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5장. 재회(再會)-다시 만나다
반색을 하고 다가오는 사내를 바라보며 고덕이 말했다.
“오랜만일세.”
“예, 대협. 얼마 만인 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반갑게 인사를 건네며 다가오는 이는 호천검 남궁단이었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인가?”
고덕의 물음에 남궁단이 겸연쩍은 웃음을 지었다.
“하하하, 안휘에서 그런 질문을 받을 줄은 몰랐습니다.”
“안휘에서… 아! 자네 집이 안휘였던가?”
대남궁세가가 단순히 자네 집이 되었지만, 남궁단은 별로 노여워하지 않았다. 상대가 강호의 예법은 그다지 따르지 않는 사람이란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곁에 서 있던 구는 눈이 튀어나올까 걱정일 정도였다. 남궁단의 앞섶에 그려진 구름 문양이 무엇을 뜻하는지 너무나 잘 알았던 것이다.
아무리 관에 속한 노비라 해도 마차를 몰고 여기저기를 다녀야 하는 마부의 신분상 강호에서 피해야 하는 집단, 즉 강호인들에 대해서도 귀동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탓이다.
그 안에서 말하는 구름 문양은 흔히 남궁 검가로 유명한 남궁세가의 독문 표시였다.
생각이 그에 이르자 구의 걱정이 한없이 깊어졌다.
제아무리 순무가 고개를 숙여야 할 정도로 높은 관인이라 해도 명예가 제 목숨보다 중하다는 강호인에게 저리 아랫사람 대하듯이 헐게 대하는 것은 그리 좋은 대처가 아니라 생각한 까닭이었다.
그런 구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고덕의 하대는 여전했다. 이상한 것은 남궁세가의 사람이 분명할 강호인의 반응이었다.
“예. 저희 세가가 위치한 황산이 안휘에 있습지요.”
“그렇군. 그럼 관할 시찰인가?”
한마디로 보호세 받으러 다니느냐는 말이다. 시정잡배에게나 물을 말한 말이었지만, 남궁단의 얼굴에선 여전히 미소가 걷히지 않았다.
“비슷합니다. 봉양에 있는 분가에 일이 있어 들렀다 돌아가는 길이니까요.”
“그런가? 이렇게 만난 것도 다 인연이겠지. 그 기념으로 밥이나 사게.”
고덕의 말에 남궁단은 크게 웃었다.
“하하하! 예, 그러지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구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여태 남궁단과 함께 앉아 있던 이들도 놀라고 당황한 표정투성이였던 것이다.
“참, 인사 여쭙게. 고 대협이시네.”
남궁단의 소개에 사람들의 표정에 든 의문은 더욱 깊어졌다. 그저 ‘고 대협’이라 소개된 인사에 대해 제대로 된 정보가 없었던 탓이다.
더구나 인사를 여쭈라는 상대는 이제 약관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청년이 아닌가.
그런 이들의 기색을 읽었던지 남궁단의 추가 설명이 이어졌다.
“우리 남궁세가의 은인이시네.”
남궁단의 그 말에 실린 무게가 가볍지 않았다. 더구나 어린아이와 노인을 조심하라는 강호의 금언이 중년인 두 사내의 고개를 숙이게 만들었다.
“험험, 제검가(製劍家)의 관일이라 합니다. 동도들이 추풍검(秋風劍)이라 불러줍니다.”
“섬열검가(閃列劍家)의 청여입니다. 과분하게도 안휘섬검(安輝閃劍)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추풍검, 안휘섬검 둘 다 안휘에서는 이름깨나 날리는 고수들이다.
물론 강호 전체로 보자면 아주 막강한 고수들은 아니었지만, 절정에 이른 무위를 가진 이들이니 흔히 볼 수 있는 이들도 아니었다.
“고덕이오.”
별다른 수식어가 붙지 않은 고덕의 소개에도 두 사람은 궁금증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둘의 입장에선 남궁세가의 은인이라는 남궁단의 말만으로도 고덕을 설명하기엔 충분한 까닭이었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빙긋이 미소를 지어 보인 남궁단이 그들에 대해 조금 더 깊게 소개했다.
“둘 다 남궁세가와는 한가족이지요.”
남궁단의 말에 두 사내의 입가에 미소가 깃들었다.
천하에 이름이 드높은 남궁세가의 외총관이 외인 앞에서 스스럼없이 한가족이라 칭한 까닭이다.
하지만 그들의 가문 역시 단지 그 이유만으로 좋아할 만큼 힘이 없는 곳은 아니다.
제검가와 섬열검가 모두 안휘에 위치한 무가였지만, 둘 다 백도 사십 중문에 들 정도로 강력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궁단의 소개에 미소를 짓는 것은 이 두 무가가 남궁세가와는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탓이었다.
“한가족? 제검가와 섬열검가의 사람이라면서?”
고덕의 의문에 추풍검 관일이 나섰다.
“둘 다 사문의 시조께서 남궁세가의 외방이셨던 까닭입니다.”
남궁세가의 외방, 그러니까 남궁 성을 쓰지 않는 남궁세가의 제자를 말함이다.
관일의 말처럼 제검가와 섬열검가는 남궁세가의 중추까지 올랐던 외방의 고수가 남궁세가주의 특별한 허락을 얻어 문호를 연 무가였던 것이다.
“좋은 인연들을 두었군.”
마교를 나와 겪었던 시간으로 인연이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아버린 고덕의 평이었다.
그 말에 남궁단이 미소를 지었다.
“예, 좋은 인연이지요. 그나저나 누구십니까?”
남궁단의 시선을 따라 고덕의 눈이 어정쩡하니 서 있는 구에게 향했다.
“제자.”
“예? 제자분이 있으셨습니까?”
남궁단의 물음이 과거형인 이유는 구의 외모 때문이었다.
적어도 서른은 넘어 보였던 것이다.
“며칠 전에 들였네.”
“예? 며칠 전에요?”
놀란 남궁단이 구의 전신을 훑어보았다.
적어도 초극의 극의는 확실히 넘어가리라 어렴풋이 짐작하던 고덕의 제자라는 기회를 잡은 이를 살펴보기 위함이었다.
그런 남궁단의 시선을 받은 구가 울상을 지으며 허리를 숙였다.
“구, 구입니다요.”
절로 숙여지는 허리에 남궁단은 물론이고, 관일과 청여의 표정마저 당황으로 물들었다.
강호인으로 타인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것만으로도 최고의 경의를 표하는 것이거늘 허리까지 숙이다니, 수하가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런 모습에 고덕이 피식 웃었다.
“아직 제대로 닦이지 않았으니 이해하게.”
고덕의 말에 세 사람이 당황감을 간신히 추스르며 포권을 취했다.
“남궁단이라오. 사람들이 호천검이라 부르지요.”
“관일이오.”
“청여라오.”
이미 한 차례 정식 소개를 했던 관일과 청여는 간단히 자신의 이름만 밝혔다.
그렇게 서로 간의 인사가 마무리되자 자리에 앉았다.
“백부님의 금분세수 이후엔 처음 뵙는 것 같습니다. 그땐 온다 간다 아무 말씀도 없이 사라지셔서 한참 궁금해했었습니다.”
아무 말도 안 한 건 아니다. 금분세수를 치른 검존, 남궁호군을 만나고 떠났으니까.
하지만 고덕 자신의 정체를 숨겨 주기로 했던 검존 또한 세가 가솔들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을 테니, 다른 이들은 몰랐을 것이기도 했다.
“그땐 급히 움직일 일이 있었네. 서운했다면 미안함세.”
고덕의 답에 남궁단이 고개를 조아렸다.
“말씀을 편히 해주십시오. 백부님께 존대를 듣는 분이라 들었습니다.”
남궁단의 말에 고덕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혹여라도 남궁세가의 식솔들이 자신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게 하려는 검존의 얄팍한 계산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거추장스럽게 점잔을 빼고 있는 것도 그다지 기분에 내키는 일은 아니었기에.
“그런가? 그렇다면 내 말을 편히 하지.”
사양 한 번 없는 고덕의 답에도 불구하고 남궁단은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예. 그래주시면 더 편하겠습니다.”
“그래, 혹시 내가 그리 떠났다고 뒤에 대고 욕을 한 건 아니겠지.”
“욕이라니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저 혹여 접대가 소홀했던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을 뿐입니다.”
“그런 건 아니었어. 정말 급한 일이 있었을 뿐이지.”
솔직히 말도 없이 떠날 만큼 급한 일은 없었다. 그길로 왕부로 귀환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남궁단은 고덕의 핑계를 철석같이 믿는 눈치였다.
“역시 그러셨군요. 저희도 그럴 것이라 짐작은 했었습니다.”
남궁단의 답에 고덕은 그저 어정쩡한 미소를 지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고덕에게 남궁단이 물었다.
“그나저나 갑자기 안휘에 오시고. 혹, 이곳에 볼일이 있으신 겁니까?”
“그렇게 됐어.”
고덕의 답에 남궁단의 얼굴이 밝아졌다.
“도울 만한 일이 있다면 말씀해주십시오.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과거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던 것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일전에 아이들 성혼에 제대로 힘쓰지 못했던 것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지?”
“지난 일이지만 정말 죄송합니다. 그 당시엔 정말 어쩔 수 없었습니다, 대협.”
다시금 고개를 숙여 사죄의 뜻을 전하는 남궁단의 모습에 슬쩍 미소를 지어 보인 고덕이 물었다.
“그나저나 아이들의 성혼식은 잘 끝났나?”
고덕의 물음에 남궁단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답했다.
“아직 전입니다. 내달 열이틀로 날이 잡혀 있지요. 혹시 모르셨습니까?”
자신이 소흥 왕부의 일에 매달려 있는 동안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집안일에 신경을 못 쓰기도 했고, 그 탓에 조카 손녀인 나아랑과 남궁태의 성혼이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나름대로 정신없이 살았거든. 그나저나 꽤 오래 걸렸군.”
“협가의 사정이…….”
말을 잇지 못하는 남궁단의 모습에서 무언가 사연이 있음을 알아차린 고덕이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협가의 치부가 드러난 탓에 소란스러운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말에 협가가 살겁을 일으킨다는 소문에 움직였다가 우연히 자신이 구해주었던 이들이 생각났다.
그들을 치료해 돌려보냈으니 아마 협가의 치부는 그들의 손에 의해서 드러났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잘 정리는 됐고?”
별다른 의문도 없이 결과만 묻는 고덕에게 남궁단이 물었다.
“알고 계셨던 겁니까?”
“아니.”
내용은 알아도 치부가 드러난 일은 몰랐으니 거짓말은 아니라 생각했다.
“그런데도 안 궁금하십니까?”
남궁단의 물음에 고덕이 고개를 저었다.
“내 흉이 태산인데 남의 흉을 알아 뭐하려고.”
고덕의 답에 남궁단의 입이 다물렸다. 그리 말하면 남궁세가도 자유로울 수 없었던 탓이다.
뭐, 비슷한 일로 남궁세가도 일전에 세상에 자신들의 잘못을 고해하고, 관련자들의 목을 베고, 검존이 은퇴까지 했다지만 그 일 말고도 세상으로부터 지탄받아야 마땅한 잘못들은 부지기수로 감추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맞는 말씀이군요…….”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남궁단에게 고덕이 다시 물었다.
“정리는 잘된 거냐고?”
“예? 아! 예. 속은 모르겠지만 일단 외부에서 보았을 때는 정리가 된 셈입니다.”
“일단?”
고개를 갸웃거리는 고덕의 물음에 남궁단이 답을 이었다.
“부인을 했으니까요.”
“사실이 아니라 했단 말이야?”
“예.”
“드러난 치부를 증명할 사람들이 있었을 텐데?”
역시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애써 궁금증을 눌러 참은 남궁단이 답했다.
“소문의 근원지가 오리무중해진 터라……. 나중엔 그저 근거 없는 다른 풍문들처럼 헛소문으로 치부가 되었습니다.”
소문의 근원지가 오리무중이라는 것은 그때 고덕이 구해주었던 마송과 안평, 두 사람이 해를 입었다는 말과 같았다.
그렇게 되면 범인으로 의심되는 곳은 단 한 곳뿐이다.
“비슷한 일을 다르게 처리했군.”
남궁세가를 필두로 한 황보세가와 제갈세가의 처리 방법을 거론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고덕은 안휘협가의 일 처리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지기는 싫었다.
자신조차 옳지 않은 일을 해온 것이 백사장의 모래알같이 많았던 까닭이다.
비슷한 생각을 했던지 남궁단이 중얼거렸다.
“다 제각기 사정이 있는 것이니까요…….”
그렇게 변명 비슷한 말을 해주는 남궁단의 음성이 유난히 씁쓸해 보였다.
“그래. 그나저나 내달 열이틀이라고.”
가라앉는 분위기가 싫었던지 화제를 돌리는 고덕의 물음에 남궁단이 답을 했다.
“예. 참! 태상가주 자리에서 물러나신 백부께선 대협이 참석하시는지 매우 궁금해하십니다.”
검존의 자리에 있던 남궁호군을 말함이다.
아마도 고덕이 검마인 것을 알기 때문에 갖는 궁금증일 것이었다.
“참석해야겠지.”
모르면 몰랐으되 알고서 안 갈 생각은 없었다. 적어도 서운해하는 형의 얼굴을 볼 배짱은 없기 때문이다.
“백부께서 기뻐하실 겁니다.”
남궁단의 답에 고덕은 그저 피식 웃어 보였을 뿐이었다.
그렇게 웃기만 하는 고덕에게 남궁단이 재차 청했다.
“도울 일이 있으시면 말씀해주십시오.”
남궁단의 말에 고덕은 고개를 저었다.
“관이 연결된 일이니 부탁할 건 없어.”
딱 자르는 고덕의 말에 남궁단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관이요? 하필 왜 관과…….”
강호인치고 관과 연결되는 걸 반길 사람은 없다.
애초에 무림이나 강호인 자체가 일반 백성의 무장을 금지하는 대명률에 위반되기 때문이다.
존재 자체부터 위법이니, 그들의 생활 모든 면에서 법과 맞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하니, 그것을 제재하여야 할 관과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강호는 서로 물과 기름처럼 겉돌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럴 일이 있었지. 하니, 내 일에선 신경 꺼.”
고덕의 말이 그랬지만, 은혜를 입었다는 사람의 입장에서 낼름 그러겠다고 답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관이라도 상관없습니다. 필요하신 것이 있다면 말씀하십시오. 남궁세가의 이름은 쓸 수 없겠으나, 남궁단의 몸은 언제 어느 곳이라도 빌려 드리겠습니다.”
제법 호기로운 남궁단의 말에 고덕은 피식 웃었다.
“겉멋은…….”
입으론 통박을 주었지만, 눈까지 반달처럼 휘어진 것으로 보아선 기분이 나쁘진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남궁단과 제법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고덕은 다음 날 아침 다시 여로에 올랐다.
“괜찮으니 그냥 가래도?”
고덕의 말에 남궁단은 희미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이래 봬도 제가 안휘에선 제법 통합니다. 하니, 안휘에서만큼이라도 제가 모시겠습니다.”
“허허, 참…….”
남궁단의 설레발이 호의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기에 고덕은 그리 싫지 않았다.
사실 언제나 혼자 움직이던 것이 버릇이 된 그였기에 지금처럼 여럿이 뭉쳐 가는 것은 그다지 편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불편함을 덮을 정도로 남궁단의 호의가 가슴을 들뜨게 만들었다.
“그럼 저 친구들이나 보내던가.”
고덕의 말에 저 친구들로 불린 관일과 청여가 동시에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대협. 남궁의 은인이시면 저희의 은인도 됩지요. 함께 돕게 해주십시오.”
지난 저녁, 고덕이 초극의 극의 또는 그 이상일 것이라는 남궁단의 설명으로 그 둘이 고덕을 대하는 자세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더구나 고덕의 나이가 약관에 불과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이미 환갑을 지났다는 남궁단의 설명으로 존대를 사용하는 것에도 거리낌이 사라진 탓인지, 둘은 처음보다 훨씬 살갑게 다가섰다.
그런 둘의 모습에 고덕은 부담스러워하면서도 굳이 내치지 못했다.
왠지 이들과 함께 있으면 식어버린 가슴이 조금씩 따듯해지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 * *
뜻하지 않은 만남으로 인해 다섯으로 늘어난 일행이 합비에 도착한 것은 고덕이 하남의 정주를 떠난 지 거의 보름 만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합비는 다른 때보다도 한층 더 복잡하고 분주해져 있었다.
“조만간 동북어위도총사가 방문한다더니, 그 탓에 이 난리인 모양입니다.”
남궁단의 말마따나 합비 성내는 색색의 휘장들과 환영 글귀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이게 무슨 난리인지…….”
비교적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관과 작지 않은 연을 맺어왔던 고덕으로서도 처음 보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균사왕이 새로 등극했습니까?”
관일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무슨 소리야?”
남궁단의 물음에 관일이 휘장 하나를 가리켰다.
공희균사부신왕즉위(恭喜均思部新王卽位)
“정말인가 본데.”
청여의 말에 사람들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하지만 고덕만큼은 그들처럼 선선히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바로 얼마 전에 전 균사왕의 목을 베어버린 것이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후사를 남기지 못한 채 균사왕이 죽었으니, 차기 대권을 차지한 자라도 즉위를 허락받으려면 황제의 윤허가 필요했다.
하지만 소흥 왕부와 뜻을 함께하고 있는 황제가 벌써 신임 균사왕의 즉위를 허락했을 리가 만무했다.
그것이 궁금해진 고덕이 지나가는 행인을 붙잡고 물었다.
“신왕 즉위에 황제 폐하의 허락이 내려온 건가?”
이제 갓 약관이나 되었을까 싶은 놈의 반말이었지만, 그 뒤에 서 있는 이들의 절반이 칼을 찬 것을 확인한 중년 사내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게 들었소.”
“거짓말 아니고?”
고덕의 으르렁거림에 사내는 당황하여 사색이 되었다.
그 사내를 구한 것은 근처에 있던 한 강호인이었다.
“왜 그걸 묻는지는 모르겠지만, 며칠 전에 황제의 칙사가 칙령을 들고 왔었으니 사실일 것이오.”
“자운!”
남궁단의 놀란 부름에 끼어들었던 사내, 자운이 손을 들어 보였다.
“무슨 짓이야. 힘없는 민초를 겁박하고.”
자운이라 불린 사내의 말을 들었던지 고덕은 사색이 된 사내를 놓아 보냈다.
“확실히 네 눈으로 본 겐가?”
고덕의 물음에 자운의 눈이 사나와졌다.
“젊은 객기에 남궁가의 이름을 뒤에 업었다고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모양이다만, 그것도 사람을 가려야 하는 것이다.”
자운으로서는 나름대로 버릇없는 놈에게 점잖게 훈계를 했다고 생각했지만, 결과는 그리 좋지 못했다.
“컥-”
“확실히 보았느냔 말이다.”
갑자기 목울대를 잡아 올린 고덕의 행동으로 자운의 얼굴에 고통과 함께 경악이 떠올랐다.
목울대를 잡혔을 뿐인데, 온몸의 힘이 빠지고 내력이 꼼짝달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말은 목울대를 잡히는 순간 혈문까지 제압을 당했다는 뜻이었다.
문제는 그 모든 움직임을 자운 자신은 제대로 볼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대, 대협!”
갑작스런 상황에 놀란 것은 자운이라는 사내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기겁을 한 남궁단이 고덕을 불렀다.
“왜?”
“그, 그는 황보세가의 사람입니다.”
“황보세가?”
“예, 대협.”
목울대를 잡혀 있으면서도 남궁단과 고덕의 대화를 들었던지 황보자운이라는 사내의 눈에는 득의의 빛이 흘렀다.
황보세가의 이름이 거론된 이상 자신의 목울대를 잡은 놈이 곧 사죄를 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데?”
“예?”
“이놈이 황보세가 놈인데 어쩌라고?”
“그, 그게…….”
순간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하는 남궁단의 모습에 황보자운의 표정이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대황보세가의 이름 앞에서도 이처럼 당당할 수 있는 데다 남궁세가의 외총관인 남궁단이 사정을 해야만 하는 사람을 좀처럼 짐작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그렇게 남궁단이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자 고덕의 시선은 다시 황보자운에게 향했다.
“정말 네가 보았냐?”
“커, 커헉.”
“미친놈. 사람이 물으면 대답을 해야지, 왜 캑캑대고 지랄이야.”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목을 잡은 손을 흔드니, 황보자운의 몸이 마치 지푸라기 인형처럼 그 손길에 따라 흔들렸다.
“컥, 캑캑.”
숨이 막힌 데다 거칠게 다뤄지기까지 하니 고통은 배가 되었다. 그 상황을 지켜보던 남궁단이 안 되겠던지 다시 나섰다.
“소, 손을…….”
그제야 상대의 목울대를 움켜쥐고 있던 자신의 손을 바라본 고덕이 겸연쩍은 웃음과 함께 목을 놓았다.
“커흑…….”
비로소 숨을 쉬게 된 황보자운이 죽다 살아난 표정으로 호흡을 골랐다.
“괜찮은 거야?”
걱정스런 남궁단의 물음에 어느 정도 숨을 고른 황보자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 누구야?”
고덕을 힐긋거리며 묻는 황보자운에게 남궁단이 답했다.
“세가의 은인이시다… 그리고 보기보다 연세가 높으시고…….”
남궁단의 입에서 연세란 표현이 나온 탓에 대강의 사정을 눈치챈 황보자운이 엉거주춤 포권을 취해 보였다.
“미처 연배를 몰라 뵙고… 죄송합니다.”
사실 사과를 한다면 고덕이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강호에선 힘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그 강자지존의 철칙이 철저히 지켜지는 강호의 생리는 황보세가라는 울타리를 가진 황보자운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흠흠… 괜찮네.”
고덕도 겸연쩍은 표정으로 헛기침을 했다. 너무 흥분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탓이다.
어색하지만 대충 상황이 정리되자, 고덕의 물음이 다시 황보자운을 향했다.
“아까 했던 말이 사실이야?”
“어떤… 혹시 황제의 사신이 왔었다는 거 말입니까?”
“그래, 그거.”
“예, 사실입니다. 한 사나흘 되었지요. 떠났다는 소식은 들은바 없으니 아마 아직도 왕부 안에 머물고 있을 겁니다.”
황보자운의 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고덕의 신형이 사라졌다.
초절정과 절정 고수들이 즐비하게 서 있는 눈앞에서 사라졌건만, 남겨진 누구 하나 고덕이 어디로 어떻게 사라졌는지 알아차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뭐, 뭐야, 저 양반.”
놀란 황보자운의 경악성만이 합비의 거리를 돌 뿐이었다.
* * *
일행과 헤어진 고덕이 향한 곳은 균사 왕부였다.
이미 수십 번도 더 들락날락거린 곳이었기에 아직 해가 쨍쨍한 대낮임에도 왕부로 스며드는 고덕의 행동은 자연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왕부로 스며든 고덕은 한참 움직인 끝에 원하는 이들을 찾았다.
함께 파견 나온 나 공공과 담소를 나누던 해위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갑자기 사람이 솟아오르는 괴사에 기겁을 했다.
“흐힉!”
놀라서 벌떡 일어선 해위와는 달리 나 공공은 입에 거품을 물고 기절해버렸다.
동창에 있는 무위태감(武衛太監)인 자신이 이리 놀라는데, 황명의 출납을 담당하는 시종원의 일반 환관이 버틸 리 만무했던 것이다.
“거참, 새가슴도 아니고…….”
“누, 누구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해위에게 고덕이 물었다.
“네 상관과 아는 사람.”
“제, 제독태감을 아시오?”
“제독태감? 그런 놈은 몰라.”
“그럼 누굴…….”
“황제.”
“그, 그 무슨 망발을!”
충성심이 깊은 건지 아니면 몸에 배인 습관인지는 몰라도 해위는 다른 이유로 입에 거품을 물었다.
달려들 기세인 해위의 모습에 피식 웃어버린 고덕이 말을 이었다.
“이번 일, 황제의 뜻은 맞는 거야?”
갑자기 날아든 정치적인 질문에 해위는 흠칫 서버렸다.
“무, 무슨 말이오?”
“내가 만났던 황제는 이런 일을 벌일 사람이 아니라서 묻는 거야. 확실히 대답해. 황제의 뜻이 맞아?”
고덕의 물음에 해위의 눈동자는 쉴 새 없이 흔들렸다.
“다, 당신은 누구요?”
“나? 고덕.”
처음 듣는 이름이다. 동창의 감승(監丞)으로 황제의 두터운 신임 덕에 웬만한 황제파의 거두들은 대부분 알고 있는 자신이었지만, 이런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처음 듣소만…….”
의심스러운 표정의 해위에게 고덕이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그럴 거야. 별로 친하지 않으니까.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고덕의 재촉에 해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일이 균사 왕부의 신왕 즉위라면 그것은 폐하의 의지가 맞소.”
상대의 눈을 한참 동안 노려보던 고덕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제길.”
사실은 진위를 알 수 없는 상대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면 거짓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는 소리를 시험해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고덕은 도저히 진위를 가려낼 수 없었다.
결국 고덕이 선택한 것은 그가 예전부터 즐겨 사용하던 방식이었다.
“흡!”
언제 어떻게 당했는지 순식간에 마혈을 제압당한 해위를 의자에 앉힌 구덕이 물었다.
“솔직히 부는 게 좋아. 버텨 봐야 네 몸 상하고, 난 시간을 잃지. 불어. 황제의 본뜻이 아니지?”
고덕의 물음에 해위는 눈만 뒤룩뒤룩 굴릴 뿐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버텨 보겠다는 말이군. 의지가 굳다는 것도 좋은 일이지.”
“크흡.”
억눌린 비명 소리가 해위의 입을 비집고 흘렀다.
해위의 허벅지에 놓인 고덕의 손가락들이 천천히 살을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음만 흘릴 뿐 해위는 여전히 입을 꾹 다문 채 말이 없었다.
“제법 버티는군.”
고덕의 말 뒤로 해위의 눈에 흰자가 드러났다.
양쪽 허벅지에 파묻힌 고덕의 손가락이 깊숙이 파고들고 있었던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