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5장. 위협(威脅)-녹림, 잘못 털다
다음 날 아침, 예정대로 떠나는 팽호량 일행에 호철랑과 표사가 따라붙었다.
지난 저녁의 술자리를 거친 덕인지 호철랑은 팽호량 일행과 편하게 웃고 떠들며 움직였다.
개중에서 천성적으로 성격이 밝은 고이현은 아예 호철랑의 마차에 동승해 있었다.
주인이 내린 그녀의 말은 마차에 묶여 천천히 뒤따랐다.
그렇게 낙안탕산을 오르기 시작한 일행은 점심나절이 돼서야 산의 정상부에 위치한 관도를 지날 수 있었다.
“시장하시겠지만, 점심은 거르고자 합니다.”
마차로 다가온 모용휘의 말에 호철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 상관없으니 뜻대로 따르겠습니다.”
“아직 위험지역인 탓에 그리하기로 한 것이니 이해해주십시오.”
“예. 괜찮으니 괘념치 마세요.”
호철랑의 답에 슬쩍 그녀의 얼굴을 훔쳐본 모용휘가 말을 몰아 앞으로 나가자 고이현이 투덜거렸다.
“피- 바람둥이.”
“응? 누가? 모용 소협이 바람둥이란 뜻이니?”
호철랑의 물음에 고이현이 저만치 앞서 나간 모용휘를 향해 혀를 내밀곤 말을 이었다.
“실은 모용 오라버니는 당 언니가 찍었거든요.”
“찍… 어?”
“아! 좋아한다고요.”
혀를 날름 내밀고 답하는 고이현의 말에 대강의 사정을 이해한 호철랑이 미소를 지었다.
“한데 모용 소협은 당 언니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나 보구나?”
“그러기만 하면 다행이게요. 다른 여자에게 노골적으로 관심을 보이니까 문제죠.”
“다른 여자? 누구?”
호철랑의 물음에 고이현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모용 오라버니가 호 언니에게 관심을 보이는 걸 정말 몰랐단 말이에요?”
“에~ 에! 나한테?”
당황하는 호철랑의 모습에 고이현은 헛웃음을 웃었다.
“허, 정말 몰랐나 보네요. 호 언니는.”
“정말이야. 생각도 못했었는걸.”
호철랑의 답에 고이현이 은근한 음성으로 물었다.
“몰랐다는 건 둘째 치고, 마음은 있고요?”
“마음은 무슨. 난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어.”
“정말이요?”
“그래. 내겐 목숨과도 같은 사람이 있어. 실제로 내 생명의 은인이기도 하고.”
아버지가 균사 왕부에 잡혀 있을 때의 일을 말하는 것이다. 만에 하나 그때 일이 잘못되었다면 자신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니, 생명의 은인이란 표현도 과하지 않았다.
“언니 표정… 정말이군요.”
고이현의 말에 호철랑은 다른 때와는 분명히 달라 보이는 깊은 미소를 보여 주었다.
그에 고이현이 마차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당호란을 불렀다.
“당 언니! 아이, 당 언니!”
자신의 부름에 마지못한 표정으로 당 호란이 다가오자, 고이현이 마차 문을 열더니 그녀를 와락 끌어당겼다.
“어, 어마.”
깜짝 놀란 와중에도 역시 무술을 익힌 사람답게 당호란은 재빨리 균형을 잡고 마차 안으로 들어섰다.
“이게 무슨 짓이니!”
눈을 흘기는 당호란을 주저앉힌 고이현이 호들갑을 떨었다.
“중요한 일이 생겼거든. 일단 내 말 좀 들어봐. 글쎄, 호 언니한테 남자가 있다잖아.”
“뭐?”
“남자 말이야. 마음에 둔 남자. 저기 바람둥이 모용 오라버니 말고 생명의 은인이 있대.”
그 말에 당호란의 시선이 호철랑에게 향했다.
“맞아요. 제겐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분이 따로 계시답니다.”
“그럼 모용 소협은 마음에… 없는 건가요?”
“두 사람을 마음에 품는 건 못합니다.”
호철랑의 답에 여태 뾰로통해 있던 당호란의 얼굴이 단박에 풀렸다.
“내가 호 언니 처음부터 마음에 들어 했던 거 알죠?”
직전까지도 호 소저라 부르던 호칭이 언니로 바뀌었다. 스물둘인 당호란보다 호철랑은 세 살이나 많았던 까닭이다.
그렇게 마차 속에서 웃음 하나가 늘어났다.
웃음소리가 들리자 궁금증을 참지 못한 팽연마저 마차 안으로 들어가면서 일행 중에 여자들의 모습은 완전히 가려졌다.
그런 일행의 앞을 일단의 사람들이 막아섰다.
“멈춰라!”
산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며 나선 이들은 누가 봐도 한눈에 정체를 알 법한 옷차림 일색이었다.
그들의 출현에 팽호량이 선두로 나섰다.
“왜 길을 막아 세우는 건가?”
몰라서 하는 말은 아니다. 기세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그런 기세 싸움을 위해 산적들 속에서도 우락부락한 사내가 하나 나섰다.
짐승 가죽으로 된 조끼에 텁석부리 장한이 커다란 월도를 바닥에 찍으며 우렁우렁한 음성으로 말했다.
“감히 낙안채의 앞마당을 맨입으로 지나겠다는 상큼 발랄한 생각을 먹은 건 아닐 거라 믿네만.”
산적의 말을 팽호량이 받아쳤다.
“내, 관도에 통행세가 먹여졌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소이다.”
“허어~ 관도도 어디에 있는 관도냐에 따라 세금이 붙는 다는 걸 모르는 인사로세. 좋은 말로 할 때 두당 금자 두 냥씩만 놓고 썩 물러가라!”
아무리 산적이라고는 하나 통과세가 너무 과했다. 물론 작다고 줄 생각은 아니었지만 지금 부른 가격대로라면 산적들도 돈을 받고자 하기보단 사람 자체가 목표라고 보는 게 옳아 보였다.
“정녕 도둑이 맞긴 한 모양이군. 내 금자 두 냥을 주느니 목 두 개를 베어버리겠소.”
생각 외로 강하게 나오는 팽호량을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보던 텁석부리 사내가 콧방귀를 뀌었다.
“흥! 어쩐지 당차다 했더니 팽가의 놈이로구나. 아가야, 우리가 팽가의 이름으로 겁을 집어먹는 초적 집단인 줄 알았더냐?”
팽가의 표식을 알아보고도 강짜다. 하긴 녹림에 정식으로 이름을 올린 산채가 그깟 이름에 겁을 먹을 리는 없다. 하지만 실력이 더해진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오냐, 오늘 하북패도 팽호량이 누구인지 녹림에 똑똑히 새겨 줄 것이다!”
호기롭게 외친 팽호량을 향해 예의 그 텁석부리 장한이 비웃음을 머금었다.
“크크크, 젖비린내 나는 애송이 놈이 앞마당에서 얻은 알량한 이름을 자랑하다니 우습지도 않구나. 오냐, 네놈의 이름을 나, 부귀도(浮鬼刀)의 전적에 추가해 넣어야겠다. 어서 오너라!”
상대의 말에 팽호량은 물론이고, 뒤에서 상황을 주시하던 일행의 표정에도 놀람이 어렸다. 부귀도 추치라면 녹림에서도 이름이 높은 고수였기 때문이다.
그의 커다란 월도가 지날 때면 주변에 남아나는 것이 없다는 소문이 자자한 고수였다.
아무리 팽호량이 신진 고수들 중에 뛰어난 기량을 보이는 이라고는 하나, 이미 기성 고수들 사이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는 이들 가운데 하나인 부귀도의 상대는 아니었다.
상황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르자 눈치가 빠른 당이철이 끼어들었다.
“추 대협이 어찌 직접 거간(居間)을 나오셨습니까?”
“네놈은 또 뭐지?”
“당가의 당이철이란 무명소졸입니다.”
“당가…….”
당가란 말에 부귀도의 표정이 흠칫거려졌다.
사천당문, 또는 사천당가라 불리는 이들의 집요함과 잔혹함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들은 ‘일 푼의 은혜를 백 냥으로, 반 푼의 원한을 만 냥으로 갚는다.’는 이기적인 구호를 가훈으로 삼은 집단이다. 괜히 건드려 봐야 좋은 일을 보기 힘든 집단인 셈이었다.
더구나 당가엔 독귀라는 빌어먹을 영감탱이가 버티고 있는 것이 신경 쓰였다.
그렇게 보면 도왕이 버티고 있는 팽가도 신경 쓰일 법도 한데, 팽가의 이름엔 꿀리지 않는 걸 보니 힘이 달린다고 꼬리를 마는 건 아니다.
워낙에 당가의 손속이 맵고, 또 사람이라면 누구나 두려움을 갖는 독이 연관되어 있다는 점 때문에 꺼리는 것 같았다.
“예, 당가의 식솔이죠. 그나저나 서로가 손해를 볼 일을 만들어서 무얼 하겠습니까? 하니 추 대협의 체면을 구기지 않을 정도의 통행세를 드리지요.”
당이철의 말에도 불구하고 팽호량과 일행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상대가 부귀도 추치라면 대항은 쓸데없는 오기일 뿐이란 걸 알기 때문이다.
“뭐, 그렇다면야…….”
부귀도도 한발 물러섰다. 원래대로라면 모조리 잡아다 몸값을 받고 풀어줘야 했지만, 팽가뿐만이 아니라 당가 사람마저 섞였다면 그냥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부귀도의 생각은 뒤에서 들려온 음성에 의해 싹 날아가 버렸다.
“누구 마음대로!”
갑작스런 음성을 좇아 시선을 돌리니, 산적들 틈을 비집고 나서는 거한이 보였다.
“서, 설마……!”
불안한 표정인 당이철의 귀로 걱정하던 일이 현실이 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왜 또 참견입니까? 사부! 여기 영업은 제 소관이란 말입니다.”
부귀도의 말에 당이철과 일행의 표정에 절망이 들어찼다.
부귀도 추치의 사부면 멸사도귀(滅私刀鬼) 망진이다. 그는 녹림의 총표파자로 사패련 삼대고수 중 한 사람이자 제하이십사강의 일인이었다.
“네놈의 영업이 영 엉터리니까 그러지.”
“뭐가 또 엉터리란 말씀이십니까?”
“마차를 봐야지, 마차를.”
“마차가 거기서 다 거기지, 뭘 또 봅니까?”
사부의 핀잔에도 부귀도는 별로 관심을 갖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기왕 적당 선에서 끝내기로 한 거, 일을 벌일 생각이 사라진 때문이었다.
하지만 망진은 그럴 마음이 없는 듯했다.
“냄새가 나지 않느냐? 냄새가?”
“냄새는 무슨. 말똥 냄새만 나는구만.”
부귀도의 중얼거림에 잠시 눈을 흘긴 망진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러하니 네놈이 아직 멀었다는 게 아니더냐. 딱 봐라. 향긋한 것이 계집의 살내음이 아니더냐. 그것도 상품 중의 극상품이니라.”
망진의 말에 부귀도의 눈에 광망이 서렸다. 그의 또 다른 무명, 광녀(狂女)의 본능이 깨어난 탓이다.
광녀라고 비오는 날 머리에 꽃 달고 괜히 동네를 도는 여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미쳤다고 붙은 무명이다. 그것도 여자에게…….
치마를 두른 여자라면 칠순 노인도 침을 흘릴 만큼 여색을 밝히는 탓에 붙은 당당하지 못한 무명이었다.
물론 당사자는 그것을 그다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저, 정말입니까?”
“내가 여자를 놓치는 걸 본 적이 있느냐?”
제자에겐 못 미치지만 망진의 여성 편력도 만만치 않다. 오죽하면 그에게도 기둥서방이란 웃지 못할 별명이 따라다닐까.
기생이란 기생은 모조리 건드려 그녀들의 기둥서방이 되어야만 직성이 풀린다는 인사가 바로 망진이다.
두 사제의 시선이 마차를 노리자, 팽호량과 일행이 일제히 그 시선에서 마차를 가리고 나섰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상대를 자극하는 일밖에 되지 못한 모양이었다.
두말없이 날아오른 부귀도의 커다란 월도가 그렇게 마차를 막아선 일행에게 쏟아졌다.
차장, 차라라랑, 차창, 추앙.
각양각색의 금속성 뒤로 팽호량을 시작으로 네 청년들이 형편없는 모습으로 밀려났다.
그리고,
쾅-
단 한 번의 도격으로 마차의 앞면을 모조리 날려 버리는 부귀도를 향해 마차 안에 있던 세 여인들이 일제히 날아들었다.
츠라라랑.
노리고 벌인 일이었지만, 부귀도는 가볍게 세 여인의 공세를 걷어냈다.
그리고 어느새 양팔로 세 여인을 끌어안듯 잡아들인 부귀도가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런 부귀도의 앞을 당황한 네 청년이 황급히 가로막았다.
쾅- 콰광!
이전보다 훨씬 커다란 폭음과 함께 길을 막아서던 네 청년이 나가떨어졌다.
언제 뛰어들었는지 망진이 거치적거리는 네 청년의 무기와 몽둥이를 한 번에 걷어내고 마차로 달려들었던 것이다.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망진을 보고 당황한 호철랑이 소리를 질렀다.
“내게 손끝 하나라도 댄다면 대협이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왜일까? 평소라면 저따위 협박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을 텐데, 이번엔 이상하게 발길이 멈춰지는 망진이었다.
그것이 신경 쓰였던지 망진이 비웃음을 머금고 물었다.
“대협? 어떤 대협?”
“너희 강호인들 사이에선 검마라 불린다고 들었다.”
호철랑의 말에 장내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물었던 망진은 둘째 치고, 사부 덕에 거치적거리는 것들을 치워버린 채 자신의 팔 안에 안긴 여인들을 희롱할 참이던 부귀도마저 굳어버렸다.
그렇게 잠시간이 흐르고, 망진이 갑자기 킬킬대기 시작했다.
“킬킬킬, 내가 들어본 거짓말 중에 가장 멋있는 거짓말이로구나. 고년 참으로 맹랑한 년이로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손을 뻗진 못한다. 여전히 검마라는 이름이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그런 사부의 말을 부귀도가 받았다.
“그, 그러게 말입니다, 사부. 검마라니요. 검마가 뉘 집 똥개새끼 이름도 아니고, 아무나 검마하고 인연이 있다고 떠들겠습니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어느새 슬그머니 품 안의 여인들을 놓아주는 부귀도다. 그로서도 검마란 이름이 주는 위압감이 너무 무거웠던 것이다.
팔에서 풀려난 여인들은 황급히 부귀도에게서 떨어졌다. 하지만 놀람은 여전히 가시지 않은 듯 부귀도에게서 불안한 눈길을 떼지 못했다.
“내 말이 거짓이라면 이 목을 내놓겠다!”
이왕 내친걸음이라고 생각했던지 앙칼지게 외치는 호철랑을 바라보는 망진과 부귀도의 시선에 불안감이 들어섰다.
거짓이라면 상관없으나 만에 하나 사실이라면, 둘이 문제가 아니라 녹림 자체가 문을 닫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탓에 섣불리 나서지 못하는 둘을 대신해 쥐 수염을 단 사내가 끼어들었다.
“그것을 어찌 믿는단 말이냐?”
갑자기 끼어든 사내를 확인한 부귀도가 반색을 했다.
“아! 군사.”
맹우. 부귀도가 이끄는 낙안채의 군사를 맡고 있는 인물이다.
산적 무리의 군사가 으레 그렇듯이 무슨 제갈공명에 비교될 인사는 아니었다.
몰락한 유생 집안 출신으로, 글귀를 조금 읽었다는 것으로 까막눈이 대부분인 산적 소굴에서 군사란 중책을 맡고 있는 그저 그런 인사였다.
이번에도 뛰어난 계책이 있어 나선 것이 아니라, 그저 총채주에게 잘 보여 낙안채를 벗어나 총채로 진출해볼 욕심으로 나선 것뿐이었다.
그것을 알 길 없는 부귀도와 망진은 맹우의 입을 기대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거짓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단 말인가요?”
“거짓이 아니라는 증거도 없지 않느냐?”
“하면 어찌해야 믿겠나요?”
“검마를 불러온다면 내 믿을 것이다.”
맹우의 말에 사색이 된 부귀도가 그에게 바짝 다가왔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누구 죽는 꼴을 보고 싶어서 그래!”
부귀도의 작은 음성에 맹우가 얍삽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저년과 검마가 정말 인연이 있다고 보십니까? 마교 부교주였던 검마와 인연이 있는 여인이 백도의 청년 고수들과 함께 다닌다고요? 차라리 황후가 남자라고 하면 믿겠습니다.”
맹우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럴싸했다. 하긴 팽가니, 당가니 모두 백도의 명가들이다.
그런 곳의 신예들이 검마와 인연을 맺은 여인과 함께 다니다니 소가 웃고, 개가 바닥을 칠 일이었다.
부귀도가 슬그머니 물러나자 맹우가 말을 이었다.
“어때? 할 수 있겠나?”
“만약 사실이라면 어쩔 거죠?”
“어쩌긴, 풀어주지.”
정말로 검마가 온다면 풀어준다기보다는 빼앗긴다는 것이 맞는 말일 터다. 그것도 죽기 싫어서 바닥에 엎어져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말이다.
“약속할 수 있나요?”
호철랑의 물음에 맹우의 시선이 부귀도와 망진에게 향했다. 결정은 두 사람의 몫이란 걸 뜻하는 것이었다.
그런 맹우의 시선을 받은 망진이 부귀도의 곁으로 다가왔다.
“저놈, 왜 저래?”
소곤거리는 사부에게 부귀도가 잔뜩 낮은 음성으로 답했다.
“백도인들과 검마의 여인이 함께 다닐 거라 생각하십니까?”
맹우에게 들은 말을 마치 자신의 생각인 양 떠벌리는 부귀도의 말에 망진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말도 안 되지! 하면 저년이 거짓을……?”
“그럴 가능성이 높죠.”
“한데 무슨 기회를 준다는 거지?”
“그거야…….”
말을 하다 말고 맹우를 바라보자 망진이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부귀도를 노려보았다.
사부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는 자신의 눈짓에, 맹우가 가까이 다가섰다. 그런 맹우의 귀에 대고 부귀도가 물었다.
“왜 귀찮게 기회를 주려는 거야?”
“혹시 정말일지도 모르니까요.”
“무슨 의심 갈 일이라도 있는 거야?”
단숨에 겁에 질리는 부귀도에게 고개를 저어 보인 맹우가 말을 이었다.
“그냥 말 그대로 가능성만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물론 천분의 일, 만분의 일도 없지만 말입니다.”
“그렇다면 괜히 시간 끌지 말고 덮쳐도 되는 거잖아.”
뭔가 아쉬운 듯한 부귀도의 물음에 맹우의 입가에 다시금 얍삽한 미소가 떠올랐다.
“반항하는 계집보단 순순히 협조하는 계집이 더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글쎄, 난 상관없는데…….”
부귀도의 말에 망진이 면박을 줬다.
“그러니 계집에 미쳤다는 소리나 듣지. 자고로 계집과의 합방은 합의하에 하는 것이 제 맛이니라. 하면, 방법은 있는 게냐?”
망진의 물음에 맹우가 고개를 조아렸다.
“예, 총표파자 어른. 맡겨만 주신다면 멍석을 깔아보겠습니다.”
“클클클. 오냐, 좋다. 한번 만들어보아라.”
망진의 허락에 맹우가 호철랑을 향해 물었다.
“만에 하나 거짓이라면 어찌하겠느냐?”
“원하는 대로 하겠어요.”
호철랑의 답에 여인들의 눈에 당황감이 들어섰다. 그 모습에 맹우가 물었다.
“저 여인들도 마찬가지렷다.”
맹우의 물음에 부귀도의 기대 어린 눈길이 세 여인의 몸을 훑었다.
그 시선이 마치 송충이가 벌거벗은 몸 위를 기어가는 듯한 느낌인지라 세 여인들은 잔뜩 움츠러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호철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하죠. 대신.”
“대신?”
“결정이 날 때까진 우리에게 어떠한 위해도 가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줘요.”
호철랑의 요구에 부귀도가 아쉬운 음성으로 물었다.
“술을 따르라 시키는 것도 안 되는 거냐?”
“안 됩니다. 절대로!”
호철랑의 단호한 답에 부귀도의 표정은 금세 풀이 죽었다.
그런 제자의 낙담은 상관이 없었던지 망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고갯짓에 맹우가 답했다.
“좋다. 약속한다. 대신 우리도 조건이 있다.”
“뭔가요?”
“한도 끝도 없이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 기한을 정해야겠다.”
“얼마나 줄 건가요?”
“한 달!”
맹우의 답에 호철랑은 두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솔직히 한 달도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고덕이 머무는 복건성의 하포와 이곳 절강의 낙안탕산은 말로 달려도 열흘이면 충분히 닿을 거리였기 때문이다.
“하면 어찌 연락을 취할 생각이지?”
맹우의 물음에 호철랑의 시선이 파랗게 질려 있는 표사에게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