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67장 (68/129)

제67장. 구출(救出)-균사 왕부를 멸하다

문을 부수고 균사왕의 침전으로 뛰어든 고덕의 시선에 잡힌 것은 거대한 침상 한편에 다리를 꼬고 앉아 여성일 때 호철랑의 음성을 흉내 내고 있는 여인이었다.

그 여인을 바라보는 고덕의 눈빛엔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그런 고덕의 앞에 앉아 있는 여인은 외모로는 이제 이십대 후반. 하지만 뭉클거리며 흘러나오는 기세는 결코 그런 나이 대에는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결국 고덕의 조심성이 모자랐던 것이다. 그가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다면 충분히 알아차렸을 수 있을 만큼 확연한 기세를 품고 있었는데 말이다.

자신의 실수를 뒤늦게 알아차린 고덕이 낮게 혀를 차며 뒤를 돌아보니, 곧 쫓아 들어올 줄 알았던 군병들은 온데간데없고 대신 온통 야행복으로 감싼 정체불명의 무인 수백이 몰려들어 있었다.

“한 방 먹었군.”

고덕의 감상평에 여인이 배시시 웃었다.

“망설이기에 미끼를 던져 보았는데, 예상외로 효과가 좋군요.”

“인정하지. 내가 미련했다.”

“포기가 빠르시군요?”

“포기? 난 그런 거 몰라.”

“그럼 실수에 대한 인정인가요?”

여인의 물음에 고덕이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뭐, 그렇다고 해두지.”

“살황과 북황이 모두 잡아먹혔다기에 얼마나 뛰어난지 궁금했는데, 실제로 보니 그다지 대단해 보이지도 않는군요.”

여인의 말에 잠시 눈썹을 꿈틀거렸던 고덕이 담담히 답했다.

“실망했나?”

“조금은요.”

“미안하군. 실망시켜서 말이야.”

“아니에요. 어차피 대가는 치를 테니까요.”

“그렇게 하지. 원하는 방향일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고덕의 말에 박속같이 하얀 치아를 드러내고 웃은 여인이 자신의 옆자리를 두드리며 물었다.

“이리 와서 앉지 않겠어요? 잠시 좋은 시간을 보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말이에요.”

“고맙지만 거절하지. 요새 수절 중이어서 말이야.”

천연덕스러운 고덕의 말에 여인은 뭐가 그리 웃긴지 크게 웃었다.

“호호호, 남자도 수절을 하나요?”

“그럼, 남겨진 정이 크니 달리 어쩌겠나.”

“그 말을 들으니 더 구미가 당기는군요. 이리와 봐요. 다른 이에게선 느껴 본 적이 없는 환상을 선물해줄 테니…….”

혀로 입술을 축이며 교태를 부리는 여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고덕이 말했다.

“요새 삼천은 창녀도 키우나 보지?”

상대를 도발하는 말이었지만, 여인은 오히려 배시시 웃어 보였을 뿐이었다.

“창녀면 어때요. 더 깊은 것을, 더 많이 알고 있으니 남자에겐 나쁠 게 없지 않을까요?”

“수치심도 없군.”

“호호호, 수치심은 아무것도 주는 게 없답니다. 오히려 인내가 달콤한 열매를 맺는 법이지요.”

여인은 여전히 미소가 가득한 얼굴로 고덕의 말을 받아주고 있었다.

결국 자신의 어떤 도발도 소용없다고 판단한 고덕이 여인의 옆에 가서 앉았다.

풀석-

갑작스런 고덕의 행동에 여인은 꽤나 놀란 표정이었다.

“정말 앉는군요.”

“왜? 마음에 없는 이야기였나?”

고덕의 말에 여인은 언제 놀랐나 싶게 고혹적인 표정으로 그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그럴 리가요. 저는 남자에게 운우의 정으로 거짓을 말하지 않는답니다.”

천천히 어깨에 머리를 기대오는 여인을 지그시 내려다보던 고덕이 말했다.

“기억력은 여전히 좋지 못한가 봐?”

갑작스런 고덕의 말에 여인은 기대가던 머리를 들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날 아는군요.”

“그럼. 네가 날 모르는 게 더 이상한 거지.”

그 말에 여인은 한참 동안 기억을 되살려 보려고 노력했지만, 소득이 없었던지 결국 고개를 저어버렸다.

“도저히 모르겠군요. 당신 같은 사람을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는데 말이죠.”

“그건 아마 나 따윈 기억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거야.”

고덕의 말에 여인은 다소 걱정스런 표정으로 답했다.

“그 말은 지금보다 훨씬 형편없을 때 나를 만났다는 말이겠군요.”

“그랬지. 그땐 겨우 막 입교했을 때였으니까.”

그 말을 들은 여인의 표정에 놀람이 깃들었다.

“교도군요.”

“날 몰랐나? 적어도 내 무명 정도는 알리고 보냈을 줄 알았는데?”

그 물음에 여인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저 살황과 북황이 잡아먹혔다고……. 거둘 수 있으면 거두고 아니면 멸하란 요구를 받았을 뿐이에요.”

“크크크, 하긴 홍염수라에게 천마신교의 부교주였던 자를 죽이라고 할 순 없었겠지.”

고덕의 말에 여인의 눈이 크게 뜨였다.

하지만 지금 거론된 말을 다른 이들이 들었다면 홍염수라라 불린 여인의 놀람은 아무것도 아닐 터였다.

그만큼 홍염수라란 이름이 주는 충격은 대단히 커다란 것이었다.

혈세천하, 유희살녀, 천상도희, 수라마녀 등등 홍염수라란 무명 외에도 별명이 수십 가지나 되는 전대의 고수다.

그녀는 강호 역사상 가장 강력한 여고수로 이름을 남기고 있었고, 그 탓에 강호의 모든 여고수들은 그녀의 강함을 목표로 삼기도 한다.

한때 철혈의 대지라 불리는 마교에서 자신의 무력만으로 부교주의 자리를 차지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 그대가 검… 마!”

“뭐, 사람들은 그리 부르기도 하지. 하지만 네겐 고덕이란 이름이 더 기억하기 좋지 않을까? 아닌가? 서영.”

고덕의 부름에 홍염수라의 얼굴은 마치 호수 위의 잔물결처럼 푸들거렸다.

“서, 설마… 마, 말도 안 돼…….”

“맞아,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난 거야. 네가 날 밀어버린 절벽 아래에 정말로 마총이 있었으니까.”

고덕의 말에 홍염수라의 표정엔 경악이 가득했다. 그런 그녀의 얼굴 가까이 고개를 들이민 고덕이 낮은 음성으로 뇌까렸다.

“자, 그러니 이제 선택해봐. 마총의 무학을 견식할 건지, 아니면 조용히 돌아갈 건지.”

“보내주겠다고요? 당신을 죽이려 했던 날?”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의 홍염수라에게 고덕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 원인은 어쨌건 간에 너는 내게 사문관의 연을 맺어준 사람이니까. 네가 날 죽이려 절벽에서 밀어버린 건 그것과 상쇄되었다고 생각해왔다.”

솔직히 처음엔 그렇지 않았다.

천운으로 절벽의 중간에 솟아오른 나무에 걸린 덕에 살아나 천신만고 끝에 마총에 들고, 그곳에서 사문의 무공을 배우기 시작할 때만 해도 나가기만 하면 제일 먼저 목을 비틀어버릴 것이라 다짐했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경지가 넘어가면서 그 생각은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녀가 자신을 절벽에서 밀어버릴 수밖에 없던 나름의 사정을 이해하기로 했던 탓이었다.

물론 그것이 옳은 일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녀의 입장에서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일 뿐…….

“믿기지 않는군요.”

“원래 세상은 믿기지 않는 일투성이더군.”

고덕의 말에 홍염수라는 복잡한 신색이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홍염수라가 말문을 열었다.

“감히 마총의 무학을 견식할 간담은 없어요. 하지만 내가 돌아간다고 해서 저 밖에 있는 아이들도 돌아가리란 생각은 할 수 없군요.”

“그건 상관없어. 네가 있어도, 저들이 남아도 내겐 상관없으니까.”

지독한 자신감이었지만, 홍염수라는 감히 그것을 책잡을 수 없었다.

천마신교에서 내려오는 마총의 전설이 그것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삼천의 추적은 더욱 무서워질 거예요.”

“상관없어.”

고덕의 답에 홍염수라의 고개가 저어졌다.

“살황과 북황만 보고 말하는 거라면 오판이라고 말해줄게요. 삼천엔 그 둘을 동시에 상대할 수 있는 이들이 적어도 셋은 있으니까요.”

다소 충격적인 말이었지만, 그 말에 겁먹을 생각 따윈 없었다.

고덕의 입장에서 그놈들은 목을 비틀고, 산 채로 팔다리를 잡아 뽑아 죽여야 할 놈들이었으니 말이다.

“나쁘지 않군.”

전혀 개의치 않는 고덕의 반응을 홍염수라는 다르게 해석했던 모양이다.

“내 말을 안 믿는군요.”

“믿어. 언제나 네 말은 믿었듯이.”

고덕의 그 말에 홍염수라의 표정엔 아픔이 스쳐 지나갔다.

“변명이겠지만… 나도 어쩔 수 없었어요. 사부의 눈에 들자면 당신은 장… 애물일 뿐이었으니까요.”

그녀의 사부는 마교의 전전대 고수였던 적환음마(赤幻淫魔)였다.

당시의 강호십대고수에 들 정도로 뛰어난 무위를 가졌던 적환음마였지만, 그는 백도에겐 뼈째 통째로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천인공노할 마두였다.

그에게 강제로 몸을 버린 백도의 여식만 백을 넘겼고, 그 과정에서 정혈을 갈취당한 백도의 여고수만 해도 기십을 넘겼다.

개중에는 청성의 여도사와 아미의 비구니가 포함되어 있을 정도였으니, 백도가 그에게 갖는 증오가 어떠했을지는 쉽게 짐작하고도 남을 터였다.

그런 적환음마가 말년에 들인 제자가 바로 홍염수라다. 말이 제자이지, 실제로는 잠자리 상대였다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었으니 둘 사이의 일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에게 선택되기 위해 홍염수라, 아니 천마신교의 하급 여무사 서영이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약혼자를 악명이 자자한 마교 내의 절벽에서 밀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이해한다.”

그 말에 홍염수라는 복잡한 시선으로 고덕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으며 고덕이 말을 이었다.

“그때 내가 사랑했던 것이 네가 아니라 네 몸뚱이였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듯이 말이다.”

지독히 모욕적인 말이었지만 홍염수라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적어도 그녀가 기억하는, 아니 기억 저편에 묻어버린 고덕이 자신에게 갖고 있던 마음이 진실이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이다.

“화가 나 있군요. 아직도…….”

홍염수라의 말에 고덕의 눈이 잠시 흔들렸다. 그런 고덕의 눈을 바라보며 홍염수라가 말을 이었다.

“그 말은 나를 여전히 마음에 두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그 말에 고덕의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걸렸다. 잠시 과거의 기억에서 아련함이 흘러나왔었지만,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는 말엔 절로 실소가 나왔던 것이다.

그의 마음속엔 자신의 짜증에 사랑한다고 말해주던, 참기 힘들었을 고통 속에서 예쁜 미소만을 지어주던, 그리고 속절없이 불 속에서 타오르던 그녀, 연화의 모습만이 남아 있던 때문이었다.

그런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 떠오르자 고덕의 신형에서 절로 짙은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개소리는 하지 마라!”

갑작스럽게 변해버린 고덕의 기세에 홍염수라는 적잖이 당황했다.

더구나 그에게서 뿜어지는 살기는 살수의 제왕이라던 살황의 것보다 훨씬 농도가 짙고 깊어 현경의 마지막에 발을 딛고 있던 그녀마저 절로 몸이 떨릴 지경이었던 것이다.

“실… 언을 한 모양이군요.”

“시답지 않은 소리는 그만하고 결정해라. 돌아갈지, 내 검을 받을지.”

위협을 하고는 있었지만 고덕은 솔직히 승기를 장담할 수는 없었다.

상대의 강함을 알아서가 아니다. 그거라면 어느 정도 자신은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력의 수발이 원활하던 북황과의 결투 이전의 이야기다.

지금은 내력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었다.

어지간한 고수라면 모를까, 현경에 발을 디딘 고수를 상대로 그런 상태로 싸움을 건다는 건 솔직히 미친 짓이었다.

그 생각이 밖으로 새어나가기라도 했던 것일까? 고덕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던 홍염수라가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무언가 문제가 있군요.”

“뭔 개소리야?”

“당신 눈, 흔들려요. 설마 내가 배운 무공의 특색을 잊은 건 아니겠지요?”

적환마공. 그녀의 사부, 적환음마를 탄생시킨 마공이다. 그 마공의 공능 중엔 상대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절기가 있었다.

적환음마는 그것을 여인을 속여 넘기는 재주로 이용했지만, 원래는 상대의 움직임을 먼저 파악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었다.

홍염수라는 지금 그것으로 고덕의 불안감을 엿본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군.”

“사람은 변하지 않아요. 그걸 몰랐던 모양이군요.”

입가를 차지한 미소가 점점 짙어져 가는 홍염수라의 모습에 고덕은 천천히 혈문들을 풀어나갔다.

자신의 의지를 거부한 채 혈맥 안에서 미친 듯이 발광해대는 빌어먹을 내기를 밖으로 뿜어내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게 풀어져 간 혈문들이 모조리 열리고 그길로 미친 듯이 질주하던 내기가 뛰쳐나가는 순간, 수강에 뒤덮인 홍염수라의 좌수가 고덕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쾅-!

폭음이 울리고 전각이 통째로 주저앉았다.

전각이 주저앉으며 일어난 먼지를 뚫고 날아오른 두 인형은 대조적이었다.

고덕의 옆구리는 피에 젖어 있었지만 그뿐, 별다른 외상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마주 내려서는 홍염수라의 전신은 피로 목욕을 한 듯 피투성이로 변해 있었다.

“쿨럭-”

기침과 함께 뿜어진 피가 이미 피로 물든 홍염수라의 앞섶을 완전히 적셨다.

“이게 마총의 무공인가요?”

“글쎄, 아직은 정체가 모호하지.”

고덕의 답을 들은 홍염수라의 피에 젖은 입가로 미소가 그려졌다.

“여하간 과거의 정은 깨끗이 끊을 수 있겠군요.”

“끊어지긴 하겠지. 네가 죽음으로써.”

고덕의 말에 홍염수라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글쎄요. 당신의 내기, 강력하긴 하지만 어색하더군요. 마치 남의 옷을 입은 듯이 말이에요. 그런 느낌은 내가 가장 잘 알지요.”

흡정 이후 느껴지는 기분이 바로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비약적으로 늘어난 내기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흡정 직후의 상황이 그러했으니까.

그것이 홍염수라가 고덕의 상황을 정확히 짚어내는 이유였다.

홍염수라의 말을 고덕은 받아치지 못했다. 그녀가 무엇을 말하는지 충분히 짐작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고덕의 반응에 더욱 자신감이 붙었는지, 수강을 일으킨 홍염수라의 신형이 순간적으로 덮쳐 왔다.

그녀의 이동에 잠시 아픔이 스쳐 지나가는 표정을 지었던 고덕의 손이 명혼을 뽑아 올렸다.

쎄에에액-

아래에서 치고 올라오는 반달형 검강에 놀란 홍염수라의 신형이 순간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렇게 멈춰버린 홍염수라의 주변으로 노란 달무리가 어리던 순간, 공간을 뚫고 나타난 고덕의 장심이 홍염수라의 가슴에 붙었다.

투황-!

가죽 북 터져 나가는 소리가 울리고, 가슴어림이 뻥 뚫린 채 완전히 날아간 홍염수라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사, 살황의 현월과 부, 부… 황의 고, 공간권이 어떻게……?”

“현월에 당한 북황도 그걸 묻더군.”

“다, 답은……?”

“내가 눈이 좋아서라고 했지.”

답하는 고덕의 눈에 차 있는 자신감을 읽은 홍염수라는 그것이 어디에서 나오는 자신감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마, 마… 총…….”

“그래, 세상 모든 마공은 그곳에서 출발하니까. 네가 익힌 적환마공까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홍염수라의 몸이 떨려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의 상황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차린 홍염수라의 얼굴에 경악과 두려움이 떠올랐다.

“아, 안 돼~!”

그녀의 비명이 터져 나옴과 함께 강력한 기운이 고덕의 장심으로 흘러들었다.

공명(共鳴). 뿌리가 같은 무공을 만나면 자연히 깨어날 것이니 그 수련법을 일러 공명이라 하노라.

사문의 비처, 마총에서 얻은 수련법에 적힌 글귀였다.

그것이 고덕의 비밀이었다. 세상 모든 마공은 고덕과 충돌하면서 그에게 각인된다. 그것도 본류가 깨어나는 것이다.

그것이 고덕의 손에서 현월이 튀어나온 이유였고, 공간권이 무리 없이 펼쳐지는 원인이었다.

그리고 적환마공에서 비롯된 흡정의 현상이 일어나는 것도 그것에서 연유되는 것이었다.

그간의 경험으로 최초의 공명은 멈출 수 없었다. 그 과정으로 상대의 마공이 각인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홍염수라의 몸뚱이가 먼지가 되어 흩날리고서야 흡정은 끝이 났다.

우습게도 현경에 이를 정도로 막대한 진기가 흡수되었건만, 고덕의 혈맥을 치닫는 내기 안으로 말려들어간 홍염수라의 진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마치 망망대해에 작은 강줄기가 더해진 것처럼 말이다.

창졸간에 홍염수라가 먼지가 되어 흩날리자 전각을 둘러싼 채 대기하고 있던 야행복 차림의 무인들이 몰려들었다.

수십이 달려들었지만 그 흔한 함성이나 고함 한 번 없었다.

먹물이 물에 번지듯 소리 없이 밀려든 야행복 차림의 무인들은 일제히 고덕을 향해 검을 뻗어냈다.

* * *

고덕이 균사 왕부에서 홍염수라 등과 충돌하고 있던 시기, 합비 시내에 위치한 일풍 객잔에선 몇몇 사내들이 호철랑과 둘러앉아 있었다.

“저희가 모을 수 있는 사람의 수는 이백이 조금 넘습니다. 모두 일반 병사들보다는 확실히 뛰어난 이들입니다.”

최 표두의 말에 호철랑이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과 일일이 눈을 맞췄다.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은 채 과거의 인연을 잊지 않고 달려와준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바라본 호철랑이 물기 어린 음성을 토했다.

“이 은혜는 죽어서도 갚지 못할 거예요.”

“그런 말씀 마십시오, 아가씨. 저희 모두 다 절제사 대인께는 목숨의 빚을 진 이들입니다. 이미 오래전에 죽었어야 할 목숨입니다. 절제사 대인께 그 목숨을 돌려드리는 일이니 오히려 저희에겐 보람입니다.”

최 표두의 말에 자리에 앉아 있던 사내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인다. 같은 뜻이라는 의미다.

그들의 모습에 습막이 차올라 있던 호철랑의 눈에서 기어코 눈물이 흘러내렸다.

호철랑이 이렇듯 고마워하는 것은 이들이 미끼가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균사 왕부의 이목을 돌려놓고, 그사이에 호철랑이 불러들인 인사가 부친을 빼내는 것이 그녀의 계획이었다.

물론 그 계획을 최 표두를 비롯한 이들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일체의 머뭇거림이 없는 그들의 모습에 호철랑은 눈물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잠시 후 계획을 다시 한 번 점검한 그들이 예전의 수하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이동한 직후, 한 사람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신의가 깊은 이들이군요.”

“어서 오세요, 묵 대협.”

호철랑이 반갑게 맞는 이는 창군 묵린이었다.

그는 호경명의 실종 이후 길림에서 대기하다 호철랑의 연통을 받고 전력을 다해 달려왔던 것이다.

“그나저나 호 판관의 여장은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는군요.”

여장 상태의 호철랑을 처음 본 묵린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놀랐었다.

강호의 절정 고수인 자신이 낌새조차 못 챘다는 것이 그는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보기 안 좋은가요?”

“아, 아닙니다. 무슨 당치 않은 말씀을……. 이전보다 훨씬 좋습니다만, 제가 알고 있던 호 판관의 모습이랑은…….”

잘 웃고, 잘 떠들고, 거기에 술을 먹고 음정박자 틀려가며 노래를 불러 젖히던 모습이 그의 기억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짐작한 호철랑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그것도, 이것도 다 제 모습이랍니다.”

모습을 바꾸었을 뿐 사람을 가식으로 대하지 않았다는 항변인 셈이었다.

“그렇군요. 여하간 솔직히 지금 모습이 더 좋은 것은 사실이랍니다.”

창군의 말에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인 호철랑이 말을 이었다.

“일단 밖에서 들으셨다시피 저들이 미끼 역할을 해줄 거예요.”

“저들이 눈길만 확실하게 잡아둘 수 있다면 도총사는 반드시 구출할 수 있습니다.”

그가 알기에 제하이십사강 이상의 강자가 균사 왕부에 들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혹시나 싶어서 호철랑의 의중을 듣고선 곧바로 추가 조사를 벌여 보았지만, 역시 그 정도의 고수는 균사 왕부에 없었다.

그것이 묵린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주고 있었다.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호철랑의 말에 묵린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말씀하시지요.”

“반 시진 이내에 아버지를 발견하지 못하시거나, 혹… 신변에 문제가 생겼을 때는 과감히 아버지를 포기하고 왕부를 벗어나셔야 합니다.”

“반드시 구출할 수 있을 터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호 판관.”

묵린의 말에 고개를 저은 호철랑이 말을 이었다.

“그것이 두려워서 하는 말이 아니에요. 상황이 그리되면 어려우셔도 미끼가 되어 있는 분들을 도와 탈출해주십사 하는 것이에요.”

그제야 호철랑의 의중을 알아들은 묵린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만에 하나 그런 상황이라면 최선을 다해 그들을 구출하지요.”

“무거운 짐만 지워드려 죄송해요.”

“아닙니다. 도총사부에 몸을 의탁한 순간 이미 각오한 일들입니다.”

묵린의 답에 호철랑은 그저 고개를 숙여 보일 뿐이었다.

약속한 시간이 되어 묵린마저 나가자 홀로 남은 호철랑은 이내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녀의 숙소를 나서는 것은 소흥 왕부의 지낭 호 판관이었다.

* * *

오십여 명에 이르는 야행복 무리를 모조리 격살시킨 고덕은 거의 무아지경에 빠져 있었다.

홍염수라를 척살하며 시작된 적환마공의 공명이 좀처럼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탓에 오십여 명의 야행복 무리는 정혈을 모조리 빨리고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그뿐이 아니다. 통제가 되지 않는 내공과 합쳐진 적환마공의 공능은 이내 몰려든 일반 군병의 정혈까지 무차별로 빨아들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 상황은 고덕의 판단 착오에서 비롯되었다.

홍염수라의 내공을 모조리 흡수한 자신의 내공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야행복 무리를 상대하며 자신의 내공을 폭출시킨 탓이었다.

솔직히 그들을 상대하면서 내기를 일제히 폭출시키는 방법은 사용하지 않아도 되었을 터였다.

하지만 지난 기억의 편린이 그의 잊힌 아픔을 건드린 탓인지, 빨리 적을 소멸시키고자 했던 고덕이 내기의 폭출을 택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반향은 고덕으로서는 생각도 해보지 못했을 만큼 강력한 후폭풍을 동반했다.

고덕의 내력과 합쳐진 홍염수라의 내력 탓인지 아니면 공명의 여파 때문인지, 터져 나간 내기가 주변의 야행복 무리를 후려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정혈을 빨아들여 버렸던 것이다.

안개와 같이 퍼져 나간 고덕의 내력에 휩싸인 채 정혈을 모조리 빨려 먼지로 부서져 나가는 장면은 마치 요괴 이야기에나 등장하는 모습 같았다.

그렇게 순식간에 오십여 명의 야행복 무리를 먼지로 만들어버린 고덕은 또 다른 난관에 부딪혔다.

되돌아온 내력의 양이 이전의 배를 훨씬 상회했던 것이다.

내기들은 미친 듯이 소용돌이쳤고, 혈맥들은 그 소용돌이에 강제로 넓어지며 아우성을 쳤다.

간혹 가다간 그 강력한 힘을 이기지 못해 찢겨 나가는 혈맥이 있을 정도였으니, 고덕의 상황이 얼마나 위험했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그런 위험에서 고덕을 구해준 것은 우습게도 뒤늦게 밀어닥친 균사 왕부의 군병들이었다.

수백, 수천이 밀어닥치는 상황에서 고덕의 내력은 다시금 폭출되었다.

이번의 폭출은 고덕이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또 다른 정혈을 찾아 내력이 뛰쳐나갔던 것이다.

그 결과는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수백의 군병이 순식간에 먼지가 되어 휘날렸다. 그 괴기스러운 장면을 목격한 군병들이 잠시 멈칫거린 순간, 이젠 붉게 물들기 시작한 고덕의 내력이 그들을 뒤덮어버렸다.

그리고…

퍽, 퍽, 툭, 팍.

사방에서 무언가가 연속적으로 폭발하는 것 같은 소음과 함께 정혈이 고갈된 군병들이 마치 메마른 흙덩이처럼 터져 나가며 먼지가 되어 사라졌던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붉은 안개처럼 변한 고덕의 내력은 균사 왕부를 완전히 뒤덮어버렸다.

안개에 휩싸인 균사 왕부에선 무언가가 터지는 소음만이 가득했다.

미끼를 자처한 최 표두와 그의 옛 동료들이 균사 왕부의 정문에 도착했을 때는 그렇게 왕부를 뒤덮었던 붉은 안개가 마치 썰물처럼 안으로 물러가던 시점이었다.

비장한 표정의 최 표두가 고개를 끄덕이자 무장을 갖춘 몇몇 사내가 왕부의 정문을 걷어찼다.

푸스스스-

왕부의 정문을 걷어찼던 사내들은 물론이고, 그 뒤에서 잔뜩 긴장한 채 기다리던 사람들도 어이없는 표정이 되었다.

“좀 살살 차지.”

정신을 차린 최 표두의 말에 문을 걷어찼던 두 사내가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런 두 사람을 지나쳐 동료들이 왕부로 밀어닥쳤다.

하지만 기세 좋게 무기를 뽑아들고 들이닥친 이들은 왕부 안으로 들어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찌 된 일인지 지금쯤이면 왕부를 경비하는 군병들이 떼로 몰려들었어야 함에도 왕부 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던 것이다.

“이건 마치…….”

“폐가 같군요.”

합비에서 무관을 열고 있었던 양 장군, 아니 양 관장의 말에 최 표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조심스럽게 들어가 보세.”

최 표두의 말에 이백에 이르는 사람들이 천천히 왕부 안으로 깊숙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 * *

고덕이 정신을 차린 것은 최 표두와 그의 옛 동료들이 왕부 안으로 진입한 시점이었다.

내기는 여전히 통제 불능이었다. 물론 혈맥 안을 미친 듯이 치닫는 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이전보다 일 성씩 꼬여 있는 내기의 두께가 더 굵어졌다는 것이 달랐다.

“흠… 그나저나 모두 어디로 간 거지?”

먼지로 화한 것은 사람만이 아니다. 그들이 입고 있던 옷은 물론이거니와 그들의 무기까지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던 것이다.

자신이 벌여 놓은 참상을 기억하지 못하는 고덕은 천천히 발길을 옮겼다.

그런데 기척이 없었다. 자신의 기억으론 홍염수라와 싸움이 벌어지기 직전까지도 사방에 기척으로 가득했던 왕부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던 것이다.

“어쭈, 이거 봐라.”

그 고요 속에서 두 가지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한 곳은 정문 쪽인데, 그쪽에서 다수의 기척이 안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곳은 얼마 전에 자신이 수색해보았던 곳들 중 한 곳이었다.

느껴지는 감각으론 둘에서 셋. 이런 경우 많은 곳보다 적은 곳이 더 중한 법이다.

결국 고덕의 발걸음은 기척이 적게 느껴지는 곳으로 돌려졌다.

고덕이 도착한 전각은 왕부의 출납을 담당하는 관리들이 근무한다던 곳이었다.

그곳에서 미약하게 흘러나오는 기세에 문을 열고 들어선 고덕은 기진맥진한 채 쓰러져 있는 야행복 차림의 두 명과 함께 정신을 잃고 있는 호경명을 발견할 수 있었다.

“찾았군.”

내기를 돌려 호경명의 상세를 살피려던 고덕은 내뻗던 손을 거둬들였다.

지금 자신의 상태에서 남에게 내력을 주입한다면 백이면 백 내상을 입고 죽음을 당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결국 호경명을 들쳐 업은 고덕이 전각을 나섰다.

기진맥진한 채 쓰러져 있던 야행복 둘은 사혈을 지그시 눌러버렸다.

진기와 정혈을 빨아들이는 이상한 안개와 술법으로 맞서던 탓에 기진맥진한 두 야행복의 사내들은 두 눈을 뜨고도 사혈이 눌리는 것을 막지 못했다.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기 위해 호경명을 들쳐 업고 뒷문으로 빠져나오던 고덕은 자신도 미끼가 되어 기회를 벌어주겠다는 호철랑과 실랑이 중이던 묵린과 마주쳤다.

“너 여기서 뭐하냐?”

“대, 대협!”

“대협!”

“호 판관!”

서로를 마주 본 세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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