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장. 회귀(回歸)-일상으로 돌아가다
척사량의 참혹한 시신은 다음 날 아침에 발견되었다.
놀란 장수들이 척구진에게 달려갔지만, 그는 목과 몸뚱이가 분리된 채 자신의 막사 침상에서 발견되었다.
중심을 잃어버린 동북어위도총사부의 지휘부는 갈팡질팡했다.
그 사이를 융경 왕부의 무장들이 파고들었다.
이렇게 된 이상 자신들이 새롭게 왕위에 천거한 어린 왕야를 주인으로 모시고 반정의 끝을 보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도총사부의 고위 장군들의 생각은 달랐다.
반정의 최고위자들은 모조리 목이 잘려 죽었다.
특히 다시금 반란의 중심에 섰던 척사량은 끔찍하도록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그 일련의 살행이 황제가 보낸 자객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여기는 장군들은 반란을 지속해야 하는 것에 대해 겁을 냈다.
그렇다고 이제 와 황제에게 항복을 하면 목숨을 보전키 어려우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한 통의 서찰이 군영에 전해졌다.
장춘의 도총사부 대본영에서 날아온 서찰은 절제사 호경명의 것이었다.
원래부터 그의 수하였던 우군도독부의 고위 장군들이 먼저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즉시 회군하라는 호경명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북 삼성의 도지휘사들과 엉겁결에 반란군이 되어버린 하북성 도지휘사는 그 주장에 동조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들이 떨어져 나갈 경우 안위를 보장할 수 없었던 융경 왕부의 무장들은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거기에 반란의 흉수가 되는 척계광의 사병들을 지휘했던 무장들이 힘을 실었다.
양측의 대립이 첨예하게 이루어지는 시기, 호경명이 장춘에 남아 있던 도총사부의 병력들 중 우군도독부에서 십만의 병력을 이끌고 남하하기 시작했다.
우스운 건 그 명분이었는데, 호경명은 패악무도(悖惡無道)한 반란군을 토벌한다는 기치를 내걸었다.
그것이 뜻하는 바를 알아들은 우군도독부 장수들과 동북 삼성의 지휘사들이 일제히 휘하 병력을 이끌고 반란군을 이탈했다.
하북성의 지휘사와 휘하 병사들도 다를 것이 없었다.
생각지 못한 상황에 당황한 융경 왕부의 무장들과 척계광의 사병들을 지휘하는 장군들은 즉시 병력을 움직여 임구로 물러났다.
자신들보다 많은 수의 적을 맞기에 알맞은 지형을 찾아 움직인 것이다.
호경명은 남하를 계속해 북경 인근에서 대기하던 병력과 합세했다.
그로써 반란군이 하루아침에 근황군이 되어버린 셈이었다.
완전히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이었지만, 황실은 그것을 따질 입장이 되지 못했다.
당당히 수백의 호위 병력만 데리고 자금성으로 입성한 호경명에게 가정제는 새로이 동북어위도총사의 직위와 함께 반정토평병마절제사란 직책을 새롭게 제수하여야만 했다.
황제로부터 자신의 직책을 인정받고, 반정토평군이란 이름으로 얼마 전까지 반란군에 참여했던 장수들과 병사들의 안위를 보장받은 호경명은 그길로 자금성을 나섰다.
북경 외곽에 주둔 중이던 동북어위도총부 예하 병력 앞에 반정토평군이란 기치가 새롭게 내걸렸다.
이십삼만에 달하는 병력이 반정토평군의 기치 아래 임구로 몰려들었다.
이만에 불과한 죽은 척계광의 사병들과 팔만의 융경 왕부의 병력은 임구에서 결사 항전을 벌였지만, 중과부적이라는 말을 증명하듯이 보름 만에 토벌되었다.
반란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하지만 이번 반란의 최대 공로자인 황제의 자객에 대해선 끝내 알려진 것이 없었다.
그 탓에 관부 안에선 황제에게 수만 대군을 무색게 할 뛰어난 자객이 있다는 소문이 퍼져 나갔다.
그러자 근황의 명을 거부했던 왕부들과 도독부의 경비가 몇 배로 강화되었다.
그런 일련의 움직임과 상관없이 척씨 부자를 모조리 죽인 고덕은 북경 외곽의 명승지 중 하나인 소오태산 입구에 늘어선 객잔들 중 한 곳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십시오, 대협.”
들어서는 고덕을 맞은 이는 후량이었다.
“팔이와 협련은?”
“말씀하신 흔적을 알아보러 움직였습니다.”
후량의 답에 고덕을 따라온 묵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흔적이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놈들을 일부러 놓아주었다.”
“놈들이라시면……?”
“진짜 흉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묵린의 물음에 고덕은 살황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를 짤막하게 설명했다.
물론 그들의 광범위한 조직이나 야욕은 모조리 생략되었다.
어차피 고덕이 집중한 것은 그런 일이 아니라 오로지 문정 군주의 복수였기 때문이다.
“그럼 흔적이라는 게……?”
“그래. 척계광이 죽을 당시 주변에 놈들의 잔챙이들이 숨죽이고 있기에 그냥 두었다.”
“그들의 흔적을 쫓으시려는 것이로군요.”
묵린의 말에 고덕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들이 늦은 점심을 해결하는 동안 돌아온 왕팔과 협련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흔적을 놓쳤다고?”
“예. 놈들의 서찰을 가진 자를 쫓았는데, 중간에 숨겨 놓았던 전서응을 날리는 것으로 추적이 끊겼습니다.”
“흠… 하면 놈들은?”
“여전히 북경 인근에 은신해 있고, 일부는 북경 안으로 스며들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놈들을 족친다.”
먹던 점심을 두고 일어서는 고덕으로 인해 묵린도 별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서야만 했다.
그 뒤를 일행이 모두 따랐다.
이후 그들은 근 이백을 도륙하는 고덕의 잔인성을 목격해야만 했다.
간혹 가다간 생포된 이가 생으로 사지가 뜯겨 나가는 것도 보았다.
그런 참혹한 추살과 추문에도 불구하고 고덕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었다.
주저리주저리 떠들던 살황도 삼천의 위치는 알려 주지 않았던 탓에 더 이상의 추적을 이을 수 없었다.
단서가 끊기자 고덕은 한동안 미친 듯이 흔적을 찾아 동분서주했다.
일전에 부딪쳤던 청성의 인물들을 찾아 청성 본산까지 걸음 했지만 그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후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들과 함께 어울렸던 소림과 무당의 사람들까지 찾아가보았지만, 역시 그들에게서도 아무런 단서를 얻을 수 없었다.
결국 고덕은 살황이 거론했던 삼천이란 조직을 찾아낼 만한 그 어떠한 단서도 얻지 못했다.
그즈음 임구에서 버티던 반란군이 토벌되었다.
* * *
며칠째 객잔에 틀어박혀 술만 마셔 대는 고덕을 바라보는 이들의 표정엔 근심과 걱정이 가득했다.
“저렇게 두어도 괜찮겠습니까?”
묵린의 물음에 협련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그 어떤 말도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왕팔의 말과 묵린이 귀동냥한 정보로 고덕에게 일어난 일을 알아낸 일행은 그의 고통을 충분히 짐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소흥 왕부에서 보였던 특이한 고덕의 행보를 그제야 완전히 이해하게 된 협련은 특히나 측은지심이 깊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두었다간 몸이 상할까 두렵습니다.”
묵린의 말에 협련이 미소를 지었다.
“저 정도로 무너질 분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협련의 말에 묵린의 얼굴에 겸연쩍음이 떠올랐다.
하긴 천하오존이라 불리는 이가 저 정도의 술판에 몸이 상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긴 합니다만…….”
그렇게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이들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섰다.
술잔을 내려놓은 고덕이 벌떡 일어나 다가왔기 때문이다.
“가자.”
“어, 어디로……?”
당황한 협련의 물음에 고덕이 답했다.
“알려야 하지 않겠나?”
“무엇을 말입니까?”
“왕부에…….”
그제야 문정 군주의 죽음을 소흥 왕부에 알리겠다는 말을 알아들은 협련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괜찮겠습니까?”
“그녀의 죽음마저 감출 이유는 없으니까…….”
“그야 그렇습니다만…….”
협련은 소흥왕의 책망이 두려웠다.
소흥왕에게 문정 군주의 존재가 어떤 의미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그 모든 원망이 고덕에게 몰렸을 때 그가 받을 상처의 깊이가 협련은 걱정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걱정을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충분히 알고 있을 고덕이었기 때문이다.
요 며칠 술 속에 파묻혀 산 것엔 그에 대한 고뇌도 분명 일조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고덕이 움직이자 걱정을 접어둔 협련과 일행이 곧바로 따라붙었다.
이전처럼 뒤처져 며칠씩 고생해서 찾아다니는 일을 겪고 싶진 않아서였다.
다행히 이번엔 고덕이 이전처럼 무지막지한 속도로 이동하지 않았다.
물론 천천히 이동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경공을 통한 이동이었다.
중간 중간 식사도 하고 쉬기도 했다.
그때마다 고덕과 일행은 전쟁 후 피폐해진 백성들의 일상을 볼 뿐이었다.
전쟁의 상처는 토벌군과 반란군이 전투를 벌였던 하북성을 벗어나자 사라졌다.
하지만 산동을 지나 안휘로 접어들면서부턴 이상한 분위기를 느껴야만 했다.
그것은 마치 전란 직전의 어수선함 같았다.
특히 안휘의 성도인 합비에 대한 입성이 불허되자 고덕과 일행은 무언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무기를 들었다고 입성이 불가능하다니, 이거야 원…….”
성문 밖 객잔에서 소면으로 허기를 달래던 고덕과 일행은 자신들처럼 입성이 불허된, 무림인으로 보이는 이의 불만을 들으며 불편한 미소를 지어야만 했다.
“그게 다 황제의 자객 때문이라는 소문이더이다.”
또 다른 무림인의 말에 처음 불평을 터트렸던 무림인이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요? 황제의 자객이라니.”
“이번 반란 토벌에서 가장 중요한 공을 세운 자객이 있다더군요.”
“가장 중요한 공?”
“척계광 세 부자와 융경왕의 척살 말이오.”
“아, 그 자객! 한데, 그 자객과 합비에 대한 통행 제한이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거참, 합비에 무엇이 있소? 바로 후군도독부와 균사 왕부가 있지 않소!”
“그렇긴 하오만…….”
여전히 이해를 못하는 상대의 반응에 신이 났는지 곧바로 세세한 설명이 따랐다.
“생각해보시오. 오군도독부 가운데 황제가 가장 신뢰하던 곳이 어디요? 바로 중군도독부 아니겠소. 하지만 결과는 어땠소? 균사 왕부와 손을 잡은 중군도독부가 황제의 뒤통수를 친 게 아니오. 그것은 이미 다른 왕부들의 입김이 강했던 여타 도독부들과는 다른 의미였을 것이오.”
그제야 무언가 알 것 같다는 표정의 무림인이 무릎을 쳤다.
“그럼 황제가 자객을 보내 앙갚음을!”
“물론 그거야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겠소. 여기뿐이 아니라 각 도독부와 그곳에 영향력을 행사했던 왕부가 위치하는 도시들은 요사이 전부 무림인뿐만이 아니라 무기를 소지한 사람은 통행을 시키지 않는다 하오.”
두 무림인의 대화를 듣고 있던 고덕과 일행의 시선이 마주쳤다.
“혹시 황명을…….”
협련의 물음에 고덕은 딱 잘라 말했다.
“이번 일론 만난 적도 없다.”
고덕의 반응에 일행의 눈짓이 오고 갔다.
오해가 오해를 부른 모양이니 그에 대해선 달리 말을 말자는 의견들이었다.
결국 합비엔 들어가 보지도 못한 고덕과 일행은 다시 길을 나서 절강으로 들어섰다.
그런 고덕과 일행은 곧 조금 더 이상한 상황을 경험해야 했다.
“저건 안휘성의 깃발이 아닌가?”
고덕의 물음에 협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한데 저게 왜 여기에 있는 거지?”
고덕이 의문을 가질 만한 것이, 안휘성의 깃발이 휘날리는 곳은 절강성 도지휘사사 휘하의 병력이 머무는 요새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안휘성에서 절강성으로 이어지는 주요 관도에 대한 경계 임무를 띠고 있었기에 관도에 접해 있어, 관도를 지나는 사람들에겐 꽤나 유명한 곳이었다.
협련도 같은 의문인지라 고덕의 궁금증을 풀어줄 수는 없었다.
문제는 여정 중 그런 곳이 여러 곳 눈에 띄었다는 것이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절강성의 성도인 항주를 지날 때였다.
항주 성문의 경비 병력이 평시보다 증강되어 있었는데, 의아하게도 그 병력들이 모두 안휘성의 향방군 병사들이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관부의 일이기에 애써 의문을 누른 일행은 소흥으로 향했다.
그러나 소흥의 성문을 지나치는 순간, 더 이상은 의문을 묻어둘 수 없게 되었다.
소흥엔 중군도독부의 기치를 세운 대규모 병력이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다.
왕부로 향하기 전에 소흥 시내의 객잔에 자리를 잡은 고덕은 정보를 모으러 나간 왕팔과 후량을 기다렸다.
잠시 후, 두 사람이 돌아와 전한 이야기는 기가 찰 내용이었다.
“그러니까… 균사 왕부에서 소흥 왕부를 압박했단 말이냐?”
고덕의 물음에 왕팔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답했다.
“그게 압박보다는 수위가 조금 더 높은 것 같습니다.”
“그것이 무슨 뜻이지? 괜히 뜸 들이지 말고 속 시원히 이야기해봐.”
고덕의 재촉에 왕팔이 말을 이었다.
“그게… 중군도독부 관할권에 있는 호북, 하남, 산동, 강소, 절강의 도지휘사들과 안찰사, 그리고 승선포정사들을 균사 왕부에서 불러들였답니다.”
“한데?”
“절강성의 관리들만 참여하지 않았다고…….”
당연한 일이다. 안휘에 균사 왕부가 들어서 있어 성주인 순무의 기능을 하는 것처럼 절강엔 소흥 왕부가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명을 어겼다고, 병력을 파병해 일체의 권한을 박탈했다고 합니다.”
왕팔의 말에 검미를 찌푸린 고덕이 물었다.
“소흥 왕부의 대응은?”
“최악의 경우 군사적 대결이 발생되더라도 대항을 해야 한다는 절강성 도지휘사와 왕부 무장들의 의견에도 불구하고 순응하라 명했답니다.”
“왕야의 생각인가?”
고덕의 물음이 갖는 의미를 파악한 왕팔이 고개를 끄덕였다.
“외부적 요인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왕팔의 답에 고덕은 한참 동안 생각을 가다듬었다.
“어찌… 할까요?”
협련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고덕이 낮은 음성으로 답했다.
“잠시 상황을 보기로 하지.”
“예, 대협.”
고덕답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지난 일들이 일상적이지만은 않았기 때문에 일행은 조용히 명에 따를 뿐이었다.
* * *
각종 꽃으로 화사하게 단장된 작은 정원에 선 소흥왕은 멍하니 화단을 가득 메운 꽃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소흥왕의 뒤로 이첨이 모습을 드러냈다.
“왕야, 중군도독부 도독첨사가 뵙기를 청합니다.”
“무슨 일인가?”
“왕부 병력의 감… 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첨의 억눌린 음성에 고개를 돌린 소흥왕의 얼굴은 이전과 달리 매우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승인한다고 하라.”
“와, 왕야!”
놀라는 이첨의 경악성에도 불구하고 소흥왕의 시선은 다시 꽃으로 돌아갔다.
“악을 써 지킨다 한들 이어받을 이도 없음이니…….”
자손이 없는 소흥왕은 문정 군주가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에게 왕위를 잇게 할 생각이었다.
예전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겠지만, 지금처럼 황제의 힘이 약하고 각 왕부의 힘이 강할 때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더구나 그렇게 일각을 지켜 냄으로써 황제에게 힘이 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젠 그런 생각을 버렸다.
그날, 장춘의 그 어디에서도 문정 군주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다는 새로운 동북어위도총사의 전갈을 받은 그날 이후로는…….
“왕야…….”
이첨의 음성에서도 맥이 빠졌다.
후계자의 상실은 생각 이상으로 소흥 왕부에 커다란 약점을 주었다.
풀 죽은 모습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첨의 뒤가 소란스러워지더니, 일단의 왕부 병사들이 중군도독부의 병사들에게 밀려 들어왔다.
비슷한 수임에도 불구하고 왕부 병사들이 밀린 것은, 그들의 무장이 해제된 상태인데 반해 중군도독부 병사들은 완전한 중무장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런 중군도독부 병사들 앞에 고위 장군복을 입은 이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에 계셨군요, 왕야.”
앞으로 나선 이의 모습을 확인한 이첨이 인상을 구기며 그를 막아섰다.
“이곳이 어디라고 함부로 들어서는 것이오!”
“이 지휘사의 말은 마치 내가 오지 못할 곳에 왔다는 듯하구려.”
“이곳은… 이곳은…….”
말을 잇지 못하는 이첨을 손을 들어 안정시킨 소흥왕이 말문을 열었다.
“날 찾은 것이 왕부 병력의 감축 때문이라면 그리하게.”
소흥왕의 말에 도독첨사 위진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훌륭한 결정이십니다. 그리하옵고 도독부 병사들 중 일부를 왕부 안에 주둔코자 하니 허락해주시지요.”
“위 첨사!”
분노한 이첨의 고함에도 불구하고 위진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러시오, 이 지휘사?”
도독부 도독첨사는 종이품, 그에 반해 왕부 장군부의 책임자인 왕부지휘사는 정이품이다.
불과 한 품계 차이라고는 하나 위진의 말투는 분명한 결례였다.
하지만 이첨은 그런 사소한 문제는 지적할 정신도 없었다.
“왕부에 외부의 병력을 주둔시킨다니, 감히 왕야를 겁박하는 것인가?”
“겁박이요? 우리가 무엇 때문에 왕야를 겁박한단 말입니까? 그럴 연유가 없지 않습니까?”
능청스러운 위진의 대꾸에 이첨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고성을 토해냈다.
“하면 감히 왕야의 명예를 해치려 하는 겐가?”
“거, 이 지휘사는 이상한 쪽으로 자꾸 생각하는 모양인데, 도독부의 병력이 왕부 안에 주둔하는 것은 왕부 병력이 줄어들면 생기게 되는 경비 병력의 부족을 막기 위함이라오.”
애초에 왕부 병력의 감축이 없으면 생기지도 않을 일이다.
완벽하게 어르고 뺨치는 수법이니, 대놓고 모욕을 주는 셈이었다.
“이익!”
분노가 극에 달한 이첨이 검병에 손을 얹자 위진의 뒤를 따라 들어와 있던 그의 호위병들이 일제히 검을 뽑았다.
감히 왕을 앞에 두고 벌일 수 없는 행위였지만, 중군도독부의 병사들은 버젓이 그 같은 짓을 자행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왕야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첨은 이를 악물고 검병에서 손을 떼었다.
그 모습에 위진이 차가운 음성으로 요구했다.
“지휘 책임자라 믿고 무장을 허락했었소만 더 이상은 안 되겠소이다. 검을 내어주시오.”
다시금 분기가 치솟았지만, 그 상황에서도 묵묵히 화단의 꽃만 바라보고 서 있는 소흥왕을 일별한 이첨은 이를 악물고 검을 풀어주었다.
이첨이 무장을 해제하자 위진의 태도가 일변했다.
“이 지휘사가 왕야의 뒤에서 검병에 손을 대었다. 시해의 혐의가 있으니 압송하여 조사하라!”
위진의 명에 당장 서너 명의 병사가 검으로 위협하며 달려들어 이첨을 포박했다.
그렇게 이첨이 끌려가는데도 소흥왕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왕야?”
위진의 부름에 마지못해 고개를 돌린 소흥왕이 낮은 음성으로 답했다.
“그리하게. 대신 이첨 지휘사를 고이 풀어주게.”
“조건이십니까?”
비아냥거림이 분명한 위진의 말에 소흥왕이 고개를 저었다.
“부탁일세.”
그 말에 위진의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맺혔다.
“생각해보지요. 그럼…….”
제대로 된 인사도 없이 몸을 돌려 월동문을 나선 위진의 음성이 들렸다.
“역적 척계광에게 하가된 문정 군주의 처소를 어찌 지금까지 두는지……. 내 상신하여 이곳을 부순 후 연못을 만들어야겠다.”
결코 작지 않은 음성이니 고의적인 말이리라…….
그럼에도 소흥왕은 화조차 내지 않고 묵묵히 꽃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언젠가 나이 어린 동생 문정 군주가 아름답다고 극찬했던 제비꽃을…….
한편, 문정 군주의 처소였던 전각의 지붕 위에서 그 모든 것을 지켜보던 인영이 조용히 사라졌음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 * *
다음 날, 고덕은 새 옷으로 갈아입고 객잔을 나섰다.
“어디로 가십니까?”
협련의 물음에 고덕이 미소를 지었다.
“처가에.”
그 말이 주는 의미를 알아들은 협련을 비롯한 일행이 그 뒤를 따랐다.
소흥 왕부의 앞, 중군도독부의 장수로 보이는 군관이 두 명의 병사와 함께 정문을 막고 섰다.
“웬 놈이냐?”
말이 끝나기 무섭게 군관의 얼굴을 손으로 잡은 고덕은 그대로 그의 머리를 벽 속에 처박아버렸다.
질펀한 피가 벽을 타고 흐르자 곁에 있던 두 병사가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고덕은 그 둘을 향해 손을 한 번 떨었을 뿐이지만, 가볍지 않은 경력은 병사 둘의 가슴을 깨끗하게 관통하고 지나갔다.
숨이 끊긴 병사 둘이 끈 떨어진 인형처럼 무너져 내리자 고덕은 아무 말 없이 정문으로 들어섰다.
말이 길지, 눈 한 번 깜빡거릴 동안 벌어진 일이었다.
그 탓에 제지도, 조언도 하지 못했던 일행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정문 안으로 들어가는 고덕의 뒤를 황급히 따랐다.
고덕과 일행의 모습에 중군도독부 병사들은 의아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다 한 장수가 그 앞을 가로막았다.
“누구인가?”
군복도 아니고, 그렇다고 하인복도 아닌 이들이 무장까지 하고 돌아다니니 묻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상대의 물음에 고덕은 시퍼렇게 일어선 강기로 뒤덮인 수도로 답을 했다.
목을 잃은 장수의 시신이 무너지자 주변에 있던 도독부의 병사들이 몰려들었다.
더 이상 어쩔 수 없다고 판단했던지 협련과 묵린, 그리고 후량의 신형이 빛살처럼 뻗어나갔다.
이십여 명에 달하던 중군도독부 병력은 순식간에 정리가 되었다.
다만, 정리의 방법은 제각각이었다.
협련과 묵린이 혈을 잡거나 급소를 쳐 기절시킨 반면, 후량은 모조리 목을 꺾어 숨을 끊어놓은 것이다.
소란에 고개를 내밀었던 왕부 병사들이 고덕과 협련의 모습을 보고 반갑게 달려 나왔다.
그 안엔 한때 고덕이 뽑았던 호위 무사인 신허가 섞여 있었다.
“대, 대협!”
눈물마저 글썽거리는 신허의 마중에 고덕이 물었다.
“다른 이들은?”
“그, 그것이…….”
“그들은 저들을 막다 유명을 달리했소.”
귀에 익숙한 음성에 고개를 돌린 고덕은 천천히 다가오는 이첨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죽었단 말이오, 모두?”
“그랬소. 저항하지 말라는 왕야의 명이 있었지만…….”
호위 무사의 직분을 다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에 고덕의 입가엔 씁쓸한 미소가 어렸다.
죽음은 슬픈 일이었지만, 의기가 결부된 죽음에 애도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제대로 살다 갔다면 그로 된 일.”
고덕의 답에 신허가 고개를 숙였다.
“대협…….”
살아남은 자의 고통이다. 당시에 다른 임무를 맡아 나가 있던 신허는 뒤늦게 귀환한 탓에 대응의 시기를 놓쳤던 것이다.
“산 자는 그에 맞는 값을 하면 그뿐이다.”
고덕의 말에 신허가 고개를 들었다.
“정말 그럴까요?”
“아니면 그렇게 만들어라. 그게 네게 남은 일이다.”
고덕의 답에 신허의 얼굴에 결의가 떠올랐다.
“알겠습니다, 대협.”
신허의 답을 들은 고덕의 발걸음이 움직이자 이첨이 그것을 막았다.
“이미 늦은 일이오. 왕야를 더욱 괴롭게 하지 마시오.”
이첨의 말에 그를 향해 시선을 돌린 고덕이 물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찾아온 건지는 아는가?”
평소와 말투가 달라졌지만 모든 이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던 때라 그랬는지 이첨은 고덕의 변화를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고 무인을 떠나 있게 만든 것을 따지고자 할 생각이 아니오?”
“그럴 생각도, 자격도 없다.”
알 수 없는 말만 남긴 고덕이 자리를 뜨자 일행 모두 그 뒤를 따랐다.
그렇게 멀어져 가는 이들의 뒤를 중군도독부 병사들의 시신에서 칼 하나를 주워든 신허가 따랐다.
그 모습에 자극을 받았는지 이첨의 눈치를 보던 몇몇 장수들과 병사들이 신허처럼 시신들에서 무기를 주워 그 뒤를 쫓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