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장. 모반(謀反)-반기를 들다
북경의 지근, 산동성의 청주에 자리한 융경 왕부가 불현듯 황실에 반기를 들었다.
산동성 향방군 오만과 사병 삼만을 모아 봉기한 융경 왕부의 반란에, 황실은 구문제독부와 금의위로 하여금 자금성과 북경의 방비를 다지는 한편 선전관을 광동으로 내려 보냈다.
광동성에 주둔 중인 후군도독부에 명을 내려 반군을 진압하고자 했던 까닭이었다.
하지만 황제의 의중은 완벽하게 빗나갔다.
후군도독부의 병권을 쥐고 있던 영상 왕부가 왜구와의 전투를 구실로 황실의 명을 거부했던 것이다.
상황이 그렇게 되자 황실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이었다.
구문제독부와 금의위를 끌어모아봐야 삼만뿐이었고, 북경을 둘러싼 하북성 향방군 이만까지 동원해도 오만에 불과했다.
다급해진 황제는 동북 삼성에 눌러붙어 있던 동북어위도총사 척계광에게 근황의 칙명을 내렸다.
황명을 받은 척계광은 곧바로 동북 삼성의 향방군에서 삼만, 우군도독부에서 칠만의 병력을 끌어모아 구성한 십만의 병력을 이끌고 북경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미 혼인 동맹으로 굳건한 믿음이 형성되었다고 판단한 황제는 척계광의 구원군을 눈이 빠져라 기다렸다.
하지만 황명으로 하북성의 향방군 오만의 병권을 접수한 척계광은 오히려 북경을 둘러싸고 모든 통로를 막아버렸다. 그리고 도착한 융경 왕부의 반란군과 합세해 황실을 압박했다.
청천하늘의 날벼락 같은 상황에 황제와 황실은 대경실색했지만 그뿐, 상황을 타개할 묘책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즈음, 한 사내가 장춘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남쪽에서는 전화의 기운에 불안해하고 있었지만 그 당사자 중 하나인 동북 삼성, 그중에서도 중심에 선 장춘은 의외로 차분해 보였다.
그렇게 장춘의 한 객잔에 자리를 잡은 사내를 찾는 반가운 음성이 들렸다.
“고 무인?”
생각지 못한 음성에 고래를 돌리던 사내, 고덕의 시선에 동그랗게 눈을 뜬 호철랑의 얼굴이 들어왔다.
“호 판관!”
“정말 고 무인이군요.”
반가운 얼굴로 다가온 호철랑의 눈빛에 놀람이 들어섰다.
“무슨 일이 있었군요.”
완전히 변해버린 고덕의 분위기에 호철랑은 꽤나 놀라는 눈치였다.
“조금…….”
말처럼 조금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거칠긴 했지만 정제된 무엇인가가 느껴지던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마치… 들판을 어슬렁거리는 늑대의 것과 같은 거침이 느껴졌다.
“군주를 놓친 탓이군요.”
호철랑의 물음에 고덕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되었소.”
“늦었던 건가요?”
고덕은 고개를 저었다.
“내 능력이 미천했기 때문이오.”
생각지 못한 고덕의 답에 호철랑의 안색이 변했다.
“척계광에게 빼앗긴 게 아니군요.”
“그렇소.”
“하면… 설마……!”
당황하는 호철랑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덕이 검을 들어올렸다. 아무런 장식도 달려 있지 않던 검병에 무언가가 매달려 있었다.
“그건… 나비 모양 머리 장식… 군주님이 아끼던 그것이군요.”
“내 아내의 유품이오.”
고덕의 말에 호철랑은 한참 동안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것이 주는 의미가 너무나 깊고 컸기 때문이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한참 만에 입을 연 호철랑의 위로에 고덕은 그저 희미하게 웃을 따름이었다.
그런 고덕을 바라보던 호철랑이 말을 이었다.
“한데, 척계광은 왜 군주님의 실종을 말하지 않았을까요?”
솔직히 고덕은 척계광이 그 사실을 숨겼다는 것도 장춘에 들어서야 알았다.
“무언가를 원했던 모양이구려.”
믿음이다. 황실의 믿음. 아무런 경계도 받지 않고 북경 근처까지 병력을 밀어 넣을 수 있는 믿음.
그렇다면 척계광은 원하던 일을 이미 성공시킨 셈이었다.
“그랬군요. 갑작스러운 척계광의 변심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그런 이유가 있었군요.”
호철랑의 말에 고덕이 차가운 음성을 흘렸다.
“하지만 더 이상은 거짓을 말할 수 없을 거요.”
“죽이실 생각이군요.”
“죽어야 할 놈이오.”
엄밀히 말하자면 중간에 그녀를 농락하려던 척사량 그놈을 죽이러 왔다. 하지만 그 아비가 원인이니 그의 목도 함께 베어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곳에 없어요.”
“그렇다더군.”
“그럼 움직이실 건가요?”
“그럴 생각이오.”
고덕의 답을 들은 호철랑이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 전에 혹시 절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호 판관을?”
“예. 제 일이 성사되면 척계광 그자에게는 죽음보다 싫은 일이 될 거예요.”
호철랑의 말에 고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라면…….”
척계광에게 타격을 줄 수 있다는 말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간 알게 모르게 받았던 호철랑의 배려를 갚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 고덕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호철랑은 뛸 듯이 기뻐했다.
잠시 후, 식사를 마치고 고덕이 호철랑과 함께 움직인 곳은 예상외로 우군도독부의 관아였다.
“잠시 이곳에서 쉬고 계세요.”
조금은 당황한 고덕을 관아에 딸린 숙사에 머물게 한 호철랑은 내원으로 향했다.
그렇게 잠시의 시간이 흐르고 난 뒤, 고덕은 숙사로 들어서는 사람을 보며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따라오세요.”
하늘거리는 성장에 매우 고운 미성이었다. 여자인 것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런 모습은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고덕은 매우 당황한 표정이었다.
“호, 호 판관?”
“이곳에서는 그저 호 소저라 부르세요.”
말끝에 싱긋 웃는 호철랑의 모습에 고덕은 좀처럼 적응하지 못했다.
그렇게 당황한 상황에서 고덕은 호철랑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내원의 한 건물로 들어선 고덕은 다부진 인상의 노장군을 볼 수 있었다.
“아버지…….”
호철랑의 부름에 시선을 준 노장군이 물었다.
“돌아온 게냐?”
“아직은…….”
“하면, 어쩐 일로 온 게야?”
“일을 바로잡을 때라 생각해서요.”
호철랑의 말에 노장군은 고개를 저었다.
“부질없는 짓이다.”
“왜요? 그가 이곳을 떠나 있는 지금이 적기라는 것은 아버지도 아시잖아요.”
“그가 돌아오면?”
“돌아오지 못할 거예요.”
호철랑의 말에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노장군이 고개를 저었다.
“살수를 보내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다면 진즉에 끝났을 것이다.”
“그자의 곁을 그 호위 무사들이 지킨다면 자객 따위는 소용이 없다는 거, 알고 있어요.”
“그걸 아는데도 그리 말하는 게냐?”
“이번에는 정말 돌아오지 못할 거예요.”
그 말끝에 호철랑의 시선이 고덕에게 향해 있음을 느낀 노장군의 시선도 그에게 향했다.
“누구신가?”
“고덕이오.”
“고덕?”
고개를 갸웃거리는 노장군에게 호철랑이 답했다.
“소흥 왕부의 일을 처리하신 분이에요.”
“소흥 왕부의 일이라면 설마 그 납치 사건?”
“예.”
호철랑의 답에 고덕을 바라보는 노장군의 시선이 변했다.
“우군도독부 도독을 맡고 있는 절제사 호경명이오.”
도독이라고는 해도 우군도독부의 실제적인 지휘권은 황명에 의해 동북어위도총사인 척계광에게 있었다.
그 상황에서 호경명의 역할은 그저 참모에 지나지 않았다.
상대의 소개에 고덕은 가볍게 포권을 취해 보이는 것으로 답례를 대신했다.
그런 고덕에게 호경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녕 그를 제거할 수 있겠소?”
“그가 척계광이라면 그렇소.”
“그의 주변에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실력을 갖춘 호위 무사들이 존재하오. 그것도 알고 있소?”
“누가, 얼마나 지키고 있어도 상관없는 일이오.”
고덕의 답에 호경명은 잠시 갈등 어린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호철랑과의 시간을 요청했다.
미안해하는 호철랑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고덕은 그길로 자신에게 배정된 숙사로 돌아왔다.
그런 고덕을 호철랑이 찾은 것은 해가 완전히 진 저녁 시간이었다.
“아깐 미안했어요.”
“상관없소.”
고덕의 답에 작게 미소 지은 호철랑이 말을 이었다.
“이번에도 미안한 말을 해야 하네요.”
“상관치 말고 말하시오.”
“아버지는 고 무인을 완전히 신뢰할 수 없다고 하세요.”
“상관없소. 그 일에 누구의 신뢰는 필요 없으니까.”
그의 말에도 호철랑은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니요. 그 일엔 아버지의 신뢰가 절대적으로 필요해요.”
“이유를 알 수 있겠소?”
“이곳에 남겨진 관병의 군권을 움켜쥐고 단속해줄 이가 필요하기 때문이에요.”
“그럴 필요가 있소?”
“지휘관을 잃은 반군은 도적이 되기 때문이에요. 고 무인이 척계광을 척살하면 북경을 둘러싸고 있는 우군도독부의 병력은 물론이고, 이곳에 남아 있는 병력도 도적이 될 거예요.”
반란이다. 반란의 죄는 구족을 참형에 처하니, 살기 위해서는 도망치는 방법뿐이다.
물론 그 죄는 반란을 알면서도 참여한 군병들에게도 동일하게 지어진다.
남겨진 병사들이 도적이 된다는 것은 관, 여기선 황실에 대항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말뜻을 알아들은 고덕이 물었다.
“그 말은 그 일을 영존(令尊)께서 할 수 있다는 뜻이오?”
“그래요. 흑룡강성의 도지휘사였던 척계광이 황제 폐하의 눈에 들어 동북 삼성의 군권을 휘어잡기 전까지, 우군도독부의 지휘관은 절제사인 아버지였으니까요.”
결과적으론 황제가 당금의 역적을 키워낸 셈이었다.
“우군도독부는 그렇다 치고, 다른 이들은 어찌 되는 거요?”
“동북 삼성의 향방군을 묻는 것이라면 그들도 아버지의 지휘를 받게 될 거예요.”
“어째서 그렇게 장담하는 거요?”
“그들도 살기 위해서는 어찌해야 하는지 너무나 잘 알 것이기 때문이에요.”
틀린 말은 아니다. 살길을 도모하다 보면 힘을 가진 이에게 붙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고도 문제는 남는다.
“그럼 영존이 척계광의 자리를 물려받는 거요?”
“그건 황제 폐하의 의중에 따라 다르겠지요.”
호철랑의 답에 고덕이 이채가 담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 말은……?”
“맞아요. 아버지는 군권을 황제 폐하께 돌려드릴 것이에요.”
사실 호철랑의 답에 고덕은 관심이 없었다.
작은 인연이 있었다고는 하나, 황제에게 무슨 일이 생기든지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알겠소. 그럼 난 이만 움직이겠소.”
“왜, 왜요?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요?”
“척계광을 처리하자면 시간이 별로 없어 보이는데, 아니오?”
“그, 그건…….”
제대로 답을 못하는 호철랑에게 고덕이 작게 웃어 보였다.
“그럼 일 끝내고 봅시다.”
자리에서 일어서는 고덕을 호철랑이 잡아 세웠다.
“참, 창군이 그에게 가 있어요.”
“위험한 호위 무사라는 게 그 녀석인 거요?”
“아니에요. 그는 얼마 전에 합류한 식객 중 한 사람일 뿐이에요. 호위 무사들은 수는 물론이고, 그 출신조차 아는 이들이 없는 자들이에요. 지난 시간 동안 보여 준 능력을 보면 적어도 창군이란 강호인의 밑은 아니에요.”
제하이십사강에 포함된 인사가 바로 창군이다.
그런 창군과 비슷한 능력이라면 그들도 살황이 언급했던 삼천 출신들일 공산이 컸다.
그 생각이 들자 고덕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길로 길을 나서는 고덕을 호철랑은 결국 잡지 못했다.
* * *
북경을 둘러싼 반군들은 작은 분란을 겪고 있었다.
“왜 들이치지 않는 것이오?”
융경왕의 불만에 척계광은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곳을 주시하는 눈들이 많습니다. 무력으로 황좌를 빼앗으면 찬탈이라 말할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이미 군병을 동원한 이상 무력은 사용한 게 아닌가 말이외다.”
융경왕의 불만이 이어지자 척계광이 미소를 지었다.
“명분입니다. 동원된 군은 아직 황법에 명시된 황제의 땅인 북경 안으로는 들어서지 않았으니까요.”
“그 말은……?”
“맞습니다. 황제가 스스로 황위를 선위하길 바라는 것입니다.”
선위라는 말에 융경왕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서, 선위!”
“예, 왕야. 그것이 후일 제국을 운영하는 것에도 득이 되실 것입니다.”
“하긴 찬탈이라는 꼬리표를 붙이는 것보다는 좋긴 하겠소만… 시일이 너무 많이 걸리지 않겠소?”
“길어야 한 달입니다. 모든 물자의 반입이 중단된 상황에서 근황병조차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면 황제도 버틸 수만은 없을 테니까요.”
“물자를 끊어내는 것만으로 정말 가능하겠소?”
북경의 물류 보관 시설은 제국 최고 수준이다. 수십 개의 황실 창고와 조정 창고에는 엄청난 양의 식량과 각종 물자들이 쌓여 있었다.
그 물자들을 풀어쓰며 버틴다면 한두 달이 아니라 이삼 년도 문제 될 게 없었다.
“그야 약간의 손을 쓰긴 해야겠지요.”
“약간의 손이라면 어떤……?”
융경왕의 물음에 비릿하게 미소 지은 척계광이 북경을 세세하게 그려 놓은 군사 지도의 한 점을 가리켰다.
“대도독부 관할의 군량 창고입니다. 이곳은 손을 좀 봐야겠지요.”
“설마 그곳을 불태우자는 말은 아니리라 믿소.”
“때론 독해야 장부라 합니다, 왕야.”
척계광의 답에 융경왕의 표정은 하얗게 질렸다.
“그, 그곳에 쌓인 군량은 제국의 안위를 담보하는 것이오. 만에 하나 그곳의 군량이 소실되기라도 한다면 외적의 침입이 있을 때 대명 제국의 군사들은 손가락만 빨아야 하게 될 것이오.”
“감히 대명에 대적해 침입할 곳이 있겠습니까?”
“지금도 달단과 왜구의 침입이 빈번하거늘, 어찌 그리 장담하시는 게요?”
융경왕의 물음에 척계광이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들은 약탈만 자행할 뿐, 대규모 침공을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대명과 전면전을 벌여 무사할 나라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거야…….”
틀린 말이 아니라 생각한 탓인지 융경왕은 별다른 반론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태워도 된다는 것입니다.”
“경비가 가장 심한 곳 중 한 곳일 텐데, 가능하긴 한 것이오?”
마음을 바꾼 듯 물어오는 융경왕에게 척계광이 서찰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무엇이오?”
“그곳의 지휘 장수가 보내온 서찰입니다.”
척계광의 말에 황급히 서찰을 읽어 내려간 융경왕의 표정에 웃음이 활짝 피어났다.
“시류를 볼 줄 아는 장수로다.”
“충신이 아니겠습니까?”
“충신?”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표정의 융경왕에게 척계광이 은근히 속삭였다.
“새 황제 폐하의 충신 말입니다.”
척계광의 은근한 음성에 융경왕의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그렇지. 충신이로다, 충신! 으하하하!”
대소하는 융경왕을 바라보는 척계광의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 눈빛을 들키지 않으려는 듯 그는 공손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 * *
그날 밤, 일단의 그림자가 대도독부 예하의 군량 창고로 스며들었다.
그런데 움직임이 예상외로 은밀하지 않았다.
저 정도의 은밀성이라면 대번에 발각되어야 함에도 번을 서는 군병들은 그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다른 날과 달리 경비 병력의 절반 이상이 훈련에 동원된 까닭이다.
그렇다면 번을 서는 병사들의 담당 구역이 넓어져야 하는데, 우습게도 담당 구역은 그대로였다. 한마디로 사방에 구멍이 뚫린 셈이었다.
스며든 그림자들은 그 구멍들을 정확히 통과하고 있었다.
그림자들이 군량 창고로 스며든 직후 곳곳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놀란 병사들이 불을 끄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평소의 절반밖에 안 되는 병력으로는 불길조차 잡을 수 없었다.
불은 새벽이 지나고, 해가 뜨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사그라졌다.
자그마치 칠백 채의 창고가 새카맣게 타버린 재로 변했다.
그 창고들과 함께 오십만 명의 병력이 일 년간 사용할 수 있는 군량도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군량을 잃은 황실은 사면초가에 빠졌다.
자금성은 둘째 치고, 북경의 백성들이 소모하는 식량의 양만으로도 엄청났다.
외부로 통하는 모든 통로가 반군으로 인해 막힌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북경에 풀어지던 식량의 거의 대부분을 감당해오던 대도독부 관할의 군량 창고가 불타오른 일은 대단히 치명적인 사건이었다.
당장 어전회의가 열렸고, 사색이 된 대신들이 몰려들었다.
“창고들은 어떤 상태인가?”
가정제의 물음에 병부상서가 나섰다.
“대도독이 현지에 나가 있으니 정확한 것은 그가 들어와 봐야 알 것 같사옵니다, 폐하.”
“그렇다면 그 외의 것들을 확인해보기로 하세. 호부상서.”
“하명하소서, 폐하.”
“대도독부에 비축된 군량 외에 가지고 있는 식량은 얼마나 되는가?”
“북경 내에서 관부가 보유하고 있는 창고는 그다지 많지 않사옵니다. 우선 호부의 창고에 구휼미로 쓸 식량이 이십만 석가량 있사옵고, 병부의 창고에도 군관들의 호봉으로 쓸 곡물이 육만 석가량 있사옵니다.”
호부상서의 보고에 가정제가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겨우 그뿐이란 말인가? 자금성에서 하루에 소비되는 곡물의 양만 해도 이천 석에 이른다고 들었거늘.”
“그렇기에 큰일이옵니다. 이 상태라면 며칠 버티지 못하기 때문이옵니다, 폐하.”
“이런 낭패가…….”
나오는 것은 한탄과 한숨뿐이었다.
군사적으로 우월한 반란군에 포위되어 백척간두의 위험 속에 서 있던 황제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고비였다.
그런 상황에서 현장에 나갔던 대도독이 들어서자 황제의 물음이 쏟아졌다.
“그래, 현장은 어떻던가? 조금이라도 건질 수 있겠는가?”
“황송하옵니다, 폐하.”
곤혹스러운 대도독의 표정에 가정제가 불안한 음성으로 물었다.
“설마 완전히 타버린 겐가?”
“그렇사옵니다. 칠백여 채의 창고가 모두 불에 완전히 소실되었사옵니다.”
“흐음… 어찌, 어찌 그런 일이 벌어진 겐가?”
“확실한 것은 도찰원의 조사가 끝나봐야 알겠사옵니다만, 정황으론 경비 부대의 장수가 변… 심을 한 것 같사옵니다.”
“변심?”
“예. 아무래도 반란군과 내통을 한 것 같사옵니다.”
대도독의 보고에 가정제가 경악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반란군과 내통이라니!”
“화재 원인을 조사하던 중 지난밤의 경비 병력이 평소의 절반도 안 됐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그 이유를 파악하던 중, 해당 부대의 지휘 장수가 어젯밤 이후로 행적이 파악되지 않아 현재 추포령을 내려놓은 상태입니다.”
도찰원의 조사 내용은 굳이 듣지 않아도 뻔해 보였다.
전시 상황에서 군량 창고 같은 중요 시설의 경비 병력을 줄였다는 것만으로도 내통자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자를 반드시 잡아라! 반드시 잡아서 내 앞으로 데려와! 놈의 포를 떠 경계를 삼을 것이다!”
“명을 받사옵니다, 폐하.”
황제의 엄명이 추상같았지만, 그뿐이다. 내통자를 잡아 죽인다 한들 이미 타버린 군량이 돌아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탓에 내용은 곧바로 현실로 돌아왔다.
“그나저나 현재 근황의 명을 받아 움직이는 병력은 있는가?”
황제의 물음에 대도독의 표정에 곤혹스러움이 가득해졌다.
“그, 그것이…….”
반란군의 중추인 우군도독부를 제외한 중, 전, 후, 좌 사군도독부 그 어디에서도 회답은 없었다.
이미 알려진 대로 선전관을 통해 근황의 명을 가장 먼저 받은 후군도독부는, 그 지휘권을 가진 경공 왕부가 근황의 명을 정면으로 거부한 상태였다.
거기다 전군도독부는 달단과의 대치를 이유로, 좌군도독부는 서장과 토번을 제어해야 한다는 명분을 들어 근황의 명을 거부했다.
하지만 그들이 각기 척회 왕부와 경공 왕부의 명을 받고 있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두 왕부가 거절했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남는다. 사실상 황제의 지지자로 분류되던 중군도독부가 움직이지 않고 있는 이유였다.
그 탓에 세간에는 중군도독이 주둔지에 왕부를 둔 균사왕과 손을 잡았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고 있었다.
여하간 황제는 금군들로부터 어떠한 지원도 받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도독이 답을 못하자 황제가 다시 물었다.
“오군도독부는 그렇다 치고, 각 성의 도지휘사들에게서는 아무런 회답이 없는가?”
“그것이… 절강성 도지휘사사에서는 회답이 도착하였사오나, 안휘에 주둔 중인 중군도독부에서 인근의 군사 이동을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란 경고를 받았다 하옵니다.”
절강성엔 소흥 왕부가 위치한다.
아마도 소흥왕이 절강성 도지휘사를 움직인 모양이었지만, 결국 중군도독이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이다.
“흐음…….”
가정제의 침음에 대소 신료들의 불안한 시선이 바쁘게 오갔다.
그들로서는 황제가 중군도독의 이상한 움직임에 대해 아직 이렇다 할 입장을 표하지 않고 있었기에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
대도독의 보고에 잔뜩 구겨진 가정제의 표정을 살피던 병부상서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현재 북경 내에서 근황군의 모집이 완료되어 갑니다만, 아직도 부족한 실정입니다. 징집령을 내려 주소서.”
적이 몰려온 시점에 내려진 황명은 자의에 의한 근황군의 모집이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모여든 병력은 고작 삼천이 다였다.
상주인구가 삼십만에 육박하는 북경의 인구를 상기할 때, 그 수치는 거의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뜻했다.
“많이 부족했던 모양이로군.”
“황망하옵니다, 폐하.”
고개를 조아리는 병부상서를 내려다보는 가정제의 표정에는 자괴감이 가득했다. 백성들로부터 외면받는 자신의 처지가 답답했기 때문이다.
“징집령이 내려지면 도움은 되겠는가?”
“수치적으로 따지자면 적어도 이만에서 이만 오천여 명은 마련이 될 것이옵니다.”
“징집 연령을 어찌 둔 수치인가?”
황제의 물음에 병부상서가 민망한 표정으로 답했다.
“이십대를 중심으로 둔 수치이옵니다.”
사실은 그 이상의 연령대에서도 징집은 가능하다.
실제로 홍무제 때는 이십대에서 사십대까지 징집한 전례가 있기도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황제가 민심을 얻지 못한 지금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많이 징집을 해대면 민심이 이반될 것이고, 이반된 민심은 자칫 폭동으로 이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그런 일이 발생하면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
병부상서의 표정에서 그런 사정을 읽어낸 가정제의 심경은 참담함 그 자체였다.
“경의 뜻대로 처리하라.”
“감읍하옵니다. 하오면 북경 백성들 중 스물에서 스물아홉에 이르는 모든 장정들을 징집하겠나이다.”
병부상서의 말에 가정제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경들의 분투를 빌겠소.”
그 말만 남겨 놓은 젊은 황제는 조용히 대전을 나섰다.
황제가 나가자 대전은 소란스러워졌다. 많은 수의 대신들은 공공연히 항복을 언급했고, 그 소리를 고스란히 들으며 가정제는 묵묵히 걸음을 옮겨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