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6장. 부정(否定)-아니라 되뇌어보다
부들부들 떠는 표사를 달래 하포로 보낸 호철랑과 일행은 낙안채로 끌려왔다.
일신에 무공을 익히지 않은 호철랑을 제외한 모두는 혈도를 눌려 내력이 봉쇄된 채 갇혔다.
그렇게 갇히자 팽호량이 호철랑을 칭찬하고 나섰다.
“잘하셨소, 호 소저. 일단 소저의 기지로 시간을 벌었으니 이 위협을 벗어날 방안을 강구해봅시다.”
“맞아요. 저도 처음엔 많이 놀랐지만 검마란 이름을 생각하다 보니 호 언니의 기지라는 것을 알겠더라고요. 정말 대단해요, 언니.”
고이현까지 추켜세우며 나서는 바람에 호철랑은 자신의 말이 사실이라는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다만 이들이 조급한 마음을 먹고 어설프게 움직이다 봉변을 당할까 걱정이 되어 그 부분만 경고를 했다.
“시간은 벌었으니 천천히, 확실하게 움직여요. 섣불리 움직이다간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큰일만 당할 수 있어요.”
호철랑의 말에 여인들은 확연히 겁을 집어먹은 표정이었고, 청년들도 한층 더 차분해진 것 같았다.
그런 일행을 바라보며 호철랑은 그가 빨리 와주기만을 빌었다.
그들을 가둬둔 낙안채는 낙안채대로 소란스러웠다.
“캬아~ 술맛 좋고. 이런 술엔 계집이 있어야 제 맛인데…….”
부귀도의 푸념에 맹우가 슬며시 권했다.
“계집을 몇 들일까요?”
“뭐, 산채에 있는 계집들?”
“예. 며칠 전에 잡아온 계집들은 몸값을 지불할 곳이 없어 그대로 있습니다만…….”
“됐어. 박색은 둘째 치고, 나이도 잔뜩 먹은 할머니들을 어따 써.”
할머니라고 타박하지만 그녀들의 평균 나이는 삼십대 중반이다.
여자로는 물이 오를 대로 오른 나이였건만 부귀도에겐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면 어찌……?”
“창고의 고것들을 잠시만 데려다 술만 따르게 하면 안 될까?”
부귀도의 말을 곁에 있던 망진이 막았다.
“저저, 인내라곤 자라새끼 그것만큼도 없는 놈.”
“술만 따르는 겁니다, 술만. 그것도 안 됩니까?”
“아까 안 되는 걸로 합의했잖아!”
“우린 기억에 없다고 하면 지들이 어쩔 거냐구요?”
“멍청한 놈. 하지만 걔들한텐 우리가 약속을 어긴 기억이 남겠지. 하면 나중에 승복하겠느냐?”
“난, 정말 승복 안 해도 된다니까요?”
“이런 덜떨어진 놈. 진정한 여인을 알게 해준다는데도 이런 망동이니…….”
“사부…….”
“어허!”
“다가 안 되면 둘만. 아니, 하나라도 좀 빼옵시다.”
간절하기까지 한 부귀도의 애원에도 망진의 결심은 확고했다.
“무슨 소리를 해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게야! 괜히 사부의 일마저 망치지 말고, 입 닥치고 그저 엎어져 기다리기나 해!”
“사부~”
“어허, 이놈의 자식을!”
눈을 부라리는 망진의 서슬에 억지로 닫은 부귀도의 입은 댓 발이나 튀어나와 있었다.
“그나저나 정말 검마와는 상관없는 거겠지?”
걱정스런 망진의 물음에 맹우가 확신 어린 음성으로 답했다.
“분명합니다.”
“하지만 최근에 검마가 백도의 문파들과 인연을 맺었다는 소문도 들리고 보면, 그리 확신을 하기에도 어려운 게 아닐까?”
망진의 말에 맹우는 급격하게 떨어지는 자신감을 느껴야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물릴 수도 없었다.
말을 바꾸는 순간, 망진의 저 무식한 월도가 왠지 자신의 목을 치고 지나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맹우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무조건 맞다고 우기는 것뿐이었다.
“소문이지요, 소문. 남궁세가나 안휘협가 모두가 정천맹에 붙은 것만 봐도 확실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한데… 단리세가는 안 붙었잖아.”
“하지만 단리세가는 소문에 없었지 않습니까?”
“단리세가는 아니었나?”
“예, 총표파자 어른. 단리세가가 검마와 혼인 동맹을 맺었다는 소리는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랬던가. 하긴 생각해보면 나도 그런 소리는 듣지 못한 거 같군. 한데 단리세가는 왜 정천맹의 결정에 반기를 든 거지?”
“무언가 다른 사정이 있었겠지요.”
일문의 군사로는 너무나 무책임한 말이었지만, 그걸 따져 물어야 할 자들은 그 말에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하긴 그럴 수도 있겠지.”
망진의 수긍 뒤로 부귀도의 앓는 소리가 이어졌다.
“아… 여자가 그립다!”
“쓰읍!”
“알았어요, 알았다구요.”
망진의 서슬에 눌린 부귀도의 볼멘 음성이 낙안채의 밤을 가득 채워갔다.
* * *
호철랑의 서찰을 품고 낙안탕산을 출발한 구주 표국의 표사는 잠도 줄여 가며 하포를 향해 말을 달렸다.
그 덕인지 표사가 하포에 도착한 것은 낙안탕산을 출발한 지 칠 일 만으로, 거의 사흘을 앞당긴 결과였다.
밭일을 나갔다가 돌아오던 고덕과 식구들은 집 앞에서 서성이는 표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누구요?”
맨 앞에서 걸어오던 왕팔의 물음에 표사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입을 뗐다.
“거, 검마 대협께 전할 서찰을 가지고 왔습니다.”
검마란 이름에 두려움이 앞서 말조차 더듬거렸지만, 막상 눈앞의 사람들 중 검마란 이가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세상에 검마란 이가 호미와 쟁기를 들고 밭일을 하러 다닐 리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데, 자신의 말에 물었던 이가 누군가를 불렀다.
“대협, 사람이 찾아왔는데요.”
그때까지도 표사는 지목당한 농부가 검마란 성에 이름이 대협일 것이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천천히 다가오는 사내는 약관에 불과할 뿐만이 아니라 완벽한 시골 농부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 탓에 표사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거, 검마 대협이십니까?”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기도 하지. 한데 무슨 일인가?”
너무나 자연스러운 하대였다. 하지만 기가 막혀서인지, 아니면 눈앞의 청년이 정말 검마이길 바라서인지 화는 나지 않았다.
“서찰이 있습니다.”
말과 함께 서찰을 꺼낸 표사가 다시 물었다.
“근데 정말 검마, 맞긴 한 겁니까?”
의심이 불안을 넘어서 확신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 까닭에 대협이란 존칭도 사라졌다.
조금 더 가면 공대도 안 할 판이다.
그런 표사에게서 아무 말도 없이 서찰을 빼앗듯 넘겨받은 고덕이 발신인을 확인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호여랑? 호여랑이 누구지?”
호철랑의 본명을 들어본 적이 없는 고덕과 식구들은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불안했던지 표사가 다시금 서찰을 뺏어갔다.
검마의 손에서 강제로 무언가를 뺏어가는 상대를 본 식구들은 놀란 표정이 역력했다.
하지만 자신이 벌인 일로 확신을 얻은 모양인지 표사는 짐짓 무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떽! 강호 영웅들의 이름을 사용하고픈 마음은 알겠네만 그도 정도가 있는 게야. 쓸 수 있는 이름이 있고, 그렇지 못한 이름이 있다 그 말일세. 젊은 사람이 명을 재촉하지 않을 생각이라면 다시는 그 이름을 쓰지 말게.”
멍하니 훈계를 들은 고덕을 남겨 둔 표사는 저만치 천천히 걸어오는 노부부에게 다가갔다.
“노인장, 말씀 좀 물읍시다.”
표사의 물음에 조금 뒤에서 걸어오던 고길이 흔쾌히 답을 했다.
“뭐요. 내 아는 것이면 답을 해주리다.”
“여기 근방에 고씨네 집이 어디요?”
“고씨? 고씨네면 건넛마을에 한 집 있고, 개천 너머 상촌에도 두 집 정도가 있소만.”
고길의 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표사는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그곳 말고 이 근방 말이오.”
“이 근방이면 댁이 방금 지나쳐 온 우리 집밖에는 없소만…….”
고길의 답에 표사는 고개를 저으면서도 물었다.
“노인장, 혹시 검마란 이름이나 무명을 쓰는 사람을 아시오?”
표사의 물음에 고길의 시선이 절로 문 앞에 서 있는 고덕에게 향했다.
예전엔 몰랐지만 고진의 일이 터진 이후엔 동생의 무림명을 알게 되었다. 또 그 무림명에 깃든 의미까지도…….
하지만 고길에겐 세상의 그 어떤 소문보다 동생의 설명이 더 믿음직했다.
그래서 고길은 말했었다. 세상 소문 중엔 믿을 것이 없다고…….
그런 고길의 시선을 따라 움직이던 표사의 눈에 못마땅한 표정으로 서 있는 고덕의 모습이 보였다.
“에휴~ 정말 자네가 아가씨가 말씀하신 그 검마가 맞는다면 아가씨에겐 정말 큰일 난 걸세.”
그 말과 함께 내미는 서찰을 받아든 고덕이 봉투에서 꺼내 펼쳐 보았다.
그렇게 읽어보던 서찰을 접은 고덕이 형에게 말했다.
“잠시 밖에 좀 다녀와야겠수.”
“또 왜? 무슨 일인데 그러는 게야?”
걱정 가득한 고길의 물음에 고덕이 답했다.
“호 판관에게 문제가 좀 생긴 모양이우.”
“호 판관이면, 그 처자?”
“그게… 오는 길에 칠칠치 못하게 산적에게 사로잡힌 모양이오.”
고덕의 답에 고길의 눈에 당황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가 왜 이곳으로 오던 길인지 짐작을 하기 때문이다.
“그, 그럼 어여 가봐야지.”
못마땅해할 것이란 예상과 달리 호들갑을 떠는 형을 의아하게 바라보며 고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수. 금세 다녀올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슈.”
“혼자 가려구?”
“그게 편하지 싶어서…….”
“아니다. 상대가 산적이라면서. 자고로 도적을 상대할 때는 사람이 많을수록 좋다고 했다. 사람들을 데리고 가거라.”
“아니요. 나 혼자면 충분하오.”
“어허, 걱정으로 이 형을 말려 죽일 생각이 아니라면 말 좀 들어.”
고길의 책망에 고덕은 할 수 없이 후량을 향해 손짓을 했다. 녹림이라면 같은 사파인인 후량이 말이 좀 통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 명만 동행하겠다는 고덕의 결정이 불만족스러웠지만, 그나마 혼자 가는 게 아니어서인지 고길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형 내외와 식구들, 그리고 경공으로 인해 갑자기 일어난 먼지를 들이켜고 캑캑대는 표사를 남겨 둔 고덕과 후량의 신형이 빛줄기가 되어 쏘아졌다.
그 놀라운 광경에 입안으로 밀려 들어간 먼지로 인해 캑캑대면서도 표사는 질린 표정이 완연했다.
비로소 자신이 반말을 찍찍 해댄 인사가 정말로 검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 *
후량의 속도에 맞춰 달린 고덕이 낙안탕산에 도착한 것은 하포를 떠난 지 이틀 만이었다.
빠른 이동 탓에 먼지를 뒤집어쓴 후량이 후줄근한 데 반해 이젠 차고 넘치도록 흐르는 내력에 어느 정도 수발마저 정리된 고덕은 말짱한 모습이었다.
하긴 말짱하다고는 해도 농사일을 하다 곧바로 달려온 탓이라 입고 있는 옷은 일하기에 편한 허름한 차림이었고, 그나마도 여기저기에 흙이 묻어 있었다.
더구나 피부도 여러 날 뙤약볕에 타서 검게 그을려 있으니 겉모양으로만 보면 딱 시골 농부 그대로였다.
그런 고덕과 후량이 낙안탕산을 오른 지 반 시진. 갑자기 일단의 사내들이 둘의 앞을 가로막았다.
“멈춰라!”
호통을 치며 앞으로 나선 사내들을 바라보는 고덕에게 후량이 고개를 저어왔다.
“아는 이들이 없는데요?”
그 한마디에 후량을 이곳까지 데려온 보람이 반감되었다. 그 탓에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고덕에게 한 사내가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감히 낙안채의 앞마당을 맨입으로 지나겠다는 상큼 발랄한 생각을 먹은 건 아닐 거라 믿는다!”
“헛소리 그만하고, 네들 채주에게나 안내해라.”
고덕의 말에 사내는 헛웃음을 웃었다.
“허허허, 뭐? 채주? 네놈이 채주를 봐서 뭐하게?”
“할 만한 일이 있으니 보자는 게지.”
“이런 싹퉁머리 없는 새끼. 어따 대고 다짜고짜 반말이야?”
낙안채의 부채주인 불귀객(不歸客) 어창이 화가 날 만도 했다. 이제 막 약관이나 넘었을까 싶은 놈이, 그것도 딱 농부인 놈이 주제도 모르고 나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불행이 시작되는 순간임을 그는 알지 못했다.
퍽-
별이 보였다. 분명 해가 중천에 멀쩡히 얼굴을 드러내고 있는 대낮임에도 별은 명확하게 보였다.
“뭐, 뭐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어창의 뒤통수로 후량의 손바닥이 다시금 날아들었다.
퍽-
또다시 눈앞이 번쩍거린 어창은 잔뜩 표정을 일그러트린 자와 눈이 마주쳤다.
“뭐, 뭐야?”
“뭐긴 뭐야.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말란 뜻이지, 자식아.”
부채주가 뒤통수를 맞는 어이없는 사태가 벌어졌지만 낙안채의 녹림도들은 섣불리 나서지 못했다.
어중이떠중이 모여든 초적도 아니고, 녹림에 정식으로 이름을 올린 산채의 산적들이다.
당연히 무공들도 한가락 하는 이들이 대부분이고 보면 후량이 펼친 일수가 단순히 손바닥 후려치기 정도는 아니라는 걸 대번에 눈치챌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 사람, 어창만큼은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에겐 불행이었지만 뒤통수에 눈이 달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자신이 대낮에 별을 보게 된 원인을 짐작해낸 어창의 만도가 허공을 날았다.
그리고 어창은 복날 개 맞듯 맞는다는 말이 무엇인지 몸으로 깨달아야만 했다.
* * *
잠시 후, 알록달록한 얼굴에 반쯤 정신이 나간 어창을 들쳐 업은 산적을 앞장세운 고덕과 후량이 낙안채가 들어앉은 산 중턱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어창과 함께 있었던 녹림도들은 남은 임무가 있다며 모두 동행을 거절했다.
상대의 경지를 대번에 짐작한 그들은 무조건 빠지는 것이 유일한 재산인 몸뚱이를 보존하는 길이라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물론 안내자는 필요했기에 서열과 실력에서 가장 처지는 녹림도 하나가 후량에게 늘씬하게 두들겨 맞고 늘어진 어창을 업고 앞장을 섰다.
그렇게 들어서는 고덕과 후량을 녹림도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저거 어창 부채주 아니야?”
“어디? 난 처음 보는 사람들인데.”
“저 두 놈 말고, 유가 놈에게 업혀 있는 사람 말이야.”
“정말이네. 근데 얼굴은 왜 저래?”
“글쎄, 독버섯이라도 먹었나?”
“그런 모양이구만.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사람 얼굴이 저리돼.”
여기저기서 수군대는 산적들 사이를 유유히 지나쳐 가장 커다란 모옥에 도착하자, 유가라 불린 산적이 고덕과 후량을 밖에 세워놓고 어창을 업은 채 그대로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씨근덕거리는 부귀도가 그 커다란 월도를 들고 나오다 후량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어! 싸움꾼, 네놈이 여긴 웬일이냐?”
부귀도 추치와 후량은 나름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같은 ‘사파인’인 데다 기질도 다혈질로 워낙에 비슷해서 사패련의 회합에만 가면 죽이 잘 맞는 사이였던 것이다.
그 때문에 부귀도의 경지가 후량에 비해 떨어지긴 해도 서로 친우처럼 지내곤 했었다.
물론 대부분이 술집에 처박혀 지내는 동안 이어지는 관계였지만 말이다.
“여길 오게 만든 놈이 할 말은 아니지 않냐?”
“난데없이 나타나서 뜬금없이 뭔 소리야?”
두 사람의 대화를 고덕이 끊고 들어왔다.
“회포는 나중에. 우선 사람부터 돌려받지.”
“아, 예. 그래, 대협 말씀대로 사람들부터 내줘라.”
“사람들? 그리고 대협이라니. 저 자식은 누군데 그렇게 설설 기는 거야? 설마, 요새 관부 놈 뒤나 닦고 다니는 거냐?”
부귀도의 말에 흘깃 고덕의 눈치를 살핀 후량이 면박을 주었다.
“이런 경박한 놈. 함부로 주둥이를 놀리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고 뒈진다고 했지? 입 좀 조심해, 이 미련한 인사야.”
“어떤 놈이 내 제자에게 이래라저래라야!”
그래도 제자라고 편을 들기 위해 나오는 망진의 출현에 후량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아니, 망 선배!”
“선배는! 내가 네 친구냐? 제자하고 친구 먹었으면 하다못해 사숙이라고 부르든지.”
못마땅한 표정이 역력한 망진의 핀잔에 다시 한 번 고덕의 눈치를 본 후량이 서둘러 말을 이었다.
“아아, 호칭 문제는 나중에 다시 정하고, 일단 가둬둔 이들부터 풀어주쇼.”
“걔들을 왜 네놈에게 내줘야 하는데. 혹시 무슨 연관이라도 있는 게야?”
망진의 물음에 후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관이라면 아주 크게 있소. 하니, 일단 풀어주고 말을 나눕시다.”
“혹시 가족이나 연인 뭐 그런 거냐?”
“가족이나 연인은 무슨. 그냥 인연이 깊다잖소. 얼른 풀어주기나 합시다.”
그나마 아는 얼굴들이 봉변을 당하지 않게 하려고 서두는 후량의 마음을 망진은 너무나 몰랐다.
“안 돼. 아무리 네놈과 연이 있다고 해도 가족이나 뭐 그런 게 아니라면 풀어줄 수 없다.”
“아니, 갑자기 웬 고집이오?”
후량의 물음에 부귀도가 냉큼 끼어들었다.
“내기를 했거든.”
“내기? 무슨 내기?”
“지들이 주장한 것을 해내지 못하면 몸을 바치기로 했지. 아주 순순히 말이야.”
시키는 대로 한다는 말이 그렇게 변했다. 하긴 그 의미가 들어 있는 것도 맞으니 아주 아니라곤 할 수 없었지만, 엄연히 ‘아’ 다르고 ‘어’ 다른 법인데 부귀도에겐 별 차이가 없는 모양이었다.
“무슨 주장을 했기에?”
궁금증이 인 후량의 물음에 부귀도는 같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검마를 불러온다나. 내 참, 검마가 뉘 집 똥개새끼도 아니고, 오란다고 오겠냐고. 하여튼 고년들의 보들보들한 속살을 맛볼 날도 멀지 않았다 그 말이지. 크크크.”
뭐가 그리 좋은지 혼자 키득거리는 부귀도를 후량은 불쌍한 듯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당사자를 앞에 두고 똥개 운운했으니, 살아도 산 게 아니게 될 확률이 구 할 이상이었다.
그런 부귀도에게 고덕의 음성이 날아들었다.
“그래서 왔다.”
“뭐?”
“그래서 왔다고.”
고덕의 말을 여전히 알아듣지 못한 부귀도가 후량에게 물었다.
“저 자식, 뭐라는 거야?”
부귀도의 물음에 후량은 그가 갈 데까지 갔다는 생각에 눈을 질끈 감으며 답했다.
“내기대로 대협께서 왔다는 말이다.”
“내기대로? 무슨 내기……!”
말을 하다 만 부귀도의 표정이 그대로 굳었다.
“서, 서, 설마… 거, 검마 대협은 아니죠?”
제발 아니길 바라는 부귀도의 희망은 이어진 고덕의 답에 완전히 무너졌다.
“맞아. 내가 검마라 불리기도 하지.”
자신의 답에 완전히 사색이 되는 부귀도를 바라보며 고덕은 한자 한자 씹어뱉듯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똥.개.새.끼.란 말은 처음 들었다.”
퍽-!
무언가 강렬한 통증 이후로 까무룩하게 멀어지는 정신을 붙잡지 못한 부귀도의 신형이 스르르 무너졌다.
슬쩍 스치듯이 휘두른 고덕의 손짓 한 방에 정신을 잃고 쓰러진 것이다.
그 모습을 눈앞에서 목도한 망진은 제자에게 손을 쓴 고덕에게 대항하는 대신에 재빨리 손을 비비는 걸 택했다.
“아이고, 대협! 이놈 눈이 해태 눈깔이라 미처 알아 뵙지 못했습니다요.”
제하이십사강이고 사패련 삼대고수고 간에 그것도 대거리가 가능한 사람에게나 먹히는 것이다.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나는 사람에겐 그 이름은 정말로 옆집 똥개 이름만도 못한 것이란 걸 망진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완전히 고개를 숙인 망진이 서둘러 고덕을 안으로 모셨고, 정신을 잃은 부귀도는 주변의 녹림도들이 수습해 옮겼다.
고덕이 자리에 앉기 무섭게 망진의 명을 받은 녹림도들이 호철랑을 비롯한 이들을 채주의 오막으로 끌고 왔다.
“이, 이런 막돼먹은 놈들을 보았나? 어찌 이 귀하신 분들께 이리 악독하게…….”
호들갑을 떨며 온몸을 묶어둔 밧줄을 푸는 동시에 슬쩍슬쩍 혈도를 치는 것만으로도 눌러놓았던 혈을 풀어주었다.
갑작스런 상황에 놀란 와중에도 일행은 내력이 돌아옴을 느끼며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런 이들의 시선에 앞으로 나서는 호철랑의 모습이 보였다.
“오셨군요.”
“고생했소.”
“송구합니다. 이리 발걸음을 하게 만들어서…….”
“상관없소. 나름 무료한 참이었으니까.”
두 사람의 대화를 듣는 이들의 표정이 점점 심각하게 변해갔다. 지금의 대화로만 보면 저 약관의 농부가 검마란 뜻이 되기 때문이었다.
“에이~ 설마!”
마음속의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와 버린 고이현이 자신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지만, 이미 그 말은 고덕이 들어버린 후였다.
천천히 고이현에게 시선을 돌렸던 고덕의 세상이 그대로 멈춰졌다. 마찬가지로 그의 몸도 그림처럼 굳어졌다.
“여, 연화?”
고덕의 음성을 들은 호철랑은 그제야 고이현에게서 받았던 친숙함의 정체를 깨달았다.
세상을 떠난 문정 군주의 모습과 고이현의 생김이 너무나 유사했던 것이다.
“저, 전 고, 고이현인데요…….”
당황한 고이현의 말에 굳어졌던 고덕의 몸이 다시금 움직였다. 그리고 정지되어 있던 그의 세상도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 미안하오.”
사과를 했다. 천하의 독불장군 검마가…….
고덕의 평소 성격을 잘 아는 후량은 물론이고, 호철랑마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그들의 귀로 고이현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아요. 저도 소협을 다른 사람으로 착각한걸요.”
고이현의 음성을 듣는 순간, 고덕은 다시금 세상이 멈추는 느낌을 받았다.
‘상공, 괜찮아요. 내가 상공을 사랑하니까.’
언제나 밝게 웃고, 떠들던 연화의 모습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고덕의 시선에 고이현이 배시시 웃어버렸다.
“제가 좀 이쁘긴 하죠?”
그 말투, 그리고 표정. 고덕의 마음속으로 비명이 들려왔다.
‘맙소사! 그녀가 돌아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