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56장 (57/129)

제56장. 척살(刺殺)-적을 베다

북경이 가까워지자 밤임에도 불구하고 사방이 훤하게 밝았다.

수백 수천의 군병들과 그들의 막사가 늘어선 주변에 화톳불이 놓여 사방을 밝혀 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군병들을 지나친 고덕의 신형이 군막들이 집중된 곳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이현은 암천에 소속된 고위 무사였다.

그는 암천주의 명에 의해 십여 명의 동료와 함께 척계광의 호위 무사로 지내고 있었다.

물론 그들뿐은 아니다. 암천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척계광을 호위하는 자신들을 돕기 위해 주변에는 암군 이백이 포진해 있었다.

그런 경호망에 구멍이 뚫렸다.

빠르게 다가오는 기세는 차갑고 거칠었다. 마치 홍수기의 황하처럼…….

잠자리에서 일어난 이현은 주변의 동료들을 깨웠다.

전음조차 주지 않았건만, 기억이 존재하기 시작한 이후 사십 년이 넘게 함께한 동료들은 이현의 표정만으로도 상황을 이해하고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척계광이 잠들어 있는 막사로 들어선 이현은 막사 안에서 경비를 서던 호위 무장들의 놀람에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잠시 후, 다가오던 기세가 휘어졌다. 동료들이 펼친 경호망에 걸려든 것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분명 일차적인 경호망을 분쇄한 것으로 느껴지는 침입자의 기세가 막사로 들이닥치지 않고 주변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곧바로 이차 경호망과의 충돌이 시작됐음을 급격하게 흔들리는 기세들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현은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침입자는 뒤를 깨끗이 하기 위해 호위 무사들을 모조리 제거하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불행하게도 이차 경호망에는 그 녀석이 있었다.

구열.

암혼이라 불리는 암천의 무인들 중에서도 가장 거칠고 강한 자인 그가.

하지만 이현의 입가에 어렸던 미소는 나타나는 것보다 빨리 사라졌다.

구열이라 짐작되는 기세가 일어서는 것보다 빨리 사그라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맹렬한 기세의 폭풍이 느껴진 이후, 침입자는 마지막 삼차 경호망으로 이동했다.

순간, 이상함을 느낀 이현이 호위 무사들에게 경고했다.

“도총사를 깨우고 병사들을 부르시오!”

경고를 남긴 이현이 삼차 경호망이 형성된 막사의 우측부로 나갔을 때, 그는 사신을 볼 수 있었다.

이 장이 넘게 떨어진 거리에서 검이 휘둘러졌다.

그런 검의 이동에 이 장이나 떨어진 곳에 위치하던 암혼 둘의 목이 떨어져 나갔다.

동료의 죽음에 고함을 지른 한 명의 암혼이 달려드는 순간, 침입자의 검이 붉은 광망을 토해냈다.

푸확!

무언가가 공간을 가르고 지나갔다고 느꼈을 무렵, 이현은 달려들던 동료 암혼의 몸이 공중에서 폭발하는 것을 코앞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너무 놀라 잠시 넋을 놓았던 이현의 정신이 돌아왔을 때 그의 눈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머리를 잃고 멀뚱히 서 있는 자신의 몸뚱이였다.

그리고 세상은 곧바로 새까맣게 변해버렸다.

살황이 언급한 삼천의 무인들로 보이는, 호철랑이 말한 호위 무사들 십여 명을 제거한 고덕은 천천히 척계광이 머문다는 막사로 들었다.

막사에는 이미 다수의 무장들이 검을 들고 대기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척사량, 그 더러운 놈이 나이를 먹은 모습이라 생각되는 자를 발견했다.

“네가 척계광인가?”

고덕의 물음에 사방에서 호통이 터져 나왔다.

“닥쳐라! 감히 자객 따위가 입에 담을 이름이 아니다!”

“무도한 놈!”

장수들의 호통에 비릿하게 웃어 보인 고덕이 다가서자, 척계광을 호위하던 무장들이 우르르 물러났다.

그들도 아는 것이다. 고덕이 베어버린 이들의 무위를.

시간을 끌 생각이 없었던 고덕은 검을 들어 크게 베었다.

스걱-

검이 지나간 궤적을 따라 천막의 뒷부분까지 모든 것이 한꺼번에 베어져 나갔다.

십여 명의 무장과 척계광의 시신을 지나친 고덕이 베어져 나간 부분으로 천막을 빠져나오다 빠른 속도로 달려오던 일단의 무인들과 마주쳤다.

“대, 대협!”

경악성에 고개를 돌리니 당황한 표정의 창군 묵린이 보였다.

“네가 이곳에 있다는 말은 들었다.”

고덕의 말에 그와 뒤편에 늘어진 척계광의 시신을 번갈아 바라보던 묵린이 물었다.

“대, 대협께서 하신 일입니까?”

“그래.”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묵린과 함께 달려온 무인들의 병장기가 일제히 고덕을 겨누었다.

순간, 고덕의 눈에 파란 광기가 떠올랐다.

그것이 순수한 살기라는 것을 알아차린 묵린이 동료 무인들을 향해 다급성을 터트렸다.

“거, 검마 대협이시오! 무기를 거두란 말이오!”

검마란 이름에 화들짝 놀란 무인들이 무기를 거두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서너 걸음씩 물러났다.

날 본 자, 죽는다. 검을 겨누는 자, 죽는다.

검마란 이름과 함께 강호에 회자되는 말이다.

정작 검마 본인은 단 한 번도 입에 담은 적이 없는 말이었지만, 마치 진실인 양 퍼진 말이기도 했다.

그 탓에 검마의 이름을 들은 무인들이 경기를 일으키며 후다닥 물러난 것이다.

그 모습에 고소를 베어 문 고덕이 묵린에게 물었다.

“막을 생각이 아니면 척사량, 그 개자식이 있는 곳이나 알려 주게.”

“척사량 장군은… 왜, 왜 찾으십니까?”

물어보나 마나 한 물음임을 자신도 아는지 묵린은 자신의 머리를 주먹으로 쥐어박았다.

“멍청한 건 여전한 모양이구나.”

“대, 대협!”

당황하는 묵린의 주변으로 무장들과 병사들이 몰려들었지만, 그걸 보면서도 고덕은 담담한 표정이었다.

“어디 있더냐, 그놈은?”

고덕의 물음에 묵린의 표정에 곤혹스러움이 서렸다.

“이곳에 식객으로 있습니다.”

“막겠다는 말이더냐?”

묻기 시작하면서부터 퍼져 나오는 기세가 이미 진득한 살기다.

아마도 ‘예’라는 말이 반쯤만 나왔으면 목은 떨어졌을 것 같았다.

그 때문이었다. 묵린이 힘차게 고개를 저은 것도.

“아닙니다.”

“그럼?”

“최소한 위치를 알려 드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묵린의 답에 고덕의 시선은 일체의 머뭇거림 없이 주변에 몰려든 무장들에게 향했다.

“척사량이라는 개잡놈을 찾는다. 어디 있나?”

고덕의 물음에 돌아온 답은 예상처럼 욕설이었다.

다만…

“이런 개…….”

욕설을 퍼부으려던 장수의 목이 떨어지며 욕은 완전히 마무리되지 않았다.

군은 집단성이 강하다. 대부분 동료가 죽어나간다면 앞뒤 안 가리고 밀어닥치기 나름이다.

하지만 그것도 때와 상황에 따라 다른 것이었다.

뭐가 어떻게 움직였는지조차 모르는 상황에서 장수의 목이 떨어지자, 그래도 무술깨나 익혔다는 주변의 무장들은 크게 당황했다.

그들도 말로만 듣던 강호의 절대 고수가 왔다는 걸 직감한 것이다.

“누, 누구요?”

우습게도 말끝이 반공대다. 그것도 더듬거리기까지…….

“그러는 넌 누구지?”

“도, 도지휘사… 가, 갈휘요.”

요녕성 도지휘사인 갈휘다. 무술이 뛰어난 건 아니지만 담이 크고 대범해서 출세한 인사였다.

“갈휘, 네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아. 대신 척사량이란 놈의 위치를 알려 주면 넌 살려 준다.”

고덕의 말에 갈휘가 뭐라 대꾸를 하지 못하는 동안, 그만큼이나 담이 큰 자가 나섰다.

“이런 죽일…….”

하지만 역시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목이 달아났다.

그것도 주변에 서 있던 다수의 무장들과 군병들의 목과 함께…….

소란이 일었고, 사람들은 우르르 물러났다.

“물었다. 어디 있나?”

고덕이 자신을 바라보자 갈휘는 마른침을 삼켜야 했다. 조금만 다른 말을 해도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이 없는 곳에서 저 눈으로 물었다면 맹세코 척사량의 위치를 소상히 설명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는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척계광의 군대에서 배신자의 말로가 어떻다는 것을 그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갈휘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쳐, 쳐라!”

아무리 겁을 먹어도 군병은 군병이다. 이런 위기 상황 속에서도 명을 좇도록 훈련된 것이 빛을 발했다.

와아아아!

갑자기 함성이 터지며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수백의 군병이 밀어닥쳤다.

하지만 정작 명을 내린 갈휘는 정신없이 뒤로 물러났다. 마찬가지로 눈치가 빠른 무장들도 다급히 물러섰다.

그 순간, 고덕의 검이 빛을 토했다.

이현이 죽기 전 보았던 바로 그 붉은 광망이었다.

푸확-

직선으로 피가 터져 올랐다.

수십의 군병의 머리가 터져 나간 끝에 도망치듯 물러나던 갈휘의 머리가 한순간 걸렸다.

투확-

갈휘의 머리를 터트린 광망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더불어 밀어닥치던 군병들의 움직임이 거짓말처럼 정지했다.

직면한 공포와 공격하라던 명령 사이에서 극심한 갈등을 보이는 것이다.

그 안에서 검을 들지 않은 고덕의 왼팔이 보석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백의 별빛이 폭발했다.

쫘악-

고덕을 중심으로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수백 군병의 몸이 걸레처럼 찢겨 나갔다.

폭발의 여력으로 밖으로 쓰러져 누운 군병들의 시신에서 다량의 피가 흘러나오며 짙은 혈향을 풍겼다.

엄청난 괴사를 눈으로 지켜본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한 사람, 두 사람… 도주가 늘어가는 속도만큼 공포 역시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순간, 한 명을 피해 수천의 병사가 도망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개중엔 간신히 목숨을 구한 무인들도 적지 않게 섞여 있었다.

방금 전에 터진 고덕의 공격에 미처 대비하지 못했던 무인들도 다수가 죽임을 당한 탓이었다.

메뚜기 떼처럼 도주하는 군병들을 바라보던 고덕이 발길을 옮겼다.

그런 고덕을 묵린이 잡았다.

“이 상황에서는 찾지 못합니다.”

“안다.”

“아신다면서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여기서 도주했다면 다른 군영으로 간 것이겠지.”

수만의 병력을 한군데로 몰아넣은 게 아니기 때문이다.

적게는 수백, 많게는 수천의 병력으로 흩어져 북경을 빙 둘러 포위한 탓이다.

그 탓에 본영이 있던 이곳조차 병력이라곤 수천에 불과했다.

“하면 다른 군영도 이리 만들 요량이란 말씀이십니까?”

“왜, 문제라도 있나?”

고덕의 물음에 묵린이 살짝 찌푸린 표정으로 말했다.

“이들에게도 기다리는 가족이 있습니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 건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생각과 다른 고덕의 답에 묵린이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대협답지 않으십니다.”

“나다운 거? 나다운 게 뭔가? 바보처럼 머뭇거리다 시기를 놓친 거? 적보다 월등히 뛰어나지 못해 내 여자를 지키지 못한 거? 대체 뭐가 나답지 않은 건가?”

갑작스런 고덕의 외침에 묵린은 놀라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 말들로 무언가 일이 있었음을 직감하고 물었다.

“척사량 장군이 혹 대협의 내자 분을…….”

“그놈을 찾아줄 것이 아니라면 더 이상 묻지 마라.”

싸늘한 음성을 던진 고덕이 다시 발길을 움직이자 묵린이 황급히 따라붙었다.

“척사량 장군은 다른 군영에 있습니다.”

묵린의 말에 고덕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왜? 알려 줄 수 없다더니.”

“대협이 그를 찾는 이유를 알았으니까요.”

자신의 답에 고덕이 시선을 돌리자 묵린이 앞으로 나섰다.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소문이 나기 전에 움직이죠.”

그 말에 두 사람의 속도가 점차 빨라지다 결국 선으로 변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사라진 군영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불쑥 일어섰다.

“어찌할까요?”

그 그림자들 중 하나의 물음에 수장으로 보이는 그림자가 답했다.

“우리로선 막을 수 없는 적이다. 즉시 암천으로 전갈을 보내라. 검마가 척계광과 척사량을 죽였다고.”

“예? 척사량은 아직 살아 있지 않습니까?”

수하 그림자의 물음에 수장 그림자가 못마땅한 음성을 흘렸다.

“하면 저자의 손에서 그가 살아남을 수 있을 듯싶으냐?”

“아, 아닙니다.”

“그러니 시키는 대로 소식을 전해라.”

“예.”

복명한 그림자가 다시 밤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수장 그림자가 중얼거렸다.

“우리의 기척을 못 느낄 인사가 아닌데 왜 살려 둔 거지……?”

수장 그림자의 말소리가 한밤의 적막에 묻혔다.

* * *

묵린의 안내로 이동한 고덕은 아직 소식을 듣지 못했는지 조용한 군영에 도착했다.

규모는 본영에 비해 결코 작지 않았다.

그 탓에 척사량이 맡은 직위가 절대 낮지 않은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다가가던 고덕은, 중앙의 한 막사에서 휘날리는 깃발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건……?”

고덕의 시선을 따라간 묵린이 답했다.

“예. 융경 왕부의 깃발입니다. 저곳에 융경왕이 머물고 있을 것입니다.”

얼핏 황제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이내 사라졌다.

지금은 누구보다 척사량, 그 잡놈을 잡아 죽이는 일에 몰두한 탓이다.

“저쪽이겠군.”

척계광의 막사에 나부끼던 동북어위도총관부의 깃발을 발견한 고덕의 말에 묵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척사량이 머물고 있을 겁니다.”

그 답에 두말없이 고덕이 움직였다.

드러내고 걸어가는 와중에도 그 둘을 잡는 경비병들이 없었다.

묵린의 팔에 매어진 표식 까닭이기도 했지만, 적이 이렇게 대놓고 다니지는 않으리란 생각 때문인 듯싶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이동한 두 사람이 최초로 제지를 당한 곳은 척사량의 막사 앞이었다.

“누구냐?”

막사 앞에서 경비를 서던 무장의 낮은 외침에 고덕의 검이 답을 대신했다.

순식간에 무장과 병사 둘을 베어버리는 그의 손속에 묵린이 혀를 내둘렀다.

그 자신조차 고덕의 검이 검집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보지도 못했던 것이다.

놀라 서 있는 묵린을 둔 고덕이 막사에 들어섰지만, 안은 텅 비어 있었다.

“흠…….”

주변을 둘러보니 모두가 단정한 편이다. 자신의 기습을 알고 도주한 것 같지는 않았다.

막사를 나선 고덕이 물었다.

“지금 시간에 있을 곳이 또 있나?”

그러자 상황을 짐작한 묵린의 시선이 융경 왕부의 깃발이 펄럭이는 막사로 향했다.

그 뜻을 알아차린 고덕이 움직이려 하자 묵린이 서둘러 경비 무사들을 막사 안으로 던져 넣었다.

“어차피 알려질 일이다.”

“가는 동안만이라도 조용하면 죽여야 할 이들의 수도 줄겠지요.”

묵린의 말에 고덕은 아무 대꾸 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런 고덕의 뒤를 묵린이 재빨리 따라붙었다.

* * *

그 시각, 융경왕의 부름으로 그의 막사로 찾아간 척사량은 부친을 대신해 불만 공세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렇게 시간만 끌다간 아무것도 되지 않는단 말일세.”

“하나, 도총사께선 선위를 기다리는 것이 좋다고 하십니다.”

“그것도 빌어먹을 황제가 선위를 하려 할 때나 일이지… 벌써 보름이 지났지만 아무런 움직임도 없지 않은가, 그 말이야!”

“군량 창고가 불탄 지 이제 사흘이 지났습니다. 압박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조금 더 기다려 보심이…….”

“기다리긴 뭘 기다린단 말인가? 즉시 도총사를 들라 하게. 내 그에게서 확답을 받아야겠어!”

융경왕의 호통에 척사량은 남몰래 주먹을 쥐었다.

결정만 선다면 언제라도 목을 딸 수 있을 작자가 자신의 앞에서 거들먹거리는 모습이 당최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게 다 그 빌어먹을 년 때문이야! 그년만 도망치지 않았다면…….’

척사량은 문정 군주의 실종으로 인해 부친인 척계광으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았다.

직책도 우군도독부 도독첨사에서 경력사로 여섯 품계나 떨어졌다.

물론 애초부터 황실의 추인을 받지 않은 인사였지만, 동북 삼성과 우군도독부에선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부친의 처결인 이상 황제의 임명과 다름이 없었다.

물론 그것도 척사량 본인이 문정 군주를 품으려다 당했다는 보고를 누락시킨 덕에 지킨 자리였다.

곧이곧대로 보고했다면 아마도 목이 달아났을 공산이 컸기에 숨겼던 것이다.

“뭘 그리 멀뚱히 서 있는 겐가? 나가서 척 도총사를 속히 부르라!”

융경왕의 호통에 인상을 잔뜩 찌푸린 척사량이 군례를 올리곤 막사를 나섰다.

그렇게 막사를 빠져나온 척사량은 술렁거리는 군영의 분위기를 느꼈다.

그에 혹여 야습이라도 가해왔나 싶어 근처에 있는 무장을 불렀다.

“무슨 일이냐?”

척사량을 알아본 장수가 당황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 그것이… 보, 본영이 급습을 당했다는 소문이…….”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대체 어디서 나온 말이냐?”

서슬이 퍼런 척사량의 호통에 장수가 사색이 되어 말을 이었다.

“그, 그것이 본영에서 탈출했다는 병사가…….”

말을 하며 한 곳을 흘깃거리는 장수의 시선을 따라간 척사량이 움직였다.

그가 도착한 곳엔 다른 병사들에게 둘러싸인 채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 병사가 있었다.

“네놈이 유언비어를 유포한 놈이렷다!”

척사량의 호통에 상대의 갑주에 붙은 계급장을 알아본 병사가 화들짝 놀라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닙니다요, 장군! 저, 정말로 본영에 난리가 났습니다요.”

“이놈이 그래도!”

버럭 화를 내는 척사량에게 병사는 다급히 설명을 이었다.

“저, 정말입니다요. 웬 괴물 같은 무사가 칼을 이렇게 휘두르니까 장수들의 목이 우수수 떨어졌습니다요. 그자의 손짓 한 번에 병사들 수백이 넝마처럼 되어 죽는 것을 이 눈으로 직접 봤습니다요.”

병사의 말에 척사량은 순간적으로 문정 군주를 채어간 자가 생각났다.

왜 그자가 생각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을 내팽개치고 건물을 무너트린 그 능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듯싶었다.

“그, 그자는 어찌 생겼더냐?”

혹시나 한 척사량의 물음에 병사가 설명한 외관은 분명 그때 그자의 모습이었다.

“내, 내가 알아볼 테니 병사들을 진정시키고 조용히 기다리도록.”

척사량의 명에 장수가 고개를 숙였다.

“옛, 장군!”

장수의 복명을 들으며 주변을 둘러보던 척사량의 눈에 일순 말이 들어왔다.

“진중에 웬 말이냐?”

“저 병사가 타고 온 말입니다.”

장수의 답에 척사량은 아무 말 없이 그 말에 올라탔다.

“괜한 말로 소란 떨지 말고 조용히 기다려라.”

장수에게 다시 한 번 주의를 준 척사량은 서둘러 움직였다.

마치 누군가에게 쫓기는 듯이 급한 움직임이었다.

* * *

고덕과 묵린이 융경왕의 막사에 도착했을 땐 그 근처에 병사들이 몰려 있는 상황이었다.

“알려진 건가?”

고덕의 중얼거림에 병사들의 움직임을 살펴본 묵린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닌 듯합니다.”

자신들이 융경왕의 막사로 다가가는데도 병사들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슨 일…….”

막사 앞에 도착하자 경비를 서던 왕부 병사들이 막아섰지만, 그들은 말을 채 마치지도 못하고 쓰러졌다.

병사들을 쓰러트린 창을 거둬들인 묵린이 자신을 바라보는 고덕에게 겸연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굳이 죽일 필요까지는 없을 듯해서… 죄송합니다.”

고덕이 손을 쓰기 전에 창대로 경비병들을 쳐서 기절시킨 것이었다.

묵린의 말에 고덕은 아무 말 없이 막사로 들어갔다.

그 뒤를 가슴을 쓸어내린 묵린이 따랐다.

“무슨 일… 누구냐!”

융경왕과 함께 있던 장군 하나가 의심스런 음성으로 물었지만, 그가 들은 답은 음성이 아니라 차게 빛나는 검이 했다.

가슴 어림부터 목까지 사선으로 잘려 나간 장군의 상체가 미끄러지듯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눈앞에서 본 융경왕은 기겁을 했다.

“누, 누구냐!”

하지만 융경왕의 물음은 무시되었다.

주변을 쓰윽 둘러본 고덕이 융경왕을 바라보며 물었다.

“척사량은 어딜 갔나?”

“그, 그는 왜……?”

물음은 중단되었다. 턱밑으로 고덕의 검이 디밀어진 탓이다.

“왜, 왜 이러는 게냐?”

“어디 갔냐고 물었다.”

마치 한겨울 차디찬 계곡물에 던져진 듯 소름 끼치는 느낌에 융경왕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도, 도총사를 데리러 갔다.”

융경왕의 답에 고덕의 표정이 구겨졌다.

척사량이 본영의 상황을 본다면 몸을 숨길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찾기 어려워진다. 어떤 군영으로 숨어들지 알 수 없는 탓이다.

곤란해하는 고덕을 향해 묵린이 말했다.

“일단 베시지요.”

그러자 고덕이 묵린을 바라보았다.

“살생은 피하자는 쪽이 아니었나?”

“이자는 다르니까요.”

“왜?”

“지금 상황에서 이자를 살려 주면 상황이 복잡해집니다.”

당장 막사 밖의 군병들과 드잡이질을 해야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필경 더 많은 이가 죽어나가야 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묵린의 말에 고덕은 검을 치우고 돌아섰다.

“네 일은 네가 해.”

그 말을 남기고 걸어가는 고덕의 뒤에서 묵린의 창이 허공을 갈랐다.

묵린의 창에 의해 창졸간에 목이 날아가며 융경왕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그렇게 융경왕의 목을 벤 묵린은 이미 움직이기 시작한 고덕의 뒤를 따라 황급히 융경왕의 막사를 벗어났다.

하지만 막사 밖으로 나선 둘은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그런 자연스러움 때문인지 여전히 융경왕의 막사 인근에 모여 있던 병사들은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웅성거리고 있었을 뿐, 그 둘에겐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 * *

날이 밝기 무섭게 반란군은 북경에 대한 포위를 풀고 집중했다.

그 와중에 척계광과 융경왕이 황제가 보낸 자객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소문이 퍼져 나갔다.

사실 유무에 대한 확인을 요청하는 고위 장군들의 문의에 척사량은 무답으로 일관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척사량은 수하 장수들을 시켜 군을 집결하는 데 매진했다.

마치 병력이 없으면 죽을 것같이 집요했다.

병력의 집중이 끝나자 척사량은 소문대로 융경왕과 척계광의 사망 사실을 공표했다.

더불어 두 사람이 자신에게 뜻을 완성해달라고 했다는 발표도 더했다.

일부 장군들은 그 말을 믿는 것도 같았지만, 일부는 고개를 저었다.

특히 척계광의 장남인 척구진과 그를 따르는 장군들의 반발은 생각 외로 거셌다.

그들은 융경왕의 죽음에 강한 의문을 제기하는 왕부 무장들과 연합할 움직임마저 보였다.

상황이 그리되자 척사량은 자신을 따르는 장군들과 함께 병력을 물렸다.

본거지인 동북 삼성으로 돌아간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자 척구진과 융경 왕부의 무장들이 당황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척사량을 따르는 장군들이 많았던 탓이다.

진실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으나 죽은 척계광의 의발을 척사량이 이었다고 발표한 것 때문이었다.

확실치 않은 주장이었지만 죽은 척계광과 함께 동북어위도총사부를 일으켜 세운 노장군들은 그 명분을 좇을 생각인 듯했다.

명분과 실리가 척사량을 따르자 척구진과 융경 왕부의 무장들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들은 급히 화해 사자를 보내 척사량과의 협의에 들어갔다.

그 결과, 척사량을 새로운 동북어위도총사로 인정한다는 것에 합의했다.

창졸간에 동북어위도총사란 직책을 거머쥔 척사량은 자신이 누구를 피해 도주했었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물론 그렇다고 호위를 어설프게 하진 않았다.

정적인 친형이나 융경 왕부의 상속자인 어린 왕야를 보위하는 왕부 무장들의 견제를 염두에 두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 탓에 그는 고르고 고른 무장들 수십으로 자신의 주변을 둘러싸고, 그 밖은 수백의 호위병으로 인의 장막을 치게 했다.

그 탄탄한 보호막 안에서 단 며칠 동안에 급박하게 이루어진 일들에 지쳐 잠이 들었던 척사량은, 한순간 무언가가 자신의 뺨을 건드린다는 느낌에 잠을 깼다.

“으음…….”

기지개를 켜며 천천히 눈을 뜨던 척사량은 두 손을 위로 뻗은 자세 그대로 굳어져 버렸다.

꿈속에서도 만나기 싫었던 작자의 얼굴이 자신의 코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으헉!”

기겁을 하는 척사량을 바라보던 고덕이 희미하게 웃었다.

“찾느라 애를 좀 먹었어. 가짜 막사를 여러 개 만들어두었더군. 이곳이 여덟 개째야.”

고덕의 말에 척사량은 당황성을 토했다.

“왜, 왜 이러는 거냐? 나에게… 무,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척사량의 물음에 고덕의 입가에 떠올라 있던 미소가 잔인하게 바뀌었다.

“다른 사람의 아내를 농락한 놈의 말치고는 웃긴다고 생각지 않나?”

“다, 다른 사람의 아내라니……. 호, 혹 문정 군주의 일이라면 아직 아버님과는 혼례도 올리기 전… 흐윽!”

어느새 귓불을 베고 지나간 검에 놀란 척사량에게 고덕이 싸늘한 음성을 토했다.

“내 아내의 이름 앞에 더러운 이름을 거론하지 마라.”

고덕의 말에 척사량의 눈이 부릅떠졌다.

“서, 설마… 무, 문정 군주가… 너, 너의 아내라 말하는 것이냐?”

핏-

무언가 움직인다 싶은 순간, 척사량의 허벅지에서 피가 튀고 이어 신음이 터져 나왔다.

“커헉-”

“네 더러운 입에도 담지 마라.”

“모, 몰랐다. 아니, 몰랐소. 정말이오. 알았다면 절대로… 절대로 그러지 않았을 것이… 크악!”

척사량의 어깨에 검을 반쯤 파묻은 고덕의 얼굴이 바짝 들이밀어졌다.

“이런 방법은 그다지 좋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어때, 같은 생각인가?”

고덕의 물음에 척사량은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고덕이 척사량의 어깨에 틀어박힌 검을 비틀어 뽑아냈다.

“크악-!”

척사량의 비명이 터져 나왔지만, 어쩐 일인지 밖에선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그것이 이상한지 피가 뿜어져 나오는 어깨를 손으로 막으면서도 밖을 힐긋거리는 척사량에게 고덕이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안의 소리는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아.”

기로 막사 전체를 둘러싼 탓이다.

이야기책에서나 읽어보았던 일이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졌지만 척사량은 신기해할 여유가 없었다.

어느새 짚었는지 마혈을 제압한 고덕이 천천히 그의 팔을 잡아오며 잔인한 미소를 그렸기 때문이다.

“불필요한 움직임은 거추장스러워서 마혈을 짚었어. 하지만 아혈은 풀어두었으니 비명은 마음껏 질러도 돼.”

속삭이듯 작은 고덕의 음성에 척사량의 얼굴엔 공포가 가득해졌다.

“사, 살려 줘… 살려… 크아아악!”

고래고래 비명을 지르는 척사량은 자신의 왼팔이 생으로 뜯겨 나가는 장면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피가 폭포수처럼 뿜어지는 곳을 고덕이 느긋하게 지혈했다.

마치 푸줏간에서 고기를 잘라 던져 놓듯 막사 한쪽에 던져지는 자신의 팔을 바라보는 척사량은, 이 미칠 듯한 고통과 공포심에도 불구하고 또렷한 정신임을 좀체 이해할 수 없었다.

척사량의 표정에서 그것을 읽은 고덕이 친절하게 설명했다.

“네 백회혈을 열어놔서 그래. 사지가 다 뽑히고 네 심장이 꺼내지는 것까지 생생하게 볼 수 있을 거야. 약속할게.”

고덕의 속삭임에 척사량은 절박하게 사정했다.

“사, 살려 주십시오, 제발! 시, 시키는 건 무엇이든지 하겠습니다. 살려… 으, 으아아악-!”

막사 한편에 서 있던 묵린은 그렇게 사람이 천천히 분해되는 광경을 보고 있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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