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9장. 은원(恩怨)-얽혀 버린 수레바퀴
소림의 전갈을 받은 무당은 고심했다. 불가의 종가가 도가의 종가에 배움을 청했다는 것은 종교적 관점보다는 실행적 문제일 터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복안 혈사가 터진 직후이니 소림이 물어올 배움이란 뻔한 것이었다.
“괜한 걸음을 하는 것이 아닌지요?”
장문인 일성 진인의 걱정에 무극검이 빙긋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트집을 잡고 우리 탓을 하고 싶다면, 들어주면 그만인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말을 들을 이유가 없으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사백님.”
“남의 아픔을 들어주고 화풀이 상대도 되어주는 것이 덕이니, 원시천존의 가르침이 또한 그곳에 있는 것이 아니겠소.”
“그렇게 생각하신다니 막진 않겠습니다만… 혹, 그들이 이번 일을 키우는 데 우리 무당을 이용하고자 할까 봐 걱정입니다.”
“무당은 흔들리지 않을 겝니다. 아니 그렇소이까, 장문인?”
너만 흔들리지 않는다면 무당은 마음을 바꿀 일이 없다는 뜻이었다.
말뜻을 알아들은 일성 진인은 작은 미소와 함께 도호를 중얼거렸다.
“무량수불…….”
그런 장문인을 담담한 미소로 바라보던 무극검은 그날 장문의 허락을 얻어 하남의 숭산으로 향했다.
* * *
복안 혈사로 중요 고수나 가주, 또는 문주를 잃은 문파는 상당히 많았다.
그중에는 불행히도 고덕과 각별한 인연을 맺은 남궁세가도 끼어 있었다.
아들의 주검이 들어 있는 관을 마주한 검존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복수를 외치자니, 상대의 강함은 둘째 치고 자신을 지키기 위한 정당한 싸움의 결과이니 그를 탓할 수 없었다.
더구나 이쪽은 배신을 했다는 부담감마저 안고 있었으니…….
그렇다고 가주까지 죽어나간 마당에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순 없는 노릇. 이래저래 이슬을 머금은 검존의 노안은 잔뜩 찌푸려져 펴질 줄 몰랐다.
“아버님…….”
이번이 벌써 서른 번째다. 자신이 부르고 방에 들어앉은 부친은 아무 말도 없다.
여전히 묵묵부답인 부친의 방문 밖에서 남궁영호는 서른한 번째로 입을 열었다.
“아버님, 제발…….”
정성이 닿았을까, 아니면 귀찮았던 걸까? 한때 검존이라 불렸던 노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돌아가거라. 은퇴한 늙은이가 다시 나서면 세가 전부가 웃음거리가 될 뿐이다.”
단호한 거절의 말이었지만, 근 한 시진 만에 처음 들려온 부친의 음성이 반가웠던지 남궁영호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하오나 아버님, 지금은 비상 상황입니다. 우리만이 아니라 수도 없는 문파와 세가가 살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가주를 비롯해 적지 않은 고수를 잃었습니다. 세가를, 세가를 버리지 말아주십시오, 아버님.”
간곡한 남궁영호의 음성에 잠시 정적이 이어지다 문이 열렸다.
그렇게 모습을 드러낸 남궁호군의 외관은 비쩍 말라 있어, 그간의 시름을 단편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아버님!”
반가움 반, 걱정 반으로 바짝 엎드려 부르는 둘째 아들을 내려다보던 남궁호군이 물었다.
“내가 나서면 금분세수를 파한 책임을 져야 할 게다.”
“그것을 따질 만한 계제가 아닙니다.”
“다른 수뇌들과는 합의된 이야기더냐?”
“장로원에서 먼저 원한 일입니다, 아버님.”
가주와 함께 검마를 치자고 가장 강력히 주장한 세력이 바로 장로원이다.
은퇴했다는 명분은 집어치우고 그들을 힘으로라도 누르지 못했던 것이 천추의 한으로 남았다.
그런 인사들이 자신의 복귀를 가장 원했다는 것이 가소로웠다.
“가보자꾸나. 가서 그 낯바닥들을 보아야겠어.”
결국 결정을 내린 남궁호군이 방에서 몸을 빼냈다.
부친의 결정이 뒤바뀔까 걱정이 들었던지 그런 남궁호군을 앞장서 인도하는 남궁영호였다.
“잠시만…….”
걸음을 멈춘 남궁호군이 손을 뻗자, 일 장 깊이로 땅을 파고 묻어두었던 그의 애검이 그 위에 심어진 난을 뚫고 튀어 올라왔다.
손에 잡힌 검에 내력을 주입하자 덕지덕지 붙어 있던 흙과 녹이 우수수 떨어져 나가며 예전의 찬란한 자태를 곧바로 되찾았다.
신주 구대명검이라 불렸던 창궁검이 그렇게 주인의 손으로 돌아왔다.
검을 그러쥔 남궁호군의 걸음에 어느새 힘과 기백이 실리기 시작했다.
* * *
대청으로 들어서는 남궁호군, 아니 이제 다시 검존으로 돌아온 그를 바라보는 장로들은 잔뜩 기가 죽은 표정이었다.
더구나 검을 들고 들어서는 검존을 발견한 이후엔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자신의 설득에 고개를 빳빳이 들고 검마를 잡는 일에 앞장서야 하는 이유들을 수십 가지도 넘게 주워 삼키던 이들이라곤 결코 생각할 수 없는 모습들이었다.
쿵-
고의적으로 내력을 담아 검을 바로 세운 검존이 상석에 앉자, 장로들이 눈치를 보며 각자의 자리에 앉았다.
“피해 보고?”
검존의 물음에 인원의 관리를 담당하는 장로가 벌떡 일어나 서류를 읽었다.
“가, 가주 외 열세 명 사망입니다…….”
“죽은 이들의 신상?”
“구검원의 노고수들이 셋, 호원의 고수들이 다섯, 창궁검대와 진천검대의 고위 무사들이 또한 다섯입니다.”
“모두 초절정 이상인 자들이로군.”
“그, 그렇습니다.”
“하면 세가에 남은 초절정 이상인 고수들의 수는?”
“태, 태상가주님을 제외하면 외총관과 호원의 차석뿌… 뿐입니다.”
“그래, 세가의 고수들을 모조리 말아먹은 느낌은 어떠한가, 장로들?”
검존의 물음에 장로들의 고개가 바닥을 향해 파고들었다.
그런 장로들을 노려보던 검존이 작은 한숨과 함께 화를 간신히 억눌렀다.
“그럼 앞으로의 계획은?”
검존의 물음에 장로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자 참석해 있던 외총관, 남궁단이 입을 열었다.
“먼저 복수에 대한 방침을 결정해야 합니다.”
“그것은 이미 결정 난 것이 아니었나?”
살아서 당당한 모습으로 세가를 나갔다 시신이 되어 관 속에 누워 돌아온 가주를 받은 날, 검존 자신이 가문의 가장 웃어른으로 복수는 안 된다고 못을 박았었다.
“하지만 여전히 세가에선 복수의 여론이 뜨겁습니다.”
“하면 가솔들이 더 죽어서야 정신을 차리겠단 말인 게야!”
검존의 힐난이 날카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수 이야기를 꺼낸 남궁단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가주와 많은 형제가 죽었습니다. 그냥 묻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닙니까?”
일이 시작되기 전엔 가장 극렬하게 반대했던 이가 바로 지금 복수를 주장하는 남궁단이었다. 그랬던 그가 왜 복수를 주장하는지 검존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 탓에 남궁단을 부르는 음성은 유난히 부드럽고 물기가 가득했다.
“단아, 배신은 우리가 먼저 한 것이다.”
“압니다. 하지만 그는… 그는 죽이지 않고 패퇴시킬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 결정은 그의 몫. 애초에 배신의 칼을 들었을 땐 그것을 가지고 왈가불가할 자격이 우리에겐 없었다.”
“그래도… 그래도…….”
남궁단은 고덕의 처사가 너무나 서운했다.
검존의 말이 반만 사실이었어도 그는, 분명히 살려서 돌려보낼 수도 있었다.
병신이 되어도, 단전이 파괴되어 무공을 다시는 연성하지 못해도 살아서만 돌아왔다면…….
그 생각이 남궁단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자신과 함께 가길 원했던 가주를, 아니 사촌 형을 사지로 홀로 보낸, 좀처럼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죄책감의 발로인지도 몰랐다.
울먹이는 남궁단에게서 물기 어린 시선을 거둔 검존이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복수는 불가. 그를 단죄할 능력도 명분도 없는 탓이다. 추후 이 문제를 다시 꺼내는 이는 이 창궁검이 용납지 않을 것이다.”
쿵-
창궁검을 다시 한 번 내리찍는 검존의 음성에 장로들의 고개는 깊게 숙여졌다.
그들도 홀로 현경의 고수를 포함한 정천맹의 주력을 모조리 주살한 검마와 검을 맞댈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장로들의 반응을 확인한 검존이 다음 안건을 꺼내놓았다.
“다음은 신임 가주 건이다. 사촌 이내의 직계로 이어지는 가주의 승계 구도를 감안하면 당금의 가주 후보는 둘이다.”
검존의 말에 숙여졌던 장로들의 고개가 슬며시 들렸다. 그런 이들의 시선에, 물기 어린 눈으로 천장만 바라보는 남궁단과 굳은 얼굴로 굳게 입을 다물고 있는 남궁영호가 들어왔다.
“그들 중 가주를 이 자리에서 뽑는다.”
검존의 폭탄선언에 장로들이 당황성을 냈다.
“태, 태상가주님, 어찌 그런 중차대한 일을 그리 성급하게…….”
쿵-
창궁검으로 바닥을 짓찧은 검존의 일갈이 터져 나왔다.
“갈! 이 상황에서도 줄을 대고 이익을 따져 가주를 세울 참인가!”
한 가지 성으로 이루어진 세가라 해도 모든 이가 똑같은 성일 수는 없다.
사위도 들어오고, 외부 제자도 들어온다. 간혹 뛰어난 이들이 의탁해와 세가 내에서 일가를 이루기도 하고, 그런 이들의 가족이 또 다른 성으로 다른 힘의 축을 이루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남궁세가만 해도 일곱 개의 성을 쓰는 이들이 얽혀 살고, 그들의 힘은 무시하기엔 버거운 정도로 커버렸다.
그 탓에 열두 명의 장로 중 일곱이 바로 그들, 외방 출신들로 채워져 있었다.
당연히 가주 선출에 한 표를 행사하는 장로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줄서기를 하곤 했던 것이다.
그것을 정면으로 가로막고 나서는 검존의 일갈에 장로들은 고개를 파묻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검존이 결정을 내렸다.
“이 자리에서 표결로 처리할 것이다.”
검존의 기세에 눌린 장로들은 그 결정에 아무 소리도 하지 못했다.
그 상황에 남궁영호가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소자는 고사하고자 합니다.”
“이유?”
“소자의 며느리가 원흉의 가족입니다. 어찌 가주의 위에 도전하겠습니까?”
남궁영호의 말에 검존은 가차 없이 고개를 저었다.
“불가!”
“하오나 아버님…….”
“불가! 배신자가 피해자에게 그 죄를 물을 순 없다.”
“하오나 현실이…….”
“그가 마음이 넓어서 복수를 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그는, 마교의 교도를 토막 내어 개 먹이로 주어야 한다는 말을 해남검문주가 공식 석상에서 했다고 백도 십이대파의 하나였던 해남검문을 홀로 도륙 낸 인사다. 그런 그가 갑자기 득도라도 해서 살행을 자제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 터.”
검존의 말에 장로들의 목울대를 타고 마른침이 넘어갔다.
그런 장로들의 귀로 검존의 음성이 칼날처럼 파고들었다.
“그럼에도 그가 참는 것이 무엇 때문인지 깊이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여기서 그에게 빌미를 제공하면 나머지도 모두 죽는 거야. 죽음, 멸문 그것밖에 남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단 말이다!”
장내는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말귀를 완전히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어느 정도는 알아들은 듯했다.
그런 이들을 바라보며 검존이 말을 이었다.
“하니 고사는 받아들일 수 없다. 첫째 후보는 외총관인 남궁단이다. 그를 지지하는 장로들은 손을 들어라.”
완벽히 드러난 투표다. 훗날 가주로 올라선 이의 미움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니 서로 눈치만 볼 뿐, 장로들의 손은 좀처럼 올라가지 않았다.
“뭐야, 남궁단을 지지하는 장로가 하나도 없단 말인가?”
검존의 음성에 화들짝 놀란 몇몇 장로가 손을 들었다. 그들의 수를 센 검존이 말을 이었다.
“넷. 그럼 이제 남궁영호를 지지하는 장로들은 손을 들어라.”
검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손을 든 장로들의 수는 마치 짜기라도 한 듯 넷뿐이었다.
손을 들려던 장로들 중 수가 차자 은근슬쩍 올리던 손을 내린 이를 분명히 목격한 검존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하기 힘들었다.
“이도 넷. 하면 도합 여덟. 나머지 넷은 무슨 의미인가? 이들을 가주 후보로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인가?”
검존의 호통에 어떤 쪽에도 손을 들지 못했던 장로들은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쿵-
신경질적으로 창궁검을 내리찧은 검존의 입에서 고성이 터져 나갔다.
“갈! 내 이런 이들과 여태 세가를 이끌어 나왔다니. 사조들의 얼굴을 볼 낯이 없다! 오늘부로 장로원을 폐하니, 모든 장로는 평무사로 봉사하라!”
“태, 태상가주님!”
장로는 각자의 파벌을 대표하는 자리다. 이권이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그들에겐 삶의 질과 고난의 경중을 가리는 자리이니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데 지금 그 자리가 한꺼번에 날아가게 생긴 것이다. 그리되면 소수인 파벌은 다수의 파벌에 묻히기 쉽다.
그러면 지금 같은 수평의 체제는 다시 찾기 어려워진다. 그저 다수의 파벌이 소수의 파벌 위에 설 뿐…….
그것이 소수 파벌의 장로들을 절박하게 했다.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십시오, 태상가주!”
장로들의 애원에 검존이 한발 물러섰다. 그도 장로원을 정말로 없앨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좋다. 하나, 이번뿐이다.”
“예, 태상가주.”
이후에 이어진 투표에서 차기 가주로 선출된 이는, 전대 가주인 남궁창천의 동생이자 검존의 둘째 아들인 남궁영호였다.
소란스럽고 당황스러운 상황이 지나가고 검존을 위시한 장로들이 물러가자, 대청엔 남궁영호와 남궁단 둘만 남았다.
“이제 어찌할 생각이시오, 가주?”
남궁단의 반공대에 남궁영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놀리지 마라.”
“속이 좁다 하나, 그럴 만큼은 아니오.”
자신의 말투가 가주에 대한 최소한의 공경을 표하는 것임을 알리는 남궁단을 힐끗 쳐다본 남궁영호는, 그저 고개를 저어버렸다.
“모르겠다. 어찌할지…….”
“복수는… 꿈도 꾸지 마시오.”
조금 전까지도 복수를 부르짖었던 이의 말로는 앞뒤가 맞지 않아, 남궁영호가 의외란 음성으로 물었다.
“왜 갑자기 생각이 바뀐 건가?”
“생각이 바뀐 적은 없소.”
“하면, 아까는 왜……?”
“그저 그렇게라도 어리광을 부리지 않고서는 버티기가 힘들었을 뿐이오.”
남궁단의 말에 남궁영호는 그저 깊은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를 마주 보았다.
그러길 잠시, 남궁단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그 웃음에 남궁영호의 입가에도 웃음기가 설핏 스쳤고, 이내 둘은 표정을 풀고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했다.
길고 깊은 대화가 이루어지는 대청의 지붕 위. 창궁검을 가슴에 안은 검존이 대견한 눈빛으로 비스듬히 누워 안에서 들려오는 이야기에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 * *
새롭게 남궁세가의 가주가 선출되던 시기, 무당을 출발한 무극검이 소림에 도착했다.
곧 방장을 위시한 고승들이 모여들고, 개중엔 불목하니의 모습을 벗고 내소림의 수장으로 분한 양원 대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소림의 의사청으로 안내되어 들어오던 무극검은 마치 잘 벼린 칼날 같은 기세의 양원 대사를 발견하곤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불심의 도량인 소림에서 저런 기세를 내보일 이가 누군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무극검의 미소를 보면서도 소림의 방장인 복경 대사는 내소림주인 양원 대사의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
여하간 무극검은 외인. 외인에게 내소림은 철저한 비밀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아는지 무극검은 이내 양원 대사에게서, 시선은 물론 관심까지 걷어가 버렸다.
그런 무극검의 자기 제어에 양원 대사는 찬탄을 금치 못했다.
“이렇듯 먼 길을 달려와 주신 데 대해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복경 대사의 인사에 무극검은 가벼운 포권으로 답례를 대신했다.
“무당과 소림이 본래 한 사형제의 문파나 다름이 없으니 외인이라 생각지 않소이다. 하니 괘념치 마시구려.”
복경 대사가 소림의 방장이라고는 하나 무극검이 한 배분 위였다.
더구나 복경 대사의 선사(先師)였던 우진 선사와는 막역한 지우로 지냈던 탓에 사사로이는 사숙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런 까닭에 복경 대사를 향한 무극검의 말투는 반공대였다.
하나 그런 무극검의 행태를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다. 그로서는 충분히 누릴 수 있는 권리였기 때문이다.
“그리 말씀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래, 이 퇴물을 청한 이유를 들어볼까 합니다만……?”
무극검의 요구에 복경 대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복안 혈사에 대한 강호의 대응이 이전의 비슷한 일들과는 전혀 다르게 진행되기에, 그 이유에 대한 고견을 듣고자 청했습니다.”
복경 대사의 말에 무극검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물었다.
“정말 몰라 묻는 게요, 아니면 무당의 입장을 말해달라는 뜻이오?”
“정말 알 수가 없어 여쭙는 것입니다, 사숙.”
복경 대사의 말에, 의사청으로 쓰이는 선방을 가득 메우고 앉아 있는 고승들을 바라보는 무극검의 마음은 답답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고승들의 눈에는 정말로 사정을 알지 못한다는 눈빛이 가득했던 까닭이다.
“허허, 이런…….”
어쩌다 소림이 현실감각을 이렇게 잃었나 싶었다.
아무리 불가의 가르침을 중요시하는 산사라고는 하나, 속가 제자들도 적지 않은 소림이 이렇듯 세사에 문외한일 줄은 미처 상상도 해보지 못했었다.
잠시 탄식으로 어이없음을 내려앉힌 무극검이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람들은 두 가지 연유로 복수를 꺼리는 거라오.”
“두 가지 연유라면……?”
“첫째는 두려움이오. 검마란 이름이 주는 원초적인 두려움에 이번 복안 혈사로 인해 드러난 검마의 능력이 더해지며 실질적인 두려움을 주었기 때문이오.”
“하면 두 번째 연유는 무엇입니까?”
첫 번째 연유는 이미 짐작하고 있던 것인지 곧바로 물어오는 복경 대사의 말에 무극검이 답을 이었다.
“둘째는 명분의 부재요.”
“명분의 부재라니요? 그는 마교의 마두였습니다. 그가 저지른 패악과 살행의 이야기는 차고 넘치도록 많지 않습니까?”
“하나 그것들을 따져 보면 당한 이들이 언제나 먼저 빌미를 제공했음을 알 수 있을 것이오. 검마의 악명이 가장 크게 높아진 해남검문의 일만 해도 알 수 있듯이 말이오.”
“하나, 그것으로 모두 해명되긴 어려워 보입니다만…….”
“그럴지도 모르겠소. 하나, 이번 일은 특히 명분이 없었다오. 검마가 먼저 분란을 일으킨 일이 없는데, 그를 척살하겠다고 나선 것은 분명 정천맹이었으니 말이오.”
그 말은 옳았다. 문제를 일으켜서라기보다는 지난 죄를 징치한다는 의미가 깊었으니까.
“하나 그것은 지난 잘못에 대한 징치였습니다.”
“무슨 징치 말이오. 앞서 말했다시피 그가 벌인 일들은 크건 작건 당한 이들이 모두 빌미를 먼저 제공한 것이었소. 그런 상황에서 정녕 징치를 원했다면 어떤 사건의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우선적으로 설명이 있었어야 했을 것이오. 만에 하나 그것이 타당성이 있었다면 무당도, 또 중립을 애써 지킨 여러 백도 문파들도 그저 바라보고만 있진 않았을 게요.”
무극검의 말에 소림 고승들의 표정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만약 정말 정당한 징치의 구실이 없었다면 이번 일에 앞장선 소림은 요사이 도는 소문대로 자파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희생양을 찾았다 오히려 크게 물린 셈이 되는 것이었다.
“그가 마교의 검마였다는 것만으로도 징치의 대상은 되지 않겠습니까?”
장경각주를 맡고 있는 복유 선사의 물음에 무극검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하면 마교가 단지 정천맹의 일원이라는 이유만으로 선사를 척살한다고 해도 타당한 이유라고 말할 수 있겠소이까?”
무극검의 말에 복유 선사의 입이 다물리자 더 이상 입을 여는 고승들은 없었다. 그들도 이제 정말 문제가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면 이번 일을 바로잡으려면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복경 대사의 물음에 무극검은 고개를 저었다.
“바로잡으려고도 말고, 달리 무엇을 하려고도 하지 마시구려. 이쪽의 잘못은 그가 목숨을 거두는 것으로 죄를 물었고, 그에 대해 복수를 하지 않는 것으로써 오해의 잘못을 인정하는 셈이니 서로가 그리 묻고 가는 것이 가장 좋을 듯하오이다만.”
무극검의 말에 복경 대사의 고개는 끄덕여졌지만, 상당수 고승의 고개는 천천히 가로저어졌다.
그 모습에 무극검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여전히 소림은 사안을 바로 보지 못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이후로도 이어진 문답은 긴 시간 이어졌지만, 무극검은 고승들의 꽉 막힌 사고방식을 전환하는 것엔 실패했다.
마찬가지로 소림승들은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대신 그들은 무극검이 소림의 행사에 반감을 가지고 있다는 근거 없는 선입견만 하나 늘려 놓았을 뿐이었다.
그렇게 백도의 시간이 분주히 흐르던 시기, 하포는 하포대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 * *
근 보름에 가까운 구완에도 불구하고 고덕은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반경 이백 리 이내의 용하다는 의원은 모조리 동원해봤지만, 그들은 원인조차 밝혀내지 못했다.
나중엔 소문이 나는 것도 무릅쓰고 강호와 연을 맺은 의원들을 납치해오다시피 끌고 와 상세를 보였지만, 그들도 원인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시간은 흘렀고, 고덕은 점점 야위어만 갔다.
물을 제외한 어떤 음식도 먹지 못한 탓이었다.
그렇게 비쩍 마른 고덕에게 미음이라도 먹여 볼 생각으로 열심히 숟가락을 움직였던 고길은, 입가로 흘러내려 버리는 미음을 닦아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고덕이 정신을 차리지 못한 지 이십 일이 되던 날, 예상외의 손님이 찾아왔다.
“호 판관!”
놀란 묵린의 음성에 툇마루에 앉아 있던 고길 내외와 마당을 쓸던 구가 그대로 납작 엎드렸다.
“이분들은……?”
판관이라는 말에 다짜고짜 엎드린 탓에 죄를 지은 것인가 싶었던 호철랑에게 협련이 당황스런 음성을 토했다.
“그게… 고 대협의 형님 내외와 제자입니다.”
“어마!”
남장을 한 것과 어울리지 않는 음성을 토한 호철랑은 고길 내외와 구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진땀을 흘려야만 했다.
“그러니까 저희 덕이의 친우 되신다고요?”
조심스러운 고길의 물음에 호철랑은 어설픈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예, 그, 그런 셈이죠, 예.”
“이놈이 밖으로 나다니더니, 높으신 양반과 연을 맺었던 모양이군요.”
판관과 친우가 되었다는 것이 대견한 듯 연신 그 말을 반복하는 고길에게서 시선을 뗀 호철랑이 묵린에게 물었다.
“한데 고 대협은 어디에 가셨습니까? 보이질 않네요.”
호철랑의 물음에 묵린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의 낯빛이 금세 어두워졌다.
“무슨 일 있어요? 설마 변고라도 생긴 건 아니겠죠?”
놀라 다그치는 호철랑을 달랜 묵린은 그를, 아니 그녀를 고덕의 방으로 안내했다.
이불 위에 죽은 듯이 누워 있는 고덕을 본 호철랑은 마치 죽은 사람을 대하는 양 펑펑 울었다.
대성통곡을 하는 호철랑을 달래기 위해 묵린은 그동안 벌어졌던 이야기를 그녀에게 상세하게 설명하여야만 했다.
결국 아직 죽거나 포기할 단계가 아니라고 판단했던지 호철랑은 곧바로 고덕의 간병인으로 돌아섰다.
남장도 훌훌 벗어버리고, 언제 준비해왔는지 단정한 성장으로 갈아입고 고덕의 곁을 떠나지 않은 것이다.
시간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