님!”
놀란 이찬과 양승의 음성이 터져 나왔지만, 고유장은 손을 들어 두 사람의 입을 막았다.
“하루다. 그 시간 동안에 결정을 내려라.”
“제 결정이 바뀌지 않는다면…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난 내 아들을 믿는다.”
고유장의 말에 이찬과 양승의 얼굴엔 놀람과 불안이 가득했지만, 이미 가주의 제지를 받은 상황. 더 이상 입을 열어 반대의 목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그 모습에 고일천이 고개를 숙였다.
“심사숙고하겠습니다, 아버님.”
아들의 답에 고유장은 그저 고개를 끄덕여 보였을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