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0장. 변화(變化)-자연경의 비밀
고덕의 상태는 말도 못하고 움직이지 못한다 뿐이지 정신도 말짱했고, 사람들의 이야기도 잘 들렸다.
처음엔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지만, 시간이 흐르자 그것도 천천히 적응되어갔다.
그렇게 적응이 되자 고덕에겐 시간이 남아돌기 시작했다.
그때가 되어서야 고덕은 자신의 내부를 제대로 관조할 수 있었다.
내력의 도움 없이 내부를 관조한다는 것은 생각 외로 어려운 일이었다.
생각을 집중하고 또 집중하고서야 내부의 일부를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보인 고덕의 내부는 엉망진창이었다. 혈도는 막혔고, 내력은 흩어져 근육에 틀어박혔다.
그 탓에 기운은 돌지 않았고, 근육은 마비라도 된 듯 땅땅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마비는 심해져 왔고, 혈맥은 점점 더 꽉 막혀 갔다. 그것이 고덕의 조급증을 부채질했다.
다시금 금방이라도 미칠 것 같은 조급함이 고덕의 전신을 지배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고덕의 몸은 더욱 빠르게 피폐해져 갈 뿐이었다.
몇 날 며칠을 노력해도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나빠지는 속도만 빨라진다는 걸 확인한 고덕은 결국 모든 걸 포기해버렸다.
우스운 건 그렇게 포기를 하고 나니 정신 집중도 더 잘되고, 그에 따라 관조의 범위도 점점 더 넓어져 갔다는 것이다.
그렇게 사흘이 흐르고서야 고덕은 자신의 내력이 완전히 뒤엉켜 멈춰버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마치 실타래가 엉키듯 가닥가닥 나뉘어져 움직이던 내기들이 마구 뒤섞여 엉켜 버린 것이다.
모든 것을 확인한 그는 엉킨 실타래의 끝을 찾아 천천히 움직이도록 노력해보았다.
하지만 결과는 연이은 실패였다.
더구나 오랜 시간 곡기가 끊긴 탓인지 체력이 떨어지면서 집중력과 의지력도 함께 떨어지고 있었다.
형, 고길이 자신에게 어떡해서든 무엇을 먹이려 애를 썼지만, 전혀 움직이지 않는 혀는 음식을 목구멍으로 밀어 넣지 못했다. 오히려 음식물이 기도를 막아 숨을 쉬기가 어려울 뿐이었다.
그 경우를 몇 번 겪더니 형도 결국은 포기하고 말았다.
안 된다고 속으로 몇 번을 고함 질렀지만, 형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이젠 깨어 있는 시간마저 줄어들어갔다. 처음으로 이대로 죽을 거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 그녀가 왔다.
호철랑을 보며 그래도 아는 얼굴을 한 사람이라도 더 보고 죽을 수 있게 된 것 같아 조금은 기뻤다.
자꾸 아득해지는 의식이 고덕의 정신을 갉아먹었다.
* * *
바람은 기운을 북돋고, 땅은 자랐다. 해는 강물을 눌러 구름을 만들고, 그렇게 일어난 구름은 비를 뿌렸다.
땅에 뿌려진 비는 온 땅을 물기로 가득 채웠다.
물기가 너무 많아질 무렵, 바람이 구름을 흩었다.
촉촉이 젖어 윤기 나는 땅을 해가 비추고, 땅은 더위를 먹고 초록빛 아이를 밖으로 내보냈다.
아이들은 바람과 해와 구름을 먹고 자라 하늘을 향해 크게 뻗어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다른 때처럼 해로 인해 일어난 구름이 나무를 때려 불을 내었다.
온 초록 아이들에게 불이 번지고, 땅은 이내 시커먼 재만 남았다.
그 재들이 다시 땅의 기운을 북돋아 아이들을 키워냈다.
마치 꿈같기도 했고, 어릴 적 부모에게 들은 이야기 같기도 했다.
그런 일련의 과정들이 고덕의 상상에서, 또 머릿속에서, 그리고 몸속에서 일어났다.
살이 붙고, 힘이 서리고, 피가 돌고, 근육이 생기를 머금자 조금씩 실타래처럼 엉겨 있던 내력들이 움직임을 보였다.
* * *
호철랑이 고덕의 간병을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비쩍 말랐던 고덕의 몸에 다시 살이 오르기 시작했다.
모두가 즐거워했지만, 구만은 고개를 갸웃거려야 했다.
이상하게도 식사를 한 후가 아니라 하기 전에 호철랑이 자신은 물론이고, 고덕의 이를 유난히 깨끗이 닦아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십여 일이 지났을 때쯤 고덕의 눈이 뜨였다.
그리고 다시 십여 일이 흐른 날, 고덕의 음성이 돌아왔다.
“제발 입으로는 그만 먹여!”
그때서야 사람들은 호철랑이 고덕에게 밥을 먹인 방법을 알 수 있었다.
남자들은 부러워했고, 여자들은 괜히 몸을 꼬며 호철랑의 어깨를 슬쩍 찔렀다.
입을 연 지 보름, 고덕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사흘. 회복은 무섭게 빨랐다. 내력은 모두 자리를 찾았고, 굳었던 근육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막혔던 혈맥은 모조리 뚫리면서 오히려 이전보다 훨씬 단단해졌다.
마치 막혔던 찌꺼기들이 혈맥의 외벽으로 변한 듯한 느낌이 강했다.
세인들이 말하는 복안 혈사가 벌어진 지 꼬박 석 달. 고덕은 이전의 몸 상태로 돌아왔다.
아니, 그의 내력은 한층 더 깊어지고 강해졌다. 그리고 가닥가닥 나뉘어 돌았던 내력이 드디어 하나로 합쳐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사문의 비처에서 보았던 글귀 하나가 생각났다.
가닥가닥 나뉘어진 하천들이 합쳐져 강이 되고, 강이 모여 바다를 이루노니 하백의 수는 모두 하나라. 비는 구름의 아들이고, 구름은 해의 딸이라. 또한 바람의 자손일저. 모두가 하나가 될 때 세상이 너를 비추리라.
마치 고덕의 뇌리를 망치로 내려치는 듯 커다란 울림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그 울림이 가라앉은 고덕의 혈맥에는 노도처럼 흐르는 내기의 강이 존재하고 있었다.
* * *
원상 복구는커녕 이전보다 훨씬 좋아진 몸 상태에 고덕은 나름대로 만족해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덕은 그런 경험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다.
정신은 똑바른데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거. 그것만큼 무기력하고 무서운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무슨 일로 온 거요?”
고덕의 물음에 호철랑이 배시시 웃었다.
“참 빨리도 물어보시네요.”
“험험…….”
단지 무안하기 때문에 헛기침을 한 건 아니었다. 호철랑은 자신의 웃음이 그녀를 닮아 있음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사랑해요.’
그녀의 그 말이 오늘따라 미치도록 그리웠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세요?”
“아, 아니오. 한데, 정말 무슨 일로 온 게요?”
고덕의 물음에 호철랑은 그저 어깨를 으쓱해 보였을 뿐이었다.
“휴가예요.”
“휴가?”
“예. 지금은 제가 할 일이 없어서요.”
사강 체제가 정립되고, 북쪽에 동북어위도총부가 완벽하게 자리를 잡자 중원을 차지한 관부는 조용해졌다.
누구 하나가 먼저 나서는 동시에 다른 이들로부터 공격을 받게 될 상황인지라 철저하게 균형을 맞춰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깨지려면 어느 한 곳이 욕심을 내야 하는데, 아직은 그 어느 곳도 욕심을 부리지 않고 있었다.
“그 탓에 제가 할 일이 사라져 버렸죠, 뭐.”
머리싸움을 할 이유가 없어졌다는 의미였다. 그 말에 묵린이 헛웃음을 웃었다.
“허허, 그것참. 잘됐다고 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안됐다고 해야 하는 건지 도저히 모르겠군요.”
묵린의 말에 호철랑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잘됐다고 봐야겠죠. 그 덕에 이렇게 놀고 있으니 말이에요.”
“그런가요?”
“네. 확실히 그렇답니다.”
호철랑의 답을 들은 사람들의 입가에 미소가 짙어졌다.
그런 이들을 둘러보던 고덕의 시선이 고진에게 머물렀다.
“아랑이 소식은 들은 게 있더냐?”
“그게… 아직…….”
아랑의 이름이 거론되자 고진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애써 잊고 살고 있지만, 이름만 들어도 쏟아지는 걱정을 막을 수 없었던 탓이다.
그런 고진에게서 시선을 돌린 고덕의 눈이 왕팔에게 향했다.
그 시선의 의미를 알아차린 왕팔이 설명을 이었다.
“남궁세가에서 나온 소식은 특별한 게 없습니다. 다만…….”
“다만?”
바짝 신경을 곤두세우는 고덕에게 왕팔이 조심스럽게 답했다.
“남궁영호가 신임 가주가 되었습니다.”
남궁영호면 아랑의 시아버지다. 자신을 죽이려 일어섰던 남궁세가의 신임 가주 자리에 아랑의 시아버지가 앉았다는 뜻을 좀처럼 가늠할 수 없었다.
“남궁태는?”
“이혼을 했다거나, 다시 혼약을 했다는 말은 들리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아이를 가졌다는 말도…….”
앞의 두 경우는 직접적인 증거가 될 테고, 마지막의 경우는 간접적인 증거가 될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 세 가지 경우 모두 맞아떨어지는 정보가 없었다.
“정보를 습득하는 창구는?”
“그것이…….”
쉽게 답하지 못하는 왕팔을 보니 제대로 된 정보가 취합되지 못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하긴 하포에 앉아 취합할 수 있는 정보라 해봐야 풍문이나 소문이 다일 터였다.
“돈을 쓰면 정보를 알아볼 수도 있다던데, 가능한 곳을 아나?”
고덕의 물음에 왕팔이 잠시 반색을 했다가 이내 풀이 죽었다.
그의 친정이나 다름없는 하오문은 대표적인 정보 상인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왕팔은 끝까지 추적해 죽여야 하는 변절자일 뿐이었다.
만에 하나 그들에게 자신의 종적이 발각당하는 날엔 위협만 끌어들인 꼴이 될 터였다.
왕팔의 표정에서 그런 것을 읽은 고덕이 피식 웃었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가서 의뢰해. 의뢰자는 검마.”
그 말에 왕팔의 얼굴에 다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아무리 하오문이 자신을 죽이고 싶어 해도 검마의 의뢰를 수행하는 이를 향해 이빨을 드러낼 순 없다.
모두 죽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결국 얼마간의 돈을 쥐어준 왕팔에게 후량을 딸려 시내로 내보냈다.
하포에서 하오문을 찾지 못한다면 왕팔은 고덕의 악명이 자자한 복안으로 향할 것이다.
기다림은 생각 외로 길었다.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 출발한 왕팔과 후량은 해가 저물고 달이 떠서야 돌아왔다.
“아랑이는 남궁세가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잡아먹은 시간에 비해 정보가 너무 짧았다. 하지만 고진과 나성운은 그것만으로도 한시름을 놓았는지 훨씬 가벼워진 얼굴로 자신들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돌아가자 아껴 두었던 왕팔의 말이 이어졌다.
“여전히 소가주가 된 남궁태의 아내인 것은 맞습니다. 한데…….”
“한데?”
바짝 다가앉는 고덕에게 왕팔이 걱정스런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소가주의 아내는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남궁태가 소가주가 되었고, 그런 그녀석의 아내라면서 소가주의 아내는 아니라니?”
“정식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소리군요.”
호철랑의 음성에 고덕의 시선이 돌아갔다.
“그게 무슨 뜻이지?”
“이미 성혼을 했으니 아내의 자리는 인정한다. 하지만 세가의 가주를 이을 소가주의 아내로는 인정할 수 없다. 그 뜻이지요.”
깔끔한 호철랑의 정리에도 불구하고 고덕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그에 호철랑의 부연 설명이 이어졌다.
“한마디로 정실이 아니라는 의미예요.”
순간, 고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감히 자신의 피붙이를 첩으로 삼았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남궁 놈들, 내 경고가 우스웠던 모양이로군!”
남궁창천을 비롯한 남궁세가의 모든 고수들의 허리를 깨끗이 잘라 보냈다.
뭐, 당시에 자신이 처한 상황이 선별해 손을 쓸 여유가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애초부터 그럴 생각 자체가 없었다.
자신은 성인군자가 아니다. 사돈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이라도 자신에게 칼을 들이대면 결단코 용서하지 않는다.
한 번 배신한 놈은 두 번도 하고, 세 번은 더 쉽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완벽하게 뿌리 뽑지 않은 것은 아랑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안휘협가도 나성운과 연관된 조카들과 고진을 보아 두고 볼 뿐이지, 마음에 차서 그냥 두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모른다면, 손을 대어 가르칠 마음은 차고 넘치도록 있었다. 물론 대가는 피가 되겠지만 말이다.
천천히 굳어 종내엔 싸늘한 살기를 뿜어내는 고덕의 신위에 사람들의 표정이 굳었다.
그들도 고덕의 주변으로 휘몰아치는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 * *
다음 날, 고덕이 써준 서신이 왕팔과 하오문을 통해 남궁세가로 향했다.
복안에서 출발한 전서구가 안휘의 성도인 합비에 자리한 하오문 안휘 총 분타에 도착하고, 그곳에서 다시 전서구를 통해 황산의 하오문 분타로 향했다.
그렇게 긴 여정을 통해서야 고덕의 서신은 남궁세가에 도착했다.
발신인에 적힌 검마란 두 글자에 놀라 검존은 물론이고 모든 수뇌가 모인 자리에서 공개된 서신은 대단히 짧았다.
죽고 싶지?
글자도 몇 개 없는 단 한 줄짜리 서신에 남궁세가는 발칵 뒤집혔다.
그간 검마의 복수에서 비켜서 있다는 안도감이 그 서신으로 완전히 무너진 탓이었다.
“이런 서신이 갑자기 왜 왔다고 생각하시오?”
신임 가주에 오른 남궁영호의 물음에 장로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닫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섣불리 의견을 개진했다가 틀리기라도 하는 날엔 작은 망신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각 전체의 안위에 크게 해를 끼치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런 장로들이 답답했는지 남궁영호의 시선이 여전히 외총관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남궁단에게 향했다.
“외총관은 어찌 생각하시오?”
가주의 물음에 남궁단은 조심스럽게 의견을 개진했다.
“아무래도 지난 복안의 일을 따지려는 것이거나… 그도 아니면 소가주의 가정사가 아니겠습니까?”
남궁단의 말에 장로들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그걸 제외하면 검마가 이따위 서신을 보낼 리 없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검존이 어두운 표정으로 물었다.
“소문이 새어 나갔더냐?”
“세가 안에만 입이 수백 개입니다. 무사들이야 함구령으로 막을 수 있다지만, 시비들과 몸종들의 입은 막기 어렵습니다.”
무서움도 많으면서 이상하게도 안에서 본 비밀을 밖으로 퍼트리지 못해 안달인 것이 바로 시비들과 몸종들이다.
그러다 걸려 많은 이가 죽거나 그에 상응한 대가를 받아도 좀처럼 고쳐지지 않는 고질이었다.
물론 혹자는 그들 속에 간자가 끼어 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단순히 그렇게만 보기엔 문제가 너무 많았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태의 안사람 문제일 듯싶다. 우리의 처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겠지.”
검존의 말에 남궁단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자신이라도 조카가 첩이 되었다면 결코 좌시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만에 하나 이것으로 손을 써올 수도 있을까요?”
남궁영호의 물음에 검존이 잠시 생각해보다 고개를 저었다.
“얼마 후면 정천맹에 불연대란 이름의 무력 단체가 탄생한다. 제일 해결 목표가 바로 검마의 척살이니, 우리에게 신경 쓸 여력은 없어질 게야.”
사실 그에 대해 검존은 끝까지 반대를 했다. 하지만 소림의 결정을 막을 길은 없었다.
그 결정을 막기에는 소림을 지지하는 문파들의 수가 너무 많았다.
더구나 소림은 무극검의 경고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대신 검마의 위험성은 충분히 인식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소림 본산과 속가를 샅샅이 뒤져 일백의 기재를 선발했다.
그들에게 소림은 칠십이 종 절예를 모조리 공개했다. 더구나 대환단도 아낌없이 풀었다.
한마디로 단숨에 고수를 만들기 위한 모든 배려를 아끼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탄생한 백여 명의 청년 고수들을 모조리 정천맹으로 보냈다.
그들은 그곳에서 제갈세가가 파견한 백인의 두뇌들이 개개인의 능력과 취향에 맞게 조절한 개별 교육에 맞춰 맹렬한 훈련에 임하고 있었다.
정천맹과 백도의 많은 문파들은 그들에게 거는 기대가 제법 깊었다.
“하면, 길어야 한두 달만 버티면 되는 것이겠군요.”
남궁영호의 말에 검존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끝나진 않을 게야. 문제는 우리가 기습을 당할 염려는 그만큼 줄어든다는 것이겠지.”
“만에 하나 그 전에 기습을 가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남궁영호의 걱정에 검존은 확답을 할 수 없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검마의 성격상 내일 바로 쳐들어올지도 모르고, 아예 계속해서 겁만 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만이 알겠지.”
원론적인 검존의 답에 남궁영호는 실망한 눈치였다.
하긴 검마의 조카를 소가주의 정실로 인정할 수 없다는 말을 맨 처음 꺼낸 이는 생각 외로 검존이었다.
검마의 무서움을 가장 절실히 강조하던 검존의 돌연한 변화에 남궁영호와 남궁단은 꽤나 당황했지만, 그녀를 통해 얻은 남궁가의 핏줄이 세가를 이을 경우 자칫 마도로 빠져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걱정엔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반대하는 남궁태를 설득해 아랑을 첩으로 내려앉히고 정실 자리를 비워두었다.
그 자리는 검마의 일이 해결되는 대로 백도 유수의 문파에서 규수를 맞아들여 채우기로 말을 맞춰둔 상태였던 것이다.
결국 시간을 끌어본다는 원론적인 선에서 결론을 내린 남궁세가는 별다른 조처를 취하지 않았다.
그리고 남궁세가의 조처를 유심히 지켜보던 고덕은 고심을 해야 했다.
그런대로 자신의 위험성을 인지하던 남궁세가가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천천히 적대 세력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왜일까? 뒤늦은 복수심? 아니면 검마란 이름에 대항할 수단의 확보?
여러 가능성을 두고 유심히 관찰하던 고덕은 한 가지 결론에 이르렀다.
바로 시험이다. 검마란 이름의 위험성과 그 진득한 피 냄새에 대한 의심.
그 의심을 방관하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변한다. 그리되면 정말 백도의 모든 문파를 상대로 전쟁을 벌여야 할지도 몰랐다.
일이 그렇게 확산되면 제아무리 천하의 고덕이라도 무사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선 피와 살육과 광기만 남을 뿐이다. 그 안에서 무수히 많은 이들의 목숨을 빼앗고, 종내엔 자신도 목숨을 잃게 될 것이 자명했다.
그것을 직감한 고덕은 이를 지그시 물고 눈에 힘을 주었다.
살을 저미고 뼈를 가르는 고통이 수반될 것이다. 가족의 행복을 위해 끼어든 일이 피붙이의 불행으로, 눈물로 점철될 것을 알면서도 고덕은 결심을 굳혔다.
결국 피로 가득한 경고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굳힌 그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조용히 하포를 떠났다.
그리고 그로부터 사흘 후 야밤.
“크아아악~”
“저, 적이다!”
찢어지는 비명 속에 울린 경악성에 남궁세가 전체가 깨어났다.
“적은 하나다. 모두 뭉쳐서 막아라!”
고위 무사들의 독촉에 일반 무사들이 뭉쳐서 다가왔지만, 그들은 다가오는 족족 거대한 시체 더미만 늘려 놓을 뿐 침입한 적의 지근거리로는 접근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적을 막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가운데 마침내 남궁세가의 고수들이 몰려나왔다.
하지만 그들은 몰려나온 것보다 빠르게 밀려 들어갔다.
만월이 뜬 하늘에 달이 하나 더 떴다.
대신 이번에 새로 뜬 달은 붉게 달아오른 현월, 바로 초승달이었다.
크아아아악~
폐부를 찢는 듯한 비명을 끌며 현월이 가른 중심부가 온통 피로 물들었다.
만월이 가득한 밤에 느닷없이 나타난 현월의 무지막지한 살육은 그들에게 한 가지 이름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거, 검마! 검마다!”
누군가의 입에서 나온 단 한마디에 남궁세가 전체가 싸늘하게 식었다.
그 중심을 또다시 떠오른 현월이 붉게 물들였다.
“도, 도망가!”
처음의 외침이 누구에게서 시작된 것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 외침의 반향은 대단히 크게 나타났다. 순식간에 검을 버리고 몸을 돌린 남궁가의 무사들이 태반이 넘은 것이다.
그럼에도 악착같이 남아 버티는 무사들의 중심에서 노란 달무리를 이끌며 현월이 날아올랐다.
쐐애애애액-
엄청난 파공성을 이끌며 떠오른 현월의 끝이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그 붉은색을 이끌고 다시 곤두박질친 현월이 처음으로 폭발했다.
쿠왕-
폭발의 중심지를 기준으로 엄청난 풍압이 모든 것을 할퀴고 지나갔다.
그로 인해 일어난 흙바람이 가라앉자, 드러난 상처는 깊고 잔인했다.
조금 전까지도 생생하게 살아서 움직이던 무사 수십이 한낱 육편으로 변했고, 주변의 건물 대여섯 채가 힘없이 주저앉았다.
도저히 사람의 것으로 믿을 수 없는 강력한 힘에 떠밀린 남궁세가의 고수들이 피로 점철된 길을 따라 점점 안채로 밀려들고 있었다.
그들이 밀려 들어가자 드디어 남궁세가의 진정한 힘이라 불리는 제왕무적검대가 풀려나왔다.
강력한 힘으로 되받아치며 날아오르는 이십 인의 검수들을 향해 시리도록 차가운 은빛 사선이 허공에 그려졌다.
스걱-
방위, 높이, 위치가 제각각 다른 이십 인의 제왕무적검대 검수들의 신형이 동시에 비스듬히 어긋났다.
팍- 픽-
허공에 핏줄기가 솟구치면서, 사선으로 잘려 나간 제왕무적검대의 신형이 둘로 변해 떨어져 내렸다.
그들의 두 동강 난 몸뚱이와 함께 피가 비가 되어 뿌려졌다.
제왕무적검대가 단 일검에 끝장나는 모습이 남궁세가 검수들의 마음에 비수가 되어 꽂혔다.
으아아아아아악~
느닷없는 비명의 꼬리를 이으며 사람들 사이에서 피가 번졌다.
푸확-
미친 듯이 몸을 떨며 비명을 지르던 사람을 뚫고 혈인(血刃)이 솟아올랐다. 그렇게 솟아오른 혈인은 주인의 목숨이 다한 순간 한 줌의 피로 무너져 내렸다.
혈(血)의 인(刃).
마도의 절세 마공이 남궁세가 한가운데서 피어올랐다.
사방 곳곳에서 자신의 피가 칼이 되어 몸속에서 솟구쳐 올랐다.
커헉, 크아아아악… 크악!
하나의 비명이 둘로, 둘의 비명이 셋, 넷의 비명으로 순식간에 번져 갔다.
종당에는 십여 명이 넘는 검수들이 자신들의 피에 몸이 뚫리며 힘없이 무너졌다.
온 천지가 남궁세가 무인들의 시신으로 가득해진 순간, 갑자기 정적이 찾아왔다.
서로가 등을 맞대고 두려운 눈으로 사방을 경계하는 남궁세가의 검수들도 갑작스런 정적에 당황한 눈치가 역력했다.
그 쥐 죽은 듯한 정적을 밟으며 한 사람이 천천히 들어섰다.
그에게 모든 이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두려움에 젖은 일반 무사에서부터 자신의 애검인 창궁검을 그러쥔 채 전의를 불태우던 검존까지…….
“내가 경고했을 텐데?”
천천히 달빛 아래로 걸음을 옮겨 모습을 드러낸 이는 검마의 이름으로 불리는 고덕이었다.
그의 출현에 검존의 입에서 절로 침음이 흘렀다.
무극검이 두려워하고, 자신의 능력으론 측량조차 불가능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거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홀로 팔대세가의 수좌인 남궁세가를 피로 씻을 수 있는 능력이 있을 거라곤 결코 믿지 않았다.
솔직히 대부분의 백도인들은 해남검문의 혈사도 그 혼자가 아닌 마교의 무력 집단을 대동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것은 검존도 다르지 않았다. 그것이 약간의 방종을 가져왔다.
일말의 자신감도 키웠다. 최선을 다한다면 검마 홀로는 남궁세가를 칠 수 없을 것이란 막연한 기대가 밑바닥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너무 많은 피와 너무 많은 목숨이 대가로 지불되었지만…….
“소, 솔직히 믿지 않았소.”
“뭘?”
“홀로 이럴 수 있다는 것을 말이오.”
검존의 자책 어린 음성에 고덕이 피식댔다.
“똑똑한 줄 알았더니, 결국은 똑같은 멍청이였군.”
고덕의 힐난이 비수가 되어 검존의 가슴을 후벼 팠다.
“이제 정리를 하지.”
말을 섞을 마음도 사라졌던가. 다시금 검을 들어올리는 고덕의 앞으로 작은 인형 하나가 뛰어들었다.
“작은할아버지!”
두 팔을 벌리고 고덕으로부터 남궁세가의 검수들을 가로막고 나선 것은 온통 눈물 자국뿐인 아랑이었다.
“아가…….”
측은했다. 자신 때문에, 몇 번 보지도 못했던 외숙조 때문에 비틀린 조카 손녀의 운명이 슬펐다. 그 탓에 음성은 물기로 가득했다.
“살려 주세요. 제발, 이렇게 빌게요. 살려 주세요, 작은할아버지.”
피 웅덩이로 변한 바닥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비는 아랑의 모습에 고덕은 차마 검을 휘두르지 못했다.
손을 댄 이상 중도에서 멈추면 애초에 손을 대지 않은 것만도 못하다. 이 상황에서 살려 두면 끝낸 후환으로 돌아올 거란 걸 알면서도 그는 검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후환이 자신의 목을 치는 적의 칼날이 될지라도 지금 당장은 아랑의 눈물을 외면할 수 없었다.
깊은 한숨과 고뇌의 눈빛을 남겨 둔 고덕은 그렇게 몸을 돌렸다.
검마의 차가운 검날 아래서 남궁의 이름을 지켜 낸 것은 그들의 자부심 가득했던 검이 아니라, 그렇게 모질게 대했던 자신들의 며느리가 흘린 눈물과 애원이었다.
천천히 멀어져 가는 고덕의 등을, 남궁세가의 검수들은 흔들리는 눈으로 아랑의 슬픈 모습과 번갈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