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장. 여로(旅路)-속을 긁다
서성에 도착한 협련 등은 단리청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당황했다.
“그거 사기꾼 아니야?”
후량의 말에 묵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처음엔 따라오는 거 같긴 했는데…….”
“혹시 실력이 처져서 늦는 걸 수도 있소.”
약자의 설움을 가장 잘 아는 왕팔의 의견에, 사람들의 얼굴에 아차 하는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자신들보다 경지가 한참 처지는 왕팔이 일행 중 가장 빨랐던 연유로 경공 속도의 차이를 미처 계산해보지 못했던 탓이다.
“험험! 그럼 기다려야 하나?”
묵린의 말에 협련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가 서성을 목표로 움직인 건 알까?”
결국 구시렁거리는 후량을 대동한 왕팔이 오던 길을 되짚어가야만 했다. 사람을 찾는 일이니 왕팔이 나설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다.
한참 뒤로 돌아간 왕팔과 후량은 중간 정도에서 헤매고 있는 단리청을 찾아 서성으로 돌아왔다.
모두가 모이자 단리청을 앞세운 일행은 숙주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 *
이틀이 걸려서야 숙주에 도착한 협련 등이 무사한 고진을 보고 반가워한 반면, 나성운은 완전히 찬밥 신세를 면할 수 없었다.
뻘쭘한 표정으로 고진과 협련들이 인사 나누는 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는 나성운에게 왕팔이 다가왔다.
“자네가 이해하게. 모두 걱정이 깊었던 탓이니까.”
그래도 가장 큰 자손 취급을 받던 까닭인지 제법 어른 노릇을 하는 왕팔에게 나성운은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아, 아닙니다, 처남. 모두 제 잘못인걸요.”
“그렇긴 하지만……. 여하간 이해해.”
그 말을 남긴 왕팔은 다시 고진에게 붙어 협가 흉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소란스러운 시간이 지나자 고덕은 곧바로 단리세가를 떠날 의향을 내비쳤다.
“이렇게 서둘러 가실 필요가…….”
아쉬워하는 단리천패에게 고덕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리가 오래 머물면 머물수록 압박은 더 거세질 거야. 지금도 힘들다는 거 아니까.”
사실이었다. 어찌 알았는지 이들이 머물고 있다는 걸 안 정천맹에서부터 하루에도 서너 차례씩 서찰이 밀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서찰의 내용들 대부분은 위협에 가까운 경고였다.
“그런 것이 무서웠다면 아예 시작하지도 않았을 일입니다.”
단리천패의 답에 고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하지만 굳이 문제를 피할 수 있는데 마다할 이유는 없지.”
“대협…….”
처연한 단리천패의 음성에 고덕이 말을 이었다.
“우리가 떠나거든 그저 조용히 지내게. 괜히 나서서 정 맞지 말고.”
“하나, 정천맹은 중립은 용납지 않습니다.”
“필요하다면 반대에 서도 서운하다는 말은 않을 테니…….”
“대협! 단리세가는 그리 줏대 없는 곳이 아닙니다.”
“알아, 안다고. 하나, 의리 때문에 화를 자초하진 말란 말이야.”
“단지 의리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인의가 올바로 선 것이 협의이고, 협의가 바로 백도의 변하지 않는 기본이라 믿기에 뜻을 정한 것입니다.”
굳건한 의지가 엿보이는 단리천패의 음성에 고덕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역시 백도야.”
“예?”
“고리타분하다고! 그래도 나름 멋은 있군. 좋아, 그건 자네의 일이니 자네 뜻대로 하게. 필요하다면 내 이름을 팔아도 좋고, 원한다면 한 팔 거들기도 하지.”
고덕의 말에 단리천패는 입가에 작은 웃음을 달았다.
“원군이 든든하게 되었군요.”
“든든하긴. 달려오려면 사나흘은 족히 걸릴걸. 잘못하면 정작 필요할 때 써먹지도 못할 수 있어.”
“그 정도는 버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자신감이다. 누백 년을 이어온 단리세가의 힘에 대한…….
“알겠네. 하면 나중에 또 보세.”
그 말을 남기고 돌아서 객사로 가는 고덕의 뒤에 대고 단리천패가 인사를 고했다.
“멀리 배웅은 하지 않겠습니다, 대협.”
단리천패의 인사에 고덕은 그저 걸어가는 그대로 손을 흔들어 보였을 뿐이다.
그렇게 멀어져 가는 고덕의 등을 바라보는 단리천패의 눈에 어린 걱정은, 이전보다 조금은 적어진 듯 보였다.
* * *
마차 하나와 말 여섯 필이 단리세가를 빠져나온 것은 해가 중천에 뜬 한낮이었다.
보는 눈이 적은 밤에 떠나라는 단리천패의 만류를 고덕이 뿌리쳤던 까닭이다.
고덕은 자신들이 떠나는 것을 확인하는 눈들이 많을수록 단리세가에 가해지는 압력이 줄어들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멀어져 가는 고덕 일행을 단리천패는 한참 동안 지켜보았다.
그런 단리천패에게 다가온 단리명이 고개를 조아렸다.
“가주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서찰이 아니고 손님?”
“예. 아마도 고 대협이 떠난 것을 알고 찾아온 듯합니다.”
“후후! 무서움이 사라졌다는 생각인가? 하면 단리세가는 안 무섭다는 뜻이겠군.”
단리천패의 음성에서 한기가 돌았다. 그런 가주에게 단리명이 물었다.
“어찌하올까요?”
“이번엔 누구던가?”
“만도문의 부문주인 백도향입니다.”
“천도란 이로군.”
“예. 그래도 만도문의 부문주이기에 접빈각에 두었습니다만…….”
만도문은 백도 사십 중문의 하나다. 결코 가벼이 볼 곳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백도 팔대세가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는 단리세가가 신경 써야 할 정도의 인사는 아니었다.
“자네가 처리하게.”
“반발이 거셀 것입니다.”
걱정스런 단리명의 말에 단리천패가 미소를 지었다.
“자네가 몸담고 있는 단리세가는 그 정도에 흔들릴 곳은 아닐세.”
가주의 눈에 서린 확고한 의지를 확인한 단리명이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가주.”
그렇게 돌아서는 단리명을 단리천패가 불렀다.
“명아, 내가 잘하고 있는 것이겠지?”
“그 어느 때보다 잘하고 있소, 형님.”
그 말만 남겨 놓고 멀어져 가는 동생을, 단리천패는 깊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 * *
한참 만에 돌아온 단리명을 바라보며 백도향이 못마땅한 음성을 토했다.
“노부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는 것은 아니오이까?”
이미 백도 사십 중문의 사람이 팔대세가에 와서 부릴 강짜는 넘어섰다. 그것을 단리명은 더 이상 간과할 수 없었다.
“백 대협.”
“말씀하시오.”
“도대체 여기가 어디라 생각하십니까?”
자신이 한 짓이 있기 때문인지 잠시 움찔했던 백도향이었지만, 이미 기호지세라 모르쇠로 일관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요?”
“지금 백 대협이 그리 고함을 치고 있는 이곳이 과연 어디인 줄은 알고 그런 망동이냐는 말씀이외다.”
“뭐, 뭐라! 망동?”
너무했나 싶었던 마음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분노가 활화산처럼 뿜어져 나왔다.
눈에 쌍심지를 켜고 벌떡 일어서는 백도향을 향해 단리명이 싸늘한 음성을 이었다.
“하면, 지금 이 모양을 망동이 아니면 무어라 한단 말이오.”
“이 작자가 감히!”
쾅-
순간, 문이 부서져라 열리며 십자패도 단리태천이 들어섰다.
비록 초극엔 못 들어섰다 하나 단리세가에서 최고수다. 더구나 백도향보다는 실력은 물론이고 배분도 확실히 앞선 고수가 바로 단리태천이었다.
“감히! 만도문이 간이 배 밖으로 나왔던가? 대단리세가에서 감히라!”
“시, 십자패도!”
백도향의 당황성에 단리태천이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그대가 정녕 단리세가를 모욕하러 온 것인가?”
“어, 어찌……. 그건… 그건 오해요.”
“오해? 단리세가를 향해 감히란 말을 내뱉은 것을 내 귀로 들었는데 그것이 오해라!”
기세를 잔뜩 올린 단리태천의 분노에 백도향은 한발 물러섰다. 여하간 이곳은 그에게 적지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 그것은 실언… 그렇지, 실언이었소.”
“정녕 실언이었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소생이 실언을 하였소이다.”
한번 죽은 기세는 살아날 줄 몰랐다. 그 탓인지 백도향은 생각 이상으로 고개를 숙여 왔다.
“하면 돌아가라. 우린 그대를 환영하지 않는다.”
“하, 하지만 난 저, 정천맹의 사자로…….”
“하여, 정천맹이 단리세가를 모욕하고자 한 것인가?”
“그, 그런 것은 아니오.”
적이 될지도 모르는 이들로 분류된 곳이라고는 하지만 단리세가는 엄연히 백도 팔대세가였다.
단리세가의 전력 반만 풀려나와도 만도문은 괴멸을 면치 못할 것이었다.
아무리 정천맹의 힘을 업었다 해도 그런 상대에게 드러내고 이빨을 보이는 것은 명을 재촉하는 일일 뿐이라는 것을, 백도향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결국 백도향은 본래의 목적은 꺼내보지도 못하고 단리세가에서 쫓겨나듯 나와야만 했다.
그렇게 등이 떠밀려 멀어져 가는 백도향을 바라보며 단리명이 불안한 음성으로 물었다.
“괜찮겠습니까?”
“이미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 셈이다. 망설일 이유도, 여유도 없다. 외총관도 잊어선 안 될 것일세.”
단호한 단리태천의 말에 단리명이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숙부님.”
그렇게 단리세가의 의지가 밖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 * *
숙주를 벗어나 관도에 오른 고덕 일행은 먼저 절강을 향해 길을 잡았다.
절강 아래에 위치한 복건성을 가자면 싫어도 절강성을 지나야 했던 까닭이다.
그렇게 움직이는 일행을 좇는 시선이 수십 개씩 따라붙었다.
관도를 따라 한참을 이동한 끝에 마을을 벗어나 산길로 접어들자, 후량이 마차로 다가왔다.
“뒤를 따르는 이들이 많습니다. 정리를 할까요?”
“그냥 두어라.”
고덕의 명에 후량은 입맛을 다시며 물러나야만 했다.
“예, 대협.”
뒤로도 눈을 잔뜩 단 일행은 끊임없이 움직였다. 지친 말을 쉬게 하거나 밤을 지새우는 것을 제외하면 일행은 결코 쉬지 않았다.
만약의 상황을 위해서 마을에선 육포나 건량 같은 비상식량과 기타 필요 물품만 채우곤 곧바로 벗어났다.
언제 싸움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움직임에 제약이 많은 마을이나 도시는 피하고자 한 까닭이었다.
그렇게 오 일을 움직인 일행의 앞을 일단의 사람들이 막아섰다.
그들의 앞엔 검은 바탕에 황금색 글씨가 돋보이는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제마척사(制魔斥邪)
자랑스럽게 내세운 깃발의 글귀를 확인한 협련의 검미가 찌푸려졌다.
“길을 열어주시오.”
강호인들과의 충돌을 원하지 않았던지 저들에게 말을 건네고 나선 것은 나성운이었다.
하지만 앞을 막은 이들은 검을 들어 답을 대신했다.
척-!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보이는 이들의 앞가슴엔 두 개의 섬이 그려져 있었다.
그런 표식을 쓰는 곳은 강호에선 한 곳뿐이다. 바로 보타산의 절벽에 자리 잡은 검각이다.
검에 있어 무당이나 화산, 남궁, 그리고 이미 멸문한 해남검문의 이름과 함께 거론되는 백도 오대검문의 하나가 앞을 막고 나선 것이다.
그럼에도 일행의 표정엔 별다른 긴장감이 없다. 이미 절강으로 들어서며 부딪칠지도 모를 것이란 예상을 해오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의 앞으로 나성운을 지나쳐 협련이 나섰다.
“길을 열라!”
“어깨 위의 물건을 놓고 간다면 곱게 보내줄 것이다.”
꼬장꼬장해 보이는 노검객의 응대에 협련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굳이 관을 보아야겠다면…….”
협련이 강행 돌파를 선택하려 하자, 다혈질의 후량은 물론이고 묵린마저 창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런 이들의 귀로 고덕의 음성이 들려왔다.
“지금 비켜서면 검각은 살려 준다. 하나, 막고자 하면 내 반드시 검각의 기둥뿌리를 뽑아주마.”
특별히 사납지도, 천하를 뒤엎을 기세도 따르지 않았지만, 마차에서 흘러나온 말에 검각의 고수들은 몸을 떨어야 했다.
해남검문이 비슷한 말을 거부한 이후 세상에서 자취를 감춘 것을, 형제 문파였던 검각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 네놈의 목을 베어 억울하게 죽어간 해남검문 형제들의 설욕을 할 것이다.”
검각의 각주인 보타검군 해문위의 떨리는 음성에 고덕은 한마디로 답했다.
“치워라!”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협련과 묵린, 그리고 후량이 뛰쳐나갔다.
둘은 제하이십사강에 이름을 올린 초극의 고수요, 하난 초입이라고는 하나 화경의 고수다.
그들 셋이 쏟아놓는 강기 세례를 검각의 무사들은 고스란히 뒤집어써야만 했다.
전장을 완전히 장악하고 자신들의 의지대로 적들을 몰고 다니는 세 사람의 움직임을 지켜본 나성운이나 그의 두 아들은, 도우려 나설 마음마저 사라져 버렸다.
아니, 자신들이 나서 봐야 도움은커녕 걸림돌이 될 뿐이라는 것을 진즉에 눈치챘던 것이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고덕의 일행은 이내 다시 관도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의 뒤로 걸레가 되다시피 한 검각의 고수들이 즐비하게 쓰러져 있었다.
“죽은 자들이 너무 많은 게 아닐까요?”
나성운의 걱정에 마차를 몰던 왕팔이 고개를 저었다.
“죽었다고 해봐야 서넛뿐이야.”
“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놀란 나성운의 물음에 왕팔은 그것도 제대로 못 봤냐는 투로 답했다.
“죽어서 숨 쉬는 놈들은 못 봤으니까.”
고덕과 함께한 시간이 결코 적지 않았던 왕팔이다. 그동안 고덕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은 기회가 적어도 수십 번이다.
아직 협련 등 세 사람에 비견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도 이미 초절정을 눈앞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일류에 턱걸이하던 그를 생각한다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고덕이라는 기연을 옆에 달고 다닐 수 있었던 행운도 크게 한몫했다.
하지만 그동안 왕팔이 기울인 피나는 노력을 곁에서 지켜본 이들은 그것이 결코 운이라고만은 할 수 없었다.
그 결과를 목도한 나성운은 왕팔을 바라보는 시선을 새롭게 정립해야만 했다.
왕팔의 말대로 앞을 가로막았던 검각의 무사들 중 목숨을 잃은 이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수와 상관없이 사망자가 나왔다는 것은 이미 끊을 수 없는 은원에 얽매였다는 의미였다. 물론 그 은원은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도 별로 상관이 없었다.
* * *
그런 검각의 무사들을 추스른 것은, 고덕 일행의 뒤를 쫓아 움직이던 정천맹의 세력이었다.
“정녕 이대로 그냥 두실 생각이시오?”
녹피에 사슴 문양이 그려진 가죽 주머니를 찬 노고수의 물음에 권황, 구환 대사가 입을 열었다.
“지금은 그냥 두는 것이 좋습니다, 독괴 시주.”
독괴. 강호십대고수의 사괴 중 일인으로, 독과 암기의 대명사인 사천당가의 문주 당조성이 바로 그였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오?”
“검마를 잡기엔 우리의 전력이 충분치 않다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상대가 비록 검마라고는 하나, 맹주가 있고 내가 있소이다. 너무 걱정이 큰 것이 아니오이까?”
“우리가 상대할 수도 있겠지요. 아니, 우리 둘이면 충분하다는 생각은 합니다. 하나…….”
“하나?”
“검마를 잡고 모든 것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그 마두를 잡을 수만 있다면 이 늙은이의 목숨 따윈 어떻게 되든 상관없소이다.”
목숨뿐이라면 구환 대사도 미련이 없었다. 하나, 그에겐 무당에 눌려 오던 사문의 숨통을 열어주어야 할 책임이 남아 있었다.
“목숨뿐이라면 그렇지요. 하나 검마를 없앤다고 모든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구환 대사의 말에 독괴가 한발 물러났다. 그도 자신의 후계를 아직 제대로 정하지 못한 까닭이다.
모르긴 몰라도 자신이 죽으면 당가는 독괴의 이름을 당분간은 찾을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자신의 자식들 중 누구도 화경은 둘째 치고 초극에조차 발을 딛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맥없이 물러나는 것이 겸연쩍었던지 독괴가 물었다.
“하면, 언제까지 기다릴 생각이시오?”
“무당에서 소식이 올 것입니다.”
“무당에서! 하면……?”
무당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은 역시 무극검이다. 백도 제일고수.
물론 권황이 생기며 백도 유일이라는 딱지는 떨어지긴 했지만, 가진 무력으로 여전히 그는 경외의 대상이었다.
“아직은 답이 없습니다. 하니 무당의 답이 도착할 때까진 기다려야 합니다.”
거절은 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기엔 당금의 무당 장문이 갖고 있는 명예욕이 너무 컸던 것이다.
그렇게 현경의 고수 둘이 모인다면 검마는 반드시 잡을 수 있었다. 커다란 피해 없이 말이다.
권황, 구환 대사는 그 생각을 하며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 * *
두 번째로 마차를 가로막은 것은 상상외로 단둘뿐이었다.
그리고 그 둘을 맞은 건 생각지도 않았던 고덕, 그 자신이었다.
“여긴 뭐 주워 먹을 게 있다고 온 거야?”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마차를 세우고 일행에게 휴식을 명한 고덕은 무극검과 그를 따라온 노도사 한 명을 이끌고 산자락이 제공하는 그늘의 한 귀퉁이를 차지한 바위에 앉았다.
“그저 소개해드릴 사람이 있어 실례를 무릅썼습니다.”
무극검의 말에 고덕의 시선이 굳은 표정으로 서 있는 노도사에게 향했다.
“누구야? 경지로는 이제 초극에 발을 디뎠구만.”
고덕의 평가에 더욱 굳어진 표정의 노도사가 도호를 외웠다.
“무량수불. 불민한 몸으로 무당을 책임지고 있는 일성이라 하오이다.”
건방지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지만, 상대가 일문의 우두머리란 생각 때문인지 고덕은 별다른 말은 없었다.
“무당의 장문?”
“예. 사사로이는 제 사질이지요.”
“한데 무슨 일로?”
“장문인이 대협을 뵙길 원했습니다.”
무극검의 말에 고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날? 왜?”
천하가 두려움에 떨었던 인물이라고는 도저히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평범하게 생긴 청년의 모습이었다.
햇볕에 탄 구릿빛 얼굴이며, 둥근 눈은 순박한 시골 청년이라고 해도 믿어줄 만큼 부드러워 보였다.
“지금의 대국을 결정하기 위함이오.”
“지금의 대국이라…….”
“바로 그렇소이다.”
일성 진인의 답에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고덕이 툭 내뱉듯 말을 이었다.
“버릇도 없는 데다, 정신도 나간 녀석이로군. 마치 예전의 누구와 닮았어.”
신랄한 평가에 일성 진인의 얼굴은 분노로 벌겋게 달아올랐지만, 정작 무극검의 입가엔 미소가 깃들었다.
“저를 생각하셨던 모양입니다.”
무극검의 말에 막 발작하려던 일성 진인이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잘 아는군.”
“그래서 데려왔습니다. 높고 넓은 세상을 좀 더 알아야 할 필요가 있어서 말입니다.”
“그러기엔 너희 집에도 적당한 인사가 하나 있을 텐데.”
“사백께선 대협께 데려가라 말하시더이다.”
“빌어먹을 말코들! 제 일을 떠넘기는 데엔 이골이 나 있지…….”
고덕의 불만을 은근한 미소로 받아넘긴 무극검이 말했다.
“도와주시지요.”
“무당을 키우는 짓을 내가 왜 해?”
“그렇게 큰 무당이 강호의 평화를 지켜 내지 않겠습니까?”
“지랄! 당장 지금도 이 난리건만, 네들이 한 게 뭐라고?”
“지금 이 정도인 것도 무당의 힘 덕분입니다, 대협.”
틀린 말이 아닌 걸 알기에 고덕은 그에 대해서는 아무 반론도 하지 않았다.
그런 고덕에게 무극검이 정중히 포권을 취해 보였다.
“부탁합니다.”
“도대체 어찌해달라고?”
마지못한 듯 물어오는 고덕에게 무극검이 답했다.
“그때 제게 보여 주셨던 것을 한 번만… 한 번만 장문이 견식할 기회를 주십시오, 대협.”
“안 돼.”
단호한 고덕의 거절에 무극검이 간절한 음성을 토했다.
“대협!”
“해주기 싫어서가 아니야. 해줄 수 없기 때문이지.”
“그게 무슨……?”
고개를 갸웃거리는 무극검에게 고덕은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속내를 털어놓았다.
“지금 내 속이 엉망이야. 내력의 수발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자네 장문인을 살해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그냥 데려가.”
내력의 수발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고덕의 말에 일성 진인은 눈을 반짝였지만, 무극검은 뒷말에 더 비중을 두었다.
“설마… 더 나아가신 겁니까?”
“몰라. 나아간 건지, 시원찮아진 건지 아직은…….”
고덕의 말에 무극검은 마치 작살에 맞은 물고기처럼 푸들거렸다.
“하, 하면… 드, 드디어…….”
“헛꿈은 꾸지 마. 아직 모른다니까.”
고덕의 핀잔에도 불구하고 무극검은 웃음을 터트렸다.
“허, 허허, 허허허허! 무량수불, 무량수불… 허허허허!”
그런 무극검을 고덕은 불만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았고, 일성 진인은 뒷일을 생각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결국 일성 진인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무극검의 손에 이끌려 자리를 떠났다.
그들이 떠나가자 고덕의 일행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길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