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83장 (84/129)

제83장. 정천맹(正天盟)-오판하다

정천맹의 입장에선 단리세가가 멸문에 가까운 타격을 받았다는 것은 일견 즐거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 이전에 당한 남궁세가의 피해나 현판을 스스로 부러트린 안휘협가의 결정은 대단히 치명적인 결과였다.

그 둘을 잃으면서 정천맹이 안휘에 확보한 발판이 사실상 모조리 깨어진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둘 다 검마란 항거 불능의 존재에게 당한 일이란 점에선 아쉬워할 수조차 없는 일이긴 했지만, 손실은 분명했다.

더구나 현판을 스스로 부러트린 안휘협가의 결정은 거의 봉문과 다름없었다.

“검마가 스스로 이름을 꺾는 조건이었다고는 합니다만…….”

군사 제갈천의 말에 신임 정천맹주에 오른 독괴 당조성의 검미가 찌푸려졌다.

전대 맹주였던 권황을 비롯한 여러 장로들이 복안 혈사에서 명운을 달리한 까닭에 정천맹은 한동안 지도부의 부재로 곤혹을 치러야 했다.

이후 각파에서 장로들을 파견하고 독괴에게 맹주를 맡긴 연후에 간신히 기능을 회복하고 있었지만, 독괴가 강력한 주축 세력인 소림의 사람이 아니라는 점에서 맹주의 권위는 상당히 깎여 버린 셈이었다.

“이름을 꺾었다는 게 허울만 잔뜩 씌웠지, 실제적 손해는 없는 게 아닌가?”

틀린 말은 아니다. 검마의 이름이 꺾였다는 것은 결국 안휘협가의 배덕을 눈감고 덮어준다는 일종의 면죄부인 셈이니까 말이다.

다시 말해 검마는 아무런 손해가 없다. 그저 ‘성격 한번 죽였다.’ 정도랄까.

물론 명예가 모든 것이라 말하는 백도인들에겐 커다란 명분이 되겠지만, 마도인인 검마에겐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었다.

그런 까닭에 맹주의 지적에 제갈천은 별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런 제갈천에게서 슬쩍 시선을 돌린 독괴가 물었다.

“그나저나 불연대의 성취는 어떠한가?”

“목표치에 팔 할 정도 접근했습니다.”

“소림이 하도 장담을 하기에 그러려니 하고 있긴 하네만, 정말 기대만큼 해낼 수 있겠는가?”

“각자에게 대환단이 한 알씩 지급된 이들입니다. 또한 그들의 복용을 각파에서 보내주신 장로분들이 도왔고 말입니다. 현재 평균 경지가 절정을 넘어갑니다.”

“내력이 절정의 수준을 넘어간다고 다 절정이던가? 깨달음이 따라가야지, 깨달음이!”

독괴의 지적에 제갈천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제갈가의 석학들이 붙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그 까닭에 오성이 뛰어난 이들을 가려 뽑은 것이고 말입니다. 그런 연유인지 깨달음의 속도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드러난 고수, 권황과 숨겨졌던 고수, 철존이 모두 복안 혈사에서 꺾인 소림이다. 상처 입은 자존심도 문제였지만 거대한 소림을 떠받들 기둥의 부재는 더욱 심각한 사안이었다.

결국 소림은 절대 고수의 부재를 다수의 절정 고수로 채우려는 시도를 하게 된 것이다.

물론 소림의 대적이 된 검마의 척결이 우선 과제가 되었지만 말이다.

“흠… 결국 그들의 완성을 기다려야만 한다는 말인데. 무당과 팽가는 아직인가?”

“무당은 생각을 고쳐먹을 마음이 전혀 없어 보입니다. 문제는 팽가인데, 무슨 생각인지 도왕이 결정권을 틀어쥐고 고개만 젓고 있습니다.”

제갈천의 말에 독괴가 혀를 찼다.

“쯔쯔… 무림의 명숙들이 어찌 그리 자파의 안위에만 신경을 쓰는 겐지…….”

“맹주께서 서신을 한번 보내보심이 어떻겠습니까?”

“그 인사들이 내 말에 꿈쩍이나 하겠는가? 괜히 나서 봐야 내 체면 깎아 먹고, 맹의 이름에 똥칠이나 하는 일이 될 게야.”

독괴의 말이 틀린 것이 아니기에 제갈천도 다시 권하지 못했다.

무당이나 팽가 모두 독괴 이상의 고수를 보유한 곳이기에 독괴란 이름이 위협은커녕 압박도 되지 않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하면 그냥 이대로 기다려야만 합니까?”

“그러니 답답한 게지. 에잉…….”

독괴의 짜증 어린 음성에 제갈천은 그저 고개만 조아릴 뿐이었다.

솔직히 당금 상황에선 검마가 정천맹으로 쳐들어온다고 해도 막을 능력이 없었다.

자신들이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는 만큼, 힘이 갖춰지는 그때까지 검마가 지금처럼 기다려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것이 현실이었다.

독괴는 그것이 못마땅한 것이다. 그도 사람의 기준을 벗어났다는 강자였기에 눈앞에 버티고 선 검마란 절벽이 더 못 견디게 답답한 것이었다.

그런 정천맹에 한 사람이 들어서고 있었다.

“배, 백부님!”

자신을 찾아온 사람을 확인한 모용경은 기절할 듯이 놀랐다.

이미 사십 년 전에 죽었다고 믿었던 이가 귀환한 일이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많이 컸구나.”

몇 년 전에 환갑을 지난 사람이 들을 말은 아니었지만, 상대의 나이와 자신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그리 말하는 걸 잘못했다 할 수 없었다.

“어, 어찌 되신 겁니까? 조부님께선……?”

“백교의 난에 나가 죽지 않았느냐, 그 말인 게냐?”

혈교의 뒤를 이어 나타났던 백교는 상당히 잔혹한 집단이었다. 당시의 마교가 그들과 싸워 반 토막이 난 채 칩거해야 할 정도였으니, 그들의 위세가 어떠했는지는 굳이 따지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문제는 그렇게 마교를 둥지로 밀어 넣은 백교가 중원으로 손을 뻗었다는 것이었다.

결국 정천맹이 나섰고, 양측은 사 년이 넘는 시간을 온통 피로 얼룩진 세월을 보내야 했다.

종내엔 정천맹의 고수들이 백교의 수뇌부가 이동하는 정보를 입수해 급습했고, 다행히 백교의 교주를 비롯한 수뇌들을 주살하며 백교의 난은 막을 내렸다.

하지만 당시 동원되었던 정천맹의 고수들 중 태반 이상은 돌아오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 안엔 모용세가의 당대 가주였던 여의검존(如意劍尊) 모용제현이 들어 있었다.

무림명에서 알 수 있듯이 모용제현은 당시의 십대고수 중 삼존의 일인이었다.

그의 실종 이후 남궁세가의 남궁호군이 화경의 벽을 깨고 비어 있던 검존의 자리를 차지했던 것이다.

“소, 소질의 말씀은…….”

당황하는 모용경을 바라보며 빙긋이 웃은 모용제현이 말을 이었다.

“그래. 사실 죽을 만큼 커다란 상처를 입었었다. 하지만 아직 죽을 날이 되지 않았던 모양인지 선인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하온데 왜 돌아오지 않으신 겁니까?”

“정신을 차리고 몸을 추슬렀을 땐 준후가 가주를 이어받은 상태였지. 형이 돼서 아우의 앞날을 밟을 수는 없었다.”

가주의 갑작스런 유고. 그에 이어진 세가 내 권력 쟁탈은 첨예했다.

하지만 남아 있던 모용제현의 아들들은 그 싸움에서 도태되지 않을 만큼 뛰어나지 못했고, 결국 가주의 자리는 전대 가주의 동생인 모용준후의 차지가 되었다.

다행이라면 그렇게 밀려난 형님의 자식들을 모용준후가 내치지 않고 요직에 기용하는 대범함을 보여 주었다는 것이다.

“그래도… 살아 계시다는 연락이라도 주셨다면…….”

“세가에 혼란이 있었겠지……. 밖에 있으나 안에 있으나 모용의 성을 쓰니 그런 건 바라지 않았다.”

절절한 애정이 묻어나는 그의 말에 모용경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권력을 차지한 모용준후가 자신의 아버지였고, 그 덕에 자신의 형이 당대의 가주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모용경의 침묵에 희미하게 미소를 지은 모용제현이 물었다.

“준후는 잘 있는 게냐?”

“예. 아직은 건강하십니다.”

내공을 익힌 덕이다. 그 탓에 백수가 코앞이지만 건강했다. 한데 백부를 보니 그 이상이다.

역시 인간의 범주를 빗겨난 경지에 오른 덕인가 싶었다.

“다행이로구나. 언제 한번 보러 가봐야겠다.”

“소식을 들으시면 뵈올 날을 학수고대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마운 게지. 그나저나 당가의 사람이 맹주를 차지했다고?”

“예, 백부님.”

모용제현이 활동할 당시의 독괴는 막 기성세대로 진입한 절정의 고수였다.

물론 팔대세가의 인연으로 안면이 있었겠지만, 모용제현의 입장에선 얼굴도 가물가물한 새카만 후배일 따름이었다.

“한번 보자고 전해줄 수 있겠느냐? 검마로 인해 흔들리는 백도를 보며 나와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기왕 나왔으니 한 팔을 거들어야 할 터. 맹주에게 미리 말을 넣어놓는 것이 도리겠지.”

모용제현의 말에 모용경의 고개가 깊숙이 숙여졌다.

“곧바로 전하겠습니다, 백부님.”

기쁜 표정으로 뛰어나가는 모용경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모용제현의 표정은 인자함 그 자체였다.

하지만 고개를 돌리는 그의 눈 속을 순간적으로 채우고 사라지는 한광엔 진득한 살기가 감돌았다.

모용경의 전갈에 독괴는 모용제현을 버선발로 마중했다.

그 옛날 자신의 우상 중 한 명을 다시 마주한 독괴는 어린아이처럼 흥분해 들떠 있었다.

“이리 뵈오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대협.”

천하의 독괴가 대협이라 부른다. 그 모습에 한쪽에 배석해 있던 모용경의 표정에 뿌듯함이 가득하다.

모용제현의 실종 이후 세가는 제대로 된 절대 고수를 배출하지 못해왔다.

오죽하면 사십 년이란 세월 동안 제하이십사강에 이름을 올릴 만한 고수조차 배출하지 못한 것이다.

그렇게 쌓인 울분과 부끄러움이 모용경은 이 자리에서 모두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런 모용경의 흥분 속에 독괴와 모용제현의 대화가 이어졌다.

“말을 들었습니다. 대협께서 힘을 보태주신다고요?”

“백도의 위험을 어찌 모른 척하겠소이까? 늙어 삭은 몸일지나 한 팔 거들고자 하오이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대협이 도움을 주신다면 정천맹과 백도의 앞날에 커다란 힘이 될 것입니다.”

입에 발린 말만은 아니었다. 지금도 은연중에 뿌려지는 기세는 독괴 자신을 간단히 뛰어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긴 사십 년 전에도 지금의 자신보다 윗줄에 있던 인사다. 지난 세월이 그에게 어떤 신천지를 열어주었을진 감히 상상해볼 수 없었다.

“그리 말해주니 고맙구려. 하면, 앞으로 어디에 힘을 실어주리까?”

모용제현의 물음에 미처 생각해놓지 못한 독괴의 얼굴에 당황감이 어렸다.

그 모습에 빙긋이 미소를 지은 모용제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소문에 들으니 불연대라는 이름으로 청년 고수들을 키우고 있다고요?”

“아! 예, 맞습니다. 소림이 준비하고 제갈세가가 키우고 있지요. 솔직히 정천맹에서 머물 거처만 내주고 있을 뿐, 크게 도움을 주고 있진 못합니다.”

“하면 내가 그들을 좀 돌보면 어떻겠소?”

화경의 고수가 직접 젊은 무사들의 진척을 돌봐준다는 말이다. 그 말인즉 가르침을 내리겠다는 뜻과 같았다.

소림의 배려와 제갈세가의 지도, 거기에 사십 년 전에 이미 화경에 들어섰던 절대 고수의 가르침이라면 더할 나위가 없었다.

“그리만 해주신다면 이 당 모가 크게 감사를 드리겠습니다.”

독괴의 답에 모용제현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면 그리하십시다. 내 그들에게 작은 깨달음을 나누어주지요. 한데 제갈세가의 지도하에 있다는데, 괜한 참견이 되지는 않을지 모르겠소이다.”

모용제현의 말에 배석해 있던 제갈천의 고개가 황급히 저어졌다.

아무리 뛰어난 석학들이라도 이미 길을 걸어가 본 선구자의 경험엔 비할 바가 아닐 터다.

필요하다면 모용제현의 가르침에 따라 제갈세가가 제시한 훈련 계획을 완전히 바꿀 의향도 있었다.

“당치 않으십니다. 차라리 이참에 대협께서 그들의 교육을 담당해주신다면 소림과 정천맹, 나아가 백도가 크게 감사할 것입니다.”

틀린 말이 아니다. 독으로 화경을 넘어선 독괴인 탓에 그들에게 가르침을 베풀 수 없었다. 그것을 소림도, 정천맹도 크게 아쉬워하던 참이다.

하지만 정통 무공으로 화경의 벽을 넘어선 모용제현이라면 내공의 원류가 다름도, 사용하는 무공의 상이함도 문제가 될 게 없었다.

“그렇다니 모자라나 노부가 한번 나서봄세.”

그렇게 소림의 희망, 정천맹의 기둥이 갑자기 돌아온 모용제현의 손에 쥐어졌다.

사람들은 그 소식에 환호를 보냈을 뿐, 그의 갑작스런 등장을 의심하는 이는 없었다.

불행하게도…….

* * *

그즈음, 안휘협가에서 물러난 단리세가는 재건에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사방에 방을 붙여 새롭게 무사를 모집하고, 능력 있는 낭인들을 끌어들이려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깎여 나간 전력이 너무 컸기에 재건은 더디게 이루어졌다.

간혹 단리세가가 보유한 이권을 탐낸 사도나 마도 문파와의 다툼도 벌어졌다.

마도 문파야 고덕이 모습만 보여도 꽁지가 빠지게 달아나기 급했지만, 사도의 문파들은 꽤나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안창의 반군이 무너지며 다시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사패련 탓인지 사도 문파들의 활동이 적극적으로 변한 것이다.

그 영향인지 단리세가의 이권을 탐낸 사도 문파들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강호에서 갈등이 깊어지면 당연히 따라오는 것은 실력 행사다.

단리세가의 안방인 숙주에선 아직 충돌이 벌어지지 않았지만, 앞마당인 고연에선 진패문이란 사도 문파와 심각한 충돌이 일어났다.

단리세가 고연 분가의 무사 스물이 상하고 여섯이 죽었다. 진패문은 그보다 큰 손실을 입었지만, 남아 있는 전력은 단리세가가 명함도 못 내밀 만큼 많았다.

결국 지난 피해를 빌미로 진패문의 주력이 고연으로 들어왔다.

분가의 무사들과 본가에서 지원 나간 서른의 무사가 극렬하게 저항했지만, 모두가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분노한 단리세가가 무사들을 추가로 내보냈으나 힘이 달렸다. 그렇게 보내진 본가의 무사 오십이 죽거나 상해서 돌아온 것이다.

분기충천한 단리태천이 남아 있는 십자도단을 이끌고 나가겠다는 것을 가주인 단리천패가 말렸다.

“어찌 이대로 참으라 하시오? 가주!”

“나가도 소득이 없기 때문입니다, 백부님.”

“설마하니 우리가 그따위 덜떨어진 사파 나부랭이에게 패하기라도 할 것이란 말씀이외까?”

단리태천의 분기에 가주는 무거운 표정으로 답했다.

“예. 그것이 두렵습니다.”

“가주!”

당황한 표정으로 자신을 부르는 백부에게 단리천패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이제 남은 무사라고 해봐야 백이 조금 넘습니다. 개중에 성한 이들을 추리면 오십도 되지 않지요. 항상 선봉에 섰던 십자도단의 경우엔 서넛이 고작일 겁니다.”

고덕이 개입하기 전에 벌어진 안휘협가에서의 싸움 때문이었다. 그 탓에 상한 이들도, 죽은 이들도 더 늘어났다.

가주의 말에 단리태천의 입이 다물렸다. 그런 상황을 몰라서 했던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면서도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단리의 자존심이, 사조들에 대한 부끄러움이 그의 몸을 들썩이게 만들었던 것이다.

“하나 가주, 이대로 당하고만 있으면 문제는 더 커질 게요.”

“압니다. 고연은 이제 시작일 뿐이겠지요.”

“알면서도 묵과하겠단 말씀이시오?”

“그것이 현재의 단리세가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가주!”

“참으십시오, 백부님. 지금은 참고 힘을 길러야 합니다. 빼앗긴 이권은 다시 찾아오면 됩니다. 하지만 우리의 분기에 내몰려 목숨을 잃은 세가의 식솔은 되살릴 수 없습니다. 하니 이를 악물고 참아주십시오.”

가주의 말에 단리태천이 입이 앙다물렸다. 마치 내뱉고 싶은 화를 억지로 참아내듯이…….

단리천패의 예상대로 고연은 시작에 불과했다.

고연을 상실했음에도 단리세가가 침묵을 유지하자 몇몇 사파가 주변의 이권을 침탈해왔다.

그렇게 숙주를 빙 둘러싸고 영벽, 경석, 회북, 와양, 몽성에 걸쳐진 이권들을 모조리 빼앗겼다.

숙주의 지근거리에 위치한 지역의 이권을 상실하자, 그보다 먼 지역의 이권은 순식간에 이탈했다.

오죽하면 봉양에선 보호권이 아닌 실제 단리세가가 소유하고 있던 객잔과 주루를 일개 흑도 방파에게 강제로 빼앗기는 모욕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단리세가는 여전히 묵묵부답. 숙주만을 깔고 앉은 채 뜨겁게 달궈지는 화로 속의 무쇠처럼 참고 또 참았다.

인내로 안정화를 꾀하는 단리세가의 모습에 고덕은 홀연히 숙주에서 모습을 감췄다.

작은 서찰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졌지만, 단리천패는 그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는 걸 짐작하고 호들갑을 떠는 세가의 무사들에게 침묵을 요구했다.

그렇게 단리세가는 깊은 침묵으로 침잔(沈殘)해가고 있었다.

* * *

이제나저제나 목을 빼고 기다리던 고길 내외는 고덕이 돌아오며 한시름을 놓은 표정이었다.

“잊을 건 잊어야 하는 게다. 그것이 순리이니…….”

돌아온 고덕에게 고길이 한 첫말이었다.

그 말을 지키려는 것인지 고덕은 그 후로 강호의 일에서 귀를 닫았다.

고진과 나성운 일가도 마찬가지였던지 밭일과 집안일에 매진하여 다른 곳에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하물며 남궁세가에 출가한 아랑의 일조차 관심에서 애써 묻어버리려 노력해야 했다.

그런 나성운이나 고진은 둘째 치고, 아직 혈기왕성할 두 손자들의 인내가 안쓰러웠던지 고길 내외는 그 둘을 바라보며 남몰래 눈물을 짓는 날이 많았다.

협련과 묵린, 후량은 왕팔과 함께 돌아온 이후 노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몸이 편하면 다른 생각이 든다는 고덕의 지론에 떠밀려 강도 높은 노동에 혹사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탓에 그들은 고진 내외처럼 남궁세가에 남겨진 아랑의 처지를 살펴볼 수 없었다.

그것이 훗날의 악몽을 잉태하게 되는 계기가 됨을 이때엔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매일같이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던 어느 날, 한도회에 몸담고 있던 고칠이 집으로 찾아왔다.

동생의 불행에도 나서지 못하는 오라비의 마음을 고칠은 거듭된 사과로 전했다.

여전히 한도회는 회복 중이었고, 아직도 예전의 성세는 회복하지 못했다.

더구나 최근 들어 활동을 재개하기 시작한 사파들과 옥신각신하느라 회복은 느렸고, 피해는 자꾸 쌓여만 갔다.

“하면 정신없이 바쁠 터인데, 이리 나와 보셔도 되는 겁니까?”

강호 문파의 생리를 잘 아는 나성운의 걱정에 고칠이 답했다.

“실은 인근인 영덕에서 작은 사단이 발생해서 문파의 무사들과 함께 나와 본 참일세.”

“역시 사파 문제입니까?”

“그래. 사패련이 활동을 재개하면서 적지 않은 충돌이 벌어지고 있네. 아직 지난 상처에서 회복 중인 우리로선 감당하기가 쉽지 않아.”

“걱정이군요. 그간의 침묵 속에 사파가 축적해둔 힘이 적지 않을 터인데 말입니다.”

“솔직히 매부의 평가가 정확한 편일세. 우리뿐만이 아니라 사패련의 영향권 안인 중남부 전역이 홍역을 앓고 있네. 가뜩이나 정천맹의 영향력이 줄어든 시점이니…….”

말을 하다 만 고칠은 묵묵히 대화를 듣고 있던 고덕의 표정을 살피곤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여하간 정신이 없네. 그나저나 자네, 예서 이리 주저앉아 있을 생각인가?”

고칠의 물음에 고길 내외의 시선이 들렸다. 걱정스런 부모의 시선에도 고칠은 마음속에 담아왔던 말을 꺼냈다.

“자네 정도라면 회에선 요직에 앉을 수 있네. 어떤가? 한도회에서 일해볼 생각이 없나?”

고칠의 권유에 나성운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다른 곳에 들어간다는 생각을 못하겠습니다.”

쫓겨났다고는 하나 세가의 일원임을 잊어본 적이 없었다. 쌓인 오해가 풀리고 가주의 화가 가라앉으면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도 여전했다.

표정에서 그 생각을 읽은 고칠이 고개를 저었다.

“이미 자네와 안휘협가의 연은 다한 게야. 그걸 정말 모른단 말인가?”

고칠의 말에 나성운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어렸다. 어찌 모를까? 안다. 알기에 더욱 미련이 남는지도 몰랐다. 그 탓에 부질없는 희망을 품고 그렇게 버티고 있었다.

지금은, 지금은 자신이 버텨 나가자면 그것이라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런 나성운에게 고칠의 타박이 이어졌다.

“자넨 그렇다 쳐도 두 조카는 어찌하라고 저리 두냔 말일세.”

고칠의 말에 시선을 돌리니 마당에서 묵묵히 농기구를 손질하는 두 아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대견한 녀석들이었다. 마음의 상처가 아비보다 적지 않을 녀석들이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 자숙하고 또 자숙하며 지내고 있었다.

그렇게 두 아들을 바라보는 나성운에게 고칠이 말했다.

“저 아이들을 함께 데려가세. 아직은 부실하다 하나 한도회일세. 한땐 복건의 패자라 불리던 곳이야. 닦고 키우다 보면 얻는 것도 많고, 이루는 것도 작지 않을 걸세. 그렇게 저 아이들에게 또 다른 세상을 열어주란 말일세.”

고칠의 말에 나성운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렇게 무거운 침묵을, 아이들에게서 시선을 돌린 나성운이 깨었다.

“상의해보겠습니다. 오늘 밤만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그리하세.”

고칠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나성운의 눈에서 아비에게서만 보이는 결연한 부정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날 밤, 나성운은 아내와 두 아들을 불러 마주했다.

“외숙께서 한도회로 오면 어떠하냐는 물음이 계셨구나. 결정을 내리기 전에 너희의 생각을 듣고자 하니 마음속의 이야기를 해보거라.”

부친의 말에 천과 문 두 형제의 시선이 엉켰다 떨어졌다.

“저흰 아버님의 결정에 따를 것입니다.”

“맞습니다. 형님의 말씀대로 그리하겠습니다.”

두 아들의 답에 나성운은 고개를 저었다.

“내 결정이 아니라 너희의 마음을 묻고 있는 게야.”

부친의 거듭된 물음에 두 형제는 잠시 머뭇거리다 물어왔다.

“정녕 돌아가긴 어려운 것입니까?”

두 아이의 마음만큼이나 돌아가고픈 나성운이었다. 하지만 고칠의 말처럼 이제 가문과는 연이 끊어진 셈이었다.

그 답을 솟구치는 울음을 간신히 참으며 꺼냈다.

“아무래도 어려울 듯하구나.”

“기다려도 안 되는 겁니까?”

둘째 문의 물음에 나성운은 끝내 눈에 어리는 습막을 막지 못했다.

“그… 래. 아무래도 그런 듯싶구나.”

부친의 답에 두 형제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렇게 한참이 흐르고, 첫째인 천이 말문을 열었다.

“그렇다면 새 길을 찾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선 외숙께서 계신 곳도 의지할 사람이 있어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천의 답에 고진이 미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저 이렇게 농사를 지으며 사는 것은 안 되겠니?”

모친의 걱정을 알기에 답하는 둘째의 표정엔 죄스러움이 가득했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하지만 전 농부보다는 무인이 좋습니다. 그리 살게 허락해주십시오.”

두 형제의 뜻이 세워지자 나성운과 고진의 결정은 이미 나와 있는 것과 같았다.

잠시 아내와 눈으로 대화를 나눈 나성운이 두 아들에게 말했다.

“짐을 싸두거라. 내일 외숙과 함께 떠날 것이다.”

“하, 하면 두 분도 함께 가시는 것입니까?”

“오냐. 아직은 헤어질 때가 아닌 듯하구나.”

나성운의 답에 두 형제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났다.

“고맙습니다, 아버님.”

“감사합니다, 어머니.”

두 형제의 음성이 문지방을 넘자, 근처에서 서성이던 고칠의 입가에 미소가 깃들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툇마루에 앉아 바라보던 고길의 얼굴엔 근심이 더 깊어졌다.

날이 밝고, 아침을 먹은 고진과 나성운 일가는 앞장서는 고칠을 따라 집을 나섰다.

그렇게 멀어져 가는 딸아이 일가를 바라보는 고길 내외의 얼굴은 온통 걱정뿐이었다.

“잘할 거요.”

보기 안쓰러웠는지 고덕이 한 말을 보탰지만, 돌아오는 것은 타박뿐이었다.

“네놈이나 잘해. 구는 어쩔 거여. 저리 밭일만 시키다 종 칠 게냐? 집에서 기다리는 가족도 있다던데 뭔가 결말을 내줘야지.”

고길의 말에 시선을 돌리니, 마당 한편에서 농기구를 정리하는 구의 모습이 들어왔다.

자신의 마음이 산란한 탓에 제자랍시고 들인 구를 등한시해왔던 것이다.

하지만 이젠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처음으로 들인 정식 제자를 위해서도, 또 자신을 위해서도…….

“구야.”

“예, 대인!”

여전히 사부가 아닌 대인으로 부르는 구가 쪼르르 달려왔다.

그를 지그시 바라보는 고덕의 표정에 모종의 결심이 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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