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장. 광견(狂犬)-미친개를 거두다
건일검문의 사정이 그렇게 되자 어색해진 것은 우습게도 한도회의 고수들이었다.
함께 피를 흘려 싸우고 결국엔 자신들과 함께 온 이의 힘으로 승리까지 거뒀건만, 그 도움을 떳떳이 내세우지 못하는 이상한 상황이 벌어진 탓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런 상황을 만들어낸 장본인인 고덕은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더구나 그는 지난 싸움에서 얻은 상처들을 돌보고 있던 한도회의 고수들에게 돌아가자고 말했다.
“돌아가요? 지금 말입니까?”
당황한 예자문의 물음에 고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의 일이 끝을 보았으면 머물 이유가 없겠지요.”
“하나, 문도들의 부상을 아직 제대로 돌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남의 집에 얹혀 상처가 나을 때까지 뭉갤 생각인 겁니까?”
너무나 직설적인 고덕의 물음에 예자문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 그건 아닙니다.”
“하면, 가야 하는 게 아닙니까?”
“그, 그야…….”
“뭐, 건일검문에서 얻을 것이라도 있는 겁니까?”
“그런 건 아닙니다.”
“한데, 왜 망설입니까?”
고덕의 추궁에 가까운 물음에 예자문은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아, 알겠습니다. 돌아갈 준비를 하겠습니다.”
예자문으로서는 고덕의 도발에 말려든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뿐이다.
빠져나갈 수 없는 도발은 사실과 같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결정이 내려지자 한도회의 고수들은 곧바로 짐을 꾸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왕팔이 묵묵히 서 있는 고덕에게 다가섰다.
“왜 갑자기 서두르십니까?”
그 물음에 왕팔을 지그시 바라보던 고덕이 되물었다.
“서두르는 듯이 보이느냐?”
“예. 대협답지 않으십니다.”
조심스러운 왕팔의 답에 고덕은 생각 외로 답답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답지 않다라……. 글쎄… 과연 나다운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구나.”
“혹, 마음 쓰이시는 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글쎄다.”
답을 피하는 고덕의 시선은 어느새 멀리 소흥 왕부가 있는 동북쪽을 향해 있었다.
떠나겠다는 한도회의 갑작스러운 통보에 표고성은 당황해했다.
“혹시 서운한 것이라도…….”
자신들의 행태가 한도회에게는 결례가 되었으리라는 점을 뒤늦게 인식한 까닭이었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단지 저희에게 아직 할 일이 남았기 때문입니다.”
“할 일이라면… 혹시 광한문과의 일을 말씀하십니까?”
“예. 어지럽게 꼬인 매듭을 풀어야 하니까요.”
예자문의 답에 표고성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하나, 아직 부상들도 다 돌보지 못한 것으로 압니다만…….”
“상처가 모두 낫길 기다리자면 시간이 너무 길게 남았기에 이쯤에서 움직이고자 합니다.”
예자문의 말에 표고성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군요. 시간이란 것이 때론 시기를 지나치게 만들기도 하니까요.”
“그렇습니다. 실기하기 전에 떠나고자 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차비를 갖추지요.”
표고성의 말에 예자문의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무슨 말씀이신지……?”
“함께 움직일 고수들을 추려 놓겠습니다.”
“예?”
놀라는 예자문에게 표고성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혈맹입니다. 우리의 문제를 함께 풀었으니 한도회의 문제도 함께 해결해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표, 표 문주님…….”
감격한 예자문의 음성에 표고성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상처가 깊은 이들이 있어 다 함께 가진 못합니다. 그 점을 이해해주십시오.”
“어, 어찌 그것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단 몇 분이 함께하신다 해도 감사할 뿐입니다.”
“그리 생각해주신다니 감사합니다.”
“표 문주님…….”
지그시 잡아오는 예자문의 손을 표고성이 굳게 쥐었다.
“우린 혈맹이자 형제가 아니겠습니까!”
“예, 형제지요.”
고개를 끄덕이는 예자문이나 그런 그를 바라보는 표고성의 입가에나 신뢰의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 * *
한도회의 이동에는 건일검문의 무사들이 따라붙었다.
수도 적지 않았다. 중상자를 제외한 거의 모든 문도가 함께한 까닭이었다.
물론 건일오검수도 그 안에 모두 함께하고 있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남평을 새롭게 차지했던 광한문에게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다.
만약에 대비해 적지 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던 까닭이다.
“제길! 그냥 끝장내는 건데 괜히…….”
한도회와 건일검문의 이동 사실을 보고받은 광한의 불만에 여평의 고개가 한없이 숙여졌다.
광한문의 체면을 위해 한도회를 멸문시키면 안 된다고 권한 것이 바로 여평이었기 때문이다.
“죄, 죄송합니다.”
“문제를 만들었다면 해결할 방법도 있는 거겠지?”
광한의 물음에 여평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방법은 있습니다만… 돈이…….”
“돈? 저들을 상대하는 데 돈이 왜 필요해?”
“우리의 도전을 받아주었던 상대를, 그것도 우리에게 패해 몰락한 이들을 상대로 습격을 가한다면 우리 광한문의 체면이…….”
“야! 여평! 그놈의 체면 차리다가 이렇게 된 걸 몰라서 또 그 타령이야!”
광한의 분노에 찔끔한 기색이 역력했음에도 여평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하나, 이젠 그 체면이라는 것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왜?”
“우리가 예전처럼 별 볼일 없는 문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별 볼일 없는 문파가 아니기 때문에 체면을 갖춰야 한다?”
“예.”
“우리의 위상과 체면이 무슨 상관이라고?”
“상관이 아주 많습니다.”
“빙빙 돌리지 말고 제대로 말해봐.”
광한의 물음에 여평이 고개를 들고 눈을 맞췄다.
“세력이 커지면 권리가 커집니다.”
“그야 당연하지. 그래서 정든 집 버리고 예까지 와서 한도회를 잡아먹은 거니까.”
“맞습니다. 문제는 권리가 커진 만큼 우리가 갖춰야 할 것들도 늘어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체면이다?”
광한의 물음에 여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이름깨나 있다는 이들은 그걸 명예나 명분이라고도 부르지요.”
“명예나 명분이라……. 그 골치 아픈 걸 신경 써야 한다고? 우리가 왜?”
광한의 물음에 여평은 한자 한자 힘을 주어 답했다.
“이젠 우리의 행동을 정천맹과 마교가 주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갑자기 왜?”
물어오는 광한의 음성에는 곤혹스러움과 당황감이 짙었다.
사파였던 광한문으로서는 사도의 중심축인 사패련의 발이 묶인 상황에서 가장 껄끄러운 상대가 바로 정천맹과 마교였기 때문이다.
“사실상 복건성의 패자였던 한도회를 물리치고 우리가 그 자리를 차지했으니까요.”
“그럼…….”
“맞습니다. 그들은 복건성의 주인이 된 우리를 눈여겨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만에 하나 명분을 잃는다면…….”
“잃는다면?”
“마교는 몰라도 정천맹은 반드시 개입해올 것입니다.”
“그들이 왜?”
광한의 부정에 여평이 낮은 음성으로 답했다.
“한도회는 백도였습니다.”
“하, 하지만 정천맹에 가입된 문파도 아니었잖아!”
“맞습니다. 그래서 우리 목표로 선택된 문파이기도 하니까요.”
그랬다. 적당한 규모이면서도 정천맹에 정식으로 가입된 문파가 아니었기에 광한문의 표적이 되었던 것이다.
“한데, 이제 와서 그들이 왜?”
“아무리 정식으로 가입된 문파가 아니었다곤 해도 정천맹도 기본은 해야 하니까요.”
“기본? 기본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사실 한도회는 정천맹에 매년 일정분의 기부를 해왔습니다. 다시 말해, 정식 가입은 아니었지만 가입맹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가입맹이라고?”
“예. 정천맹에 예속되어 유수의 대문파들 사이에서 치이긴 싫고, 그렇다고 정천맹의 권위를 거스를 수도 없었던 거죠.”
“그러니까 정천맹에 상납을 해왔다는 말이군.”
지극히 자신의 눈높이에 맞춰서 해석하는 광한에게 여평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맞습니다. 딱 그 짝입니다.”
“제길! 그럼 우리가 정천맹의 하부 조직을 건드렸다는 말이잖아.”
“그런 셈입니다. 하지만 명분이 우리에게 있는 이상 그들도 그걸 주장할 수는 없죠.”
“명분이라……. 네가 말한 체면 말이로군.”
“예, 그렇습니다.”
이제야 자신의 말을 이해한 듯 보이는 광한에게 여평이 말을 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도회의 도전 이전에는 우리가 나서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면, 돈을 쓴다는 뜻은?”
“우리는 아니지만 다른 애들이 나서지 말라는 법은 없지요.”
“돈으로 움직일 만한 애들이라면 소용이 없는 거 아니야?”
“우리가 원하는 것은 그들이 한도회를 멸해주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날개가 꺾였다곤 해도 한도회니까요.”
자신들에게 당한 직후라면 충분히 제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건일검문이 회천문을 물리치는 데 일조할 만큼 회복된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럼 힘을 빼자는 말이야?”
“예, 문주.”
“기분이 별로군. 그 허접한 놈들을 상대하기 위해 그런 수까지 써야 하다니… 차라리 우리가 찾아가서 박살을 내는 게 나은데…….”
“그건 절대로 안 됩니다.”
펄쩍 뛰는 여평에게 광한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물었다.
“정천맹 때문에?”
“예. 명분이 없으니까요.”
“제길! 그러면 어딜 쓰려고?”
광한의 물음에 여평이 빙긋이 웃었다.
“후량을 써볼 생각입니다.”
“미친개 후량?”
“예. 그 작자라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흐음… 그놈이라면…….”
침음의 끝에 고개를 끄덕이는 광한의 눈에 차가운 한광이 어리고 있었다.
* * *
건일검문이 위치한 청류에서 남평으로 향하자면 삼명이란 도시를 지나게 된다.
그 삼명의 외곽에 위치한 산을 넘을 때였다.
“어딜 그렇게 급히 가시나그래?”
갑자기 나타나 앞을 가로막는 무리의 출현에 이동 중이던 한도회와 건일검문의 무사들이 긴장했다.
“무슨 일이냐?”
앞에서 길을 열던 칠파도 묵광겸의 물음에 길을 가로막은 이들의 수장쯤 되어 보이는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그냥 볼일 좀 보려고.”
“볼일? 감히 어떤 놈이기에 한도회와 건일검문의 앞을 막고 산적질을 한단 말이더냐?”
상대를 산적으로 오인한 묵광겸의 호통이 터져 나왔지만, 사내는 여전히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네들이 누군지는 관심 없고, 가진 것 좀 놓고 가라.”
“이놈들이!”
분기를 참지 못한 묵광겸이 달려 나가려는 것을 예자문이 잡았다.
“잠시 기다리시게.”
“하나 회주님, 저놈이 감히…….”
“선자불래 내자불선(善者不來 來者不善)이라 했으니, 좋은 뜻을 가지지 않은 것은 분명한 일. 그런 이들이 설마 우리 정체를 모르진 않겠지.”
“하면, 저놈들이 우리를 노리고 왔다는 말씀이십니까?”
당황하는 묵광겸에게 미소로 답을 대신한 예자문이 앞으로 나섰다.
“어디에서 오신 분이시오?”
예전에도 차분한 편이었지만, 한 차례의 파도를 넘은 이후 더욱 신중해진 예자문이었다.
그런 그의 질문에 사내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냥 대판 붙어보나 했는데, 말이 길어지게 생겼군.”
“우린 그리 급하지 않소만…….”
“제길! 역시 백도 나부랭이 냄새로군.”
“마도에서 오신 손님 같진 않으시오만…….”
상대의 차림과 말투를 보고 예상하는 예자문에게 사내가 빈정거렸다.
“마도 놈들이었으면 입으로 막아서진 않았겠지.”
틀린 말이 아니다. 마도 쪽 고수들이었다면 말보다 칼을 먼저 휘둘러왔을 테니까.
“그렇겠지요. 누구시오?”
“그래, 이름을 숨길 필요는 없겠지. 나 후량이야.”
사내의 말에 왕팔이 고덕의 귀에 소곤거렸다.
“광견(狂犬), 또는 투견(鬪犬)이라 불리는 작자로 박투술이 뛰어나다는 평을 받는 자입니다. 무이산에 본거지를 둔 투문(鬪門)의 문주이기도 하지요.”
한때 불교와 도가의 중요한 성지 중 한 곳이던 무이산이 일개 사파 계열의 중소 문파의 차지가 된 일이 있었다.
그때 언뜻 들었던 이름들 속에 광견이라는 무명이 있었던 듯도 했다.
기억을 더듬던 고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놈이 무슨 일로…….”
그 의문은 사내를 알아본 예자문도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후 문주시구려. 후 문주가 무슨 일이시오?”
알려진 대로라면 후량의 실력은 광한문과의 싸움에서 부상을 입기 전의 예자문과 동일한 초극의 고수였다.
그 말은 예자문이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지금의 상황에서는 또다시 고덕을 제외하곤 맞상대할 이가 없다는 것과 같았다.
그것이 예자문을 비롯한 중인들의 긴장감을 높였다.
“당신 입으로 이야기했잖아. 선자불래 내자불선이라고.”
“우리와 피를 보아야 할 이유가 있는 게요?”
“뭐, 꼭 특별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 알 만한 사람끼리 왜 이래!”
알 만한 사람. 하긴 저들이 앞을 가로막는 순간 광한, 그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놈의 얼굴이 떠올랐으니 예자문으로서도 모른다고 할 수만은 없었다.
“좋은 조건을 제시한 모양이구려.”
“조건은 무슨… 돈을 좀 많이 받았지. 중놈들이나 말코 놈들하고 드잡이질 하느라 가뜩이나 돈이 모자란데 거절할 입장은 아니었다고.”
여전히 무이산을 되찾으려는 불가와 도가의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당장 코앞의 후량을 해결해야 하는 예자문으로서는 그것에 신경 쓸 입장이 아니었다.
“그것은 명리(名利)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명리? 그딴 거 난 몰라. 잇속이라면 잘 알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게 어떻겠소?”
예자문의 말에 후량이 빈정거림이 분명한 웃음을 머금었다.
“제대로 깨졌었다더니 과거의 한화도가 아니로군.”
한화도(寒花刀)는 예자문의 무명이다. 다시 말해 예자문이 겁을 내고 있다고 비웃는 것이었다.
상대의 도발에 넘어간 것은 예자문보다 다른 사람이 먼저였다.
“네놈이 감히!”
고함과 함께 앞으로 나서는 사내의 얼굴을 확인한 고덕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누구냐, 넌?”
자신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나서는 사내를 향한 후량의 물음에 상대가 답했다.
“패부도라 불리는 고칠이다!”
“패부도? 패부면, 도끼 아니야?”
틀린 말이 아니다. 대부분 패부는 도끼를 무기로 다루는 이들에게 붙여지는 무명에 사용되는 단어였으니까.
“이놈이! 어디 그 더러운 입을 언제까지 놀리는지 두고 보자!”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달려드는 상대를 후량은 어려움 없이 막아나갔다.
후량에게 달려드는 고칠을 바라보며 고덕이 투덜거렸다.
“저놈 저거, 왜 저래?”
왕팔이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내젓자, 그 말에 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사실 고칠이 무모해 보일 정도로 나댄 것에는 나름대로의 고충이 있었다.
고덕의 가르침 이후로 실력이 부쩍 향상된 것을 느끼고 있는 고칠이었다.
그 느낌은 건일검문에서의 싸움을 겪으며 확신으로 바뀌었다.
하나, 그뿐이다. 그 이후엔 더 이상의 진척이 없었다.
한도회 안에서 구할 수 있는 상대들로서는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검증하거나 향상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회주나 두 명의 전주들에게 대결을 요청할 수도 없었고…….
물론 그들도 제대로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으니 도움이 될지조차 확신이 서지 않았다.
더구나 고덕은 언제나 수심에 잠겨 있어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그런 상황에서 만난 후량은 고칠이 도전하기에 너무나 좋은 상대였다.
회주인 예자문이 주저할 정도로 고수이긴 해도, 뒤에 고덕이 버티고 있는 이상 적어도 죽지 않을 것이란 나름의 계산도 서 있기에 마음 놓고 나댄 것이었다.
싸움은 생각 외로 긴박하게 흘렀다.
초극이라 알려진 실력이 거짓이 아닐까 심각하게 고심해봐야 할 만큼 후량은 당황하고 있었다.
“제법인걸.”
고덕의 평가가 틀리지 않을 정도로 고칠은 선전을 하고 있었다.
사실 후량이 당황하는 것도 고칠의 검식이 그의 상식을 깨는 방향에서 날아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고덕의 충고와 실전을 겪으며 새롭게 정립된 고칠만의 철혈도법이었다.
패도식이면서 변식이 많이 섞인 지금 같은 도법을 상대해본 적이 없던 후량으로서는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밀리지도 않는다. 적어도 후량은 인간의 능력을 초월했다는 초극의 고수인 탓이다.
당황스러운 상황이라도 시간이 길어지자 후량이 적응이란 것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적응의 뒤론 무서운 박투술이 뿜어져 나왔다.
후량의 박투술이 뿜어져 나오며 고칠의 도가 갈 길을 잃고 휘청거리는 순간이 많아졌다.
하지만 위험한 순간들을 넘기며 고칠도 적응이라는 것을 했고, 그렇게 서로의 공격에 적응이 되자 싸움은 예상 밖의 상황으로 흘렀다. 기력과 기술의 싸움이 아니라 임기응변과 순발력의 경쟁으로 바뀐 것이다.
“칠이의 능력이 저 정도였다니… 설마 초극이었던 겁니까?”
왕팔의 경악이 이해가 갈 정도로 고칠은 선전에 선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아니, 이제 절정 정도…….”
“그, 그런데 어떻게…….”
절정이 초극 앞에서 도를 들었다면 두어 수가 지나기 전에 목이 날아가야 정상이기 때문이다.
“무공의 이해도가 절정의 경지를 넘어섰어. 내력만 받쳐 준다면… 초절정도 어렵지 않겠군.”
고덕의 평에 왕팔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광한문과의 싸움 전만 해도 분명 고칠의 경지는 상승의 일류에 머물고 있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고칠의 경지는 어디까지나 이제 절정일 뿐이었다.
그 경지로 두 경지나 윗줄인 초극의 후량을 맞아 수십 합을 싸웠다는 것만으로도 기적이라 할 법했다.
그러나 그 기적도 끝이 있는 모양이었다.
츠팡!
후량의 거센 공격에 맞섰던 고칠의 도가 허공으로 튀어올랐다.
도가 벗어나며 드러난 고칠의 가슴으로 후량의 주먹이 지체 없이 들이닥쳤다.
쾅!
울컥!
폭음과 함께 피를 게워낸 고칠이 일곱 걸음이나 밀려났다. 그렇게 밀려난 고칠을 따라 후량이 달려 들어왔다.
텅-
고칠을 끝장낼 심사로 허공을 가로질러 날아들던 후량의 주먹이 공중에서 정지했다.
물론 자의는 아니다. 주먹의 앞을 막아선 검집 때문이었으니까.
검집을 뻗어낸 이를 일별한 후량이 천천히 한 걸음 물러났다.
“이제부턴 네가 나설 생각인가?”
후량의 물음에 고덕이 피식 웃었다.
“까불지 말고 가라.”
“뭐?”
“가라 했다.”
이제 약관이다. 반로환동이 아닌 다음에야 후량 자신 앞에서 저리 입을 놀릴 인사는 없다.
하지만 전설에나 등장하는 반로환동이 눈앞에 있을 리도 없으니, 겁을 상실한 놈이거나 알량한 뒷배를 믿고 설치는 철부지일 것이다.
생각이 그에 이르자 후량은 두말없이 주먹을 내질렀다. 그런 놈과는 말조차 섞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후량 일생일대의 실수가 되었다.
퍽!
별이 튀고 눈앞이 아득해지며 세상이 노랗게 변했다.
언제 어떻게 걷어낸 것인지 모를 주먹은 하늘을 향해 있고, 중앙을 시원하게 관통한 검집이 이마를 통타한 까닭이었다.
“이, 이 자식이!”
분기가 끓어오른 후량이 거칠게 달려들었다.
쿡-
“컥! 커헉!”
검집이 가까운 데 놓여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잘못이었다. 이마에서 목으로 내려온 검집에 스스로 달려든 꼴이 되었다.
상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밀어닥친 극심한 고통에 후량은 목을 부여잡고 발을 동동거렸다.
고통이 가라앉자 살기가 무섭게 일어섰다.
“이 자식! 죽여 버린다!”
우우우웅-!
벌 떼 우는 소리가 후량의 주먹에서 울려 왔다.
그리고 주변의 기들과 충돌을 일으켜 공명을 불러낼 정도로 강력한 권강이 일어섰다.
부우우웅!
이전과 확연히 다른 소음이 공간을 가르는 후량의 주먹을 따랐다.
바람이 찢기며 비명을 질러대는 소음 속으로 고덕의 검집이 움직였다.
툭- 빡-
“윽!”
결과는 달라진 것이 없다.
권강이 시퍼렇게 번뜩이는 주먹은 이번에도 하늘을 가리켰다. 그리고 그 사이를 뚫고 들어온 검집은 어김없이 이마를 강타했다.
다시금 번쩍이는 별들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어어!”
다리가 풀려 주저앉은 후량은 자신을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는 고덕과 눈을 마주쳤다.
그제야 볼 수 있었다. 깊고 깊어 끝이 없어 보이는 무저갱을 품은 눈을…….
“누, 누구십니까?”
절로 공대가 나오는 것을 후량은 인식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