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63장 (64/129)

제63장. 발전(發展)-경계를 넘어서다

이틀 만에 정신을 차린 고덕의 몸은 정상적이지 않았다.

하긴 내력이 바닥을 치는 상황에서 주변의 진기를 과도하게 끌어 썼으니, 숨이 끊어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일어나자마자 고덕이 한 일은 운기였다. 일단 자신의 몸 상태를 제대로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제길, 엉망이로군.”

반 각 만에 눈을 뜬 고덕의 눈매는 깊게 찌푸려졌다.

혈도는 둘째 치고 혈맥마저 온전한 곳이 없었던 것이다. 몸을 회복하려면 상당한 시일이 걸릴 듯싶었다.

그렇게 심란한 상황에서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들어섰다.

“대, 대협!”

멀쩡히 앉아 있는 그를 발견한 협련의 경호성에 고덕이 통박을 주었다.

“누가 들으면 죽었던 놈이 살아난 줄 알겠다.”

“괘, 괜찮으십니까?”

“별로.”

“예?”

“그다지 좋지 않아. 그나저나 마지막 기억에 네 얼굴이 들어 있던데, 잘못 본 건 아니었던 모양이군.”

고덕의 곁으로 다가앉은 협련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정신을 잃으시기 직전에 도착했습니다.”

“무슨 일로. 지금 같은 시기에 놀러온 건 아닐 테고?”

“그것이…….”

협련은 망설였다. 지금 상태에서 호 판관의 납치 사실을 알려야 할지 말지 좀처럼 판단이 서지 않았던 것이다.

“망설이는 걸 보니 뭔가 사단이 난 모양이로군.”

“그, 그게…….”

여전히 말을 못하고 머뭇거리는 협련을 고덕이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뭔가? 뭐기에 그리 머뭇거려?”

“그, 그것이… 사실은 호, 호 판관이…….”

“호 판관이 왜?”

고덕의 물음에 협련이 마지못해 답했다.

“납치를 당하신 거 같습니다.”

협련의 말에 잠시 움찔했던 고덕은 생각 외로 담담한 신색으로 물어왔다.

“납치를 당한 거면 납치를 당한 거지, 당한 거 같다는 건 또 뭐야?”

“그것이… 스스로 왕부를 나서신 탓에…….”

“스스로 왕부를 나가?”

“예. 당시 수문 장수의 말에 의하면 아무도 대동하지 않고 홀로 나가셨답니다.”

“그러면 잠시 어딜 다녀오기 위해 나간 것이겠지.”

“그게… 그렇게 사라지신 지 벌써 십여 일이 넘어가는지라…….”

협련이 왕부를 출발할 때가 호 판관의 행적이 묘연해진 지 칠 일이 지난 정도였고, 그가 소흥에서 이곳 정주까지 오 일이 걸렸으니 도합 십이 일간 소식이 없는 셈이었다.

협련의 말에 고덕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 정도의 시일이라면 분명 간단치 않은 문제가 발생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혼자 나갔다면 처음엔 자의에 의해서 나갔다는 건데, 혹시 남겨 둔 서찰도 없었고?”

“예. 아무런 언질도, 남겨진 서찰도 없었습니다.”

호 판관의 성격상 아무런 흔적도 남겨 놓지 않은 채 무단으로 왕부를 떠날 리 없었다.

그 말은 왕부를 나갈 때만 해도 자리를 오래 비워둘 생각이 없었다는 뜻이다.

“혹시 호 판관이 사라진 이후에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고?”

“그것이… 서찰이 한 통 오기는 했습니다만…….”

“호 판관에게서?”

“예. 개인적인 일로 잠시 왕부를 비우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만…….”

그 말에 고덕이 물었다.

“서체는 호 판관의 것이 맞고?”

“호 판관이 작성했던 다른 서류들과 대조를 하였는데, 동일한 서체로 판명되었습니다.”

“그럼 기다리면 될 일이지, 예까지 달려와서 납치를 당했다고 소란을 떨게 무어라고……. 쯧.”

못마땅한 고덕의 음성에 협련이 말을 이었다.

“처음엔 저희도 그리 생각했었습니다만, 다른 서찰이 하나 더 날아든 탓에…….”

“다른 서찰?”

“예. 놀라지 마십시오, 대협. 글쎄, 신임 동북어위도총사가 직접 보낸 서찰이었습니다.”

신임 동북어위도총사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고덕으로서는 그다지 색다른 감흥은 없었다.

다만 그가 호 판관의 감춰진 신분이 드러날 위험을 알면서도 서찰을 보냈다는 것이 이상할 뿐이었다.

“내용은?”

“저기… 안 놀라십니까?”

고덕의 반응이 자신의 기대와는 달랐던지 협련이 맥 빠진 표정으로 물었다.

“놀라야 하나?”

“당연한 거 아닙니까?”

“글쎄… 그다지 놀랍지는 않군. 그나저나 내용?”

거듭된 고덕의 요구에 협련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답을 이었다.

“일종의 경고 서찰이었습니다.”

“경고?”

“예. 신변에 위협이 증대될 가능성이 높으니 조심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흠… 위협이라……. 왕부의 대응은?”

“그 서찰 때문에 호 판관의 외유가 비정상적이라고 판단한 왕부 장군부에서 즉시 그의 신병을 확보하기 위해 움직였습니다만, 의혹만 커졌습니다.”

협련의 말에 고덕이 물었다.

“의혹만 커지다니, 다른 일이 생긴 건가?”

“그게… 호 판관이 왕부를 벗어난 것은 파악이 되는데, 소흥성을 나선 것은 파악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야? 알아듣게 설명해봐.”

고덕의 핀잔에 협련이 설명을 이었다.

“그러니까, 호 판관이 왕부를 벗어난 기록은 찾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소흥성의 사대문 어디에도 호 판관이 나간 기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가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았을 수도 있잖은가?”

“왕부는 물론이고, 소흥성은 이미 몇 개월째 비상 상황입니다. 왕부의 요인들을 포함한 모든 이들에 대해 성문을 출입할 경우엔 누구도 예외 없이 호패를 확인하고 출입 기록을 남기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호 판관도 기록이 남아야 정상이다?”

“예. 더구나 소흥성 사대문의 수문장들은 호 판관의 얼굴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호 판관의 출입을 놓칠 리 없지요.”

협련의 설명이 끝나자 고덕의 표정이 굳었다.

그도 이번에 벌어진 일의 뒤에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그럼 현재는 어찌하고 있나?”

“왕야의 부탁으로 후량과 왕팔이 수색에 나섰습니다만…….”

“팔이가 흔적을 찾지 못했단 말인가?”

믿기지 않는다는 고덕의 물음에 협련이 조심스럽게 답했다.

“그게… 왕팔도 이해할 수 없답니다. 소흥성 내의 한 객잔에서 마치 하늘로 솟은 듯이 흔적이 사라졌답니다.”

“팔이가 못 찾을 흔적이라……. 특이한 점도 없고?”

“실은… 호 판관의 흔적이 지분 냄새에 묻혔다는 말은 했습니다만…….”

협련의 말에 고덕은 성장을 했던 고운 자태의 호철랑을 떠올렸다.

그녀가 여장으로 움직였다면 타의에 의한 것은 아닐 것이란 판단이 들었다.

하지만 왜? 지금 같은 상황에서 그녀가 스스로 소흥 왕부를 벗어났는지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다.

더구나 동북 삼성에 있는 부친의 경고가 날아들 정도로 그녀의 주변에서 모종의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도 걱정이 되었다.

“시간은 정확히 얼마나 지났지?”

“오늘까지 딱 열이틀입니다.”

그 시간이면 상당한 거리를 이동할 수 있다. 더구나 마차를 이용했다면…….

“아니지, 굳이 마차를 이용할 거면서 여장을 할 필요가 없지…….”

“예?”

자신의 중얼거림을 이해하지 못한 협련의 반문을 간단히 무시한 고덕이 말했다.

“곧바로 움직일 수 있도록 마차를 준비해.”

“마… 차요?”

“그래, 마차.”

“마차는 왜 필요하신 건지 여쭈어봐도 됩니까?”

“그냥 시키면 시키는 대로 좀 해!”

갑자기 버럭 짜증을 내는 고덕의 모습에 협련은 화들짝 놀랐다.

“아, 예. 아, 알겠습니다.”

고덕의 서슬에 놀라 서둘러 방을 나선 협련은 여전히 마차를 찾는 이유는 짐작하지 못했다. 그 탓에 그가 구해온 마차는 사방에 훤히 보이는 무개(無蓋) 마차였다.

그 마차를 어이없이 바라보던 고덕이 자신의 청에 밖으로 나온 순무에게 물었다.

“마차를 하나 빌릴 수 있겠나?”

마당에 버젓이 서 있는 마차를 두고 묻는 말이었기 때문인지 순무는 곧바로 고덕의 의중을 알아차렸다.

“혹, 지붕이 있는 마차를 원하십니까?”

“음… 참, 마부도 가능하다면 부탁하지.”

고개를 끄덕이는 고덕에게 순무가 답했다.

“곧 준비를 갖춰드리지요.”

순순히 답을 한 순무가 지시를 내리자, 근처에 서 있던 관리 하나가 바쁘게 외원을 향해 달려 나갔다.

그렇게 수하를 보낸 순무가 고덕에게 물었다.

“그런데 어디를 가십니까?”

“가볼 곳이 생겼거든.”

“하면, 이곳은……?”

지난 싸움을 두 눈으로 본 순무의 불안감은 대단히 깊었다. 강호인들의 싸움이 그리 무서울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처음 알았기 때문이다.

“저자가 이곳에 있을 거야.”

고덕의 시선 끝에 멍한 표정으로 서 있는 협련을 일별한 순무가 미덥지 못한 눈길을 보냈다.

“저자로 될까요?”

순무의 걱정에 고덕이 피식 웃었다.

“그래도 한때는 황제의 어전 시위였던 놈이니, 잘 해낼 거야.”

자신의 말이 예상외였던지 꽤나 놀라는 순무의 뒤로 지붕이 씌워진 마차가 들어서고 있었다.

* * *

불만이 가득한 협련을 남겨 둔 채 고덕을 실은 마차는 정주를 벗어나 빠른 속도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그 마차 안에서 고덕은 회복에 전념했다.

지금 상태에서 또다시 북황 같은 인사와 부딪치게 되면 살아남기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흔들리는 마차의 진동에 아랑곳하지 않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내기를 다스리던 고덕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잘 돌아가던 내기가 갑자기 비틀리기 시작한 탓이다.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내기를 돌리기 때문에 이 할가량의 내력만 운용하던 고덕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당황하고 있을 수만도 없는 노릇. 다시 삼 할의 내력을 끌어올려 비틀리다 못해 배배 꼬이기 시작한 이 할의 내력을 바로잡으려 했다.

하지만 새롭게 일어선 삼 할의 내력은 비틀려 꼬여 버린 이 할의 내력에 힘없이 휘말려 버렸다.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 나선형으로 꼬여 혈도를 치달리기 시작한 내기가 점점 속도까지 빨라지기 시작했다.

안정되지 않은 상태의 운기에서 통제 불능의 내기는 치명적이다.

자칫 건드리지 말아야 할 혈도라도 치는 날에는 평생 반신불구로 살아야 하거나 아예 목숨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고덕이 할 수 있는 일은 남은 모든 내력을 동원해 통제를 벗어난 내력을 바로잡는 것뿐이었다.

묶어두고 감추어두었던 내기들이 일제히 깨어났다.

십 할의 내공도 모자라 선천진기의 영향을 받는 잠재력까지, 흔히 말하는 십이성 내공이 모조리 몰려들어 나선형으로 꼬여 혈맥을 달리는 내기를 잡기 위해 움직였다.

마차 안의 사정이 그러니 마차 밖이라고 평탄할 리 없다.

마부는 갑자기 일어서는 소름은 둘째 치고, 마차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나무들의 비명 소리에 두려운 표정이 역력했다.

강대한 내기의 힘을 이기지 못한 마차의 나무들이 뒤틀리거나 어긋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마차 안에선 아무런 소리도 없다. 당연히 내기를 다스리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 고덕이 말을 할 수가 없었던 탓이다.

그러니 마부는 마차를 세울 수 없었다.

출발하기 전, 하늘 같은 순무가 목숨을 바쳐서라도 원하는 곳까지 안전히 모시라는 특명을 받은 까닭이었다.

관아에 딸린 노비로서 마부는 그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거역하는 순간 자신의 목숨만이 아니라 관아에 남겨진 가족들의 목이 함께 날아갈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 탓에 마차는 비명을 지르며 계속 달려가고 있었다.

‘제길, 마차라도 세울 수 있었으면…….’

반대로 마차 안에서 꼬인 내력을 풀어내려 안간힘을 쓰는 고덕은 마차가 서주길 바랐다.

마차의 진동만 사라져도 내기의 조정이 조금은 수월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바람과는 달리 마차는 여전히 질주 중이었고, 은근히 겁을 먹은 마부로 인해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속도가 빨라진 만큼 마차의 진동은 늘어났다. 그만큼 내기의 수발(受發)은 조금 더 힘들어진 셈이다.

그것이 결국은 혈맥에 작은 상처를 내었다.

“큭.”

작은 내상이라지만, 내기가 불안정한 상태에서 입은 내상은 자못 심각한 위험을 초래한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내상을 다스리기는커녕 비틀린 내기를 바로잡는 데 모든 능력이 동원된 탓에 상처는 고스란히 피해로 돌아왔다.

실낱같은 핏줄기가 입가를 타고 흘렀지만, 고덕은 그것은 신경조차 쓰지 못했다.

오로지 통제를 벗어난 내기를 바로잡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번 엇나간 내기는 좀처럼 바로잡히지 않았다.

원래의 이 할에 한순간에 잡아먹힌 삼 할을 합해 오 할의 내기가 뒤틀려 나선형을 이루며 혈맥을 치달렸다.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일어선 칠 할의 내기가 악착같이 통제력을 발휘해보려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통제력 회복은 둘째 치고, 끌려다니기에 바빴던 것이다.

그렇다고 분리시키지도 못했다. 나선형으로 꼬여 달리기 시작한 오 할의 내기에 자락을 잡힌 듯 칠 할의 내기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태는 점점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렀다.

통제를 벗어난 내기에 잡아먹히지 않았다 뿐이지, 붙들린 채 혈맥을 달려 대는 속도는 이미 고덕의 통제를 벗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래서야 잡아먹히지 않은 것이 의미가 없었다. 오히려 하나가 아닌 두 개의 내기가 달려 대는 통에 혈맥은 터질 듯이 요동쳤다.

아득해져 가는 정신을 다잡기 위해 고덕은 혀를 깨물어 피를 냈다.

비릿하게 도는 혈향과 짜릿한 통증은 고덕의 정신을 붙잡아주었지만, 통제를 벗어난 내기는 여전히 잡을 수 없었다.

약간의 통증으로 찾은 맑은 정신이 고덕에게 작은 여유를 제공했다.

그 작은 여유 속에서 고덕은 지금 일어나는 상황에서 이해할 수 없는 점을 찾아내었다.

바로 힘의 논리가 뒤틀렸다는 것이다.

처음엔 이 할의 내기가 삼 할의 내기를 잡아먹었다. 그것도 모자라 지금은 오 할의 내기가 칠 할의 내기를 정신없이 끌고 다닌다.

이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흔히 말하는 차력미기나 사량발천근도 상대의 내력보다 많거나 비슷해야 가능한 일인 것이다.

한마디로 한 갑자의 내력을 반 갑자로 쳐내기 위해서는 시전자의 내력이 최소한 한 갑자는 되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흔히 하는 오해 중의 하나가 바로 사량발천근이니 차력미기니 하는 수법을 사용하면 반 갑자의 힘으로 한 갑자의 힘을 쳐내는 것이라 시전자의 내력도 반 갑자면 되는 줄 안다.

하지만 이건 정말 커다란 오해다. 실제로 그런 일을 벌인다면 시전자는 절대로 상대의 힘을 이겨 내지 못한다.

나머지 반 갑자만큼의 내력이 주는 충격이 오롯이 시전자를 통해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내가 고수들 사이에서는 그것을 반탄진기라 부른다.

동일한 내력, 또는 더 많은 내력을 가진 이가 펼친 호신강기를 내가중수법으로 쳤을 때 되돌아오는 충격과 같기 때문에 이름도 같다.

그만큼 강력한 충격이란 의미다.

각설하고, 힘은 그 크기에 비례한다. 힘과 힘이 정면으로 맞붙는 상황에서는 절대로 일의 힘이 이의 힘을 이길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 논리가 어긋났다. 그것도 고덕의 몸 내부에서 말이다.

상황을 인식하자 고덕은 제 스스로 정신없이 달려 대는 내력을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내기는 처음보다는 완만한 속도였지만 여전히 꼬여 갔다. 꼬여감이 심해질수록 나선형의 기울기는 수직에서 수평에 가까워져 갔다.

그만큼 내기의 굵기가 굵어졌다. 이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내기가 굵어졌다는 말은 내력이 늘어났다는 뜻이다. 그것은 내기의 질량이, 부피가 일정하기 때문이다.

일 갑자의 내력이 갖는 내기의 굵기는 어떤 내공심법, 어떤 수련 방법을 통했다 해도 비슷비슷하다. 그 탓에 다른 내공을 익혔다 해도 타인에게 내력을 주입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성질이 다르다면 주입된 내력은 얼마 되지 않아 소실된다. 자신이 쌓은 내력과 성질이 다른 진기를 붙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여하간 내기의 크기는 내력의 양에 따라 일정하다고 해도 좋을 만큼 대동소이하다.

그러니 지금 고덕의 혈맥 안에서 비틀려 몸체를 불린 내기는 일반적인 강호의 정설상 일어날 수 없는 괴사인 셈이었다.

그렇게 몸체를 불린 내기의 굵기는 이미 칠 할의 내기가 갖는 굵기를 지나고 있었다.

그 말은 나선형으로 비틀리며 통제를 벗어난 내기에 주입된 내력은 오 할이지만, 실질적으로 발휘하는 힘은 칠 할의 내력을 넘어선다는 것이었다.

비로소 오 할의 내기에 칠 할의 내기가 끌려 다닌 이유가 드러난 셈이다.

그것을 알자 고덕은 궁금증이 일었다.

‘만약 나머지 내기까지 흡수하면 얼마나 커질까?’ 하는 궁금증이 말이다.

조금은, 아니 많이 무대포적인 고덕의 개념은 궁금증을 오래 가지고 있지 못한다.

고덕의 의지가 끊어진 칠 할의 내기는 곧바로 비틀려 꼬여 있던 내기에 휘말려 버렸다.

이제 더 꼬여 굵어지리라 예상했던 내기는 고덕의 생각을 비웃듯이 달리 움직였다. 내기들이 올올이 풀어지더니 제각각 꼬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십이 성의 내력이 열두 가닥의 내기로 변해 나선형으로 꼬여 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꼬여 든 내기는 단전의 내력을 모래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소모했다.

고덕이 가진 내력의 양으로 볼 때 전신을 십이 성의 내기로 돌려도 단전의 팔 할은 차 있어야 정상이었다.

물론 북황과의 격돌 이후 완전히 회복되지 못해 절반 정도의 내력을 아직 되찾지 못했다곤 해도, 지금처럼 단전이 완전히 말라버린다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황스럽기도 하고 놀랍기도 해서 집중한 고덕은 이내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각각의 내기 가닥이 평소보다 서너 배 이상 압축된 탓이다.

나선형으로 꼬인 데다 그 꼬임이 심해지며 굵기마저 굵어졌다. 다시 말해 일 성의 내기가 소비하는 내력이 평소의 두세 배가 되었다는 의미였다.

그 말은 일 성의 내기가 담은 힘, 다시 말해 내력의 절대량이 상승했다는 뜻이다.

그것을 뒤집으면, 지금처럼 꼬여 있는 내력을 모조리 발출한다면 고덕이 평소에 내던 힘의 서너 배에 해당하는 힘을 낼 수 있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건 그간에 알려진 내기에 대한 정론(定論)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고덕이 가진 내력엔 엄연히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칠 갑자. 평소 온전할 때 고덕의 단전을 채우던 내력의 양이다.

물론 평소에도 십이 성 전력을 뽑아내면 고덕은 선천진기의 도움으로 반 갑자를 더해 칠 갑자 반의 내력을 뿜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뿐이다. 그 이상은 어떠한 방법으로도 내력의 양을 늘릴 수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고덕이 가진 모든 내력이었기 때문이다.

한데, 지금 돌아가는 상황대로라면 고덕이 십이 성 전력을 뿜어내면 단순 수치상 이십이 갑자 반의 내력을 뿜어낼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선천진기가 더해주는 반 갑자를 포함해도 고덕의 내력은 칠 갑자 반이라는 내력의 절대량을 넘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무에서 유를 만들어낼 수는 없다. 그것은 이른바 신의 영역인 창조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지금 상황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한 가지 방법뿐이었다.

결심이 서자 행동은 지체 없이 이루어졌다. 혈맥 속에서 미친 듯이 날뛰는 내기 앞에 출구를 열었던 것이다.

그렇게 고덕이 열어놓은 혈문인 옆구리의 대횡으로 진출한 진기 다발들은 복걸과 부사, 충문의 혈문을 거쳐 노도처럼 밀려나갔다.

순식간에 치골에 닿은 진기를 기문혈을 열어 다리로 보냈다.

혈해, 지기, 삼음교를 통해 상구까지 진출한 진기를 언곡을 거쳐 용천혈로 인도했다.

쾅-!

마차 안에서 벽력탄이 폭발한 듯 마차가 일순간에 터져 나갔다.

폭발의 위력이 얼마나 컸던지 마차를 끌던 두 필의 말은 육편으로 다져져 사방에 뿌려졌다.

다행히 마부는 폭발의 충격에 튕겨 나갔는지 십여 장 밖으로 나뒹굴었지만, 금세 벌떡 일어서는 것이 상처는 그리 커 보이지 않았다.

문제는 고덕이었다. 폭발의 중심에 있었던 고덕은 만신창이가 되어 관도 한편에 나뒹굴고 있었던 것이다.

목숨을 바쳐 모시라던 순무의 말이 생각난 마부는 이마에 흐르는 피도 무시한 채 기겁을 해서 달려갔다.

그렇게 달려간 마부가 본 것은 만신창이가 된 채 킬킬거리며 웃어대고 있는 고덕의 모습이었다.

“대, 대인……?”

미친 것이 아닌가 싶어 조심스럽게 불러보았지만, 웃음소리만 점차 커졌을 뿐 다른 답을 들을 수 없었다.

“크하하하하!”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덕의 박장대소를 당황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마부의 표정이 처량했다.

* * *

여기저기 핏자국이 보이고, 폭발의 여력에 휩쓸려 입고 있는 옷마저 넝마가 된 고덕은 예상외로 활기차게 걷고 있었다.

다행히 머리가 조금 찢어진 것 외엔 별다른 외상이 없는 마부가 그 뒤를 힘겹게 쫓아가고 있었다.

멀거니 걷기가 심심했던지 고덕이 마부에게 물었다.

“이름?”

“구입니다요, 대인.”

“구?”

“예. 제가 열두 형제 중에 아홉째라서요.”

뒷머리를 긁적거리는 마부의 답에 고덕이 누군가가 생각이 난 듯 피식 웃었다.

“그럼 형이 팔인가?”

“아닙니다요. 제 위는 누이라서 하라는 이름을 얻었습지요.”

“하? 혹시 여름에 태어난 건가?”

“예.”

고개를 조아리며 답하는 마부, 구를 유심히 바라보던 고덕이 물었다.

“나이가 어찌 되지?”

“이제 열아홉입니다요.”

순간 고덕은 자신의 귀를 의심해야만 했다. 누가 봐도 서른은 넘어 보이는 사내가 아직 약관도 되지 않았다고 하니 말이다.

“노, 농이 심하… 정말이야?”

너무나 맑은 눈으로 바라보는 구에게 농이냐는 소리는 차마 할 수 없었다.

“예, 대인. 소인이 어려서부터 고생을 너무 많이 해서…….”

하긴 관에 딸린 노비의 삶이 얼마나 고단했을지는 묻지 않아도 뻔했다.

결국 구의 말을 믿기로 한 고덕이 물었다.

“혹시 무관에 다니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나?”

고덕의 물음에 구의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가 걸렸다.

“있습지요.”

미소에 깃든 자괴감이 자연스럽게 드러날 정도이니, 한두 번 들어본 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한데 왜 가지 않았지?”

“제 신분을 알고는 모두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지요, 대인.”

노비라는 신분 때문이었을 것이다. 돈을 받고 무예를 가르치는 무관들로서는 교육비를 부담할 수 없는 구에게 더 이상 말을 건넬 이유가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물론 그것에서 조금은 더 자유스러운 강호의 문파들도 있었겠지만, 결과는 별로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타인에게 신분이 종속된 노비이니 눈여겨보았더라도 데려가기는 쉽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거기에 관에 딸린 노비이니 관과 연을 맺기를 싫어하는 강호인들의 생리상 더 이상 접근하고 싶어 하지도 않았을 공산이 컸다.

더구나 밖으로 보이는 구의 재질은 조금 눈에 뜨인다 할 뿐이지, 흔히 말하는 기재 정도까지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성혼은 했고?”

“예. 열일곱에 했습지요.”

“흠… 아이도 있겠군.”

“예. 아들놈 하나와 딸 하나를 두었습니다요.”

“이 년 만에 둘이라……. 바빴겠군.”

“예?”

구의 반문에 고덕은 아무 말도 없이 하늘만 바라보았다.

마부와 뜬금없는 대화를 나눈 것은 고덕에게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진기의 폭발이 일어난 후, 고덕에게 벌어진 일은 도무지 말로 설명할 길이 없었다.

폭발하듯 터져 나간 진기가 마치 전서구가 제집 찾아 돌아오듯 모조리 되돌아오는 기사가 벌어졌던 것이다.

그것도 외부의 진기를 뭉텅이로 끌어안고서 말이다.

그렇게 끌려 들어온 외부의 진기는 이전처럼 순수한 자연지기 상태가 아니었다.

마치 자석에 철만 이끌리듯, 폭발해 뻗어나갔던 진기와 동일한 진기만이 흡수되듯 묻어왔던 것이다.

그렇게 늘어난 진기의 양은 결과적으로 고덕의 내력을 북황과의 대결 이전으로 돌려놓았다.

단 한 번의 진기 폭발이 내상을 입으며 손실되었던 고덕의 내력을 원래대로 회복시킨 셈이었다.

더구나 진기가 폭발하며 내달렸던 혈맥들은 내상을 입기 전처럼 매끈하게 닦여 내상을 입었던 게 맞는지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돌아온 진기들은 이전과 같지 않았다.

폭발 전처럼 일제히 가닥가닥 나선형으로 꼬여서는 미친 듯이 혈맥을 타고 움직였던 것이다.

순간 혈맥은 급격한 팽창을 거듭했다.

당연한 것이, 손가락 하나가 통과할 수 있었던 창호지를 손가락 서너 개가 지나가야 하니 넓어질 수밖에 없는 것과 같았다.

다행이라면 혈맥들이 창호지처럼 찢어지며 넓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나마 탄력을 유지하며 늘어났다는 것이었다.

절망과 희망, 그리고 기사가 계속 이어지는 과정 속에서 보여 주는 내기의 움직임을 살피던 고덕은 그렇게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내력이 일정한 형태를 그린다는 걸 알아버렸다.

멸겁신혈(滅劫迅穴). 배웠으되 익히지 못했던 사문의 독문심법이 이르던 혈문들을 지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치에 닿으면 하늘이 열리고 천지가 개벽을 시작할지어다.

비급의 서두에 적혀 있던 글을 읽으며 얼핏 비웃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사문의 금서라던 비급이 가리키던 것은 신으로 가는 길이었다.

도문이라면 우화등선의 길이었고, 불문이라면 해탈에 이르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만큼 비급은 정상적이지 않은 내용을 담고 있었고, 다소 허황된 이야기들로 가득했었다.

그 탓에 호기심은 실망으로 바뀌었었고, 비급을 제대로 살피지 않았다.

그것이 아쉬웠다. 한번 나오면 다시는 들어갈 수 없는 사문의 비지가 더없이 안타까웠다.

그러고 보면 내기만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 변화로 말미암아 고덕의 눈도 외부가 아니라 내부를 살피는 심안이라고 할까? 아니, 거창하게 그리 말할 것도 없이 무언가 알 길 없는 직감 비슷한 것이 이전에 비할 수 없이 발달해버렸던 것이다.

그때부터였다. 보이는 것들이 이전과는 사뭇 달랐던 것은.

구도 마찬가지다. 이전까진 그저 무공을 익히기 좋은 체질로 보였던 것이지만, 지금 고덕의 눈엔 발전의 끝이 어디일지 감도 잡히지 않을 정도의 무재로 비쳤던 것이다.

그것이 제자와 같았던 이들을 마교를 나오며 베어야 했던 고덕의 결심을 흔들었다.

“내게서 배워보지 않겠나?”

“예~ 에?”

놀라서 바라보는 구의 표정은 반갑기보다는 두려움에 더 가까웠다.

훗날, 세상이 도제(刀帝)라 부르며 두려워하게 되는 만구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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