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78장 (79/129)

제78장. 득도(得道)-무당, 마음을 열다

고덕 일행과 헤어져 관도를 걷던 일성 진인이 무극검에게 의미심장한 음성으로 말했다.

“검마의 사정이 좋지 않다 하니, 이제 기회가 생긴 듯합니다. 속히 소림과 상의해 그자를 잡아야겠습니다.”

열기를 띤 일성 진인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던 무극검이 나지막한 음성으로 그를 불렀다.

“장문.”

“예, 사백님.”

“장문은 무당의 역사를 이제 닫고 싶은 게요?”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하면, 자연경에 발을 디뎠다는 사람을 잡아보겠다고 나서는 이유가 대관절 뭐란 말이오?”

“자, 자연경이라니요!”

현경의 위에 있다고만 알려진 경지 자연경. 자연 자체로 돌아간다 하여 도교에선 우화등선과 불교에서는 해탈의 경지와 함께 놓고 보는 절대의 경지다.

역사상 그 경지에 도달했다는 사람은 기록도 아닌 설화에 단 하나의 이름만 남겨 놓았다.

천마, 구양경.

마교의 창시자, 모든 마도 무공의 종주라는 그의 이름을…….

그러니 일성 진인이 기겁할 만큼 놀랄밖에…….

“말도 안 됩니다!”

“십수 년 전에 이미 현경의 정점을 달리고 있던 사람이오. 넘지 못했을 거란 생각은… 차마 들지 않소.”

“하, 하나 정녕 그런 경지에 도달했다면 어찌 이리 조용할 수 있단 말입니까? 벌써 천하를 발아래 두겠다고 분란을 일으켜야 했을 게 아닙니까?”

일성 진인의 말에 무극검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연경 이전에도 이미 강호에선 그를 막을 수 있는 자가 없었소이다, 장문인. 하나 그때에도 그는 천하를 발아래 두겠다는 말은 꺼낸 적이 없다오.”

“하, 하지만…….”

“그가 마교의 마두이기 때문이란 말이라면 하지 마시구려. 적어도 난 장문인이 풍문 너머의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으니…….”

굳건한 믿음이 담긴 사백의 시선을 받은 일성 진인은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을 힘겹게 밀어 넣어야만 했다.

그리고 검마란 이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고덕 일행의 뒤를 쫓아 움직이던 정천맹의 인사들과 조우했다.

“드디어 오셨구려.”

구환 대사의 환영에 무극검은 그저 쓰게 웃어 보였을 뿐이다.

“성취를 감축하오이다.”

무극검의 인사에 권황은 자부심이 가득한 얼굴로 반장을 했다.

“무량 도장의 축하를 받으니 이제야 진정 현경에 오른 기분을 느끼겠소이다. 아미타불…….”

“감축드립니다, 구환 대사님.”

“감사하오이다, 장문인.”

나름대로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만족한 권황이 곧바로 본론을 꺼내들었다.

“이렇게 직접 걸음을 하셨으니 이제 검마를 잡을 일만 남은 모양입니다.”

구환대사의 말에 힐끗, 담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무극검을 일별한 일성 진인이 미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대사. 무당은 나서기 어려울 듯합니다.”

생각지 못했던 말을 들은 구환 대사가 펄쩍 뛰었다.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서기 어렵다니요?”

“무당은 검마가 진정 마두인지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그 무슨 당치 않은 말씀이시오? 검마가 마두인지 확신이 서지 않다니. 그가 벌여 오던 일들을 정녕 몰라서 하시는 말씀은 아니겠지요?”

대경한 구환 대사의 물음에 일성 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들은 지겹도록 들어왔습니다. 하나… 그 속내는 솔직히 들여다본 적이 없다는 걸 오늘, 아니 대사를 만나기 직전에야 깨달았습니다.”

“도대체 그 무슨…….”

일성 진인의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구환 대사는 정신이 하나도 없는 표정이었다.

그런 구환 대사에게 일성 진인은 분명한 사과를 전했다.

“정천맹의 일원으로 맹의 명을 따르지 않은 죄를 물으신다면, 내 그에 상응한 대가를 치르지요. 하나 무당은 이번 일엔 나서지 않을 것입니다.”

단호한 일성 진인의 음성에 구환 대사는 결코 무당의 결정이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내렸다.

그러자 그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내, 무당이 이리 겁이 많은 줄은 몰랐소이다.”

일견 모욕이 분명한 말에도 일성 진인은 화를 내기는커녕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답니다. 무당은 겁이 납니다. 하니 이번 일에서는 빼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남긴 일성 진인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무극검도 조용히 그를 따라 일어섰다.

그런 무극검에게 구환 대사의 차가운 음성이 날아들었다.

“저 생각에 무량 도장도 동의하신 게요?”

“그리 생각하도록 만든 것이 나니, 아니라 못하겠소이다.”

“그 무슨!”

얼굴마저 시뻘겋게 변한 구환 대사에게 무극검이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대사, 멀리서 보세요.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세밀하게 보이긴 하나, 때론 전체를 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대에게서 그런 말을 들고 싶지는 않소이다!”

실망이 컸던지 구환 대사는 아예 귀를 닫아버린 듯했다. 그 모습에 안타까운 시선을 보내던 무극검은, 이미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일성 진인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떠나는 두 사람의 뒤로 구환 대사의 저주 같은 비난이 끊임없이 퍼부어졌다.

한참을 걸어 간신히 구환 대사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거리까지 움직인 무극검이 물었다.

“정녕 두려운 게요?”

“예, 사백님.”

일성 진인의 답에 무극검은 다소 어두워진 표정으로 말했다.

“상대에 대해 두려움을 갖는다는 것도 나쁘진 않겠소만, 그것이 결정을 좌우하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못하다오.”

걱정이 가득한 무극검의 말에 일성 진인은 잔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소질이 두려운 것은 검마의 경지나 무력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저질렀을, 그리고 저지르고 있는 아집과 독선입니다.”

분명 한발 더 나아간 듯한 사질의 말에 무극검은 걱정이 걷힌 표정으로 물었다.

“얻은 게 있는 모양이구려.”

“그저 간단한 이치만 생각해보았습니다.”

“간단한 이치라면……?”

“그는 우리 단둘과 함께했으면서도 손을 쓰지 않았습니다. 이미 사백을 누른 적이 있는 인사가 말입니다.”

“그냥 누른 정도도 아니었지요. 삼 초 만에 제압당했으니. 물론 그것도 최선을 다했다고 보기엔 어려워 보였소이다만…….”

“그런 인사가 왜 우릴 그냥 보내주었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해서 내린 결론이 그거인 게요?”

“그냥 우리가 알던 검마와는 조금 다른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았지요. 그러고 보니 다른 것들도 그것처럼 다르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그뿐입니다.”

그뿐이라곤 하나, 모든 것의 출발이 바로 그 생각에서 시작된다.

그것을 아는 무극검의 입가에 미소가 깃들었다.

“눈을 돌리면 피안이라는 불가의 말이, 소림보다 무당에 먼저 피어난 모양이외다.”

무극검의 놀림에 어린 감정이 대견함이라는 것에 일성 진인은 그저 희미하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그에게는 아직도 생각해봐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 * *

믿었던 무당이 빠지자 구환 대사는 당황했다.

하지만 그 당황은 떠오를 때보다 더 빨리 사라졌다. 얻을 수 없는 것에 미련을 갖지 않는 것이 바로 승려들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했던 까닭이다.

정신을 수습한 구환 대사는 곧바로 독괴와 상의한 후, 전서구를 띄워 안휘협가에 남아 있던 일양 선사를 불러올렸다.

이제 철존이라 불리며, 구환 대사가 빠져나간 십대고수의 일좌를 메운 일양 선사라면 커다란 힘이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하북팽가에도 전서를 보내 도왕의 참여를 독려했지만, 도왕은 칭병하며 참여를 정중히 거절해왔다.

대신 인근 중소 문파들에서 다수의 고수들이 참여해왔다.

특히 죽은 줄 알았던 전대 고수의 참여는 정천맹의 사기를 크게 올려놓았다.

“무상존자께서 이리 건재하실 줄은 미처 알지 못했소이다.”

구환 대사의 말에 무상존자라 불린 노인이 빙긋이 웃었다.

“세상을 등지고 살아보려 했더니, 마두의 소문이 하도 귀를 간질여서 말이외다.”

“그것이 빈승을 비롯한 후배들의 잘못이니 송구할 따름입니다. 아미타불…….”

무상존자는 전 전대의 고수로, 당시만 해도 우내사존의 일좌로 거론되었던 불세출의 고수였다.

세수로만 따져도 이백에 가까운 사람이고, 배분으로 가면 현 강호 최고의 배분에 속하는 구환 대사보다도 두 단계는 윗줄이니 그보다 윗줄의 배분을 찾긴 어려울 터였다.

상상조차 못해봤던 그의 참여로 정천맹에는 다시 현경의 고수가 둘이 되었다.

사기는 올랐고, 속도는 빨라졌다.

그런 그들이 고덕 일행의 뒤를 잡은 데는 하포를 목전에 둔 복건의 복안 지방이었다.

일순간에 자신들을 둘러싸는 이들을 바라보는 일행의 눈엔 긴장이 확연하게 차올랐다.

그런 긴장을 끊어내며 고덕이 마차에서 내리자, 정천맹 무사들 사이에서 구환 대사가 몇몇 강자들을 대동하고 앞으로 나섰다.

“그대가 검마인가?”

고덕의 얼굴을 아는 이들의 언질을 받은 구환 대사의 물음에 입꼬리를 말아 올린 그가 말문을 열었다.

“현경이라……. 웬일로 이빨을 드러낸다 했더니, 자신감의 발로가 그것이었던 모양이군.”

“감히! 우리가 나선 것은 마성에 젖은 그대의 악행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니 순순히 죄를 인정하고 포박을 받으라! 순순히 포박을 받으면 목숨만은 살려, 참회동에서 남은 인생 동안 죄를 뉘우치도록 선처를 베풀 것이다.”

구환 대사의 말에 고덕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미친놈!”

“이, 이 마두 놈이!”

분노한 구환 대사가 나서려는 것을 무상존자가 말렸다.

“먼저 노부가 손을 보리다.”

무상존자의 기세는 분명 자신보다 윗줄이었다. 그런 이가 나선다니, 구환 대사는 말릴 이유가 없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에 하나 그가 밀린다면 그때 자신이 도움을 주어도 늦지 않을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그럼 시주께 부탁을 드립니다.”

구환 대사가 선선히 물러나자 무상존자는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영유원의 삼객을 모두 잡아먹은 이들이오. 절대로 얕잡아 보지 마시오!’

자신을 내보내며 멸천주가 신신당부한 소리였다.

그 말을 어길 생각은 없었지만, 상대에게 밀릴 것이라 생각한 적도 없었다.

상대가 현경의 극의에 이른 영유원의 삼객을 잡아먹었다지만, 자신은 이미 현경의 정점에 도달한 지 수십 년이 넘은 사람이다.

그런 어중간한 이들과 비교하기엔 자신은 너무 높이 앉아 있었다.

그렇게 자신감에 충만해 앞으로 나선 무상존자는, 천천히 다가서는 고덕을 바라보며 점점 낯빛을 굳혀야만 했다.

상대에게서 자신을 처음으로 굴복시켰던 주천주의 기세를 엿본 탓이었다.

하지만 설마 하는 마음은 끝내 버리지 못했다. 그러나 반대로 업신여김은 버렸다.

그 탓에 뽑아든 검에 불어넣은 내기는 그 자신이 가진 모든 내력이었다.

웅웅웅웅.

검이 울었다. 내기에 반응해 울고, 주인의 긴장에 울고, 터질 듯이 밀려든 내력에 미친듯이 울어댔다.

전설이나 설화에만 간혹 등장하는 검명이 너른 벌판 전체를 뒤덮었다.

그리고 느껴지는 여파만으로도 끔찍할 정도의 기운이, 고덕을 향해 무상존자의 검을 뛰쳐나갔다.

쑤아아앙-

일격 필살. 다음 수는 생각도 안 한 무상존자의 최강 초식이 허공을 완전히 뜯어 발기며 날았다.

그런 상대를 향해 움직임을 보인 것은, 하단세에서 상단세로 빠르게 이동한 고덕의 가르기 한 번뿐이었다.

손에 땀을 쥐고 바라보는 양측 인사들의 시선에 시간은 수백 초의 일로 가늘게 쪼개져 흘렀다.

그 속에서 무상존자의 전면으로 갑자기 노란 달무리가 일었다.

스걱-

그리고 그 달무리에서 뛰쳐나온 반달 모양의 검강이 눈을 부릅뜬 무상존자를 뚫고 지나갔다.

콰과과과광- 콰광-!

무상존자를 뚫고 나온 반달 모양의 검강이 뒤에 몰려 있던 정천맹 고수들을 일자로 쓸고 지나가더니만 폭발했다.

폭발의 여력은 무서웠다. 주변 가득 진을 치고 있던 정천맹의 무사 수십이 육편이 되어 흩어졌고, 주변의 숲은 완전히 초토화되어 커다란 웅덩이만 남았다.

뿐만 아니다. 반월형 검강의 진로에 휩쓸린 무사 십여 명도 모조리 핏속에 누웠다. 개중엔 이제 철존의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하던 일양 선사의 주검마저 섞여 있었다.

그리고 무상존자…….

“너, 넘어섰군… 크크크! 넘어섰어… 빌어먹을…….”

알 수 없는 말만 중얼거리던 그는 뿜어지는 피와 함께 좌우로 양분되어 쓰러졌다.

그 와중에 기묘한 일이 일어났다.

코앞까지 다가온 무상존자의 무지막지한 패력이 마치 빨려 들어가듯 고덕의 품으로 뛰어들어 소멸한 것이다.

하지만 고덕이 벌여 놓은 어마어마한 일에 눈이 팔린 이들은 그 기사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 누구도…….

믿어지지 않는 능력을 보인 고덕의 신위에 움츠러든 정천맹의 인사들이 황급히 뭉쳐 들었다.

그리고 그 앞엔 구환 대사가 섰다.

그 와중에 바닥에 피범벅이 되어 쓰러져 있는 일양 선사의 주검을 목격한 구환 대사는, 입술을 깨물어 경악에 흐트러지는 정신을 바로잡았다.

“역시 피에 굶주린 마두답구나. 내, 오늘 너를 징치할 것이다!”

두려움을 없애려는 듯 고래고래 고함을 치는 구환 대사를 바라보던 고덕의 시선이, 그의 곁에 서 있는 이에게 옮겨 갔다.

무엇이라도 꿰뚫어버릴 것 같던 그의 눈빛이 어쩐 일인지 슬퍼 보였다.

그 눈빛을 받은 남궁창천은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검을 쥔 손에 힘을 가득 실었다.

“돌아가라. 돌아가면 죄를 묻지 않을 것이다.”

고덕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흔들렸다. 단 일수만으로 가장 강력한 패를 꺾어버린 고덕의 신위에 눌린 그들의 마음이, 높은 파도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일엽편주처럼 세차게 흔들렸다.

“가, 갈! 감히 정천맹의 의지를 꺾을 수 있을 듯싶었더냐! 우리는 여기서 죽을지언정 적에게 등을 보였다는 오명은 남기지 않을 것이다.”

구환 대사의 고성에 흔들리던 이들의 눈이 떨림을 천천히 멈추어갔다.

“그렇다면 모두 죽어야겠지.”

말과 함께 한 걸음을 내디뎠을 뿐인데, 한데 뭉친 정천맹의 사람들이 일제히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에 피식 웃어버린 고덕이 말했다.

“돌아가. 개도 피우지 않을 고집은 그만 접고.”

“우, 우린 돌아가지 않아!”

다시금 발작적으로 외치는 구환 대사를 지그시 바라보던 고덕이 천천히 명혼을 중단세로 들어올렸다.

“그리 죽음을 원한다면… 죽여주지.”

고덕의 움직임에 구환 대사도 황급히 주먹을 말아 쥐며 자세를 잡았다.

구환 대사의 절기는 백보신권이다. 천둥과 우레를 동반한다는 그의 백보신권은, 이미 강호의 일절로 자리를 잡은 절기였다.

그 백보신권의 신위가 주변을 가볍게 울리기 시작하는 우레 소리와 함께 드러나기 시작했다.

후르르르릉- 꽈광-

우레의 끝을 천둥소리가 장식했다. 그와 동시에 고덕의 전면에서 진기의 폭발이 일어났다.

어느새 날아든 백보신권의 권력이 고덕의 호신강기와 부딪치며 폭발한 것이다.

상체를 슬쩍 떠밀 정도로 강력한 백보신권의 위력에 놀란 고덕의 애검 명혼이, 중단세에서 상단세로, 또 상단세에서 하단세로 벼락같이 움직였다.

“피, 피해!”

남궁창천의 입에서 터진 고함 소리와 거의 동시에,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낸 반월형 검강이 권황을 스치고 지나가며 그 주변을 휩쓸었다.

콰광-

끝에서 폭발한 반월형 검강은 주변의 모든 것을 파괴했다. 하지만 다행히 이번엔 그 여파에 걸려든 정천맹의 무사들이 적었다.

시의적절하게 터진 남궁창천의 경고성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의 경고 덕분에 위기를 모면한 것은 구환 대사도 다르지 않았다.

눈으로 좇기보다 남궁창천의 경고성에 본능적으로 몸을 튼 덕에 반월형 검강의 쇄도에서 비켜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탓에 바로 뒤에 서 있던 고수들은 순식간에 반월형 검강의 쇄도에 휘말려 반으로 잘려 나갔다.

상대를 완벽하게 밀어붙이고 있다고 고덕이 편한 건 아니었다.

급한 대로 살황의 현월을 북황의 공간권에 실어 사용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뿜어져 나가는 내력은 이내 되돌아왔다. 그것도 이전에 비할 수 없이 많은 내력을 품고서…….

문제는 그것을 갈무리할 시간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적을 두고 운기할 수 없으니 그건 당연한 노릇. 다만 그것이 한 번은 견딜 만했는데, 두 번째부터는 내부를 치달리던 내력들이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 상태가 심화되면 상대를 잡기 전에 자신이 제 풀에 쓰러질 것이라 판단한 고덕은 이를 악물었다.

결정이 서자 검이 수직에서 수평으로 누여졌다.

그 변화에 정천맹 사람들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수직으로 세워져 날아오는 반월형 검강도 막지 못하거늘, 그 살상 범위가 늘어난 수평의 반월형 검강은 생각만으로도 다리가 후들거리고 등에 소름이 돋았다.

결국 그 압박을 견디지 못한 사람이 나섰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적이라곤 하나, 감히 말을 낮출 담조차 찾을 수 없었다.

“뭔가?”

고덕의 물음에 앞으로 나선 이가 답했다.

“청성의 오량입니다. 물러가는 자는 정말 그냥 보내줄 것입니까?”

“물론. 단, 다음에 다시 앞을 막아서면 그놈만이 아니라 그놈의 사문도 끝장을 내줄 테니 잘 생각하도록.”

고덕의 답에 오량 진인이 서둘러 검을 갈무리하며 제자들에게 외쳤다.

“청성의 제자들은 속히 물러나라-!”

“자, 장로님!”

당황한 제자들이 오량 진인을 불렀지만 그는 단호했다. 하지만 죽음이 두려웠다기보다는, 장문의 명을 받아 자신을 따라 내려온 일대 제자들을 이곳에서 모두 잃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더욱 컸다.

이미 반월형 검기에 휩쓸려 생명을 잃은 제자들의 수만도 일곱을 넘어가고 있었다.

일대 제자에 겨우 서른을 남기는 청성의 관례상 삼분의 일이 이미 날아간 셈이었다.

그들은 청성의 미래를 받쳐 주어야 할 소중한 재원. 그들을 이곳에서 이리 허망하게 잃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뭣들 하느냐? 청성의 제자들은 속히 물러나라!”

거듭된 오량 진인의 명에 마지못한 표정의 청성 제자들이 일제히 검을 거두고 뒤로 물러났다.

그것을 확인한 오량 진인이 고덕에게 포권을 취했다.

“오늘의 일은 오(誤)와 인(仁)의 상쇄로 보아도 되겠습니까?”

검을 들어 죽이고자 했던 자신들의 잘못과 그럼에도 살려 보내는 인의를 상쇄하자는 의미다. 먼저 일을 만든 이들의 요구치고는 뻔뻔한 것이었지만, 그 말에 숨은 의도가 은원을 남기지 말자는 뜻이었기에 고덕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리하지.”

고덕의 허락에 오량 진인은 다시 한 번 포권을 취해 보이고는, 제자들을 이끌고 꽁지가 빠지게 모습을 감추었다.

천하의 구파가 꼬리를 말자 여기저기서 떠나겠다는 문파가 줄을 이었다.

순식간에 절반 이상이 떠났지만, 여전히 살 둥 죽을 둥 뭉쳐 있는 이들도 절반에 이르렀다.

물론 그들의 앞엔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서 있는 구환 대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저들을 모두 죽일 생각이냐?”

고덕의 힐난에 구환 대사는 차갑게 대꾸했다.

“죽이는 것은 그대지, 내가 아니오!”

들어야 헛웃음만 나오는 궤변을 더 듣고 싶은 마음도 없었지만, 더 이상 내력의 횡전을 방치할 수 없었던 고덕은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쐐애애애액-

이번엔 달무리가 없다. 명혼을 떠나며 반월형 검강으로 형상을 드러낸 고덕의 내력은 이전의 것보다 배는 더 컸다.

더구나 날아가는 동안 몸집을 불린 반월형 검강은 뭉쳐 있는 정천맹의 무사들 전체를 뒤덮을 만큼 커져 버렸다.

스걱-

단 하나의 소음을 끝으로 남아 있던 모든 이의 몸이 반으로 나누어지며 쓰러졌다.

맨 앞에 서 들고 있던 불진에 모든 내력을 담아내 날아드는 검강에 대항하던 구환 대사도, 뒤쪽에서 겁에 질려 머리를 감싸 안은 일반 무사도 모조리 반으로 잘려 나뒹굴었다.

순식간에 근 백여 명의 고수를 반 토막 낸 검강은 사라졌지만, 허공을 돌아온 진기는 몇 배로 몸집을 불려 고덕의 안으로 뛰어들었다.

“커헉!”

내력이 돌아오는 충격에 핏줄기를 뿜으며 뒤로 나동그라진 고덕은 까무룩 멀어지는 정신을 악착같이 붙잡고 늘어졌다.

여기서 의식을 잃으면 남는 것은 죽음뿐이라는 직감이 들었던 탓이다.

뒤에서 경이로운 시선으로 고덕의 무위를 지켜보던 일행이 놀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적을 모조리 물리치고 나서 오히려 피를 뿜으며 쓰러졌으니, 안 놀랄 수 없었던 것이다.

일행이 달려오고, 당황한 사람들의 고성이 시끄럽게 울려 댔다.

* * *

강호는 충격 그 자체에 빠졌다.

이른바 복안 혈사라 이름 붙여진 사건으로 자그마치 열아홉 개 문파의 최고수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최후의 직전, 열세 개의 문파가 꼬리를 말고 물러났음에도 그런 대량의 피해가 발생한 것이다.

드러난 결과가 너무 충격적이었던 탓에 물러난 문파들을 비난하지조차 않았다.

오히려 상대의 강함을 알고서도 고집을 피운 이들의 아집을 비판하는 목소리마저 심심치 않게 나돌았다.

그것은 정말 생각지도 못해본 결과였다.

졌든 이겼든 상대는 마두였다. 당연히 피해에 분노하고 더 많은 문파가, 더 많은 고수가 참여해 척살대가 꾸려져 왔던 전례와는 확연히 다른 전개였다.

그리고 그런 전개에 가장 많이 당황한 곳은 이번 검마 척살의 기치를 앞장서 주장했던 소림이었다.

“조사 이래로 내려오는 녹옥불장의 권위로 내소림의 발동을 명합니다.”

소림의 방장인 법화군 복경 대사의 명에 반장을 한 노승이 답했다.

“녹옥불장의 명을 받아 내소림은 적을 맞을 채비를 갖추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사조님…….”

복경 대사의 말에 그저 불목하니 승려로 알려져 있던 노승은 다시금 반장의 예를 취해 보이곤 조용히 물러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고위 승려들이 놀란 표정으로 수군거렸다.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전설처럼 내려오는 내소림의 수장이 겨우 불목하니 승려였다는 것에 말이다.

그런 고위 승려들을 바라보던 복경 대사가 크게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그의 불호에 고위 승려들의 입이 다물렸다. 사위가 조용해지자 복경 대사의 시선이 나한전주인 불연 선사에게 향했다.

“이번에 입은 피해가 어느 정도입니까?”

“나한전에서 출행한 나한승 스물여덟 중 안휘협가에 남아 있던 일곱을 제외한 스물한 명이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나한전주의 답에 사방에서 침중한 불호가 이어졌다.

“장로 이상의 고승들의 피해는 어떠합니까?”

“정천맹의 맹주로 나가 계시던 달마동주와 세법전의 일양, 긴나라전의 일주, 양심당의 이정이 돌아오지 못하였습니다.”

각기 현경과 화경에 달했던 달마동주, 구환 대사와 세법전주인 일양 선사는 둘째 치고, 긴나라전의 일주 대사와 양심당의 이정 선사 두 사람은 모두 소림이 보유한 초극의 고수였다.

그들을 제외하면 외소림, 그러니까 일반 사람들이 소림이라 부르는 곳엔 이제 방장인 복경 대사 외에는 초극의 고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허허, 이 난관을…….”

“난제로다, 난제야…….”

여기저기서 고승들의 한탄이 터져 나왔지만 그뿐이다.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으니 그저 탄식만 터트릴 뿐이었다.

“그가, 검마가 복수에 나설 확률은 얼마나 된다고 보시는가?”

방장의 물음에 답은 나한전주가 아닌 지객당주에게서 나왔다.

“돌아다니는 풍문엔 그가 자신의 사가로 돌아갔다고 합니다만…….”

“사가로 돌아갔다?”

“예. 그 탓에 복수는 없을 것이라는 의견이 조심스럽게 힘을 얻고 있긴 합니다만, 그것을 맹신하기엔 너무 위험한지라…….”

“이번에 피해를 입은 다른 문파들은 어찌한답니까?”

“화산과 종남의 피해가 컸다고 들었습니다. 그들은 즉각적인 복수를 외치고 있습니다만, 다른 문파들은 이대로 덮자는 분위기입니다. 특히 점창과 남궁세가의 분위기가 그러합니다.”

한 곳은 구파의 한 곳이었고, 다른 한 곳은 팔대세가의 수좌로 여겨지던 곳이다.

그 두 곳이 덮고자 한다니,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았다.

“피해를 두고 볼 곳들이 아닌데 어찌 된 일입니까?”

“종남은 무당의 전언이 전해진 듯하고, 남궁세가는 유명을 달리한 전대 가주를 대신해 은퇴했던 검존이 세가를 이끌며 그리 유도하는 듯합니다.”

“도무지 알 수가 없군요. 두 곳 다 힘에 눌려 숨죽일 곳들이 아닌데 말입니다. 정녕 우리 소림이 보지 못하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입니까?”

방장의 물음에 고승들은 입을 다물었다. 유일하게 반대했던 방장을 설득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던 탓이다.

그런 고승들을 바라보며 복경 대사는 답답함을 지울 수 없었다.

“우선 무당에 배움을 청해야겠습니다.”

평소라면 반대가 빗발쳤을 방장의 말에도 고승들은 그저 침음만 흘릴 뿐,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그런 이들을 바라보며 복경 대사는 이전에도 녹옥불장의 권위를 동원해서라도 출행을 막았어야 한다는 자책을 막을 길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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