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76장(7권) (77/129)

제76장. 고뇌(苦惱)-인연의 깊이

협련 등이 안휘의 육안에 도달한 것은 하포를 출발한 지 육 일 만이었다.

말로 달려도 보름은 족히 걸릴 거리를 단 육 일 만에 주파한 것이니, 이들이 얼마나 급히 움직였는지는 달리 설명이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육안에 접어들자마자 곧바로 고진 일가의 행방에 대해 수소문을 했다.

하지만 잡히는 정보는 아무것도 없었다.

“뭐야, 오기만 하면 무조건 찾아낼 수 있다면서?”

후량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왕팔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흔적을 쫓기 위해서는 그 흔적의 시작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그것을 찾아낼 단서가 이렇게 아무것도 없을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반나절 동안 육안 시내를 이 잡듯 뒤지고 다녔지만, 얻어낸 정보는 아무것도 없었다.

“할 수 없지. 협가로 가보는 수밖에.”

협련의 말에 묵린이 걱정스런 음성으로 말했다.

“괜히 충돌만 벌어지지 않겠나?”

“그래도 진이의 행방을 알 수 있는 방법이 그것뿐이 없으니 별수 없잖아.”

“그렇긴 해도 걱정이 드는군. 우리가 나타나면 과잉 반응을 보일지도 모르는데…….”

묵린의 걱정에 후량이 벌떡 일어섰다.

“지들이 무슨 과잉 반응은……. 까불면 아주 박살을 내줄 거야.”

은근히 그러길 바라는 후량을 바라보며 협련과 묵린은 고개를 저었다.

만에 하나 그런 일이 벌어지면 아무래도 고진과 나성운 사이에 불협화음이 생길까 걱정이 되었던 까닭이다.

여하간 방법이 없었던 일행은 결국 안휘협가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어디서 오신 분들이십니까?”

협가의 정문을 막아선 무사의 물음에 협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일전의 혼사로 인해 얼굴을 알고 있을 사람들의 앞을 막는 저의가 뻔히 드러나 보였기 때문이다.

“하포의 사돈댁에서 왔다고 전해주시오.”

“송구합니다만, 본가엔 하포에 거하시는 사돈이 안 계십니다.”

수문 무사의 답에 협련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하포의 사돈이 없다?”

“그러합니다.”

묻긴 자신이 물었는데, 잘게 떨리는 시선은 자꾸 뒤를 흘깃거린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자신보다는 이미 드러나 있는 묵린이나 후량이 신경 쓰인다는 뜻이리라.

그것이 가슴을 더욱 차갑게 식혀 왔다.

“하면, 외총관을 불러주게.”

협련의 요구에 수문 무사가 불안한 음색으로 물었다.

“어디서 오신 누구라 전해 올릴까요?”

여전히 모르쇠로 일관하는 수문 무사를 향해 묵린이 사나운 음성을 토했다.

“가서 창군이 좀 뵙잖다고 전해주게!”

진체가 알려지지 않은 협련을 생각해 자신의 명호를 꺼내들었다. 여기서도 모르쇠로 일관하면 사돈이고 뭐고 창부터 내지르고 볼 생각이었다.

그런 묵린의 의지가 엿보였던지 수문 무사는 떨리는 음성으로 답해왔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곧 안으로 기별을 넣겠습니다.”

“그러지.”

창군의 답이 나왔지만, 긴장된 표정의 수문 무사들은 누구도 안으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협련 등도 그것을 따져 묻지 않았다. 그들도 자신들이 접근할 무렵, 한 명의 수문 무사가 급히 안으로 달려 들어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미 연락을 받은 협가의 고수들이 대강의 준비가 갖춰지면 반응해올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생각보다 조금 늦게 반응이 나왔다. 그것도 생각 이상의 반응으로…….

“반갑다는 인사는 하지 못하겠습니다, 묵 대협.”

일단의 사람들을 대동하고 나선 이는, 아랑의 혼례 때 접객을 맡았던 장로 나일평이었다.

“나도 그런 말을 할 마음은 없소이다. 지금 내 동생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자 찾아왔을 뿐!”

“대협의 동생분을 왜 본가에서 찾으시는지 모르겠군요.”

“장난은 더 이상 용납지 않을 것이외다, 나 장로!”

“허허, 장난이라니요. 제가 어찌 묵 대협께 장난을 치겠습니까?”

묵린을 상대로 생각 이상으로 여유로운 나일명을 바라보던 협련의 시선이, 그 뒤에 서 있는 이들의 면면을 훑었다.

개중 노승 한 명에게 멈춘 시선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그 노승도 협련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런 상대의 시선에 협련의 입에서 절로 침음이 흘렀다.

“흠…….”

그런 협련과 상관없이 나일평을 상대하던 묵린이 결국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고성을 터트렸다.

“정녕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릴 생각인가!”

묵린의 고성에 협련과 눈을 맞추고 있던 노승이 나섰다.

“아미타불. 묵 시주께선 어찌 안휘협가에 위협을 가하시는 겁니까?”

상대의 출현에 묵린이 움찔거렸다.

뒤에 있을 땐 알지 못했는데, 노승이 앞으로 나서고 보니 그 기세가 예사롭지 않았던 것이다. 더구나 상대의 경지가 좀처럼 짐작되지 않는다는 것이 묵린을 당혹하게 하고 있었다.

“누… 구시오?”

“소림의 일양이라 합니다.”

상대의 소개에 묵린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소림의 승려가 협가에서 튀어나온 것은 이미 정천맹 단위의 대응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 까닭인지 협가의 무사들 속엔 예사롭지 않은 승려들이 적지 않게 섞여 있었다. 아마 그들도 소림의 무승들인 듯싶었다.

“소림의 노승께서 어찌 안휘협가의 일에 나서시는지 모르겠군요.”

“소림과 안휘협가 모두 정천맹이란 한 울타리 안에 있거늘, 그것이 문제가 될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묵 시주.”

“하나, 이번 일은 가족사에 관계된 것이니 외인이 참견할 사안은 아닙니다.”

단호한 묵린의 말에 노승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묵 시주께서 찾고 계신 이가 가족이듯이 안휘협가도, 소림도 다 정천맹의 가족이랍니다.”

애초에 작정을 하고 나선 듯 노승이 전혀 물러섬이 없자 묵린은 결코 말로 해결될 상황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결국 무력 사용도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다진 묵린이 창을 그러쥐며 앞으로 나서는 것을 협련이 막았다.

“왜?”

묵린의 물음에 협련은 아무 말 없이 노승에게 포권을 해 보였다.

“협련이란 이름의 무림 말학입니다.”

협련의 소개에 노승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말학이라……. 시주가 말학이면, 소승 일양은 소림의 말승(末僧)이라 소개를 해드려야겠습니다그려.”

노승, 일양 선사의 겸양에 협련이 말을 이었다.

“어찌 그런……. 그나저나 소림의 홍복이로군요. 십대고수를 둘씩이나 보유하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협련의 말에 놀란 묵린은 그가 왜 자신을 말렸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협련은 이미 일양 선사의 경지가 화경에 이르러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다.

일행의 놀람에 찬 시선을 받은 일양 선사는 협련의 말을 담담히 받았다.

“허허허! 말씀은 고마우나, 소림은 여전히 십대고수를 한 명밖에 보유하고 있지 않답니다.”

“겸양이 지나친 것이 아닐지……?”

“겸양이라니요. 빈승이 승려이기는 하나 무인이기도 하니, 십대고수란 명예를 가벼이 보겠소이까. 다만, 소승의 사형께서 천하오절의 자리에 오르셨다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이랍니다.”

일양 선사의 말에 협련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하, 하면 권왕께서……?”

“이젠 권황이라 불려야겠지요.”

자부심으로 가득한 일양 선사의 답에 협련을 비롯한 일행의 얼굴에 경악이 가득해졌다.

“흠… 좋은 일이나 축하한다는 말을 못하겠군요.”

“마도인들에게서 축하를 받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않습니다, 시주.”

“마도인… 선사께선 제가 마도인으로 보입니까?”

다소 불편한 음성인 협련의 물음에 일양 선사는 당연하다는 듯이 답했다.

“하면 남의 문파에 와서 다짜고짜 행패를 부리는 것을 그럼 무어라 부르리까?”

“동생을 찾기 위한 일입니다.”

“동생을 찾기 위한 일이라고 모든 것이 용서되는 것은 아니겠지요.”

진이의 일을 모르는 것일까? 감이 잘 잡히지 않았다.

“협가의 며느리로 있었던 아이입니다. 그 아이의 거취를 묻고자 하는 것이라면 이해하시겠습니까?”

말이 부드럽고 설명이 길었다. 애초에 갖고 왔던 계획대로라면 피를 볼 생각까지는 아니었어도 협가를 한 번쯤은 들었다 놓을 마음은 먹었었다.

하지만 일양 선사가 나서는 순간, 그 모든 계획은 틀어졌다. 같은 화경이라고는 하나 협련은 상대에게서 위축감을 느꼈던 것이다. 그 말은 상대가 자신의 윗줄이라는 것.

괜히 강짜를 부려 봐야 얻는 건 없고 잃는 것만 생길 것이다. 진이를 위해서도, 또 나중을 위해서도 지금 상황을 그리 이끌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도의 핏줄을 내쳤다는 소리는 들었소이다만, 그건 안휘협가의 소관인 가내 기강을 세운 일이지 외인이 관여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오만…….”

“이 빌어먹을 땡중이 어디서 함부로!”

참지 못한 후량이 나서는 것을 협련이 막았다.

“그만!”

하지만 이미 일양 선사의 시선은 후량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사파인도 마도인만큼 강호의 정기를 어지럽히는 대상이지요. 오늘 아무래도 빈승이 제마척사의 기치를 세워야 할 모양이로군요.”

말투는 온화하나, 이미 뻗어 나오는 기세엔 모든 것을 뭉개버릴 것 같은 패력이 담겨 있었다.

결국 피하지 못할 것이라 판단한 협련도 마주 기세를 올렸다.

두 사람의 기세가 일어서자 일행도 반응했다.

협가의 무사들이 검을 뽑아들었고, 후량의 주먹과 묵린의 창이 그들을 겨누었다.

순식간에 차오른 긴장이 팽팽히 당겨졌고, 그것을 나현의 고성이 끊었다.

“쳐라!”

그런데 처음 반응한 것은 우습게도 협련이었다.

고성이 울리는 것과 동시에 일양 선사를 향해 협련의 검이 뻗어나갔다.

모든 것을 짓뭉갤 것같이 일어섰던 패력이 일제히 협련을 향해 돌진했다.

콰과과광- 콰광!

자잘한 것까지 합하면 수십 번의 폭음이, 일양 선사의 패력이 날아든 협련에게서 울렸다.

소림의 진산절기 중 하나인 아라한신권이다.

소림의 권법들 중 패력으론 으뜸인 데다 백보신권의 모태가 바로 이 아라한신권이기에, 원거리 공격의 묘리까지 섞여 있었다.

그 탓에 협련은 선공을 취하고서도 일양 선사에게 다가서지도 못하고 공격을 허용했다.

무시무시한 권력의 진로에 자신의 내력을 모조리 끌어올려 검막을 펼쳤지만, 충격은 상상 이상이다.

내력이 기우는 탓인지 검막을 치는 충격의 일부가 고스란히 협련의 내부를 흔들었다.

비릿함이 올라오고, 입가로는 선혈이 가늘게 흘러내렸다.

단 한 번의 충돌로 내상을 입은 것이다.

그로써 확실해졌다. 일양 선사의 경지는 최소한 화경의 중간 이상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화경의 초입인 협련으로서는 상대가 불가능했다. 더구나 이렇게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을 것은 자명한 노릇이니, 후일을 도모해야만 했다.

-물러나야 해!

자신의 전음에 묵린과 후량의 전음이 동시에 밀어닥쳤다.

-어디로?

-제길! 어디로 튈 건데?

답이 없는 왕팔을 찾으니, 그는 협가의 무사들과 드잡이를 하느라 전음을 시전할 틈도 없어 보였다.

-동남 방향. 내가 신호하면 뛰어. 목표는 서성이야.

-알았네.

-신호나 해!

역시 두 사람의 답뿐이다. 하지만 이쪽을 흘깃거리는 왕팔의 모습을 보건대, 그도 확실히 전음을 들은 듯했다.

세 사람이 마음의 준비가 끝났다고 생각하자, 협련이 전음으로 신호를 보냈다.

-지금!

동시에 일행이 일제히 적을 밀어붙이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동남쪽을 향해 달렸다.

실력은 가장 처지는 왕팔이 경공은 가장 빨라 두 사람을 제치고 저만치 쏘아져 갔다.

그것을 확인한 협련이 일양 선사를 향해 검강의 다발을 일순간에 쏟아부어 떨어트리곤 이내 몸을 돌렸다.

“쫓아라!”

나현의 명령에 협가의 무사들이 도주하는 이들을 따라 뛰쳐나갔지만, 일양 선사와 그를 따라왔던 소림의 고수들은 그럴 마음이 없는지 요지부동이었다.

그들이 없이는 저들을 상대할 수 없다는 걸 잘 아는 나현의 당황성이 곧바로 터져 나왔다.

“머, 멈춰라!”

가주의 명에 한창 달려가던 협가의 고수들이 멈춰선 뒤를 돌아보았다.

“추적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심스런 나현의 물음에 일양 선사가 고개를 저었다.

“사형을 혼자 두고서는 움직일 수 없습니다. 아미타불…….”

한마디로 내원에 앉아 있는 권왕… 아니, 권황을 두고는 멀리 나설 수 없다는 말이다.

아마도 검마의 기습을 염려하는 듯했다.

“하, 하면……?”

“저들이 왔으니 조만간 그 마두도 오겠지요.”

결국 자신의 세가를 전장으로 삼겠다는 말이니, 나현의 기분이 좋을 리 없다.

하지만 그걸 겉으로 표시 낼 만큼 나현은 어리석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상황을 정리하지요.”

“그러십시오. 하면 빈승들은 이만…….”

마치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듯 일양 선사는 소림의 무승들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뻘쭘해진 나현이 멀거니 서 있는 협가의 무사들에게 짜증을 냈다.

“뭣들 하느냐? 다친 이들을 약당으로 옮기고, 문 앞을 정리해라.”

“예, 가주.”

세가 무사들의 복명을 들으며 나현은 가능한 한 피해가 적길 빌고 또 빌었다.

* * *

정신없이 뛰어 협가에서 백이십 리나 떨어진 서성까지 물러난 일행이 모여들었다.

“제길…….”

후량의 입에서 절로 욕설이 나왔다.

그렇게 기세등등하게 찾아갔다가 이렇게 뭐 쫓기듯 도망쳐 왔으니, 어이가 없기도 하고 화도 치솟았던 것이다.

“이미 정천맹이 협가에 손을 대고 있을 것이란 생각을 못했던 우리의 잘못이다.”

협련의 말에 묵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 외로 빠른 대응이야. 설마 벌써 협가에 손을 써놓았으리라곤 미처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그들의 대응이 빠른 게 아니라, 우리가 너무 늦게 움직인 건지도 모르지.”

협련의 음성엔 너무 안일했다는 자괴감이 가득했다. 그 탓인지 그의 말에 일행의 표정이 더욱 가라앉았다.

“그나저나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오?”

왕팔의 물음에 후량이 씹어뱉듯 답했다.

“어떻게 하긴, 다시 가야지!”

“다시 몰려가 봐야 또 이번 짝 나지 않겠소?”

“그렇다고 그냥 앉아 있을 순 없잖아!”

후량의 짜증에 왕팔은 인상을 구기긴 했지만 별다른 말을 하진 않았다. 자신도 후량의 지금 기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후량에게 대들 정도의 능력도 가지지 못했다는 것도 한몫했다.

“일단 무작정 가서는 안 될 거야.”

묵린의 말에 협련이 고개를 끄덕였다.

“야음을 틈타 볼밖에…….”

효과적인 야습 방법을 협련은 수백 가지도 더 알고 있었다.

그것을 막아야 하는 입장에서 십여 년을 넘게 살아왔던 과거와의 인연 때문이었다.

그렇게 일행은 서성의 야산 자락에서 해가 지길 기다렸다.

어차피 서성에서 육안까진 경공으로 반 시진이면 충분한 거리였던 것이다.

* * *

그렇게 협련 등이 해가 지길 기다리는 동안, 이번 사건의 중심인 고덕은 단리세가가 위치한 숙주에 도달하고 있었다.

협련 등을 쫓아가는 길목에서 우연찮게 하포로 향하던 단리세가의 무사를 만난 덕이었다.

그는 숙주로 향하는 동안, 그간 강호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들을 수 있었다.

그 까닭에 협련 등이 튀어나간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해냈다.

아마 고진의 일가가 단리세가의 보호하에 숙주에 있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면 그 자신도 안휘협가가 있는 육안으로 먼저 향했을 터였다.

그렇게 단리세가에 도착한 고덕은 객사로 안내되었다.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대협?”

외총관인 단리명과 함께 들어서며 인사를 건네는 단리천패의 표정은 그다지 밝아 보이지 않았다.

“가주도 잘 지내셨는가?”

무겁게 가라앉은 고덕의 음성에 자리에 앉는 단리천패의 표정도 함께 어두워졌다.

“다시 뵙습니다, 대협.”

가주의 뒤에 서 있던 단리명의 인사에 고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와 가주를 이렇게 자주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은 것 같군.”

그들이 고진 일가에 보인 호의 때문이다. 작게 시작된 인연이 깊어지는 것이 나름 기꺼웠던 탓이다.

그런 고덕의 마음이 다가왔지만, 단리천패는 밝은 음성으로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좋지 않은 일로 모시게 되어 마음이 무겁습니다.”

“그리되었군. 그나저나 조카 아이 일가를 데리고 있다고?”

“예. 아무래도 하포로 내려가는 것은 다소 위험스러워 보여서 모시고 오라 했습니다.”

단리천패의 답에 잠시 자리에서 일어선 고덕이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고맙네.”

생각 이상의 반응이었던지 단리천패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 말이 기꺼웠던지 고덕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래도 맺었던 인연들이 모두 헛된 건 아니었던 모양이야.”

고덕이 말하는 인연들이 안휘협가와 남궁세가를 가리킨다는 걸 모를 리 없는 단리천패의 표정이 조금 더 어두워졌다. 두 곳 다 적지 않은 인연들로 맺어진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사정이 있을 것입니다.”

“사정이라……. 그렇겠지. 그만한 일을 벌이는 데 사정이 없지는 않을 테니……. 하나, 난 그다지 이해할 생각은 없어.”

그 말로 고덕의 생각을 엿본 단리명의 얼굴은 완전히 굳어졌다.

“제가 뭐라 말씀드릴 수 있는 위치는 아니겠습니다만, 손을 쓰실 때 한 번만 더 생각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대협.”

단리천패의 부탁에 고덕은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리천패는 그런 고덕에게 답을 종용할 수 없었다. 그저 그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풀어지길 조심스럽게 기원해볼 뿐이었다.

“조카 일가를 만나고 싶네만…….”

“예. 외총관이 안내해드릴 것입니다.”

“고맙네.”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던 고덕이 생각난 듯 말을 이었다.

“참, 앞서 집을 나선 이들이 있네. 방법이 있다면 좀 데려왔으면 하네만…….”

“그렇지 않아도 대협과 관련된 이들이 안휘협가로 갈 것 같아 육안으로 무사들을 보내놓았습니다. 찾으시는 이들에 창군이 포함되어 있다면 곧 찾아 연락을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는 말로 보아선 벌써 한 차례 소동이 지나간 모양이었다.

“고맙다는 말밖엔, 지금은 해줄 게 없네.”

“무엇을 받고자 한 일이 아닙니다. 괘념치 마십시오.”

단리천패의 말에 고덕은 그저 가볍게 포권을 취해 보이곤 앞서는 단리명을 따라 객사를 나섰다.

그런 고덕의 등을 바라보는 단리천패의 눈엔 걱정이 가득했다.

* * *

단리명을 따라 내원으로 든 고덕은, 이내 고진을 비롯한 그들 일가를 만날 수 있었다.

“숙부님!”

단박에 달려와 안겨 드는 고진의 등을 두드리는 고덕의 눈에 아픔이 스쳐 지나갔다.

“다 나 때문에 생긴 일이라 들었다.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어찌 그것이 숙부님 탓이겠어요. 모두 못난 제 탓이니, 그런 말씀 마세요.”

며느리 대접도 받지 못하던 자신의 자리를 찾아준 고마운 숙부였다. 무뚝뚝하고 거칠긴 했지만, 지나고 보면 말 하나, 행동 하나에 깊은 뜻이 서리지 않은 것이 없고 정이 흐르지 않은 것이 없던 숙부였다.

그런 사람에게 마두라니…….

소문이 어떠하든 고진은 숙부를 믿고 있었다.

“자네에게도 할 말이 없군.”

자신의 자리와 가족마저 지키지 못한 녀석이긴 하나 그 원인이 자신에게 있으니, 원망보단 미안함이 더 컸던 것이다.

“송구합니다, 숙부님.”

나성운은 나성운대로 할 말이 없었다. 그 탓에 죄를 청하는 그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아이들의 모습도 가슴 아프긴 매한가지다. 부모의 뒤에서 그저 눈물만 흘리는 두 조카 손자를 바라보며 고덕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이 걸어왔던 길이 어떤 길인지는 고덕 본인이 더 잘 알았다. 정천맹이 말하듯 더럽고 피로 점철된 길도 분명히 걸었고, 죽이지 말아야 할 자도 죽인 적이 있었다.

하니 자신에게 잘못이 없다는 말은 하지 못한다. 그들이 잘못 안 거란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것이 싫어 나왔건만… 그래서 가족에게 돌아왔건만……. 그것이 비수가 되어 가족에게 상처를 주리라곤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렇게 울음을 그치지 못하는 고진의 등을 두드리는 고덕은 자신의 소리 없는 울음도 달래야 했다.

고진이 울음을 그친 것은 한참이 지난 후였다.

“그래, 어찌해주길 바라느냐?”

고덕의 물음에 고진은 힘없이 답했다.

“그냥 집으로 가고 싶어요, 숙부님.”

“집이라면……?”

“하포. 친정으로 갔으면 해요.”

조카의 답에 고덕은 나성운을 바라보았다.

“자네 생각도 같은가?”

“집안과 척을 질 것이 아닌 이상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숙부님.”

나성운의 결정에 서린 고충을 알기에 고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알았다. 그렇게 하자꾸나. 네 오라비들이 오면 길을 나서기로 하자.”

혼자 가자면 못할 것도 없다. 근처에만 접근해도 모조리 목을 비틀어버리면 되니까.

하지만 매일같이 피로 점철된 길을 갈 것이 아니라면 협련들과 함께 움직이는 것이 조카 일가의 안위에 더 큰 도움이 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오라버니들이 오시나요?”

“이미 나갔지. 아마 지금쯤 육안 쪽에 있지 싶구나.”

고덕의 답에 나성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들이 육안으로 간 이유를 짐작해서였다.

소림을 앞세운 정천맹의 도움을 알지 못하는 나성운은, 후량 한 사람조차 막을 능력이 없는 세가가 커다란 홍역을 치를 것이라 생각했다.

그 탓에 더욱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무리 자신들을 내쫓았다고는 하나 그곳은 자신의 부모가, 그리고 형제가 머무는 집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죽을상을 짓는 나성운을 바라보는 고덕의 마음은 더없이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 * *

해가 완전히 저문 뒤 서성에서 출발한 협련 등은 육안에 도착하고서도 달이 완전히 기울길 기다렸다.

안휘협가를 쳐 씨를 말리자는 것도 아니고, 그저 고진 일가의 행방을 알 만한 놈만 납치해 나올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잔뜩 웅크리고 있던 이들이 움직인 건, 달이 기울기 시작한 인시(寅時:오전3~5시) 중엽이었다.

조심스럽게 안휘협가 쪽으로 다가가던 그들이 막 담을 넘기 직전이었다.

-잠시만요.

막 땅을 박찼던 협련은 너무 놀라 바닥으로 떨어졌고, 협련의 뒤를 따르던 묵린은 창을 잡은 손을 허우적댔다. 그 탓에 뒤에서 순서를 기다리던 후량은 묵린의 창에 걸려 나동그라져야 했다.

물론 일행 중 가장 뛰어난 경공 실력으로 인해 벌써 담을 넘었던 왕팔은 기겁한 표정으로 다시 뛰어넘어왔고 말이다.

“뭐, 뭐야?”

혼이 쏙 빠져나간 표정인 왕팔의 당황성에 작은 그림자 하나가 접근했다.

-쉿! 조용히 하십시오. 그렇게 소리를 내다간 들킵니다.

상대의 전음에 황급히 신형을 추스른 일행은 자신들에게 다가선 이를 살폈다.

-누구……?

협련의 전음에 상대가 답했다.

-전 단리세가에서 온 단리청이라 합니다.

-단리세가……. 한데 왜?

대답 여하에 따라서 단칼에 베겠다는 생각인지 협련의 손은 검병에 얹혀 있었다.

-고 대협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고 대협? 어느 고 대협?

설마하니 고덕이 자신들의 뒤를 쫓아 나왔으리라곤 생각도 못해본 협련의 물음에 단리청이 답했다.

-검마 대협이라면 더 편하겠군요.

-헙! 대협의 소식? 그게 뭐지?

-대협께서 단리세가로 오시랍니다.

단리청의 전음에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던 일행의 시선이 다시 단리청에게 향했다.

-그 말을 어찌 믿지?

협련의 말에 단리청은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달리 증명할 방법은 없습니다만…….

이번엔 묵린이 물었다.

-한데 대협이 왜 단리세가에 계시지?

-그건 나성운 대협 일가가 저희 세가에 머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나성운? 그게 누구야?

무감각한 후량의 질문에 묵린이 통박을 주었다.

-넌 매부 이름도 모르냐?

-매부? 아! 그게 그 녀석 이름이었나.

머리를 긁적이는 후량에게서 시선을 돌린 협련이 물었다.

-그들이 어쩌다 단리세가에?

-그게…….

답하는 단리청의 전음 사이로 왕팔의 전음이 파고들었다.

-근데 이렇게 협가의 담벼락 아래서 계속 대화를 나눌 생각이오?

왕팔의 전음에 일행은 그제야 자신들이 있는 곳을 상기하곤 조심스럽게 물러나기 시작했다.

빠각-

야밤을 울리는 갑작스런 소음과 함께, 부러진 나뭇가지를 밟고 서 있는 후량을 향해 사람들의 시선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그 소리를 확인하기 위해 담장 위로 오른 협가 무사의 시선이 그들을 발견했다.

“거기 누구냐? 어, 어! 놈들이다!”

“어디?”

“비상 걸어! 소림승들도 깨우고!”

삑삑!

곧바로 소란스러워지는 담장 안을 확인한 일행은 정신없이 뛰기 시작했다.

한데 방향이 모두 동남쪽이다. 본능적으로 이전에 합의된 피난처 서성으로 튀었던 탓이다.

“이런!”

그것도 모르고 단리세가가 위치한 숙주를 목표로 동북쪽을 향해 뛰리라 생각하고 몸을 날렸던 단리청은 황급히 방향을 틀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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