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53장 (54/129)

제53장. 애정(哀情)-사랑을 좇다

하포를 떠난 고덕이 소흥에 도착한 것은 이틀이 지나서였다.

성문을 들어서면서부터 온 거리가 붉은 천과 은은한 유황 냄새로 가득했다.

발걸음이 점점 빨라지는 고덕의 곁으로 걱정스러운 표정의 협련이 따라붙었다.

왕부에 들어서는 고덕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엔 당황과 두려움이 들어 있었다.

고덕이 돌아왔다는 소리에 놀라서 달려온 이들은 이첨이 지휘하는 중무장 상태의 무장들이었다.

그것은 마중이라기보다는 침입한 적을 막기 위해 달려 나온 형색이었다.

하지만 고덕은 그들에겐 관심조차 보이지 않은 채 곧바로 군주의 침전으로 향했다.

그 뒤를 이첨과 무장들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따랐다.

깨끗하게 비워진 침전에서 고덕은 너무 담담해서 날카롭게 벼려진 것처럼 느껴지는 음성으로 물었다.

“어디로 갔소?”

“고 무인…….”

이첨의 부름에 돌려진 고덕의 눈 속에선 흉포한 야수의 본성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 노르스름한 눈빛에 이첨은 오금이 저려 오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어디로 갔소?”

다시금 묻는 싸늘한 고덕의 음성에 무너지는 자신감을 이첨은 혀를 깨물어서야 간신히 지탱해낼 수 있었다.

“마, 말할 수 없소.”

순간적으로 고덕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기에 놀란 이첨은 황급히 말을 이어야만 했다.

“이, 이건 왕명이오!”

그 말에 멀리 소흥왕의 침전을 바라보는 고덕의 눈에 어린 살기를 느낀 이첨과 무장들이 일제히 발검했다.

하지만 그것은 왕을 지키고자 하는 이성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너무 짙은 살기에 저도 모르게 반응한 것이었다.

검을 빼든 이첨과 무장들을 바라보는 고덕의 손이 피가 날 정도로 굳게 쥐어졌다.

“왕야를 뵈어야겠소.”

“그, 그럴 수 없소!”

반사적으로 터져 나온 이첨의 음성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런 그를 지그시 바라보던 고덕이 말했다.

“모조리 죽이고 가는 방법도 있소. 그걸 원하는 거요?”

고덕의 물음에 이첨은 섣불리 답하지 못했다. 자신의 답에 따라 상대는 정말로 살수를 써올 것이란 느낌이 물씬 풍겨 왔기 때문이다.

잠시간의 갈등 끝에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준 이첨의 입이 열렸다.

“죽어야 한다면 죽을 수밖에.”

그 대답에 장수들의 검이 바로 섰다. 장수들도 죽음을 각오한 것이다.

그 모습을 본 고덕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무언가 폭발할 것 같은 그 순간, 예상외의 음성이 들려왔다.

“잠시 기다려 주게.”

음성을 좇은 시선에 서둘러 다가오는 소흥왕의 모습이 보였다.

“와, 왕야, 위, 위험합니다.”

이첨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소흥왕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고덕의 앞에 서자 황급히 둘러싸는 이첨과 무장들을 소흥왕이 제지했다.

“잠시 물러나 있게.”

“와, 왕야!”

“어허! 왕명일세.”

소흥왕이 왕명을 거론하고서야 이첨과 무장들은 마지못해 몇 걸음 물러났지만, 완전히 멀어지지는 않았다.

마치 고덕이 움직이면 사생결단을 내겠다는 의지의 표현 같았다.

그런 이들에게서 시선을 옮겨 자신을 바라보는 고덕과 눈을 마주친 소흥왕이 움찔거렸다. 깊게 찔러오는 눈빛이 마치 비수 같았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늦었군.”

소흥왕의 말에 고덕이 고저가 느껴지지 않는 음성으로 답했다.

“그것을 후회하는 중입니다.”

“후회하지 말고 그냥 놓아주게.”

고덕의 음성에서 씁쓸함이 묻어났다.

“한때는 그럴까도 했습니다. 그 탓에 늦었으니까요.”

“그 말은 물러나지 않겠다는 뜻인가?”

“그래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습니다.”

아니, 이유는 차고 넘치도록 많았다. 하지만 그것을 모두 무시할 정도로 마음이 깊었을 뿐이다.

“고 무인의 이유는 그럴지 몰라도, 왕부와 황족의 이유는 하늘을 가득 채우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일세.”

“저는 관인이 아닙니다. 그 이유를 따를 이유가 없습니다.”

“바로 그것이 문제라네.”

소흥왕의 말을 들은 고덕의 눈이 잠시 떨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 서찰을 떠올린 고덕의 눈은 다시금 확신으로 채워졌다.

“내게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건 자네만의 생각이 아니겠나?”

소흥왕의 말에 잠시 그를 바라보던 고덕이 물었다.

“어딥니까?”

“알려 줄 수 없네.”

단호한 소흥왕의 음성에 고덕의 시선이 불안한 표정의 협련에게 향했다.

“알아봐.”

“대협…….”

곤혹스러워하는 협련의 음성에 고덕의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어렸다.

“그래. 넌 관부 출신이었지.”

“대, 대협!”

당황하는 협련의 음성에도 불구하고 고덕의 시선은 미련 없이 떠났다.

그것에 신임마저 거두어갔다는 뜻이 담겼음을 협련은 너무나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당황한 협련을 둔 고덕의 신형은 왕부를 벗어났다.

“그냥 두어도 되겠습니까?”

걱정스러운 이첨의 물음에 소흥왕은 고개를 저었다.

“명을 하면 막을 수는 있겠나?”

지난 시간, 고덕이 보인 능력들을 돌아보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에 생각이 미친 이첨이 고개를 숙이자, 씁쓸한 미소를 지은 소흥왕이 말했다.

“그저 왕부 인사들의 입단속에만 신경 쓰게.”

“명을 받습니다, 왕야.”

돌아가는 소흥왕과 함께 사람들이 흩어지자 협련만이 덩그러니 남겨졌다.

* * *

왕부를 벗어난 고덕은 즉시 주변 사람들에게 군주의 성혼을 묻기 시작했다.

소흥의 백성들은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

대단히 많은 병력이 들어왔다고, 그리고 며칠 후 그 병력이 떠나고 나서 군주의 성혼 사실이 발표되었고 축제가 열렸다고…….

신랑이 누구인지는 백성들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 탓에 그들은 황실의 종친 중 한 사람이라고도 했고, 변경의 장군이라고도 했다.

간혹 새외의 군왕에게 하가되었다는 사람도 있어 도무지 정확한 대상을 짐작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하루가 흘렀다.

헐떡거리며 왕팔과 후량이 뒤늦게 소흥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호철랑이 고덕을 찾아왔다.

“왕부로 찾아오셨기에 함께 왔습니다.”

호철랑의 말에 고덕은 작게 고개를 숙여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안색이 안 좋네요.”

“좋을 수가 없구려. 그나저나 호 판관, 혹시……?”

“군주가 어디로 시집을 갔는지 아느냐고 물으실 건가요?”

호철랑의 물음에 고덕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는 거요?”

“예, 압니다.”

“어디요, 그곳이?”

“왕명으로 함구령이 내려와 있답니다.”

호철랑의 답에 고덕은 조용한 음성으로 그를 불렀다.

“호 판관!”

“왜, 왜 꼭 그녀여야만 하나요?”

뜻을 알 수 없는 호철랑의 말에도 고덕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인연이라오.”

“인연은 새로 만들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해요.”

“그럴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오.”

“왜요? 왜 아닌가요?”

질시의 눈으로 따져 묻는 호철랑을 고덕은 잔잔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내 마음이 그녀를 향하니까. 호 판관도 알고 있지 않소?”

“아니요! 난 몰라요! 그따위 거 알지 못한다구요.”

고개를 젓는 호철랑을 지그시 바라보던 고덕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어디에 있소?”

물음을 무시한 채 한참 동안 고덕을 노려보던 호철랑이 입을 열었다.

“꼭 그녀여야만 하는 건가요?”

“언젠가부터 그렇게 되었더이다.”

“하아!”

하늘을 바라보며 토하는 한숨이 너무 깊었다.

“호 판관…….”

작게 부르는 고덕의 음성에 한참 동안 하늘만 바라보던 호철랑의 음성이 천천히 이어졌다.

“쉽지 않을 거예요.”

“그래도 가야만 하오.”

“그렇겠지요. 전에도 그랬으니까…….”

“부탁하외다.”

고개를 숙이는 고덕의 모습으로 시선을 옮긴 호철랑이 작은 음성으로 답했다.

“장춘으로 가세요.”

“장춘이면… 길림?”

“동북어위도총사, 그에게 가는 길입니다. 군주의 행렬이 왕부를 출발한 것은 보름 전. 얼마 안 있으면 장춘에 도착하겠군요.”

보름 전에 출발했다면 일단의 병력이 들어왔다 나간 시점이었다.

동북어위도총사의 신분상 그가 오지 못하고 신부를 데리러 병력을 보냈던 모양이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는 고덕을 향해 호철랑이 경고했다.

“사십만 대군을 움켜쥔 자입니다. 그간 상대해오던 어떤 이도 그와 같은 힘을 가지지 못했어요. 잘못하면 죽음의 길이 될 수도 있다구요.”

호철랑의 걱정에 고덕이 미소를 지었다.

“수는 문제가 아니라오. 그것이 강호이니……. 고맙소.”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려 방을 나서는 고덕을 바라보는 호철랑의 눈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움직이는 고덕을 왕팔과 후량은 제대로 쫓지 못했다.

그래도 종착지는 알고 있으니 상관없다는 생각인지, 두 사람은 저 멀리 사라진 고덕의 뒤를 쫓아 바쁘게 움직였다.

그렇게 멀리 사라지는 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협련의 눈 속에는 복잡한 갈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어째서 안 따라가는 거죠?”

호철랑의 물음에 협련이 고개를 저었다.

“저 같은 사람이 함께할 수 없는 분이니까요.”

“뒤를 따르는 두 사람은요?”

“그들은 강호인… 자유가 있으니까요.”

“협련 시위는 이미 자유를 얻은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제가 잘못 안 건가요?”

일전에 황제에게 청해 금의위에서 벗어난 신분이다. 호철랑은 그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건… 제게 주어진 자유는 완벽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군주의 성혼이 황명이기 때문인가요?”

호철랑의 물음에 협련은 아무 말 없이 씁쓸한 미소만 지어 보였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호철랑이 담담한 음성을 토해냈다.

“고 무인이 협련 시위를 버린 이유를 알겠군요.”

움찔.

당황하는 협련에게 호철랑이 말을 이었다.

“고 무인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것이더군요. 그를 사랑하려면 완전하진 않아도 닮아야 하지 않을까요?”

호철랑의 말에 협련의 얼굴 위로 무언가에 얻어맞은 표정이 떠올랐다.

“무조건…….”

“그래요. 명분도, 조건도, 아무것도 개의치 않는…….”

호철랑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협련의 신형은 왕부의 담을 넘고 있었다. 그가 향한 방향은 고덕과 같았다.

* * *

어두운 그림자 속 검은 안개에서 차가운 음성이 흘렀다.

“녀석은?”

그 음성에 그림자인지 사람인지 구별되지 않는 이의 답이 들렸다.

“폐관에 드셨습니다.”

“원망하던가?”

“…각오를 다지셨습니다.”

“답이 늦는 걸 보니 원망이 컸던 모양이군.”

“주천주와 혼천주께서 가해온 압박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변명을 해주다니, 여전히 기대가 남은 겐가?”

“천주님의 유일한 혈육입니다.”

“그것이 때론 걸림돌이 된다네.”

“언젠간 그 힘을 깨치고 나올 것입니다. 기다려 주시옵소서.”

“그러자고 폐관에 집어넣은 것이니……. 그나저나 녀석을 거꾸러트린 놈은 어찌 되었나?”

검은 안개의 물음에 그림자의 사내가 답했다.

“소흥 왕부로 들어간 것까지 확인이 되었습니다.”

“놈을 그냥 두고 싶진 않군.”

“손을 대시면 주천과 혼천에서 말이…….”

“상관없어. 그들의 눈치를 볼 생각은 없으니.”

“하오나 주군…….”

“암영(暗影).”

검은 안개의 부름에 그림자의 사내가 하던 말을 멈추고 낮은 음성을 토했다.

“하명하소서.”

“영유원의 살황에게 전갈을 넣게.”

“주, 주군!”

“네게 의견을 구하는 것이 아니야.”

“하, 하오나 영유원의 식객들을 동원하려면 주천의 동의가…….”

그림자의 사내의 말을 듣지 않겠다는 듯 검은 안개의 음성이 말을 자르고 흘렀다.

“내 전갈이면 살황은 움직일 것이야.”

“무, 무어라 전하올지……?”

“돌아오지 않아도 좋다 하게.”

“주군!”

놀라는 그림자의 사내를 두고 검은 안개는 조용히 사라졌다.

주군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그림자의 사내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여전히 주변 가득한 검은 기운에 그의 이목구비는 구별이 되지 않았다.

“어찌하시려고…….”

걱정스러운 음성을 남긴 그림자의 사내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무릉도원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곳을 걷는 사내의 주위는 여전히 어두운 밤이었다.

그렇게 흐릿한 사내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절벽에서 떨어지는 폭포가 형성한 투명한 호숫가에 위치해 있는 그림 같은 정자 앞이었다.

정자에서 한 자루 검을 갈고 있던 노인의 시선이 그 사내에게 향했다.

“무슨 일인가?”

“살황을 뵙습니다.”

“입에 발린 소리. 인질을 찾아왔으면 용건이나 보게.”

노인, 살황의 비틀린 음성에 그림자의 사내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는 것 같았다.

“주군께서 외유를 나가 보심이 어떤지 여쭈라 하셨습니다.”

그 말에 검을 갈던 노인의 손이 멈추어 섰다.

“외유라…….”

“예.”

“또 경지를 벗어날 만한 자가 생긴 모양이군. 한데, 이번에는 어찌 주천의 난쟁이가 안 오고 검둥이 너지?”

“이번 것은 주군 개인의 청입니다.”

“암천주 개인의…….”

고개를 들어 그림자의 사내를 바라보는 살황의 눈에서는 짙은 피 냄새가 풍겼다.

“주군께선 돌아오지 않으셔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순간, 차가운 광망이 살황의 눈에 떠올랐다.

“그 말은…….”

“후손들은 삼천의 보살핌에서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어긴다면?”

“제 목을 드리지요.”

그림자의 사내의 답에 살황의 입가에 차가운 조소가 물렸다.

“네놈 목을 어디에 쓰라고.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암천주에게 이 늙은이를 한번 방문해달라 전해주게.”

살행에 있어서 살황의 능력은 예측 불허였다.

삼천의 최강자인 주천주조차 살황의 살행을 완벽하게 막아낼 수 있다고 장담하지 못할 정도로…….

그런 이가 암천주의 방문을 요구하는 이유는 한 가지뿐이다.

그것을 알아차린 그림자의 사내의 주변을 둘러싼 어둠이 잘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 다시 평소의 차분함을 되찾은 어둠 속에서 음성이 흘러나왔다.

“여쭈어보겠습니다.”

“답을 받거든 다시 오게.”

그 말을 끝으로 고개를 돌린 살황은 다시 검을 갈기 시작했다.

* * *

기다란 군열의 중간, 붉은색 휘장으로 치장된 마차가 엄밀한 경비하에 움직이고 있었다.

“잠시 쉬어가자.”

장군복을 한 청년의 명에 수천은 되어 보이는 군병들이 일제히 발길을 멈추었다.

발걸음을 멈추자 장수들의 지휘를 받은 군병들이 마차를 중심으로 둥글게 원진을 형성하고, 방패와 창을 세웠다.

그것을 확인한 젊은 장군의 손이 수평을 그림에 장수들의 명이 떨어졌다.

“쉬어-!”

방패를 등에 걸머메고 창을 놓은 군병들이 그제야 바닥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물주머니를 꺼내 마시고 발을 주무르는 둥 휴식을 취하는 군병들에게서 시선을 돌린 젊은 장군이 마차의 문을 두드렸다.

“잠시 쉴 것이니 나오시오.”

잠시 후 마차 문이 열리고, 잔뜩 긴장한 시녀 둘의 부축을 받으며 붉은 면사를 쓴 여인이 내려섰다.

평평한 바위를 찾은 시녀들이 면사녀를 안내해 앉히자, 그 앞으로 젊은 장군이 물주머니를 던졌다.

“마셔라. 앞으로 반나절 동안은 마실 수 없을 게다.”

무례를 넘어 모욕적인 행동이었지만, 시녀들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모르던 여정의 초기, 왕부가 멀어진 후 일변해버린 대우에 항의하던 시녀 둘이 목 없는 시신이 되어 벌판에 버려진 뒤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를 악문 시녀 하나가 물주머니를 주워 조심스럽게 닦고는 면사녀에게 권했다.

면사녀는 시녀들의 도움으로 얼굴을 가린 붉은 면사의 반을 젖히고 물을 마셨다.

그런 면사녀를 바라보는 젊은 장군에게 푸른색 갑주를 차려입은 장수 하나가 다가왔다.

“반나절만 더 가면 요녕을 넘어 길림으로 들어섭니다.”

“사평 요새에는 준비가 되어 있겠지?”

“예, 장군. 하온데, 그 일로 도총사의 진노라도 사시면 어쩌시려고 하십니까?”

“필요한 건 명분뿐이다. 저 계집이 누구의 품에 안기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

“하오나, 황제의 명은 도총사께 하가한다고…….”

“그깟 어린 녀석의 말을 신경 쓸 이유는 없다.”

“그래도 도총사께 허락을 구하시는 것이…….”

걱정스러운 표정의 장수에게 젊은 장군은 고개를 저어 보였다.

“마렴, 아버지의 여성 편력을 몰라서 하는 말인가? 저 미색을 보면 절대로 내게 주지 않아.”

“하오면…….”

“설마 아들이 품은 여자를 취하시진 않겠지. 황실의 부마도위 척사량. 괜찮지 않겠나?”

젊은 장군, 척사량의 말에 마렴이라 불린 장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명분을 얻어 후계 구도에서 우선권을 확보하시게 되니 좋긴 합니다만, 자칫 그것이 거꾸로 약점이 되지 않겠습니까?”

“아버지의 명을 어겼다는 거 말인가?”

“예. 첫째 공자님은 그것을 그냥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형이 물고 늘어진다고 해도 내가 군주를 취한 건 변하지 않아.”

“만에 하나 도총사께서 군주를 내치시면…….”

“무엇 때문에 이 짓을 하는데, 그리 쉽게 내칠 것 같은가?”

단호한 척사량의 말에도 불구하고 마렴은 좀처럼 걱정이 가시지 않는 표정이었다.

“명분을 얻기 위해서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아버님은 궁극적으로 왕야라 불리고 싶은 거야. 그것을 위해선 절대로 군주를 내치지 못해. 물론 그녀를 취한 나도 그렇고.”

“그래도 저는 영 불안합니다.”

마렴의 말에도 불구하고 척사량은 붉게 달아오른 시선으로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물을 마시고 있는 면사녀인 문정 군주를 훑기에 바빴다.

“저런 미녀를 차지하는 일이야. 그 정도 불안감은 감수해야 하는 거라고.”

척사량의 시선을 느낀 문정 군주는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돌려진 고개는 멀리 서남쪽을 향해 있었다.

군병들의 피로가 어느 정도 풀리자 척사량은 일행을 출발시켰다.

그들은 반나절의 거리를 걸어 길림성 안으로 들어섰다.

멀리 거대한 회색 벽을 드러낸 성채를 발견한 마렴이 반갑게 외쳤다.

“사평 요새다! 힘을 내라!”

마렴의 고함에 힘을 얻은 군병들의 속도가 조금씩 빨라지고 있었다.

* * *

고덕은 최대한 직선으로 움직였다.

산이 막으면 산을 넘고, 강이 나타나면 강을 타고 달렸다. 평지에 들어서면 한 줄기 바람이 되어 속도를 높였다.

초상비, 등평도수, 어풍비행. 상승의 신법에서부터 상고에 거론된 전설의 경공들까지 모조리 끌려 나왔다.

그렇게 달린 덕에 고덕이 요녕에 들어선 것은 척사량 일행이 사평 요새에 도착하던 시기였다.

아무리 자신감이 넘치는 고덕이라도 한계라는 것은 있기 마련이었다.

그 한계에 다다른 고덕이 요녕의 초입에 위치한 한 객잔에 들었다.

지친 육신에 힘을 불어넣는 것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섭생과 운기였기 때문이다.

“너무 기름지지 않은 것으로 부탁하마.”

고덕의 말에 차를 내려놓은 점소이는 두말없이 주방으로 달려갔다.

잠시 후, 북경에서나 볼 수 있는 기름을 뺀 오리 구이와 맑은 국물이 담백해 보이는 소면이 나왔다.

“먼 길을 오신 듯해서 소면을 함께 올렸습니다.”

“고맙구나.”

자신의 답에 몸을 돌리는 점소이를 고덕이 불러 세웠다.

“참, 뭐 좀 묻자꾸나.”

“말씀하세요.”

“혹, 이 길로 많은 수의 군병이 지나가진 않았더냐?”

“손님도… 참 답답하십니다. 이곳은 수많은 변경 오랑캐들과 맞닿은 동북 삼성의 하나인 요녕입니다요. 고개를 돌리면 군병인데 그리 말씀하시면 찾지 못합지요.”

하긴 점소이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지금도 객잔 밖으로 십여 명의 군병들이 열을 지어 지나가고 있었으니까.

고덕은 품을 뒤져 반 냥짜리 은자를 꺼내 탁자 위에 놓았다.

“마차가 딸렸을 게다. 신부를 태운 마차이니, 붉은 주단이 온통 뒤덮고 있었을 게다.”

고덕의 물음에 슬쩍 은자를 갈무리한 점소이가 미소를 지었다.

“한 댓새 전에 지나갔습지요. 지현 대인이 코가 땅에 닿게 인사를 해서 기억합니다요.”

댓새란 말에 고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 거리면 이곳에서 하루를 머문다 해도 장춘에 들어서기 전에 잡아챌 수 있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점소이를 돌려보낸 고덕은 식사를 시작했다. 많이 씹고 최대한 느리게 먹었다.

먹는 모든 것을 몸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였다.

식사를 마친 고덕은 방을 하나 빌려 들어앉았다.

바닥까지 내려간 내력을 채우기 위해 운기조식을 하기 위함이었다.

눈을 감고 천지간의 기운을 끌어당기는 고덕의 주위로 적지 않은 기운이 요동쳤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길 반 각.

고양이의 출현에 놀란 쥐들처럼 기운은 순식간에 흩어졌다.

그리고 눈을 뜬 고덕의 표정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그의 감각을 계속해서 건드렸기 때문이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선 고덕은 답답한 듯 창문을 열었다.

그렇게 보낸 시선은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북동쪽으로 향했다.

“흐음…….”

작은 침음을 남긴 고덕의 신형이 창을 통해 북동쪽으로 쏘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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