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1장. 분노(憤怒)-안휘협가, 샛길로 들다
남궁세가의 혈사에 가장 놀란 것은 안휘협가였다.
자신들의 세 배가 넘는 전력이 결딴나고, 기화이초로 아름답던 남궁세가의 별원들이 피와 시체로 가득 찼다는 풍문을 접했다.
놀란 마음에 사실을 확인할 겸 동맹의 이름으로 무사들을 파견했다.
그들이 가지고 돌아온 소식은 풍문보다 끔찍했던 남궁세가의 모습이었다.
보고를 접한 안휘협가의 지휘부는 당황하고 겁을 집어먹었다.
더구나 복안 혈사 이후 정천맹의 이름으로 드리워졌던 소림의 보호가 거둬진 상태라 안휘협가는 완전히 벌거벗겨진 채 내던져진 것과 같았다.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검마는커녕 이전에 달려왔던 묵린이나 후량만 있어도 안휘협가엔 피가 내를 이루게 될 터였다.
그 지독한 공포가 이성을 마비시켰다. 그 탓에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는 안휘협가에 검은 손길이 드리워졌다.
머리를 헤집는 걱정과 두려움으로 술에 빠진 나현의 방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하지만 그것을 눈치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술에 취해 몽롱한 가운데 머릿속에서 음성이 울려 왔다.
‘힘을 원하나?’
술에 빠져 살다 보니 이젠 환청이 다 들린다는 생각에 나현의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가 깃들었다. 한데, 환청은 물러나지 않았다.
‘힘을 원하지 않나?’
“뭐?”
‘힘을 원하는지 않느냔 말이다.’
자신의 말에 반응해 변하는 환청이란 들어본 적이 없다. 아니, 정기신이 바로 서야 하는 내가고수에게 정신병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생각이 그에 미치자 나현의 등줄기로 소름이 훑고 지나갔다.
순식간에 방 안에 주향이 가득 차고, 나현의 얼굴에선 주독이 깨끗하게 빠져나갔다.
내력을 이용해 단숨에 몰아낸 것이다.
그렇게 정신을 차린 나현의 머릿속으로 다시 음성이 들려왔다.
‘이제 대화할 준비가 되었군. 어때, 힘이 필요하지 않나?’
환청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한 나현의 얼굴이 완전히 굳었다.
“누, 누구요?”
‘나? 그대에게 힘을 줄 수 있는 사람.’
“나, 나는 모습조차 드러내지 못하는 이의 말을 믿을 생각 따윈 결코 없소!”
제법 강단 있게 나가는 나현의 머릿속에 소름 돋는 웃음소리가 울렸다.
‘크크크, 나 네 앞에 있잖아. 보지 못하는 것은 네가 모자란 탓이라구. 크크’
머릿속을 울려 대는 음성이 뜻하는 바에 놀라 눈에 내력을 모으자, 무언가 검은 안개 같은 것이 자신의 앞을 가득 메우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뭐, 뭐냐?”
당황하며 호들갑을 떠는 나현의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 머릿속의 음성은 한참 동안 깔깔거리는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그렇게 한참을 웃던 음성이 천천히 머릿속에서 사라진다 싶은 순간, 눈앞의 검은 안개가 뭉쳐 들며 하나의 모양을 그려 냈다.
“사, 사람?”
희미한 형체를 드러내는 안개 속에서 머릿속을 울렸던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럼 사람이지, 귀신이겠나?”
좀처럼 믿기지 않는 말이었지만, 나현은 감히 반박하지 못했다.
자신을 가지고 노는 상대의 능력이 이미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 있다는 걸 깨달은 까닭이었다.
“내, 내게 무엇을 원하는 것이오?”
“원한다? 글쎄, 원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대가 아닐까?”
흐릿한 인형의 음성에 나현이 복잡한 시선으로 되물었다.
“내가 원한다고? 당신한테?”
“그래. 그것도 아주 간절히……. 아닌가? 난 네가 내게 힘을 갈구하는 목소리를 들었는데 말이야.”
“하, 하지만 내가 빈 상대는…….”
“신이지. 맞아. 그래서 이렇게 왔잖아. 뭐가 문제지?”
상대가 신이 아니라는 것쯤은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이 필요할 때 갈구하는 것을 건네는 자를 신이라 믿어주는 것도 손해 볼 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군. 신이라……. 그래, 뭐 내가 필요한 것을 주면 그것이 신이겠지. 좋소. 그대는 내게 뭘 줄 수 있소?”
“그대가 그리 원하는 거, 힘을 주지. 만인 위에 군림하고, 만인을 찍어 누르는 힘을.”
“저, 정말이오?”
“신이 거짓을 말하는 걸 본 적이 있나?”
“그, 글쎄, 신이 답을 한 적은 처음이라서…….”
나현의 답에 한참 동안 깔깔거리던 인형은 단 한마디를 남기고 안개처럼 흩어져 방 안에 가득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내일 아침을 기대해도 좋아…….’
날이 밝자 나현은 온종일 대청에 나가 앉아 무슨 일이 일어나길 기다렸다.
하지만 아침 시간이 지나고 해가 중천에 떠오를 때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헛것이 보였거나 꿈을 꾼 것이라 생각한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는 순간, 대청의 바닥이 불쑥 솟아올랐다.
“허억!”
기겁을 하는 나현을 향해 바닥재가 늘어난 모습 그대로인 셋이 묘하게 울리는 음성을 토해냈다.
“지옥 삼마존이 그대의 힘이 되어주기 위해 왔네.”
“지, 지옥 삼마존?”
당황한 음성으로 그들의 이름을 되뇌는 나현에게 여전히 바닥재가 늘어난 형상을 유지하고 있는 셋의 음성이 동시에 울렸다.
“그렇다네. 우리의 임무는 그대의 명을 좇아 모든 것을 이루는 것. 그대, 지금 원하는 것이 있는가?”
원하는 거? 그 말에 언뜻 노선을 달리한 이후 끊임없이 신경을 거스르는 단리세가가 사라졌으면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단리세가가 사라졌으면 좋겠소.”
나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솟아올랐던 바닥이 원래의 모습을 되찾아가며, 묘한 울림을 담은 음성이 대청 안을 감돌았다.
“그대의 바람이 이루어지리다…….”
* * *
정천맹의 행사에 반대해 나름대로의 행보를 걷던 단리세가는 복안 혈사 이후 조금 더 애매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무사들을 보냈다가 함께 피해를 입은 문파들에 의해 은근히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고나 할까?
하지만 단리세가의 힘이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기에 나름대로 영역을 지키며 아직까지는 이름과 실익 두 가지를 온전히 지켜 내고 있었다.
여전히 고까운 시선을 보내는 백도의 문파들이 많았지만 실력을 행사해오는 곳도 없었고, 이권을 침탈당한 적도 없었다.
단리세가의 표식을 단 표국들은 여전히 여러 지역을 무리 없이 돌아다녔고, 단리세가의 비호를 받는 상단들도 거래에서 제약을 받지 않았다.
나름 만족할 만한 상황에 어느 정도 안심하고 있던 단리천패는 잠자리에서 불현듯 드는 불안감에 벌떡 일어나야만 했다.
그리고 가만히 귀를 기울이자 바람 소리에 실려 나지막한 비명이 흘러들었다.
비명을 들었다고 판단하자마자 내뻗은 손으로, 침상 한편에 풀어놓았던 애병 묵인이 날아들었다.
묵직한 도병을 감아쥐자 자신감이 사지 백해로 뻗어나갔다.
일수에 벽면에 걸려 있던 장삼을 잡아당겨 걸친 단리천패가 침전의 문을 박차고 나서자, 경호 무사들이 일제히 반응했다.
“가주, 이 야심한 시간에 어찌……?”
“그대들은 저 비명 소리가 들리지 않는단 말인가?”
단리천패의 물음에 잠시 귀를 기울였던 경호 무사들은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들리지 않는다는 간접적인 표현임을 안다. 하지만 자신의 귀에는 비명 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었다.
결국 직접 확인하기로 한 단리천패가 걸음을 옮겼다.
“따르라!”
그의 명에 사방에서 모습을 드러낸 경호 무사 서른이 일제히 그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처음엔 고개를 갸웃거리던 경호 무사들도 내원을 벗어나 외원으로 향하는 월동문을 지나며 안색을 굳혀야 했다.
그들의 귀에도 바람 소리에 묻어 희미한 비명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 까닭이었다.
“가, 가주!”
경호대의 수장인 장로가 걱정 어린 음성으로 부르자, 그 의미를 알아들은 단리천패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상을 발하고 비천도단을 풀게.”
“명!”
고개를 숙여 보인 장로의 입이 달싹거린다고 느껴진 순간, 세가를 깨우는 비상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경호대 수장인 장로의 명을 받은 경비 무사가 비상종을 치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향 한 자루가 탈 시간이 흐르자, 오백으로 이루어진 비천도단이 모여들었다.
“가자!”
단리천패의 음성에 비천도단의 무사들과 경호대 무사들이 일제히 그의 뒤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외원으로 나온 단리천패의 눈은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목불인견, 처참지경이란 말이 절로 나올 참경이 벌어져 있었던 까닭이다.
배가 갈리고, 사지가 찢기고, 머리가 터져 나간 시신들이 외원을 가득 뒤덮고 있었다.
도대체 이런 참경이 벌어지는 동안 어찌 제대로 된 비명 하나 들리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불가사의한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 시신들 사이에서 불쑥 피가 솟아올라 사람의 형상을 갖췄다.
갑작스런 기사에 경호대의 무사들이 가주의 주위로 모여들었고, 비천도단의 무사들은 일제히 도를 치켜들었다.
그런 이들을 바라보며 키득이던 사람 형상의 핏물이 풀썩 무너지며 사라졌다.
그리고 잔뜩 긴장한 채 사위을 향해 형형한 눈빛을 번뜩이던 비천도단원들의 한복판에서 비명과 함께 피가 뿌려졌다.
“크아아악!”
비명의 여운이 사라지기도 전에 사타구니부터 정수리까지 단숨에 쪼개진 무사의 신형이 양쪽으로 벌어지는 동시에 내장과 피를 쏟아내며 쓰러졌다.
자신들이 모여 있는 복판에서 벌어진 일에 당황하는 비천도단원들 속에서 또다시 비명이 터졌다.
“크악-”
짧았지만 반향은 더 컸다. 향주급 고수의 머리가 허공으로 떠오른 것이다.
툭. 데구르르르륵.
힘없이 떨어진 목이 바닥을 구르다 멈추자, 피를 분수처럼 뿜던 그의 몸뚱이가 천천히 쓰러졌다.
풀썩-
문제는 그 옆에 멀쩡히 서 있던 무사의 신형도 함께 쓰러졌다는 것이다.
한데, 쓰러진 무사가 움직이지 않았다. 이상함에 동료들이 자세히 보니 가슴이 쩍 하니 벌어져 있었다.
“저, 적이다!”
그제야 경호성이 터지고, 무사들끼리 등을 맞대고 사방을 경계했다.
푸확-
하지만 무소용이다. 등을 맞댄 채 사방을 주시하던 무사 셋의 목이 동시에 떠올랐다.
피가 뿌려지고, 그만큼 깊은 공포도 함께 뿌려졌다.
사방에서 세가의 고수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가는데, 도무지 흉수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것이 단리천패의 분노를 끌어올렸다.
“천밀!”
그의 고함에 세가 전체에서 웅혼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발(發)-!
동시에 내원에 가득 차올랐던 긴장감이 세가 전체를 감싸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또 다른 단리세가의 무력 집단인 단천도단은 물론이고, 단리세가 최강의 무력 집단인 십자도단까지 동원된 커다란 포위망이 세가를 감싸고 천천히 조여 왔다.
결국 포위망은 비천도단이 피를 뿌리는 외원의 입구로 좁혀졌다.
“반(反)!”
단리천패의 명에 정신없이 밀려다니던 비천도단의 무사들이 둥글게 모여들어 일제히 도를 밖으로 뻗었다.
그리되자 안에서 밖으로 도를 뻗어낸 비천도단과 그들을 둥글게 둘러싸고 밖에서 안으로 도를 세운 단천도단과 십자도단의 사이엔 피와 시신이 늘어선 공간만이 남았다.
하지만 단리세가 무사들의 시선은 분노와 복수심에 얼룩져 단순히 공간을 바라보는 눈빛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집요하게 뒤지고 찾는 그들의 시선 안쪽에서 비명이 터졌다.
“크헉-”
둥글게 뭉쳐 있던 비천도단의 중심에서 비명과 피가 솟구친 것이다.
당황했지만, 비천도단의 고수들이 빼곡하게 밀착된 공간이다. 도조차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는 것뿐이었다.
한데, 이번엔 비명이 두 곳에서 동시에 터졌다.
“크악!”
“커헉-”
둘 다 비천도단이 뭉쳐 있는 중심이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외곽, 그러니까 십자도단과 단천도단이 형성한 포위망 속에서 터져 오른 것이었다.
힘없이 무너지는 두구의 시신… 그리고 비명이 들불 번지듯이 번져 나갔다.
크아아악, 커헉, 큽. 으악!
비명만큼 피가 사방에서 솟구치며 무사들이 중구난방으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이건 마치 보이지 않는 적 수십이 사방에서 무작위로 칼을 휘두르는 것 같은 상황이었다.
여건이 그러자 무사들도 맥없이 당할 수만은 없었다. 동료와의 사이를 띄우고, 근처에 다가서는 것은 그게 무엇이라도 일단 도를 휘두르고 봤다.
어이없이 등 뒤에서 동료가 휘두른 도에 쓰러지는 무사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그사이에도 흉수는 보지도 못한 채 목이 잘리고 가슴이 쪼개지며 쓰러지는 무사들이 끊이지 않았다.
날이 밝자 흉수들은 물러갔다.
그렇게 피의 광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엔 칠백가량의 무사들이 핼쑥한 표정으로 남았다.
내원에서 동원된 무사들의 수만도 천오백. 거의 팔백의 무사들이 모습도 보지 못한 흉수와 겁에 질린 동료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거기에 외원에서 살해당한 무사들의 수까지 합하자, 단리세가는 하룻밤 사이 천이백이나 되는 무사들을 잃었다.
* * *
긴급히 벌어진 회의에 참석한 단리세가의 수뇌들은 참담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그들 대부분은 밤새 살육이 벌어지는 현장에서 손도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수하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했기에 자괴감과 분노에 떨고 있었다.
“이런 수법, 들어본 적이 있나?”
단리천패의 물음에 세가의 중추를 맡고 있는 장년 고수들은 물론이고, 장로를 맡고 있는 원로 고수들까지 고개를 저었다.
“들어본 적이 없네. 이런 살법이라니…….”
가주의 숙부인 단리태천조차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단리세가의 최강 고수라는 그도 흉수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대로는 안 됩니다. 도움을,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단리명의 말에 가주가 물었다.
“누구에게 도움을 청한단 말인가? 설사 청한다 한들 고립무원의 형국인 우리를 누가 돕겠다고 나선단 말인가?”
비관적인 가주의 말에 단리명은 확고한 음성으로 말했다.
“대협께, 고 대협께 도움을 청해야죠.”
그의 말에 사방에서 왜 이제야 생각이 났느냐는 듯이 무릎을 치는 소리들이 들렸지만, 단리천패의 말에 살아나던 분위기는 곧바로 죽어버렸다.
“여기서 하포까지 전서구를 날리더라도 사흘은 족히 걸리네. 그곳에서 또 대협이 올라오는 시간은 어찌하고? 더구나 어제와 같은 공격을 다시 받는다면 세가는 삼 일을 넘길 수 없네.”
단리천패의 말에 단리명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어쩌면… 어쩌면 말입니다. 대협은 하포가 아니라 황산 인근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황산에……?”
“예, 가주.”
“설마… 자네는 지금 대협이 남궁세가를 그 지경으로 만들어놓고 그 주변을 배회하고 있을지도 모른단 말을 하는 겐가?”
“그렇습니다. 떠나기엔 조카 손녀의 안전이 마음에 걸릴 테니까요.”
“아무리 고 대협의 정리가 깊다 하나, 설마 조카 손녀 하나 때문에 그 위험을 감수할 것이란 말인가?”
“대협에겐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단리명의 말을 듣고 고심하는 가주에게 단리태천이 은근히 권했다.
“시도해본다고 우리가 손해 볼 건 없다고 생각하오만, 가주.”
“맞습니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죠.”
“해봅시다, 가주.”
사방에서 찬동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들로서는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라도 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다시는, 다시는 어젯밤처럼 무능력하게 아무것도 못하고 수하들을 눈앞에서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뇌부의 결정에 고덕과의 인연 탓에 선발된 위사부의 단리청이 몇몇 무사들을 이끌고 황급히 황산으로 달려갔다.
그들이 황산으로 달려가는 동안 해가 지고 달이 떴다.
이번엔 삼 단의 무사뿐이 아니라 가내의 무사 전체가 동원되어 밀집된 진세를 구축했지만, 어제의 상황이 다시 벌어졌다.
여전히 제자들은 속절없이 죽어갔고, 수뇌들은 흉수의 위치도, 흔적도 찾지 못했다.
그나마 무사들이 어제와 달리 동료를 향해 도를 휘두르는 사단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분노에 떠는 눈을 부릅뜬 채 흉수를 찾으려 고군분투하는 가운데 피가 낭자하게 흘렀다.
그렇게 피와 시신을 가득 남겨 둔 밤이 지나고, 다시 해가 중천에 떠올랐다.
수뇌는 수뇌들대로, 무사들은 무사들대로 지쳐 갔다.
“청은 황산에 닿았을까요?”
한 장로의 물음에 단리태천이 고개를 저었다.
“그들의 경공 실력으로 보았을 때 오늘 오후는 되어야 도착할 수 있을 게요.”
“하면 다시 밤이로군요.”
밤이라는 말에 수뇌들의 얼굴이 잘게 떨렸다. 하지만 그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분노에 떠는 것이다.
“그렇겠지. 문제는 밤엔 대협을 찾기가 어려울 거라는 걸세.”
“그럼…….”
“천운으로 그곳에서 찾는다 해도 하루는 더 버텨 내야 한다는 말이겠지.”
지난밤에 목숨을 잃은 세가의 무사들은 모두 삼백이다. 그나마 전날에 비해 피해가 크게 줄어든 것은 세가의 무사들끼리 도를 휘두르지 않은 덕분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일반 무사들까지 합해도 오백을 간신히 넘길 뿐이다.
삼 일 전만 해도 물경 이천의 무사가 바글거리던 단리세가의 현실이라고는 도저히 믿겨지지가 않았다.
더구나 문제는 오늘을 넘길 수 있을 것 같지 않다는 점이었다.
그것이 수뇌들의 마음을 무겁게 내리눌렀다.
“정녕 이대로 당해야만 하는 겁니까?”
참다못해 일어난 이는 단천도단을 이끄는 단리격이었다.
“부끄럽네만, 수가 없으니 달리 할 말이 없네.”
가주의 맥 빠진 음성에도 불구하고 단리격은 다시 주저앉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해볼 수 있는 데까지는 해봐야지요. 제 놈들이 살법을 쓴다면 우리도 살법에 대항할 수단을 강구하면 됩니다!”
단리격의 격정에 동한 것인지 아니면 무기력한 자신들의 모습이 진저리가 난 것인지 일부 수뇌들이 함께 일어섰다.
“옳은 말입니다. 소용이 있든 없든 할 수 있는 건 모조리 해봐야지요. 내 죽기 전에 그놈들 중 한 놈만이라도 끌고 간다면 아까울 게 없소이다.”
그 말에 여기저기서 동조의 말이 터져 나오더니, 종내엔 가주까지 더해 모든 수뇌가 쏟아져 나갔다.
이내 그들을 중심으로 세가의 무사들 전체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처에 함정이 파지고, 그 함정의 사이사이를 날카로운 은사가 가로질렀다.
그렇게 완성된 죽음의 함정들 사이로 단리세가의 무사들이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죽더라도 자신들의 자리를 벗어날 수 없을 터였다. 조금만 발을 옮겨도 은사와 함정이 죽음으로 인도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자신들의 처절한 몸부림을 흉수들이 비릿한 미소를 지은 채 느긋하게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렇게 삼 일째의 밤이 단리세가를 덮어오고 있었다.
주변이 완전히 어둠에 잠기고, 달빛과 도처에 밝혀 놓은 화톳불만이 외원 마당을 비춰주고 있었다.
그 고고한 정막을 어김없이 붉게 치솟는 피와 함께 비명이 부숴놓았다.
여전히 무사들은 속절없이 죽어갔다. 하지만 흉수들은 그 수많은 함정과 은사들에도 불구하고 전혀 위축됨이 없어 보였다.
마치 모든 것을 손바닥 안에 놓고 움직이듯 죽어나가는 무사들의 수와 상황은 이전 밤과 다를 것이 없었다.
결국 단리천패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죽어가는 수하를 위해 흉수에게 검 한번 휘둘러 보지 못한 주군의 미안함이, 치 떨리는 무력함이 주는 분노가 수하들의 죽음이라도 똑똑히 기억하고자 그의 눈을 더없이 크게 부릅뜨게 만들었고, 그로 인해 찢어진 눈가에서 흐르는 피가 눈물과 함께 떨어져 내렸다.
가주를 시작으로 수뇌들의 눈에서 혈루가 흘렀다. 죽어가는 무사도, 죽어가는 동료를 지켜 주지 못한 무사들의 눈에서도, 가슴에서도 피가 눈물이 되어 흘렀다.
그러던 한순간, 전혀 다른 비명이 울렸다.
“커헉-!”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청년의 손아귀에 잡힌 무언가가 괴로운 듯 뒤틀며 캑캑대고 있었다.
“대, 대협!”
청년의 모습을 본 단리명의 목에서 기쁨의 음성이 터져 나갔다.
그 음성이 함성이 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와아아아~
단리세가 무사들의 함성 끝에 손에 잡힌 것의 목을 비틀어 꺾어버린 고덕의 신형이 허공을 밟고 뛰었다.
아니, 사실은 길게 이어진 은사를 밟고 날듯이 달리는 것이었다. 무언가 희끗거리는 놈들이 하듯이…….
고덕은 둘로 갈라지는 놈들 중 우측으로 휘어진 놈의 뒤를 따라잡았다.
그리고 이 장 밖에서 은사를 박차고 허공으로 몸을 뽑아 올리는 놈의 허리 어림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순간 놈의 허리 인근에 노란 달무리가 그려지고, 현월이 튀어나왔다.
스걱-
섬뜩한 음성의 잔향 뒤로 붉은 피를 쏟으며 둘로 나뉘어 떨어지는 몸뚱이가 사람의 형상으로 돌아가 있었다.
현월의 결과는 확인하지도 않고 신형을 움직인 고덕은 저만치 얽히고설킨 은사를 밟으며 날듯이 도주하는 놈을 쫓았다.
조금만 더 가면 담장, 그것을 넘으면 놈은 단리세가를 벗어날 것이다.
그리되면 찾을 수 없을 만큼, 놈의 은신은 주변과 완벽히 동화되어 있었다.
결국 고덕의 애검 명혼이 허공에 궤적을 그려 냈다.
동시에 도주하던 놈의 전방에 은빛 사선의 무리가 그려졌고, 허공이 갈라지는 신기가 벌어졌다.
위기를 느낀 놈의 신형이 또다시 좌측으로 틀어졌다.
이번엔 달무리가 일었다.
쾅-
현월이 아니라 공간권의 묘리가 놈의 전방에서 폭발했다.
당황한 놈의 신형이 은사의 탄력을 이용해 우측으로 돌려지자, 현월이 본연의 속도 그대로 쇄도해 들었다.
당황한 놈이 황급히 뛰어내려 바닥을 밟은 순간, 주변 전체가 무너져 내렸다.
“헉!”
다급성과 함께 땅속으로 빨려 들어간 놈은 함정 바닥에 빼곡히 박혀 있던 죽창에 형편없는 모습으로 꿰여 버렸다.
그것을 확인한 고덕이 주변을 살폈지만, 더 이상 특이한 놈은 보이지 않았다.
그에 은사를 밟고 단리천패의 앞으로 이동한 고덕이 말했다.
“놈들은 다 잡은 거 같네만.”
고덕의 말에 무사들의 환호성이 단리세가를 떨어 울렸다.
와아아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