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장. 부활(復活)-소흥 왕부, 일어서다
소흥왕이 매일같이 시간을 보내는 문정 군주의 처소까지 가는 길은 피로 점철되었다.
때론 고덕이 손을 쓰기도 하고, 때론 협련을 비롯한 일행이 나서기도 했다.
그리고 나중엔 시신들에서 무기를 주워 뒤따라온 왕부 무장들과 병사들이 알아서 앞을 피로 닦았다.
문정 군주의 처소인 별원의 월동문 앞에 선 고덕이 작게 숨을 골랐다.
마치 문정 군주, 그녀의 향기가 풍기는 듯했기 때문이다.
천천히 발걸음을 들여놓는 고덕의 뒷모습을 수많은 눈동자가 주시하고 있었다.
소흥왕의 곁으로 다가선 고덕이 아무 말 없이 꽃을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소흥왕이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왔나?”
“예.”
“미… 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을 것이네.”
고덕과 문정 군주, 두 사람의 사랑을 외면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또 고덕을 따돌리고 문정 군주의 하가를 진행한 것도 말하고 있었다.
그런 소흥왕의 말에 고덕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실 필요 없습니다.”
“의외군……. 난 자네가 내 멱살을 잡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잠시 숨을 고른 고덕이 말했다.
“예전에 낚시를 나갔었습니다.”
“그랬던가?”
“사람을 낚았지요.”
“그런 일도 있는 모양이로군.”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던 소흥왕은 이어지는 말에 놀란 표정이 되었다.
“여자였습니다. 아름다웠지요. 그녀는… 그녀는 기억을 잃고 있었습니다.”
“…….”
아무 말도 못하고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소흥왕을 외면한 채 꽃만 응시하며 고덕은 말을 이었다.
“연화란 이름도 붙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비 문양 머리 장식도 사주었지요.”
“자, 자네… 서, 설마!”
놀람을 넘어 당황하는 소흥왕을 무시한 채 고덕의 말은 이어졌다.
“그녀는 무식한 칼잡이를 사랑했습니다. 구박이 심할 때마다 그녀는 사랑한다고 말해주었지요. 그 말이 피로 채워진 칼잡이의 마음을 녹였던 모양입니다. 그 마음에도 사랑이란 말이 자리를 잡았으니까요.”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이럴 수가’만 연발하는 소흥왕의 귀로 고덕의 말이 계속 들려왔다.
“그런 그녀가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사랑을 알아버린 칼잡이는 미친 듯이 그녀를 찾았답니다. 그리고 한참의 노력 끝에 찾을 수 있었지만 그녀는… 그녀는 칼잡이를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고 무인, 어찌… 어찌 말하지 않았는가!”
소흥왕의 애끓는 물음에 고덕은 이야기로 답을 대신했다.
“칼잡이를 잊어버린 그녀는 조금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것이 칼잡이는 그녀를 향한 사랑이라 생각했습니다. 바보 같았지만…….”
“그래서 그 아이가 자네를, 한낱 야인을 마음에 두었던 게야……. 내가 무슨 짓을…….”
자책하기 시작하는 소흥왕에게 고덕은 마지막 말을 이었다.
“뒤늦게 알았습니다. 바보짓이란 것을. 그래서 쫓아갔습니다, 그녀를…….”
“그, 그럼 설마… 어디에 있나? 어디에 있어!”
반색하는 소흥왕의 생각이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고덕의 표정은 더욱 깊게 가라앉았다.
“그녀를 찾았지만 습격을 받았습니다. 도저히 무사히 빠져나올 수 없는 적에게서…….”
“그게 무슨 소리야? 대체 그게…….”
“그녀가 품에서 숨을 거두기 전에 불렀습니다. 상공이라고… 기다렸다고… 왜 이제 왔느냐고…….”
사실 왜 이제 왔느냐는 말은 없었다. 그것은 그제야 찾아갔던 자신에 대한 후회였을 뿐이다.
“그게 무슨 말이야! 수, 숨을 거두다니. 안 돼, 안 돼-!”
단말마의 비명을 지른 소흥왕은 끝내 정신을 잃고 말았다.
쓰러지는 그를 받쳐 든 고덕의 뺨을 타고 흐른 눈물이 떨어져 문정 군주가 그토록 좋아했던 제비꽃을 적셨다.
문정 군주의 방에서 정신을 차린 소흥왕은 그 짧은 시간에 십 년은 더 늙어 보였다.
조용히 일어나 앉은 그는 곁에 있는 고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냥 데리고 떠나지 그랬나?”
소흥왕의 책망 어린 물음에 고덕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마지막은 어떠했던가?”
“상처가 깊어 고생을 했습니다.”
“누구의 공격이었기에 고 무인이 지킬 수 없었던 겐가?”
“살황이란 자였습니다.”
소흥왕이 두 배분 전의 강호 고수를 알 리 없었다.
“강한 자였던 모양이로군.”
“강했습니다.”
“찾아야겠군.”
“죽였습니다.”
고덕의 차가운 음성에 소흥왕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혹, 척계광 부자의 죽음이…….”
“죽을 짓을 한 놈들입니다.”
단지 하가에 연관된 말만은 아니라는 걸 느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겐가?”
“척사량 그놈이…….”
뒷말을 다 잇지 못하고 부르르 떠는 고덕을 바라보던 소흥왕은 척사량이 사지가 모조리 뜯겨 나간 모습으로 처참하게 죽었다는 말을 상기해냈다.
“그 대가를 받았던 겐가?”
“천분의 일, 만분의 일도 제대로 치르게 하지 못했습니다.”
고덕의 분노가 고스란히 느껴진 소흥왕은 대강의 사정을 짐작했다.
“그러했군, 그러했어…….”
한참을 조용히 앉아 있던 소흥왕이 물었다.
“이제 어찌할 생각인가?”
“흉수를 찾고자 합니다.”
“흉수? 살황이라는 자는 죽었다 하지 않았는가?”
소흥왕의 의문에 고덕은 이 갈리는 소리를 냈다.
“그자를 사주한 놈이 있습니다! 그놈을 찾아 껍질을 벗겨 살을 저며 내지 않고서는… 복수는 끝나지 않은 것입니다.”
“사주한 자? 어디의 어떤 자인가?”
“강대한 힘을 가지고 깊게 숨은 놈입니다. 하지만 반드시 찾아내 죽일 겁니다.”
고덕의 말에 소흥왕이 재차 물었다.
“강대해? 혼자가 아닌가?”
“예, 혼자가 아닙니다. 그들의 힘은 척계광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라 하더군요.”
살황의 말이다. 물론 암천 혼자의 힘을 말한 건 아니었지만, 고덕으로서는 상관없었다.
암천주를 죽이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삼천 전부를 상대할 생각이었으니까…….
고덕의 답에 소흥왕의 눈에서 강렬한 생기가 일어서기 시작했다.
“갚아야지. 그런 강력한 힘을 가졌다 해도 반드시 갚아야 해!”
“그럴 것입니다.”
고덕의 다짐에 소흥왕이 말을 이었다.
“내가 힘을 보탬세. 내 모든 힘을 동원해 그 일을 도울 게야!”
다짐하는 소흥왕의 눈빛은 예전보다 훨씬 강하게 빛나고 있었다.
* * *
소흥에 들어와 있던 중군도독부의 병력 일만이 흔적도 없이 날아갔다.
물론 다 죽었다는 건 아니다. 수백이 죽고 그 이상의 수가 중상을 당하는 피해를 입었지만, 나머진 감당하기 어려운 힘과 왕부 병사들의 협공 사이에서 두 손을 들었던 것이다.
소흥이 정리되자 소흥 왕부의 병력은 차례차례 절강성 내의 군사 요충지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다수의 안휘성 향방군이 죽거나 사로잡혔다.
절강 성내의 병권을 소흥 왕부가 회복하는 데 걸린 시간은 보름 남짓이었다.
원래의 체제를 회복한 절강성과 소흥 왕부는 대대적인 모병에 나섰다.
원체 절강성민을 위해 선정을 베풀던 소흥 왕부였던 덕인지 군사를 모은다는 소흥왕의 포고문에 수천의 장정이 절강성 각지에서 지원했다.
그렇게 소흥 왕부의 군세는 순식간에 오만으로 불어났다.
절강성 도지휘사사 소속의 군세도 오만으로 확충되었다.
도합 십만의 군세가 절강성에 웅지를 세우자 당황한 것은 균사 왕부였다.
관할지의 각 성 도지휘사사의 병력을 빼면 중군도독부의 병력인 십만과 동일한 병력이 소흥 왕부의 손에 쥐여진 탓이었다.
향후 대응책이 수십, 수백 가지가 나오는 상황에서 균사 왕부와 중군도독부는 갑론을박의 격론에 휩싸여 있었다.
“애초에 소흥 왕부를 위협한 것이 실책입니다.”
“맞습니다. 해당 사안을 건의한 왕부 책사를 파직하시고, 소흥 왕부와 화평을 도모하시옵소서. 왕야.”
화친론자들의 주장에 주전론자들이 들고일어났다.
“그 무슨 가당치도 않은 말이오! 황제의 자객이 버젓이 활동하는 마당에 우리의 뒷마당인 절강에 황제의 또 다른 비수인 소흥 왕부를 그냥 두자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냔 말이외다.”
“그렇습니다. 황제의 자객이 누구를 노릴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이 상황에서 후방의 위협 세력을 그냥 두는 것은 커다란 패착이 될 것입니다. 속히 군을 일으키시어 병탄하소서, 왕야!”
수적으로 우세한 주전론자들의 주장이 사방에서 빗발치자 균사왕은 배석한 중군도독에게 시선을 돌렸다.
“도독의 생각은 어떠하시오?”
“양쪽의 의견이 다 타당성이 있사옵니다. 하나, 무관의 입장에서 후방에 위험 요소를 두는 것은 결코 좋은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중군도독이 주전론자들의 의견에 힘을 실어주자 균사왕의 결정도 그리로 흐를 수밖에 없었다.
“여러 대신과 중군도독의 생각이 그러하니 소흥 왕부는 토벌하는 것으로 결정한다. 각 성 도지휘사는 군병을 끌어모으라.”
균사왕의 명에 하남성의 도지휘사가 물었다.
“하오면 징집을 하는 것이옵니까?”
“아직은 아닐세. 지원병을 받게. 그렇게 늘어나는 병력을 훈련시키는 동시에 각 성의 향방군을 안휘로 집결시키게.”
각 성마다 약간씩의 차이가 있지만, 한 성의 향방군은 적게는 이만에서 많게는 오만에 이른다.
중군도독부를 손아귀에 넣은 균사 왕부다. 중군도독부의 관할권이 곧 균사 왕부의 관할권이 된 상황이니, 소흥 왕부가 있는 절강성을 뺀다 해도 그 범위가 호북, 하남, 산동, 강소, 안휘를 아우르는 동남부 오 개성에 이른다.
그 오 성의 향방군 병력만 모아도 십오만에 육박하는 병력이 생기는 것이었다.
거기에 중군도독부 십만이 더해지면 자그마치 이십오만의 병력이 균사왕의 명령에 움직이는 것이다.
균사왕의 결정이 떨어지자 동남부 오 개성 전체가 들썩였다.
그런 커다란 움직임을 소흥 왕부가 모를 수 없었다.
균사 왕부가 군사적 해결을 모색한다는 판단이 떨어지자 고덕이 움직였다.
그가 맨 처음 찾아간 곳은 예상외로 균사 왕부가 아닌 강소성이었다.
강소성 순무의 집무실에 스며든 고덕은 조용히 순무를 깨웠다.
“누, 누구냐!”
황제의 자객에 대한 소문이 퍼진 이후라 그런지 강소성 순무 이필의 놀람은 대단히 커다랬다.
“목을 취하러 온 것은 아니다.”
“그, 그럼… 무, 무엇 때문에…….”
“받아라.”
고덕이 내민 서찰을 덜덜 떠는 손으로 받은 이필은 서둘러 서찰을 읽었다.
“이, 이것은…….”
“내용 그대로다. 소흥 왕야께서 네 충정을 기대하신다.”
이필은 한때 절강성 좌포정사를 거친 인물이다. 당시 그의 능력을 높이 산 소흥왕의 천거로 말미암아 강소성의 순무로 승차했던 것이다.
“하, 하나 도지휘사는 내 사람이 아니오.”
“네 사람이 있을 것이라 했다.”
소흥왕이 평하길, 이필이란 자는 자신이 관할해야 하는 예하 부서에 반드시 자신의 측근을 만든다고 했다.
그걸 믿고 한 말에 이필이 반응했다.
“지휘동지라면 내 말을 듣긴 하겠소만…….”
“이틀 후, 그를 통해 도지휘사사를 완벽하게 장악해라.”
“하, 하면 지휘사는 어찌…….”
“그때면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고덕의 차가운 음성에 이필의 목은 잔뜩 움츠러들었다.
“아, 알겠소.”
고덕이 조용히 사라진 후에도 이필은 두려움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 * *
이필의 숙소에서 물러난 고덕은 강소성 도지휘사의 위치를 탐문했다.
안휘에 나가 있으면 시간이 촉박했을 텐데 그는 다행히 그리 멀리 나가 있지 않았다.
새롭게 모병된 지원병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성도인 남경에서 가까운 육합이라는 곳에 나가 있었던 것이다.
위치가 파악되자 고덕의 신형이 육합을 향해 날아올랐다.
육합에 도착한 고덕은 곧바로 도지휘사에게 향하지 않았다.
갑작스런 타살은 생각지 못한 상황을 만들어낼 위험이 있다는 이첨의 지적 때문이었다.
결국 주변에 어둠이 내리길 기다리던 고덕은 사위가 완전히 어둠에 잠긴 깊은 밤에 도지휘사의 숙소로 스며들었다.
고덕에 의해서 깨어난 도지휘사의 반응은 이필의 것과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고덕의 요구는 이필에게 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다, 다 썼소이다.”
자신이 던져 준 종이에 적힌 대로 쓴 도지휘사의 서찰을 확인한 고덕의 손이 허공에서 움직이는 순간, 도지휘사의 목을 어느새 검은 비단이 감았다.
“커헉-”
답답한 신음을 남긴 도지휘사의 신형이 대들보를 향하며 위로 올라갔다.
“컥컥커억-”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도지휘사의 발밑에 그가 쓴 서찰을 둔 고덕의 신형이 사라진 실내엔 답답한 도지휘사의 신음만이 감돌았다.
하지만 그도 잠시, 이내 침실엔 고요한 적막만이 흘렀다.
다음 날 아침, 도지휘사의 시신은 시비에게 발견되어 알려졌다.
그는 황제 폐하의 의중을 헤아리지 못하고 반도에게 부화뇌동한 죄를 청한다는 유서를 남겼다.
유서가 발견된 데다 목을 매 숨진 정황 등을 들어 도지휘사의 죽음은 자살로 결론지어졌다.
그의 자살 이후, 강소성은 균사 왕부의 명을 받지 않겠다고 천명했다.
그와 함께 강소 도지휘사 휘하의 사만 병력을 절강의 소흥 왕부로 보냈다.
이로써 균사 왕부가 모을 수 있는 병력은 이십일만으로 줄었고, 소흥 왕부의 병력은 십사만으로 늘었다.
강소성의 배신에 당황한 균사 왕부는 관할 도지휘사사에 즉시 병력을 보내라고 통지했다.
추가적인 이탈을 막아보자는 의미였다.
그 명에 하남성과 호북성 도지휘사사 소속의 향방군 육만이 안휘성에 도착했다.
하지만, 융경 왕부가 몰락한 후 재건되고 있던 산동성에선 강소성의 견제에 밀려 병력을 보낼 수 없다는 통지만 도착했을 뿐이었다.
균사왕은 불같이 분노했지만, 당장은 산동성에 어떠한 조치도 취할 수 없었다.
결국 균사 왕부가 모은 병력은 안휘성의 향방군 삼만을 합쳐 십구만의 병력뿐이었다.
그로 인해 소흥 왕부와의 병력 차는 오만으로 좁혀지고 있었다.
* * *
그 시각, 고덕은 광서성을 방문하고 있었다.
“어쩐 일이오?”
퉁명스럽게 맞는 안창에게 고덕이 으르렁거렸다.
“목을 베러!”
“그놈의 목을 벤다는 말은 아주 입에 붙었구려. 전에도 그러더니 이번에도 그러고.”
전혀 겁을 먹지 않는 안창의 반응에 고덕이 맥 빠진 표정을 지었다.
“역시 재미가 없어.”
“자객질을 재미로 하시오?”
“아아, 시끄럽고. 일단 앉아봐. 할 말이 있으니까.”
“서 있어도 말 잘 들리니 하시오.”
안창의 대꾸에 인상을 구긴 고덕이 말을 이었다.
“광동 좀 압박해봐.”
“광동이면, 후군도독부를 압박하란 소리요?”
“정확히는 그 주인이겠지.”
“영상 왕부 말이구려.”
“그래. 해볼 수 있겠나?”
“황명인 게요?”
“그놈의 황명은 무슨… 그냥 내 부탁이야.”
고덕의 답에 안창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황명도 아닌 말을 내가 들을 것 같소?”
“내 덕에 황제가 살았어. 그러니 이 정도 부탁은 해도 돼.”
고덕의 말에 안창이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과연 그대였군. 척계광 부자가 진중에서 암살당했다고 했을 때부터 그럴 거라 생각했소.”
“그러니 내가 부탁한 일 좀 해봐.”
“그거랑 이거랑 무슨 상관이라고…….”
“다 네가 그렇게 믿고 따르는 황제를 위한 일이라고.”
고덕의 말에 안창이 물었다.
“정말이오?”
“그렇다면 믿고, 아니라면 안 믿을 생각이야?”
“그건 아니오만…….”
“어쩔 거야?”
고덕의 물음에 안창이 자리에 앉았다.
“앉아서 들어야 할 말 같으니까… 일단 원하는 게 뭔지 정확히 들읍시다.”
안창의 요구에 고덕이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광동을 압박해서 후군도독부의 병력이 움직일 정도의 위협을 가하는 거야.”
“그러다 충돌하는 수도 있소.”
“어차피 다음 상대 아니었어?”
고덕의 물음에 안창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원래는 그랬지만 워낙 왜구의 침탈이 심해져서……. 우리와 후군도독부가 전투를 벌이면 왜구의 침탈을 막을 군세가 없어지는 셈이니 백성들의 처지가 곤할 터이기에 잠시 미뤄두고 있었소.”
“백성 생각해서 일을 뒤로 미룰 때 네 황제는 속 터져 죽을 거다.”
고덕의 말에 안창은 미소를 지었다.
“황상께선 그 고통의 시간을 분명 흔쾌히 즐기고 계실 게요.”
어찌하면 저런 믿음이 생기는지는 모르겠지만 황제에 대한 안창의 믿음은 확고해 보였다.
“그거야 네 생각이고. 아, 뭐 그러든 아니든 나랑 무관하니까 그건 건너뛰지. 일단 충돌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그 전에 내가 영상 왕부를 방문해볼 생각이니까.”
“영상왕이 죽으면 충돌은 피할 수 없소. 후군도독은 다른 곳의 도독들과 달리 영상왕의 생사와 상관없이 항쟁을 계속할 인사란 말이오.”
“왜, 친척이라도 되나?”
생각 없이 물은 것이었는데 대답은 예상을 뛰어넘었다.
“맞소. 영상왕의 장인이 바로 후군도독이오.”
안창의 답에 고덕이 손사래를 쳤다.
“괜찮아. 어차피 영상왕의 목을 딸 생각은 없으니까.”
“그럼… 회유로군.”
안창의 말에 고덕이 씽긋 미소를 지었다.
“회유보다는 협박이 되겠지.”
이후로도 여러 이야기를 더 나눈 고덕은 밤이 깊어서야 안창의 숙소를 떠났다.
* * *
안창은 고덕이 떠난 직후 병력을 움직였다.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던 안창의 군대는 즉각적으로 이동을 개시했다.
그 이동은 즉시 영상왕이 깔아놓은 세작들의 눈과 귀에 포착되었다.
이내 사방에서 전서구가 날아올랐다.
야간임에도 불구하고 병력의 이동이 시작되었다는 세작들의 보고에 영상 왕부는 즉시 후군도독부에 비상을 걸었다.
뿐만 아니라 광동을 제외한 인근 삼성에도 비상소집을 걸었다.
곧바로 호남, 강서의 향방군은 소집에 응했지만, 복건의 향방군에선 왜구들과의 전투로 흩어진 탓에 재빠른 대응을 할 수 없다는 통보만 도착했다.
왜구와의 전투가 심화되어 있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영상 왕부는 복건성의 향방군은 포기한 채 후군도독부의 병력을 집결시키도록 통보했지만, 그것조차 여의치 않았다.
후군도독부도 왜구와의 전투에 나가 있는 병력이 많아 소집된 병력은 겨우 사만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자 영상 왕부는 안창의 군대에 저항할 충분한 수의 병력을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
위기감이 고조되자 영상 왕부의 대전에서는 징집령을 내려 장정들을 끌어모아 병력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었다.
하지만 가뜩이나 왜구의 침탈로 몸살을 앓고 있는 지역에서 장정들마저 대규모로 징집할 경우, 민심의 이반이 크게 나타날 우려가 있기에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런 어느 날, 영상왕은 자신의 잠을 깨우는 손길에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무예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는 자라 하더니, 그 말대로 벌떡 일어난 그는 침상 옆에 두었던 검을 먼저 꺼내들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고덕이 물었다.
“그거 들고 있으면 살 것 같은가?”
고덕의 빈정거림에 영상왕의 얼굴은 벌겋게 물들었다.
삼엄한 경계가 펼쳐진 이곳까지 들어올 실력자라면 자신의 능력으론 상대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항을 포기하진 않았다.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겁먹은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애를 썼다.
“죽을 때 죽더라도 결코 헛되이 죽지는 않을 것이다.”
나름대로 기백마저 느껴지는 상대의 모습에 고덕의 입가에 오랜만에 진짜 미소가 어렸다.
“나름 괜찮은 사람이군. 죽이러 온 거 아니니까 일단 앉아봐.”
고덕의 말에 영상왕은 조금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주, 죽이러 온 게 아니라고?”
“그래.”
“그럼 왜 왔는데?”
“지금 그걸 말하려 하잖아. 그러니 좀 앉아.”
고덕의 힐난에 조심스럽게 침상에 앉는 영상왕은, 그러나 여전히 검을 손에서 놓진 않았다.
그 모습에 피식 웃어 보인 고덕이 말을 이었다.
“한 가지 제안이 있다.”
“제안? 무슨 제안?”
“호남과 강서에서 무력시위 좀 해줘.”
고덕의 말에 영상왕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안창의 반군이 공격을 눈앞에 두었는데 우리보고 병력을 빼란 말인가? 그게 날 죽이는 것과 뭐가 달라?”
이제 삼십대 후반인 영상왕은 예상외로 담도 크고 머리도 잘 돌아가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해주면 안창의 반군은 내가 막아주지.”
“그게 무슨 소리지? 혹시 너……?”
영상왕의 의문에 고덕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내가 안창과 손이 닿느냐고 묻는 거라면 그렇다고 답해주지.”
“흐음… 그럼 설마 안창의 이번 움직임도?”
“맞아. 그런데 어찌 안 거지?”
고덕의 물음에 영상왕이 답했다.
“그자, 반란군의 수괴라지만 사리는 아는 자이니까.”
“안창을 높이 사는군.”
“적이어도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영상왕의 답에 고덕은 향후 가장 강력한 왕야로 커갈 자가 바로 이 사람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마치 안창의 사람됨을 꽤나 믿는 것 같은 말투로군.”
“그간 그와 대치를 이어오는 상황 속에서도 내가 병력을 흩어 왜구를 상대할 수 있었던 건, 그가 왜구의 침탈이 기승을 부리는 기간엔 공격하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야.”
“어디서 나오는 확신인지 당최 모르겠군.”
“알면서도 그렇게 묻는 모양인 거 같지만 답은 해주지. 적어도 안창, 그 작자는 백성의 고단함을 알아. 그러니 백성의 고단함이 커지는 짓은 안 할 것이라 생각했지. 하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던 차에 이번의 일이 벌어져서 당황하긴 했어.”
“뭐, 대충 제대로 꿰고 있는 거 같으니 다시 말하지. 호남과 강서에서 무력시위 좀 해줘.”
“요즘 균사 왕부와 소흥 왕부 간에 시끄럽다더니, 그 탓인가?”
더할 수 없이 정확하게 꿰뚫어 보는 영상왕의 말에 고덕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머리가 좋은 모양이군.”
“대충 그런 소리는 듣지.”
“하지만 내가 보기엔 헛똑똑이야.”
“무슨 뜻이지?”
인상을 찌푸린 영상왕의 물음에 고덕이 답했다.
“적이 될지도 모르는 이 앞에서 자신의 머리를 과신하는 것은 죽음을 재촉하는 일이라는 거, 정말 모르는 거야?”
“아, 그거! 그 정도는 알지. 하지만 난 너와는 적이 되지 않으리란 걸 알거든.”
“그걸 어떻게 장담하지?”
“넌 명리에 초탈해. 아니, 신경을 안 쓴다는 게 더 맞겠군.”
영상왕의 평가에 고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아니라면 왕인 내게 그렇게 단박에 반말을 하진 않을 테니까.”
“네게 반말을 하면 다 명리에 초탈한 거냐?”
“그렇게 말하고 싶으면 마음대로. 여하간 명리에 초탈한 사람은 원하는 게 적어. 아니, 간단하다고 해야 하나? 그것만 들어주면 되니 적이 될 이유는 없지. 잘 구슬리면 동료도 가능할걸!”
영상왕의 말을 들으며 입으로는 그를 당할 수 없겠다고 생각한 고덕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쓸데없는 말로 이야기가 길어졌군. 답이나 듣지.”
고덕의 말에 영상왕이 두 손을 펼치고 어깨를 으쓱였다.
“뭐, 안 들으면 죽이겠다는 사람 앞에서 답은 하나뿐이지 않을까?”
영상왕의 대꾸에 고덕이 피식 웃었다.
“괜한 수고를 한 것 같군. 안창의 병력을 움직이기 전에 너랑 이야기했어도 해결이 되었을 것 같으니 말이야.”
“아니, 그건 그렇지 않아.”
생각 외의 답에 고덕이 의문의 눈빛을 보내자 영상왕이 말을 이었다.
“내가 아무리 왕으로 지휘권을 쥐고 있다고 해도 모든 신하에게서 맹목적인 추종은 받지 못해. 결국 어느 정도의 이해는 받아야 한다는 거지. 왜구하고 사방에서 전투를 하는데 무작정 호남과 강서에서 무력시위를 해대라고 하면 반발과 반대가 나올 수밖에 없어.”
“왜지?”
“그쪽은 균사 왕부가 있으니까. 그들이 안창만큼 적대시하는 사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우리 쪽에서 무력시위를 하는 걸 웃으며 봐줄 정도로 친하게 지내는 사이도 아니거든.”
“그게 지금 상황과 차이가 있나?”
“당연히. 지금은 명분이 있잖아. 안창의 공격을 무효화시킨다는 명분.”
영상왕의 말에 고덕은 아무 대꾸도 못하고 물러나와야만 했다.
영상왕은 약속대로 무력시위를 벌였다.
집결했던 호남과 강서의 향방군을 돌려보낸 영상왕은 그들로 하여금 인접한 호북과 안휘를 위협하게 했다.
당연히 안휘의 균사 왕부는 크게 당황했고, 호북의 향방군을 돌려보내는 한편 안휘성 향방군을 강서와의 접경으로 파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일련의 상황으로 말미암아 소흥 왕부를 상대하기 위해 균사 왕부가 동원한 군세는 십삼만으로 급감했다.
그것은 십사만인 소흥 왕부에 비해 오히려 일만의 병력이 부족한 군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