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2장. 오해(誤解)-도왕의 불행
한참 후, 나일평의 안내로 가주의 집무실로 안내된 고덕은 비장한 표정으로 검마란 희대의 살인 마두에 대해 침을 튀겨 가며 열변을 토하는 나현의 설명을 들어야 했다.
“마교가 망한 이후 아마 숨어 있을 곳을 찾다 협련이라는 가명으로 고 대협의 그늘로 숨어든 듯합니다. 하니 서둘러 그를 정리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의 속내를 들키지 않아야겠지요.”
나현의 설명이 끝나자 심각한 표정의 고덕이 물었다.
“흠… 그렇군요. 그렇게 악독한 이라니……. 한데, 이 이야기는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왜 그러십니까? 혹여 정보의 진실성 여부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도왕께서 직접 두 눈으로 그 마두를 확인하셨으니까요.”
“흐음… 도왕이라…….”
“예. 그분의 말이니 확실합니다.”
나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고덕이 청했다.
“일단 그분의 말을 제가 들어볼 수 있겠습니까?”
“확인이 필요하시군요. 그렇긴 하지요. 자신의 사람을 내칠 때는 그에 합당한 이유가 반드시 필요한 법이니. 알겠습니다. 제가 그분을 청하지요.”
이내 나현의 명을 받은 나일평이 도왕을 부르러 떠나고, 잠시 후…….
“어서 오십시오. 사돈께서 선배께 직접 확인하고 싶다고 해서 말입니다.”
들어서던 도왕은 무슨 일인지 문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 도왕에게 나현이 비어진 의자를 가리켰다.
“급하시긴 하겠지만, 일단 앉아서 사돈께 확인을 시켜 주십시오.”
태평한 나현의 말에 도왕은 사색이 되어 나현과 고덕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런 도왕을 지그시 바라보던 고덕이 입을 열었다.
“피에 굶주린 미친놈이라……. 언제 어떻게 백도인의 뒤통수를 칠지 모르는 야비한 놈이고, 어린아이의 간을 간식으로 빼먹고, 임산부의 배를 차서 애를 떨어트리는 것을 취미로 삼으며, 비구니를 겁탈하는 게 특기라……. 네가 검마란 희대의 마두에 대해 말한 거라고.”
지금까지 열거한 것들은 나현이 검마의 위험성을 알리기 위해 고덕에게 했던 말들이다.
물론 그 말에 신빙성을 더하기 위해 이 이야기들은 도왕이 직접 해준 것이라는 말을 덧붙여 주었다.
순간 도왕이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대협. 제, 제가 설마 그런 무지막지한 험담을… 정말 아닙니다.”
갑작스런 도왕의 모습에 당황한 나현이 그를 불렀다.
“왜 그러십니까? 도왕 선배, 혹시 우리 사돈을 아세요?”
나현의 물음에 그를 책망의 시선으로 바라보던 도왕이 고덕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애원했다.
“저, 정말 아닙니다. 다 거짓말이에요. 전 그런 말을 한 적 없습니다, 검마 대협.”
도왕의 마지막 말에 기겁할 듯 놀란 나현에게 고덕의 시선이 돌아왔다.
“저 덜떨어진 녀석의 말이 맞습니까? 사돈.”
“히익.”
절로 이는 기함을 막을 수 없었다. 극도로 놀라 마구 흔들리는 나현의 눈을 직시하며 고덕이 다시 물었다.
“저 녀석의 말이 맞습니까, 아니면 사돈이 지어내신 겁니까?”
뒤로 갈수록 뭉클뭉클 피어오르는 끔찍하도록 강력한 기세에 나현의 고개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동적으로 저어졌다.
“그 고갯짓은 저 녀석이 지껄인 말이 맞는다는 뜻이겠죠, 사돈?”
고덕의 물음에 나현의 고개가 방향을 바꿔 위아래로 맹렬히 휘둘렸다. 지금 나현의 머릿속엔 오로지 살아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그 탓에 나현은 자신이 무슨 짓을 벌이는지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그 모습에 도왕의 입에서 절박하고 억울한 음성이 토해졌다.
“거, 거짓말! 거짓말입니다. 대협, 대협, 어, 어, 대, 대협!”
점점 다가오는 고덕의 신형을 바라보며 대협만 부르짖던 도왕의 음성이 갑자기 찢어지는 비명 소리로 바뀌었다.
“끄아아아악~”
느닷없는 사태에 가주전의 경비를 맡고 있던 협가의 무사들이 검을 그러쥐었지만, 아무도 들이지 말라던 가주의 명을 상기한 나일평은 손을 저어 다가서는 무사들을 물렸다.
그것은 멀뚱히 나일평의 곁에 서 있던 팽문천도 다르지 않았다. 그도 무슨 일이 있어도 방으로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도왕의 엄명을 받았던 것이다.
그렇게 외부의 철저한 무관심 속에서 도왕의 비명이 한참 동안 안휘협가를 쩌렁쩌렁하게 울려 댔다.
* * *
어디를 어떻게 비트는지 몰라도 고통은 끝이 없이 몰려드는데 상처는 남지 않았다.
초극도 아니고 이미 화경에 오른 자신을 마치 애들 장난감 가지고 놀듯이 이리 비틀고 저리 비트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상대가 무섭기도 하고 팽가에 피해가 갈까 두렵기도 했지만, 정작 반항조차 하지 못했던 것은 자신의 내력을 완전히 봉쇄할 정도로 강력하게 퍼져 나오는 무지막지한 기파 때문이었다.
그렇게 고문 아닌 고문에 녹초가 된 도왕과 여전히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나현을 배석시킨 고덕의 앞엔 남궁세가의 가주와 남궁단이 불려와 있었다.
“소문을 내려던 건 아닌데 저 인간하고 안면이 있었다. 해서 알려진 것이니 내 잘못은 아니야.”
고덕의 말에 남궁단의 시선이 고개를 끄덕이는 가주의 입으로 향했다.
“상관없습니다. 소문이 크게 나는 것도 반가울 것은 없으나, 난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남궁창천의 말에 고덕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 상관없는 건가? 지난번엔 저 친구가 와서 볼멘소리를 하던데.”
고덕의 말에 남궁단을 잠시 일별한 남궁창천이 미소를 지었다.
“다 외총관의 고뇌에서 나오는 세가에 대한 걱정 탓이겠지요. 하지만 남궁세가는 그것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대협.”
남궁창천의 말에 예상외라는 표정의 고덕이 다시 물었다.
“정말인가?”
“예. 함께 죽고 사는 가족에게 출신 따위는 아무런 문제도 아니지요. 아니 그렇습니까? 대협.”
그제야 남궁창천의 속내를 짐작한 고덕의 입가에 고소가 그려졌다.
“그렇긴 하지. 내 사돈의 뜻은 알았네.”
아랑이 시집을 가며 남궁가도 사돈이 되었다. 당연히 공대를 해야겠지만, 고덕은 그 상대를 직계에 한정시켰다.
다시 말해 남궁태의 부친인 내총관에겐 존대를 하겠지만 그의 백부이자 가주인 남궁창천이나 숙부인 남궁단에겐 굳이 공대를 붙일 생각이 없던 것이다.
“알아주신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가볍게 고개를 숙이는 남궁창천에게서 고개를 돌린 고덕의 시선이 못마땅한 표정이 역력한 도왕에게 향했다.
“왜, 불만이라도 있나 보지?”
“애들 앞에서… 아, 아닙니다.”
뭔가 불만을 말하려던 도왕이 그의 눈에서 서서히 일어서는 광기를 발견하곤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뭐야, 확실히 말해?”
“불만 같은 거 없습니다.”
“또 어디서 떠들 생각은 있고?”
“그런 말을 한 적이 정말로 없습니다.”
황급히 고개를 젓는 도왕을 바라보며 고덕이 피식 웃었다.
자신이 물은 말뜻을 도왕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탓에 고덕은 다시 물을 수밖에 없었다.
“어디 가서 또 내 흉을 볼 거냐고 물은 것이 아니라 날 보았다는 말을 할 거냐고 물은 거야.”
“아! 근데 그거 하면 안 되는 겁니까?”
검마가 어디 있다고 이야기를 했다고 해서 누가 검을 들고 쫓아오진 않을 것이다.
그랬다간 십오 년 전의 해남검문 꼴을 면할 수 없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을 테니 말이다.
그 탓에 이해를 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의 도왕에게 고덕이 핀잔을 주었다.
“네 녀석처럼 똥인지 된장인지 모르고 나대는 놈들이 생길까 봐 그러지.”
고덕의 말에 기분 나쁘다는 듯이 슬쩍 검미를 찌푸린 도왕이 고개를 저었다.
“안 합니다. 또 했다간 무슨 말이 돌지 겁이 다 나니 말입니다.”
말끝에 나현을 쏘아보는 도왕의 눈빛은 먹이를 잡아먹기 직전의 야수같이 번들거렸다.
그런 도왕의 눈빛이 왜 만들어지는지 너무나 잘 아는 나현은 그저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을 뿐이었다.
소란은 그렇게 끝나가는 듯했다.
안휘협가는 안휘협가대로, 남궁세가는 남궁세가대로 밖으로 굳이 꺼내놓을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도왕도 같은 입장이었다. 자신이 검마에게 당했던 일을 거론해봐야 자신의 체면만 깎여 나갈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단리세가가 그 사실을 모를 것이라는 것을…….
* * *
“내 창피한 일이지만 정말 죽다 살았네. 여기에 그 괴물이 있을 줄 어찌 알았겠나?”
선친과 각별한 인연을 맺었던 도왕이 갑자기 찾아와 하소연을 늘어놓는 것을 들어주던 단리세가의 가주 단리천패가 웃으며 물었다.
“괴물이라니요?”
“이런, 자네도 나를 속일 셈인가? 이제 다 알았으니 굳이 감출 이유는 없네. 안휘의 세가들이 똘똘 뭉친 것은 보기 좋으나 다른 이들에 대한 배타성이 너무 도가 지나친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네.”
도왕의 말에 단리천패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소질은 백부께서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어허, 이런 사람하고는. 내 이미 검마의 일을 알고 있다니까.”
“누, 누구요?”
당황한 단리천패의 표정에 도왕은 낄낄거리며 말했다.
“놀라긴. 이미 다 알고 있다니까? 내 조카가 아니라면 그 괴물에게 당한 이야기는 창피해서 꺼내지도 않았을 걸세.”
“자, 잠시만요, 백부님. 정말, 진정으로 검마를 말씀하시는 겝니까? 마교의 그 검마요?”
“그럼 검마가 마교의 그 말고 또 있던가? 하여간 너무 놀라니 내가 다 미안…….”
말이 뒤로 갈수록 힘을 잃었다. 아무리 봐도 단리천패의 표정이 전혀 모르고 있었던 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백부님의 말씀은 검마가 지금 안휘협가와 남궁세가의 비호 아래 숨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단리천패의 말에 울상이 된 도왕이 물었다.
“설마 자네, 정말 몰랐던가?”
“하면 백부님은 소질이 그런 천인공노할 일에 동참했을 것이라 생각하셨단 말씀이십니까?”
단리천패의 강력한 부정에 도왕의 표정이 당황감으로 물들었다.
그런 도왕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말을 단리천패가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는 결코 묵과할 수 없는 일입니다. 즉시 맹에 알려 맹주를 불러야 합니다. 이곳에 다행히 백부님이 계시니 맹주님만 오신다면 놈을 분명히 잡을 수 있습니다.”
“이, 이보게, 조카.”
자신을 부르는 도왕의 당황성에도 불구하고 단리천패는 급히 준비할 것이라도 있는지 황급히 방을 벗어났다.
너무 놀라 그런 단리천패를 쫓아가지 못한 채 방에 남겨진 도왕은 안절부절못하고 서성이기 시작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생각이 정리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도왕을 자신의 거처에 남겨 두고 나온 단리천패는 수하들을 불러 대책을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남궁세가의 가주를 찾았다.
“이 늦은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
남궁창천의 환대에 얼굴을 잔뜩 굳힌 단리천패가 심각한 음성을 토했다.
“내, 남궁세가의 가주께 긴히 물을 것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단리 가주의 표정을 보아하니 중요한 문제 같군요. 이리 앉으시지요.”
남궁창천의 권유에 자리에 앉은 단리천패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혹, 검마를 숨겨 주고 있습니까?”
단리천패의 입에서 검마가 거론되었지만, 어쩐 일인지 남궁창천의 표정엔 그다지 놀람이 보이지 않았다.
“내 도왕께서 아셨으니 단리 가주의 귀에 들어가는 것도 시간문제라 생각했으나, 예상보다 빠르구려.”
“그, 그럼 정말이란 말씀이시오?”
경악 어린 단리천패의 표정에 남궁창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되었습니다. 다만 그를 숨겨 주고 있다는 말은 어폐가 있군요.”
“남궁 가주, 그 말의 어폐가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이건 자칫 남궁세가의 안위에 직접적인 문제가 될 수도 있단 말입니다.”
단리천패의 말에 남궁창천은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그런 남궁창천의 모습에 단리천패가 걱정 어린 음성을 퍼부었다.
“지금 그리 웃고만 있을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백부께서 아셨으니 팽가가 아는 건 시간문제일 겁니다. 그 폭급한 성격의 팽가가 알면 전 백도가 아는 건 시간문제라는 걸 인식하셔야지요.”
“그리해도 어쩔 수 없겠지요.”
“어허, 남궁 가주!”
이젠 화까지 내는 단리천패를 바라보며 남궁창천이 미소를 지었다.
“제가 하나만 여쭙지요.”
“무엇을 말입니까?”
“지금 이렇듯 화를 내시는 것이 혹 남궁세가를 걱정하시는 탓입니까?”
듣기에 따라선 오해의 소지가 너무나 많은 물음이다. 가장 기본적으로 단리세가에 영향을 미칠까 두렵냐는 의미로 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리천패의 답은 너무나 간단히 튀어나와 버렸다.
“그야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이걸 방치하면 남궁세가는 백도의 공적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단리천패의 답에 남궁창천의 입가에 그려진 미소가 더 깊어졌다.
“감사합니다, 단리 가주. 내 단리 가주의 마음을 알게 되어 기쁘기 한이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단리천패의 물음에 남궁창천이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검마의 이름이 거론된 일입니다. 곧바로 정천맹에 알렸다면 단리세가의 이름이 크게 일어날 기회가 아니었겠습니까?”
“어허, 우리 단리세가를 어찌 보시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우린 형제를 그리 버리라 배운 적도, 가르친 적도 없습니다.”
펄쩍 뛰는 단리천패의 말에 남궁창천의 미소는 더없이 진해졌다.
“그것을 뒤늦게 알아 더없이 가슴이 아픕니다. 단리 가주, 내 다시 한 번 사과하리다. 조카의 일은 정녕 우리가 원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서 정중히 포권을 취해 보이는 남궁창천의 말에 단리천패의 표정이 굳어졌다.
남궁창천이 언급한 조카가 일전에 벌어진 두 가문 간의 알력 다툼 속에서 명을 달리한 자신의 아들을 거론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들은 탓이다.
“남궁 가주, 그 일을 새삼스럽게 왜……?”
“가슴이 아파서 그럽니다. 그 일을 겪고도 이리 굳건한 두 세가가 그런 고통을 겪어야 했다는 것이 말입니다. 정말 송구합니다, 단리 가주.”
남궁창천의 말에 단리천패는 잠시 숨을 고르곤 말을 이었다.
“이미 잊기로 한 일입니다. 어느 한쪽의 잘못이라고도 할 수 없던 일이었으니까요. 그 일은 남궁세가만이 아닌 우리 단리세가의 아집이 부른 화였기도 하니 말입니다. 나는 앞으로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안휘협가의 사돈이라던 고덕에게서 배운 가르침이었다.
뒤늦게, 그것도 자식을 잃은 후에 찾은 깨달음이었기에 단리천패는 그것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 단리천패에게 남궁창천이 굳은 음성으로 말했다.
“남궁의 성이 이 땅에 있는 한 단리세가와 한울타리라 생각하겠습니다.”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는 맹세였다. 그에 단리천패의 손이 남궁창천의 손을 굳게 잡았다.
“단리의 성을 쓰는 이들도 그것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남궁 가주, 속히 검마의 일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렇게 이야기는 본론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말에 남궁창천은 다시 미소로 답했다.
“그것은 걱정하실 일이 아닙니다. 이미 맹주께서도 아시는 일이니까요.”
“그, 그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놀라는 단리천패에게 남궁창천은 자신의 부친인 검존의 금분세수 때 벌어졌던 일을 이야기했다.
“하면 검마가 검존 대협의 증인이었단 말씀입니까? 그걸 맹주께서 추천하시고요?”
“그렇게 되었답니다. 사실 저도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기겁할 만큼 놀랐었답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 들려주신 아버님의 말씀에 검마란 이를 다시 보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이어진 이야기는 정말로 놀랄 내용들뿐이었다.
검마에게 도전했던 맹주 무극검이 박살이 나고, 그의 윗사람이었던 마제마저 두려워했다는 대목에선 할 말조차 없었다.
특히 언제나 홀로 움직이고, 그 자신의 판단이 서지 않으면 아무리 마제의 명이 있었다 해도 검조차 꺼내들지 않았다는 대목에선 강자의 끝없는 자긍심이 느껴졌다.
“자유로운 이였군요.”
“그랬던 모양입니다. 결국엔 마교를 나왔으니까요.”
“마교를 나와요?”
“예. 그 탓에 마교에 문제가 생겼던 모양입니다. 결국은 그의 손으로 마교를 세상에서 지웠다니까요.”
남궁창천의 말에 단리천패는 놀라 벌어진 입을 좀처럼 다물지 못했다.
“저, 정말입니까?”
“예. 이것은 무극검 무량도장께 아버님께서 직접 들으신 말씀이랍니다. 그리고 지금 마교가 재건되고 있다더군요.”
“그, 그럼 설마 검마가!”
“그가 아니라 혈마랍니다. 검마는 그것을 묵인하라고 맹주께 요구했답니다.”
“하, 하면 설마……?”
끝없이 이어지는 단리천패의 경악에 남궁창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함구하기로 하셨답니다. 맹주께서 나서 봐야 피만 강이 되어 흐를 것이라 판단하셨다더군요.”
그럴 것이다. 한 사람의 강자가 수백, 수천의 하수들을 제압하는 곳이 바로 강호인 탓이다.
더구나 백도의 최고수인 무극검을 단 몇 수만에 패퇴시키고, 도왕은 칼조차 내밀지 못했다는 인사다.
그런 이가 백도의 고위 고수들을 모조리 격살시킨다면 백도는 마도의 고수들 앞에 지리멸렬할 것이 분명했던 것이다.
“흐음… 그 정도 강자였다니……. 천하제일인의 자리를 차지하겠다며 나서지 않은 것이 다행이군요.”
“내 만나 보니 그런 것엔 아예 관심도 없는 인사더군요.”
남궁창천의 말에 단리천패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백도고 마도를 떠나 그런 강자를 보았다니, 그 또한 홍복입니다. 부럽군요.”
“어허, 그 무슨 말씀을. 이미 단리 가주도 만나 보았지 않습니까?”
순간 단리천패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누가요? 내가 말입니까? 말도 안 됩니다.”
단리천패의 말에 남궁창천이 의미심장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니, 아까 저녁도 함께 드셔 놓고선 그리 발뺌을 하시다니요.”
“저녁?”
안휘협가의 가주가 초대한 저녁 식사 자리에 참석했던 인사들은 몇 되지도 않았다.
주인인 안휘협가의 가주 나현과 지금 눈앞에 앉아 있는 남궁창천, 그리고 자신과 갑자기 불쑥 모습을 드러낸 도왕과 안휘협가의 사돈이었던…
“서, 설마!”
너무 놀라 파랗게 변해가는 단리천패의 얼굴을 바라보며 쓰게 웃은 남궁창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고 대협이 바로 그입니다.”
남궁창천의 확인으로 명확해진 검마의 정체에 단리천패는 석상처럼 딱딱하게 굳어져 버렸다.
자신의 입으로 세가의 은인이라 칭송했던 이가 바로 검마였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 * *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조찬 모임에 참석한 도왕은 걸음을 옮기는 것마저도 힘들어 보였다.
그리고 무슨 일인지 단리천패는 그런 도왕에게 송구하다는 말만 자꾸 반복했다.
물론 주빈으로 초대되었던 고덕은 유난히 개운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우습기도 하고 소란스럽기도 했던 조찬이 끝나자, 남궁창천과 단리천패는 조금 난감한 상황에 직면했다.
안휘협가에 하객으로 들어왔던 몇몇 백도의 저명인사들이 그 둘을 찾아왔던 것이다.
“하니, 백 대협께선 안휘협가를 압박하자는 말씀이십니까?”
남궁창천의 물음에 백 대협이라 불린 중년의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압력이라면 조금 과하긴 하겠으나 속을 들여다보자면 그것이 사실이기도 하겠지요. 하여간 안휘협가의 주빈석에 사파의 인물이 있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분명히 해명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말을 꺼낸 인물은 강호에 천도(千刀)란 무명으로 잘 알려진 만도문(萬刀門)의 부문주인 백도향이었다.
경지는 초극을 눈앞에 둔 초절정의 고수로, 만도문이 자리한 귀주 지역에선 협명이 자자한 인사였다.
“저도 백 대협의 의견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해서, 두 분 가주님들이 이 일에 나서주셨으면 하는 마음에 찾아뵈었습니다.”
백도향의 말을 지지하고 나선 이는 설검문의 총관인 설천검 이한이었다.
그 또한 백도향과 비슷한 경지의 고수로 협의를 매우 중요시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러고 보니 백도향과 이한을 포함해 이곳에 몰려온 이들의 대부분이 백도 사십 중문에 몸을 담고 있는 이들이었다.
하긴 이들의 성향상 사파의 인사가 백도 팔대세가의 잔치에 주빈으로 참석한 이유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긴 했다.
그 탓에 난감해진 남궁창천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다른 가문의 경사입니다. 그런 일에 초청된 인사에게 무엇을 따진다는 것은 결례가 되지 않겠습니까?”
남궁창천으로서는 문제를 해소시켜 보자고 나선 셈인데, 받아들인 인사들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대번에 반론이 튀어나온 것이다. 그것도 꽤나 수위가 높은 말이…….
“설마 안휘협가와 사돈지간이 되셨다고 남궁세가가 감싸고도는 것입니까?”
자칫 커다란 충돌이 벌어질 만한 언사였지만, 상황은 그것을 문제 삼을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실제로 남궁세가는 안휘협가의 사돈이 되었고, 다른 때와 달리 사파인이 연관된 문제를 애써 덮으려 했기 때문이다.
“어허, 참…….”
답답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던 남궁창천의 음성에 단리천패가 급히 나섰다.
괜히 방관만 하다간 남궁세가와 백도 사십 중문 간에 불화가 생길까 걱정한 까닭이었다.
“지나친 말은 감정만 상합니다, 백 대협.”
“험험…….”
자신의 말에 백도향이 헛기침만 하고 물러나자 단리천패가 말을 이었다.
“사파의 인물인 후량의 존재는 사실 저도 놀란 일이긴 합니다만, 그는 안휘협가의 초청으로 오게 된 이가 아니라 안휘협가의 사돈 되시는 이의 식객으로 따라온 것이라 합니다. 하니 달리 이의를 제기하기가 어렵지 않을까 합니다.”
나름 안휘협가의 입장을 배려한 변명이었지만, 그것이 또 다른 문제를 낳고 말았다.
“하면 안휘협가의 사돈이 사파인이란 말씀입니까?”
이한의 경악성에 단리천패가 황급히 나섰다.
“아, 아니, 그것이 아니라 그저 작은 인연으로 머물고 있는 식객이라고 하더군요.”
“도대체 그 사돈이라는 자가 어떤 사람이기에 후량 정도의 인사가 식객으로 머문단 말입니까?”
“생각해보니 그렇군요. 설마 사파의 거두가 백도인의 집에 머물 리도 없고, 하면 그도 사파인인 게 아닙니까?”
“사, 사파인이라니요. 절대로 아닙니다.”
물론 당연히 아니다. 마도인이라면 또 몰라도……. 그 짧은 생각 때문에 이어진 질문에 단리천패는 작은 실수를 하고 말았다.
“그럼 설마 마도인이라도 된답니까?”
“헉!”
단리천패의 경악성에 사람들의 눈이 일제히 빛나기 시작했다.
한창 재건이 진행 중인 마교의 소식이 맹주를 비롯한 고위 인사들의 고의적인 묵인 속에 아직 수면 아래에 가려져 있는 상황에서 마도인은 좋은 사냥감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을 지켜 주고 힘을 실어주던 마교가 무너졌다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황을 인식하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사람들이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