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1장. 혼사(婚事)-얽히는 인연
하객들은 저마다 소곤거린 것이지만 그것이 수십, 수백 명이다 보니 주빈들의 자리에선 그들이 웅성거리는 것으로 보였다.
그 탓에 주빈석에 앉은 이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하객석, 그중에서도 안휘의 상가와 무가들에서 온 이들의 좌석으로 쏠렸다.
그 상황을 알아차린 안휘협가의 장로 하나가 서둘러 안휘의 하객들이 모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혹, 무슨 불편함이라도 있으십니까?”
갑자기 다가온 안휘협가의 장로가 묻자 소곤거리던 사람들의 입이 일시에 다물렸다.
감히 안휘협가의 인물 앞에서 사파의 인물이 왜 이 자리에 있냐고 물을 수 없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갑자기 입을 다무니 오히려 기분이 나빠지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더구나 자신의 눈을 슬글슬금 피하는 것이 마치 세가의 욕을 하다가 입을 다문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까닭이다.
그 탓에 나일평 장로의 물음이 집요해질 수밖에 없었다.
“구 장로님, 안휘협가의 대접에 혹 소홀한 점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평소에 약간의 안면이 있던 나일평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은 구정의 표정이 당황감으로 물들었다.
“아, 아닙니다. 후, 훌륭한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당황한 탓에 한 말만은 아니다. 정말로 안휘협가는 하객들에게 최선을 다했다.
이름 없는 무관이나 있는지조차도 몰랐던 영세 상단에서 온 이들에게까지 개별적으로 상을 내고 정갈한 음식과 술을 차려 내었다.
솔직히 안휘협가 정도의 무가에서 이 정도의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는 이들이 태반이 넘을 정도로 정중한 대접이었던 것이다.
“하온데 하객 분들의 표정이 그리 밝지가 않습니다. 제게 고견을 들려주신다면 이 나 모가 구 장로님의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안휘협가의 장로씩이나 되는 이가 이리 나오는데, 봉양검문의 총관에 불과한 구정이 계속 입을 다물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만에 하나 구정이 계속 입을 다물면 그 해가 구정 개인을 벗어나 자칫 봉양검문에 이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구정에게 남겨진 방법은 나일평이 원하는 대로 입을 여는 것뿐이 없었다.
“그, 그것이… 실은 주빈석에 계신 분 중에 한 분을 광, 아니 투견 후량으로 오해한 탓에…….”
구정의 말에 잠시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던 나일평의 시선이 주빈석으로 향했다가 돌아왔다.
그를 비롯한 장로들도 이런 점을 예상해 후량의 방문을 거절하자고 말했던 것이다.
하지만 가주는 그가 사돈의 사람이라는 것과 남궁세가나 단리세가에서도 아무런 이의를 제기치 않는다는 점을 내세워 장로들의 의견을 묵살했다.
여하간 자신이 걱정했던 사태가 나온 까닭인지 나일평 장로의 얼굴엔 못마땅함과 함께 거보란 듯한 표정이 뒤섞여 있었다.
“흠흠… 잘못 본 것은 아닙니다.”
나일평의 말에 구정뿐만이 아니라 주변에 있던 이들의 얼굴에도 경악이 들어섰다.
“그, 그럼 정말이라는 말입니까?”
“예. 투문의 문주이신 투견 후량 대협이 맞습니다.”
일개 사파 나부랭이한테 대협을 갖다 붙여야만 하는 자신의 입장이 한스럽기만 했던 나일평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하지만 뒤이어 나온 반응은 그런 그의 표정을 아예 일그러지게 만들어버렸다.
“감히 백도의 잔치에 사파 나부랭이가 들어섰단 말이오!”
벌떡 일어서 커다란 음성으로 말한 이는 안휘의 하객들이 모여 있던 곳이 아닌 여타 지역에서 온 백도의 하객들을 모신 천막이었다.
“구, 구렴도 대협!”
나일평이 놀랄 만도 한 것이 벌떡 일어선 사람은 하북팽가의 외총관인 구렴도 팽문천이었기 때문이다.
자신들 이전에 남궁태와 혼담이 성사되기 직전이었던 곳이 바로 하북팽가였다.
그 혼담이 깨어지자 태상가주였던 도왕이 불같이 화를 냈다는 것은 알 만한 이들은 모두 아는 이야기였다.
그 탓에 팽가에서 하객이 왔을 때 접객을 담당했던 나일평은 꽤나 놀랬었다.
나일평의 부름에도 불구하고 팽문천은 식장이 떠나가라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어디 말이나 들어봅시다. 감히 사파 나부랭이가 어찌 이곳에 있는지 말씀이외다.”
그 커다란 음성에 당황한 것은 나일평만이 아니었다.
나현을 비롯한 안휘협가의 모든 이들의 얼굴에 당황감이 들어선 것이다. 더구나 상대가 하북팽가의 사람인 탓인지 남궁세가의 사람들도 다소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에 하객으로 참가한 모든 이들의 시선이 몰렸다.
이번 일이 어찌 정리되느냐에 따라 사파에 대한 안휘협가의 입장이 정해지는 게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모든 이들이 간과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고덕이었다.
그의 눈엔 행복하기만 하던 조카 손녀의 표정이 울 것처럼 변한 것만 들어왔던 것이다.
더구나 사단의 중심이 자신이 동행한 이라는 것에서도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런 고덕의 상황을 가장 빨리 눈치챈 이가 바로 왕팔이었다.
폭발 일보 직전인 고덕의 모습이 불안했던 왕팔이 협련의 옆구리를 찔렀다.
“왜 그러시오?”
“대, 대협을 말려요.”
난데없는 왕팔의 말에 고덕에게 시선을 돌렸던 협련은 그 말뜻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하지만 알아차렸다고 나설 수는 없다. 고덕의 성질머리를 잘 아는 탓이었다.
그렇게 측근들이 주저하는 사이, 드디어 고덕의 화가 폭발했다.
쑤아아악- 쾅!
무언가 날카로운 소성을 이끌고 날아간 연후에 커다란 폭음이 울렸다.
그리고 그 폭음이 사라진 곳엔 정신을 잃고 널브러진 팽문천의 모습이 보였다.
“이, 이게 무슨…….”
놀란 사람들의 웅성거림 속에 급히 다가온 나일평은 팽문천의 머리 근처에서 그를 기절시킨 원흉으로 보이는 신발 한 짝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당황하는 나일평의 귀로 뜬금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짝짝짝-
갑작스런 박수 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그 소리를 낸 주인공에게 몰렸다.
“자자, 방해꾼이 사라졌으니 식을 계속합시다.”
시원한 표정으로 그 말만 하고 자리에 앉는 고덕을 바라보던 나일평은 불안한 시선으로 그의 발을 확인했다.
“헉!”
설마 했던 대로 고덕의 한쪽 발에선 신발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경악성을 토했던 자신의 입을 틀어막은 나일평은 근처로 다가온 협가의 제자들을 시켜 패문천을 옮기는 동시에 남들이 보지 않는 틈을 타 범행 도구로 짐작되는 신발을 슬그머니 챙겼다.
그러나 그런 나일평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팽문천을 한 방에 거꾸러트린 물건의 정체와 그것이 날아온 곳을 알아보는 이들은 적지 않았다.
그들은 저마다 이름깨나 알려진 대문파의 하객들이었고, 그만한 능력을 구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의 시선엔 가해자가 분명한 청년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는 남궁세가와 단리세가의 가주들이 보였던 것이다.
세상에 백도 팔대세가의 가주들이 고개를 숙이는 청년이란 있을 수 없다.
말인즉슨 상대가 적어도 반로환동이라는 전설을 이룩한 고수라는 의미였다.
결국 상황을 알아차린 이들은 적어도 십대고수에 버금가는 새로운 고수의 출현에, 또 제대로 전말을 알지 못하는 이들은 생각지 못한 안휘협가의 능력에 놀라며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소란스러울 뻔했던 성혼식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 * *
성혼식이 모두 끝난 시각, 외원의 접객원 중 한 전각에선 나일평 장로가 곤혹스런 얼굴로 팽문천의 항의를 받고 있었다.
“이건 암습이오, 암습! 감히 팽가의 사람을 암습하다니, 이것이 안휘협가의 공론인 것이외까?”
“오, 오해입니다. 이번 일은 우리 협가와는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으하하, 상관이 없다. 지금 발뺌을 할 요량이시오?”
“발뺌이라니요.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지나치다? 만인이 바라보는 곳에서 하객을 암습해 치욕을 안기고선 그것을 항의하는 내 말이 과하다?”
팽문천의 말에 나일평은 가주의 말을 떠올렸다.
‘팽문천이 따지거든 사실대로 말해주게. 우리가 아니라 그가 벌인 일이라고 말이야.’
‘하, 하오나 가주, 그리되면 그는 팽가 앞에 벌거벗겨 내던져지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 정도 일도 헤쳐 나오지 못할 사람이라면 우리도 필요 없겠지.’
차가운 가주의 말 속에서 나일평은 가주가 무언가 다른 것을 확인하고파 한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여하간 지금은 가주의 말대로 할 때였다.
“그것이……. 사실은 대협에 대한 위해는 우리가 아니라 사돈이 벌인 일입니다.”
“사돈? 누구의 사돈 말이오?”
“아시겠지만 오늘 성혼한 본 세가의 여식에겐 외가가 있지요. 그 외가분의 손속이었소이다.”
나일평의 말에 팽문천의 입가에 조소가 어렸다.
“허, 허허, 대단한 사돈을 두셨던 모양이구려. 대팽가의 사람에게 암습을 가하다니. 내 그 작자의 얼굴을 좀 보아야겠소이다.”
팽문천의 요구에 나일평은 너무나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지요. 지금 가시겠습니까?”
예상외인 나일평의 모습에 팽문천은 당황했다.
극구 부인하거나 가해자를 숨길 것이라 생각했던 예상이 모조리 빗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 지금 바로 안내해주겠단 소리요?”
“예. 그것을 원하신 것이 아닌지요.”
“그, 그렇긴 하오만…….”
“그럼 망설일 필요가 없겠지요. 가시지요.”
팽문천은 나일평의 행동으로 혹시 안휘협가가 자신들의 사돈이라는 사람을 내치기 위해 자신을 이용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이 날 지경이었다.
여하간 어어 하는 순간에 팽문천은 나일평을 따라 고덕이 머무는 귀빈용 전각으로 안내되어 있었다.
“흠흠, 저… 사돈어른.”
“누구요?”
“협가의 나 장로입니다. 낮의 일로 팽가의 손님이 뵙기를 청합니다.”
나일평의 음성에 문이 열리며 문제가 되었던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일이요?”
후량의 물음에 나일평은 자신의 용무가 아니라는 듯 옆으로 비켜났다.
그렇게 되자 후량과 정면으로 마주 서게 된 팽문천은 당황했다. 그 사돈이라는 이가 후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 그게… 낮의 일로 해명을…….”
말이 흔들리고 끝은 제대로 맺지도 못했다. 만에 하나 문제의 사돈이 후량이라면 자신이 그의 코앞에서 사파인 운운한 것에 대한 징치였을 뿐이라고 주장해도 달리 할 말이 없는 탓이다.
그렇다고 대거리도 못한다. 자신이 겁 없이 사파라 몰아세웠다지만, 상대는 당당히 제하이십사강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강자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낮에 그를 몰아세울 수 있었던 것은 그곳에 여러 백도인들이 자리를 함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인적이 드문 곳이라면…….
‘빌어먹을 놈. 날 여기서 죽여 입막음이라도 할 생각이었나?’
괜히 옆에 묵묵히 서 있는 나일평 장로가 죽도록 미워지는 팽문천이었다.
말을 하다 말고 나일평만 노려보는 팽문천을 지그시 바라보던 후량의 눈이 번쩍거렸다.
물론 자신을 일러 사파인 나부랭이라 거론했던 이에 대한 노여움 때문은 아니었다.
방 안에서 날아온 목침이 뒤통수를 때리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찬바람 들어오잖아, 자식아. 문 닫고 떠들어.”
갑작스런 상황에 놀란 팽문천의 눈은 그다음에 벌어진 일에 빠질까 걱정일 정도로 부릅떠졌다.
“아, 알았어요. 닫으면 되잖아요, 닫으면…….”
구시렁거리면서도 서둘러 문을 닫는 것이 안에서 호통을 친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세상에, 제하이십사강이 겁을 내?’
퉁방울처럼 불거진 눈으로 바라보는 팽문천에게 후량이 신경질적인 음성으로 물었다.
“뭐? 왜 왔어? 말 똑바로 해봐.”
후량의 다그침에 흠칫 놀랐던 팽문천은 이내 이를 악물었다.
혹여 오늘 이곳에서 협가와 후량의 악독한 술수에 빠져 죽을지언정 팽가의 기개를 저버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갑자기 숨을 들이쉬고 가슴을 내민 팽문천이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낮의 일에 대해 해명을 듣기 위해 왔소.”
“낮의 일? 혹시 신발에 얻어맞고 기절한 거?”
“시, 신발?”
생각지 못했던 말에 당황한 팽문천에게 한발 물러나 있던 나일평이 측은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게… 오늘 낮에 팽 대협을 기절시킨 물건이 신발이었습니다.”
“그,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좀처럼 인정하지 않으려는 팽문천의 가슴을 후량이 깊게 후벼 팠다.
“뭐야, 지가 뭐에 당했는지조차 몰랐던 거야?”
아무리 상대보다 실력이 떨어진다고는 해도 무인이다. 그것도 초극을 눈앞에 둔 초절정의 극의를 밟고 있는 출중한 무인이다.
그런 이가 상대에게서 저런 말을 들었다면 칼을 물고 죽고 싶을 것이었다.
지금 팽문천의 마음이 그랬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절대로 인정할 수 없었다.
무슨 절세의 암기도 아니고, 그저 신발 한 짝에 얻어맞고 기절했다고 하면 어찌 강호에 얼굴을 들고 다닌단 말인가?
“사, 사실이 아니겠지요?”
제발 아니길 바라는 표정의 팽문천에게 나일평은 모진 말을 해야만 했다.
“사… 실입니다, 팽 대협. 죄송합니다.”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숙여 보이는 나일평의 모습에 팽문천은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치욕도 이만한 치욕이 없다. 자신을 기절로 몰아넣은 암기의 모습도 몰랐던 데다 그 암기의 정체가 신발 한 짝이었다는 것엔 변명의 여지조차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어차피 당한 창피며 모욕이다. 지금부터는 자신의 죽음으로 팽가의 기개를 살리면 되는 것이라 생각하며 이를 더욱 악물었다.
“그, 그… 좋소. 그렇다 치고, 그 연유를 들어야겠소.”
팽문천의 모습이 의외였던지 후량이 조금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뭐, 심지가 굳다고 해야 하나……. 칭찬할 건 칭찬해야겠지만, 그 연유는 안 듣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말이오.”
후량의 말을 자신에 대한 조롱으로 받아들인 팽문천의 음성이 조금 더 단호해졌다.
“아니, 난 꼭 들어야겠소.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그런 꼴을 당해야만 했는지 암습을 가한 당사자에게 반드시, 꼭 들어야만 하겠소이다.”
그 가해자가 분명하리라 생각했던 후량에게 퍼부은 팽문천은 난데없이 문 안쪽에 대고 소리치는 후량의 음성을 들어야 했다.
“대협, 이자가 대협한테 따질 게 있다는데요?”
쾅-!
문이 폭발하듯 부서져 나가며 날아온 것은 아까 후량의 뒤통수를 때렸던 것과 동일하게 생긴 목침이었다.
놀란 표정으로 목침을 피한 팽문천의 귀로 폭언이 들려왔다.
“어떤 시러베잡놈이 따지러 와? 누구야, 어떤 새끼야!”
놀란 탓에 화도 못 내고 서 있던 팽문천은 안에서 누군가를 말리는 이들의 음성이 흘러나오는 것을 들었다.
한데 그 내용들이 가관이다. 저놈이 뭘 몰라서 그런다,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몰라서 그런다, 애가 떼쓴다고 어른이 화를 내면 되겠느냐, 나중엔 미친놈 말을 곧이들으면 안 된다는 말까지 나왔다.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밀어 오른 팽문천이 사생결단을 낼 마음을 먹은 찰나, 부서진 문으로 기다란 묵창을 든 사람이 걸어 나왔다.
“대, 대협!”
그를 보고 놀란 팽문천의 경악성에 묵린이 고소를 지어 보였다.
“오랜만입니다, 구렴도.”
“아까 주빈석에 계신 것은 보았습니다만……. 한데 어찌 대협이 이곳에서 나오십니까?”
팽문천과 묵린은 제법 안면이 있었다.
팽가의 가주인 팽군현과 묵린 사이에 작지 않은 인연이 있었던 탓이다.
“그게… 안에 계신 분을 모시고 있습니다.”
“호, 혹시 묵가의 가주께서……?”
한땐 이름이 드높았던 무가가 북경묵가다. 하지만 지금은 관부에 기댄 박쥐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곳이다.
사실 그 탓에 강호에선 유명무실해진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부자가 망해도 삼대는 간다는 말처럼, 아무리 그렇다 해도 북경묵가는 감히 소홀히 대할 수 없는 곳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바로 직전 세대에는 십대고수를 배출했고, 지금은 제하이십사강을 배출한 곳이기 때문이다.
물론 대장로라는 명예직에 사실상 강호로 내쳐진 한 핏줄로 이어져 오는 일인 전승에 불과했지만, 그것만으로도 무게는 천금이었다.
“세가와의 인연은… 아닙니다.”
사실 아비의 위험을 묵가가 외면한 순간 끊어졌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비처럼 차마 뿌리를 외면하지 못한 묵린은 그 말을 목구멍 안으로 삼켜야만 했다.
“하온데 모신다는 말씀은…….”
그 탓에 더 궁금증이 드는 팽문천에게 묵린이 답했다.
“제겐 은인이자 스승 같은 분이시지요.”
그 답에 팽문천은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후량도 버거운데 묵린마저 그리 높게 사는 이가 원흉이라면 자신이 나서서 따져 물을 능력이 못 미친다는 것을 통감한 탓이었다.
“흠… 제겐 너무 과한 상대로군요. 하지만 팽가는 모욕은 참지 않습니다.”
빠른 시간에 당황을 추스른 팽문천의 차가운 음성에 묵린은 그저 포권을 취해 보였을 뿐이다.
“그저 잊으시라 말씀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묵린의 말에 표정을 굳힌 팽문천은 그길로 돌아갔다.
사람들은 그것으로 일이 정리되었다 생각하고 흩어졌지만,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묵린은 협가의 밤하늘을 날아오르는 비둘기를 걱정스런 표정으로 바라보아야만 했다.
* * *
다음 날, 묵린의 걱정은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난데없이 도왕이 불쑥 찾아온 것이다.
전날의 일도 있었던 탓에 안휘협가는 펄쩍 뛸 만큼 놀랐다.
은근히 팽문천과 고덕을 붙여 그의 역량을 시험해보고자 했던 나현마저 사색이 될 정도로 도왕의 출현은 급작스럽고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그런 이들의 걱정을 외면한 채 도왕은 팽문천을 앞세우고 마치 제집인 양 고덕이 머무는 전각을 찾아들었다.
마침 고길 내외가 고진의 처소에서 부른다는 전갈을 받고 자신이 머무는 전각을 나서던 고덕은 들어서던 도왕과 마주쳤다.
“딸꾹.”
뭐에 놀랐는지 갑자기 발길을 멈춘 도왕은 딸꾹질을 시작했다.
그런 도왕을 본 고덕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아는 체를 했다.
“어라, 네가 여긴 웬일이냐? 칼잡이.”
“딸꾹.”
“너 뭐 다른 사람 몰래 맛있는 거 먹었냐? 웬 딸꾹질이야.”
“아, 아닙니다, 대협.”
“이놈이나 저놈이나 그놈의 대협 소리는…….”
못마땅한 표정의 고덕에게 도왕이 불안한 눈길로 물었다.
“하, 한데 딸꾹, 어, 어찌 대협이 딸꾹, 여기에 계십니까? 딸꾹.”
“정신 사납게시리……. 내가 고수가 딸꾹질이라니, 창피하지도 않아? 일단 그거나 멈추고 말해.”
고덕의 불퉁거림에 도왕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게 딸꾹, 머, 멈춰지지가 않아서… 딸꾹.”
도왕은 도왕대로 미칠 지경이었다. 과거 마교의 비밀 초청으로 무극검을 따라갔다 보았던 희대의 악마가 왜 이곳에 있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던 까닭이다.
자신은 감히 도전도 하지 못하던 무극검을 숫제 가지고 놀던 검마의 무위는 이미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그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올라오며 도왕의 목을 조여 오는 것 같았다.
“덜떨어진 거는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군. 할 말 있으면 나중에 와. 나 바빠.”
그 말만 남겨 둔 고덕이 일행과 횡 하니 떠나자,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몰라 당황해 있던 팽문천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 어찌 된 것입니까? 태상가주님.”
팽문천의 물음에도 불구하고 도왕은 연신 딸꾹질을 하며 고덕이 나간 월동문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 * *
갑작스런 도왕의 방문으로 노심초사하던 나현은 당황한 표정으로 갑자기 자신을 찾아온 도왕을 맞아야 했다.
“어, 어서 오십시오, 도왕 선배.”
“가주는 도대체 무슨 생각이신가? 어쩌자고 그런 괴물을! 혹시 마도로 돌아서려는 생각이신가?”
들어서자마자 앉지도 않고 쏟아붓는 도왕의 말에 나현이 검미를 찌푸렸다.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마도로 돌아서다니요.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아무리 상대가 저 높은 곳에 있는 강자이고 선배라고는 하나 엄연히 자신은 다른 세가의 가주다.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는 법. 그에 대한 반발이 나현에게서 튀어나왔지만, 도왕은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어찌 세가에 검마를 들여놓을 수 있느냔 말일세.”
도왕의 말에 나현의 표정이 뜨악하게 변했다.
“예? 누, 누굴 들여놔요?”
“검마, 검마 말이네.”
거듭 불러지는 검마란 이름에 나현은 어이없는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제가 세가를 말아먹을 작정이 아니고서 어찌 검마를 세가에 들여놓겠습니까? 더구나 마교는 멸문했습니다, 도왕 선배.”
나현의 말에 도왕이 답답하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어허, 내 눈이 벌써 어두워졌다고 말하는겐가? 내가 바로 이 눈으로 방금 전에 그를 보고 왔는데도 그 소린가?”
그 말에 나현의 얼굴에 의아함이 들어섰다.
도왕의 나이가 이미 칠십을 넘어간다지만 화경에 들어서며 인간의 잣대에선 비켜선 사람이었다.
그런 이가 치매에 걸렸을 리도 없으니, 헛소리가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자세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검마를 지금 본가에서 보셨다는 말씀이십니까?”
“설마……. 혹시 가주도 모르고 있는 일이었던가?”
도왕의 말에 나현은 잠시 검마란 희대의 마두가 세가로 잠입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왜?’
강호에 파다하게 소문이 나 있는 검마란 이의 실력을 참고하면 백도의 가문에, 그것도 팔대세가의 말석을 차지하고 있는 자신의 가문에 몰래 숨어들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그 탓에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이십니까?”
자신을 의심스런 눈빛으로 보는 나현의 물음에 도왕은 가슴을 쳤다.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네. 정말일세.”
도왕이란 이름이 검마에 비해선 치우친다지만, 도왕이란 이름만 떼어놓고 보면 분명 강호 최고수 중 한자리를 당당하게 차지한 이의 이름이다. 감히 거짓 자체를 논할 수 없는 것이다.
생각이 그에 이르자 나현의 표정이 검게 죽어버렸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오늘 안휘협가는 검마의 검 아래 한 줌의 피로 잠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외, 외총관, 밖에 있는가?”
도왕의 출현에 신경을 바짝 쓰고 따라왔던 나일평은 가주의 커다란 부름에 황급히 방 안으로 들어섰다.
행여 도왕이 가주를 핍박할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그렇게 다급히 들어서는 나일평에게 나현의 명이 떨어졌다.
“즉시 세가 내의 모든 가솔들에게 비상령을 내려 대기시키게. 그리고…….”
“자, 잠깐. 협가의 가주께선 지금 무얼 하시는겐가?”
도왕의 물음에 나현이 당연하다는 듯이 답했다.
“그만한 마두가 잠입했다면 준비를 갖추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서두르면 그가 눈치채기 전에 채비는 갖출 수 있을 듯합니다.”
나현의 답에 도왕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 그를 막겠단 말씀인가? 안휘협가의 힘으로?”
“부족하긴 하겠으나 세가가 최선을 다한 데다, 하객들로 오신 분들께 도움을 청하고 도왕 선배님의 힘을 더한다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철이 없는 건지, 아니면 상대의 무서움을 몰라서인지 모를 나현의 말에 도왕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냥 다 죽자는 말이구먼.”
“예? 서, 설마 그 정도이려구요?”
“이보게, 가주. 해남검문이 어찌 몰락한 것인지 모르시는 겐가?”
순간 나현의 말문이 막혔다.
해남검문은 십오 년 전만 해도 수백 년의 역사를 이어오던 전통의 무가로 당당히 백도 십이대파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그 성세는 대단해서 당시에도 백도 팔대세가의 수좌라 불리던 남궁세가와 자웅을 겨룰 정도라 남해의 패자라 불리던 곳이었다.
물론 검마의 방문을 받기 전까지였지만 말이다.
그렇게 검마의 방문 이후, 해남검문은 사라졌다. 무사들은 물론이고 일하던 하인에 하물며 키우던 개 한 마리 살아남지 못했다.
사람뿐이 아니다. 전각은 불태워졌고, 흔적마저 완전히 제거되었을 정도였다.
해남검문이 그런 횡액을 당한 것은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마교도들을 모두 잡아 토막 쳐서 개 먹이로 주어야 한다는 말을 술에 취한 해남검문의 문주가 공식 석상에서 했다는 것이었다.
그 기억을 끄집어낸 나현의 입이 절로 다물렸다.
그 혈겁 당시 해남검문은 절정의 시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지금의 안휘협가 정도는 쉽게 찜 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말뜻을 알아들은 듯하자 도왕이 말을 이었다.
“하니, 방법은 하나뿐이네. 그와의 연을 끊는 것. 티가 나서도 아니 되네. 그자가 자신과의 연을 끊으려 한다는 것을 알면 절대로 그냥 있진 않을 것이니 말일세.”
“그와의 연이라니요? 설마 저희 협가가 그와 연을 맺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 안휘협가가 아니라 협가의 사돈 되는 이가 연을 맺은 모양이네.”
“사돈이…….”
순간 고덕과 그를 따라온 이들의 신상 정보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아! 협련.”
“그게 누군가?”
“제 사돈의 일행 중에 자신을 협련이라 소개한 이가 있었습니다. 한데 그에게 창군과 투견이 고개를 숙이지 뭡니까?”
나현의 말에 도왕이 무릎을 쳤다.
“바로 그일걸세. 아까도 보니 투견인지 광견인지 하던 사파의 잡종 놈과 함께 나가더군.”
도왕의 말에 나현이 도대체 무슨 말들인지 몰라 엉거주춤 서 있던 나일평에게 명을 내렸다.
“자넨 지금 즉시 사돈께 잠시 방문해달라 청하게.”
“사돈이라시면……?”
사돈이란 이름으로 묶인 인사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 나일평의 물음에 나현이 답답하다는 듯이 답했다.
“고 대협 말이네.”
“아! 알겠습니다. 바로 전하겠습니다.”
“다른 이들은 두고 반드시 혼자 오시라 전하게.”
“예, 가주.”
답을 하고 나가려는 나일평을 도왕이 잡았다.
“내가 이곳에 있다는 말은 마시게. 그가 들어서 좋을 것이 없으니.”
“그렇군요. 그가 알면 의심을 할 수도 있겠지요. 자넨 도왕 선배의 말대로 하게.”
도왕과 나현이 지칭하는 그가 누군지 몰랐지만, 왠지 물어선 안 될 것 같은 분위기 탓에 나일평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고 물러갔다.
그렇게 나일평이 나가자, 도왕은 자신의 존재가 사돈이라는 이에게 압력으로 비춰질 수도 있으니 아예 객방에서 기다리겠다는 말을 남기곤 자리를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