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69장 (70/129)

제69장. 전쟁(戰爭)-안창, 쓰러지다

현청을 담당했던 부대의 하급 장수가 올린 보고에 별동대를 지휘하던 지휘첨사인 소람의 눈이 이채를 발했다.

“그러니까 놈들도 이곳을 걱정하고 있다 그 말인가?”

“예, 장군.”

“그 말은 놈들이 아직도 이곳이 공격당한 줄 모른다는 뜻인데…….”

소람의 말에 한 수하 장수가 말문을 열었다.

“이참에 놈들의 후방을 찔러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우리에게 내려진 명령은 변경 도시들을 두들겨 흥문에 집결 중인 저들의 병력을 분산시키라는 것이었다.”

“하오나 저들이 모른다지 않습니까? 그 말은 그에 대한 대비가 되어 있지 못하다는 말과 같습니다. 하니, 이대로 몰아치면 놈들에게 커다란 압박을 줄 수 있습니다, 장군.”

소람에게 주어진 병력은 모두 삼천이다. 대규모 작전을 펼치기엔 확실히 모자란 수였다.

“하나, 그런 작전을 취하기엔 우리의 병력이 너무 적다.”

“하오나 기회가 너무 좋지 않습니까? 만에 하나 우리가 성도 인근에라도 나타난다면…….”

이쪽의 규모를 확인할 수 없는 경공 왕부의 지휘부는 필연적으로 흥문에 집결해놓은 병력을 급거 성도로 불러올릴 수밖에 없을 터였다.

생각이 그에 이르자 소람도 수하 장수의 의견에 구미가 당기기 시작했다.

“즉시 장수들을 모아라. 의견을 물어 결정할 것이다.”

소람의 명에 병사들이 내강 이곳저곳에 퍼진 부대의 장수들을 부르기 위해 부챗살처럼 퍼져 나갔다.

회의의 결과는 만장일치였다. 장수로서 적의 심장부를 겨냥하는 일을 마다할 이들이 없었던 것이다.

결국 소람의 별동대는 자신들의 의지를 적은 서찰을 소지한 전령을 본대로 보내는 한편 급히 내륙을 향해 이동을 시작했다.

물론 포로로 잡힌 이들 중 전서를 다룰 줄 아는 이들은 물론이고, 그것과 상관없이 관리란 관리들은 모조리 찾아내 베어버리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들이 내륙으로 진출한 사실을 다른 지역으로 알릴 것을 두려워한 소람의 조치였다.

그 덕이었는지 소람이 이끄는 병력이 떠난 후에도 내강에선 전서구는 물론이고 사람조차 도시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소람이 내강을 떠나며 일부 병력을 매복시켜 놓았다가 외부로 소식을 전하는 것을 발견하거든 사람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겠다고 위협한 것이 먹혀들어간 까닭이기도 했다.

* * *

사 일이라는 시간이 흐르자 허량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무래도 내강이 당한 듯하구려.”

“하오면 어찌해야 합니까?”

수하 장수의 물음에 허량의 시선이 곤무령에게 향했다.

“훈련 중인 징집병은 얼마요?”

“현재 훈련 중인 병사들은 삼만가량 됩니다. 그들을 내강을 향해 출병시키실 생각이십니까?”

“그 수밖에 없지 않겠소.”

“하나, 향방군이나 좌군도독부의 병력 없이 징집병만으론 적을 상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곤무령의 말에 허량의 시선이 수하 장수에게 돌려졌다.

“청해에서 이동 중인 좌군도독부의 병력은 지금 어디에 있나?”

“어제 온 전령의 보고와 이동속도를 가늠하면 지금쯤 금천에 들어섰을 것입니다, 도독.”

금천이면 아직도 사 일은 더 지나야 성도에 도달할 거리였다.

결국 좌군도독부의 병력은 지금 사용할 수 없다고 판단한 허량의 시선이 한쪽에 우두커니 서 있는 문관에게 향했다.

“이보게, 양 부사.”

허량의 부름에 사천 안찰사사의 부사인 양온이 조용히 답했다.

“예, 도독 대인.”

“안찰사사에서 보유 중인 병력이 얼마나 되는가?”

안찰사사는 형옥 기관이다. 당연히 치안도 담당한다.

그 탓에 무장한 인원이 있지만, 엄밀히 따져 군인은 아니었다. 일종의 준군사 집단이랄까? 그런 까닭에 대부분의 포쾌나 정용들은 방망이나 기다란 법봉을 가지고 다닌다.

포교쯤은 되어야 칼을 차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적어도 그들은 정식으로 무예를 수련한 무관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도 포두로 올라가면 말이 달라진다. 대부분의 포두들이 포교를 거친 무관들이긴 하지만, 그중 삼분지 일 정도는 무관이 아닌 문관들이다.

안찰사라는 곳이 형옥을 관장하는 곳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서기들이 포함되고, 그들은 당연히 문관들이다. 그들이 승차해 오르는 자리도 바로 포두였던 것이다.

더 위로 올라가면 더할 말이 없다. 문관들의 수효가 절대적으로 많아지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명 전역 스무 개 안찰사사의 최고위자인 안찰사는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문관이었다.

“병력이라시면… 혹, 포쾌와 정용들을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그러하네.”

“현재 성내에 머물고 있는 포쾌와 정용들의 수는 모두 이천가량입니다.”

원래 그리 많은 수가 성도에 머물진 않는다. 일정 수가 각 부나 현마다 설치된 안찰지사에 나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기가 닥치자 성도의 치안을 강화한다는 취지로 일정 수씩 성도로 불러올린 탓에 수가 많아진 것이었다.

“그들 중 반만 내어주게.”

“도독 대인!”

당황하는 양온에게 허량이 말을 이었다.

“기존의 병력이 어느 정도는 포함되어 있어야 징집병들이 안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네. 그들이 반드시 필요하단 말일세.”

“하, 하오나 그들은 병사들이 아닙니다. 전장에 서본 적도, 그렇게 하도록 훈련을 받은 적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하나, 기본적인 창술 훈련은 매달 받는다고 들었네. 더구나 그들은 치안을 유지해오며 산적들과도 전투를 벌여 본 경험이 있지 않겠나?”

“그, 그야……. 하오나 그땐 향방군이 주축이 됩니다, 도독 대인.”

“그렇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쾌나 정용들이 전투 경험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질 않나.”

허량의 주장에 양온은 더 이상 거부만 할 수 없게 되었다.

“아, 알겠습니다.”

마지못해 답하는 양온에게 허량이 단서를 붙였다.

“단, 포교들은 모두가 포함되어야 하네.”

“도독 대인!”

다시금 당황성이 터졌지만, 이미 군사 지휘권을 장악한 허량은 안찰사인 양온과 더 이상 실랑이를 벌일 생각은 없었던지 단호한 음성으로 말을 맺었다.

“왕명으로 내려진 최고 지휘관으로서의 군령일세.”

“대, 대인…….”

기가 질린 양온의 음성이 흘렀지만, 허량은 이미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징집군 삼만에 안찰사의 포쾌와 정용 일천이 포함된 대병이 내강을 향해 출발한 직후, 비둘기 한 마리가 성도에 내려앉고 있었다.

* * *

비둘기의 다리에 매인 전서통에서 쪽지를 꺼내 본 사내는 사천 제일의 부호라는 충만장의 총관이었다.

세간에선 지금의 충만장이 있게 된 배경에 총관의 능력을 꼽길 주저하지 않는다.

그만큼 충만장 총관의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뛰어났던 것이다.

그런 총관의 손에 들려 있던 쪽지가 갑자기 불길에 휩싸여 사라졌다.

“주군께서 왜 갑자기……. 이유를 모르겠군.”

총관의 음성이 잔잔하게 흩어지는 순간, 그의 신형도 함께 사라졌다.

충만장에서 사라진 총관의 모습이 다시 드러난 곳은 바로 경공왕이 잠시 왕부를 옮긴 사천성 승선포정사사였다.

“누구?”

“충만장의 총관이란 자입니다, 왕야.”

좌포정사의 답에 경공왕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일개 상단의 사람을, 그것도 주인이 아니라 총관을 내가 직접 만나 보란 말인가?”

“그, 그것이… 그가 가져온 내용이 너무 커다란지라…….”

좌포정사의 말에 경공왕이 물었다.

“그가 가져온 것이 대체 무엇이건대 그러는가?”

“정병 일만과 막대한 군수물자를 대겠다고 합니다.”

“군수물자는 둘째 치고, 정병 일만을 내겠다?”

“예. 그것도 흔히 강호인이라 불리는 이들로 이루어진 정병이라 합니다.”

강호인들 개개인의 능력이 정예화된 군병의 능력을 월등히 뛰어넘는다는 것은 경공왕도 충분히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능력의 고하에 따라 다르겠지만, 웬만한 강호인들이라면 대체로 잘 훈련된 장수급의 실력이다.

그 말은 그 충만장의 총관이라는 자가 일만의 장수로 이루어진 병력을 제공할 수 있다는 소리와 같았다.

“그를 들이라.”

경공왕의 명에 좌포정사가 총관을 안내해 들어왔다.

“충만장의 총관인 홀려가 왕야를 뵈옵니다.”

오체투지는 아니었지만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대는 대례를 올렸다.

그것이 흡족했던지 경공왕의 입에서 부드러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일어나 앉으라.”

“감읍하옵니다.”

공손히 읍을 해 보인 홀려가 왕좌 아래에 놓인 의자에 앉자 경공왕이 물었다.

“그래, 고(孤)에게 내줄 것이 있다고?”

평소라면 이런 일에 왕이 먼저 이야기를 꺼내는 경우는 없다. 체통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그렇게 체통이나 따지면서 시간을 끌 수 있을 만큼 녹록치 않았기 때문인지 경공왕은 곧바로 본론을 거론했다.

“그렇사옵니다. 소인이 몸을 담고 있는 충만장은 왕야께 도움을 드리고자 하옵니다.”

“좌포정사의 말을 들으니 강호인들로 구성된 정병 일만을 내놓겠다고?”

“예, 그렇사옵니다.”

“그만한 강호인들을 보유하고는 있는가?”

“그렇진 못하오나 삼 일이면 모을 수 있사옵니다.”

“삼 일이면 된다? 어떻게 말인가?”

경공왕의 물음에 홀려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사천엔 낭인 시장이 존재하옵니다.”

“낭인 시장?”

“예. 원래는 감숙성에 위치한 가욕관 근처에 있었으나 몇 해 전 계애왕 전하의 소거령으로 이곳 사천의 삼합으로 자리를 옮겨 왔사옵니다.”

“한데, 그 낭인 시장과 강호인으로 구성된 정병 일만이 무슨 관계란 말인가?”

“낭인 시장은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낭인들이 자신을 파는 곳이옵니다. 그리고 낭인들의 대다수가 강호의 떠돌이들이라는 것도 주지의 사실이옵니다.”

그제야 상대가 하려는 말을 알아들은 경공왕의 표정에 이채가 깃들었다.

“하면 너는 그곳에서 사람을 모아 고를 돕겠다는 것이냐?”

“그러하옵니다, 왕야.”

“말은 알겠다만 그곳에서 일만의 낭인을 모을 수 있다는 말은 믿기 어렵구나?”

“가능한 수치이옵니다. 현재 낭인 시장에 머물고 있는 이들의 수가 이미 일만을 넘기고 있으니 말이옵니다.”

“낭인의 수가 일만을 넘긴다?”

처음 듣는 소리다. 칼이나 창 등 무기를 소지하는 강호인이, 그것도 통제가 잘 되지 않는 낭인들이 일만이나 넘게 자신의 권역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는 것에 경공왕은 분노와 경악을 함께 느끼고 있었다.

“여봐라, 즉시 안찰사를 들라 하라.”

경공왕의 호통에 밖에서 왕부 내관들의 답이 들려왔다.

“예, 왕야.”

그들의 분주한 발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 문관 복장의 안찰사가 들어섰다.

“찾아 계시옵니까? 왕야.”

“어서 오게. 내 이자에게 하도 어이가 없는 말을 들어서 확인하고자 경을 불렀네.”

경공왕의 말에 잠시 자리에 앉아 있는 홀려를 일별한 안찰사가 경공왕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하문하십시오, 왕야.”

“내 이자에게 들으니 삼합에 낭인 시장이라는 곳이 생겼다고?”

“예, 왕야. 그러하옵니다.”

“하면 그곳에 머무는 낭인들의 수가 일만을 넘긴다는 것을 알고 있던가?”

경공왕의 물음에 안찰사는 담담한 신색으로 답했다.

“알고 있사옵니다.”

“알고 있다? 한데 어찌 내겐 보고가 되지 않았던 것인가?”

분기가 가득한 경공왕의 물음에도 불구하고 안찰사는 담담한 신색을 잃지 않았다.

“낭인 시장이라는 곳이 관과는 관계가 없는 강호의 것이었던 데다 그 위치가 삼합이라는 것 때문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옵니다.”

“위치가 삼합인 것이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과 무슨 상관인가?”

좀처럼 누그러지지 않는 경공왕의 분노에 잠시 그를 바라보았던 안찰사가 답을 이었다.

“감히 아뢰오나 삼합엔 사천 도지휘사사 소속의 향방군 이만이 주둔하옵니다.”

“삼합에?”

놀라는 경공왕에게 안찰사가 고개를 조아렸다.

“예, 왕야. 그곳엔 도지휘사사의 훈련장이 존재하는지라…….”

그러고 보니 도지휘사사엔 별도의 훈련장이 존재했다. 그곳에선 신병뿐이 아니라 기존 향방군들의 전투력 재고를 위해 매 분기마다 훈련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경공왕도 익히 알고 있던 일이었으나, 최근의 사태로 성도 내에서 징집병들의 훈련이 이루어지는 탓에 별도의 훈련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흠흠… 그렇구나. 그곳엔 도지휘사사 소속의 훈련장이 있었어. 하나, 그렇다 해도 강호의 야인들이 일만씩이나 모여드는 것을 보고하지 않은 것은 묵과할 수 없는 일이다.”

경공왕의 호통에 안찰사의 시선이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끙끙대는 좌포정사를 힐끗 일별하곤 고개를 조아렸다.

“소관이 어리석어 실수를 저질렀사옵니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왕야.”

안찰사가 용서를 구해오자 그에게 더 이상 화를 내기도 애매해져 버렸다.

평시라면 모를까, 지금처럼 위기 상황에서 휘하들과의 화기를 해치는 것은 가능한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 말하니 더 이상 그것을 문제 삼지 않을 것이네만, 향후엔 그런 일이 없도록 유념하게.”

“감읍하옵니다, 왕야.”

고개를 조아리는 안찰사의 모습에 경공왕이 손을 내저었다.

“물러가라.”

“예, 왕야.”

깊게 읍을 하고 물러나는 안찰사를 따라 좌포정사가 슬쩍 대전을 벗어나는 것에 경공왕은 아무런 제지도 가하지 않았다.

둘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운으로 보아서 이미 이번 보고가 안찰사가 아니라 좌포정사 선에서 누락되었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단둘만 남게 되자 경공왕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물었다.

“그 대가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소흥 왕부의 적몰이옵니다.”

홀려의 말에 경공왕은 한참 동안 그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감히 일개 상인이 왕부의 몰락을 입에 담았다라? 죽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이유가 있을 터.”

“제겐 모시는 주인이 한 분 계십니다.”

“충만장의 주인 말인가?”

경공왕의 물음에 총관의 고개가 저어졌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주인의 수족일 뿐입지요.”

홀려의 말에 경공왕의 안색이 가라앉았다.

“그런 말을 내게 하는 저의가 무엇인가?”

“소인의 주군께선 왕야께 커다란 도움을 주실 수 있을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내게 도움을 준다. 감히 일개 야인이!”

상대가 평범한 상인이 아니라 무림이라 떠드는 별개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강호인이라는 것을 짐작한 경공왕의 음색이 높아졌다.

“그 일개 야인의 힘으로 저들 안창의 반군을 쓸어드리겠나이다.”

“무어라?”

관부인들 사이에 형성된 기본 지식에 의하면 강호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머릿수다. 황제가 동원할 수 있는 질리도록 많은 병사들.

그 탓에 강호인들은 황제의 권위와 그에 따른 관의 권리를 인정한다.

그것이 강호인들에 대해 관부인들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소수의 강호인들이 다수의 군병을 쳐 없앤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 까닭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경공왕에게 홀려가 말을 이었다.

“앞서 말씀 올린 일만의 정병을 말하는 것이 아니옵니다. 왕야께오서 제 주인의 조건을 가납하여 주신다면 며칠 이내로 주변에서 왕야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있는 적병들을 일거에 도륙 낼 수 있을 것이옵니다.”

홀려의 말에 경공왕이 물었다.

“내게 이런 제의를 하는 까닭이 무엇이냐?”

“주인께선 한 사람의 목을 원하옵니다.”

“한사람의 목?”

“예. 그러하옵니다, 왕야.”

“한 사람의 목을 원하는데 왜 소흥 왕부의 적몰을 조건으로 세우는 거지?”

“그가 소흥 왕부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옵니다.”

홀려의 답에 경공왕의 물음이 이어졌다.

“대체 네 주인이 원한다는 목의 주인이 누군가?”

“그것은 소인도 모르옵니다. 다만 주인의 뜻을 왕야께 전해 올렸을 뿐이옵니다.”

“만약 내가 허락하면 네가 말한 것을 정말 이룰 수는 있는 게냐?”

“증거를 보여 드릴 수도 있사옵니다.”

“증거?”

“예. 아마 일단의 적병들이 내강을 지나 내륙으로 진출하고 있을 것이옵니다. 그들의 목을 왕야께 바치겠나이다.”

홀려의 말에 잠시 생각을 가다듬던 경공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내게 그 증거를 가져오라. 하면, 내 네 주인이 내세운 조건을 수락할 것이다.”

“감읍하옵니다, 왕야.”

홀려가 물러간 이후 경공왕은 즉시 허량을 불러들였다.

급히 불려온 허량은 경공왕에게서 홀려의 이야기를 듣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낭인들 일만으로 이루어진 정병은 분명 욕심이 나긴 합니다만, 과연 다른 것들이 지켜지겠습니까?”

“그래서 증거를 보이라 하였네. 하니, 내강 쪽에 정찰을 강화시켜 결과를 확인토록 하게.”

“예, 왕야.”

하지만 답을 하는 허량은 상인의 허황된 약속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 * *

그로부터 사 일 후, 일단의 수레를 대동한 군병들이 성도로 돌아왔다.

그들은 내강을 향해 출병했던 안찰사사 소속의 포쾌와 정용들이 포함된 징집군 삼만이었다.

“이게 무엇인가? 또 자네들은 어찌 되돌아온 게야?”

허량의 불호령에 그들을 지휘해 나갔던 한 지휘첨사가 조심스럽게 보고를 올렸다.

“그것이, 왕야의 명으로 적도들을 전멸시켰다고… 이것들을 보시오면…….”

말을 중단한 지휘첨사가 수레에 실린 궤짝을 열자, 소금에 절여진 수급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것이 무엇인가?”

인상을 잔뜩 찌푸린 허량의 물음에 수급을 들어올린 지휘첨사가 답했다.

“이것이 내강을 공격하였던 적병들의 수급이라 합니다.”

“뭐라? 이것이 내강을 공격했던 적도들의 수급이라!”

“예, 도독.”

“그, 그것을 어찌 믿는단 말이냐?”

“저기…….”

말을 하다 만 지휘첨사의 시선이 군병들 사이에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노인에게 향했다.

“누구인가?”

“내강의 백성입니다.”

“내강의 백성?”

“예, 증인이라면서……. 이 수급을 건네준 이가 함께 내어준 사람입니다.”

지휘첨사의 말에 허량이 그 노인을 불렀다.

“자네가 정말로 내강의 백성인가?”

“예, 대인. 살려만 주십시오.”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떠는 노인을 바라보며 허량이 물었다.

“어찌 자네가 이곳에 있게 된 것인가?”

“소, 소인도 모르겠습니다요. 그저 밭일을 나왔다가 웬 무림인들에게 납치, 아, 아니 이끌려 하늘을 날아와 보니 저 장군님들과 함께 있었습니다요.”

노인의 말에 허량은 강호인들이 경공이라는 것을 써 새처럼 하늘을 날아다닌다는 소리를 기억해냈다.

“흠… 하면 묻지. 내강이 적도들에게 공격을 당한 것은 맞는가?”

“예, 대인. 이놈의 식솔들도 간신히 살아남았습니다요.”

“관인들은 어찌 되었나?”

“흉악한 적도들이 모두 죽였습지요.”

“흐음… 하면, 적이 얼마나 되는 줄은 알고 있나?”

“마, 많았습니다요.”

추상적인 노인의 말에 허량이 다시 물었다.

“어디 자세히 말해보게. 이들보다 많았던가?”

허량의 손을 따라간 노인의 시선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열을 지어 늘어선 군병들의 모습이 가득했다.

“그, 그게 모, 모르겠사오나 이들만큼은 되었던 것도 같습니다.”

“하면, 저쪽의 병사들과 비교하면 어떤가?”

다시 허량의 손을 따라간 곳엔 이천의 친병 부대가 도열해 있었다.

엄정한 군기와 대오, 길게 늘어선 군열은 보는 것만으로도 기가 질릴 정도였다.

“저, 저 정도였던 것도 같습니다요, 대인.”

삼만과 이천의 수요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노인의 말을 믿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면, 저 수급들이 내강을 공격했던 이들인 것은 맞는가?”

허량의 물음에 노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몸체가 없으니 그들의 복색과 구분할 수가 없사옵고… 또 저 얼굴은 보지 못하였던 터라…….”

놀란 탓인지 수는 명확히 짚지 못했지만, 상대는 비교적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에 허량의 명이 떨어졌다.

“모든 수급을 꺼내 정렬시켜라.”

허량의 명에 병사들이 달려들어 궤짝에서 수급들을 꺼내 도열하기 시작했다.

머리만 도열시켰음에도 끝이 없이 이어지는 수에 그것을 늘어놓는 병사들도 놀란 표정이 역력했다.

“저 중에서 찾아보게.”

허량의 말에 노인은 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수급들을 일일이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이, 이자입니다. 제가 이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옆집 개돌이가 이놈이 휘두른 칼에 맞아 죽었습지요.”

노인의 말에 허량이 물었다.

“이들을 지휘하던 장수의 얼굴은 모르는가?”

“자, 장수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들 몇몇을 지휘하던 이는 먼발치에서 보았습니다요. 대인.”

“그를 찾아보게.”

허량의 말에 노인은 또다시 수급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길 얼마,

“이자입니다.”

“확실한가?”

“예. 분명합니다요, 대인.”

노인의 대답에 수하 장수들을 불러들인 허량이 그 수급을 높이 들었다.

“이자를 아는 이가 있는가?”

장수라면 안면이 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관으로 입문하기 위해 거쳐야만 하는 금군 훈련원에서 얼굴을 익히게 되는 까닭이었다.

“아는 이입니다.”

한 장수의 말에 허량이 물었다.

“누구인가?”

“소람이라고, 광서 도지휘사사에 근무하던 지휘첨사입니다. 도독.”

“확실한가?”

“분명합니다. 동기였던 데다 동향이었기에 다소 친분이 있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저리 말할 정도라면 가볍지 않은 친분이 있었을 터였다.

그 탓인지 허량이 수급을 그 장수에게 내주었다.

“친우였다니 내어주지. 장사를 지내든지 아니면 가족에게 수급을 보내든지, 자네의 요량대로 처결해도 좋다.”

허량의 말에 장수가 군례를 올렸다.

“감사합니다, 도독.”

수하 장수의 군례를 받으며 물러난 허량은 이내 경공왕을 찾았다.

“그자의 약속이 사실이란 말인가?”

“예. 분명 내강을 침습했던 적군들의 수급이 맞았습니다.”

“그렇다면……. 여봐라, 즉시 충만장의 총관을 불러오거라.”

경공왕의 명이 대전을 떨어 울렸다.

* * *

자신의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는 것을 확인하고 있던 안창은 예상외의 소식에 직면해야 했다.

“누구? 소람 지휘첨사의 수급이 가족에게 전해져?”

“예, 순무. 사천 도지휘사사에서 근무하는 친우가 보내왔다 합니다.”

“알았으니 나가 보게.”

수하를 내보낸 안창의 표정이 빠르게 굳어져 갔다.

소람이 지휘하는 별동대가 내강을 공격하고 내륙으로 파고든다는 전령이 도착한 지 이틀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의 수급이 사천 도지휘사사에 근무하는 친우의 손을 거쳐 가족에게 도달했다? 시간상으로 도저히 성립될 수 없는 일이었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기발로 달려도 사천의 성도에서 이곳까지의 거리가 얼마인데…….”

안창의 음성이 완전히 가라앉기도 전에 다른 음성이 끼어들었다.

“그거야 누가 가지고 왔느냐에 따라 다르지 않겠나?”

갑작스런 음성에 고개를 돌린 안창의 시선엔 검은 옷 일색인 사내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누, 누구냐?”

“나? 손님이라고 해두지.”

“소, 손님이라니. 너 같은 손님을 청한 적이 없다!”

호통을 치는 안창의 음성이 유난히 높고 컸다. 그런 안창을 지그시 바라보던 사내가 조소를 지었다.

“왜, 그렇게 해서 밖에 있는 이들을 불러들일 생각인 모양이지?”

문 밖엔 경호 병사들이 있었다. 그뿐이 아니라 그를 돕겠다고 나선 강호인들도 여럿이 주변에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불청객의 여유만큼이나 이상할 정도로 반응이 없었다.

“설마…….”

안창의 불안한 시선에 사내가 자신의 검을 들어 보였다.

“피가 좀 많이 흘렀어.”

사내의 말대로 검엔 옅게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것으로 확연해졌다. 저 사내가 자신의 앞으로 나서기 전에 경비병들은 물론이고, 강호인들마저 제거된 것이다.

하지만 언제. 자신에게 보고한 수하가 방을 나간 건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런 일련의 상황은 상대가 무섭도록 뛰어난 고수라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었다.

“자, 이젠 죽어줄 시간이야.”

“자, 잠깐! 누가 시킨 거지? 경공왕인가?”

“뭐, 무슨 왕이 원하긴 했다더군. 하지만 난 그런 건 몰라. 주인의 뜻에 따를 뿐이니까.”

“주인? 그럼 네 주인이 따로 있다는 말인가?”

안창의 물음에 사내가 조금 더 짙어진 조소를 그렸다.

“궁금증이 많은 시체군.”

아예 죽은 사람 취급인 상대의 말에도 안창은 화를 내기보다는 자신의 궁금증을 해결하길 원했다.

“누구지? 네 말대로 곧 죽을 사람이라면 알려 주지 못할 것도 없잖아.”

“그건 그렇군. 하면 명부에 가서 전하라. 암천의 주인께서 보내서 왔다고 말이야.”

그 말을 끝으로 파랗게 일어나는 빛이 쏘아 들어왔다.

그 순간, 언젠가 자신의 목을 베러 왔다던 창군이라는 사람이 보인 섬광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의 섬광 같던 창을 막아서던 이가 떠올랐다.

“제길, 그때처럼 나타나면 원하는 건 모두 들어주겠건만…….”

안창의 머릿속으로 그려지는 고덕의 영상을 상대의 검이 가르고 지나갔다.

이후엔 모든 것이 어두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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