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장. 귀랑(歸郞)-약속을 지키다
사평 요새에 딸린 관아로 안내된 문정 군주는 모처럼 만에 목욕을 할 수 있었다.
그들의 주인과 마찬가지로 며칠 만에 목욕을 한 시녀들이 밝은 얼굴로 문정 군주의 머리를 빗겨 주며 재잘거렸다.
잠시였지만 무거운 마음을 빗겨 내는 것 같았던 시간은 갑자기 들이닥친 관아의 하녀들에 의해 깨어졌다.
그녀들은 침상에 두꺼운 금침을 깔고 정갈한 술상을 차렸다. 그리고 놀란 토끼 눈을 뜨고 이유를 묻는 문정 군주의 시녀 둘을 이끌고 나가버렸다.
거칠게 닫히는 문소리만큼 큰 소리가 문정 군주의 가슴속에서 들렸다.
그녀의 눈동자만큼 심하게 흔들리는 촛불을 따라 일렁이는 불빛은 그보다 많은 것을 어둠에 묻었다.
그 어둠만큼 깊은 두려움이 문정 군주의 숨을 막아왔다.
덜컹.
문이 열리고 들어선 이는 갑주를 벗은 척사량이었다. 백색 유삼 차림인 척사량은 생각 외로 부드러워 보였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
누가 기다렸다는 것인지 모를 말만 남긴 척사량이 탁자에 앉아 술잔을 채웠다.
“이리로 앉지.”
“무, 무슨 일이에요?”
겁에 질린 문정 군주의 물음에 척사량이 히죽 웃었다.
“신랑도 보지 못한 신부의 면사가 벗겨졌어. 왜라 생각하지?”
그러고 보니 목욕을 마치고 나오자 그동안 자신이 쓰고 다녔던 면사는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새것으로 바꾸어주는가 보다 했는데, 다른 의미가 있었던 모양이다.
“이, 이것은 잘못된 일이다.”
“그래, 잘못되었지. 원래대로라면 널 찾은 이는 며칠 후 아버지였어야 하니까.”
그것조차 생각하기 싫었지만, 지금 당장을 모면해야 했던 문정 군주는 그 말에 매달렸다.
“그, 그래. 나, 난 황명에 의해 동북어위도총사에게 하가되었다.”
“알아. 그 동북어위도총사로부터 널 데려오라는 명을 받은 게 나니까.”
“그, 그럼 이 무슨 짓이냐?”
짐짓 위엄을 가장한 호통에 척사량은 두려움보다는 흥미를 느낀 모양이었다.
“무슨 짓은. 그냥 널 내가 갖기로 했을 뿐이야.”
“무, 무엄하다!”
“무엄? 크크크! 힘이라곤 쥐뿔도 없는 소흥 왕부의 왕녀가 이십만 우군도독부의 도총관에게 뱉어낼 말은 아니라는 생각은 못하나?”
“네, 네놈이 감히!”
“뭐, 그렇게 앙칼진 것도 재미는 있겠지.”
피식 웃어 보인 척사량은 술을 단숨에 들이켜곤 자리에서 일어서 침상에 앉아 있던 문정 군주에게 다가갔다.
“오, 오지 마라!”
“침상에서 기다린 주제에 그런 내숭이라니……. 이리 오너라. 내 오늘 네게 좋은 경험을 시켜 줄 테니. 크흐흐!”
천천히 다가선 척사량은 생각보다 거칠게 반항하는 문정 군주를 힘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아악-!”
다급한 문정 군주의 비명과 함께 전장에서 다져진 우악스러운 힘에 겉옷이 찢겨 나갔다.
필사적으로 속옷을 붙잡고 버티는 문정 군주의 웃옷을 잡은 척사량이 강하게 잡아당겼다.
찌이익!
웃옷이 찢겨 나가며 속살이 드러나자 문정 군주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꺄아아악!”
그것이 오히려 흥분이 되는 듯 척사량은 자신의 겉옷을 벗어던졌다.
얇은 속옷은 탄탄한 근육을 고스란히 내보이고 있었다.
그 우람한 근육들이 움직이며 잔뜩 웅크리고 바동거리는 문정 군주를 덮쳤다.
잠시간의 실랑이 끝에 짧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윽!”
입술이 물어 뜯겨 피를 흘리며 침상에서 일어난 척사량의 얼굴이 사납게 구겨졌다.
“이년이!”
짝!
“아악!”
척사량의 우악스러운 손찌검에 뺨을 얻어맞은 문정 군주가 침상 위에 나동그라졌다.
입술이 터지고, 피가 흐르는 그녀를 향해 척사량이 다가섰다.
“좋게 대해주었더니 네년이 사태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이구나. 내 네년의 처지를 확실히 알려 줄 것이다. 퉤-!”
피를 뱉어낸 척사량이 침상으로 다가서는 순간이었다.
우지끈!
천장이 무너지며 기와가 쏟아져 내렸다.
전장에서 굴렀던 시간이 적지 않았던 듯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척사량은 다급히 몸을 굴려 위험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진정한 위험은 그다음에 들이닥쳤다.
무언가가 번쩍인 순간 허공에 몸이 뜬 척사량은 문을 부수고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와지끈!
갑작스러운 사태에 외부가 소란스러워지는 것에도 아랑곳없이 천장을 뚫고 나타난 고덕이 침상으로 다가섰다.
눈물은 물론이고, 피로 범벅이 된 문정 군주는 그렇게 다가선 고덕을 바라보며 반색했다.
“사, 상공!”
‘상공?’
그녀가 부른 호칭에 놀라는 고덕의 품으로 문정 군주가 달려들었다.
가슴 깊이 파고드는 그녀를 안아든 고덕의 입에서 조심스러운 음성이 흘렀다.
“여, 연… 화?”
“예, 상공. 무서웠어요. 너무 무서웠어요.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이 날 막…….”
설명하려 애쓰는 문정 군주, 아니 무슨 이유인지 다시 연화로 돌아온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은 고덕이 작게 속삭였다.
“괜찮아. 다 끝났어. 내가 왔으니까 안심해.”
“네 이놈! 누구……!”
쾅!
검을 꺼내들고 방 안으로 들어와 떠들던 장수 하나가 고덕의 손을 떠난 강기와 충돌해 형편없는 모습으로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들어가자마자 반죽음이 되어 튕겨 나온 장수의 모습에 군병들은 섣불리 방 안으로 들어서지 못한 채 주춤거렸다.
“돌아가자.”
연화의 귀에 속삭인 후, 그녀를 안고 몸을 뽑아 올리려던 고덕의 신형이 움찔거리며 멈추어 섰다.
그리고 연화를 뒤로 감추고 앞을 막아선 그의 손에는 어느새 애검, 명혼이 들려 있었다.
“다음을 기약하자면 들어주시겠소?”
누구를 향한 말인지 모를 고덕의 음성이 방 안을 휘돌았지만 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입술을 물며 몸을 낮추고, 검을 수평으로 세운 고덕의 차가운 시선이 방 안을 차근차근 훑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위화감이다. 기세라고 말하기조차 어려울 정도의 미약한 느낌.
그 불쾌함의 근원도, 방향도 알 수 없었다. 그것이 고덕의 감각을 바짝 닦아 세웠다.
“왜, 왜요?”
겁에 질린 연화의 물음에 고덕이 할 수 있는 일은 검을 들지 않은 손을 뒤로 보내 그녀의 손을 잡아주는 것뿐이었다.
연화를 안심시키려 무의식중에 한 행동이었지만, 상대에겐 그것이 목표의 한 손이 봉쇄된 순간으로 인식된 모양이었다.
불쑥 솟아오른 반월형의 검강이 방 전체를 가르며 미끄러지듯 날아들었다.
방에 들어찬 기물을 마치 수수깡 잘라내듯 거침없이 가르며 날아온 검강의 앞으로 고덕의 명혼이 짙은 광채를 뿜어냈다.
쾅! 스걱!
폭음 사이로 들린 섬뜩한 음향의 끝을 붉은 피가 장식했다.
검을 쥐지 않은 고덕의 오른팔을 타고 피가 흘렀다.
공격의 목표는 고덕이 아니었다. 내력들이 충돌해 폭발하는 찰나를 이용해 놈은 무방비 상태의 연화를 노렸다.
상처를 내고 빠져나가는 기척조차 잡아내지 못했다.
당금 천하에 이 정도의 살법을 구사하는 살수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기억을 넓혀 고래의 인사들을 포함해 뒤진다면 가장 가까이는 두 배분 이전에 살아 있는 살신으로 불렸던 살황 정도였다.
생각이 그에 이르자 고덕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살황 율파인가? 아니면 전인?”
고덕의 물음에도 불구하고 미세한 기척조차 없었다. 이 정도의 감정 조절이라면 전인으로는 어림도 없다.
그렇다면 상대는 살황 본인이라는 의미이니, 고덕으로서는 최악의 상황을 맞은 셈이었다.
물론 혼자뿐이었다면 그의 성품상 양단간의 결정을 위해 강행 돌파를 시도했겠지만, 지금은 지켜야만 하는 이가 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밖의 상황도 조금 더 복잡해졌다.
중무장한 군병들이 모여드는 것도 모자라, 쇠뇌를 동원한 관병들이 쇠뇌에 철창을 장착하느라 여념이 없는 모습이 떨어져 나간 방문으로 보이고 있었다.
저 쇠뇌들이 발사되는 틈을 살황이 탄다면…….
고덕은 자신에게 더 이상의 선택권이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상황을 파악하자 결단과 움직임이 지체 없이 이어졌다.
연화를 버린 채 고덕의 신형이 지붕을 향해 솟아오른 것이다.
순간, 떠오른 반월형 검강은 갈등하는지 약간의 회전 후에 결국 솟아오른 고덕을 노렸다.
그때였다. 공중에서 몸을 뒤틀어 내리꽂는 고덕의 검에서 눈을 멀게 할 정도의 강력한 광채가 뿜어져 나온 것은.
쿠왕-!
커다란 굉음과 함께 엄청난 후폭풍이 주변을 휩쓸었다.
강력한 바람에 의해 일어났던 먼지와 잔해들이 가라앉은 관아의 내실은 완전히 무너져 내려 있었다.
수많은 군병들이 동원되어 무너져 내린 내실을 수색했지만, 그들은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침입한 자는 둘째 치고, 문정 군주의 시신조차도…….
군주가 사라졌지만 동북어위도총사 측은 그에 대해 함구했다.
황제와 소흥왕은 문정 군주가 무사히 장춘에 도착한 것으로 오인했고, 자신들이 추진한 혼인 동맹에 이상이 없다고 믿었다.
그들의 믿음 뒤로 동북어위도총사인 척계광의 사자가 융경왕 주후령을 찾아 산동성을 찾아들고 있었다.
* * *
그들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요녕의 남쪽, 장백산 기슭의 작은 모옥에 어느 날 젊은 사내와 병든 아내가 들어섰다.
왠지 모를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장백산을 등지고 앉아 산 아래를 내려다보는 사내의 품에는 수척한 여인이 안겨 있었다.
“콜록! 콜록!”
“추워?”
사내, 고덕의 물음에 연화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당신 품은 언제나… 따뜻해요.”
억지로 기침을 참는 기색이 역력하자 고덕은 연화를 안아들었다.
“아니, 들어가는 게 좋겠어.”
너무 말라 가뿐히 들리는 연화의 오른쪽이 왠지 허전했다.
그녀를 안고 돌아서 모옥으로 움직이는 고덕의 팔 아래로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연화의 오른쪽 소매가 흘러내렸다.
모옥으로 들어서 연화를 침상에 내려놓은 고덕은 침상 아래로 흘러내린 빈 소매를 추스르며 입술을 깨물었다.
두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연화의 상처를 볼 때면 가슴을 저며 오는 고통이 엄습했다.
자신의 잘못이었다. 한순간의 판단 착오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만들었다.
고덕 자신을 쫓아 올라온다고 느꼈던 반월형 검강은 자신이 몸을 뒤트는 것과 거의 동시에 연화를 덮쳤다.
모든 내력을 쏟아내 반월형 검강의 진로를 튕겨 내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약간의 시간 차이로 한쪽 팔을 잔인하게 뜯고 지나가는 것은 막지 못했다.
이후에는 팔을 잃고 피를 쏟는 연화를 안고 미친 듯이 도주했다.
놈을 잡아 갈기갈기 찢어 씹어먹고 싶은 욕구가 전신을 지배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꺼져 가는 연화의 생명을 붙잡아야 했기 때문이다.
“너무 슬퍼하지 말아요, 상공.”
“누가 슬퍼한다고 그래.”
“그 눈, 아파하니까요.”
자신의 눈 어디에 고통이 머문다는 소리일까.
그 사건 이후 가끔 물 위에 비춰본 눈 속에는 자신도 흠칫 놀랄 만큼 잔인한 살광만이 넘실거리고 있었는데…….
“쓸데없는 소리.”
고덕의 힘없는 핀잔에 연화는 더 힘없는 미소를 그려 보였다.
“알아요. 당신이 나 많이 사랑한다는 거.”
“어림도 없는 소리…….”
“그래요. 나도 사랑해요.”
특유의 화법에 고개를 돌린 고덕의 눈에서 작은 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밤새 내력을 돌려 기를 불어넣고, 날이 새면 온 장백산을 뒤져 귀하다는 약초를 구해 달여 먹였지만 연화의 기력은 날이 갈수록 떨어져만 갔다.
장백산에 머문 지도 석 달이 넘어가던 어느 날이었다.
약초를 캐 돌아오던 고덕의 신형이 모옥을 삼십 장 거리에 두고 멈추어 섰다.
익숙한 느낌. 죽어도 잊지 못할 그때의 느낌이었다. 연화의 팔을 앗아가던 그날의…….
가늘어진 눈매가 재빨리 주변을 살폈지만, 이번에도 기척을 잡아낼 수는 없었다.
천천히 약초가 담긴 망태기를 내려놓고 허리 어림에서 기다리던 명혼을 잡아 뽑았다.
그때, 알싸한 냄새가 고덕의 후각을 자극했다.
순간 독인가 싶어 숨을 끊고 모공을 닫았지만, 냄새의 정체는 곧바로 눈으로 확인되었다.
모옥의 한 귀퉁이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불!’
연기의 정체를 직감하자마자 고덕의 신형이 모옥으로 쏘아졌다. 모옥 안에 있을 연화의 안위가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씨아아앙!
공중에서 방향을 바꿔 바닥을 굴렀다.
눈에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날카로운 은사가 사방에서 조여 오는 와중에 고덕의 신형이 무섭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츄라라라락!
허공에서 갑작스레 비 오듯이 쏘아지는 암기 세례를 피해 이형환위가 펼쳐졌다.
은사에 몇 군데 찢기고, 두어 개의 비침이 옷에 얽혀 대롱거렸지만 고덕의 몸은 아무런 상흔도 입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고덕의 옆에 놓인 것은 아까 벗어놓았던 약초 망태기였다. 그 말은 다시 원래의 위치로 내몰려 왔다는 뜻이었다.
점점 짙어져 가는 연기와 이제는 언뜻언뜻 비쳐지는 화염이 그 뜻과 합쳐지며 적이 원하는 것이 선명해졌다.
놈은 눈앞에서 연화의 죽음을 지켜보게 하겠다는 의중이었다. 그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흔들고, 틈을 만들어 파고들겠다는 뜻이리라.
두 손으로 명혼을 부여잡고 조용히 숨을 골랐다.
죽음… 명혼을 손에 잡을 때마다 생각해보지 않은 적이 없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오늘은 반드시 살아야만 했다. 자신이 살아야 그녀, 연화가 살 수 있기에…….
검이 중단에 도착함과 동시에 고덕의 신형이 허공에서 사라졌다.
씨아아앙!
다시금 은사들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움직였지만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저 멀리 모옥 주변이 벽력탄에 얻어맞은 듯 폭발했다.
콰과과광! 쾅광!
검탄으로 불타는 모옥과 위험을 한꺼번에 날려 버린 고덕의 신형이 모옥 앞에 드러났다.
황급히 달려 들어간 고덕이 정신을 잃은 연화를 들쳐 업고 나서는 순간, 수십 자루의 비도가 사방을 뒤덮으며 날아들었다.
부아아앙!
명혼의 회전이 검벽을 만들어냈다.
문제는 검벽이 오로지 앞만 막는다는 것이다. 모옥이 위치한 뒤는 몰라도, 비어진 좌우로 들이닥친 단검들은 요사스러운 빛을 뿜어내는 머리를 들이밀었다.
쾅!
진각으로 내민 오른발을 중심으로 바람이 불었다. 좌에서 우로, 좌에서 우로…….
작게 시작된 바람은 촌각의 시간 만에 회전을 만들어내고, 곧이어 회오리바람을 만들었다.
그가가가각!
좌우로 들이닥친 단검들과 급작스럽게 일어난 회오리바람이 부딪치며 금속 갉아먹는 소리가 울렸다.
날과 기세를 잃은 단검들이 흩어져 내리는 사이로 은빛이 번뜩이며 스며들었다.
씨이이앙!
“큭!”
진기로 이루어진 바람을 은사는 너무나 쉽게 파고들었다.
부리나케 물러나며 은사에서 멀어졌지만, 허벅지에서 배어나오는 피를 막지 못했다.
은사를 피해 움직이는 순간 진각이 깨어지며 바람이 소멸했다.
완전히 드러난 고덕의 신형을 쫓아 화살 하나가 날아들었다.
몸을 움직여 화살의 진로에서 비켜서는 순간, 무언가가 뒤를 할퀴고 지나갔다.
연화를 받친 왼손으로 진득한 무언가가 흘러들었다. 기겁해서 확인한 손에는 피가 흥건했다.
당황해 앞으로 당긴 연화의 옆구리가 크게 벌어지며 피가 쏟아졌다.
어쩔 줄 몰라 하며 상처를 두 손으로 막는 사이 반월형 검강이 날아들었다.
다급한 마음에 연화를 안고 정신없이 굴렀다.
파바바바박!
굴러가는 바닥에서 날카로운 창날들이 솟구쳐 올랐다.
길게 뻗어가는 창날의 파도가 급속도로 가까워져 왔다.
진기를 휘돌려 왼팔에 모아 바닥을 쳤다.
진기의 반탄력에 연화를 안은 고덕의 신형이 허공에 띄워지며 회전했다.
그 회전을 이용해 몸을 세운 고덕의 신형이 간신히 멀쩡한 땅에 발을 딛는 순간, 허공을 찢으며 나타난 검신 하나가 연화의 몸을 관통해 고덕의 몸에 틀어박혔다.
“흡!”
쾅!
불지불식간에 내친 강기가 검을 내뻗은 적을 치고 몸을 뒤로 밀어냈다.
비척이며 물러난 고덕의 품에는 가슴에서 피를 뿜어내는 연화의 몸이 늘어져 있었다.
황급히 살피는 고덕의 시선은 정확히 왼쪽 가슴을 관통한 상처에 머물렀다.
당황한 표정으로 코에 손을 대었지만 숨결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 안 돼!”
늘어진 연화의 몸을 당겨 안았지만 심장의 울림도 전해오지 않았다.
주변의 소음이 사라지고, 현실 감각이 사라졌다.
그 사이를 정확히 노린 검이 다시금 허공을 찢고 나타났다.
‘일어나요! 일어나요, 상공!’
머릿속을 울리는 연화의 음성에 화들짝 놀란 고덕의 감각이 살아났다.
날아오는 검을 피해 몸을 굴렸다.
스걱!
곧바로 움직인다고 움직였지만 검이 조금 더 빨랐던 모양이다.
하지만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곧바로 드러났다. 이미 숨이 끊어진 연화의 등이 크게 베여 있었기 때문이다.
화들짝 놀란 고덕이 저도 모르게 움츠려드는 탓에 연화의 몸을 놓쳤다.
출렁이며 바닥에 떨어진 연화는 움직이지 않았다.
고운 얼굴에 그려지던 미소도 없었다. 작지만 아름답게 소록거리던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천천히 들리는 고덕의 눈이 파란 광기로 들어찼다.
순간, 고덕의 뒤편 허공이 찢기며 다시금 검이 나타났다. 곧바로 고덕의 신형이 돌아갔다.
푸욱!
오른쪽 가슴 깊이 검을 박아 넣은 고덕의 신형이 앞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명혼이 찢겨진 허공 너머로 들이밀어졌다.
푹!
파육음, 그리고 허공이 사람의 신형을 토해냈다.
당황, 어이없음, 절망… 여러 가지 표정이 뒤섞인 얼굴을 한 살황의 왼쪽 가슴을 정확하게 꿰뚫은 명혼이 햇빛에 반짝거렸다.
힘이 풀린 살황이 무릎을 꿇자, 그의 손에 들린 검에 오른쪽 가슴을 관통당한 고덕의 신형도 절로 주저앉아졌다.
“죽음… 이군…….”
자신의 가슴을 관통한 명혼을 내려다보던 살황의 자조적인 음성을 들은 고덕이 피와 함께 차가운 음성을 토해냈다.
“누구냐?”
“복수라도 하려는가?”
“모두 찢어 죽일 것이다!”
고덕의 외침에 살황은 뭐가 좋은지 웃음을 흘렸다.
“크크크! 그것도 좋겠지. 이야기가 긴데 시간이 허락하려는지 모르겠어.”
살황이 풀어놓은 것은 놀라운 이야기들뿐이었다.
강호와는 또 다른 무림의 세계, 삼천.
주천, 혼천, 그리고 암천.
암중에서 무림을 움직이고 세상을 경영하는 이들. 그 무소불위의 힘과 깊은 뿌리에 살황은 진저리를 떨었다.
그리고 강조했다. 그들의 강함과 치밀함, 잔혹함에 대해서…….
천 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삼천의 이야기와 그들이 간섭한 강호의 비사들이 살황의 입을 통해 그렇게 고덕에게 전해졌다.
숨이 끊어지기 전까지 적지 않은 이야기들이 살황의 입에서 흘러나왔지만, 고덕의 귀에 들어간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그들의 이름 삼천. 나머지는 기억 저편으로 묻혔다.
죽여야 하는 이들에 대해 깊게 알 것이 없다는 고덕 특유의 생각 때문이었다.
앉은 채 숨이 끊긴 살황을 버려둔 고덕이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영혼이 떠난 연화의 몸을 안아들고는 천천히 모옥을 향해 움직였다.
타닥탁탁탁!
슬픈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모옥을 바라보는 고덕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불길의 기운에 밀려 하늘로 솟아오르는 재들을 바라보며 고덕의 눈물은 점점 굵어져만 갔다.
‘편안하길… 내 아내여…….’
고덕의 외침이 그의 가슴 안에서 울음으로 번져 나왔다.
그렇게 장백산 기슭에서는 서러운 사내의 울음이 한동안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