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82장 (83/129)

제82장. 당황(唐惶)-검마, 이름을 꺾다

날이 밝은 단리세가는 초상집이었다.

전날 밤에 세가 전체를 떨어 울리던 승리의 함성은 이내 남은 자의 통곡이 되었다.

세가의 무사 이천 중 살아남은 이들은 채 삼백이 되지 않았다.

중상을 입거나 부상을 당한 이들까지 빼버리면 남은 인원은 이백에도 못 미친다.

거의 구 할에 가까운 무사를 지난 사흘 만에 잃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잡은 적은 겨우 셋이었다. 그것도 고덕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절대 고수의 부재. 단리세가가 이번에 입은 피해의 가장 큰 원인은 그것에 있었다.

남궁세가처럼 검존 정도의 고수라도 있었다면 이 정도의 피해는 입지 않았을 것이다.

적의 은신을 깨고 무사들만 집중시킬 수 있었더라도, 아니 그저 적이 움직이는 형체라도 잡아낼 정도의 고수만이라도 있었다면…….

그런 절대 고수의 부재가 남궁세가의 팔 할에 이르는 전력을 가지고서도 지금처럼 기가 막힌 피해를 입은 이유였다.

그래서 수뇌들은 쏟아지는 피눈물 외엔 할 말이 없었다. 죽어 차가워진 몸을 열을 맞추듯 늘어세워진 이들에게도, 살아남아 그들을 줄 세우는 이들에게도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어디서 어떻게 뭉개진 건지 하체는 찾지 못해 상체만 남은 아들을 부여잡고 우는 노모의 울음에, 머리가 짓터져 몸만 남은 남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꺽꺽거리는 아내의 흐느낌에, 그런 어미의 치맛자락을 붙잡은 채 어리둥절한 표정인 작은 여자아이의 모습에, 살아남은 이들은 그저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이들을 삼 층에 마련된 가주의 집무실에서 내려다보던 가주 단리천패의 뒤로 비천도단주인 단리강후가 모습을 드러냈다.

“놈이 입을 열었습니다.”

마지막에 함정에 빠진 적은 다행히도 숨이 붙어 있었다. 함정 속에 설치되어 있던 죽창에 자그마치 열일곱 군데나 관통상을 입었음에도 놈은 살아 있었던 것이다.

놈을 꺼내 약당이 가진 비약을 사용해가며 숨을 붙여 놓았다. 그리고 심문을 위해 세가의 기밀 심문실로 곧바로 호송했던 것이다.

그 심문의 관리를 담당했던 사촌 동생의 보고에 단리천패가 고개를 돌렸다.

“흉수는 어디냐?”

“삼천이라는 말만 합니다.”

“삼천?”

“예. 한데…….”

“무엇이냐? 놈의 입에서 나온 말이거든 한마디도 흘리지 말고 고하라!”

서슬이 퍼런 가주의 음성에 단리강후가 말을 이었다.

“그것이… 이번 일을 나 가주가 원했다고…….”

“나 가주? 어디의 나 가주를 말하는가?”

“안휘협가의…….”

단리강후의 음성이 저리 굼뜰 만한 내용이다. 같은 팔대세가, 그것도 친분이 결코 가볍지 않았던 곳의 이름이 거론된 까닭이다.

“진실성은?”

“아시지 않습니까? 여가의 심문은 고문이 아니라 약물에 의한 진술입니다.”

단리세가의 방가인 여씨 가문은 한 가지 특이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것은 약물에 의한 심문법으로, 그들의 방법에 입을 열지 않는 세작은 보지 못했다.

문제라면 사용된 약물의 독성으로 인해 대상이 오래 살지 못한다는 것뿐.

그것을 제외하고 결과만 놓고 보면 그들의 심문은 대단히 뛰어났다. 시간이 지나며 확인된 사실에 의하면 그렇게 얻어낸 정보의 구 할 이상이 진실에 기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면, 정말 협가 그놈들이……!”

대번에 적의가 튀어나오고 살기가 쏟아진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수백의 수하들이 쓰러져 가는 것을 무능력하게 바라만 보며 쌓인 울분이 모조리 터져 나온 것이다.

“어찌하올지……?”

단리강후의 물음에 가주의 답은 일체의 머뭇거림도 없이 튀어나왔다.

“무사들을 준비시켜라!”

“가주? 당장 움직일 수 있는 무사들이라고 해봐야 고작 이백입니다. 그도 모두 동원해야 가능한 숫자이고 보면 안휘협가를 치기엔 부담이…….”

단리세가에 비해 약체로 평가받던 곳이긴 하나 엄연히 팔대세가에 포함되어 있는 곳이다.

그들을 어찌해보자면 세가가 건재할 때도 상당한 피해를 각오해야 할 것이 분명한데, 지금의 상황으론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가주인 단리천패의 분노는 그런 것들을 간단히 뒤덮을 만큼 커다랬다.

“어차피 이백으로 유지될 이름도 아니다. 기왕 무너질 이름이라면 기개라도 세워야 하지 않겠나?”

한기 가득한 가주의 음성에 단리강후는 안 된다는 말을 두 번은 하지 못했다.

그도 아는 것이다. 단 이백의 무사로는 단리세가라는 이름을 절대로 지킬 수 없음을…….

흉수를 치러 움직인다는 소식에 대상자 이백 외에도 부상자들과 죽은 무사들의 인척들이 모여들었다.

수는 삼백가량.

가주인 단리천패는 그들을 바라보며 돌아가라 말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그들의 가슴에 파고든 분노가 자신보다 작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을 천천히 훑어보던 단리천패가 입을 열었다.

“흉수는 삼천이라는 집단에 소속된 놈이다. 삼천이라는 곳, 들어본 적도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 놈이 그것만은 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놈을 사주한 자는 알아냈다.”

가주의 말에도 무사들 사이에선 그 흔한 웅성거림조차도 없다. 대신 살을 저밀 것 같은 농도 짙은 살기만 뭉클거리며 피어올랐다. 상대가 누구라도 상관없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런 이들을 바라보며 단리천패가 말을 이었다.

“상대는… 안휘협가의 가주 나현이다.”

순간 살기가 휘청거렸다. 마도도 사도도 아니고 같은 백도, 그것도 안휘라는 한 지역에 살며 나름대로 친분을 쌓았던 곳의 이름이 거론된 까닭이다.

“그가 왜……?”

장로 한 사람의 물음이 무사들 전체의 심중을 대변했다. 그 물음에 단리천패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건 정확히 알지 못한다. 최근에 벌어진 우리와의 마찰 때문인지, 아니면 예전부터 가지고 있던 시기인지…….”

무사들 사이에 살기와 정적, 혼란이 마구 뒤엉켰다. 그런 이들에게 가주의 피 끓는 음성이 들려왔다.

“하지만 이제 이유 따윈 중요치 않다. 우리에게 남겨진 힘으론 놈을 찢어죽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도 중요하지 않다.”

무슨 말인지 몰라 시선을 모으는 무사들에게 단리천패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말을 이었다.

“다만 내겐 놈의 사주를 받은 흉수들에게 내 형제가, 저 차가운 바닥에 누워 숨조차 쉬지 않는 내 형제가, 더 이상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단리천패의 손짓에 시선을 돌린 무사들의 눈에 마당 전체를 뒤덮은 시신들의 줄이 들어왔다. 그 슬픔이, 그 적의가, 그 분노가 고스란히 그들을 바라보는, 살아 있는 형제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그런 이들의 귀로 단리천패의 음성이 이어졌다.

“무기력했던 지난 사흘과 다른 오늘을 난 신께 감사드린다. 확연한 적에 또한 감사한다. 그리고 내게 형제를 죽음으로 몰아간 적을 처단할 눈과 손과 도를 주신 신께 감사드린다. 오늘 나는 죽고자 한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이 세가를 나서려 한다. 적의 가슴에 칼을 박아 넣기 위해 난 오늘 이 세가를 나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생과 사를 초월한 가주의 음성에 무사들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그들의 몸 전체로 단리천패의 결의가 부딪쳐 왔다.

“강요는 없다. 따를 자 따르고, 남을 자 남아라. 죽는 것도, 사는 것도 모두 우리에게 남겨진 의무다.”

그 말만 남겨 둔 단리천패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정문으로 향했다.

그런 가주의 뒤를 삼백의 무사들이 묵묵히 따랐다.

그리고 일각이 흐른 후, 세가의 마당엔 살아 있는 이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단리세가를 빠져나가는 이들을 바라보는 고덕에게 바퀴 의자에 몸을 실은 단리명이 다가왔다.

“대협.”

부름에 고개를 돌리는 고덕의 시선엔 두 다리가 보이지 않는 단리명의 모습이 들어왔다.

아끼던 수하의 죽음에 분노해 보이지도 않는 흉수를 쫓아 함부로 움직이다 놈들 중 하나에게 두 다리를 베인 탓이었다.

“아직 안정을 해야 하지 않던가?”

“누워 있으면 오히려 더 안정이 안 되더군요.”

“그렇던가……?”

씁쓸함이 묻어나는 고덕의 음성에 단리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인연은 소중한 것이겠지요?”

“그렇겠지…….”

“그 인연을 깨라 말씀드린다면 이기적인 것이라 하시겠습니까?”

단리명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들은 고덕의 표정에 곤혹스러움이 담겼다.

일이 터지기 시작한 순간부터 고심하던 일이다.

그럼에도 그 연을 끊지 못한 것은, 자신의 결정으로 인해 영원히 치유되지 않을 상처를 받게 될 가족들의 수가 너무 많다는 것 때문이었다.

“흠…….”

답 대신 들려온 고덕의 침음에 단리명이 말을 이었다.

“협의니 대의니 그따위 입에 발린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저 저들의 목숨을 가엾게 여겨 달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단리명의 말에 고덕은 이젠 멀어져 희미한 흔적만으로 남겨진 무사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단리천패의 말대로 저들은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저들이 향한 안휘협가는 그렇게 허술한 곳이 아니니까…….

“내겐… 저들을 살릴 방도가 없다.”

고덕의 답에 단리명의 눈엔 절망이 스치고 지나갔다. 마지막 희망이 무너진 탓인지 의자의 바퀴를 돌려 나가는 그의 손은 몇 번씩 헛손질을 해댔다.

그렇게 삐걱대는 소리를 남기며 단리명이 나가자, 창밖으로 시선을 주고 있던 고덕의 입에서 깊은 한숨 소리가 빠져나왔다.

“후~”

* * *

단리세가의 무사들은 천천히 이동했다.

수도 적은데 가면서 경공으로 힘을 뺄 생각이 없기도 했지만, 경공의 차이가 너무 많이 나는 이들이 뒤섞인 탓에 그저 말과 수레에 몸을 싣고 평상시대로 이동하기로 한 까닭이었다.

그런 이동이 나흘에 걸쳐 이루어지자 육안이 지척으로 다가왔다.

육안 인근의 야산에서 일행을 점검한 단리천패가 무사들을 향해 말했다.

“여기서부턴 경공으로 접근한다. 작전은 없다! 계획도 없다! 각자가 가진 최고 속도로 돌입하여 안휘협가를 끝장낸다. 모두 지옥에서 만나자. 그곳에선 내가 너희의 동생이 되고, 조카가 되어 떠받들며 살 것이다.”

가주의 다짐에 그 모습을 상상했는지 무사들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스며들었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을 지어 보인 단리천패가 몸을 돌리며 낮고 차갑게 외쳤다.

“가자!”

순식간에 삼백의 그림자가 솟구쳐 날아올랐다.

능력과 완숙의 차이가 속도로 이어지며 그림자는 길게 늘어졌다.

그 그림자의 선두 부분, 단리천패를 위시한 노고수 몇몇이 육안 시내로부터 왼쪽에 치우친 안휘협가의 정문을 그대로 깨버리며 돌입했다.

콰광-!

느닷없는 굉음과 함께 비상종 소리가 세가를 깨웠다.

잠자리에 막 들었던 무사들과 고수들이 일제히 전각에서 쏟아져 나왔지만, 미친 듯이 파고드는 단리천패와 고수들의 발길을 붙잡지 못했다.

순간적으로 외원을 가로질러 내원의 월동문까지 돌파당한 안휘협가는 뒤늦게 동원된 무력 집단들을 체계적으로 활용하며 침입자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한데 침입자들의 수가 지속적으로 늘어났다. 처음엔 십수 명, 그 뒤엔 기십, 나중엔 백 단위를 넘어서더니 그 수조차 지속적으로 불어났다.

그 탓에 대응 방법도 계속해서 바뀌었다. 종내엔 무력 집단을 길게 늘여 내원의 길목을 막고, 외원에선 소탕전, 정문 인근에선 방어전으로 전투가 치러졌다.

하지만 동원된 협가 무사들의 수에 비해 절대적으로 열세인 침입자들의 저항이 너무나 거셌다.

더구나 그 와중에 침입자들의 정체가 드러나며 안휘협가의 방어책들은 일순간 크게 출렁거렸다.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오!”

협무단을 이끌고 내원의 앞을 가로막은 외당주 나호군의 질책에 단리천패가 한기가 풀풀 날리는 광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하! 정녕 대단한 인면수심이로다! 어찌 삼천이라는 외부 세력을 끌어들여 단리세가를 도모하는 악행을 일삼고서 그 징치를 나선 우리에게 무슨 짓이냐고? 개가 웃을 물음이로다!”

“그, 그게 무슨 소리요? 우리가 외부 세력을 끌어들여 단리세가를 도모하다니?”

“이미 흉수의 입에서 자백이 나왔으니 그따위 개소리는 집어치워라! 오늘 우리는 이곳에서 모두 뼈를 묻겠으나 결코 네놈들도 무사치 못할 것이다! 모조리 죽여라!”

단리천패의 명에 악에 받친 단리세가 무사들의 함성이 협가를 떨어 울렸다.

와아아아아, 복수를-!

무언가 내막이 있다고 판단된 나호군이 몸을 빼내 내원으로 달렸다.

가주의 침전으로 들어서자 불안감에 휩싸여 어쩔 줄 몰라 하는 나현의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자 나호군은 다리에서 힘이 쪽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휘청.

갑자기 균형을 잃고 휘청거리는 나호군을 바라보며 나현이 물었다.

“상황은 어찌 되어가는가? 몇 놈이나 왔나? 많은가?”

일문의 가주가 되어 적이 침입했음에도 수많은 호위 무사들에게 휩싸인 채 침전에 틀어박혀 있는 것도 답답한 일이거늘, 불안한 표정으로 적의 수효나 묻고 있는 모습을 보자 나호군은 분노마저 끓어올랐다.

하지만 누가 뭐라 해도 그는 자신의 친형이었고, 가주였다.

“지금까지 침입한 적의 수는 대략 이삼백가량입니다. 하지만 상대가 단리세가인 이상 그 다섯 배 이상은 각오해야 할 것 같소.”

단리세가가 처한 당금의 현실을 모르기에 나오는 계산이다. 원래대로라면 단리세가는 무사 이천을 거느린 대방파였으니 말이다.

“무사들을 모조리 동원해. 모조리 동원하면 막을 수 있어. 더구나 이곳은 우리의 안마당. 진법, 그렇지. 진법도 발동시켜!”

“기습을 받기 전이라면 모를까, 적아가 뒤섞인 지금 진법을 발동시키면 우리 무사들도 무사하지 못할 게요.”

“상관없다. 적만 더 많이 죽일 수 있다면 무조건 발동시켜!”

“가주!”

당황한 나호군의 부름에 나현은 버럭 화를 냈다.

“네놈, 지금 내 명을 거역하겠다는 것이냐?”

항상 이랬다. 가문의 대소사를 자신의 기분에 따라, 생각에 따라 즉흥적으로 결정해왔다.

그 탓에 세가는 항상 어수선했다. 결정이 수시로 바뀌니 세가의 구성원 누구나 한번 내려진 결정에 전폭적인 믿음을 주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이 세가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었지만, 나호군은 그런 말을 한 번도 입 밖으로 내본 적이 없었다.

지금까진 그런 형의 세가 운영 방식에 따라 자신에게도 적지 않은 이권과 이득이 떨어져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위기에선 그 점을 고치도록 충고하지 않았던 것이 후회로 밀려왔다.

“놈! 대답을 해라!”

나현의 다그침에 나호군은 고개를 숙였다. 이제 와 무얼 할 수도 없는 노릇. 결국 그는 고개를 숙였다.

“알겠소, 형님.”

나호군이 나가자 나현의 불안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미친놈들. 실패할 일을 왜……?”

“실패? 누가 실패를 했다는 거지?”

갑작스런 음성에 나현의 시선이 음성을 좇아 움직였다.

언제 들어선 것인지 기둥에 비스듬히 기대서 있는 사내를 발견한 나현은 기겁할 만큼 놀랐다.

“누, 누구냐?”

“나? 네가 필요하다는 힘이 되어줄 사람.”

“그, 그럼……!”

상대의 말에 나현은 사내 역시 이전에 방문했던 지옥 삼마존을 보낸 이와 동일한 사람이 보냈다는 걸 직감했다.

그런 나현의 직감을 상대가 확인시켜 주었다.

“주인께선 여전히 널 돕고자 하시지.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하, 하지만 돕는다면서 일만 만들고 있지 않소. 지옥 삼마존인지 뭔지, 단리세가를 지우겠다고 갔는데 저들은 저리 독을 품고 우리에게 달려들었으니…….”

“조용, 조용. 어차피 찌꺼기들뿐이야. 대다수는 이미 지옥 삼마존이 모조리 끌고 지옥으로 갔다고.”

상대의 말에 나현의 표정에 의문이 깃들었다.

“그, 그게 무슨……?”

“단리세가에 남은 놈들이라곤 지금 온 놈들뿐이라는 말이지.”

“그, 그럼 지금의 수가……?”

“맞아. 잘해야 삼백 정도. 그래도 조심은 해야겠지. 독이 바짝 오른 놈들이니까.”

상대의 말에 나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모습에 사내가 물었다.

“왜? 직접 나가 보게?”

“세가를 침탈한 적이 있거늘, 어찌 가주가 그냥 있겠소!”

속이 뻔히 보이는 말이었지만, 사내는 그걸 문제 삼고 싶진 않은 모양이었다.

“뭐, 좋을 대로. 하면 같이 가줄까?”

“그대를 어찌…….”

“어찌 믿느냐는 말 따윈 안 했으면 좋겠어. 내 칼이 화를 낼 테니까 말이야.”

사내의 말에 나현의 입은 절로 다물렸다. 마치 그 말을 어기면 죽기라도 할 것같이 말이다. 나현은 사내가 언뜻언뜻 내비치는 기세에 이미 눌려 있었던 것이다.

“하, 하지만 다른 이들의 시선이……?”

“뭐, 미리 고용한 호위 무사 정도로 하지. 물론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간 재미없겠지만 말이야. 크크.”

장난스럽게 웃고는 있었지만, 사내의 눈에서 쏟아지는 한기는 나현의 심장을 오그라들게 만들 정도로 예사롭지 않았다.

“그, 그럼 가, 갑시다.”

결국 사내의 요구대로 함께 침전에서 나오는 모습에 호위 무사들의 수장을 맡고 있는 무사에게서 전음이 왔다.

-가주, 뒤에 누가……?

-내가 특별히 고용한 호위 무사다. 신경 쓰지 말라.

-가주…….

-어허!

그것으로 호위 무사들의 불만을 막아버린 나현은 싱글거리는 사내를 대동한 채 싸움이 한창 벌어지는 곳으로 움직였다.

* * *

고덕은 안휘협가가 멀리 내려다보이는 한 객잔의 지붕에 앉아 있었다.

솔직히 미안하기도 하고, 걱정도 되었다. 거기에 단리명의 말이 마음에 걸리기도 한 탓에 결국은 이곳까지 발걸음을 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끼어들진 못했다.

그렇게 협가를 바라보던 고덕의 눈썹이 갑자기 꿈틀거렸다.

뒤늦게 나타난 나현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르는 자에게서 심상치 않은 기세를 느낀 탓이었다.

“적어도 협련은 뛰어넘는다라…….”

그 말은 십대고수의 경지를 뛰어넘는다는 의미이다.

십대고수의 위는 하나다. 천하오존, 그리고 현경. 한데 그런 고수가 나현의 수족처럼 뒤를 따른다.

엄밀히 말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모르는 이들은 안휘협가가 비밀리에 키워온 고수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엔 상대의 경지가 너무 높았다.

결국 외부 세력이 협력자란 뜻이 된다. 단리세가에서 본 놈들의 특이성으로 보자면 당금 무림에서 그런 이들을 부릴 만한 곳은 한 곳뿐이다.

고덕의 눈매가 가늘어지고 숨소리가 낮아졌다. 뛰어오르기 전의 고양이처럼 잔뜩 웅크린 그의 시선으로 나현에게 달려드는 단리천패의 모습이 보였다.

단리천패의 경지는 초절정이다. 그것은 나현과 같은 경지다. 물론 초절정의 경지에서도 나름의 상하가 존재하겠지만 대략의 능력은 대동소이했다.

하지만 분노와 결의가 깃들어진 단리천패의 기세는 안이한 나현이 막아설 수 있을 만큼 녹록지 않았다.

대번에 나현의 검이 튕겨 나가고 신형이 밀리자, 뒤에 서 있던 사내가 끼어들었다.

만근거석도 단숨에 부숴버릴 만한 패력을 담고 떨어진 단리천패의 도를 사내는 마치 장난치듯이 가볍게 흘려보냈다.

그리고 돌아 나오는 칼의 궤적에 단리천패의 목이 걸렸다.

너무나 빠르고 직선적이다. 도저히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란 걸 깨달은 단리천패의 눈이 질끈 감겼다.

투팡-

갑작스런 소음이 코앞에서 일어나고, 대비했던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슬며시 뜬 눈에 당황한 표정으로 칼을 세우고 한 걸음 물러난 사내가 보였다.

누군가 자신을 도와 사내를 물렸다는 걸 직감한 단리천패의 시선이 주변을 훑었다. 그런 그의 눈으로 점점 다가오는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대, 대협!”

고덕의 출현은 생각 이상의 파괴력을 가져왔다.

그가 고의적으로 신형을 드러내고 날아든 까닭에 그의 출현을 인식한 협가의 무사들은 급히 뒤로 물러났다.

위기에 몰렸던 단리세가의 무사들도 힘을 냈지만, 함부로 협가 무사들에게 달려들지 못했다.

그렇게 묘한 대치 상황을 이루는 가운데 고덕이 천천히 나섰다.

“우, 우리 일에 참견할 생각이시오?”

나현의 음성이 잘게 떨린다. 그런 그를 잠시 일별한 고덕의 시선은 다시 사내에게 고정되어버렸다.

자신이 무시됐다는 사실에 몸을 떨면서도 나현은 다시금 나서지 못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덕의 신형에서 풍겨 나오기 시작한 기세가 서서히 광기를 띠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삼천에서 왔나?”

고덕의 물음에 사내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삼천에 속한 이존각이란 곳에서 왔네. 뭐, 내 소개는 필요 없을 테고.”

사내의 말에 고덕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맞아. 곧 죽을 놈의 이름 따윈 알 필요가 없으니까.”

고덕의 말에 사내의 입가에도 미소가 그려졌다. 한쪽 입가가 비틀린 웃음. 명확한 비웃음이다.

“뭐, 결과가 말해주겠지.”

천천히 칼을 들어올리는 사내를 바라보며 고덕도 명혼을 중단으로 끌어올렸다.

스팟-

천천히 올라온다고 생각했던 사내의 칼이 섬광처럼 허공을 갈랐다.

상대의 쾌검에 고덕의 검도 잔상을 이끌며 빠르게 움직였다.

하지만 검과 칼의 충돌음은 들리지 않았다. 사내의 칼이 마치 바람처럼 고덕의 검을 타고 흘러들어온 까닭이다.

“흡!”

당황성 뒤로 고덕의 검이 황급히 당겨져 앞을 막았다.

슬렁~

또다시 검을 타 넘는다. 이런 것은 설화에나 등장하는 무공뿐이다. 이른바 풍검(風劍).

바람의 검이다. 아니, 상대의 무기가 특이하게 양날을 가지면서도 도처럼 휘었으니 풍도라 불러야 하나?

여하간 바람을 닮은 무공이다. 그 탓에 막는 것을 부수기보단 타 넘고, 틈이 생기면 돌파보단 스며드는 것을 택한다.

막기엔 상당히 어려운 무공임엔 분명하다.

그런 사내의 움직임을 지켜보던 이들의 입에서 이 앓는 음성이 터져 나왔다.

“절파도법(折破刀法)!”

“세상에, 절파마존이다!”

절파마존. 지금부터 백여 년 전에 활동하던 전 전대의 고수다. 그의 성명절기는 사람들이 말한 절파도법. 상대의 의지를 꺾고, 무공을 깨트린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 바로 절파도법이다.

그런 이름이 붙을 만큼 절파마존의 도법은 특이한 면이 많았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지금 보이는 것처럼 바람을 타듯이 상대의 무기를 타고 넘어 반격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것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자신을 알아보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 기쁜 듯 절파마존의 도는 거침없이 움직였다.

그에 반해 고덕의 신형은 뒤로 죽죽 밀려났다. 막아지지 않으니, 거리를 허용하지 않기 위해선 뒤로 물러나는 방법 외엔 달리 취할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고덕을 절파마존이 따라 들어왔다. 순간 고덕의 눈에 사나운 기운이 들어섰다.

그리고 그 순간, 고덕의 검을 타고 넘던 절파마존의 도 주변으로 노란 달무리가 생겼다.

쾅-!

난데없는 폭음과 함께 절파마존의 기형도가 튕겨 나갔다.

아무리 바람의 도라도 직접적인 충격은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공간권의 묘리가 발생한 폭발력에 뒤로 밀린 절파마존을 향해 명혼이 허공에서 휘둘렸다.

순간, 절파마존이 미친 듯이 물러났다. 그렇게 물러난 공간이 섬뜩한 소리를 남기며 어긋났다.

스걱-

베어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도 베어지는 소리가 허공을 울렸다.

아니, 자세히 보니 건너편의 영상이 일그러져 보인다. 허공이 베어지며 공간 너머의 영상이 일그러져 보인 것이다.

믿을 수 없는 현상을 실현해낸 고덕의 검이 다시금 허공을 갈랐다.

촉각을 곤두세운 절파마존의 눈앞에 갑자기 노란 달무리가 서렸다.

공간권의 묘리를 잘 알고 있던 절파마존이 거리를 벌렸지만, 달무리 안에서 튀어나온 현월이 그 거리를 순식간에 무로 돌렸다.

“흐헉!”

절파마존의 입에서 절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여든두 번의 변식과 아흔세 번의 보법을 밟고서야 현월을 떨어트린 그의 표정에 당황과 경악이 반반씩 어렸다.

“어, 어찌 북황과 살황의 무공이…….”

물음은 다 잇지도 못했다. 무언가 싸늘한 기운을 뿜으며 퍼져 나온 무형 강기가 화살처럼 사방을 에워싸며 덮쳐든 탓이다.

몇 개는 피하고, 몇 개는 받아쳐 소멸시켰지만 결국 몇 개는 허용하고 말았다.

그렇게 허용한 무형 강기가 내부로 파고들더니 피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이, 이건! 적환마공!”

달리 혈의 인이라 불리는 무공이다.

경악 속에 갑자기 떨기 시작하던 절파마존의 정수리를 피의 칼날이 뚫고 솟구쳤다.

퍼걱-

머리의 반이 날아간 절파마존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힘없이 무너지는 순간, 자신의 주인을 죽음으로 인도한 피의 칼이 허공에서 형체를 허물며 쏟아져 내렸다.

촤- 악-

자신의 피를 흠뻑 뒤집어쓴 절파마존의 시신에서 눈을 돌린 고덕이 멍하니 서 있던 나현에게 다가섰다.

순간, 주변에 흩어져 있던 경호 무사들이 모조리 날아올랐다.

쫘- 악.

고덕의 손이 허공에서 무언가를 털어냈다고 생각되기 무섭게, 날아올랐던 경호 무사들이 작살 맞은 물고기처럼 한차례 움찔거리더니 일제히 떨어져 내렸다.

믿었던 자신의 방패들이 모조리 사라지자, 나현은 떨리는 시선으로 다가서는 고덕을 그저 바라만 볼 뿐이었다.

지척으로 다가선 고덕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갈기갈기 찢어 죽인다 해도 분이 풀릴까마는… 네놈과의 원한은 이곳에서 접는다. 그리고 단리세가엔 그에 맞는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것이다.”

“대협!”

받아들일 수 없다는 단리천패의 눈빛에 고덕은 고개를 저었다.

“살아남아야 하는 것 또한 남은 자의 의무다. 그대의 말이다. 부정은 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고덕의 말에 이를 악문 단리천패는 피눈물을 쏟으며 도를 바닥에 박았다.

그것을 확인한 고덕의 시선이 나현에게 향했다.

“오늘 이곳에서 검마의 이름을 꺾는다. 네놈은 안휘협가의 이름을 꺾어라!”

그 말이 충격파처럼 안휘협가에 가득한 이들의 귀를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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