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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장 (61/129)

제60장. 약진(躍進)-균사 왕부의 붕괴

협련으로부터 호철랑의 계획을 전달받은 고덕은 화도를 떠나 균사 왕부가 있는 안휘의 합비로 이동했다.

합비에 도착한 날 밤. 고덕은 지체 없이 균사 왕부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잠들어 있던 균사왕의 목을 자르고 돌아서며, 왠지 자신이 그토록 떠나고 싶어 했던 마교에서와의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 업보련가…….”

그 말밖엔 할 말이 없었다.

피로 점철된 생활이 싫어서 제자와 다름없는 이들을 베어버리고 나왔건만, 다시금 피의 길로 들어서 있는 자신의 모습에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그 탓이었을까?

균사 왕부를 나와 중군도독부의 담을 넘은 고덕은 중군도독의 목을 베는 것이 매우 힘들었다.

하지만 내친걸음. 억지로 노장군의 목을 베어놓고 나선 걸음은 세 번째 목표이자 중군도독부에선 두 번째 목표가 된 도독동지의 침상 앞에까지 다가갔으나 도저히 검을 내뻗을 마음이 들지 않았다.

아마도 문정 군주의 죽음 이후, 지독히 치솟았던 살기가 시간이 지나며 가라앉은 탓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거 참…….”

한참 망설이던 고덕은 잠들어 있는 사내를 깨웠다.

무언가 자신을 두드린다는 느낌에 눈을 뜬 혁린 도독동지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대단히 크게 놀랐다.

그도 황제가 부린다는 자객에 대한 걱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 누구냐!”

“네 목을 베러 온 사람.”

“화, 황제 폐하께서 보낸 것이냐?”

“황제와는 상관없다.”

자신의 생각과 다른 답에 혁린은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 누가 내 목을…….”

“소흥 왕부의 호철랑이라는 판관.”

“판관?”

“그래.”

“아니, 그가 왜 날?”

“그야 널 제거하면 일이 쉽다는 건의를 그가 했기 때문이지.”

고덕의 답에 혁린의 지금의 상황을 대강 유추해낼 수 있었다.

“결국은 소흥 왕부에서 내 목을 원한다는 말이 아닌가?”

“뭐, 굳이 콕 집어 말하자면 그런 셈이야.”

“그렇다면 뭘 망설이지? 어서 베어라!”

목을 길게 빼고 두 눈을 감은 상대를 바라보는 고덕은 고소를 지었다.

“죽일 생각이 없으니 깨운 거야. 죽일 거였다면 귀찮게 깨우는 짓 따윈 안 해. 균사왕이나 네 상관처럼.”

고덕의 말에 감았던 혁린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지, 지금 뭐라 한 거냐? 와, 왕야가 어찌 되었다고?”

“죽었다고……. 뭐, 미안하게 생각은 해. 나랑 상관없는 사람이었는데…….”

“이 죽일 놈!”

버럭 화를 낸 혁린은 검대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으나, 번쩍이는 섬광이 휩쓴 자리엔 서너 조각으로 잘려 나간 검의 파편뿐이었다.

분노에 달려왔지만 생각도 못해본 일을 현실로 만드는 상대의 능력에 혁린은 저항 의지를 잃었다.

“무도한 놈! 어서 죽여라!”

고함을 질러대는 혁린을 물끄러미 바라본 고덕이 말했다.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 거야! 널 죽일 생각이 없다고.”

“죽이지 않는다면 후회할 것이다. 결단코 네놈을 살려 두지 않을 것이니!”

상대의 도발에 검을 잡아가던 고덕은 작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그런 생각은 하지도 마. 난 성격이 못돼서 내게 칼을 겨눈 자를 용서해본 적이 없어.”

“어차피 죽은 목숨이다. 그것이 무서울 것 같으냐?”

사납게 노려보는 혁린의 답에 고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서워해야 할 거야. 난 당사자로 끝내지 않으니까.”

“그, 그게 무슨 말이냐!”

조금은 당황한 듯한 혁린의 물음에 고덕은 조곤조곤 설명을 이었다.

“가족, 지켜야 할 이들이 죽어. 그리고 수하들이 죽을 거야. 네게 칼을 판 자도 찾아 죽일 거고, 널 그 자리에 앉힌 이도 죽일 거야. 어쩌면 너와 함께 공부한 죄로도 죽는 이가 나올 수 있을 거다.”

한마디로 연관이 있는 이들은 모조리 죽여 버리겠다는 지독한 협박이었다.

“이, 이…….”

그 협박이 먹혔는지, 아니면 기가 막혀 말문이 막힌 것인지 혁린은 제대로 대꾸하지 못했다.

“그러니 잘 들어. 널 살려 주는 대가는 하나야. 중군도독부를 황제에게 넘겨.”

“황제? 소흥왕이 아니고?”

“중군도독부는 금군이라며?”

“그, 그렇다.”

“금군은 원래 황제의 군대라던데, 아닌 건가?”

“마, 맞다.”

혁린의 답에 고덕이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그럼 됐지 뭘 물어.”

그러자 혁린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물었다.

“정말로 다른 것은 없나?”

“없다. 넌 중군도독부를 다시 황제에게 돌려주는 일만 하면 돼.”

혁린도 균사 왕부와 손을 잡은 도독의 결정에 크게 찬성하진 않았다.

하지만 이미 명운을 달리했다는 도독은 그가 초급 무장 시절부터 줄곧 모셔 온 상관이었기에 뜻을 거스를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도독첨사도 마찬가지였다.

그 상황에서 도독이 유고했으니 자신의 손으로 황제에게 지휘권을 돌려주는 것은 반대가 없었던 것이다.

“나중에 딴소리는……?”

“그런 거 없다. 대신 빠르게 움직여라. 원래대로라면 너와 네 수하까지 목을 베어야 했다. 그러지 않은 상태에선 중군도독부를 중심으로 균사 왕부에 붙은 도지휘사들의 해체가 더딜 것이다.”

고덕의 걱정이 무엇인지 알아들은 혁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바로 처리한다고 약속할 수 있다.”

“좋아, 믿고 가지.”

고덕의 말에 혁린은 균사왕이 죽었다는 말을 들을 때보다 더 놀란 표정이 되었다.

“간다고?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지켜보지 않고?”

“약속했으니 믿어야지. 그 정도 신의는 있다.”

“이런 일이 신의로 되는 일이라 생각하나?”

“되는 일, 안 되는 일 따지지 않아봤다. 그저 내가 믿고 싶으니 믿을 뿐이니까.”

“만에 하나 내가 약속을 어긴다면……?”

혁린의 물음에 고덕은 슬픈 미소를 그렸다.

“죽겠지. 네 가족과 수하…….”

“아아, 나와 연관 있는 모든 이가…….”

“그래. 감당할 수 있다면 말리진 않아.”

고덕의 답에 혁린은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럴 생각 없어. 믿어도 좋으니 꺼져 버려.”

혁린의 말에 고덕은 희미한 미소를 남긴 채 정말로 사라져 버렸다.

조각조각 부서진 검이 아니라면 꿈이라 믿을 정도로 정말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잠시 숨을 고르고 정신을 가다듬은 혁린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균사 왕부의 움직임과 중군도독부의 현황은 주변에서 암약 중이던 세작들을 통해 곧바로 소흥 왕부에 전달되었다.

“도독동지가 살아 있어?”

놀라는 소흥왕의 물음에 정보를 맡은 왕부의 문관이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답했다.

“그, 그것이 도독첨사의 모습도 확인된다는…….”

“이게 무슨… 그럼 고 무인이 실패를 했단 말이더냐?”

“그것이… 균사왕과 중군도독의 사망은 확인이 되고 있다 합니다.”

문관의 답에 소흥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다면 설마 일부는 성공하고 적에게 걸려…….”

불안한 쪽으로 몰고 가는 듯하자 호철랑이 끼어들었다.

“아직 확인된 건 아니니 주변 정황을 더 살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왕야?”

“아! 그, 그렇게 하지.”

소흥왕의 허락에 호철랑의 질문이 정보 담당자에게 쏟아졌다.

“중군도독부는 어찌 움직이고 있다 합니까?”

“그게… 도독동지가 나서서 도독부의 지휘권을 황제 폐하께 돌리겠다는 발표를 했다고 합니다.”

“도지휘사들과 다른 무관들의 반응은요?”

“도지휘사들은 상당히 동요하는 모습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호북성 도지휘사가 불안해하는 것이 공공연히 드러날 정도랍니다.”

정보 담당자의 답에 호철랑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균사왕 전하가 사망한 상태에서 그들 중 가장 강력한 군사 집단인 중군도독부가 입장을 번복하면 균사 왕부의 지지 기반이 현저하게 약해지기 때문이지요. 특히 호북성은 현재 영상 왕부의 압박을 받고 있기 때문에 더 불안할 겁니다.”

“맞습니다. 그 탓에 몇몇 도지휘사는 별도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어디가 가장 두드러지나요?”

“하남과 호북입니다.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섬서에 위치한 척회 왕부에 선을 넣으려 애를 쓰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원하는 상황은 모두 이루어진 것이라 보이는군요. 고 무인은 잡힌 게 아니라 무언가 사정으로 계획을 변경한 것 같습니다, 왕야.”

호철랑의 말에 소흥왕의 얼굴에 이채가 어렸다.

“계획을 변경하였다?”

“예. 사정이 있었던 듯합니다. 다만, 우리가 원하던 결과는 유지될 수 있도록 힘을 쓴 듯합니다.”

“결과가 그렇다는 것은 알겠네만, 고 무인이 해를 입지 않았다는 것은 어찌 장담하는 겐가?”

“고 무인에게 문제가 생겼다면 균사 왕부가 저리 조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최소한 자객을 잡았다는 공표라도 나와야 하니까요.”

“그도 그렇군…….”

고개를 끄덕이는 소흥왕에게 호철랑이 권했다.

“지금 정황으론 우리의 계획과 바뀐 것이 그다지 없습니다. 하니, 우리는 계획대로 흔들리고 있는 도지휘사들과 순무들을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는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호철랑의 말에 소흥왕의 시선이 배석한 이들을 훑었다.

모두가 수긍하는 표정이자 소흥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계획을 시작하게.”

소흥왕의 답에 대전을 메우고 있던 관리들이 일제히 밖으로 나갔다.

이제 소흥 왕부의 미래가 걸린 일들이 시작된 것이다.

* * *

균사왕과 중군도독의 갑작스런 죽음에 하남성 도지휘사는 걱정이 가득했다.

애초에 황도인 북경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것을 들어 왕부와의 거리를 유지하려는 순무의 정책에 반대해 독단으로 균사 왕부에 선을 대고 병력을 파견했던 도지휘사로서는 급변하는 정세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시기에 순무의 방문을 받았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

지은 죄가 있기 때문인지 도지휘사는 다른 때와 달리 매우 공손한 자세로 순무를 맞았다.

“상황이 여의치 않다기에 안찰사와 함께 논의를 하기 위해 왔소.”

그러고 보니 순무의 뒤엔 성의 치안을 담당하는 안찰사가 서 있었다.

“안찰사도 오셨구려. 내 면목이 없소.”

“지금은 그런 말을 나눌 때가 아닌 듯합니다. 상황은 어떻습니까?”

안찰사가 이렇게 묻는 것은 그간 균사 왕부에 대한 정보를 도지휘사가 모두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리 좋지 않네.”

“어느 정도인 겁니까?”

“균사왕 전하와 중군도독의 죽음이 확인된 이후 상황이 급변하고 있네.”

“왕부에 후사가 없다곤 하나 왕위를 이어받을 만한 세력가는 있을 게 아닙니까?”

안찰사의 물음에 도지휘사가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있지. 있긴 한데 그 수가 너무 많으니 문제라네.”

“많다니요? 부마가 있으니 그에게 힘이 모이는 게 아닙니까?”

“균사 왕부에 후사가 없다 보니 그간 외척의 힘이 강했네. 그래서 부마뿐이 아니라 왕야의 처남들까지 세도가가 되었지.”

“하면 왕야의 처남들까지 왕위 계승에 뛰어들었단 말입니까?”

“왕위가 걸린 일일세. 더구나 적통을 따르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갖고 있는 힘으로 얻을 수 있는 왕위이니 욕심이 나는 것도 당연지사가 아니겠나.”

“어허, 어찌 그런…….”

도지휘사의 평에 안찰사는 한탄만 했다.

그런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순무가 입을 열었다.

“내 듣기론 중군도독부는 황제 폐하께 지휘권을 넘기겠다는 발표를 했다고?”

“예, 대인. 도독동지가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그의 성향이 원래 황실 쪽이었나?”

“도독동지인 혁린은 원래부터 황실에 대한 충성심이 높았던 자입니다.”

“그런 자가 그간은 어떻게……?”

“중군도독부의 고위 무장들은 상관에 대한 충성심이 높습니다. 대부분이 초급 무장 시절부터 함께한 이들로 이루어진 탓입니다.”

중군도독부는 전통적으로 근황 부대였다.

그 탓에 중군도독부의 지휘관들은 그 어디보다 높은 충성심을 요구받았고, 최선임관인 도독이 선택한 장수를 초급 무장 시절부터 휘하에 두는 것이 관례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장악력이 높겠군?”

순무의 물음에 도지휘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중군도독부는 그렇습니다. 고위 무장들의 충성심이 강한 만큼 부대 장악력도 매우 높습니다. 그의 결정에 다른 의견을 가진 장수들이 있을 수는 있지만, 불만을 품거나 반대를 하고 나오는 이는 없을 것입니다.”

도지휘사의 답에 순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렇다면 중군도독부가 돌아선 이상 파벌 싸움에 혼란스러울 균사 왕부엔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는 게 아닌가?”

“아무래도 그럴 거 같습니다.”

“흠… 대안은 있는 겐가?”

“척회 왕부에 선을 대어볼까 합니다.”

“척회 왕부라……. 척회왕께선 대단히 호전적인 분이시네. 알고는 있는가?”

“예,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니 이야기하네만, 그분의 성격상 다른 곳을 누를 만한 힘을 얻었다 판단하면 절대로 그냥 계실 분이 아닐세. 만에 하나 우리뿐만이 아니라 호북성마저 그분께 의탁한다면…….”

이미 전군 도독부와 감숙, 산서성을 손아귀에 틀어쥔 척회 왕부다. 그곳에 호북과 하남의 힘마저 집중된다면…….

“저도 그것이 걱정입니다. 소나기를 피하자고 나무 밑으로 들어갔는데, 벼락이 나무를 친다면 피한 의미가 없으니까요.”

“바로 그것일세. 하여, 난 다른 곳에 선을 대었으면 하네.”

순무의 말에 도지휘사가 의문이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다른 곳이라 하시면… 설마 황실을 말씀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그건 아닐세. 황제 폐하가 위험에 빠졌을 때 뒤를 막아선 것에 힘을 보탠 것을 감출 수도, 덮을 수도 없으니.”

순무의 말에 안찰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동북어위도총사부의 전례가 있질 않습니까?”

안찰사의 말에 순무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과 다르지. 우린 동북어위도총사부와 같은 명분이 없으니까.”

“명분이라시면……?”

“표면적인 이유뿐이라 해도 그쪽은 척계광 사후 근황군이 직접 움직였지 않은가? 더구나 실제적으로 반란군을 토벌하기도 했고.”

순무의 설명에 안찰사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면 어디를 생각하시는 겁니까?”

도지휘사의 물음에 순무가 조심스럽게 답했다.

“소흥 왕부일세.”

“소, 소흥 왕부요?”

“그러하네.”

“하나, 그곳은 난세를 헤쳐 나갈 힘이 부족하지 않습니까?”

무권력, 절대 충성. 이 두 가지 노선을 굳건히 지키는 곳이 소흥 왕부다.

하지만 그 두 가지 기조는 지금 같은 난세에선 대단히 치명적이었다.

소흥 왕부의 주위에 힘이 모이지 않는 결과를 가져온 까닭이었다.

“그간은 그래왔지. 하지만 지금은 흐름이 심상치 않네.”

“심상치 않다니요?”

“최근에 벌어진 사단 중에 강소성과 산동성의 움직임을 이미 경험해보았지 않은가?”

“강소성은 그렇다 쳐도, 산동성은 소흥 왕부와 무관한 것이 아닙니까?”

도지휘사의 물음에 순무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그렇지 않으니 하는 말일세. 실은 얼마 전 내게 산동성 순무가 서찰을 보내왔네.”

“산동성의 순무가요?”

놀라는 도지휘사에게 순무가 설명을 이었다.

“자네가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와 난 한림원에서 함께 근무한 적이 있네. 그땐 제법 가깝게 지냈지.”

“그런 인연이 있으셨군요. 전 그가 균사 왕부 측 사람이라 알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네. 그의 서신을 받기 전까지는…….”

순무의 말에서 이상한 느낌을 받은 도지휘사가 물었다.

“하면… 무언가 다르다는 말씀입니까?”

“맞네. 나도 그렇고, 모든 사람이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지.”

“무엇입니까, 그것이?”

“그가 한때 태사를 지냈다는 것이라네.”

“태사라니요? 태자 전하의 태사는…….”

“아니, 그는 현 황제 폐하의 태사였네.”

자신의 말을 중간에 자르며 나온 순무의 말에 도지휘사는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그, 그게 사실입니까?”

“그렇다네. 십여 년도 더 지난 일이라 잊고 있었지만 사실이네. 그뿐이 아니더군. 이번에 산동성에 부임한 고위 관리들은 모두가 그와 함께 태사를 지냈던 이들이었네.”

“고위 관리들이라면, 설마 도지휘사와 안찰사까지……?”

도지휘사의 경악성에 순무가 말을 이었다.

“좌포정사까지도 그렇더군.”

“맙소사!”

“균사 왕부가 당한 것일세. 폐하의 낙점이 늦어지며 대상자를 계속 바꾼 연유가 있었던 게지.”

“하, 하면 그가 무어라 서찰을 보낸 것입니까?”

도지휘사의 물음에 순무가 천천히 답했다.

“그는 우리가 위험할 경우 소흥 왕부에 의탁하길 권했네.”

“그가 왜 소흥 왕부에……?”

“폐하의 사람으로 의심되는 이가 소흥 왕부를 거론한 것은 한 가지 사유뿐이겠지. 아마도 황제 폐하께서는 소흥 왕부에 힘을 실어주실 생각인 모양일세.”

“왜 황실의 힘을 키우지 않고 그런 일을……?”

도지휘사의 의문에 순무가 말을 이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 황실의 힘이 강해진다면 남는 것은 내전뿐일세. 황명을 받들지 않는 무리를 용납할 수 없을 테니까.”

“하면 황제 폐하의 의중이 무엇인지……?”

“자세한 것이야 나도 모르지. 하나, 짐작은 가네.”

“어떤 것입니까?”

“이이제이.”

“이이제이요?”

“그래. 지금의 상황에선 친황실 쪽 왕부의 힘으로 다른 왕부를 견제하거나 무너트리는 것이지. 그 경우엔 적어도 내전이라기보다는 권력 다툼으로 끝날 공산이 클 테니까. 실패해도 황실의 안위에 문제가 생기는 일도 없을 것이고.”

순무의 설명에 도지휘사는 대충이나마 황제의 의중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소흥 왕부의 힘은 최대치로 불어날 공산이 컸다.

그 점을 예상한 도지휘사가 순무에게 물었다.

“혹시 후군도독부가 소흥 왕부의 힘으로 재건되는 것입니까?”

“자네도 나와 같은 예상을 한 모양이군. 나도 그 생각이 들었네. 주변 성도들의 지지를 획득한 소흥 왕부가 황명을 받아 후군도독부를 재건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이야.”

“그렇다면 앞으로…….”

도지휘사의 말을 순무가 받았다.

“태풍의 눈이 되겠지.”

“휩쓸리지 않으려면 눈으로 들어가야 하겠군요.”

“그렇겠지. 해서, 난 소흥 왕부와 이야기를 나누어보았으면 하네만.”

일성의 성주인 순무였지만 지금 같은 난세에서 가장 강력한 발언권은 실질적으로 군권을 움켜쥐고 있는 도지휘사였기에, 사전에 그의 동의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 순무의 물음에 잠시 생각을 가다듬은 도지휘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뜻에 따르겠습니다.”

도지휘사의 답에 순무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잘 생각했네. 내 좋은 답이 오도록 노력해봄세.”

서로의 손을 맞잡은 세 사람의 합의로 인해 태풍의 눈은 점차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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