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7장. 연정(戀情)-봄바람이 불다
사람들은 고덕의 진체를 알지 못했다.
누구도 그가 검마라 말하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고덕이 보인 말투며 행동거지가 그를 검마라 생각하지 못하게 만든 점이 컸다.
그 까닭에 처음엔 고덕을 검마라 짐작하던 이들의 마음속에서도 그 의심이 점차 색을 바래갔다.
그렇게 된 가장 커다란 이유는 고이현을 졸졸 따라다니는 고덕의 행동 때문이었다.
그건 누가 봐도 어여쁜 처녀에게 한눈에 반한 시골 청년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호철랑의 눈에 짙은 아픔이 스쳐 지나가고 있음을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렇게 사흘간 극진한 대접을 받은 사람들은 고덕이 도착한 나흘째에 낙안채를 떠났다.
코가 땅에 닿을까 걱정일 정도로 고개를 숙이는 부귀도와 망진의 배웅에 사람들이 의아함을 가졌지만, 고덕이 자신의 진체를 밝히려 하지 않는다는 걸 눈치챈 후량이 자신 때문이라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폈다.
하지만 그 주장은 의외로 먹혀들어가는 듯 보였다. 하긴 일행 중에 그런 대접을 받을 만한 인사는 결국 제하이십사강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후량뿐이었기 때문이다.
한데 그러고 나니 또 다른 의문이 들었다. 그 후량이 고덕에게 대협이라 부르며 깍듯하게 대하는 탓이었다.
결국 호철랑이 고덕이 소흥 왕부에 연관된 고위 관원이었다가 은퇴한 사람이라 둘러대며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그렇게 사안이 정리된 저녁, 낙안탕산 넘어 태순에 들어선 일행은 이것도 인연이라며 함께 객잔에 들었다. 헤어지기 전에 회포라도 풀자는 모용휘의 제안 때문이었다.
곧 작은 연회가 벌어졌고, 서로 웃고 마시고 떠들었다. 하지만 그 안에서 고덕은 고이현의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고, 그런 고덕에게서 호철랑은 눈길을 돌리지 못했다.
그들만의 연회가 끝난 후, 모든 이들이 각자 자신의 객방으로 돌아갔음에도 호철랑은 좀처럼 자리를 뜨지 못했다.
그렇게 홀로 술잔을 기울이는 호철랑의 곁을 누군가가 차지하고 앉았다.
인기척에 눈을 돌린 호철랑의 시선엔 모용휘의 모습이 들어왔다.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그리 보이나요?”
“예. 아까부터, 아니 지난 며칠 동안 호 소저가 웃는 걸 보지 못했습니다.”
정확히는 고덕이라는 이가 고이현을 연화라 부른 이후부터였다. 그때 사라진 웃음은 더 이상 호철랑의 얼굴로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랬던가요? 하긴 웃는 것도 말이 안 되겠네요.”
“왜 그렇습니까?”
조심스러운 모용휘의 물음에 호철랑의 음성이 이어졌다.
“눈앞에서 버젓이 자신의 마음을 가져간 남자가 다른 여인에게 한눈을 팔고 있음에도 그 사람의 변명이나 돕고 있는데, 어찌 웃음이 나오겠어요.”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듯 본인의 입으로 들으니 마음이 미어지는 느낌이었다.
언제 마음이 이리 기울었는지 모르게 빠져 버린 모용휘가 애써 마음을 다스리며 물었다.
“나서 보시지 그랬습니까? 소저를 보아달라고 말입니다.”
모용휘의 말에 호철랑의 입가에 슬픈 미소가 그려졌다.
“그러기엔 상대가 너무 나쁘네요.”
“소저의 이야기를 알면 고 소저는 물러날 겁니다.”
그 말에 조용히 고개를 저은 호철랑이 말을 이었다.
“현이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 너머의 그녀가 문제죠.”
“예?”
알아듣지 못한 모용휘의 물음에 호철랑은 그저 슬픈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모용휘는 슬픈 미소만이라도 그녀의 얼굴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길 바랐다.
하지만 호철랑의 입가에 어린 미소는 나타날 때보다 빨리 사라졌다.
“제가 술이 과했던 모양이네요. 괜한 말을……. 저도 이만 올라가보겠습니다.”
“아, 예…….”
덩달아 일어나는 모용휘를 둔 채 호철랑이 비틀거리며 이 층의 객방으로 올라갔다.
그녀의 비틀거리는 걸음만큼이나 모용휘의 마음도 심하게 흔들렸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던 호철랑은 고이현의 방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에 발길을 멈추었다.
“그러면 은퇴하시곤 줄곧 형님하고 사시는 거예요?”
“응. 형님과 형수님, 그리고 몇몇 군식구들하고.”
“군식구요?”
“그래. 아까 보았던 후량도 그 군식구 중 하나지.”
분명한 고덕의 음성. 그 말에 고이현은 까르르 웃었다.
‘그게 그렇게 재미있는 말인가?’
자신의 머리를 울리는 생각에 잠시 고소를 지어 보인 호철랑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다.
답답하고 또 답답했다.
바람이라도 쏘이고 싶어 열어젖힌 창문 밖으로 지붕 위에 걸터앉은 고덕과 그 밑 창문으로 고개를 내민 고이현의 모습이 보였다.
지나며 들었던 대화가 저 상태에서 이루어진 모양이었다.
함께 방에 머물며 나눈 것이 아니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 판이었지만, 왠지 저 모습이 더 보기 싫었다.
‘차라리 방에서 말을 나누든지…….’
왠지 자꾸 짜증이 나는 자신이 어이가 없어 호철랑은 창문을 닫고 침상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썼다.
하지만 가냘프게 들려오는 고이현의 웃음소리는 마치 그녀를 고문하는 끊이지 않는 비명 같았다.
* * *
다음 날 아침, 각자의 길로 나서기 위해 헤어진 내내 고덕은 고이현과 그 일행이 사라진 방향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자존심이 상하고 마음이 아팠지만, 돌아가겠단 말은 하지 못했다.
그런 자신을 자책하며 호철랑은 남몰래 흐르는 눈물을 수도 없이 닦아야 했다.
그렇게 도착한 하포에선 고길 내외의 극진한 환영을 받았다.
그나마 고길 내외의 극진한 보살핌이 없었다면 찢어지고 벼린 상처를 감당할 수 없었을 것 같았다.
호철랑은 그녀가 전한 소식을 접한 소흥 왕부에서 귀환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하포에서 보름을 머물렀다.
하지만 그 기간 내내 그녀는 고덕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해 있음을 뼈저리게 느껴야만 했다.
결국 이백의 기병으로 이루어진 호송대가 도착해 할 수 없이 하포를 떠날 땐 마음속 상처에 딱지가 앉고, 굳은살이 돋아날 지경이었다.
하포를 나서기 전, 호철랑은 고덕을 찾았다.
“예전에 그분이 계실 때도 기다렸습니다. 하물며 그분의 잔상에 불과한 상대가 나타났다고 기다림을 접을 생각은 없습니다. 제 마음은 곁에 두고 가겠습니다.”
호철랑의 말에 고덕은 그저 그녀의 이름을 부를 뿐이었다. 그것도 관직으로…….
“호 판관…….”
입술을 깨문 호철랑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그녀의 뒤로 잘게 부서지는 눈물방울들의 잔상을 보면서도 고덕은 아무 말도 해줄 수 없었다.
호철랑이 연화의 잔상이라 말한 것을 부정하지 못하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마음이 결국 고덕의 발길을 다시 하포 밖으로 이끌었다.
“또 나간단 말이냐?”
형의 걱정에 고덕이 답했다.
“걱정할 일은 만들지 않겠수. 내 약조하리다.”
“네가 약조하면 뭘 해. 주변에서 그냥 두지 않으면 만사 도루아미타불인 것을.”
그 말에 고덕은 아니라고 할 수 없었다.
“가능한 한 휘말리지 않도록 노력할게. 정말이야, 형.”
“도대체 이번엔 왜 가는 건데?”
“그게…….”
우물쭈물하는 동생을 바라보던 고길이 단호하게 말했다.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절대로 허락할 수 없다.”
환갑이 지난 동생의 외출이다. 고집한다면 막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고길은 완고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것이 자신에 대한 걱정에서 기인한 것이란 걸 잘 아는 고덕은 형을 설득하기 위해 숨겨 두었던 마음의 일부를 꺼내 보여야만 했다.
“실은… 마음에 든 여인이 생겼어.”
“저, 정말이냐?”
“응…….”
“누구? 판관이라던 그 처자냐?”
형이 누굴 가리키는 줄 알아들은 고덕은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럼 누구?”
“지난 외출에서 보았어. 어려.”
“지난 외출이라면 그 판관 처자를 구하러 갔을 때 말이냐?”
“맞아. 그때.”
“도대체 누구기에 네가 마음을 열었다는 게야?”
걱정이 되기도 하고 궁금증이 들기도 한 형의 물음에 고덕이 겸연쩍은 음성으로 답했다.
“어려.”
“어려? 얼마나?”
“여린이보다 더…….”
여린이는 한도회에 있는 고칠의 딸이다. 그 아이의 나이가 올해로 열아홉이었다.
“허허, 그놈……. 네 외모가 그러한데 나이야 무슨 문제겠냐마는… 정말 마음에 든 게야?”
형의 물음에 고덕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허허, 참……. 도대체 어떤 점이 네 마음을 움직인 게냐?”
“많이 닮았어.”
“뭐?”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형의 물음에 고덕의 답이 이어졌다.
“마치 그녀가 살아온 거 같아.”
“너, 너……!”
고길의 말문이 막혔다. 마음에 든 여인이 있다기에 간신히 마음을 정리했나 싶었는데 또 그 자리다.
기억을 떨치기는커녕 오히려 죽은 연화의 그림자에 집착한다니, 마음이 먹먹해져 왔다.
“그래선 안 된다는 걸 모르는 게야? 왜 이리 미련을 떨어!”
자신도 모를 일이다. 왜 이리 마음을 정리하지 못하는지. 세상에 자신의 마음에 이런 정분이 들어설 공간이 있다는 것조차 고덕은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래도 자꾸 눈에 밟혀.”
“안 된다니까!”
“도무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형.”
숙였던 고개를 들자 동생의 눈가를 따라 흐르는 눈물이 보였다. 순간 고길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검을 들면 천하에 당할 자가 없다는 아우가 흘리는 눈물이기에 더없이 무거웠다.
피를 내처럼 이루며 살아온 동생의 눈물이기에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천하의 무게를 짊어진 채 자신 하나를 바라보고 돌아온 동생의 눈물이기에 더 이상 잡을 수가 없었다.
“꼭 가야겠느냐?”
“미안해, 형.”
동생의 답에 고길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그렇다면 따라야겠지. 다만, 다시는 후회 따윈 남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신의 말에 의문을 담는 동생에게 고길이 말을 이었다.
“네가 원한다면 이전처럼 곁만 돌지 말고 직접 밀어붙이란 말이다.”
그제야 말뜻을 알아들은 고덕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그려졌다.
“웃기는……. 꼴 보기 싫으니 떠날 요량이면 썩 떠나거라.”
“애들은 두고 갈게.”
“그들이 원한다면 언제라도 내보낼 게다.”
형의 말에 고덕은 그저 고개를 끄덕여 보였을 뿐이다.
그렇게 밤이 가기 전에 고덕의 모습은 하포에서 사라졌다.
* * *
절강성 서남단에 위치한 구룡산은 산세가 크거나 험한 산은 아니다. 남부 지형이 그렇듯이 완만한 경사에 수림도 적당히 우거져 사람이 산보를 하기에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 구룡산의 중턱에 작지 않은 고루거각군이 들어서 있었다.
그 고루거각군의 정문에 걸린 현판엔 절강고가란 글귀가 용사비등한 필체로 쓰여 있었다.
그 현판을 바라보는 고덕을 유심히 지켜보던 수문 무사가 물었다.
“혹 본 세가를 찾아온 게요?”
“그래.”
자신보다 어린 사람이 다짜고짜 반말이니 수문 무사의 기분이 좋을 수 없다.
“그래? 나 원, 젊은 사람의 말버릇이 참으로 고약스럽구만.”
그나마 학인의 풍모가 많이 남은 고가의 무사인 덕에 그만한 말이지, 다른 곳 같았으면 대번에 욕설이 튀어나갔을 일이다.
“가서 소가주를 좀 보자고 전해주겠나?”
“소가주? 소가주를 아시오?”
수문 무사의 말투가 반공대로 꺾였다. 아무리 젊다 해도 찾아온 이의 상대가 소가주라면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인사일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조금. 가서 고덕이란 사람이 좀 보잔다고 전해주게.”
고덕의 말에 수문 무사는 잠시 고심하는 표정이더니 안으로 사람을 보내 기별을 전했다.
그렇지 않아도 정천맹은 물론이고, 백도 사십 중문의 협의체인 협의회에서도 연일 사람을 보내 정천맹의 거사에 협력하라는 압박이 심했다.
하지만 가주는 명확히 드러난 과실이 없는 이상 검을 들 수 없다며 버티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 탓에 압박은 더욱 심해졌고, 그것을 타파해보고자 몇몇 문파들과 연통을 띄우기도 했지만 별다른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그 까닭에 요사이 고가를 둘러싼 긴장감은 꽤나 높은 편이었다.
한참이 지나자 내원의 무사 한 명이 마중을 나왔다.
“소가주께서 기다리십니다.”
무사의 안내로 고가 안으로 들어선 고덕은 한참을 들어가서야 고일천이 기다리는 정자에 닿았다.
“어서 오시지요.”
한때 고위 관리를 지냈던 관인이라 소개되어서인지 고일천의 접객은 꽤나 정중한 편이었다.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하네.”
그 탓에 저따위 말투도 참아주는 것이었고.
“아닙니다. 한데 저희 세가엔 어쩐 일로…….”
“이현 소저를 좀 보고자 해서 왔네.”
“현아를요?”
일전에 고이현에게서 눈을 못 떼던 사람이다. 무엇 때문에 찾아왔는지 짐작이 갔다.
그렇다고 덜컥 여동생에게로 안내할 수도 없는 노릇. 잠시 시간을 끌기로 한 고일천이 다과상을 내왔다.
“그 아이는 잠시 나갔으니, 저와 차나 한잔하면서 기다리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럴까.”
고일천이 권하는 대로 자리에 앉은 고덕에게 찻잔이 내어졌다.
청아한 향기와 함께 맑은 찻물이 찻잔에 차올랐다.
떨리는 마음 탓인지 차 향기와 맑은 찻물까지 색다른 감흥을 가져다주었다.
그렇게 천천히 차를 음미하는 고덕에게 고일천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고씨가 흔한 건 아닌데, 우연이 깊습니다.”
“그렇군. 고씨라……. 동성이로군.”
동성에 대한 남녀 관계는 엄격한 금기 사항 중 하나다. 아무래도 고일천은 그 이야기를 하고 싶은 듯했다.
“그렇군요. 동성이라……. 아쉽습니다. 고 대인의 능력이라면 좋은 인연이 될 수도 있었는데 말입니다.”
눈에 뻔히 보이는 거짓이었지만 고덕은 그저 미소를 지어 보였을 뿐이다.
그런 고덕에게 고일천이 말을 걸어왔다.
“그나저나 호 소저는 잘 지냅니까?”
“그녀는… 집으로 돌아갔네.”
“집이면 길림성의 장춘 말입니까?”
“그… 렇겠지.”
호철랑은 이 고가가 자리를 잡은, 절강에 위치한 소흥 왕부로 돌아갔다.
하지만 소흥 왕부엔 호철랑은 있어도 여장을 했던 호여랑이란 사람은 없다. 그 탓에 만에 하나 사람이 찾아갈 것을 대비해 아예 본가로 돌아갔다고 둘러댄 것이다.
“그렇군요. 그녀와 헤어진 뒤에 휘가 많이 서운해했습니다. 좋은 인연이 되었으면 하는데 다리가 되어주실 순 없으십니까?”
난감한 부탁이었다. 호철랑이 자신에게 가진 감정을 아는 이상 다리가 되어준다는 건 하지 못할 짓이었다.
“미안하지만 어렵겠군.”
“그렇습니까?”
생각보다 속이 좁다고 생각하며 고일천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이 남아 있어 아버님을 뵙고 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러지.”
여전히 짧은 고덕의 답을 뒤로하고 고일천은 내원으로 들어갔다.
내원으로 들어간 고일천은 정말로 그의 부친인 고유장을 찾았다.
강호에서 섬전혼(閃電魂)이라 불리는 고유장은 초절정에 이른 뛰어난 고수였다.
“이 시간에 네가 어쩐 일이냐?”
지금 시간이면 무공 수련에 박차를 가할 때였기 때문이다.
그 탓에 집무실로 들어서는 아들을 의아하게 바라보는 섬전혼의 물음에 고일천이 공손히 답했다.
“아버님께 아뢸 말씀이 있어 찾아뵈었습니다.”
“앉거라.”
부자의 대화에도 기품이 서렸다. 자유스러움을 추구하는 무인들보다는 마치 학인들을 연상시키는 단어들이나 행동이 많았다.
이유는 절강고가의 출발이 무가가 아니라 학인 가문이었기 때문이다.
학인 가문이 어쩌다 무가로 돌아섰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나라가 환란에 빠진 시기에 분연히 검을 들고 일어선 것이 시초가 되었다고만 기록되어 있었다.
그 까닭에 자리에 앉은 아들에게 차를 따라주는 섬전혼의 행동 하나하나에도 학인의 풍모가 서렸다.
“그래, 할 말이란 것이 무엇이냐?”
부친의 물음에 고일천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다름이 아니오라, 일전에 말씀드린 이가 찾아왔습니다.”
“일전에 말한 이라면… 누굴 말하는 것이더냐?”
“현이에게 관심을 가지던 사람 말입니다.”
“아! 소흥 왕부의 고위 관리였다던?”
아들인 고일천에게서 들은 이야기보다 딸아이인 고이현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훨씬 많은 사람이었다.
오죽하면 그 사람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형이라는 이의 대략적인 생김새까지 어림짐작을 할까.
“예. 그가 불현듯 찾아왔습니다.”
“현아를 찾아온 것이더냐?”
“예, 아버지. 그 탓에 이렇듯 말씀을 구하려 찾아뵌 것입니다.”
“네가 현아에게 인도한 것이 아니라 내게 먼저 온 것을 보니 그다지 마음에 차진 않았던 모양이구나.”
“마음에 차고 안 차고가 문제가 아니라 관인이라는 것도 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됨됨이를 제대로 재지 못하겠습니다. 그것이 절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후량이 아무리 사파의 인물이라고는 하나 그런 인물이 고개를 숙이는 사람이다. 거기에 부귀도는 물론이고, 망진 또한 코가 땅바닥에 닿을까 걱정이 들 정도로 고개를 숙였다.
거기다 약속한 검마가 아니라 그가 나타난 것만으로도 자신들이 풀려날 정도의 위세도 가졌다.
하지만 정작 본인에게서 그만한 권위나 위엄이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고덕에 대한 고일천의 평가를 흩트렸다.
“그리 판단하기가 어렵더냐?”
“예. 제 짧은 지식으로는 어려울 듯합니다.”
아들의 답에 섬전혼이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하면 내가 한번 보자꾸나. 그렇지 않아도 현이의 말을 듣고 꽤나 궁금하던 참이었는데 잘되었다.”
“하오면 어찌……?”
“점심 식사를 같이하는 걸로 하자꾸나. 내 초대라면 거부하진 않겠지.”
“예, 알겠습니다. 하면 현이는……?”
“그래도 찾아온 손님인데 숨겨 둘 수는 없겠지. 점심에 같이 보는 것으로 하자.”
“예, 아버지.”
“하면 이따 보자꾸나.”
부친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난 고일천이 조용히 읍을 해 보이곤 집무실에서 물러갔다.
아들의 인기척이 사라지자 섬전혼의 음성이 울렸다.
“삼아.”
섬전혼의 부름에 허공에서 음성이 흘러나왔다.
“예, 가주.”
“그놈의 가주 소리는. 이리 둘이 있을 땐 그저 형님이라 부르라는데도.”
“버릇이 실수를 부릅니다, 가주.”
“어허, 그놈의 고집은 돌아가신 아버님을 꼭 빼다 박았구나.”
삼아라 불린 이. 섬전혼의 숨겨진 배다른 동생이었다.
선친은 서자인 그를 가문의 비수로 키웠다.
배다른 동생이 있다는 사실도 그가 가주의 위를 물려받을 때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불쌍한 동생이 가문을 위한다는 미명하에 얼마나 어두운 생활을 해왔는지도…….
그 탓에 섬전혼은 동생을 아꼈다. 그리고 신뢰했다. 그가 견뎌 온 고된 세월만큼이나 깊이…….
“천성이 그러하니 용서하십시오, 가주.”
“용서는 무슨……. 자식이 아비를 닮는 게 당연한 일인 것을.”
“가주…….”
삼아의 부름에 눈에 물기가 어리는 것을 감추기라도 하려는 듯 섬전혼의 음성이 이어졌다.
“네가 한번 미리 살펴보겠느냐?”
“소신이 본다고 알겠습니까?”
“네 안목이야 나보다 나은 것을.”
“과신이십니다.”
“과신이 아니라 확신인 게다. 한번 보고 오너라.”
섬전혼의 명에 허공의 음성이 답했다.
“예, 가주.”
조용히 기척이 사라지자 섬전혼의 입가에 미소가 깃들었다.
세상은 모른다. 절강고가의 그늘에 십대고수에 필적하는 괴물이 숨어 있는 걸 말이다.
더구나 그는 고가의 핏줄이고, 자신의 동생이었다. 그것이 언제나 자랑스럽고 든든한 섬전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