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장. 발악(發惡)-균사 왕부의 마지막 수단
중군도독부라는 날개를 달고 막 날아오르려는 찰나, 그 주인을 잃은 균사 왕부는 분명 무너져 가고 있었다.
중군도독부라는 날개는 꺾여 나갔고, 밑을 받치던 탄탄한 다리의 역할인 주변 성들은 잘려 나갔다.
하지만 그 무너져 가는 왕부의 담벼락에 기대어 네 명의 실력자가 허울만 남은 왕위를 두고 진흙탕 싸움을 시작했다.
그 당사자 사 인 중 한 사람인 울력은 현재 매우 힘겨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유는 그가 경쟁자들과 달리 문인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그 탓에 그에겐 왕위를 향한 가장 중요한 부분, 즉 무력이 결여되어 있었다.
물론 그를 따르는 왕부 무장들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의 힘은 경쟁자들로부터 그의 목을 지켜 내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그런 울력의 침소로 검은 그림자가 스며들었다.
“누, 누구요?”
촛불이 미처 비추지 못하는 방 안 어둠에서 갑자기 일어나는 사람의 형상에 놀란 울력의 경악성에 불청객은 낮고 차가운 음성을 토해냈다.
“그대를 도울 협력자라고나 할까…….”
“혀, 협력자?”
“그렇다오. 그대를 균사왕의 왕위에 올려 줄 협력자.”
“나, 날 왕위에 올려 줄 협력자!”
울력의 되뇜에 여전히 어둠에 잠겨 있는 사내가 말했다.
“그렇다오. 하니, 그리 경계할 필요는 없소.”
“나, 날 왜 돕겠다는 것이오?”
문인이라더니 생각 외로 담이 컸던지 울력은 어느새 신색을 바로 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어둠 속의 사내가 희미한 웃음을 흘렸다.
“클클클! 역시 왕위를 탐하는 분의 기개로구려…….”
“난 아직 이유를 듣지 못했소.”
울력의 재촉에 사내가 답했다.
“우린 그대가 왕이 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소. 대체로 무술깨나 익혔다는 이들은 자신의 힘을 너무 과신하는 경향이 있어서 다루기 어려운 탓이라오.”
“다루기 어렵다? 그 말은 도와준 대가로 날 좌지우지하겠단 말이오?”
“아, 오해는 하지 마시오. 우린 그대를 좌지우지할 생각은 없으니까. 단지 우리의 부탁 한두 개를 들어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오.”
“부탁……?”
“어려운 것도 아니라오. 어떻소, 관심이 있으시오?”
상대의 물음에 울력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먼저 그 부탁이라는 것을 들어봅시다.”
“그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듯한데……. 우리 부탁을 미리 듣고 거절하면 난 그대의 목을 들고 이곳을 나가야만 한다오. 그래도 듣고 싶은 게요?”
상대의 위협에 울력은 마른침을 삼키곤 답했다.
“듣기 전에 결정을 하나, 듣고 나서 위험을 안으나 달라질 것은 없다는 생각이오만.”
“클클클… 난 기쁘다오. 그대의 담이 생각보다 커서 말이오.”
진정으로 기쁜 것인지 상대의 웃음은 잠시 동안 이어졌다.
“이제 말해보시오.”
울력의 재촉에 어둠 속의 사내가 천천히 촛불의 범위로 나왔다.
한데, 어찌 된 일인지 촛불의 밝음이 밀려나는 듯이 그의 주변은 여전히 어둠으로 채워졌다.
그 괴사에 놀란 울력의 눈이 크게 벌어지는 것을 바라본 사내의 말이 이어졌다.
“세상은 때때로 생각 이상의 세계로 이루어져 있다오. 나처럼 말이오.”
“사, 사람이긴 한 것이오?”
당황한 울력의 물음에 사내는 다시금 작게 웃었다.
“클클클! 글쎄… 사람일까, 아니면 신일까? 그건 아직 모르겠구려……. 다만 한 가지, 그대를 확실히 도울 수 있다는 것만 믿으면 되는 것이오.”
상대에게서 뿜어지는 이상한 힘에 눌린 울력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 믿겠소. 부, 부탁… 아니, 조건을 말해보시오.”
여전히 자신의 이지를 지키는 울력을 이채롭게 바라보던 사내가 말을 이었다.
“별건 아니라오. 그저 끊임없이 소흥 왕부를 압박해달라는 거… 그리고 끝까지 살아남으라는 거. 그 두 가지뿐이오.”
상대의 말에 울력은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두 가지 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요구하지 않아도 이왕 해야 할 일. 그걸 조건으로 다는 이유가 있는 것이오?”
“이왕 해야 하는 일과 무엇보다 우선해야 하는 일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오. 우린 그 두 가지가 무엇보다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걸 요구하는 것이라오.”
끝까지 살아남으라는 것은 누구보다 자신이 갈망하는 것이니 두말할 필요도 없다.
문제는 소흥 왕부의 압박을 무엇보다 우선하라는 말인데… 어차피 소흥 왕부를 무너트리지 않고서는 뒤를 깨끗이 할 수 없는 일.
울력은 그것도 어려울 것이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좋소. 조건을 승낙하겠소.”
울력의 답에 사내는 예의 그 특유의 웃음을 흘렸다.
“클클클… 탁월한 선택이라는 걸 후에 알게 될 것이오.”
“그것은 그대의 말대로 후에 알게 되겠지. 하면, 어찌 도와주겠다는 것이오?”
이젠 완전히 제 모습을 되찾은 울력의 물음에 어둠 속의 사내가 답을 했다.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그게 무슨……?”
의문이 가득한 울력의 말에 사내는 한마디만 남겨 놓았다.
“기다리면 알게 될 것이오.”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사내는 다시 방 안의 어둠 속으로 스며들듯 사라져 버렸다.
* * *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와의 만남이 있었던 다음 날, 왕부 무장들의 한 축을 담당하는 첨사 하나가 찾아왔다.
“아니, 만 첨사가 어쩐 일이오?”
“앞으로 울력 님께 충성을 맹세하고자 찾아뵈었습니다.”
갑작스런 말에 울력이 놀란 음성으로 물었다.
“가, 갑자기 이 무슨…….”
“그, 그분이 울력 님께 충성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첨사의 두 눈엔 두려움이 가득했다.
“그분이라니, 누구……? 혹 어둠 속의…….”
“마, 맞습니다. 그분이…….”
명확한 이름도, 설명도 없었지만 어제 자신을 찾아왔던 이를 지칭한다는 것을 울력은 확신할 수 있었다.
“단지 두려움 때문이라면…….”
“아, 아닙니다. 목숨으로 충성하겠습니다. 그러니 제, 제발 남은 가족만은…….”
비로소 울력은 알 수 있었다. 그가 만 첨사를 무엇으로 겁박했는지를…….
하지만 울력이 미처 알지 못한 것이 있었다.
지난밤, 만 첨사의 눈앞에서 세 아들 중 막내가 산 채로 찢겨 죽었다는 것을…….
“좋소. 만 첨사의 충성을 받아들이겠소.”
“고, 고맙습니다.”
엎드려 울먹이는 만 첨사를 울력은 복잡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그 뒤로 왕부의 첨사급 무장 둘이 더 울력에게 충성을 맹세해왔다.
그들도 만 첨사만큼의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여하간 그들의 동기가 어디에 있든지 울력은 하루아침에 자신의 뒤를 떠받쳐 줄 강력한 힘을 얻었다.
그 힘으로 울력은 차근차근 다른 경쟁자를 압박해나갔다.
제일 먼저 사라진 경쟁자는 울력의 동생이었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장수들과 외유를 나갔다가 습격을 당했다.
처절한 전투를 벌였던지 사건 현장은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울력의 동생은 목 없는 시체가 되어 발견되었다.
물론 흉수는 밝혀지지 않았다. 증거가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생이 남긴 전력을 울력은 기다렸다는 듯이 흡수했다.
어떤 수단을 동원한 것인지 일말의 반발도 나오지 않는 완벽한 흡수였다.
힘을 키운 울력은 두 형마저 조용히 제거했다.
그들의 힘은 이전처럼 고스란히 울력에게 흡수되었다.
그때서야 왕부 사람들은 지난 사건들의 배후에 누가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눈치를 보던 이들이 울력에게 모여든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몰랐다.
왕부가 가진 힘의 칠 할을 거머쥔 울력은 대담해졌다. 자신의 힘으로 부마를 깨부순 것이다.
사로잡힌 부마는 만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목이 잘렸다.
죄목은 전 균사왕을 시해했다는 것이었다.
한편, 군주는 울력이 부인으로 맞았다.
조강지처와 두 명의 첩실이 있었지만 그녀들은 한날한시에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된 탓에, 울력이 혼사를 치르는 데 전혀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외조카를 부인으로 맞은 패륜도, 뻔히 보이는 처첩의 살해도 힘과 권력 앞에선 아무것도 죄가 되지 않았다.
왕부를 차지한 울력은 조력자의 도움으로 이탈 직전의 호북성을 바로잡았다.
호북성의 관아에 협력자의 방문이 있었던 연후.
호북성의 순무는 살아 있어도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헛소리를 해대는 폐인이 되었다.
호북 안찰사는 도지휘사의 말에 토를 달지 않는 자가 되었고, 호북성 도지휘사는 울력의 말이면 끓는 가마솥 안에라도 들어갈 기세를 보였다.
호북성을 자신의 발아래 꿇어앉힌 울력은 중군도독부를 갈망했다.
중군도독부에 협력자가 방문한 날, 그간 중군도독부를 실질적으로 지휘해온 중군도독동지의 목이 날아갔다.
고위 지휘관 중 살아남은 유일한 무장인 도독첨사는 무슨 생각인지 아직 왕위도 인정받지 못한 울력에게 달려와 충성을 맹세했다.
세상은 빠른 속도로 돌아가기 시작했고, 그런 상황의 중심은 명나라의 중서부 일대가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핵심인 안휘성의 균사 왕부를 중심으로 한 주변지역의 흐름은, 다른 곳보다 더 급박하게 움직이는 중이었다.
* * *
호철랑의 전갈을 받은 고덕은 하남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이 울력이라는 균사 왕부의 새로운 후계자를 돕고 있으며, 그들의 다음 목표는 하남일 것이라는 전갈 때문이었다.
고덕은 호철랑이 언급한 알 수 없는 힘이 자신이 꼬리를 놓친 삼천의 것이길 빌고 또 빌었다.
하남성의 성도인 정주에 도착한 고덕은 밤이 되길 기다려 하남성의 중앙 관청으로 스며들었다.
느긋하게 한 전각의 그늘에 앉아 있던 그는 아주 천천히 잠식하듯 스며드는 검은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고덕의 기척을 발견하진 못했던지 그 그림자는 아주 천천히 순무의 침실이 있는 전각으로 스며들었다.
그림자가 완전히 전각 안으로 사라지자 고덕의 신형도 지붕 위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순무에게 기척을 쏘아 보내 깨우는 것에 성공한 그림자가 느긋하게 일어섰다.
갑작스런 괴사에 하남성의 순무는 심장이 튀어나올 만큼 놀랐다.
기겁하는 순무를 비릿하게 바라본 그림자는 천천히 다가섰다.
뭉클대며 일어서는 살기에 반응한 이는 겁에 질린 순무가 아니었다.
투퍽-
묵직하고 투박한 음향과 함께 그림자가 뒤로 밀려났다.
그 앞으로 솟아오른 고덕의 시선엔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 같은 관심이 깃들어 있었다.
“유련수를 정통으로 얻어맞고도 멀쩡하다니, 재미있는걸.”
고덕의 말에 그림자는 놀란 음성을 토해냈다.
“누구냐?”
“그러는 넌 누구지? 혹시 삼천에서 나온 건가?”
“네, 네놈이 어찌… 설마 검마인가?”
“서로를 안다면 남은 건 하나뿐이라는 것도 잘 알겠지.”
쾅-
무언가 빛이 번쩍한 순간, 그림자 앞에서 강렬한 목음이 터져 나왔다.
우당탕탕!
문이 부서지고, 그림자의 사내가 마치 검은 안개 덩이 같은 것에 휩싸인 채 방문 밖으로 튕겨 나갔다.
“침입자다!”
사방에서 경고성이 울리며 군병들이 몰려드는 가운데로 고덕이 걸어 나왔다.
그런 그의 손엔 어느새 명혼이 들려 있었는데, 반짝이며 달빛을 반사시켰다.
“살황이 돌아오지 못하는 이유가 다 있었군.”
검은 안개에 휩싸인 자, 언젠가 멸천주가 암영이라 부른 사내의 말에 고덕이 미소를 지었다.
“그 늙은이에겐 빚을 갚았지. 하지만 너흰 아직 아니야.”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암영의 앞에서 강렬한 빛이 폭발했다.
투콰광-!
“크흡…….”
밀려나는 암영의 입에서 신음이 튀어나왔다.
“이, 이것은… 네, 네놈!”
무언가 크게 놀란 암영의 말은 다시금 터져 오른 빛무리에 휩싸여 끊어졌다.
콰광!
“흐음…….”
다시 한 번 들려온 암영의 신음 소리. 자신이 감당할 수준을 넘어서는 타격이 계속 가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단코 암전무흔을 완성한 이래로 외부의 힘에 지금처럼 진탕되어보긴 처음인 암영이었다.
하지만 그 힘으로 상대의 경지를 정확히 파악하기도 했다.
“어떻게 지금까지 숨겨 온 거지?”
암영의 물음에 고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숨겨? 뭘?”
“네놈의 경지 말이다.”
“숨긴 적 없다.”
“웃기는 소리. 네놈의 경지가 드러났는데 몰랐을 리 없다.”
“네놈이 믿든지 안 믿든지 난 상관없어.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나눌 생각도 없고.”
그리고 찰나지간에 이동하는 명혼의 그림자에 암영이 반응했다.
쿠쾅-
재차 암영의 코앞에서 터져 오르는 빛무리에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검은 안개가 출렁거렸다.
상대의 반응에 고덕의 신형이 움직였다.
한 발, 고덕의 신형이 문 앞에서 사라졌다.
쫘악-
언제 다가선 것인지 암영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고덕의 명혼이 검은 안개를 물결 가르듯 가르며 들이닥쳤다.
“흡!”
경악성이 토해지고, 암영의 신형이 순간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그 공간을 고덕의 검이 마치 눌어붙은 듯 따라 움직였다.
그저 피하는 것으로는 고덕의 검을 떨칠 수 없겠다고 판단한 암영의 안개가 강하게 뭉쳐 들다 폭발했다.
쾅-!
명혼이 가르고 들어오던 곳의 안개가 폭발하며 휩쓴 강기의 파도에 고덕은 회전으로 맞섰다.
조각조각 뿜어진 강기들이 회전에 말려 소멸되는 순간, 암영의 안개가 한 곳으로 뭉쳐 들며 한 가지 형상을 만들어냈다.
기다란 묵창.
마치 살아 있는 듯 꿈틀거리는 묵창은 요사스러움을 뿌려 대고 있었다.
그렇게 주변을 감싸고 있던 검은 안개가 모여 묵창이 된 탓에 드러난 암영의 모습은 꽤나 특이했다.
검은 천으로 온몸을 휘감은 것이 마치 서역의 목내이 같았던 것이다.
그런 특이한 모습으로 묵창을 들고 선 암영의 모습에도 고덕은 웃을 수 없었다.
요사스럽게 꿈틀거리는 묵창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가공할 기운을 느낀 까닭이었다.
암영을 바라보는 고덕의 시선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천천히 자세를 가다듬는 그의 손에 들린 명혼이 파랗게 달아오르다 못해 새하얀 백광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곳을 향해 암영의 묵창이 달려들었다.
…….
묵창과 명혼이 부딪쳤지만 아무런 음향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런 무음의 상황 속에 명혼이 조금씩 묵창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 깊이가 깊어질수록 암영의 얼굴에 서린 경악도 깊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일순간!
쿠왕쾅-
귀청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굉음과 함께 묵창이 폭발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런 묵창의 폭발력을 명혼이 가르고 내려왔다.
스걱-
“컥!”
명혼의 끝에서 울린 섬뜩한 음향에 이은 답답한 신음은 암영이 흘린 것이었다.
갈라진 채 흩어져 내리는 검은 천들이 그의 가슴을 가리고 있었던 것이다.
“섬전무영(閃電無影)… 전설이라고만 들었는데…….”
암영의 중얼거림에 고덕이 답했다.
“대부분의 전설은 실화의 뒷이야기지.”
고덕의 답에 암영의 눈에 걱정이 들어섰다.
“주군께 네 이야길 전하지 못하는 게 아쉽군.”
고덕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네 곁으로 조만간 보내줄 테니, 그때 이야기해도 늦지 않을 거야.”
“푸후- 자만이라니……. 그것이 네놈을 죽일 게야… 크크크! 내 먼저 가 기다리지. 주군이 네놈을 보내줄 때를…….”
암영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고덕의 검이 허공에 빛무리를 그려 냈다.
스걱-
목이 깨끗이 날아간 암영을 바라보며 고덕이 씹어뱉듯 말했다.
“더럽게 중얼거리긴…….”
목을 잃은 암영의 가슴이 벌어지며 피가 뿜어져 나왔다.
몸을 움직여 그 피를 피하는 고덕에게 언제 나왔는지 순무가 물어왔다.
“누, 누구시오?”
상대의 물음에 고덕이 명혼을 갈무리하며 돌아서 답했다.
“소흥 왕부에서 왔어.”
고덕의 답에 하남 순무의 얼굴 위로 놀람이 가득해졌다.
순무의 부름으로 달려온 도지휘사와 안찰사는 순무의 침실 앞에 가득한 피 냄새와 핏자국에 꽤나 놀란 표정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겝니까, 대인!”
도지휘사의 물음에 순무는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간단히 설명했다.
그 설명을 들은 도지휘사와 안찰사의 시선이 고덕에게 향했다.
“소흥 왕부에서 나왔다는 것이 사실이오?”
“그래.”
분명한 하대였지만 자리한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고덕이 풍기는 알 수 없는 위압감도 문제였지만, 순무를 통해 들은 일로 상대가 갖고 있는 능력을 짐작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죽은 이는 누구요?”
“호북성과 중군도독부의 흉수가 아닐까 짐작할 뿐.”
고덕의 말에 두 사람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들도 귀가 있으니 소문을 듣고 있었던 것이다. 그 탓에 경비를 강화했었다.
솔직히 순무의 침실도 그런 탓에 경비를 서는 군병의 수가 수백에 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런 방어책도 되지 못했다. 그것이 도지휘사와 안찰사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강호인인 것이오?”
“아마도…….”
“그럼 귀하는……?”
“나야…….”
은퇴를 한다고 했으니 강호인이라 말하기도 이상하고, 그렇다고 다시 칼에 피를 묻히며 강호의 일에 발을 담가놓고선 강호인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우스웠다.
그 탓에 고덕의 답은 두루뭉술했다.
“…그저 소흥 왕부의 일을 돕는 사람일 뿐이야.”
“왕부 사람……?”
“그렇게만 알고 있는 게 좋을 거야.”
짜증이 묻어나는 차가운 음성에 세 사람은 그쯤에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아, 알겠소.”
수긍하는 그들을 향해 고덕이 말을 이었다.
“놈들의 시도가 다시 이어질 수도 있어. 호 판관은 왕부로 오는 게 어떠냐고 하던데?”
고덕의 물음에 일전에 만나보았던 호철랑을 떠올린 도지휘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움직이는 것이 안전하다는 것은 알고 있소. 하지만 성을 버리고 갈 수는 없는 일 아니겠소?”
“한 사람만 남으면 되는 게 아닌가?”
고덕의 물음에 순무가 입을 열었다.
“도지휘사는 갈 수 있소. 어차피 향방군 대부분이 소흥 왕부가 위치한 절강으로 내려가 있으니. 하나, 나와 안찰사는 움직일 수 없소.”
“명예나 명분… 뭐, 그런 건가?”
고덕의 물음에 순무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이유 때문이라오.”
“실질적인 이유?”
“그렇소. 난 이곳 하남성의 모든 업무를 관장하는 순무요. 내게 하루에 올라오는 재가의 서류가 이백 장이 넘소. 그것을 팽개쳐 두면 하남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게요. 그건 성내의 치안을 담당하는 안찰사도 마찬가지고.”
순무의 말에 고덕은 검미를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호철랑의 전갈엔 세 사람을 반드시 왕부로 데려와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세 사람 중 누구 하나라도 신변에 이상이 생길 경우, 하남성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리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것은 소흥 왕부가 노력하는 결과를 위해서 결코 좋지 않았다.
결국 고덕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뿐이었다.
“그럼 당분간 내가 머물지.”
고덕의 결정에 세 사람의 얼굴엔 다행스러움과 함께 묘한 불안감이 떠올랐다.
아마도 자신들의 안위를 지켜 줄 실력자의 존재에 대한 안도인 동시에, 자신들이 제어하지 못하는 이에게 자신들의 안위를 맡겨야 하는 것에서 오는 불안감이 깃든 때문인 거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