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6장. 발각(發覺)-비밀이 드러나다
고덕이 무언가 이상하다고 판단한 것은 해위의 허벅지가 거의 넝마가 되다시피 한 시점이었다.
처음엔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않는 상대의 굳건한 심지를 나름 가상해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오는 반응들이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기왕 참을 거면 눈도 좀 어떻게 해봐라. 꿈에 나올까 무섭다.”
이미 반쯤 뒤집혀 허옇게 흰자가 드러난 눈을 바라보는 고덕에게 해위는 아무 말도 않고 푸들거릴 뿐이다.
“이 자식이… 눈 똑바로 뜨라니까. 야- 어! 이, 이런 제길…….”
그때서야 고덕은 자신이 처음 고문을 가할 때 마혈을 제압한 것이 생각났다.
급히 마혈을 풀자 해위의 몸은 작살 맞은 물고기처럼 펄떡거렸다.
“사, 살려… 줘…….”
그제야 힘없는 음성이 들려오며 노릿한 악취가 진동했다.
특유의 고약한 냄새에 눈살을 찌푸리는 고덕의 시야로 해위의 아랫도리를 황토색으로 물들이는 뭔가가 보였다.
과도한 공포가 이미 해위의 정신을 파괴한 것이다. 그 탓에 제어를 상실한 근육들이 배설물을 쏟는 것이었다.
고개를 돌린 고덕의 시선이 방 한구석에 널브러져 있던 나 공공에게 향했다.
정신을 잃었던 나 공공의 혈도 몇 개를 건드리자 그가 벌떡 일어섰다.
“흐억! 귀, 귀신이다!”
쓰러지기 직전의 기억이 그대로 살아난 탓이다.
기절할 듯 놀라며 뒤로 물러나던 나 공공은 해위가 널브러져 있던 의자에 걸려 나뒹굴었다.
“히익!”
해위에게서 쏟아져 바닥을 흥건히 적시고 있는 피와 넝마가 되어 헤집어진 그의 허벅지를 바라본 나 공공은 기겁을 했다.
정신이 반쯤은 날아간 나 공공에게 다가간 고덕이 물었다.
“너도 저렇게 버틸 생각인가?”
“자, 자, 자객이오?”
“자객은 무슨……. 묻는 말에 대답만 잘하면 살 수 있다.”
고덕의 말에 나 공공의 고개가 맹렬하게 아래위로 움직였다.
“무, 물어보시오.”
“이번 일, 황제가 시킨 게 맞나?”
“이, 이번 일이라면 무슨…….”
아직 정신을 추스르지 못했는지 자신의 물음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상대를 위해 고덕은 천천히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너희가 이곳에 오게 된 일 말이야.”
고덕이 뒤로 물러나자 조금은 안정을 찾았는지, 답을 하는 나 공공의 음성은 조금씩 평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 그거야… 황명이 있으니 봉왕의 칙서가 나온 게 아니겠소.”
“그 명령이 황제의 진의냐는 거지.”
“나, 난 진위는 모르오. 황명이 내려왔으니 그를 따를 뿐이오.”
마음에 차지 않는 답에 고덕의 표정이 안 좋아지자 나 공공의 말이 빨라졌다.
“저, 정말이오, 난 황명의 출납을 담당하는 시종원의 환관일 뿐 폐하의 총애를 받고 있진 못하단 말이오.”
열심히 설명해보는 나 공공이었지만, 고덕의 얼굴에서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지우지는 못했다.
결국 고덕의 발길이 다시 다가오자 당황한 나 공공이 말했다.
“저, 정말이오. 해, 해 공공이라면 알고 있을지 모르지만 나, 난 모른단 말이오. 아니, 모릅니다. 사, 살려 주세요.”
주저앉은 채 연신 뒤로 물러서다 벽에 막히자 나 공공은 그렇지 않아도 하얀 얼굴이 완전히 백지장처럼 새하얘져서는 살려 달라고 애원을 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고덕이 발길을 멈췄다.
보이는 게 다는 아니라는 건 알지만, 바닥에 길게 이어지는 소변 흔적이 나 공공의 아랫도리로 이어지는 것을 확인하자 그가 사실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 까닭이다.
“정말 모르나?”
“정말 모릅니다. 흑, 말씀드리고 싶어도 아는 게 없습니다. 살려 주십시오. 허어어엉~”
이젠 펑펑 울기까지 하는 나 공공을 바라보던 고덕의 시선이 의자에 널브러져 있는 해위에게 닿았다.
“제길, 답은 저놈한테 있다는 건데.”
하지만 여전히 의자 위에 널브러져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해위의 상태로는 곧바로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하아~”
고덕의 한숨이 깊었다.
* * *
균사 왕부에 들어온 지 세 시진이 넘어서자 방문 밖이 점차 밝아왔다.
밤새 이 방에 묶여 있었던 것이다.
답답하기도 하고 자신의 처지가 어이없기도 했던 고덕은 여전히 의자에 널브러져 있는 해위에게 다가갔다.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나?”
고덕의 질문에 해위의 곁에 붙어 간병을 하던 나 공공이 겁먹은 얼굴로 답했다.
“그게… 여전히 횡설수설해서…….”
도대체 황실의 안위를 책임진다는 동창의 무위태감이 그깟 고문에 정신이 나간다는 것이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상대가 연극을 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고, 고덕으로서는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서성거리는 고덕에게 나 공공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어디서 오신 분이십니까?”
나 공공의 물음에 고덕이 피식 웃었다.
“왜, 나중에 복수라도 하려고?”
“그, 그런 건 아닙니다.”
“소흥 왕부에서 왔다.”
“소, 소흥 왕부요!”
나 공공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생각 외로 강렬한 상대의 반응에 고덕이 설피게 웃었다.
“왜, 소흥 왕부라니까 손을 쓰면 어찌 될 것도 같아서?”
상대의 오해에 나 공공이 서둘러 손사래를 쳤다.
“그, 그게 아닙니다. 정말, 정말로 소흥 왕부에서 오신 분이 맞으십니까?”
상대의 반응이 조금 이상하다 생각한 고덕의 표정이 굳었다.
“그래. 그런데 왜?”
고덕의 물음에 나 공공이 엉뚱한 단어를 말했다.
“약속 이행.”
“뜬금없이 뭔 소리야?”
어이없어하는 고덕의 물음에 나 공공은 다시 한마디를 더했다.
“척살 반적.”
“도대체 그게 무슨 소…….”
고개를 갸웃거리던 고덕의 눈에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약속 이행, 척살 반적’. 이 말은 일전에 안창에게 자신을 인도했던 황제의 밀지에 담겨 있던 글귀였기 때문이다.
“네놈 뭐야? 황제가 보낸 걸 네놈이 어찌 알아?”
“이보게, 해 감승, 어서 일어나시게.”
나 공공의 말에 여태까지 정신줄을 놓고 있던 해위가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 모습에 허탈한 표정의 고덕이 이를 악물었다.
“여태 속이고 있던 거였나?”
“송구합니다, 대인. 황명이 지엄한지라…….”
나 공공은 물론이고, 의자에 앉은 해위까지 마치 연습이나 한 듯 같은 말을 하니 고덕은 어이가 없었다.
“황제가 보낸 건가?”
“예. 이곳에 있다 보면 반드시 찾아오실 것이라고…….”
묻는 말에 답하는 나 공공의 표정은 좀 전까지 겁에 질려 있던 나약한 환관의 모습이 아니었다.
“너 시종원 환관 아니지?”
“맞습니다. 다만 그 전엔 동창에 있었습지요.”
나 공공의 답에 고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력이 느껴지지 않는데?”
고덕의 물음에 나 공공이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연공 중에 주화입마를 입어… 단전이 못 쓰게 되었습지요.”
“그렇군.”
내공은 사라져도 강단과 호기는 남은 것이다. 그런 이를 시종원으로 불러들인 황제의 의중이 대충은 짐작이 갔다.
“내게 전할 말이라도 있나?”
그 말에 나 공공의 목소리가 대번에 낮아졌다.
“멸왕 선봉.”
“뭐?”
“멸왕 선봉. 그 말뿐이셨습니다.”
나 공공의 말에 고덕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이 양반이, 누가 암호 전문가라도 되는 줄 아나…….”
고덕의 투덜거림에 나 공공과 해위의 표정에 당황감이 어렸다. 황제를 이 양반이라 칭한 까닭이다.
“대, 대인…….”
당혹스러워하는 나 공공의 부름에 고덕이 벌컥 짜증을 냈다.
“왜?”
“다, 답을 받아오라 하셨습니다.”
“답? 잘됐네. 가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니 다음부턴 쉽게 말하라고 해. 아니, 아예 날 부려 먹을 생각 자체를 말라고 전해.”
“대, 대인…….”
“대인은 무슨 빌어먹을 대인.”
솔직히 어이없기도 하고 화도 났다.
황제가 자신을 마치 수하로 생각한다는 느낌이 들었던 탓이다.
“하오나 대인, 황명입니다. 그것도 밀의(密意)입니다.”
황제의 밀의를 거역하는 것은 대역죄다. 황제의 믿음을 저버린 죄이니 본인은 물론 구족을 멸할 죄인 것이다.
하지만 고덕에게 그런 건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마음대로 하라고 해.”
화를 내고 돌아서던 고덕이 잠시 주춤했다.
자신이 이곳에 들어온 이유가 뒤늦게 생각난 탓이다.
“참, 신임 균사왕의 왕위 세습을 인정한 황제의 의중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 거지?”
고덕의 물음에 나 공공이 답했다.
“저희 같은 미관말직이 그 깊으신 뜻을 어찌 알겠습니까? 다만 황상께서 진정으로 원하셔서 벌어진 일은 아니라 느낄 뿐이지요.”
나 공공의 답에 고덕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새로 균사왕에 등극한 사람은 고덕 자신의 손으로 목숨을 거둔 전왕의 처남일 뿐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현 상황에서 가장 강력한 군벌인 동북어위도총사의 지지를 받고 있는 황제가 균사 왕부 정도의 힘에 눌려 왕위의 승계를 허락했을 리도 만무했다.
“혹시 동북어위도총사가 다른 생각을 가졌나?”
그 물음에 나 공공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다른 뜻이 아니라 절박한 상황이라 알고 있습니다.”
“절박해? 동북어위도총사가?”
“예. 그리 알고 있습니다.”
“이유는?”
추궁에 가까운 물음에 나 공공은 답 대신 고개를 조아렸다.
“이곳에 와 계신 일과 상통한다고 말하라 하셨습니다.”
그리 말한 것이 누구일지는 뻔했다. 약이 올랐지만, 그것에 화를 내기엔 당장 눈앞에 벌어진 일이 심각했다.
“혹시 동북어위도총사의 여식이 이곳에 잡혀 있는 거, 맞나?”
“송구하오나 여식이 아니라 동북어위도총사 자신입니다, 대인.”
“어엉?”
생각지 못했던 답에 고덕의 표정이 혼란스러워졌다. 자신은 호 판관이 납치되어 있어 동북어위도총사가 신임 균사왕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던 탓이다.
“동북어위도총사께서 황상 폐하를 찾아뵙고자 남하하다 갑자기 실종되시었는데…….”
나 공공의 말을 고덕이 연결했다.
“균사 왕부에서 그를 데리고 있었다?”
“예. 균사 왕부의 전언대로라면 잠시 머물고 계시는 것입지요. 그것도 자. 의. 에서 말입니다.”
나 공공의 말에 고덕이 무언가를 짐작한 표정을 지었다.
“혹, 동북어위도총사의 여식이나 아들이 이곳으로 오지 않았나?”
척계광 사후 새로 동북어위도총사에 오른 호경명에겐 자식이라곤 호철랑 하나뿐이다.
그럼에도 여식이나 아들이라고 말한 것은 호 판관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확신할 수 없었던 까닭이었다.
“그런 분은 오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다만 균사 왕부에서 외부에 감추려 들었다면 저희도 몰랐을 수는 있습니다.”
나 공공의 답에 문제는 더 복잡해졌다.
이래서야 호 판관이 이곳에 왔는지 안 왔는지조차 확실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 동북어위도총사가 있는 곳은 아나?”
“이곳에 와서 단 한 번 뵈었을 뿐입니다. 이후엔 일체의 접촉을 금지당하였습지요.”
“빌어먹을…….”
이전에도 뒤져 보았지만 균사 왕부는 작지 않았다. 균사왕이나 손님으로 온 고위 인사가 머물 곳은 한정되어 있었지만, 인질을 가두어둔 곳을 찾기엔 왕부의 건물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일단 뒤져 보는 수밖에. 참, 미안하게 됐다.”
지나가듯 던지는 고덕의 사과에 아직도 의자에서 일어서지 못하는 해위는 그저 허탈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 * *
나 공공과 해위 두 환관이 머무는 객관에서 나온 고덕은 주변이 환하게 밝아오는 것에도 불구하고 왕부 안을 돌아다니며 탐문하기 시작했다.
한데, 그 방법이 어이가 없었다. 숨어서 다니는 게 아니라 버젓이 모습을 드러내고 왕부 안을 활개치고 다녔던 것이다.
하지만 우습게도 왕부의 병사들이나 무관들 중에는 당당하게 휘젓고 다니는 고덕을 이상하게 보는 이가 없었다.
해가 떠서 다시 날이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거의 하루 종일 왕부를 뒤진 끝에 고덕은 중요한 인질이 갇혀 있을 만한 건물을 두어 곳으로 좁힐 수 있었다.
그곳들 모두가 알려진 건물의 중요도에 비해 경비의 밀도가 지나치게 높았던 것이다.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앉자, 고덕의 움직임은 조금 더 적극적으로 변했다.
어둠과 그늘을 이용해 움직인 고덕이 맨 처음 스며든 곳은 왕부의 출납을 담당하는 이들이 업무를 보는 건물이었다.
혹자는 그런 건물이니 경비가 삼엄한 게 당연한 것이 아니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출납’이란 두 글자에 속은 것이다.
사실 이 건물은 출납을 관리하는 왕부의 하급 관리들이 머물며 업무를 본다는 것뿐이지, 실제로 왕부의 돈이 보관되거나 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탓에 건물 안에 들어선 고덕이 세세히 살펴보았지만 건물은 텅 비어 있을 뿐, 특이한 점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건물의 경비를 위해 오십 명이 넘는 병사들이 중무장을 갖춘 채 밤낮 없이 경비를 설 리는 없었기 때문이다.
생각이 거기에 미친 고덕이 조금 더 세세하게 건물을 살폈지만, 특이한 것을 찾는 데엔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그 건물을 나선 고덕은 또 다른 목표를 향해 이동했다.
고덕이 나가자 건물 귀퉁이에서 검은 안개들이 일어났다.
“놈이 나갔군.”
“역시 우리를 알아차리지 못하는군요.”
“암운은 무공이 아니라 술법이야. 놈이 알아볼 리 없지.”
작은 음성들 속에서 검은 안개가 흩어지며 온통 검은색 야행복으로 몸을 감싼 두 명이 정신을 잃고 있는 한 사내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도총사는 어찌할까요?”
“글쎄, 여기에 계속 두는 게 안전할 거야.”
“혹, 놈이 다시 온다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한 번 왔던 곳은 그만큼 주의가 떨어진다. 이미 이상이 없었다는 선입견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뇌리에 박혀 있기 때문이지. 더구나 이곳과 같이 아무것도 없이 경비 병력만 늘어놓은 곳이 세 곳이나 더 있으니, 놈이 헛갈려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계속 이곳에 머무르기로 작정한 이들의 시선이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호경명의 얼굴에 머물렀다.
* * *
고덕의 수색은 실패로 돌아갔다.
처음에 목표로 삼았던 곳은 모두 네 곳. 한데 그곳들을 샅샅이 뒤졌음에도 모두 별다른 이상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더 이상했다. 아무것도 없는 곳을 경비하기 위해 그 많은 병사들이 밤낮없이 경비를 선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눈에 보기에도 중무장을 한 채 말이다.
“유인? 아니야. 그랬다면 놈들이 기다리고 있었어야지. 하면, 은폐?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잖아.”
혼자 중얼거리는 고덕은 머리가 너무 복잡했다. 호 판관이 이곳에 들어왔는지도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의 아버지인 호경명조차 어디에 잡혀 있는지 감을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고덕은 쉬운 길을 택하기로 했다.
순식간에 사라진 고덕의 신형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신임 균사왕의 거처였다.
수백의 군병과 간단치 않은 내력이 흐르는 무인 수십이 눈을 형형하게 빛내며 둘러싼 건물을 내려다보며 고덕은 낮게 혀를 찼다.
“쯧, 지붕에도 궁수대를 깔아놨구만.”
그의 말대로 신임 균사왕 침전의 지붕엔 족히 수십은 넘어 보이는 궁수가 잔뜩 웅크리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저들을 뚫고 들어가고자 하면 못 들어갈 것은 없다. 단지 소란스러워진다는 것이 부담일 뿐이었다.
거기다 저 건물이 함정이라면 위험에 처할 가능성도 있었다.
이리저리 생각을 굴리던 고덕의 귀가 쫑긋거렸다.
“그가 절대로 용서치 않을 것이에요!”
바람에 실려 날아온 음성은 길림에서 들어보았던 그, 아니 여자로 돌아왔을 때의 그녀 목소리였다.
‘이건… 호 소저!’
음성의 주인을 떠올리자마자 고덕의 신형이 전광석화가 되었다.
“치, 침입자다! 막아라!”
“궁수대, 쏴라!”
사방에서 고함이 터지고, 균사왕의 침전을 둘러싸고 있던 수백의 병사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그 소란을 일직선으로 돌파한 고덕의 신형이 침전의 문을 박차고 들어섰다.
* * *
그 시각, 합비의 성문을 들어서는 마차가 있었다.
마차에서 펄럭이는 깃발은 일풍 표국의 것이었다.
일풍 표국은 절강성에선 가장 잘나가는 표국 중 하나였다.
표국이라는 곳이 관과 강호에 절묘하게 발을 걸친 탓에 소흥 왕부가 위치한 절강의 표국이 적지나 마찬가지인 안휘까지 아무런 제지 없이 출입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 덕에 별다른 제지 없이 안휘의 성도까지 들어온 마차가 멈춰 선 곳은 합비에서도 나름 유명세를 타고 있는 일풍 객잔이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곳은 일풍 표국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마부가 내려 마차 문을 열어주자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여인이 천천히 내려섰다.
“미리 예약이 되어 있습니다. 드시지요, 아가씨.”
호위 무사 역할로 마부석에 동석해온 최 표두의 말에 여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객잔 안으로 들어섰다.
“본가에서 이미 예약을 해놓았을 것이다.”
뒤따라 들어선 최 표두의 말에 문 앞에 서 있던 점소이가 냉큼 허리를 접었다.
“예, 나리. 별채가 준비되어 있습니다요. 따르시지요.”
점소이의 안내를 따라 움직이는 여인의 얼굴은 과거 길림에서 고덕이 보았던 여성으로 돌아온 호철랑의 얼굴이었다.
별채로 안내된 호철랑이 최 표두와 마주 앉았다.
“일단 강호로 흩어진 형제들에게 연락을 취해보겠습니다.”
“그들이 따라줄까요?”
걱정스런 호철랑의 물음에 최 표두가 답했다.
“모두가 전장에서 절제사 대인의 도움으로 한두 번은 목숨을 건진 이들입니다. 소식을 듣는다면 두말없이 달려올 것입니다.”
“어려운 일에 이렇게 선뜻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아가씨. 이제라도 절제사 대인께 받은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겨 이 최 모는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고맙습니다, 최 장군.”
“장군이라니요. 이미 군을 떠나 강호의 야인이 된 사람입니다. 장군의 칭호는 과분합니다, 아가씨.”
지금 호철랑과 함께 있는 최 표두는 물론이고 그가 불러 모아보겠다는 이들은 과거 호경명의 휘하에서 활동하던 장수들이었다.
그들은 황명을 이용해 동북절제사였던 호경명의 실권을 빼앗고 폭정과 전횡을 일삼던 척계광의 행동에 실망한 나머지 군을 떠났던 이들이었다.
부친을 사로잡고 있다는 균사 왕부의 서찰에 소흥 왕부를 떠나야만 했던 호철랑은 인근의 표국에 안돈하고 있다던 최 표두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던 것이다.
잠시 후, 객잔을 벗어난 최 표두는 자신이 알고 있던 이들을 찾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