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4장. 일탈(逸脫)-일상에서 비켜나다
구를 불러 인근의 야산 자락으로 나온 고덕은 마치 옛이야기 같은 사문의 역사를 꺼냈다.
“뿌리는 동이의 한 선산에서 시작되었다 전해진다만 마땅히 그곳이 어디인지, 최초의 사조는 누구인지에 대해선 전해지는 바가 없다.”
“사조를 모른단 말씀이세요?”
“그래.”
“더구나 동이가 그 뿌리라면 오랑캐의 문파가 아닙니까? 대인.”
자신이 가졌던 의문을 동일하게 드러내는 구에게 고덕은 천천히 설명을 이었다.
“당시엔 중원 전역이 동이의 선인들에게 다스려지던 땅이라 사문의 역사는 전한다.”
“말도 안 돼!”
“말이 되고 안 되고는 네 생각이고. 사문의 기록엔 분명 그리 적혀 있었으니 잔말 말고 듣기나 해!”
고덕의 짜증에 구는 목을 움츠렸다.
“예, 대인.”
“여하간 선인들이 동이로 돌아간 때에도 사문은 남았다. 떠날 수 없었던 북서방의 백성들을 버릴 수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때에 따라 전진의 이름으로, 황교의 이름으로, 또는 백련교의 이름으로 바꿔가며 긴 세월을 부침해왔다.”
“배, 백련교면 역당의 무리가 아닙니까? 대인!”
만백성이 황제부터 노예에 이르기까지 하나로 동등하다는 교리는 원 치하는 물론이고, 대명의 치세에서도 용납될 수 없었다.
그 탓에 명의 태조인 주원장은 백련교를 원을 몰아내는 것에 이용하고 가차 없이 버렸다. 그것도 역당의 무리라는 죄목을 씌워서.
“관에서 말하는 바는 그보다 더 복잡하지만, 그냥 넘어간다.”
“하, 하지만 대인, 역당의 무리와 연결되면 구족이…….”
“거참, 네게 역모의 죄를 물을 수도 없으니 걱정하지 말고.”
“예? 아, 예…….”
자신의 짜증에 다시 고개를 움츠리는 구에게 고덕의 설명이 이어졌다.
“관에서 무어라 부르든 천 년 전부터 그들은 자신들을 천마신교라 불렀다. 천 년 전의 사조가 자신의 무림명을 따와 교를 만들었던 것이지. 그때부터였다. 무림에 사문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저기… 천마신교라면 마… 교가 아닙니까?”
“그래. 사람들이 그리 부르지. 하나, 너의 사문은 그 겉인 마교가 아니라 숨겨진 진실인 마총(魔塚)에 있다.”
“마… 총이요?”
말 그대로면 악마의 무덤이다. 그 탓인지 마총을 되뇌는 구의 표정은 잔뜩 굳어 있었다.
“명칭에 집착하지 마라. 사문의 진전을 이은 내가 악마가 아니듯 그 이름에 현혹될 필요가 없다.”
“아, 예…….”
하지만 구의 답엔 힘이 없었다. 그저 ‘예’ 하며 이해하고 넘어가기엔 마총이란 이름도, 또 스승이라 우겨 대는 검마란 이름도 너무 피 냄새가 독했기 때문이다.
그런 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덕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마총은 마도 무학의 본산이자 보고이다. 모든 마공이 그곳에서 출발했고, 발전하거나 퇴보했다. 때문에 사문의 무학을 익히면 공명이라는 것을 하게 된다.”
“공명이요?”
“그래. 원류가 아류를 찾아 반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쉬울 거다. 그렇게 공명이 일어나면 각인이 시작된다.”
“각인은 또 뭔가요?”
“원류가 깨어나며 네 몸에 인이 배기는 것이다.”
“인이 배긴다는 말씀은……?”
“몰랐던 것을 마치 너의 것처럼 깨닫게 된다. 말로는 이해하지 못해. 후일 겪게 되면 비로소 알게 될 것이니, 지금은 그리만 기억하면 된다.”
“예…….”
“다른 모든 건 들어가서 보면 알게 될 거다. 하지만 하나, 멸겁신혈에 대해선 반드시 알고 들어가야 할 게다.”
“멸겁신혈이요? 그게 뭡니까?”
구의 물음에 고덕의 입가에 하얀 미소가 걸렸다.
“이제 알게 해주지. 돌아앉아라.”
“이렇게 말입니까?”
“그래. 그리고 정신을 집중해. 아니, 그저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된다.”
그 말끝에 허리 어림에 고덕의 손바닥이 닿는 느낌이 들었다.
“뭐하세… 허억! 크아아아악!”
돌연 구의 입에서 찢어지는 비명 소리가 울렸다.
얼마 전에 기억이 났다. 멸겁신혈은 배우는 게 아니라 깨닫는 것이라는 걸.
그것도 스스로 깨우치는 깨달음이 아니라 사조의 깨우침을 내려 받는 것이란 걸, 북황에게서 얻은 내력에 그 깨달음이 섞여 있었다는 걸 고덕은 뒤늦게 알아차렸다.
그 울림이, 그 깨달음이 사조로부터 끊임없이 물려 내려왔던 적환마공에 어린 내력을 흡수하며 확연해졌다.
그것을 기반으로 고덕은 구에게 멸겁신혈을 심고 있었다.
이제 구가 마총에 들면 단지 금서로 보았던 자신과는 달리 멸겁신혈을 제대로 연성하고 나올 터였다.
그러면 그때 세상은 사문의 진정한 강자를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을 생각만 해도 고덕은 즐거웠다. 이 빌어먹을 세상이 질겁할 만한 괴물을 만들어내는 것이 말이다.
그렇게 비명을 지르는 구와 뒤에서 하얗게 웃는 고덕의 모습이 산자락 아래 머물고 있었다.
* * *
집으로 돌아온 구를 사람들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들도 찢어지는 듯한 구의 비명을 들었기 때문이다. 다만, 멀리서 두 사람의 형색을 보곤 모종의 대법을 시행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협련이 말린 탓에 쫓아가지 않았을 뿐이다.
“괜찮은 게냐?”
고길의 걱정에 구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예. 몸이 조금 무거워진 거 외에는 괜찮습니다, 어르신.”
“몸이 무거워진 것이 아니라 내력이 생긴 탓이다. 일러준 대로 소주천을 행하다 보면 오히려 개운한 것을 느낄 거야.”
고덕의 말에 사람들의 눈이 커졌다.
무언가 대법이 시행 중인 것 같다는 협련의 말을 듣긴 했지만, 무공엔 까막눈이던 구에게 내력이 생겼을 정도의 대법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까닭이다.
그런 사람들의 놀람과 관심 속에 구는 짐을 꾸렸다.
“갑자기 웬 짐이야?”
왕팔의 물음에 구가 고덕을 흘깃거리며 답했다.
“대인, 아니 사부께서 집에 갔다가 어디를 좀 다녀오라고 해서요.”
그동안 절대로 하지 않았던 사부 소리가 구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이 신기한지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한 번 몰려들었지만, 이내 고덕에게 돌아갔다.
여하간 답은 그에게서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가족이 있다니까 일단 집으로 돌려보내는 거야.”
“그야 그렇습니다마는… 한데 들러야 한다는 곳이……?”
왕팔의 물음에 고덕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사승에 관한 일이야. 하니, 관심 끊어.”
평소와 달리 말 속에 한기가 들었다. 정말 파고들어선 안 되는 느낌이 강하게 들자 왕팔은 풀 죽은 음성으로 답했다.
“예…….”
하오문을 떠난 이후에도 정보엔 항상 목이 말랐다. 이런 것도 중독이 되는지 알고 싶은 걸 알지 못하면 마음이 불안하거나 조급해지기 일쑤였던 것이다.
그래도 알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안다. 그 탓에 이를 악물고 참았다.
그런 왕팔을 바라보던 고덕이 툭하니 내뱉듯 실마리를 던져줬다.
“사문의 무공을 이으러 비동으로 가는 거다.”
‘비동!’
검마 정도의 극강 고수를 배출할 만큼 대단한 사문의 비동이란다. 무언가 커다란 것이 숨겨져 있을 것이 확실했지만, 더 이상 파고들면 정말로 위험해진다는 것을 짐작한 왕팔은 궁금증을 애써 접어야 했다.
그런 왕팔의 시선을 받으며 구는 고길 내외와 그동안 함께 지내온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고했다.
“이것을 순무에게 전하면 너와 가족에게 자유를 줄 것이다.”
고덕이 내미는 서찰을 받아든 구는 놀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 자유요?”
“그래. 면천을 해야 사문의 맥을 이을 게 아니냐.”
“대인! 아니 사부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코가 땅에 닿을까 걱정일 정도로 크게 읍을 해 보이던 구는 고덕의 손짓에 몇 번을 뒤돌아보며 그렇게 떠나갔다.
따로 노자를 챙겨 주진 않았지만 걱정은 없었다. 협련과 묵린이 은자를 쥐여 주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인연이 떠나가고 있었다.
비동의 특성상 머무는 시간은 좀처럼 짐작할 수 없었다. 어쩌면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 다시 만날 수 없을지도 몰랐다.
그러고 보니 비동으로 갈 때 가족과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르니 작별 인사를 확실히 하라는 말을 미처 해주지 못했다.
하지만 고덕은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 사실을 알면 비동으로 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여하간 고덕은 제자를 그렇게 떠나보냈다.
그 이후로도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별로 정을 주지도 않았건만 제자의 빈자리는 생각 이상으로 고덕의 마음을 공허하게 만들었다.
그 탓에 자꾸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럴수록 연화의 생각도 자주 일었다.
그것이 신경 쓰였는지 고길은 왕팔을 조용히 불렀다.
“일전에 찾아왔던 판관 나리 말이다.”
“아! 호 판관 말씀이군요, 아버님.”
호철랑은 고덕이 남궁세가를 치기 위해 홀연히 자취를 감춘 뒤 소흥 왕부로 돌아갔다.
그녀에게 허락된 시간이 다 되기도 했지만, 짧은 시간 안에 고덕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직감한 까닭이었다.
“그렇지. 그 판관 나리, 혹시 연락은 되느냐?”
“예. 한데 왜……. 혹 대협 때문이십니까?”
“그래. 덕이가 구를 보내고 외로움을 많이 타는 것 같더구나. 해서 그 판관, 아니 처자가 오면 어떨까 하고…….”
판관이 필요한 게 아니라 여인이 필요하다는 뜻을 처자란 호칭에 담는 고길을 바라보며 왕팔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하면 제가 연락을 한번 넣어볼까요?”
“오냐, 네가 한번 청을 넣어보거라. 다녀가면 어떻겠느냐고 말이다.”
“알겠습니다, 아버님. 하면 전 곧바로 복안에 가서 전서를 띄우고 오겠습니다.”
“오냐, 고생하거라.”
“고생은요. 다녀오겠습니다.”
“오냐오냐.”
그길로 집을 나서는 왕팔을 배웅한 고길의 시선이 툇마루에 앉아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는 고덕에게 향했다.
“쯔쯔, 사람으로 인해 든 병은 사람으로 고치는 것을…….”
고길의 걱정 어린 음성이 마당을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 * *
왕부들은 움직임이 없었다. 일전에 균사 왕부에 손을 뻗쳤던 모종의 세력도 지금은 움츠리고 있는지 잠잠했다.
그 탓에 중원은 오랜만의 평화기를 맞았다. 사람들은 평안했고, 농사는 풍작이 들었다.
삶의 고단함이 줄고, 굶주리지 않게 되자 백성들의 얼굴에 오랜만에 웃음이 돌아왔다.
그런 백성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호철랑은 이런 상태가 지속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왕부나 황실의 생각은 달랐다. 상황의 고착은 권력의 분할이 지속된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특히 강대한 권력이 나눠진 왕부들의 멸절을 강력히 희망하는 황실은 겉으론 조용해도 물밑으로 상당히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중 황실의 첨두가 된 소흥 왕부에서 직접 지배권의 통일을 위한 전쟁 계획을 세워야 했던 호철랑은 요즘 들어 백성들의 안온한 삶과 지배자들의 권력욕 사이에서 혼란을 겪고 있었다.
왕팔의 서신이 도착한 것은 그 혼란이 가장 극심해지던 시기였다.
그것이 호철랑의 무단 외유로 이어졌다.
잠시 외유를 다녀오겠다는 서찰을 남겼다고는 하나, 일전의 경험이 있었던 소흥 왕부는 그대로 앉아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 탓에 왕부의 병력만이 아니라 동원 가능한 모든 병력이 일제히 호철랑의 수색에 동원되었다.
소흥의 성문은 물론이고 절강성 각지, 요소요소에 설치된 모든 관아와 성문에 호철랑의 용모파기가 뿌려졌다.
하지만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호철랑의 모습을 보았다는 보고는 올라오지 않았다.
그렇게 소흥 왕부가 발을 동동 구르는 시기, 호철랑은 성장을 한 채 표국의 마차를 이용해 복건성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여정의 중간에 잠시 들른 객잔에서 한 청년이 호철랑에게 다가왔다.
“잠시 실례하겠소, 소저.”
갑작스런 음성에 고개를 드니, 훤칠하게 생긴 청년이 묻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일이신가요?”
“호위해온 표사가 준비를 갖추는 것을 보니 낙안탕산을 넘으시려는 듯이 보입니다만…….”
청년의 말에 호철랑의 시선이 경호 무사 겸 마부인 표사에게 향했다.
하지만 표사는 객잔 주인에게 여행에 필요한 물품을 받아 챙기는 데 바빠 미처 자신에게 청년이 다가온 줄도 모르고 있었다.
결국 시선을 다시 청년에게 돌린 호철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곳을 넘어간다고 들었습니다. 하온데 왜 그러시는지요?”
“아직 소문을 듣지 못하신 모양입니다만, 낙안탕산엔 얼마 전부터 녹림의 산채가 들어 패악을 떨고 있습니다.”
사패련이 활동을 재개하면서, 사패련의 중심축 중 하나인 녹림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문제는 오랜만에 기지개를 켠 탓인지 그 활발함이 도가 지나쳐 간혹 감내할 범위를 벗어나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문제가 된 곳들 중 하나가 바로 낙안탕산이었다.
“그럼 낙안탕산을 넘지 못한다는 말씀인가요?”
“복건으로 내려가는 관도가 그곳 하나뿐이니 완전히 막히지는 않지요. 하지만…….”
“하지만 뭔가요?”
“그것도 무력을 제대로 갖춘 남자들에 한합니다. 여인네들은 당분간 넘지 못한다는 것이 사실이지요.”
자신의 말에 호철랑의 아미가 찌푸려지자 청년이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서인지 서둘러 말을 이었다.
“산적들이 산을 넘는 여인들을 납치하기 때문입니다. 벌써 여러 차례 납치가 벌어졌기에 작금엔 여인들이 산을 넘지 않는 것이 불문율처럼 되어버렸답니다.”
“한데도 관군이 그냥 둔단 말인가요?”
“일차 토벌은 있었습니다만, 오히려 관군이 패해 크게 피해를 입었다고 들었습니다.”
청년의 말에 호철랑의 아미가 조금 더 찌푸려졌다. 절강이면 소흥 왕부의 관할이었기 때문이다.
최근에 황실의 지원에 힘입어 우군도독부를 재건하고 있는 탓에 소흥 왕부의 병력 관리가 소홀해졌다곤 하나, 관도의 통행이 지장을 받을 정도는 아니다.
그럼에도 이런 문제가 생겼다는 건 역시 지역 관리들의 일 처리가 그만큼 어설펐다는 이야기였다.
그런 속내를 알지 못하는 청년은 호철랑의 표정 변화를 오해했다.
“정말이오. 내 소저를 붙들고 없는 이야기를 지어낼 이유가 뭐겠소.”
“아, 미안합니다. 다른 생각 때문이었어요.”
“그렇다면 다행이구려. 그나저나 괜찮다면 우리와 동행하는 건 어떻겠소?”
청년의 말에 호철랑의 표정이 변했다. 역시 이 말을 하기 위해 다가온 거냐는 의미가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그에 청년이 당황한 표정으로 손을 저었다.
“이런, 또 오해를 산 모양이군요. 하지만 달리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우리도 낙안탕산을 넘어야 하고, 또 공교롭게도 일행 중에 여인이 있으니 함께 가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이야기를 꺼낸 것뿐입니다.”
청년의 말에 비로소 표정을 푼 호철랑이 미안한 얼굴로 물었다.
“일행에 여인이 있다고요?”
“예. 저기…….”
말을 하다 말고 뒤를 가리키는 청년의 손끝을 따라가니 일단의 젊은이들이 보였다.
그들 속엔 청년의 말대로 여인들도 셋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이쪽을 바라보다 청년이 자신들을 가리키자 손을 흔들어주기까지 했다.
청년도 그렇고 다른 이들도 모두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여인들도 다르지 않아 그들 중 둘은 분명 무기를 가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객잔에 앉아서도 무기를 몸에서 떨어트리지 않는 이들. 그런 이들은 한 부류뿐이다.
“혹시 강호인들이신가요?”
“아차, 이런 실수가! 긴장한 탓에 제 소개가 빠졌군요. 전 모용세가의 모용휘라 합니다.”
그냥 듣기에도 자부심이 가득 든 음성이었다. 하긴 백도 팔대세가 중 하나인 모용세가의 사람이니 다른 사람 앞에서 자부심이 없을 수 없다.
더구나 모용휘는 모용세가의 차기 가주 자리가 약속된 소가주였다. 그런 사람이 자부심이 없다면 더 웃긴 이야기일 것이다.
문제는 호철랑이 모용세가는 알아도 모용휘란 이름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반갑습니다. 전… 장춘에 있는 호가의 여식입니다.”
“아! 호 소저셨군요. 어찌 함께 움직이시는 것이…….”
저만치 마음에 든 여인을 길동무로 끌어들이기 위해 애를 쓰는 모용휘를 바라보는 젊은이들은 그가 성공할지, 아니면 퇴짜를 맞을지 내기를 하고 있었다.
“휘가 한눈에 반할 만한 미색이긴 하군.”
“그러게 말입니다. 그나저나 전 성공에 걸겠습니다.”
당이철의 말에 그의 누이인 당호란은 냉랭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난 실패할 거라고 봐.”
그녀의 말에 곁에 앉아 있던 고이현이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언니가 실패하길 바라는 건 아니고?”
“그, 그건 아니야. 무슨 말을!”
당황하는 당호란의 모습에 동생인 당이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님이 휘 형이 실패하길 바라다니, 그 무슨 말이오? 고 소저.”
“글쎄요…….”
동생의 물음에 답은 않고 빙긋이 미소만 짓고는 자신만 바라보는 고이현에게 당호란이 눈을 째렸다.
“동생, 정말 이러기야…….”
“뭐, 나야 아쉬울 게 없는걸.”
얄밉게 혀를 내미는 고이현을 팽연이 말렸다.
“그만해, 동생. 저러다 당 언니 삐치면 뒷감당을 어찌하려고.”
“호호호, 그런가?”
세 여인의 대화를 듣고 있던 사내들 중 자색 영웅건을 맨 청년이 나섰다.
“팽 소저의 말이 옳다. 그만하거라.”
“피- 오라버니는 그저……. 다른 사람에게 눈이나 팔고 있는 당 언니에게 그렇게 목매봐야 소용이 없다고요.”
고이현의 말에 오라비인 고일천은 물론이고, 당호란의 얼굴도 낭패감으로 물들었다.
“어허, 그 무슨 망발을!”
고일천의 나무람에 고이현은 다시금 혀를 내밀어 보였다.
“저저저…….”
그 모습에 안절부절못하는 고일천의 어깨를 덩치가 커다란 청년이 붙잡았다.
“자네도 그만하게. 고 소저의 장난기야 자네가 더 잘 알면서 매번 그리 발끈하면 어찌하는가?”
“그래도 할 말과 안 할 말은 가려야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하나, 이 우형의 생각으론 방금 고 소저가 한 말이 쓰리긴 해도 자네에겐 반드시 필요한 말 같은데.”
“형님!”
일행 중에 가장 나이가 많아 맏형의 대우를 받는 팽호량의 말에 고일천이 발끈하자, 젊은이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크하하하!”
“호호호!”
그들의 밝은 웃음소리에 객잔이 다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그런 이들을 바라보던 호철랑이 눈앞의 청년, 모용휘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경호를 담당한 표사분께 여쭤봐야 하겠습니다만, 별다른 반대가 없다면 그리하지요.”
호철랑의 답에 모용휘는 한껏 들뜬 표정이 되었다.
“반대할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수가 늘면 더 안전해지고, 함께 가는 여인들이 있으니 여행의 편의도 늘어날 것을요. 그도 반드시 동의할 겁니다.”
모용휘의 설레발에 호철랑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예. 저도 그리 생각되긴 합니다만, 실제 일을 하는 사람의 말을 들어보아야 결정을 할 수 있겠지요.”
“알겠습니다. 하면 준비를 하고 기다리겠습니다.”
안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지 준비를 갖추겠다는 모용휘에게 호철랑은 가만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 모습에 한껏 미소를 지어 보인 모용휘가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가자, 걱정스런 눈빛의 표사가 다가왔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소인이 그만 자리를 너무 오래 비우는 바람에…….”
표사의 사과에 호철랑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 덕에 좋은 정보를 얻었으니까요. 그나저나 저 소협의 말에 의하면 낙안탕산의 길이 위험하다는데, 사실인가요?”
“예. 객잔 주인에게 들으니 녹림의 산채가 극성을 떠는 모양입니다.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아무래도 함께 넘어가는 일행을 구해야 할 듯합니다.”
“그렇다면 잘되었군요. 그렇지 않아도 저분들이 함께 가길 청하시는데, 동행하면 어떨까 합니다.”
호철랑의 말에 표사가 청년들을 살피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모두 강호인들 같긴 합니다만, 신분이…….”
“말을 전하러 온 소협이 모용세가분이라 하더군요. 이름이 모용휘라던가…….”
순간, 표사의 얼굴에 놀람이 떠올랐다.
“정녕 모용휘라 했습니까?”
“예. 그리 소개를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안심할 수 있습니다.”
“어째서인가요?”
“모용휘라면 신주벽옥랑(迅走碧玉郞)이라 불리는 신진 고수로 모용세가의 소가주인 자입니다. 믿을 만한 사람이지요.”
“신주벽옥랑?”
“새롭게 강호를 달리는 잘생긴 사내. 뭐, 대충 그런 의미지요.”
무림명을 풀어주며 슬며시 미소를 짓는 표사의 얼굴엔 마음이라도 주었냐는 의미가 슬쩍 드러났다.
그런 표사의 의중을 모른 척하며 호철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저자가 그 신주벽옥랑이라는 증거가 없지 않나요?”
호철랑의 물음에 표사가 걱정 말라는 표정을 지었다.
“일행 중 한 명의 얼굴을 압니다. 적어도 그 앞에서 거짓을 말하진 않을 테니, 자신이 모용휘라 밝혔다면 그자가 확실할 겁니다.”
“누굴 알고 있다는 거죠?”
“저기 자색 영웅건을 두른 소협이 보이십니까?”
“예. 백색 장삼을 걸친 이를 말씀하신다면…….”
“맞습니다. 그가 바로 절강고가의 소가주입니다. 절강팔신무(浙江八新武)라 불리는 절강 무림의 신진 고수들 중 한 명이지요. 가전 검법을 꽤나 완숙하게 익혔다는 평가입니다.”
표사의 설명이 대단히 세세한 편이었다.
절강고가의 소가주인 고일천은 신무쾌검(新武快劍)으로도 불린다.
절강고가의 가전 검법인 일섬검형을 완숙의 단계로 익혀 절강성 신진 고수들 중에선 최고의 쾌검으로 꼽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안심해도 된다는 말이군요.”
“예. 좋은 동행을 얻은 듯합니다.”
“다행스러운 일이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하면 제가 의향을 전할까요?”
표사의 물음에 고개를 저은 호철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에요. 아무리 저쪽에서 먼저 손을 내밀었다지만 이쪽이 부탁을 하는 입장인데 직접 가는 것이 옳겠지요.”
“그러시다면…….”
고개를 조아리며 물러나는 표사를 뒤에 달고 호철랑이 모용휘 일행에게 다가갔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아! 예, 호 소저. 어찌, 결론은 난 것입니까?”
반색을 하는 모용휘에게 호철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표사께서도 동행을 구하는 것이 좋겠다는군요. 더구나 여러분은 좋은 동행이라고도 하고요.”
그 말을 하는 호철랑의 시선이 모용휘를 떠나 자신에게 닿자, 그 시선의 의미를 알아차린 고일천이 표사에게 물었다.
“나를 아시오?”
“예. 표행을 나갔다가 세가에서 몇 번 뵈었습니다.”
“표문(?文)이… 구주 표국이구려.”
“예, 소협.”
구주 표국은 절강고가가 위치한 구룡산에서 지척인 구주에 본점을 둔 표국이다.
국주가 무당의 속가 제자로, 절강에선 꽤나 번창하고 있는 표국 중 하나였다.
“그렇구려. 함께 가게 되었으니 여정이 끝날 때까지 잘 부탁하겠소.”
강호의 이름 높은 무가의 소가주가 일개 표사에게 건네는 말로는 과분한 인사였다.
그것을 아는지 표사의 허리는 부러질까 걱정일 정도로 깊숙이 숙여졌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소협.”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자 모용휘는 서둘러 일행을 소개했다.
“이쪽은 우리 모임의 수장이신 팽 형님이십니다.”
모용휘의 소개에 팽호량이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취했다.
“팽호량입니다. 수장이란 절 놀리려 붙이는 말이고, 그저 이 친구들 중에서 가장 노땅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의미이니 크게 괘념치 마십시오.”
팽호량의 소개에 작게 미소 지은 호철랑이 고개를 숙였다.
“반갑습니다. 길림에 자리한 호가의 여랑이라 합니다.”
“이쪽은 저와는 막역지우인 고가 녀석입니다.”
“아주 이름도 다 생략이구나. 환영합니다, 호 소저. 절강고가의 고일천입니다.”
“반갑습니다.”
“자- 이쪽은 사천당가의 당이철, 저분이 당 동생의 누이이신 당호란 소저, 그리고 저분은 팽 형님의 동생이신 팽연 소저, 그리고 이 아가씨가 고가 녀석의 누이동생입니다.”
“고이현이에요. 그저 현이라 부르시면 돼요. 잠시지만 일행이 되신 걸 환영해요.”
구김살 하나 보이지 않는 고이현의 밝은 음성에 호철랑은 자신까지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더구나 고이현은 마치 어디선가 보았던 사람처럼 친숙한 느낌마저 들었다.
“잘 부탁해요, 이현 소저.”
“에이~ 나이도 저보다 위이신 거 같은데 그냥 현이라 부르시라니까요.”
고이현의 말에 호철랑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 그래요, 혀, 현 소저.”
“소저는 빼고요.”
“그, 그래, 현…….”
“호호호, 그러니 얼마나 편해요. 자- 인사도 끝났겠다, 우리 앉죠. 호 언니도 앉으세요.”
고이현의 설레발에 사람들이 자리에 앉자 팽호량이 물었다.
“저희는 내일 오전 일찍 출발할까 합니다만, 괜찮으시겠습니까?”
아직은 해가 남아 있었지만,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는 시간이니 산을 넘다 보면 해가 저물 것이다. 녹림이 활개를 친다는 곳을 굳이 밤을 도와 넘어갈 필요가 없으니 호철랑도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없습니다. 그리하시지요.”
“그럼 잘되었군요.”
두 사람의 이야기가 잘 끝나자 모용휘가 나섰다.
“자- 그동안 술이나 한잔합시다.”
“술, 좋지!”
고일천의 맞장구에 당이철이란 이가 점소이에게 술과 안주를 주문했다.
“백주 몇 병 하고, 안주는 기름지지 않은 것으로 부탁하지.”
당이철의 말에 고개를 숙이는 점소이를 호철랑이 불러 세웠다.
“오늘 술은 좋은 동행을 만난 기념으로 제가 사겠습니다.”
호철랑의 말에 청년들은 물론이고, 새침한 표정인 당호란을 뺀 두 아가씨들마저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 모습에 미소를 지은 호철랑의 주문이 이어졌다.
“가장 좋은 술이 뭔가요?”
“십 년 묵은 여아홍이 있습니다만…….”
“그럼 술은 그거로 하죠. 안주는 당 소협의 말대로 기름지지 않은 것으로 정성껏 부탁해요.”
“예, 아가씨. 금방 대령하겠습니다요.”
비싼 술을 시켜 준 까닭인지 반색을 한 점소이가 물러가자 탁자엔 작은 열기가 떠올랐다. 이런 객지에서 십 년이나 묵은 여아홍을 맛보리라곤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거 너무 과하게 쓰시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게 미안했던지 팽호량이 걱정스레 물어오자 호철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좋은 인연을 만난 흥분에 들떠 어쭙잖은 처신이 된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아닙니다. 마음이 그렇다면 비싼 술이 아니라 좋은 술이 되는 것이니 저희에겐 좋은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팽호량의 호탕한 답에 호철랑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 이해해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감사는 저희가 해야죠. 안 그러냐, 천아.”
모용휘의 말에 고일천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여아홍 아니냐, 여아홍. 그것도 십 년 묵은. 흐흐흐.”
생각만 해도 좋은지 고일천은 침까지 흘릴 기세였다. 그 덕에 서먹하던 좌석은 웃음으로 가득해졌다.
“하하하!”
“호호호!”
청춘 남녀들의 밝은 웃음이 마치 아침에 떠오르는 햇살처럼 어두워져 가는 객잔 안을 가득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