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0장. 정립(鼎立)-균형을 맞추다
누구도 예견하지 못했던 안창의 피살은 중원 전체를 흔드는 거대한 충격이었다.
자그마치 이십만의 대병을 지휘하던 지휘관의 급작스런 죽음은 평로군이라 불리던 안창의 군대에 극심한 혼란을 가져왔다.
더구나 한군데에 집중되어 있지 않은 채 소규모 부대로 나뉘어 움직이던 상황에서 맞은 불의의 사건은 심각한 내홍을 유발했다.
평로군 고위 지휘부가 달리 손을 쓰기도 전에 항복하는 병력이 나오는가 하면, 자진 해산하고 흩어지는 이들은 물론이고 곧 이어질 토벌을 두려워해 산으로 숨어들어 도적이 되어버리는 이들까지 각양각색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단 한 달 만이었다. 그 한 달 만에 평로군의 기치 아래 남겨진 군세는 오만뿐이었다.
급히 모여든 그 오만의 지휘부는 안창을 죽음으로 따르던 수하들뿐이었고, 그들은 피살당한 안창의 의지를 떠받들기로 작정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지휘부를 구성하는 고위 장수들 이십여 명이 한날한시에 주검으로 발견됨으로써 오만 병력은 뿔뿔이 흩어지거나 급거 남진한 경공 왕부의 군대에 의해 포로가 되었다.
이후에 보여 준 경공 왕부의 대처는 정말로 눈부시도록 일목요연하고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진행되었다.
기마대를 이용해 귀주와 광서의 성도를 장악하고, 황도로 안창의 반군을 토벌했다는 장계를 올린 것이다.
물론 그 장계엔 안창의 수급이 대동되었다.
그로써 경공 왕부는 자치 지역인 탓에 관할 권역에 이름만 오른 지역들이 아닌 실질적인 부속 통치 지역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렇게 됨으로써 경공 왕부는 중원 내에 존재하는 제사의 세력으로 급부상했다.
그 결과 북부의 절대자인 동북어위도총사부를 제외하면 중원엔 척회 왕부와 영상 왕부, 그리고 소흥 왕부에 이어 새롭게 강자로 떠오른 경공 왕부의 사강 체계가 정립되었다.
* * *
생각지 못한 사태에 당황한 것은 소흥 왕부도 다르지 않았다.
뒤늦게 귀환한 호철랑이 서둘러 상황을 반전시켜 보려 애를 썼지만, 무너지기 시작한 평로군은 너무나 쉽고 빠르게 와해되어버렸다.
마치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이 평로군을 강제로 해산시키는 것처럼 사방에서 손쓸 사이도 없이 무너져 버렸던 것이다.
상황이 그렇게 되자 소흥 왕부는 여러 방향에서 진행하던 계획을 일시에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어떤 한 곳을 도모하려 하면 오히려 다른 곳의 공격을 받기 쉬운 상태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렇게 정체된 상태로 시간이 흘렀다.
구월이 다 지나가는 시점에 고덕이 소흥왕을 찾았다.
“돌아갈까 합니다.”
고덕의 말에 소흥왕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소리인가? 돌아가다니?”
“사가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자네, 설마 복수는 포기한 것인가?”
소흥왕의 물음에 고덕은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포기하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복수에 매여 살지도 않을 생각입니다.”
“자네!”
노여워하는 소흥왕에게 고덕이 말을 이었다.
“적어도 그녀는 제가 복수에 미쳐 살아가길 원하지 않을 테니까요.”
“변명이로군. 변명이야! 시간이 지나자 그 아이에 대한 마음이 식은 것이겠지. 내게 그런 변명은 하지 말게!”
자신이 세상 모든 것이 무너진 것 같은 상처를 받았다면, 소흥왕도 가슴 한편이 찢겨 나가는 것 같은 상처를 얻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소흥왕의 원망에 고덕은 다른 변명을 하지 않았다.
“건강하십시오. 만에 하나 제 도움이 필요하거든…….”
“필요 없어, 자네 따위의 도움은. 꺼져, 꺼져 버려!”
분노로 뒤덮인 소흥왕은 거칠게 고함을 질러댔다.
결국 더 이상 아무 말도 소용이 없다고 판단한 고덕은 그저 정중한 포권을 남긴 채 소흥왕의 처소를 나섰다.
“떠날 생각이시군요.”
처소 앞엔 어쩐 일인지 호철랑이 서 있었다.
“그럴 생각이오.”
“잘한 결정이긴 하지만 갑자기 어떻게 생각이 변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군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절대로 복수를 포기하지 않겠다던 사람이었기 때문인지 호철랑의 표정엔 불안감이 가득했다.
혹여 이리 말해놓고 혼자 흉수들을 찾아 움직일 것을 걱정하는 모양이었다.
그런 호철랑에게 고덕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요. 정말로 쉬고 싶을 뿐이니까.”
솔직히 말하면 그만 돌아다니고 집으로 돌아오라는 형의 편지 때문이었다.
이제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곁에 잠시만 머물러 달라는 형의 청을 뿌리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편지 이후 자신의 나이를, 그리고 형의 나이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그러자 자신이 걸어왔던 길이 하나둘 떠올랐다. 하지만 그 길 어디에서도 피가 없는 곳이 없었다.
있었다면 오직 형의 곁에서 머물렀던 잠시뿐…….
결국 피가 지겨워져 마교를 벗어났던 고덕은 다시 그 핏속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이 고덕의 마음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복수의 마음을 접지는 않지만 굳이 찾아다니진 않는다. 그것이 고덕의 결정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찾지 않아도 살황에서부터 북황을 거쳐 홍염수라까지 보낸 삼천의 처리 방식으로 보아선 절대로 멈출 것 같지 않았다.
그렇게 새로 다가올 흉수의 끈을 조용히 기다리기로 한 것이었다.
그런 마음을 알 길 없는 호철랑은 불안한 표정으로 멀어져 가는 고덕을 바라볼 뿐이었다.
* * *
고덕이 집으로 돌아온 것은 구월이 끝나가는 시기였다.
그를 따라온 이들을 합해 고덕의 집엔 군식구들이 많이 늘었다.
왕팔은 물론이고, 협련과 후량에 제자로 들인 구에다 엉거주춤 따라붙은 창군까지 끼어들었던 것이다.
그 모두를 고길 내외는 반갑게 맞았다. 특히 형수는 시동생이 정식으로 들인 첫 제자인 탓인지 구에게 많은 관심을 쏟았다.
그녀로서는 슬하에 자식을 두지 않은 시동생의 제자가 마치 시동생의 자식처럼 느껴졌던 까닭이다.
그 탓에 왕팔이 찬밥 아닌 찬밥 신세가 되었다. 간혹 무술도 가르쳐 주고 자신의 사람으로 인정해주는 부분이 있었지만, 여하간 구처럼 정식 제자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고길 내외나 고덕의 대응이 변한 건 아니었다. 단지 상대적인 박탈감에서 오는 일종의 자기 비하였던 셈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침 햇살에 드러난 새벽안개처럼 말끔히 사라졌다.
온갖 구박에 식충이란 소리를 달고 사는 이들이 셋씩이나 함께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팔에게 삶의 의욕을 다시 불어넣어준 이들인 협련과 후량, 그리고 창군은 고덕에게 온갖 구박이란 구박은 다 받고 있으면서도 차마 떠나지 못했다. 어떻게든 그에게서 배워야 할 것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자유가 되었든지, 무공이든, 아니면 한없는 당당함이 되었든 그들은 고덕에게서 배우고자 하는 바가 너무나 절실했다.
거기다 고길 내외가 쏟아주는 이유 없는 애정이 왠지 가슴 한편을 훈훈하게 해주는 탓에 악착같이 붙어 있었다.
그런 이들의 아옹다옹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고길 내외도 기쁘긴 매한가지였다.
그들로서는 깊은 상처를 받았을 고덕이 그들과 함께 부대껴 가며 다른 이들처럼 살아가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던 것이다.
그렇게 북적거리는 와중에도 고길 내외는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곧 다가올 아랑의 결혼식을 위해 안휘로 출발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시월이 시작된 첫날, 고길 내외와 고덕, 그리고 그 외 군식구들까지 모두 외유에 나섰다.
집안의 잔치에 가족이 빠져선 안 된다는 고길의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마차는 한 대만 동원되었다. 그렇다고 말들이 동원된 것도 아니었다. 무슨 심술인지 고덕이 돈이 아깝다며 추가로 말을 구하지 못하게 한 까닭이었다.
그럼 한 대뿐인 마차라도 모두가 편히 타고 갈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마차가 동원되었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겨우 네 사람 들어갈까 말까 한 마차의 안에는 고길 내외와 고덕만이 탔다.
결국 나머지 자리에 대한 쟁탈전이 벌어졌다.
그 결과 마부석은 선점권을 주장한 왕팔이 차지했고, 그 옆엔 힘에서 앞선 협련이 앉았다.
그 탓에 서열에서도 무력에서도 밀린 묵린과 후량이 마차 지붕 위에 엉거주춤 엉덩이를 붙이고 있어야만 했다.
“제길, 대투문의 문주가 이러고 가다니 이건 망신이야, 망신.”
후량의 투덜거림에 묵린이 핀잔을 주었다.
“개뿔, 대투문 같은 소리 하고 앉았네. 북경묵가의 대장로인 나도 이러고 가는데, 네가 별수 있어.”
자신이 피와 땀으로 세운 투문을 낮춰 잡는 힐난이었지만, 후량은 그저 파랗게 변한 자신의 두 눈두덩을 문지를 뿐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괜히 대들어봐야 늘어나는 건 남들 보기 창피한 멍뿐이 없다는 걸 몸으로 깨달은 까닭이었다.
그렇게 달린 마차가 안휘로 들어선 것은 십여 일 만이었다.
그 탓에 고덕 일행이 안휘협가에 도착한 것은 성혼식이 예정된 날로부터 이틀 전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사돈.”
지극히 공손히 맞는 협가의 가주 나현의 모습에 왕팔은 고소를 베어 물었다.
“오랜만입니다, 사돈어른.”
“예.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백도 팔대세가의 가주가 힘없는 시골 촌부인 고길 내외를 맞는 것이라곤 볼 수 없을 정도의 정중함이 나현에게서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렇게 자리한 이들이 이내 일행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제 아우 녀석입니다.”
그 말에 고덕보다 나현이 먼저 포권을 취했다.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나현의 인사에 고덕이 마주 포권을 취했다.
“반갑습니다.”
“이 아인 아우의 제자이지요.”
고길의 소개에 강호뿐이 아니라 일반인들에게까지 이름이 널리 알려진 안휘협가의 가주를 눈앞에 둔 구는 심하게 떨리는 마음을 간신히 다잡으며 인사를 했다.
“구, 구입니다, 대협.”
“좋은 스승을 두었네. 많이 배워 스승의 이름에 오점을 나기지 않도록 노력하게.”
“예. 가, 감사합니다.”
구의 답에 고개를 끄덕이는 나현에게 고길이 소개를 이었다.
“이쪽은 덕이의… 아니, 진이의 오라비랍니다.”
고덕의 아들뻘이라 소개하려던 고길은 이내 말을 고쳐야 했다. 여하간 그 의미로서는 구가 들어온 탓이다. 그렇다고 수하라 하자니, 그간 왕팔과 다진 정이 그것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왕팔입니다.”
고길의 소개에서 변하지 않은 자신의 위치를 실감한 왕팔의 음성은 밝고 힘찼다. 그 탓인지 답하는 나현도 밝은 미소로 응했다.
“다시 보아 반갑네.”
이후에 이어진 소개는 앞과는 조금 달랐다. 고길이 어찌 소개를 해야 하는지 몰라 말을 잇지 못한 것이다.
“이쪽은…….”
물론 이름들이야 들었지만 강호에서 어찌 자리하고 있는지 몰랐던 고길로서는 함부로 그들을 타인 앞에 소개할 수 없었던 탓이었다.
그런 난감함을 미소를 지으며 나선 협련이 해소해주었다.
“대협의 식솔인 협련이라 합니다.”
협련의 간단한 소개에 영향을 받은 것인지 다른 두 사람의 소개도 간단했다.
“묵린이오.”
“후량이외다.”
포권을 취한 채 간단히 이름만 밝혔지만, 그것을 들은 나현의 입장에선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처음 소개한 이의 이름은 몰랐지만, 다른 두 사람의 이름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탓이었다.
그 탓에 기겁할 만큼 놀란 나현이 당황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호, 혹시 창군과 광, 아니 투견이시오?”
자신의 물음에 두 사람이 말없이 다시 포권을 취해 보이자 나현의 당황감은 극에 달했다.
천하의 제하이십사강이 둘씩이나 자신의 앞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바, 반갑소이다. 안휘협가의 가주인 나현이오.”
“반갑소.”
“나도 그렇소.”
두 사람의 성격만큼이나 다른 인사에도 불구하고 나현은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한마디로 이들 모두가 고덕이란 이에게 인연으로 엮여 있고, 그 인연이 다시 혈연으로 자신의 가문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잠시 후, 연락을 받은 고진과 나성운이 들어서자 고길 내외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이전에 비해 몰라볼 정도로 고진의 신색이 밝아져 있었던 것이다.
하긴, 그간 안휘협가가 고진에게 기울인 정성은 말할 수 없이 깊었다.
오죽하면 고진이 원해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는 말까지 나돌 지경이었으니, 그간 나현이 그녀에게 쏟은 정성과 신경이 어떠했는지는 달리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였다.
양쪽의 상견례가 마무리되자 고길 내외와 고덕에게 내어진 귀빈용 객실로 옮겨 대화가 이어졌다.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했고, 가족 간의 대화는 즐거운 이야기들로 가득 채워졌다.
모처럼 고덕의 표정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고, 다른 이들의 입가에도 미소가 감돌았다.
* * *
그날 저녁, 고덕은 남궁단의 방문을 받았다.
그는 조카인 남궁태의 성혼을 위해 남궁세가 외총관의 직분으로 몇몇 세가인들과 함께 안휘협가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고덕을 찾아온 남궁단의 표정이 마치 전쟁에 나가는 장수처럼 비장해 보였다는 점이다.
“무슨 일인가?”
상대의 심상치 않은 표정에 뭔가 문제라도 생겼나 싶어 묻는 고덕에게 남궁단은 낮은 음성으로 되물었다.
“정말 대협이 거, 검마가 맞습니까?”
남궁단의 물음에 고덕의 검미가 찌푸려졌다.
“입 싼 늙은이…….”
고덕이 지칭한 입 싼 늙은이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남궁단은 하늘이 노래지는 충격을 받았다.
“정말이군요… 정말이에요.”
그 말만 반복하는 남궁단을 바라보며 고덕이 투덜거렸다.
“왜? 내가 검마인 게 마음에 안 드나?”
“아,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솔직히 말하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백도 팔대세가에 들 정도로 뿌리가 깊은 남궁세가가 마교의 부교주 출신과 사돈지간이라니, 만에 하나 이것이 소문이라도 나는 날엔…….
생각만 해도 아찔한지 눈을 질끈 감는 남궁단을 바라보며 고덕이 못마땅한 음성을 토했다.
“출신을 가지고 왈가불가만 해봐. 남궁세가를 아주 싹 갈아엎어버릴 테니까.”
고덕의 으르렁거림에 남궁단의 표정에 당황감이 서렸다.
다른 이들이 저런 말을 했다면 당황감이 아니라 당장 사생결단을 내겠다는 투지가 솟겠지만, 그것도 어지간한 이일 때나 드는 생각이었다.
상대는 항거불능인 사람이다. 자신이나 세가의 수뇌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 준 검존 남궁호군의 설명엔 백도 최고수인 무극검이 숨소리조차 숨겨 가며 벽장 속에 숨어 있어야 했을 인사라 했다.
그 말은 검마가 비록 무극검과 함께 천하오존이라 뭉뚱그려져 있어도 그 한계를 넘어섰다는 뜻이었다.
그 탓에 뒤늦게 상대의 진체를 밝히는 검존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었다.
그들도 검마란 이름이 주는 질펀한 피 냄새를 맡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그런 뜻은 아닙니다. 다만… 걱정이 아주 없다고는…….”
“왜, 끝까지 내 존재를 숨겨 달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건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남궁단의 표정에 반색이 떠올랐다.
“그,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빌어먹을 인사들. 밝혀져 봐야 귀찮기만 하니 애써 떠벌리고 다닐 생각도 없지만, 그렇다고 죽자 살자 숨길 생각도 없어. 까발려지면 그런대로 흘러가는 게지.”
“하,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저희의 입장이…….”
“어떤 시러베자식이 나와 사돈 된 걸 씹는다면 내 그 자식을 자근자근 씹어줄 생각이야. 어디 한번 해보라고 해!”
사나운 고덕의 음성에 남궁단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걸 문제 삼으면 자근자근 씹어준다는 인사 앞에서 그 문제를 계속 거론할 수 없는 까닭이었다.
세가에서 자신에게 준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남궁단의 어깨가 축 처졌다.
그 대상이 자신이니 보기 싫은 모습인 건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조카 손녀의 시어른이 될 사람이기도 하니 마음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만에 하나 말이야. 사돈 집안에 문제가 생기면 내 달려는 가지.”
“예?”
“못 알아들었어? 문제가 생기면 돕겠다고. 상대가 백도든 마도든 상관하지 않고 말이야.”
고덕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들은 남궁단의 얼굴에 놀람이 들어찼다.
“하, 하면 그 상대가 마, 마교, 아니 천마신교여도 말씀입니까?”
상대의 신분을 생각해 급히 명칭을 바꿨지만, 고덕은 그것은 신경조차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 마교든 어디든 내 가족을 건드리면 아주 박살을 내줄 생각이니까.”
진심이었다. 문정 군주, 아니 연화를 잃은 이후 고덕에게 가족이란 다시는 잃고 싶지 않은, 잃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상대의 진심을 느낀 남궁단의 표정은 환하게 밝아졌다.
검마라는 뛰어난 방패를 언급했던 검존의 말이 사실로 확인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검마에겐 친정과 다름없는 마교에 대해서도 통하는 방패가 말이다.
“가, 감사합니다, 대협.”
“감사할 건 없어. 네 집안에 내 가족이 있기 때문이니까.”
그 말은 그 가족이 없어지면 네 집안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일면 냉혹한 말이었지만 상관없었다. 그 가족을 지극히 위하면 되는 일이니까. 고덕 역시 그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라는 걸 모를 남궁단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야 이를 말입니까? 저희에게도 가족입니다. 가족이란 소중하지요. 하하하!”
남궁단의 웃음소리가 유난히 밝았다. 언제 침울했나 싶은 그의 모습에 고덕도 피식 웃음을 지었다.
* * *
남궁단의 방문으로 모종의 결론이 내려진 성혼식은 성대하게 열렸다.
중원의 풍습상 처가에서 올려진 성혼식엔 황산 인근에 위치한 무문들과 대상가에서 하객을 보내왔다.
그 안엔 성혼의 또 다른 당사자인 남궁세가의 가주는 물론이고, 안휘의 숙주에 자리한 단리세가의 가주까지 참석해 놀라움을 자아냈다.
아무리 안휘협가와 남궁세가의 성혼이라지만 단리세가의 가주까지 참석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 탓에 총관이나 장로를 파견했던 여타의 무문들은 자신들이 무언가 놓친 것이 있는지 세심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그런 이들의 눈에 뜨인 것이 백도 팔대세가의 가주들과 나란히 어깨를 한 이들이었다.
특히 그들 모두에게서 공손한 대접을 받는 청년의 모습은 놀람과 의문을 동시에 안겨 주었다.
“저 사람, 어디서 본 듯합니다만…….”
봉양상단의 하객 대표인 유장의 말에 함께 서 있던 구정이 관심을 표했다.
“어디의 누구 말입니까?”
구정은 봉양상단이 위치한 안휘성 북쪽의 봉양에서 백여 년이 넘게 이어져 온 봉양검문의 장로였다.
그 탓에 유장은 감히 허투루 답할 수 없었다.
“저기 갈색의 단삼을 입은 사내 말입니다, 구 장로님.”
“아! 머리를 틀어 올린 사람 말이군요.”
“예, 맞습니다.”
“저자를 아십니까?”
“그게… 아닙니다. 그자가 이곳에 있을 리가 없지요.”
이름도 없던 봉양상단을 안휘에서만큼은 다섯 손가락 안에 들게 성장시킨 인물이 바로 유장이란 사내였다.
그런 유장의 특기 중 가장 이름난 것이 바로 기억력이었다. 오죽하면 오 년 전에 스치듯 본 이를 기억해내 거래를 성사시켰다는 이야기가 나돌 정도였다.
그런 이가 사람을 잘못 보았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 탓에 고개를 내젓는 유장에게 구정은 다시 물을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누구를 생각하셨기에 그러십니까?”
구정의 물음에 유장은 난감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것이… 혹, 광견이라는 무명을 기억하십니까?”
“하하하, 그 이름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불한당이니 사파니 해도 당당히 제하이십사강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제 기억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저 사람의 얼굴이 그 광견의 용모파기와 닮았군요. 마치 한 사람이라고 해도 부정하지 못할 만큼 말입니다.”
유장의 말에 구정의 얼굴에 설마 하는 표정이 들어섰다.
아무리 제하이십사강이라고는 해도 광견, 또는 투견이라 불리는 후량이 세운 문파는 사파였다.
백도의 거두들이 즐비한 곳에 사파인이 버젓이 들어와 있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구정이었다.
“설마 그가 이곳에 있겠습니까?”
“그러니 제가 잘못 본 듯하다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주변인들도 저들끼리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자신이 과거에 보았던 광견 후량의 모습과 동일하다는 이들의 음성도 적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