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73장 (74/129)

제73장. 혼란(混亂)-협의와 정의의 구분

지금은 마도인을 먼저 잡는 사람이 임자인 시기였다.

더구나 후량이 의탁할 정도의 마도인이라면… 때려잡는 순간 강호 천하에 이름을 떨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모든 이들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사람들이 다급히 빠져나간 방엔 한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삼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를 바라보며 단리천패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대는 왜 따라가지 않은 건가?”

“후량도 어쩌지 못할 거면서 그가 의탁할 정도의 마도인을 잡으러 갈 정도로 멍청하지 않아서요.”

사내의 답에 이채를 머금은 단리천패가 물었다.

“어디의 누구신가?”

“황보세가의 황보철웅이라 합니다.”

황보세가라면 백여 년 전엔 당당히 백도 팔대세가에 이름을 올리고 있던 전통의 무가였다.

과거 백마전쟁에서 세가의 주요 고수들을 모조리 잃고 여러 절기들이 실전된 탓에 성세가 기울어 결국 팔대세가의 자리에서 밀려나 백도 사십 중문으로 내려앉았지만, 그들이 가진 무공의 깊이는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황보 가주와는 어찌 되시는가?”

남궁창천의 물음에 황보철웅이 포권을 취해 보이며 답했다.

“아우 됩니다, 대협.”

당금 황보세가의 가주는 남궁창천과 작은 인연이 있었다. 그 탓에 물은 것이다.

“그렇군. 가주께선 잘 지내시는가?”

“예, 대협. 가주께선 가끔 대협의 이야기를 하시곤 했습니다.”

황보철웅의 말에 남궁창천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내 흉이라도 본 모양이로세.”

“아닙니다. 향후 십대고수의 자리에 오르실 강자라 말씀하시곤 하셨습니다.”

“허허, 그 사람이 내 얼굴에 금칠을 했구먼.”

남궁창천의 말에 단리천패가 물었다.

“황보 가주와 아시는 모양입니다.”

“예. 어릴 적에 같은 서당에서 글을 배웠습니다.”

남궁창천은 어릴 적 북경의 한림원에서 수학을 한 적이 있었다.

강호 명문 세가 자손으로 관부의 기관에서 공부를, 그것도 무술이 아니라 학문을 닦는다는 것은 꽤나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릴 만큼 특이한 일이었다.

물론 그때 일은 남궁창천이 벌인 일종의 반항이었다. 하지만 그때 만난 황보정은 기울어가는 세가를 바로잡기 위해 관에게 손을 내밀어야 할 정도로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던 황보세가에서 보낸 일종의 인질이었던 것이다.

그런 입장에서 같은 강호 무가의 자손을 만났으니, 황보정의 마음에 얼마나 커다란 위안이 되었을지는 굳이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그땐 꽤나 유명한 이야기였기에 기억이 남아 있던 단리천패는 곧바로 말뜻을 알아듣곤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 두 사람에게 황보철웅이 물었다.

“그런데 저들을 말리지 않으실 생각이십니까?”

황보철웅의 물음에 남궁창천이 되물었다.

“왜 우리가 말려야 한다고 생각하나?”

“두 분 가주께서 이리 잠자코 계신 것은 상대가 흔히 말하는 피에 굶주린 마두가 아니란 뜻일 테니까요.”

황보철웅의 말에 남궁창천이 피식 웃었다.

“우리가 힘에 밀려 어쩔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은 해보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이곳에 계속 계시지만은 않았겠지요. 돌아가셔도 벌써 돌아가시지 않았겠습니까?”

황보철웅의 답에 단리천패가 웃음기 담긴 음성으로 말했다.

“내 자네의 이름을 듣지 못했다면 제갈가의 사람이 앉아 있는 것이라 생각할 뻔했네그려.”

단리천패의 말에 황보철웅이 고소를 베어 물었다.

“천하에 거침이 없었던 곳이 저희 황보세가였다 들었습니다. 하나 그 기질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가세가 기울었기에 제갈가의 재치라도 배워야 했던 것입지요.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만…….”

황보철웅의 말에 단리천패의 입가에 그려졌던 미소가 사라졌다.

그 말인즉슨 머리가 좋아져야만 살아남을 수 있을 정도로 황보가의 사정이 어려웠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말실수를 한 모양일세. 사과하지.”

단리천패의 말에 황보철웅은 꽤나 놀란 표정을 지었다.

명예와 체통을 중시하는 백도, 그중에서도 세가의 명예를 최고로 치는 팔대세가의 가주에게서 호통이 아닌 사과를 들으리라곤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대, 대협!”

너무 놀라 하는 황보철웅에게 단리천패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 놀랄 일은 아닐세. 요사이 우리 단리세가도 배운 것이 있었을 뿐이니. 하니 변함을 부끄러워 말게. 변한다는 건 또 다른 기회이기도 하니까 말이야.”

진심이 가득한 단리천패의 말에 황보철웅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포권을 취해 보였다.

자신들만큼이나 직선적인 곳이 바로 단리세가였기 때문이다.

* * *

그 시각, 떼거리로 몰려나간 백도 사십 중문의 사람들은 안휘협가의 사돈이 머무는 전각을 수소문해 그곳을 급습했다.

쾅- 콰광-

커다란 폭음과 함께 앞서 뛰어들었던 백도향과 이한이 낭패한 꼴로 튕겨 나왔다.

그 탓에 몰려들었던 이들의 발걸음이 주춤한 순간, 기다란 묵창을 든 묵린이 천천히 나섰다.

“감히 어떤 놈들이냐!”

고함을 치고 보니 간간이 아는 얼굴들이 섞였다. 그들도 묵린을 알아보곤 당황성을 토했다.

“아, 아니, 묵 대협!”

“창군?”

그들의 놀람에 묵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오?”

묵린의 물음에 나선 이는 그와 안면이 있던 항산파의 제마편(劑魔鞭) 호찬이란 자였다.

“대협이 어찌 이곳에서 나오십니까?”

“내가 머무는 객사를 공격한 이들에게서 그런 말을 들으리라곤 생각해보지 못했소이다.”

“대, 대협이 머무는 객사라고요? 이곳이 말입니까?”

“그렇소.”

묵린의 답에 호찬의 시선이 다른 이들에게 향했다. 그 시선을 받은 이가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분명 이곳에 안휘협가의 사돈 되는 이가 머물고 있다고 했소. 나만 들은 게 아니오. 아니외까?”

그의 말에 여기저기서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이 속출했다.

상황이 그리되자 호찬은 묵린에게 다시 물을 수밖에 없었다.

“호, 혹시 대협께서 안휘협가의 사돈… 되십니까?”

“내가 모시는 분이 그렇긴 하오만, 그건 왜 물으시오?”

묵린의 물음에 저만치 나뒹굴었던 백도향이 어느새 다가와 비아냥거렸다.

“역시 박쥐로다. 이번엔 마도에게 빌붙은 모양이구나!”

백도향의 말에 묵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북경묵가의 피가 이어진 사람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소리가 바로 박쥐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네놈이 죽고 싶은 모양이로구나!”

대번에 으르렁대는 묵린의 기세에도 불구하고 백도향은 자신의 도를 상단세로 들어올리며 기세를 개방했다.

“흥! 제하이십사강이란 이름이 아까운 박쥐 놈, 어디 덤벼 봐라. 마두의 하수인인 네놈의 목을 베고 네 주인의 살을 저며 백도의 기개를 세울 것이다.”

백도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함께 나뒹굴었던 이한이 그 옆에 서며 검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들과 인연이 있던 이들이 한둘씩 더해지자, 종내 엔 몰려왔던 이들 모두가 무기를 들어올리고 묵린을 겨눴다.

그 가운데는 가볍지 않은 인연을 맺었던 호찬마저 속해 있었다.

“더러운 것이 인심이라더니 그 말이 틀리지 않는구나. 오냐, 오거라. 내 오늘 묵가의 창이 어떤 것인지 네놈들에게 똑똑히 보여 줄 것이다.”

한 바퀴 휘돌려 중단세를 취한 묵린의 창에서 제하이십사강의 이름이 허명이 아닌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사위를 내리누르는 듯한 막대한 기파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강력한 신위에 중인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런 일촉즉발의 상황에 갑작스런 음성이 끼어들었다.

“뭐야, 이것들은?”

뒤에서 들려온 음성에 사람들의 시선이 뒤로 돌려지자 문제의 시발점이 된 후량과 또 다른 사내를 거느린 약관의 청년이 기분 나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이… 갑자기 쳐들어와서…….”

묵린의 말에 고덕의 눈썹이 역팔자를 그렸다.

“쳐들어와? 어딜?”

“객사를 침습했습니다.”

묵린의 답에 중인들을 바라보던 고덕이 물었다.

“혹시 묵가하고 원수라도 졌나?”

고덕의 물음에 혼란스런 표정의 호찬이 물었다.

“그, 그건 아니네만… 그런데 자넨 누군가?”

“누구, 나?”

“그러하네.”

“흠… 당분간이긴 하지만 네들이 쳐들어간 객사의 주인.”

고덕의 답에 여기저기서 헛바람을 들이켜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헛! 그, 그럼 네놈이 그 마두! 죽여라!”

버거워 보이던 묵린을 앞에 두고 있던 중인들은 상대적으로 쉬워 보이는 고덕의 출현이 반가웠던지 그 고함 소리 한 번에 망설임 없이 무기를 돌려 달려들었다.

순간 정면에서 고덕을 바라보던 묵린은 그의 눈에서 무시무시하게 일어서는 광기를 목격하곤 눈을 감았다.

그 직후…….

쾅-!

코앞에서 벽력탄이라도 터진 것 같은 폭음과 함께 엄청난 풍압이 묵린을 덮쳤다.

기겁을 해 천근추로 신형을 잡고, 그것도 모자라 내기를 돌려 창대를 땅에 박아 넣고 버텼음에도 주르륵 밀려나는 신형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렇게 버티길 잠시, 다행히 모든 것을 날려 버릴 기세로 덮쳐 왔던 풍압은 몰려왔던 기세만큼이나 순식간에 지나쳐 버렸다.

풍압이 사라지자 눈을 뜬 묵린의 시야에는 강력한 풍압의 여파 탓인지 가득 일어난 먼지로 인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그렇게 일어난 먼지가 가라앉자 드러난 정경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고덕을 중심으로 거의 오 장 정도의 크기를 가진 구덩이가 파여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깊이도 깊어 거의 일 장에 달하는 무지막지한 구덩이였다.

그 구덩이에서 멀쩡한 모습으로 손을 터는 고덕은 못마땅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로서는 또다시 제어가 안 되는 내기를 무작정 뿜어내야만 했던 탓이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묵린은 담담할 수 없었다.

분명 고덕에게 달려들던 오십여 명의 백도인들의 흔적을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 대협, 설마……!”

크게 당황하는 묵린을 바라보며 고덕이 투덜거렸다.

“설마, 뭐?”

“그, 그게… 정말 다, 다 죽이신 겁니까?”

묵린의 물음에 고덕의 검미가 일그러졌다.

“네놈도 내가 살인귀로 보이나?”

“아, 아닙니다. 그건 아닙니다만…….”

당황하는 묵린에게 고덕이 투덜거렸다.

“주변에서 찾아봐. 날아가는 모습을 대충 본 거는 같으니까.”

“날아가요?”

이해 안 된다는 표정인 묵린의 물음에 고덕은 아무 답도 없이 객사로 향했다.

하지만 그것조차 고덕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우르르, 쿠광쾅!

갑작스런 굉음에 뒤를 돌아본 묵린은 고덕이 잡은 문만 남기고 완전히 무너져 주저앉은 객사의 모습을 바라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마도 방금 전에 휘몰아쳤던 풍압이 건물을 후려쳤던 모양이었다.

“이런, 사돈한테 욕먹겠군.”

고덕은 전각을 단숨에 무너트린 것보다는 그로 인해 안휘협가에 피해를 입혔다는 사실이 더 중요한 모양이었다.

곤란한 표정의 고덕이 내원으로 들어가는 동안, 묵린은 후량과 협련의 도움을 받아 사라진 백도 사십 중문의 사람들을 찾아 나섰다.

한참을 뒤진 결과 주변 건물들의 지붕 위에 정신을 잃은 채 올려져 있던 사람들을 찾아내는 덴 성공했지만, 일부는 부상이 꽤나 심했다.

중상을 입은 이들의 대부분은 무너진 자신들의 객사 잔해 속에서 찾아낸 이들이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그들 속에는 백도향과 이한이 끼어 있었다.

그렇게 새로운 분란거리를 남겨 둔 채 고덕은 서둘러 안휘협가를 떠나야만 했다.

물론 그것은 고덕 자신의 의지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잔칫집에 찾아온 하객 다수를 부상자로 만들어내는 것도 모자라 사돈댁 건물 하나를 완전히 부숴버린 일로 인해 고길이 사돈 볼 면목이 없다며 서둘렀던 탓이다.

결국 형의 손에 이끌려 안휘협가를 떠나게 된 고덕은 고덕대로 백도 사십 중문에 좋지 않은 기억을 가지게 되는 순간이었다.

* * *

고길의 성화에 고덕과 그 일행은 떠나갔지만, 본격적인 소란은 그 이후에 불어닥쳤다.

몸을 대충 추스른 백도향과 이한을 중심으로 한 백도 사십 중문의 사람들이 나현에게 몰려온 것이다.

“말을 해보란 말씀입니다. 어찌 사파인이 안휘협가의 잔치에 주빈이 되었으며, 마도인이 사돈이란 말입니까? 특히 우리에게 손을 쓴 그 마도의 잡놈이 누군지 밝혀 주셔야겠습니다.”

백도향의 강력한 요청에 나현은 답답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마음 같아서야 ‘아, 그 사람이요. 검마랍니다. 아시죠? 검마.’라고 하고 싶었지만, 정말 그랬다간 무슨 오해가 더 쌓일 줄 몰라 차마 사실대로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충돌이 있기 전이라면 그것을 밝힘으로써 세가에 이득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백도 사십 중문의 사람들과 고덕이 충돌한 이후인 지금에서야 밝히게 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나올까 두려웠던 것이다.

“허허, 참…….”

그 탓에 나현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헛기침만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그로서는 당금의 상황상 사실도 이야기하지 못하지만, 달리 거짓을 말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나현의 모습에 백도 사십 중문 사람들의 항의는 점점 더 거세져 갔다.

그 모습을 걱정스런 시선으로 바라보는 남궁창천도 별다른 도움을 줄 수 없었다.

사안이 안휘협가에서 벌어진 탓에 전적으로 그들의 일이기도 한 이유도 있었지만, 검마가 마도 사람인 것도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 같았으면 후에 무슨 일이 벌어지든지 그가 검마라는 걸 밝히고 정면 돌파를 했을 것이나, 세가의 힘이나 강호상에서의 무게가 남궁세가와는 달랐던 안휘협가에까지 자신의 생각을 종용할 수는 없었다.

결국 불같이 분노하는 백도 사십 중문의 사람들을 안휘협가는 이해시키지 못했다.

그뿐이 아니라 오해를 가득 안은 그들이 부상조차 회복되지 않은 몸으로 안휘협가를 떠나는 것마저 잡지 못했다.

그 결과 강호에 뜻하지 않은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쾅!

최근 강호에 퍼지기 시작한 소문 때문에 급히 소집된 수뇌 회의에서 책상을 거칠게 친 나현의 사나운 음성이 터져 나왔다.

“감히 안휘세가가 마도에 붙었다며 떠들고 다닌단 말인가?”

나현의 분노에 외당주를 맡고 있는 나호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소문이 급속도로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일전에 세가를 떠난 백도 사십 중문의 사람들이 고의적으로 퍼트린 것 같습니다.”

“내 이 잡놈들을……!”

파랗게 떠는 나현이었지만, 사실 그들을 상대로 징치에 나설 정도로 확실한 힘의 우위를 안휘협가는 가지고 있지 못했다.

실제로 몇몇 백도 사십 중문이 보유한 고수들은 안휘협가의 최고수인 나현보다 윗줄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실례로 이전에 하객으로 왔던 백도향과 이한들이 바로 그런 고수들에 속했다.

경지야 같은 초절정이라 해도 미세한 차이나마 그들이 나현의 깨달음을 뛰어넘었던 것이다.

“협무단을 준비시킬까요? 가주.”

그 탓에 외당주인 나호군의 물음에 나현은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세가의 힘으로 하자면 백도 사십 중문의 그 어떤 곳도 누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백도 사십 중문 전체로 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적어도 백도 사십 중문 세 곳 이상이 합심하면 지금의 안휘협가로서는 감당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아니, 세 곳까지 갈 것도 없이 두 곳만 연수(聯手)해도 안휘협가로서는 곤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이유는 안휘협가는 원정을 해야 하고, 백도 사십 중문의 두 곳은 자신들의 앞마당에서 전력을 동원해 막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흐음…….”

그 탓에 분기에 부들부들 떠는 나현은 그저 침음만 흘릴 뿐이었다.

* * *

안휘협가가 마도에 붙었다는 소문이 커져 가자 세간의 시선은 안휘협가의 대응에 주목되었다. 아무리 백도 팔대세가의 말석이라곤 해도 절대로 이런 모욕을 참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탓이다.

하지만 곧 그 소문의 진원지를 찾아 검을 들 것이라던 세인들의 생각과 달리 안휘협가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것이 소문을 믿지 않던 이들마저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었다. 물론 그 소문을 믿은 이들이나 퍼트린 당사자들은 보란 듯이 안휘협가를 공공연히 성토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자 소문의 당사자인 안휘협가와 혼인 동맹을 맺은 셈이 되는 남궁세가에도 작지 않은 압력이 들어왔다.

모르면 몰랐으되 이제 알게 되었으니 마도의 여식을 내치라는 것이었다.

남궁세가의 입장에서 백도 사십 중문의 압력은 웃어버리면 그만이었지만, 차츰 소문에 고개를 갸웃거리기 시작한 이들 중에 구파일방이 섞여 있다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특히 마도라면 이를 가는 곤륜에선 벌써부터 태도를 분명히 하라는 위협성 서신이 날아드는 판국이었다.

결국 침묵만 유지해선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남궁창천의 서찰이 정천맹으로 날아들었다.

군사인 제갈천이 들고 온 서찰을 읽어 내려가던 권왕의 표정에 곤란함이 깃들었다.

전임 맹주였던 무극검이 자리에서 물러나며 남긴 말은 오로지 하나였다.

‘마교가 다시 일어선다 하나 그것을 막지 마오.’

‘어찌 그냥 두라 하시오이까?’

‘우리가 마교의 앞을 막으면 검마가 나설 것이기 때문이오.’

‘검마가 건재한 것입니까?’

권왕의 물음에 무극검은 침중한 표정으로 답했었다.

‘그는 건재하다오. 이 늙은 도사를 단수에 꿇어앉힐 만큼……. 하니 그를 자극하지 마시게. 피가 강을 이루고, 시체로 산을 쌓을 터이니…….’

그가 아니어도 권왕은 검마를 건드릴 생각이 없었다.

이미 입적한 사부가 그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여전히 또렷이 기억했기 때문이다.

‘그는 위험한 사람이란다. 구환아, 그를 화나게 하지 말거라. 하면 세상은 조용하고 백도는 평안할 것이다.’

‘사부님, 어찌 마교의 마두를 그리 높게 보라 하십니까?’

‘허허, 내 그를 통해 무학의 끝없는 낭떠러지를 보았으니, 어찌 네게 위험하다 말하지 않을까? 구환아, 내 사랑하는 제자야, 부처님 곁으로 가야 할 길에 이렇듯 걱정이 깊으니 나도 해탈을 하기엔 부족한 모양이로구나. 허허허.’

그것이 사부가 남긴 마지막 유언이었다.

권왕도 자신의 사부가 소림에 수도 없이 많았던 그저 그런 무승이었다면 어쩌면 고개를 갸웃거리고 말았을지도 모를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의 사부는 소림이 배출한 역사상 강력한 고수였다는 찬사를 받는 불황이었다.

소림의 기본을 닦았다는 달마 대사의 경지를 초월한 유일자, 현경의 마지막을 밟은 초인, 그런 사부의 유언이었던 것이다.

“어찌하시겠습니까? 맹주.”

제갈천의 물음에 권왕 구환 대사가 거꾸로 물었다.

“그런 자네는 어찌했으면 하는가?”

자신의 물음에 답은 하지 않고 오히려 물어오는 맹주를 바라보며 제갈천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 전임 맹주께 들은 말씀이 있으십니까?”

“호~ 자네도 들었던가?”

“역시 말씀을 남기셨군요. 예. 제게 두 번, 세 번 당부를 하시더군요. 마교의 재건에 눈길을 주지 말고, 검마의 이름 앞에 어떤 행사도 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자네의 말투를 들어보니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았던 모양이로세.”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예, 그러했습니다. 정천맹이 발족된 연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마교의 발호에 맞서기 위해서였습니다. 한데 무너졌던 마교의 재건을 모른 척하라니요. 더구나 마교의 가장 핵심 고수 중 한 사람인 검마를 그냥 두라는 말씀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갈천의 불만에 구환 대사는 그 특유의 후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음에도 어찌 마교의 재건을 공론화하지 않았던 겐가?”

“그에 대한 제 보고를 들으시고도 새로 맹주가 되신 대사님도 아무 명이 없으셨으니까요.”

“허허, 군사의 속이 시커멓게 타고 있었겠구먼…….”

구환 대사의 말에 제갈천은 총기로 반짝이는 눈으로 맹주를 바라보았다.

“그 속을 풀어주실 명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맹주님.”

제갈천의 눈길을 받은 구환 대사는 고심을 했다.

무극검과 선사의 말을 들을지 아니면 군사의 말대로 정천맹의 대의를 따를지에 대해서 말이다.

한참을 고심하던 구환 대사가 물었다.

“일을 시작하면 군사는 어찌 움직일 생각이신가?”

“곤륜과 화산, 개방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맹주님.”

마교와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곳이 곤륜이다. 때문에 매번 마교의 발호가 있을 때마다 가장 먼저 최대의 피해를 입는 곳도 언제나 곤륜이었다.

거기에 화산은 무소유를 추구하는 도량임에도 불구하고 두려울 정도로 깊은 호전성을 가지고 있었다. 오죽하면 화산의 호전성이 얼핏 마교와 닮아 있다고 평하는 강호인들마저 적지 않을까.

그만큼 화산은 자신들보다 강한 이들의 존재를 본능적으로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러니 곤륜과 화산이 거론된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 둘은 전통적으로 마교의 일에 가장 민감한 이들이었으니까.

하지만 개방은 아니었다. 소림과 무당만큼 방관 주의를 고수하는 곳이 바로 걸개들의 집단인 개방이었던 탓이다.

“어찌 개방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인지 물으면 눈이 어둡다 흉을 보시겠는가?”

구환 대사의 물음에 제갈천이 고소를 베어 물었다.

“개방은 자신들의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는 맹의 행태에 걱정이 많았습니다, 맹주.”

다른 말로 하자면 자신들의 정보를 무시하는 맹주의 처사에 불만이 많았다는 뜻이다.

정보는 개방의 자존심이다. 그것을 틀어막았으니 불만이 쌓일 만도 했다.

모든 것을 이해한 구환 대사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일단 가볍게 시작하시게. 안휘협가와 남궁세가부터 단속하는 걸로 말일세.”

구환 대사의 말에 반색을 띤 제갈천이 답했다.

“하오면 무당에 기별을 넣어 도움을 청하겠습니다.”

검마와 어깨를 나란히 하려면 그와 동급의 고수를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백도에 그런 인물은 단 한 명뿐이다.

바로 무극검.

그 자신의 의지가 어떤지는 중요치 않았다. 정천맹의 요청을 받은 이상 무당은 움직일 것이고, 사문의 명을 받은 무극검은 그 명을 좇아야만 할 테니까 말이다.

한데, 제갈천의 예상과는 달리 구환 대사의 고개가 저어졌다.

“그럴 필요는 없네. 이미 맹은 현경의 고수를 가졌으니…….”

구환 대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잠시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던 제갈천의 얼굴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가, 감축드립니다, 맹주님.”

느닷없는 축하 인사에 구환 대사는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고맙네, 군사.”

그렇게 정천맹은, 아니 소림은 다시금 현경의 고수를 보유하게 된 것이었다.

권왕에서 이제는 권황으로 불릴 고수를…….

그리고 그것이 무극검의 권유도, 선사의 걱정도 미뤄놓고 구환 대사가 제마척사의 기치를 든 자신감의 발로이기도 했다.

그렇게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정천맹 맹주실의 책상에는 남궁창천이 보낸 서찰만 외롭게 남았다.

안휘협가의 사돈으로 거론되는 이의 정체는 검마입니다.

마두라 부르긴 어려운 인물이니, 그 뒤를 살펴 술렁이는 강호가 평온을 찾을 수 있도록 맹주님의 혜안을 청합니다.

-남궁세가주 남궁창천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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