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64장 (65/129)

제64장. 전의발(傳衣鉢)-제자를 들이다

구의 ‘글쎄요.’란 대답은 고덕에게 ‘따르겠습니다.’란 말로 들린 모양이었다.

이후부터 고덕의 교육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죽여!”

고덕과 수십의 산적이 지켜보는 가운데 구와 두 명의 산적이 죽기 살기로 싸웠다.

무기는 없다. 주먹질 싸움이라 당장 죽지는 않겠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덩치가 구의 배는 넘는 산적들은 꽤나 거친 싸움에 이골이 나 보였다.

“사, 살려 주십시오.”

사력을 다해 기다시피 도망 나온 구를 자신이 그려 놓은 원 안으로 밀어 넣는 고덕은 무심한 표정이었다.

“안 죽는다.”

질질질… 퍽퍽, 쾅- 퍽.

자신의 눈치를 보며 다리를 잡고 끌고 들어간 두 산적의 손에 질펀하게 다져지는 구를 보며, 방금 한 말이 지켜질지 자신이 없어지는 고덕이었다.

결국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지 열심히 처맞는 구를 바라보던 고덕의 손이 올라갔다.

“그만.”

풀썩-

두 산적의 손에서 놓인 구는 힘없이 쓰러졌다.

그런 구를 바라보는 산적들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꿀꺽-”

자신을 바라보는 수십의 시선 속에 고덕의 무심한 음성이 울렸다.

“금창약 있나?”

“대협께서 금창약을 찾으신다. 냉큼 대령해라.”

단 한 방에 길게 누워버린 채주를 대신해 고함을 지른 것은 한쪽 눈두덩이 시퍼렇게 변한 일로채의 부채주 감양이었다.

“예이~”

감양의 말에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산적들이 산채를 뒤져 금창약이란 금창약은 모조리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봇짐 하나는 오지게 채울 만큼의 금창약이 모여들었다.

그것들 속에서 개중 제법 약기가 흘러나오는 것을 골라낸 고덕이 정신이 혼미한 채 늘어져 있는 구에게 다가갔다.

훌렁-

단 몇 번의 움직임에 속옷만 남긴 채 벌거숭이가 된 구의 전신에 금창약이 발라졌다.

그런데 금창약을 바르는 고덕의 손길이 조금은 특이하다.

고덕의 손이 이르는 곳마다 구의 살결이 물결치듯 움직인 것이다.

‘제길, 격체진기는 이제 꿈도 못 꾸겠군.’

처음엔 보는 눈도 있고 해서 격체진기를 이용해 추궁과혈을 해주려던 고덕이었다.

한데, 미친 듯이 움직이는 내기는 추궁과혈이 아니라 아직 채 피어나 보지도 못한 구의 혈도를 모조리 날려 버릴 기세로 뛰쳐나간 것이다.

기겁을 해 혈문을 닫고 내기를 안으로 불러들여 다행히 최초의 정식 제자를 살해하는 불상사는 막았지만, 애초의 의도는 완전히 빗나가 버렸다.

결국 약을 발라주는 척하며 추궁과혈을 해야만 했다.

그것도 내기가 밖으로만 꺼내놓으려 하면 미친년 널뛰듯 하는 탓에 내력은 모조리 가둬두고 직접 손으로 혈문을 두들기고 살을 문질러야만 했던 것이다.

마치 사랑하는 여인을 쓰다듬듯 말이다.

“흐음…….”

그런 고덕을 바라보는 산적들의 표정엔 당황감과 함께 경계심이 떠올랐고, 거리는 점점 더 벌어졌다.

그 상황을 모를 리 없는 고덕은 제자에 대한 살행을 심각하게 고심해야만 했다.

* * *

그로부터 이틀 후, 온몸이 멍투성이인 구를 앞장세운 고덕이 일로채의 책문을 나섰다.

멀어져 가는 고덕을 바라보던 감양이 가래침을 뱉었다.

“퉤- 똥통에 튀겨 죽일 새끼. 세상에 산적을 털어먹는 놈이 어디에 있어!”

방방 뛰는 감양의 모습에 미적거리던 당주 하나가 다른 산적들의 눈짓에 마지못해 다가섰다.

“저기… 부채주님, 이제 어쩌지요?”

“뭘 어째. 나가서 금창약 사와야지. 채주와 다른 애들 다 죽일 셈이야?”

“마을에 내려가면 위험하지 않을까요?”

산채라고는 하나 녹림에 적을 올린 곳도 아니고, 그저 뒷골목 왈패들이 화전민들과 뭉쳐져 만들어진 풀뿌리 초적에 불과할 뿐인 일로채였다.

더구나 일로채의 산적들은 다른 곳의 산적보다 관군이 더 무서웠다.

그들의 중심이 된 왈패들이 미처 알지 못해 새로 부임한 고을 현령의 아들을 반 죽여 놓고 도주해온 탓이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어.”

감양의 음성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일로채의 위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산채를 떠난 고덕은 힘없이 걷고 있는 구를 타박했다.

“싸움을 몸으로 하는 놈이 어디에 있나?”

“그럼 싸움을 몸으로 하지 뭘로 합니까?”

지난 삼 일간 죽음의 문턱을 두어 번 왕복했던 탓일까? 구는 이전의 어려움은 모두 놓아버린 것 같았다.

“미련한 놈, 그러니 상대의 주먹을 모조리 몸으로 막지.”

고덕의 힐난에 구의 입은 댓발이나 나와버렸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제부터 제대로 배워보자는 말만 던진 고덕이 느닷없이 산채로 쳐들어갔던 것이다.

물론 생전 처음 들어보는 욕을 날리며 칼을 꼬나 쥐고 달려 나온 산적 몇을 맨손으로 순식간에 반송장으로 만들어놓는 모습은 충분히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고덕의 신위에 압도당해 바닥에 납작 엎드린 나머지 산적들에게 기껏 요구한 것이 구, 자신과의 대련 상대였을 때엔 기가 차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싸움이라고는 평생 해본 적도 없는 자신을 바닥에 작대기로 대충 그려 놓은 원 안으로 밀어 넣으며 실전이 최고라는 말을 던지는 고덕을 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결정적으로 구, 자신은 고덕의 제자가 되겠다고 말한 적이 결단코 없었던 것이다.

마을로 들어서는 고덕과 구를 바라보던 사람들은 슬금슬금 피하며 수군거렸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고덕과 구 둘 다 자의와 타의에 의해 넝마 수준으로 변해버린 옷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 구의 경우엔 무슨 피부병이라도 든 듯이 전신이 울긋불긋한 데다 떡 지도록 처발라놓은 금창약들이 마르며 허옇게 들떠서 보기엔 무슨 중증 환자처럼 보였다.

“옷이라도 좀 얻어올 걸 그랬나?”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고덕을 바라보는 구의 표정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사실 이들이 산채를 나설 때 가져온 것이라곤 봇짐을 가득 채운 금창약뿐이었다.

그 탓에 구는 고덕이 자신을 괴롭히는 데 정신이 팔려 정작 필요한 건 하나도 챙기지 못한 것이라고 작게 투덜거렸다.

하지만 사실 고덕은 고덕대로 어려움이 많았다.

그의 몸속에선 여전히 통제되지 않은 내기가 미친 듯이 혈맥을 따라 움직여 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고덕은 구를 위한 금창약을 제외하곤 필요하게 될 물품을 느긋하게 챙길 여유를 가질 수 없었다.

여하간 그 때문에 고덕과 구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아침 해가 뜨기 전에 산채에서 출발해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시점에 마을에 도착한 고덕과 구인지라 거의 하루를 모두 굶은 셈이었다.

그것이 그들의 발길을 가장 먼저 마을 입구에 자리한 객잔으로 이끌었다.

“저기… 자리가 없습니다만.”

고덕과 구를 재빠르게 훑어본 점소이가 객잔의 입구를 가로막아 섰다.

“그럼 저 자리들은 뭐냐?”

고덕의 물음에 점소이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답했다.

“예약석입지요.”

천연덕스러운 점소이의 답에 고덕은 화조차 나지 않았다.

“돈은 있다만.”

고덕의 말에도 점소이의 고개는 야멸치게 저어졌다.

“돈 때문이 아닙니다요, 손님.”

“하하, 이것 참.”

절로 나오느니 헛웃음뿐이다. 하지만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점소이가 왜 이러는지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굴에 나타나는 고까운 표정은 어쩔 수 없었다.

그 표정을 흘깃거린 점소이는 다시금 눈앞의 두 사람을 자세히 살폈다.

하지만 자신이 걱정하는 부류는 아니라고 확신했는지 여전히 문 앞에서 비켜서지 않았다.

그런 모습에 안 되겠다고 생각했던지 구가 나섰다.

“이보게, 소형제.”

“예, 손님.”

“사정 좀 봐주게. 후사는 할 터이니…….”

후사란 말에 점소이의 눈이 반짝거렸다.

“죄송합니다요, 손님.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자리는 이미 다 예약이 되어 있습니다요. 하지만…….”

뒤에 딸린 하지만이란 말에 구가 얼른 고덕에게 눈짓을 했다.

“왜 눈은 끔뻑거리고 그래?”

몰라서가 아니다. 눈에 뻔히 보이는 점소이의 짓거리가 거슬린 탓이다.

아마 일반인이 아니라 강호인이었다면 진즉에 물고를 냈을 일이었다.

하지만 그 속내를 알 길 없는 구는 고덕이 자신의 눈짓에 담긴 뜻을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생각했던지 답답하다는 표정이었다.

“돈 말입니다요, 돈.”

바짝 다가서서는 작게 속닥거리는 구에게 고덕은 일부러 큰 목소리를 냈다.

“돈? 무슨 돈?”

당연히 점소이의 표정이 좋을 리 없다. 흘깃 뒤를 돌아보는 것이 아마도 주인이 그 소리를 듣지 않았는지 살펴보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 상황에 당황한 것은 구였다. 괜히 일을 그르칠까 걱정한 구가 얼른 고덕에게 속삭였다.

“일단 은자를 조금만 줘 보세요.”

구의 요구에 고덕은 마지못한 표정으로 은자 하나를 꺼내놓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달리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고덕이 내민 은자를 얼른 받아든 구가 환한 미소로 점소이에게 다가갔다.

“방법이 있는 거겠지? 소형제.”

은근한 구의 음성에 자신의 손에 쥐어진 은자를 확인한 점소이가 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흠흠… 일단 방을 잡아드리지요. 몸을 씻으시고 옷도…….”

말문을 닫고 아래위로 훑어보는 점소이에게 구가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옷도 갈아입어야지. 내 소형제에게 부탁을 할 테니, 좀 사다주게.”

구의 부탁에 점소이가 다시 손을 내밀었다.

“방 값과 옷값은 미리 계산해주셔야 합니다요. 물론 목욕을 하시려면 추가 요금이…….”

주저리주저리 떠들던 점소이의 말이 멈추어졌다.

불현듯 다가온 고덕이 점소이의 손에 쥐어져 있던 은자를 도로 빼앗아간 탓이다.

“대, 대인!”

놀라는 구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고덕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가자.”

그 말만 남기고 성큼성큼 걸어가는 고덕을 당황한 구가 황급히 따라나섰다.

“아니, 왜 그러십니까?”

황급히 쫓아온 구의 물음에 고덕이 툴툴거렸다.

“별 시답지 않은 자식이 어디서……. 됐다. 개울에서 대충 씻고, 사냥하면 돼.”

고덕의 말에 구는 절로 터져 나오는 한숨을 막을 수 없었다.

“에휴~”

“안 따라오고 뭐해?”

고덕의 부름에 잠시 발길을 멈추었던 구가 황급히 따라붙었다.

“예. 갑니다, 가요.”

그렇게 멀어져 가는 두 사람을 바라보던 점소이가 자신의 빈손을 내려다보았다.

“치사하게 줬다 뺐냐…….”

점소이의 불만 가득한 음성이 공허하게 울렸다.

* * *

객잔을 떠나 아예 마을 밖으로 나온 고덕과 구는 근처 개울가에서 몸을 닦았다.

마을 안에도 개울은 흘렀지만,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곳에서 옷을 벗고 몸을 닦을 순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깨끗해진 몸에 마을에서 사 가지고 나온 옷을 입은 두 사람의 모습은 좀 전과는 확실히 달라 보였다.

“가서 사냥 좀 해와라.”

고덕의 말에 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냥 객잔으로 가시면…….”

“자리가 없다잖냐? 다 예약석이란 소리 못 들었어?”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걸 모를 고덕이 아니지만, 심술이 난 그는 객잔에서 돈을 쓰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여하간 버럭 화를 내는 고덕의 서슬에 눌린 구가 할 수 없이 뭉그적거리며 일어섰다.

“시간이 조금 걸립니다, 대인.”

“가능한 빨리 와.”

고덕의 답에 ‘예, 예.’ 거린 구가 산속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구가 산속으로 들어가자 고덕은 개울가에 주저앉았다.

여전히 비 오는 날 미친년 동네 뛰듯 줄기차게 움직이는 내기를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눈을 감고 내기를 쫓아 침잠해 들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내기를 관조하던 고덕이 불현듯 시간의 흐름을 느끼곤 눈을 떴다.

해가 완전히 저물어 어둑어둑해진 개울가엔 여전히 자신 혼자뿐이었다.

“이 자식이, 왜 아직 안 오는 거야?”

여태 돌아오지 않은 구가 신경 쓰인 고덕이 그가 사라진 산속으로 발길을 옮겼다.

산속에 들어선 고덕은 어렵지 않게 구를 찾을 수 있었다.

작은 언덕 아래에서 구는 손에 넝쿨 줄기 같은 것을 쥐고는 바짝 엎드려 있었다.

“뭐하냐?”

그를 내려다보며 묻는 고덕에게 구가 엎드리라는 손짓을 해댔다.

“어서 엎드리세요, 대인.”

그 손짓에 엉겁결에 엎드리며 고덕이 물었다.

“왜?”

“저기요.”

구의 손짓을 따라 시선을 옮긴 곳엔 토끼 한 마리가 구가 설치해놓은 것 같은 덫 앞에서 알짱거리고 있었다.

그제야 구가 뭘 하고 있는지 알아차린 고덕이 실소를 지었다.

“지금 저거 잡느라 여태 못 내려왔던 거냐?”

고덕의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미처 보지 못한 구가 자랑스럽다는 듯이 답했다.

“그럼요. 제가 토끼가 다니는 길목을 찾느라 얼마나 애를 먹었다고요. 하지만 이제 다 됐어요. 저놈만 잡으면 됩니다.”

구의 말에 고덕은 어이없으면서도 어찌 되는지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자신도 저런 엉성한 덫에 정말 토끼가 잡히는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두 사람이 주시하는 가운데 덫 앞에서 계속 알짱거리기만 하던 토끼는 뭔가 낌새를 느꼈는지 덫을 피해 후다닥 도망가고 말았다.

그렇게 토끼가 도망가자 구가 아쉬운 듯이 중얼거렸다.

“이번엔 잡힐 줄 알았는데. 다음에 또 오겠지.”

그 말에 고덕이 물었다.

“그럼 이번이 처음이 아니란 말이냐?”

“예, 세 번째였어요. 첫 번째는 덫에 발을 집어넣긴 했는데 제가 너무 늦게 잡아당기는 바람에. 헤헤헤.”

가볍게 헤실거리는 구에게서 눈을 돌린 고덕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렇게 일어서 계시면 토끼가 안 옵니다.”

놀란 구가 제지했지만, 고덕은 들은 체도 안 하고 방금 전에 토끼가 사라진 곳으로 움직였다.

“이런! 그러면 안 오는데…….”

토끼들이 다니는 길을 따라 숲 속으로 모습을 감춘 그를 향한 구의 불만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양손에 토끼 한 마리씩을 잡아 든 고덕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는 구를 일별한 고덕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뭐해? 받지 않고.”

“아, 예.”

당황한 구가 토끼를 받아 들자, 고덕은 개울가로 향했다.

멍한 시선으로 그런 고덕을 응시하던 구가 황급히 뒤를 따랐다.

토끼는 예상외로 살아 있었다.

껍질을 벗기려다 발버둥 치는 토끼로 인해 기겁을 한 구는 경이로운 시선으로 고덕을 바라보았다.

“어찌하신 겁니까?”

불에 토끼를 굽다 말고 자신을 바라보는 구에게 고덕이 물었다.

“뭐?”

“토끼 말입니다, 대인.”

“토끼가 왜?”

“살아 있던 거요. 어떻게 살아 있는 게 꼼짝도 안 하고 있던 겁니까?”

“혈을 짚은 거야.”

“혈이요?”

“그래. 마혈을 막아놓으면 움직이지 못하거든.”

“마혈… 그게 뭡니까?”

눈을 또랑또랑 뜨고 묻는 구에게 고덕은 피식거리며 제법 상세히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혈도와 혈문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구는 놀란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그, 그럼 사람 몸에 피가 흐르는 길이 그렇게 복잡하단 말씀이십니까?”

“내가 말한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지. 기와 피는 함께 흐르는 것이기도 하니까. 전신에 퍼진 세맥까지 모조리 따진다면 수를 셀 수 없을 테니까 말이야.”

“대단하군요.”

“그래, 대단하지. 그래서 사람의 몸을 소우주라 말하는 것이기도 하고.”

“그럼 토끼는 어떻게 움직인 겁니까? 마혈을 막아놓았다면 일부러 풀어주기 전에는 움직이지 못해야 정상이지 않습니까?”

구의 물음에 고덕이 답했다.

“네가 껍질을 벗겼으니까. 혈문은 달리 육문이라고도 해서 피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거든. 그저 건드리는 것이었다면 모를까, 온 껍질을 모두 벗겨 냈으니 그 충격에 마혈이 풀렸을 거야.”

“아~ 참, 오묘하군요.”

“그런 셈이지.”

그 뒤에도 구의 질문은 멈추지 않았다. 질문이 많아질수록 무공에 대한 그의 관심은 커져 갔다.

그 모습에 고덕의 입가엔 작은 미소가 깃들었다.

꽤 긴 시간 자신의 궁금증을 쏟아내던 구가 잠이 든 시각, 고덕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내부를 관조하고 있었다.

내기는 여전히 혈맥을 따라 미친 듯이 움직이고 있었다.

우스운 건 그렇게 정신없이 도는 내기에도 불구하고 혈맥들이 나름대로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자신의 기억에 단편적으로 남아 있는 멸겁신혈의 비급에 의하면 내기들은 지금처럼 개별로 움직이지 않았다.

‘무언가 이것을 하나로 합쳐 놓는 길이 있을 텐데…….’

비급을 제대로 살피지 않았던 후회가 다시금 밀려왔다.

자신의 통제를 따르지 않는 괴물을 몸속에 가둔 셈이 되어버린 고덕이었지만, 그 괴물은 자신의 뜻을 따라 밖으로 나가긴 한다.

몇 번 더 시험해본 결과, 미친 듯이 혈맥을 움직이던 내기들은 고덕의 의사가 결정되면 미련 없이 열려진 혈맥을 타고 폭발하듯 외부로 뛰쳐나갔다.

이전처럼 매끈하고 부드러운 운용은 불가능했지만, 다행히도 고덕이 가진 모든 무공을 무리 없이 실현해내었다.

물론 문제도 있었다.

결과를 짐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살짝 나무 몇 그루를 베어버린다는 느낌으로 휘두른 검에서 일어난 검기가 숲의 절반을 때려 부숴놓기도 하고, 일 장을 이동한다는 생각으로 밟은 보법은 고덕의 신형을 이십여 보 건너로 이동시켜 놓기도 했다.

일견 더 뛰어나졌으니 좋지 않느냐고 물을 이도 있겠지만, 제대로 상황을 파악하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었다.

쉽게 설명해서 적을 죽이겠다고 휘두른 검에 그 너머에 서 있던 애먼 아군까지 함께 베어 넘어갈 수 있는 것이다.

보법도 마찬가지다. 한 보로 적의 칼을 피한다는 생각에 움직였는데, 무지막지한 움직임 끝에 적의 검날 아래 목을 들이미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었다.

고덕은 그것을 보정하기 위해 수혈이 짚여 깊게 잠이 든 구의 곁에서 날밤을 새며 움직여야만 했고, 그 탓에 아침에 일어난 구는 하룻밤 새 눈가 밑이 시커멓게 변한 고덕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려야 했다.

* * *

아침이 되자 고덕과 구는 다시금 마을 안으로 들어섰다.

어젯밤에 먹다 남은 토끼 고기를 바라보던 고덕이 느끼하다면서 소면을 찾은 탓이었다.

지난 저녁에 쫓겨났던 객잔은 고덕과 구에게 아무 소리 없이 자리를 내어주었다.

입구를 가로막고 고개를 저었던 점소이는 그 둘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간단히 소면과 채소볶음으로 배를 채우던 고덕과 구의 귀로 사람들의 말이 들려왔다.

“참, 자네 그 말 들었나?”

“무슨 말?”

“동북어위도총사가 균사 왕부에 온다는 말 말이야.”

“아니, 동북 삼성의 왕이 균사 왕부에는 왜?”

동북어위도총사는 왕위가 없는 왕이다. 그것은 관리들만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에게도 다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야 나도 모르지. 하여간 그 때문에 안휘에서 이름깨나 얻고 있는 상단들이 모조리 합비로 모여들고 있다더군.”

“그들이 왜?”

“왜긴, 동북 삼성과의 교역 때문이겠지.”

“동북 삼성과? 하지만 동북 삼성은 황제와 척을 졌던 왕부 관할 지역과는 교역을 금지해왔잖아.”

“그랬지. 그 탓에 안휘도 동북 삼성과 한참 동안 교역을 못해왔던 것이고.”

“그런데 왜 모이는 거야?”

“그야 당연히 이번 도총사의 방문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겠지.”

“도총사의 방문과? 설마… 동북 삼성과 균사 왕부가 동맹을…….”

자신이 말을 해놓고도 놀란 상인이 주변을 살폈다. 그만큼 파문이 클 말이었던 것이다.

“글쎄, 동맹까지는 모르겠지만 경색된 관계가 풀어질 모양이야. 그렇지 않으면 뭘 얻어먹을 게 있다고 안휘에서 이름난 상단들이 합비로 모여들고 있겠냔 말이지.”

“그럴 수도 있겠군.”

“그래. 그러니 우리도 가보자는 말일세.”

“우리가? 우리 같은 피라미 상인들이 뭐하러?”

“큰 거래야 우리와 연이 없겠지만, 작은 거래는 또 모르지 않겠나?”

“설마 도총사를 쫓아 동북 삼성의 상인들이 내려오는 게야?”

“확실하진 않지만, 이름깨나 있다는 상단들이 몰려드는 걸로 보아선 그렇지 않겠나?”

“그러다 동북 삼성의 상인들이 안 오면?”

“도총사 행렬이라도 구경하는 거지, 뭐.”

“흠… 그것도 나쁘지 않겠는걸.”

두 상인의 대화를 귀담아듣던 고덕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지금의 동북어위도총사가 누구인지 알기 때문이다.

더구나 호 판관이 실종, 또는 자의에 의한 은신 직후에 그의 아버지인 동북어위도총사가 황제와 반하는 균사 왕부로 향한다는 것이 고덕의 관심을 끌었다.

“합비로 가야겠다.”

“합… 비요? 소흥이 아니고 말씀입니까?”

구의 물음에 고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찾아야 할 사람이 그쪽에 있지 싶다.”

그 답에 구는 궁금한 표정으로 잔뜩 굳은 고덕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 * *

간단히 식사를 마친 고덕과 구는 그길로 안휘로 길을 잡았다.

어차피 절강에 위치한 소흥으로 가려고 해도 안휘를 거쳐야만 했으니, 여로는 별로 변한 게 없었다.

그렇게 하남을 벗어나 안휘로 들어선 고덕과 구는 봉태란 도시로 들어섰다. 적당히 객잔을 잡아 씻고 더러워진 옷도 갈아입기 위해서였다.

괜히 지난번처럼 객잔의 출입을 거절당하지 않으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렇게 ‘봉일’이란 이름의 객잔으로 들어서던 고덕은 생각지 못했던 사람을 만났다.

“대협!”

놀란 음성에 고개를 돌리던 고덕의 입가에 반가운 미소가 깃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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