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8장. 부흥(復興)-소흥 왕부, 날개를 달다
뒤늦게 합류한 최 표두를 위시한 자신의 옛 부하들의 보호 속에서 호경명은 의원의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런 일풍 객잔의 별채 안, 고덕과 마주 앉은 호철랑은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만하시오. 호 판관 일에 그 정도 도움은 줄 수 있는 일이니.”
일전의 고백으로 서먹해졌던 둘 사이가 이번 일로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솔직히 이번 일에 고덕을 찾지 못했던 것도 이전의 일로 고덕이 호철랑 자신을 멀리할 것이라 판단했던 탓이 컸다.
“그나저나 어찌 되었던 거요?”
고덕의 물음이 소흥 왕부에서 갑자기 사라진 것을 말하는 것임을 알아들은 호철랑이 설명을 했다.
“균사 왕부에서 아버지를 사로잡고 있다는 서찰이 왔어요.”
“사실이긴 했지만, 어찌 서찰만 믿고 움직인 게요.”
“서찰 속에 아버님이 항상 지니고 다니시던 노리개가 들어 있었으니까요.”
호철랑의 어머니가 죽으며 남긴 유품이라 했다. 호경명은 그것을 한 번도 몸에서 떨어트려 본 적이 없었다.
그는 그것이 자신의 호신부라 말하며 애지중지했던 것이다.
호철랑의 설명에 고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돌아갈 것이오?”
소흥 왕부로 돌아갈 것이냐 묻는 것이다. 그 물음에 호철랑의 표정에 안타까움이 떠올랐다.
“복수는 복수를 낳습니다, 대협.”
난데없는 호철랑의 말에 고덕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불구대천의 원수라는 말이 있소. 내겐 그들이 그렇소.”
“하나, 돌아보면 피안이란 말도 있지요.”
“그건 오욕칠정을 끊어냈다는 중들이나 쓸 말이지, 나완 연이 없소.”
여전히 단호한 고덕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던 호철랑이 물었다.
“지금의 그 모습을 그분이 바랄 것 같으십니까?”
호철랑의 물음에 고덕의 입이 다물렸다.
자신의 짜증에 사랑한다고 답해주던 그녀라면 지금의 모습에 고개를 내저을 것이 분명했다. 그것이 고덕의 표정을 누그러트렸다.
고덕의 표정 변화를 살피던 호철랑이 말을 이었다.
“만에 하나 그분을 두고 대협께서 먼저 화를 입었다면 그분이 복수를 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것을 바라시겠어요?”
그 말에 고덕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대협, 그분을 보내주세요. 복수에 매어놓지 마시고 좋은 세상, 아름다운 곳으로 그분을 놓아 보내주세요.”
간곡한 호철랑의 음성에 고덕은 복잡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난… 그럴 수 없소. 불에 타들어가던 내 아내에게 약속했소. 모조리 찢어 죽이겠노라고.”
마지막 말을 내뱉었을 때엔 방 안 가득 숨도 쉬기 힘들 정도의 농도 짙은 살기가 휘몰아쳤다.
“대, 대협!”
갑작스런 살기에 반응해 달려온 묵린이 고덕의 강대한 살기에 파랗게 질린 호철랑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린 고덕이 기세를 풀었다.
묵린의 출현으로 간신히 살기의 직격에서 벗어났던 호철랑이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하오.”
“아, 아니에요.”
고개를 젓는 호철랑을 남겨 둔 고덕이 다시 한 번 사죄의 의미로 포권을 해 보이곤 아무 말 없이 방을 나섰다.
호철랑의 방을 나선 고덕의 시선에 밤하늘의 별이 가득 들어왔다.
저 별들 중의 하나가 되어 있을 그녀가 고덕은 사무치게 그리웠다.
고덕이 그렇게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자, 묵린이 호철랑에게 말했다.
“지금은 그냥 두십시오.”
“하지만 묵 대협…….”
“압니다. 하고 싶은 말씀이 무엇인지. 하지만 대협 같은 성품의 사람은 복수심이라도 없으면 스스로를 해치고 말 것입니다.”
“그게 무슨…….”
“복수할 대상을 잃으면 자신이 더 강하지 못한 탓에 지킬 수 없었다는 자책을 할 거란 말입니다. 그것은 복수에 미쳐 사는 것보다 훨씬 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그럼 이대로 보고 있어야만 한단 말인가요?”
“시간이 흘러야겠지요. 대협을 보면 흥분은 가라앉았습니다. 아마도 척계광 부자를 척살하며 응어리가 풀리기 시작했던 모양입니다.”
그 말을 하며 당시에 고덕이 보여 주었던 살기와 광기가 떠올라 묵린은 가볍게 몸을 떨어야만 했다.
“하지만 여전히 저리 복수에 매달리시니…….”
“기다리십시오. 지금은 예전으로 많이 돌아오신 것 같습니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른 후, 도움을 청하면 될 것입니다.”
“도움… 이요?”
“예. 왕팔이라는 사람에게 들었습니다. 대협의 형님 내외분이 살아 계신다더군요. 그분들에 대한 대협의 정이 깊은 것 같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남은 상처는 그분들이 치료해주실 것입니다.”
묵린의 말에 호철랑은 조용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 * *
고덕과 일행이 일풍 객잔에 머무는 동안 세상은 발칵 뒤집혔다.
균사 왕부의 사람들이 한날한시에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남겨진 왕부의 건물들은 건드리기만 해도 무너져 흩어졌다.
안휘성 승선포정사사는 물론이고 도지휘사사, 안찰사사까지 균사 왕부의 괴사에 정신이 없었다.
그런 곳으로 묵린의 보호를 받는 호철랑이 찾아든 것은 호경명이 정신을 차린 지 이틀 만이었다.
갑자기 자신을 찾아왔다는 소흥 왕부의 판관과 마주 앉은 도지휘사는 불안한 표정이 역력했다.
“지금 균사 왕부의 괴사가 황제 폐하가 보내신 자객에 의한 것이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감히 폐하의 수족인 동북어위도총사를 향해 간계를 펼친 것에 대한 징치이시지요.”
동북어위도총사를 향해 모종의 계략이 실행 중인 것을 알고 있었던 도지휘사였기에 호철랑의 말에 가슴이 철렁할 수밖에 없었다.
“그, 그래서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이제 균사 왕부는 사라졌습니다. 조만간 황명으로 균사 왕부에 대한 처결이 내려지겠지만, 그 전에 거취를 정하시는 것이 후일을 위해서도 좋지 않겠냐는 말입지요.”
호철랑의 말에 도지휘사는 갈등 어린 표정을 지었다.
“설마 내게 소흥 왕부에 귀의하라는 말인가?”
“그곳이 아니고서 도지휘사 대인을 보호해줄 곳이 더 있습니까?”
그 물음에 도지휘사는 조심스럽게 답했다.
“아직 중군도독부가 온전한 것으로 아네만…….”
“중군도독첨사는 가까운 시일 안에 폐하가 보내신 자객을 맞을 것입니다. 그의 거취는 그때 결정이 되겠지요.”
현재 중군도독부에 남은 최고위자가 바로 도독첨사다. 그가 잘못되면 중군도독부는 사실상 지휘부가 몰살당한 셈이 된다.
그렇게 되면 중군도독부의 군권은 자연스럽게 황제에게 돌아가거나, 아니면 실권을 장악하기 위한 야전 지휘관들인 지휘첨사들 간의 다툼으로 번질 것이 분명했다.
두 가지 상황 다 도지휘사에겐 득이 될 수 없었다. 여하간 강력한 우군인 중군도독부가 유명무실한 세력이 되기 때문이다.
“나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닐세.”
그 말은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왕이 사라진 안휘성의 결정권은 도지휘사뿐만이 아니라 승선포정사사에 있는 좌, 우포정사와 안찰사사의 우두머리인 안찰사에게도 있을 테니까.
“그럼 시일을 드리지요. 이틀 후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 그러게.”
자리에서 일어서던 호철랑은 깜빡 잊었다는 듯이 말했다.
“참,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하남성과 강소성은 소흥 왕부와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하남의 밑은 이곳 안휘. 안휘의 우측엔 강소가, 아래엔 저희 소흥 왕부가 있는 절강이 있지요. 선택에 신중을 기하시기 바랍니다.”
협박이나 마찬가지인 말을 남긴 호철랑이 떠난 대청에서 도지휘사는 벽면을 가득 채운 주변 지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지도엔 방금 호철랑이 한 말대로 아래위로 하남과 강소, 그리고 절강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세 방향에서 협공을 받는다면… 흠…….”
절로 이 사이로 새어나오는 침음을 도지휘사는 막을 길이 없었다.
이내 도지휘사사를 빠져나온 전령들이 승선포정사사와 안찰사사로 향하는 모습이 호철랑의 시선에 잡히고 있었다.
* * *
안휘의 선택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몰랐다.
호철랑의 말대로 소흥 왕부에 붙은 하남과 앞마당인 절강에 끼인 안휘로서는 다른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안휘성이 소흥 왕부에 의탁하자 여타 왕부들의 움직임이 급박해졌다.
그런 급박한 움직임 때문인지, 아니면 그동안 적대시하던 소흥 왕부는 껄끄러웠기 때문인지 균사 왕부의 관할하에 있던 성도 중 유일하게 남은 호북이 섬서성에 있는 척회 왕부로 붙어버렸다.
이로써 척회 왕부는 이십만 대군을 거느린 전군 도독부와 그 관할권 예하인 감숙, 산서, 녕하성은 물론이고 호북마저 영향권에 넣게 되었다.
여기에 영상 왕부가 후군도독부는 물론이고 호남, 강서, 복건, 광동을 거느리며 남부의 패자가 되었다.
그 상황에서 황제의 적극적인 지원하에 일어선 소흥 왕부가 하남과 강소, 절강, 안휘에 이어 뒤늦게 합류한 산동까지 합해 오 개성을 아우르게 되자, 중원의 세력은 이들 세 왕부에 의해 균형을 찾아가는 듯했다.
하지만 이 세력 균형에서 소외된 두 무게추가 존재했으니, 한 곳은 광서와 귀주를 차지한 채 웅크리고 있는 안창의 반군이었고 또 다른 한 곳은 청해, 운남, 사천과 함께 좌군도독부를 움켜쥔 경공 왕부였다.
그 탓에 세력의 판도는 그 두 곳을 먼저 차지하는 곳이 장악할 것이란 의견이 대세를 이루었다.
하지만 삼 강으로 굳어진 세 왕부 중 어느 곳도 먼저 그 두 곳을 도모하지 못했다.
이유는 대체로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북부의 강자인 동북어위도총부의 존재였고 또 다른 하나는 무게추 중 하나를 도모할 때 다른 삼 강의 세력 중 한 곳이 뒤를 들이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상황은 그렇게 굳어가는 듯했다. 귀주를 움켜쥔 채 광서에서 웅크리고 있던 안창이 움직이기 전까지는…….
* * *
안창이 거느리는 반군의 움직임은 대단히 급작스러운 것이었다.
전투 전에 병력을 안전 지역에 집결시키는 일련의 과정도 생략된 채 광서와 귀주 전역에 걸쳐 분산 배치되어 있던 반군 병력들이 일거에 이동을 시작한 탓이다.
안창의 반군이 움직임을 보이자 그와 접경한 지역들에 일제히 긴장감이 차올랐다.
사천의 경공 왕부는 물론이고, 관할 지역들이 귀주와 맞닿아 있는 영상 왕부와 척회 왕부도 군세를 모으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모두가 긴장하게 된 것은 안창의 반군이 노리는 목표가 어디인지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초기일 뿐, 시일이 지날수록 반군의 병력이 향하는 지역을 파악하게 되면서 영상 왕부와 척회 왕부는 다소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러나 안창이 이끄는 반군의 이동이 자신들을 향한다는 것을 확인한 경공 왕부는 이전에 비할 수 없는 높은 긴장감에 휩싸였다.
그 탓에 사천의 성도(省都)인 성도(成都)에서 서남쪽으로 치우친 중소 도시, 대읍(大邑)에 자리한 경공 왕부는 매우 분주한 상태였다.
“현재 청해와 운남에 주둔 중이던 좌군도독부 예하 병력들이 이동을 시작했고, 자공에 대기 중이던 지휘사 친병 부대와 사천성 향방군을 흥문으로 이동 배치했습니다.”
좌군도독인 허량의 보고에 경공왕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신강과 청해에 주둔 중인 병력은 결국 빼낼 수 없는 게요?”
“예, 왕야. 서장의 토번족과 신강의 서하족이 보이는 불온한 움직임 때문에 해당 병력의 이동은 아무래도 불가능할 듯싶습니다.”
계속된 허량 도독의 보고에 경공왕의 표정엔 걱정이 가득해졌다.
“두 지역 다 자치권이 허용되어 있건만, 무슨 불만인지…….”
나라를 빼앗긴 이들의 마음을 전혀 생각지 않는 편협적인 사고에서 나온 말이었지만, 다른 이들은 감히 그것을 지적하지 못했다.
그런 측근들을 바라보며 경공왕이 말을 이었다.
“그렇게 되면 사만의 군세가 묶인 셈인데, 괜찮겠소?”
“솔직히 말씀드려 뼈아픈 손실입니다. 우리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총 십오만인 상황에서 사만의, 그것도 정예병인 중앙군의 누수는 치명적입니다.”
허량의 말대로다. 좌군도독부, 다시 말해 경공 왕부의 관할 지역인 사천, 신강, 서장, 청해, 그리고 운남 중에 사천을 제외한 모든 지역은 자치 지구였다.
때문에 해당 지역들은 포정사사나 도지휘사사는 물론이고, 형옥 기관인 안찰사사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존재하지 않으니 당연히 끌어올 병력이 없다. 상비군인 향방군은 둘째 치고, 징병조차 불가능한 것이다.
그 탓에 경공왕의 표정엔 걱정과 근심이 가득할 수밖에 없었다.
“하면 어찌해야 좋겠소?”
“우선은 징병을 하여야 합니다.”
허량 도독의 말에 왕부 총관이 입을 열었다.
“징집이라 봐야 사천에서밖에 할 수 없질 않습니까? 결코 많은 병력을 모으긴 어려울 것입니다. 더구나 훈련 한번 받지 않은 민초들입니다. 전투력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왕부 총관의 걱정에 허량은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래도 해야만 하오. 우리에겐 그렇게 모인 몇만의 병력이라도 반드시 필요하니 말이오.”
“그건 허 도독의 말이 옳아. 병력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니까. 총관은 사천 승선포정사사와 협조하여 즉시 징집을 실시하게. 사내 중에 이삼십대 모조리 끌어내 봐.”
“십호제(十戶制)가 아니옵니까?”
놀란 총관의 물음에 경공왕이 단호한 음성으로 명했다.
“십호제로 징집을 해봐야 얼마나 되겠나? 전원 징집이야. 이삼십대의 사내는 전부 징집해!”
십호제란 열 가구의 집에서 한 명의 사내만 징집되는 것을 말한다.
주변 이민족들과의 전쟁은 물론이고, 중원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 수시로 일어나던 중원 국가들의 특성상 그렇게 함으로써 백성들이 짊어질 군역의 부담을 낮추고 원성도 줄여 왔던 것이다.
“반발이 나올 것입니다.”
총관의 걱정에 경공왕의 고함이 터져 나왔다.
“이번 전쟁에서 지면 어찌 되는 줄 몰라서 그따위 한가한 소리나 하고 있나? 반발? 감히 왕명에 반발하면 어찌 되는지 보여 주면 될 것이 아닌가!”
경공왕의 분노에 당황한 총관이 급히 고개를 조아리자 허량이 나섰다.
“고정하시지요, 왕야. 총관도 걱정이 되어 한 말일 겁니다. 아니 그렇소? 하 총관.”
“마, 맞습니다. 걱정만 하다 보니 숲은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본 모양이옵니다. 용서하시옵소서, 왕야.”
총관의 사죄에 경공왕의 음성이 누그러졌다.
“내 총관의 걱정을 모르는 것은 아닐세. 하나, 이번 전쟁의 결과에 따라 왕부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기에 모든 방법을 동원하려는 것이니 총관은 내 뜻에 따르게.”
“명을 따르겠사옵니다, 왕야.”
왕부 총관이 허리를 접고 물러나자 경공왕의 시선이 허량에게 향했다.
“어떻소? 이리하면 막아낼 수는 있겠소?”
“안창이 이끄는 반군의 병력은 대략 이십만 정도로 예측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동원 가능한 병력은 좌군도독부 육만과 사천 향방군 오만, 거기에 왕야의 결단에 따라 사천에서 징집될 십여만가량의 병력이 포함될 것입니다.”
“하면 이십만을 훌쩍 넘기는 수가 아닌가? 충분하겠군.”
한층 밝아진 경공왕의 표정을 바라보며 허량은 다소 미안한 음색으로 답했다.
“물론 동원되는 수로는 그러합니다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니, 그 무슨 소리인 게요?”
경공왕의 물음에 허량이 설명을 이었다.
“우선 병력의 질은 엇비슷합니다. 우리가 중앙군인 좌군도독부와 사천성 향방군을 주력으로 한다면 그들은 광서성 향방군과 지원군을 중심으로 하니 말입니다.”
“아니, 그런데 어찌 질이 비슷하다 말하는 게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경공왕에게 허량이 답했다.
“실전 경험 때문입니다. 저들은 이미 금사 왕부와의 결전 등으로 인해 충분한 실전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구나 승리한 실전이었으니 사기도 높을 것이고 말입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나 정예군인 좌군도독부의 병력과 비슷한 능력이라니, 믿기 어렵구려.”
“솔직히 좌군도독부 병력만으로 대상을 한정한다면 분명히 병사들의 훈련 정도와 능력 면에선 우리 쪽이 유리합니다. 하지만 이제 곧 동원될 징집 병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과 합쳐지면 병력은 늘어나나, 전체적인 군의 작전 능력 저하를 막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던 경공왕이 물었다.
“하면, 훈련을 시키면……?”
“시간이 허락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무엇보다 큰 적은 바로 시간이니 말입니다.”
“시간?”
“예. 사실 흥문에 나간 병력은 시간 벌기용입니다. 저들과 대치하여 진군을 저지하고, 우리가 원하는 시간까지 저들을 잡아놓기 위한 일종의 기만책입니다.”
“아니, 그 무슨 말이오? 흥문에 나가 있는 병력이라면 지휘사 친병들과 사천 향방군이 아니오?”
“맞습니다.”
“그들이라면 우리의 주력이 아니외까? 그런 이들을 어찌 기만 병력이라 말한단 말이오?”
“기만 병력이기는 해도 버리는 패는 아닙니다. 왕야의 말씀대로 그들은 우리의 주력군이기 때문에 버릴 수도 없습니다.”
“하면, 도독의 뜻은 무엇인 게요?”
“이미 말씀드린 대로 그들로 하여금 적의 발길을 붙잡는 것입니다. 그것도 가능한 한 전투를 피하면서 말입니다.”
허량의 말에 경공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어찌 그래야 하는 것이오?”
“청해와 운남에서 이동해오고 있는 좌군도독부의 병력은 물론이고, 사천에서 징집될 병력이 전선에 도착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입니다.”
“아!”
경공왕의 입에서 탄성이 절로 터졌다. 자신들의 병력이 뿔뿔이 흩어져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기억해낸 탓이었다.
“이제 도독의 말뜻을 이해했소. 그들의 책임이 막중하구려.”
“맞습니다, 왕야. 만에 하나 다른 병력들이 도착하기 전에 대규모 회전이 벌어지거나 돌파라도 당한다면 뒤는 막아낼 수 없을 것입니다.”
“흠… 나 지휘사.”
경공왕의 부름에 왕부 장군부의 최고 지휘관인 나부렴이 고개를 숙였다.
“예, 왕야.”
“즉시 왕부군을 이끌고 흥문으로 가라. 가서 내 의지가 그들과 함께함을 알려라.”
지금 같은 시기에 왕부군을 빼낸다는 것은 상당한 모험이다. 적의 기습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에 대한 걱정이 나부렴의 입에서 나왔다.
“왕야의 뜻은 아오나 혹여 불온한 무리들의 오판이라도 불러오지 않을까 걱정이옵니다.”
“왕부군이 출발하면 나는 왕부를 비우고 성도로 들어갈 것이다.”
“와, 왕야!”
놀라는 중인들을 바라보며 경공왕이 단호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왕부군도 정예 중의 정예다. 일만이나 하는 그 병력을 나 때문에 묶어둘 순 없다. 나와 왕실의 신변이라면 성도의 포정사로 들어가면 그곳에 배치된 안찰사사의 병력이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니 문제가 될 것도 없다.”
다들 놀라서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는 가운데 감복한 표정의 허량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
“왕야의 결단에 모든 군병이 감복해 마지않을 것입니다.”
“감복보다는 승리가 필요하오, 도독.”
“소장, 기필코 승리를 왕야께 받칠 것입니다.”
“내 도독과 제하 장수들을 믿겠소.”
경공왕의 말에 자리에 있던 장수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충!”
* * *
경공왕의 결단에 일만의 왕부군이 대읍을 떠나 흥문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그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일단의 병력이 흥문이 아닌 동북쪽의 광안을 뚫고 들어왔다.
대부분의 향방군이 동원된 탓에 도시의 경비와 치안을 함께 떠맡게 된 광안현 안찰지사의 포쾌들과 정용들은 노도처럼 밀어닥친 안창의 반군에 의해 반 시진 만에 전멸당하고 말았다.
그 탓에 광안이 적의 수중에 떨어진 것을 경공왕을 비롯한 수뇌부들이 알게 된 것은 광안보다 내륙에 위치한 수녕이 공격을 받은 다음이었다.
급보를 받은 경공 왕부의 수뇌부는 흥문으로 향하던 왕부군 일만을 급히 수녕을 향해 이동시켰다.
그런 상황에서 왕부와 함께 성도로 들어온 군 지휘소에선 허량 도독을 포함한 고위 장수들이 작전을 숙의하고 있었다.
“적이 별동 부대를 운영하는 모양입니다.”
걱정스런 표정인 수하 장수의 말에 허량 도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런 듯하군. 수녕이면 성도까진 얼마나 걸리지?”
“말로 뛰면 사흘이면 도착합니다.”
“가깝군. 현재 징집된 병력의 규모는?”
허량의 물음에 사천성 포정사사에서 파견 나온 문관이 답했다.
“현재까지 이만 정도가 모였습니다, 대인.”
“그들은 어디에 두었나?”
“모두 사천 도지휘사사에 인계하였습니다, 대인.”
문관의 답에 허량의 시선이 사천 도지휘사사에서 유일하게 남은 고위 지휘관을 향했다.
“현재 향방군 훈련소에서 훈련을 진행 중입니다. 이틀 동안 반드시 필요한 창술과 검술, 그리고 궁술의 기본기만 익힌 연후, 보급을 마치고 흥문으로 출병할 예정이었습니다.”
지휘첨사, 곤무령의 답에 허량이 물었다.
“훈련에 돌입한 지 얼마나 되었소?”
“일만은 오늘 훈련이 끝납니다만, 일만은 오늘 입소하였습니다.”
“그들을 모두 수녕으로 보내시오.”
“모두 말입니까?”
“그렇소.”
“하나, 오늘 입소한 일만은 전장에서 창을 어찌 써야 하는지도 모르는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훈련은 가면서 시키면 될 것이오. 지금은 시간과의 싸움이니 할 수 없소. 하니 내 명에 따르시오.”
허량의 말에 곤무령은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명에 따릅니다, 도독.”
직후, 이만에 이르는 병사들이 성도를 떠나 수녕으로 향했다.
하지만 흐트러진 군열이나 잔뜩 겁먹은 표정들로 보아 제대로 된 병력이라 말할 수는 없어 보였다.
그런 상황 속에서 또 다른 급보가 지휘소에 도착했다.
“급보입니다!”
한 젊은 장수가 급히 가지고 온 서찰을 읽은 허량의 표정이 심하게 구겨졌다.
그에 곤무령이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도독.”
“운남에서 이동해오던 좌군도독부 병력이 적과 전투 중이라 하오.”
말과 함께 넘겨준 서찰엔 사천과 운남의 접경 지역에서 가까운 선위 지역을 통과하던 중에 수를 알 수 없는 적과 조우하여 전투 중이라는 짤막한 글뿐이었다.
“선위라면…….”
곤무령의 시선이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지도로 향하자 좌중의 장수들 모두의 시선이 그 지도로 향했다.
“이곳이군요. 흠… 이곳이면 귀주와의 접경 지역과도 가깝군요.”
곤무령의 말대로 선위는 사천과도 가까웠지만, 귀주와도 매우 가까운 지역이었다.
“아무래도 별동대가 한 개 이상인 모양이외다.”
허량의 말에 장수들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흥문으로 다가오는 적 병력들과 별도로 움직이는 군세가 벌써 두 개째 확인된 까닭이었다.
“혹시 별도의 군세가 또 다른 지역으로 돌출하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곤무령의 걱정에 허량의 눈이 지도를 훑었다. 그의 말을 무시할 수 없는 작금의 상황 탓이었다.
그렇게 지도를 살피던 허량의 시선이 한 곳에 멈춰 섰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허량의 명령이 수하 장수들에게 내려졌다.
“이곳, 내강의 관청과 연락을 취해보라.”
“그곳은 어찌……?”
한 수하 장수의 물음에 허량의 호통이 떨어졌다.
“군령에 어찌 반문을 다는가? 즉시 실행하라.”
“예, 예! 도독.”
기겁을 한 그 장수가 밖으로 뛰어나가자 곤무령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그곳을 걱정하시는 것입니까?”
“적의 별동대가 이곳 광안으로 튀어나와 수녕에 다다랐네. 그런 상황에서 흥문으로 다가오는 군세들 중 하나가 내강 쪽으로 돌출하지 말라는 법도 없겠지.”
안창의 반군들이 집결되지 않은 채 움직여 오는 까닭에 벌어지는 난맥상이다.
저들의 진군로를 확실히 예측하지 못하는 것이다. 오긴 오는데 어디로 올지 감을 잡지 못한다는 것은 방어자의 입장에서 대단히 치명적인 약점이 되고 있었다.
* * *
허량이 걱정하던 내강의 관청에 일단의 군병들이 시체들을 정돈하고 있었다.
푸드드득.
그 사이로 들어서는 비둘기를 발견한 한 병사가 그것을 잡아 지휘관에게 가져다 바쳤다. 다리에 빨간색 전통이 메어져 있는 것이 목격된 까닭이었다.
비둘기 다리에 메어진 전통에서 돌돌 말린 작은 쪽지를 꺼낸 지휘 장수는 그것을 잠시 바라보다가는 고개를 저어버렸다.
“도무지 뭐라고 쓴 건지 모르겠군. 이봐, 포로로 잡힌 이들 중에서 전서를 담당하는 관리가 있는지 알아보게.”
지휘 장수의 물음에 하급 군관들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잠시 후, 포박된 중년의 사내가 끌려 나오자 그와 몇 마디를 나눈 지휘 장수가 이내 장군들이 머무는 안찰지사로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