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52장 (53/129)

제52장. 회복(回復)-이름을 되찾다

삼명에서 남평으로 향하는 관도.

한도회와 건일검문의 사람들과 함께 움직이던 고덕의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슬쩍 찌푸려진 검미 아래로 못마땅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자꾸 따라오지 마라.”

“저, 저도 이쪽 길로 가는 겁니다.”

쭈뼛거리는 후량의 답에 고덕이 물었다.

“그 말도 안 되는……. 왜, 이 길로 광한문인가 하는 이들을 찾아가 그들과 함께 복수라도 해볼 참이더냐?”

“그놈들이 무슨 수로 대협을…….”

말도 안 된다는 듯한 표정의 후량에게 고덕이 다시 물었다.

“그럼 왜 쫓아오는 거야?”

“말씀드렸는데요. 저도 이쪽으로 간…….”

뒷말은 잇지 못했다. 인상을 찌푸리는 고덕의 사나운 눈과 마주친 탓이다.

“쯔!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고, 따라오는 진짜 이유가 뭐야?”

“저기… 제자 안 키우십니까?”

뜬금없는 후량의 물음에 왕팔의 시선이 움직였다. 마치 자신도 그것이 궁금하다는 듯이…….

“안 키운다.”

단칼에 자른 듯한 고덕의 답에 왕팔은 물론이고, 여기저기에서 실망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러고 보니 고덕의 답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 상황에 어이없는 웃음을 짓는 고덕에게 후량이 말을 건넸다.

“저 빨래도 잘하고, 밥도 제법 합니다.”

“식모 들일 생각 없다.”

“생긴 건 이래도 말귀도 제법 알아듣습니다.”

“그런 놈이 달려들었고?”

“그, 그땐… 눈이 있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그 뒤로도 한참을 잇는 후량의 음성을 들으며 예자문은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천하의 후량이 제자로 받아달라고 저리 떼를 쓴다는 것 자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그것을 이해하면 고덕의 경지가 대폭 상향되어야 했기에 혼란스러운 것이었다.

그 탓에 주변에서 걷고 있던 고칠에게 다가섰다.

“상처는 괜찮은가?”

“아, 예. 자상이 깊지 않았습니다.”

“다행이로군. 내 자네에게 거는 기대가 크네.”

입에 바른 소리가 아니다. 후량을 맞아 싸운 고칠의 실력은 정말로 기대를 갖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감사합니다.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고칠의 답에 고개를 끄덕이던 예자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데… 고 대협 말일세.”

“예, 하문하십시오.”

“진정 초극의 극의가 맞는 겐가?”

예자문의 물음에 뒤에 딸린 마차에 앉아 후량의 조름을 받고 있는 고덕을 일별한 고칠이 답했다.

“그리 알고 있습니다만…….”

하지만 이젠 자신도 장담하지 못했다. 초극의 극의와 초극의 차이가 아무리 많이 난다고 해도 이미 초극으로 알려진 후량을 그리 일방적으로 몰아붙인 것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 대협에게서 직접 들은 말은 없는 겐가?”

그러고 보니 고덕에게서 경지에 대해 제대로 들은 말은 없었다. 있어봐야 기껏 ‘그 정도는 하지.’ 정도의 불분명한 답변뿐이었던 것이다.

“그에 대해서 정확히 말씀하시는 건 듣지 못했습니다.”

고칠의 답에 예자문의 시선이 고덕에게 향했다.

하지만 섣불리 판단을 내리기도 어려웠다. 자신의 예상처럼 강호십대고수의 능력을 가졌다면 무슨 이유로 저리 사는지 가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탓에 예자문의 입에선 묵직한 침음만이 흘렀다.

“흠…….”

* * *

남평의 중심, 한때 한도회라 쓰인 커다란 현판이 걸렸던 솟을대문에는 광한문이란 현판이 버젓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아래로 활짝 열린 정문을 지나자 정문 뒤에 펼쳐진 중앙 대연무장을 둘러싸고 기다리는 광한문의 무사들이 보였다.

그들에 맞서 들어선 한도회와 건일검문의 무사들은 광한문 무사들에 비해 반의반도 되어 보이지 않았다.

그런 이들의 끝에 생뚱맞게 후량의 뻘쭘한 모습이 보였다.

“예는 왜 온 게야?”

못마땅한 고덕의 음성에 후량이 답했다.

“그, 그냥 구경 왔습니다.”

“장바닥도 아니고 구경은 무슨…….”

말은 그리했지만 내쫓진 않았다. 그것이 무언의 허락임을 아는 왕팔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고덕과 후량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런 왕팔의 귀로 비아냥거림이 분명한 음성이 들려왔다.

“자력으론 도전을 할 수 없었던 모양이오, 예 회주.”

여평의 도발에 예자문은 되레 빙긋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게 되었구려. 모자람을 형제들이 채워주었으니 이해하리라 믿겠소.”

“그걸 우리가 왜 이해해야 하는지 모르겠소만?”

“소수의 대결로 위장하고 뒤통수를 쳤던 광한문이 그리 거론할 줄은 몰랐구려.”

예자문의 말에 싸늘한 표정의 여평이 발끈했다.

“뒤통수라니! 그것은 작전이었다!”

“마찬가지 아니겠소. 우리도 작전이라오.”

예전과 달리 느물거리는 예자문의 답에 여평은 차가운 시선만 던질 뿐, 더 이상 그에 대해 거론하지 못했다.

상황이 자신들이 흠을 잡을 수 없게 되자 인상을 찌푸린 광한이 나섰다.

“상관없어. 두 문파가 아니라 세 문파, 네 문파가 왔더라도 짓이겨 주면 그만이니까.”

광한의 결정에 여평이 불안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문주,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왜?”

“후량이 보입니다.”

“후량? 그 미친개가?”

“예. 만일 그의 투문이 관여했다면 위험합니다.”

돈에 이끌려 움직였다곤 해도 후량과 투문은 만만한 이들이 아니었다.

그들만이라면 어찌해보겠지만, 만에 하나 한도회에 붙었다면…….

광한의 눈이 가늘어졌다.

“여~ 광견, 무슨 일로 이곳에 온 거지?”

광한의 물음에 슬쩍 고덕의 눈치를 본 후량이 큰 목소리로 답했다.

“나 구경 왔어.”

“구경이라… 그뿐인가?”

“당연하지.”

후량의 답에 안도의 표정이 된 여평이 속삭였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거짓을 말할 위인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저놈은 신경 쓸 게 없다는 말이군.”

“그런 듯합니다.”

여평의 답에 희미한 미소를 지은 광한이 예자문의 곁에 선 표고성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대가 건일검문의 문주인가?”

“그렇소.”

그 흔한 통성명도 없다.

하긴 싸우러 와서 어쩌고저쩌고 하는 것도 양쪽이 어느 정도 균형이 맞아 여유가 있을 때나 하는 일이다.

지금처럼 열세에 처한 상황이 되자 표고성도 긴장되어 인사 따위를 챙길 여유가 없었다.

“지금이라도 돌아가는 것은 어떻겠나? 그쪽과는 아직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말이야.”

광한의 말에 표고성은 주저하지 않고 답했다.

“광한문과 맺은 원한은 없으나, 한도회와 맺은 인연은 끝없이 깊소이다.”

“체면이니 명예니 하는 것들이 생명을 지켜 주진 않는다는 걸 알 텐데. 만에 하나 우리 광한문에 검을 들이민다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아. 청류에 남겨진 식솔들도 생각해봐야지 않겠어?”

지독한 위협이었다. 지면 멸문을 시키겠다는…….

그 말에 뒤에 늘어선 문도들을 둘러보았던 표고성이 잠시 숨을 고른 후 답했다.

“건일검문의 이름이 이곳에서 무너진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오.”

무너진 무문의 가족이다. 지켜 주지 못함이 천추의 한이겠으나, 차가운 강호의 밑바닥에 던져지느니 함께 저승길을 걷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표고성의 답에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린 광한이 중얼거렸다.

“겉멋만 들어서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닫은 광한을 대신해 여평이 다시 나섰다.

“원하는 대결 방식이 있나?”

여평의 물음에 예자문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지난 여정에서 싸움의 방식에 대한 자신의 물음에 답한 고덕의 말 때문이었다.

‘내력을 되찾아가고는 있다지만 아직은 멀었지요. 이 상태에서 일대일로 붙으면 필패뿐입니다. 남은 건 하나,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입니다.’

“집단전을 원하오.”

예자문의 말에 여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집단전? 지금 그 수로 집단전을 원한다는 말이오?”

“그렇소.”

예자문의 답에 광한을 바라보는 여평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어렸다.

일대일의 싸움 속에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위험성이 도사린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었는데, 그런 걱정들을 한 방에 날려 주는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그 탓에 답은 즉각적으로 나왔다.

“원한다면.”

광한의 답에 장내의 기세가 일변했다.

웃전 고수들의 싸움만 지켜보면 되리라 생각했던 광한문의 무사들이 싸움의 양상이 자신들의 피를 요구하는 것으로 바뀌자마자 살기를 피워 올린 탓이었다.

긴장과 살기로 팽팽하게 당겨진 장내의 상황이 광한의 한마디에 무너졌다.

“모두 죽여라!”

“와아아아!”

천에 육박하는 광한문의 무사들이 파도가 덮쳐들듯 쏟아져 들어오며, 연무장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있던 한도회와 건일검문의 무사들을 들이쳤다.

싸움은 예상대로 몸서리쳐지게 처절했다.

죽고 죽이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 무사들의 아수라가 펼쳐졌다.

운이 다한 무사의 피가 사방으로 뿌려지고, 그 피를 흠뻑 뒤집어쓴 무사들이 새로운 먹잇감을 찾아 핏발 선 눈을 희번덕거렸다.

기세와 수의 싸움은 점점 수의 우세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하긴 거의 열 배에 이르는 수적 차이는 처음부터 극복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그때, 조용히 지켜만 보던 고덕이 후량에게 말했다.

“나가서 놀아봐.”

“예?”

“나가 보라고.”

“제, 제가 왜?”

“그럼 얘보고 나가라고 할까?”

고덕의 손짓이 자신을 향하자 왕팔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갔다.

“그, 그건 아닙니다만…….”

한눈에 봐도 일류나 되었을까 싶은 왕팔로는 별다른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가 봐.”

마치 자신이 꼭 나가야 한다는 듯이 말하는 고덕의 요구를 후량은 끝까지 거절하지 못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싸늘한 눈길 속에 꿈틀거리는 굶주린 야수의 본능을 읽어버린 까닭이었다.

“아, 알겠습니다.”

마치 무엇에 쫓기는 듯이 발을 들이민 후량의 가세는 작지만 확실한 파장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 파장이 만들어내는 광경을 지켜보던 광한이 움직이려던 찰나, 날카로운 경기가 그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황급히 보법을 밟고 일곱 걸음이나 물러나서야 간신히 위기에서 벗어난 광한은 경악 어린 표정으로 경기의 발산지를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손을 흔들어 보이는 고덕과 눈이 마주친 그는 뒷목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느껴야만 했다.

그 이후로 광한은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발을 떼기는커녕 몸을 작게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단숨에 자신을 찢어발길 것 같은 날카로운 경기의 존재를 느끼고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싸움은 수의 패배로 기울어져 갔다.

전역 전체를 가로지르는 후량의 파장을 광한문의 그 누구도 막아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를 악문 여평이 몇몇 무사들과 후량을 막아섰지만, 그다지 긴 시간 동안 가둬두지 못했다.

가슴이 함몰된 여평이 피를 뿌리며 무너지자 광한문 쪽의 패색은 훨씬 짙어졌다.

그 순간, 광한을 옭매어두던 경기가 풀렸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불안감으로 머뭇거릴 여유가 광한에겐 없었다.

곧바로 전역으로 뛰어든 광한의 무시무시한 파괴력이 전장을 휩쓸었다.

악착같이 살아남아 적을 밀어붙이던 한도회와 건일검문의 무사들이 태풍에 휩쓸린 나뭇가지들처럼 부러져 나갔다.

파죽지세로 관통하는 광한을 향해 예자문과 표고성을 중심으로 한 두 문의 주요 고수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의 위험을 인지한 후량이 광한을 향해 움직이려는 찰나, 차가운 기운이 그의 움직임을 방해했다.

순간 기운의 기원을 찾아낸 후량의 표정에 의문이 어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바로 고덕에게서 시선을 돌린 후량은 몰려드는 광한문 무사들과의 싸움에 다시금 집중하기 시작했다.

예자문을 중심으로 조극동과 묵광겸, 거기에 고칠까지 네 사람이 동과 북을 막아서자, 표고성을 중심으로 한 건일오검수가 서와 남을 막아섰다.

그들에게 완전히 포위된 광한은 차가운 시선으로 포위자들을 훑어보았다.

느껴지는 기세는 모두가 절정. 초절정의 기세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그것이 광한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그리게 만들었다.

“죽여주마!”

그 말을 끝으로 광한의 전신에서 무시무시한 강기가 쏟아져 나왔다.

광권이란 무명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광한의 움직임은 미친 것 같아 보였다.

이리 치고, 저리 쫓고, 사방을 휘도는 무서운 공격에 죽죽 밀려났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광한의 강력한 공격을 힘을 합쳐 흘려 내며 버티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포위를 굳건히 하고 버텨 내는 것엔 성공했지만, 반대로 공격해 들어가지는 못했다.

여전히 미친 듯이 밀어닥치는 광한의 무위에 눌려 방어에 급급했기 때문이다.

자그마치 열 명의 고수들이 광한이 밀면 미는 대로, 끌면 끄는 대로 휘청거리며 악착같이 포위망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은 지극히 위태로워 보였다.

그것을 바라보는 고덕의 얼굴에 떠오른 걱정도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짙어져 갔다.

그 걱정이 절정에 달했을 때 결국 사단이 벌어졌다.

포위망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던 건일오검수 중 나환검 석모강과 절파검 나림이 피를 뿌리며 튕겨져 나온 것이다.

포위망의 일각이 무너지자 광한은 더욱 사납게 날뛰었다.

사자가 우리를 뛰쳐나오면 기세가 더 사나운 것은 불문가지다.

우리를 지키기 위해 남겨진 이들의 움직임이 더 절박해지고, 훨씬 많아졌다.

그 사이로 뚫고 나가려는 광한의 움직임은 점점 더 사나워지고 있었다.

쾅-!

커다란 폭음과 함께 한 사발은 되어 보이는 피를 게워낸 조극동이 바닥에 기다란 자국을 남기며 밀려 나왔다.

그 사이로 몸을 반쯤 빼낸 광한을 고칠의 도가 붙잡았다.

뿌리치려는 광한과 붙잡으려는 고칠의 공방이 순식간에 공간을 가득 채웠다.

위태위태하면서도 예상외로 악착같이 버텨 내는 고칠의 선방 덕에 기회를 엿보던 예자문이 작은 틈을 발견하자마자 검을 떨쳐 냈다.

콰직! 푹!

반쯤 부러진 도를 움켜쥔 고칠은 울컥거리며 쏟아져 나오는 피를 게워내면서 비척비척 물러났다.

고칠이 물러나며 드러난 광한은 자신의 가슴을 깨끗하게 관통한 예자문의 검을 내려다보다 풀썩 주저앉았다.

검을 잡은 예자문은 무심한 시선으로 주저앉은 광한을 내려다보았다.

그런 예자문의 시선을 비켜 차갑게 식어가는 여평의 시신과 이리저리 잘리고 부서진 채 사방에 널브러진 광한문 무사들의 주검을 훑어본 광한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크흐흐흐! 이제야, 이제야 제대로 사나 했는데…….”

작지 않은 한이 서린 그 말을 끝으로 광한의 고개가 힘없이 꺾였다.

“광한이 죽었다! 광한문도는 투항하라! 투항하면 살려 줄 것이다!”

광한의 죽음을 확인한 묵광겸의 고함이 울려 퍼지자, 대연무장 여기저기에서 벌어지던 싸움이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멈추어졌다.

스걱-

망설임 없이 광한의 목을 베어 높이 든 묵광겸이 사방을 둘러보며 다시 외쳤다.

“봐라! 광한의 목이다! 투항하라!”

억울한 듯 눈도 감지 못한 광한의 머리를 확인한 광한문도들은 제각기 움직였다.

힘없이 무기를 떨어뜨리고 저항을 포기하는 자, 급하게 몸을 빼 도주하는 자, 죽기를 각오하고 대항해오는 자.

사로잡고, 때론 놓아주고, 간혹 죽이는 것으로 사태는 결말을 맺었다.

대연무장 전체를 주검과 피로 물들인 싸움 끝에 남은 것은 겨우 오십여 명 남짓한 인원뿐이었다.

한도회는 명예를 되찾았다. 자신들의 패배를 설욕하고, 장원과 현판을 되찾았다.

하지만 그 대가는 너무나 컸다.

일류 이상이었던 핵심 고수들 중에 살아남은 이들은 겨우 스물 남짓이었다.

더구나 한도회의 한쪽 기둥이었던 조극동은 수년을 정양해야 할 만큼 심각한 중상을 입었다.

그들을 도왔던 건일검문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청류를 출발해 남평으로 왔던 근 백여 명의 무사들 중에 살아남은 자들은 서른을 간신히 넘겼다.

더구나 건일오검수들 중 나환검 석모강은 광한에게 당한 중상 끝에 결국 숨을 거두었다.

아직도 남아 있는 회천문의 위협을 걱정해 표고성과 건일검문의 무사들은 곧바로 귀로에 올랐다.

그들의 뒤로 길게 이어지는 관을 실은 수레들의 모습에 배웅하는 예자문과 한도회 고수들은 침중할 수밖에 없었다.

장원을 찾고 적을 물리치자 사방으로 흩어졌던 무사들이 돌아왔다.

고의로 숨겨 놓았던 이들,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을 알고 뒤로 물려 놨던 일꾼들, 고칠의 사가로 보내놓았던 부상자들이 돌아오자 상처투성이인 한도회는 서서히 되살아나고 있었다.

잠시 머물며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고덕은 어느 날 홀연히 한도회에서 모습을 감췄다.

그가 머물던 숙사에서 발견된 한 통의 서찰만이 그가 조용히 떠나고자 했던 의사를 전할 뿐이었다.

뒤늦게 서찰과 함께 소식을 들은 예자문은 하포가 있는 동북쪽을 향해 정중히 포권을 취해 보였다.

* * *

하포로 돌아온 고덕을 고길 내외는 반갑게 맞았다.

부상자들이 북적거릴 때의 소홀함이 신경 쓰였던 듯 고길과 형수의 손길은 더 따뜻했고, 정성스러웠다.

어느덧 왕부를 떠난 지도 석 달이 지났다.

건일검문에서 서두를 때는 한도회의 일이 끝나면 곧바로 왕부로 돌아갈 것 같았던 고덕은 웬일인지 하포의 사가로 돌아와선 조용히 침잠(沈潛)했다.

그런 고덕의 모습 탓인지 하포 사가의 그 누구도 왕부의 일을 입에 담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후량은 말할 것도 없고, 문정 군주의 일은 알지 못했지만 무언가 사연이 있음을 느끼는 고길 내외는 물론이고, 왕팔마저 입을 닫았다.

그렇게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시간이 평온함을 가장해 길게 흘렀다.

석 달을 훌쩍 넘기고 넉 달에 접어 들어가던 어느 날, 그 고요함이 깨어졌다.

몇몇 사람이 고덕을 찾아온 탓이었다.

“너희가 어찌……?”

자신 앞에 서 있는 혈마와 협련의 모습에 고덕의 눈 속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가득했다.

“돌아오시지 않을 것 같아서 찾아뵈었습니다.”

“내가 예 있는 것은 어찌 알고?”

“일전에 신허를 시켜 서신을 전하신 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랬다. 문정 군주와 소흥왕이 마교로 납치당했던 그때, 왕팔을 불러올리느라 신허를 시켜 전서를 보냈던 일이 있었다.

“그랬었지. 잘 왔다. 밥은 먹었나?”

묻고 싶은 것은 그것이 아니었지만, 고덕은 일부러 말을 아꼈다.

잊어버렸다 생각했던 두려움이 마음속에서 움트는 것에 당황한 탓이었다.

“패주…….”

혈마의 부름에 고덕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그 시선을 받은 혈마가 갈등 어린 표정을 지어 보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게… 후! 제가 언제 움직이면 되겠습니까?”

무언가 말을 삼키는 것이 확연했지만 고덕은 묻지 않았다. 자신이 물었을 때 돌아올 답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신교의 재건 말이더냐?”

“예.”

“시작해도 될 것이다.”

고덕의 말에 혈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극검은 어찌…….”

“그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하나, 다른 이들은 알 수 없다.”

고덕의 답에 혈마의 얼굴은 대번에 밝아졌다.

“무극검만 움직이지 않는다면 상관없습니다.”

천하오존인 무극검만 아니라면 다른 이들은 결코 두렵지 않다는 십대고수의 수좌다운 자신감이었다.

“그렇다면 잘해봐.”

“감사합니다, 패주.”

포권을 취하는 혈마의 모습에서 무언가를 느낀 고덕이 물었다.

“바로 떠날 생각인 모양이지?”

“일각이 아쉽습니다.”

신교가 전부였던 혈마다운 답이었다. 그에 고덕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그렇겠지. 가봐. 잡지 않을 테니.”

“보중하십시오.”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고덕의 앞에서 혈마의 모습이 꺼지듯 사라졌다.

혈마가 떠나가자 고덕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마침 끼니때다. 밥이나 먹자.”

고덕의 말에 협련은 아무 말도 없이 뒤를 따랐다.

식사는 조용했다.

왠지 모를 분위기에 눌려 고길 내외는 물론이고, 왕팔과 후량마저 입을 열지 못했다.

상이 물려지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는 고덕의 뒤를 협련이 따랐다.

“내일, 내일 듣자꾸나.”

복잡한 심사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그 음성에 협련의 걸음이 멈추어졌다.

홀로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 고덕의 등을 협련은 무거운 시선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잠시 후, 그를 부르는 왕팔을 따라 협련은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밤이 깊었다.

모두가 잠이 들고 바람마저 잦아든 깊은 밤에 방문을 연 고덕의 시선으로 하늘 가득한 별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별들이 참 아름다워요. 마치 상공 눈 같아요.’

슬며시 그녀가 쓰던 면경을 당겼다.

슬쩍 비춰보는 눈빛은 뱀의 그것처럼 차갑고, 죽음의 냄새로 비렸다.

이런 눈을 보고 별들 같다고 말해주던 그녀가 그리웠다.

끌어당겼던 면경을 밀 때 풀썩 올라오는 그녀의 향기가 미치도록 아릿했다.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길 반복했다.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심장의 울림은 협련이 가져왔을 소식에 대한 짙은 두려움으로 채워갔다.

생경한 두려움에 떨며 고덕은 빌었다. 제발 이 밤이 새지 말라고…….

* * *

다음 날 아침, 방을 나서던 협련은 흠칫 놀랐다.

“대, 대협!”

“말해.”

너무 무거워 그 무게에 짓눌릴 것 같은 느낌을 받은 협련은 걱정스러운 눈빛을 띠었다.

“대협…….”

“들을 준비는 되었다.”

잔뜩 경직된 고덕의 얼굴을 바라보던 협련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분이… 문정 군주께서… 서, 성혼을 하십니다.”

협련의 말이 끝났지만 고덕은 미동조차 없었다. 아니, 숨조차 쉬지 않고 있었다.

당황한 협련이 고덕을 불렀다.

“대, 대협!”

그렇게 몇 번을 부르고서야 고덕의 시선이 천천히 협련에게 향했다.

비척, 작게 휘청거린 고덕의 숨이 그제야 다시 쉬어졌다.

“대협…….”

차마 무어라 말하지 못하는 협련의 서글픈 부름에 고덕의 음성이 이끌려 나왔다.

“아, 알았다.”

그뿐이었다. 뒤로 이어지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천천히 돌아서는 고덕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갈등하던 협련이 품에서 서찰 하나를 꺼내들었다.

“군주께서 보내시는 서찰입니다.”

움찔 멈추어진 몸이 천천히 다시 돌아섰다.

내미는 고덕의 손이 마치 수전증 환자의 그것처럼 떨리는 모습에 협련의 표정에는 안타까움이 들어섰다.

건네받은 서찰을 힘들게 펼쳐 든 고덕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와락!

한참을 망부석처럼 서 있던 고덕의 손에 서찰이 구겨졌다.

“돌아간다.”

“대, 대협!”

고덕의 결정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고 있는 협련의 걱정스러운 부름이 터져 나왔지만, 이미 고덕의 신형은 담을 벗어나고 있었다.

그 뒤를 놀랜 협련이 쫓아 떠났고,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왕팔과 후량이 서둘러 뒤를 따랐다.

그렇게 사람들이 떠난 마당에는 주인을 잃은 서찰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바람에 펼쳐진 서찰의 내용이 아침 햇살에 드러나 있었다.

사랑해요.

너무 오래 걸리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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