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50장(5권) (51/129)

제50장. 이색(異色)-뒤늦게 찾다

밤늦은 시간, 이유 없이 답답한 마음에 방을 벗어난 고덕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차가운 정적이 도는 연무장은 쓸쓸했다.

마치 비워진 자신의 마음같이 허전한 연무장을 둘러보던 고덕의 시선이 연무장 구석에 머물렀다.

작은 움직임.

이목을 집중하자 연무 중인지 도를 휘두르고 있는 고칠의 모습이 보였다.

거칠고 과격한 움직임. 그가 배운 철혈도법이 패도식인 것을 감안하면 꽤나 호방한 움직임이라 할 법했지만, 고칠의 움직임을 바라보는 고덕의 눈매는 은근히 찌푸려졌다.

사람이 도를 휘두르는 게 아니라 도가 사람을 휘두르고 있는 모양 때문이었다.

그대로 둘까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적어도 식구라 묶인 정 때문인 듯싶었다.

천천히 다가서는 고덕을 알아본 고칠이 도를 갈무리하고 고개를 숙였다.

“숙부님 나오셨습니까?”

“그래. 시간이 늦었는데… 어찌 마음이 심란했던 모양이구나?”

“그저… 몸이 무거운 듯해서 나와봤습니다.”

겸연쩍어하는 고칠의 답에 고덕이 되물었다.

“몸이 무겁다?”

“예. 그것이… 요 근래 이상하게 몸이 무거워서요.”

“하긴 그 상태로 이상함을 못 느꼈다면 그것이 더 우스운 일이겠지.”

“그 상태… 혹, 제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것입니까?”

놀란 표정으로 물어오는 고칠을 고덕은 담담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간 많은 발전이 있었구나.”

“예?”

물음에 대한 답은 없고, 뜬금없이 발전했다는 말을 들은 탓인지 고칠은 감을 잡지 못한 표정이었다. 그런 고칠에게 고덕이 말을 이었다.

“무공을 익힌 사람들에겐 몇 번의 고비가 찾아오지. 그 고비를 넘기느냐, 못 넘기느냐에 따라 차이도 많이 발생하고.”

“그 말씀은……?”

고덕의 말에서 무언가를 잡아낸 고칠의 물음이 조금은 흥분되어 보였다.

“그래. 네게 그때가 온 듯싶다.”

“저, 정말입니까?”

“그리 흥분할 건 없다. 그 고비를 넘기지 못할 수도 있음이니.”

“그, 그야…….”

고덕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고칠은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런 고칠에게 고덕이 설명을 이었다.

“네게 다가온 고비는 무리(武理)의 고비다.”

“무리의 고비요?”

“그래. 네가 배운 무공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에 대한 시험인 셈이지.”

“시… 험이요?”

“우습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배운 무공이 너를 시험하는 것이야.”

“제가 배운 무공이 저를 시험하는 것이라고요?”

고칠은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에 고덕의 말이 이어졌다.

“무공이 주인에게 자격이 있는지 묻고 있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주인의 자격… 이요?”

“생각보다 까다로울 것이다. 어떤 이는 평생을 가도 그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기도 하니까.”

“길… 은 없는 겁니까?”

고칠의 물음에 고덕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지어졌다.

“세상에 길이 없는 일은 없다.”

“하오면……?”

기대감이 가득한 고칠의 물음에 고덕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도에 휘둘리지 말거라.”

“예?”

반문하는 고칠의 표정에는 ‘나 이해 못했어요.’라는 의미가 가득했다.

원래의 자신이라면 지금의 말을 못 알아들었다면 신경을 껐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그럴 수 없었다. 지금 눈앞에 멍청한 표정으로 서 있는 녀석은 자신과 식구란 이름으로 묶인 인연인 탓이었다.

결국 작게 한숨을 내쉰 고덕이 설명을 이었다.

“무공을 배우면서 많이 들어본 말이 있을 게다. 병기에 휘둘리지 마라. 병기에 휘둘리는 순간 병기에 제압되어 아무것도 보지 못할 것인저…….”

고덕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고칠이 물었다.

“그 말은 들어보았습니다. 하오나, 그것은 무기가 주는 힘에 취해 사람의 근본을 버리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까?”

“그 뜻도 들었으나 다른 뜻도 가지고 있는 말이다.”

“다른 뜻이라면 무슨……?”

다 차려진 밥상에서 밥마저 떠먹여 달라는 조카를 지그시 바라보던 고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을 이었다.

“네 녀석은 아무리 봐도 무재론 보이지 않는다만, 어찌하다 이 길로 들어섰는지 모르겠구나.”

고덕의 평가에 뒷머리를 긁적거린 고칠이 겸연쩍은 음성으로 답했다.

“처남도 그리 말하더군요. 하지만 저는 도를 휘두를 때가 좋았습니다.”

처남… 중상을 입어 재활 훈련엔 참석조차 못했던 철추도 강태명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있지. 병기의 향기에 취하는……. 하나, 그럴수록 조심해야 하는 것이 병기란 놈이다. 칼이란 자고로 요부보다 더한 요물이니…….”

“처남도 그리 말하더군요.”

그런 말을 할 줄 알았다면 강태명도 생각보다 기본이 탄탄한 무인이란 의미였다.

“다행히 어설픈 가르침을 받았던 건 아닌 모양이로구나.”

고덕의 칭찬에 고칠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그리 웃을 거 없다. 너에 대한 칭찬이 아니라 널 가르친 사돈에 대한 칭찬이니.”

고덕의 말에 고칠의 입가에 어렸던 미소는 소리 없이 사라졌다.

그래도 표정에 노여움은 없다.

칼밥을 먹고, 칼날 위에서 살아온 시간이 적지 않은 녀석이 그래도 성품은 제대로 지킨 모양이었다.

그것이 마음에 들었던 고덕이 한마디를 더했다.

“습관을 버려라. 옛것이 새로운 것이 되는 날, 네게 더 넓은 세상이 손짓할 것이다.”

그 말을 던져두고 돌아가는 고덕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고칠은 한참 동안 고심하는 모양이더니, 다시 도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마음이 변하니 모든 게 변했다.

이십 년 넘게 몸에 익었던 철혈도법을 새로 바라보자 그 안에 든 투로들이 마치 처음 본 여인네처럼 낯설었다. 그 낯설음이 고칠의 도를 새로운 길로 이끌었다.

주변으로 낮은 칼 울림이 울렸지만, 도를 휘두르는 데 빠진 고칠은 그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오로지 멀어져 가던 고덕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깃들었을 뿐이었다.

“무재와는 거리가 멀어도 운은 좋은 녀석이로군.”

하늘을 놀랜다는 무재들일지라도 진체를 알려 줬다고 바로 따라오는 이들은 드물다.

하지만 둔재라 말해도 박하지 않을 고칠이 단 몇 수만에 따라잡았다.

정말로 운이라 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 *

날이 밝기 무섭게 방문을 열어젖힌 고덕의 시선이 연무장으로 향했다.

밤새 한 가닥 기세가 간질거리며 그의 감각을 건드린 탓이다.

그 기세의 주인이 누구인지 짐작한 고덕은 천천히 발길을 옮겼다.

고덕의 시선에 들어온 이는 예상대로 고칠이었다.

이제 서른아홉, 낼모레면 불혹인 조카는 밤을 새워 칼을 휘두르면서도 뭐가 좋은지 입가에 미소가 가득했다.

“불혹(不惑)도 못 미쳐 지천명(知天命)이라니… 축하해야 하나, 아니면 이제 그곳이냐 퉁을 줘야 하나 모르겠군.”

고덕의 중얼거림 끝에 매달린 미소가 그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었다.

한참 끝에 도를 갈무리하는 고칠에게 고덕이 다가섰다.

“운이 좋았다.”

그 말에 한껏 미소를 그린 고칠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고덕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자신의 몸이 먼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숙부님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무엇이 길을 열어준 것인지 정확히 아는 것, 그것도 좋은 일이었다.

고덕의 입가에 그려진 미소가 더 짙어졌다.

“이제 천명을 알았으니 이순으로 나아가야 할 게다.”

“천명과 이순… 꼭 유가의 가르침 같습니다.”

고칠의 물음에 고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를 것도 없다. 거창히 노화순청이라 입에 올리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

노화순청(爐火純靑). 절정을 가르는 기준이 되는 말이다.

말을 그대로 옮긴다면 화로의 불이 파랗게 변했다는 것이지만, 그 말이 품은 뜻은 지극함이 다해 모든 것이 완성되었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무공이 극의에 이르렀다는 의미였다.

여기서 발전하면 초절정이고, 그것을 뛰어넘어 흔히 등봉조극(登峯造極)에 이르면 초극이라 불리는 것이다.

“그래도 전 노화순청이 더 좋습니다.”

웃음기 가득한 고칠의 말에 고덕이 피식 웃었다.

“좋으면 그리 쓰면 될 일. 하루 동안 무리하게 움직이지 마라.”

“예?”

“네게 일어난 변화를 몸이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할 게다.”

“아! 예. 알겠습니다, 숙부님.”

그런 말은 또 잘 알아듣는다고 생각한 고덕이 손을 내젓자,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보인 고칠이 한껏 상기된 표정으로 숙소로 돌아갔다.

마음 같아선 한바탕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었을 것을 참고 가는 고칠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고덕은 다시 한 번 피식 웃어 보였다.

그렇게 돌리는 시선 속으로 걸음을 옮기는 예자문의 모습이 보였다.

헝클어진 머리와 의관. 아마 밤새 술을 마신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예자문의 행태를 꼬집을 생각은 없었다. 동맹과의 유대도 중요한 것이기에…….

한데, 그렇게 빗겨 갈 것 같던 예자문이 불현듯 발길을 돌려 연무장으로 다가왔다.

“일어나셨습니까?”

예자문의 인사에 고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제 오시는 길인 모양입니다.”

건일검문에 들어서며 바뀐 말투다. 훈련이 끝났다는 암묵적인 의미가 서린 행동이었다.

“말씀을 편히 해주십시오.”

“조카 부자를 맡겨 둔 사람입니다. 그럴 수야 없겠지요.”

사실 그런 것은 상관없다. 필요하다면 하대가 아니라 욕도 서슴없이 해댈 수 있으니까.

하지만 형 내외가 깍듯이 모시는 이에게 동생인 자신이 하대를 하는 웃긴 모습이 싫었을 뿐이다.

“하나, 지난 시간은…….”

“그것은 훈련이란 명분이 있었으니까요.”

틀린 말은 아니다. 그 핑계를 대고 예의를 차려야 하는 거추장스러움을 피한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고덕의 딱 자른 듯한 대꾸에 예자문은 고개를 숙여 보였을 따름이다. 불필요한 일로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할 마음 따윈 조금도 없었기 때문이다.

“정히 그러시다면…….”

“좋은 대화를 나눈 겁니까?”

지난밤 자신이 누구의 청으로 움직였는지 알고 있는 고덕의 물음이었기에 예자문은 솔직하게 답했다.

“서로의 마음을 열어본 시간이었습니다.”

“마음을 열어보았다라……. 하면, 이제 구렁텅이에 빠진 셈이군요.”

“구렁텅이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의 예자문에게 고덕은 담담한 눈빛을 던졌다.

“마음을 열면 정이 생기지요. 대단히 무서운 놈이랍니다.”

고덕의 말에 비로소 그 뜻을 알아차린 예자문이 미소를 지었다.

“그렇긴 하지요. 하나, 그렇기에 또 가치가 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환하게 미소 짓는 예자문을 바라보며 고덕은 생각했다.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 치러야 하는 희생을 예자문이 정말로 알고나 있긴 한지에 대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 생각을 말로 내뱉진 않았다. 굳이 흥을 깨고 싶지 않았던 탓이다.

“그렇군요. 하면, 전 이만…….”

그리 갑작스럽게 몸을 돌리는 고덕을 바라보는 예자문은 혹시 자신이 말실수를 한 것이 있나 골똘히 생각해봐야만 했다.

* * *

모든 것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고 했던가?

고칠에게 시간이 필요하던 그날, 아직은 여유가 있다고 예상되던 회천문의 공격이 벌어졌다.

쾅!

문이 부서지고, 수문 무사 서넛이 피떡이 되어 튕겨 들어왔다.

무사의 수도, 전력도 높은 회천문은 정문을 열고 들어서는 정정당당한 대결보다는 결과가 확실할 습격을 택했다.

“모두 죽여라!”

담을 넘어든 회천문주 등악보의 외침에 회색 무복을 차려입은 회천문 무사들이 무차별적으로 칼을 휘둘렀다.

“으악!”

“악!”

대체로 평시에 집 안을 바삐 움직이는 이들은 일꾼들이나 하녀들이다.

가진 것이라곤 몸이 전부인 그들이 힘없이 피를 뿌리며 쓰러져 갔다.

그제야 이상을 눈치챈 건일검문의 무사들이 연무장에서, 또는 건물 안에서 쏟아져 나왔다.

‘건일(乾日)’ 두 글자가 새겨진 두건을 두른 건일검문의 무사들은 체계적인 지휘나 집단적인 진을 구성하지 못한 채 각자의 싸움에 내던져졌다.

방어자는 하나인데 공격자는 두셋이다.

원래부터 수적 우위에 있던 회천문에게 습격이란 방법은 수적 우세를 극대화시키는 이점을 안겨 주었다.

사방에서 서넛의 회천문도에게 둘러싸인 채 고전하던 건일검문의 무사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이대로라면 우리가 나설 이유도 없겠군요.”

회천문의 요청으로 제자와 함께 일부러 발걸음을 했던 형산파의 사진하가 사방에서 피를 뿌리며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지는 건일검문의 무사들을 무심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말에 곁에 있던 황보평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건 거의 학살이군요.”

호방함이 지나쳐 거칠다는 평가까지 받는 황보세가의 사람 아니랄까 봐 싸움이 있다는 말에 이 자리까지 따라온 인사였다.

하지만 백도 팔대세가인 황보세가의 장로라는 신분 때문인지, 아니면 자부심 때문인지 습격이란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던 것이다.

“그래도 피가 덜 흐를 것이니 그리 이해합시다.”

사진하의 말에 황보평의 고개가 미미하게 끄덕여졌다.

그런 둘의 눈에 비치는 건일검문의 피는 도태되어야 하는 약자의 피였을 뿐이다.

뼛속까지 강호인들인 그들에게 약자의 피는 값어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속절없이 당하던 건일검문의 움직임에 변화가 생겼다. 내원으로부터 쏟아져 나온 이들의 합류로 반격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황보평의 표정에 이채가 스쳤다.

“저자는……?”

“누구 아는 자가 있습니까?”

사진하의 물음에 황보평의 손이 격전지의 한 곳을 가리켰다.

“예자문이란 자입니다.”

황보평의 손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던 사진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자문이요?”

“들어보셨을 겁니다. 한화도라고…….”

“아! 한도회의!”

“맞습니다. 최근에 몰락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만, 예서 저자를 보는군요.”

황보평의 말에 관심을 기울였던 사진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문이란 것이 믿을 게 없다지만 저자의 경우는 심하군요.”

“이전의 경지라면 분명 소문대로였습니다. 아니, 어쩌면 소문이 모자랄 지경이었지요.”

황보평의 말에 예자문이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직접 겪어보셨던 모양입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복건성 최강자란 평가를 받던 이와의 비무였으니까요.”

“한데, 오늘은 어찌……?”

“한도회가 몰락하는 싸움에서 큰 부상을 입었다고 들었습니다.”

“하면, 그 후유증이란 말입니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군요. 사자가 고양이가 되었으니…….”

사진하는 황보평의 입가에 어리는 씁쓸한 미소를 보며 절정기의 예자문을 가늠해보았다.

황보세가에선 가주인 황보정을 제외하고는 가장 강력한 고수로 통하는 황보평에게서 호평을 받는 자다. 아무래도 자신의 아래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이 은근히 질시를 끌어냈다.

그 질시가 걸음을 옮기도록 만들었다.

느닷없이 전역으로 뛰어든 사진하의 걸음이 향한 곳을 바라보던 황보평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오악검파의 하나인 형산파가 강호에서 좋은 평을 듣지 못하는 것은 바로 저런 편협함 때문이었다.

그것을 느끼자 괜한 발걸음을 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황보평이었다.

사진하 정도의 고수가 다가서는 것을 모를 예자문이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을 향해 직선으로 다가서는 기세에도 불구하고 예자문은 검을 돌려 대비를 할 수 없었다.

자신의 검을 붙들고 늘어지는 회천문 무사들의 공격이 매서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위험에 노출되어 있던 예자문을 구한 것은 생각지도 않게 근처에 있던 고칠이었다.

상대의 검을 튕겨 올리며 예자문의 측면을 막아선 고칠의 출현에 사진하는 이채를 머금었다. 자신의 검을 막아선 힘이 결코 작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주 작은 분노와 그보다 작은 관심은 다시금 들이닥치는 검에 가볍지 않은 무게를 실었다.

츠깡!

검은 호선을 그리며 튕겨 올랐다. 그렇게 열려진 공간으로 널찍한 도가 사나운 기세로 들이닥쳤다.

하늘로 밀려난 검을 끌어당겨 코앞까지 밀어닥친 도를 막아서는 사진하의 눈길에 사나운 청광이 번뜩였다.

“우연이 아니란 말이로군. 그렇다면 대우를 해줘야겠지.”

차가운 음성만큼이나 싸늘한 검광이 번뜩이는 순간, 사진하의 검은 공간을 통째로 가르며 고칠에게 쏘아졌다.

생각보다 빠른 상대의 검속에 당황할 법도 하건만, 고칠의 대응은 칭찬을 들을 만큼 차분했다.

아지랑이처럼 일어서는 도기가 사방을 휘도는 도신과 함께 전방을 막아섰다.

그가가각!

사진하의 검이 고칠이 펼친 검기의 막에 부딪쳐 맷돌 갈리는 소음이 튀었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물려지는 검에 붙은 불만만큼 사진하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물린 검을 바로잡고 기세를 일으키는 사진하의 검미가 일그러지고, 주변으로 강력한 기파가 퍼졌다.

검에 어린 기품이 푸른 이슬같이 맑다 해서 청로검이란 무명까지 얻은 사진하다.

그 특유의 차갑고 서늘한 기운이 검신을 온통 뒤덮었다.

그렇게 자신을 감춘 사진하의 검이 주변의 모든 것을 깨끗하게 끊어내며 들어왔다.

밤을 지새우며 갓 얻은 심득으로 흉내 낸 검막은 너무나 간단하게 찢겨 나갔다.

스걱!

황급히 내기를 잔뜩 밀어 넣은 도를 들어 사선으로 날아드는 검을 막았지만, 섬뜩한 소음의 뒤로 남겨진 것은 중간이 깨끗하게 잘려 나간 반 토막짜리 도뿐이었다.

순간, 고칠의 신형이 황급히 바닥을 굴렀다.

무인이라면 죽기보다 싫다는 뇌려타곤이 펼쳐졌지만, 고칠의 어깨 어림에서 피가 뿜어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더구나 어깨에 입은 상처가 문제가 아니었다.

뱀의 혀처럼 따라붙은 상대의 검은 여전히 뒤를 쫓았던 것이다.

다급히 몇 바퀴를 더 굴렀건만, 뒤를 쫓는 검은 여전히 지척이었다.

하지만 고칠은 더 이상 구르지도 못하게 되었다.

주변으로 가득 찬 시신들과 장애물들이 고칠을 막아섰기 때문이다.

주변이 막히자 고칠의 얼굴에 절망이 어렸다.

지척으로 다가선 검이 그렇게 시커멓게 죽은 고칠의 목을 향해 폭사되는 순간, 뒤편에서 느닷없이 도 하나가 솟아올랐다.

까강-!

강렬한 충돌음과 함께 검이 튕겨 나가자, 급히 일어나 뒤로 물러서는 고칠의 곁으로 진명이 붙어 섰다.

“고맙구나.”

고칠의 음성에 진명이 엷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나타날 때보다 훨씬 빨리 사라졌다.

진심으로 분노한 사진하의 검격이 파도처럼 밀어닥쳤기 때문이다.

고칠의 도가 사방으로 분주히 움직였고, 중간 중간 드러나는 빈틈을 진명이 악착같이 막았다.

그 사이를 스치고 지나간 사진하의 검에 고칠의 몸 곳곳에서 피가 흘렀고, 진명도 적지 않은 상처를 입었다.

사진하의 일방적인 공격은 여전했지만, 방어에 나서는 두 사람의 체력은 급격히 떨어졌다.

내력의 차이를 오로지 신체의 힘으로 막아서야 했던 탓이다.

결국 힘이 빠진 진명의 도가 강하게 내리꽂히는 사진하의 검격에 실린 힘을 흩어내지 못했다.

츠투캉!

진명의 도를 날려 버린 사진하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어렸다.

그리고 당겨졌다 쏘아지는 검은 그 미소만큼 얇게 뉘어졌다.

필사의 각오로 진명의 앞을 가로막고 나서는 고칠의 사각을 파고들기 위해서였다.

정확히 원하는 사각으로 파고든 사진하의 검은 고칠의 옆구리를 얇게 저미고 빠져나가 진명의 목으로 폭사되었다.

츠파!

무언가가 번쩍인 순간, 진명의 목으로 날아들던 사진하의 검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뭐가 어찌 된 것인지 몰라 당황한 사진하의 시선이 검병만 남고 깨끗하게 잘려 나간 자신의 검에 머물렀다.

“이, 이게 어찌…….”

“돌아가!”

갑작스러운 음성으로 들려진 시선에 약관의 청년이 삐딱하게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당황스럽기도 하고 놀라웠던 사진하가 뭐라 답하기 전에, 그의 위급함을 보고 한달음에 달려온 제자들이 고덕을 향해 검을 들었다.

“놈! 감히 누구에게 위해를……!”

제자들의 호통에 고덕의 눈 속에서 천천히 고개를 드는 사나운 야수의 흉성을 발견한 사진하가 황급히 제자들을 젖히며 앞으로 나섰다.

“뉘, 뉘시오?”

다급한 마음에 뱉어낸 말에 고덕의 입가는 비틀린 웃음을 그렸다.

“세 번은 없다. 돌아가!”

그저 나지막한 음성이었지만, 심장을 후벼 파는 것 같은 두려움에 사진하는 다급히 제자들을 거둬 뒤로 물러났다.

사진하가 물러나자 고덕의 시선이 고칠 부자에게 향했다.

“괜찮은 게냐?”

“수, 숙부님…….”

피가 흥건한 손으로 뒷머리를 긁적이는 고칠의 모습에 혀를 찬 고덕이 핀잔을 주었다.

“지혈이라도 해. 피 다 빠져나가지 싶다.”

고덕의 퉁명에 고칠과 진명은 서둘러 자신들의 상처를 지혈했다.

너무 급박하게 밀리다 보니 상처를 제때 지혈하지 못했던 것이다.

고칠 부자가 자신들의 몸을 추스르는 동안 주변을 둘러보던 고덕은 두 사람의 지혈이 끝나자 발길을 옮겼다.

“예서 움직이지 마라.”

그 말만 남긴 고덕이 전역으로 발을 들여놓자, 사진하와의 충돌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고 있던 황보평이 그 앞을 가로막았다.

“뭐지?”

불쾌한 표정이 역력한 고덕의 물음에 황보평이 미소를 지었다.

“싸움터에 와서 어찌 손 한번 뻗어보지 못하고 물러가겠소.”

상대가 약관을 갓 넘긴 청년의 모습이라 하나 황보평은 그 겉모습을 그대로 믿지 않았다.

강호의 유명한 금언 중 하나가 바로 나이 어린 사람과 노인을 주의하라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상대의 호기가 가상할 법도 하건만 고덕의 표정에는 짜증뿐이었다.

“빌어먹을 겉치레.”

쾅-!

주먹을 뻗어보기는커녕 자세조차 잡아보지 못했다.

검집째 뽑아 휘두른 덕에 목은 온전했지만, 강력한 한 방을 그대로 허락한 황보평은 정신을 잃고 무너져 버렸다.

신경조차 쓰고 싶지 않다는 듯이 그렇게 널브러진 황보평을 무참히 밟고 지나간 고덕의 발걸음은 여전히 직선을 그렸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사진하에 이어 황보평까지 끼어든 싸움터는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두 사람을 간단히 격패시킨 강자의 출현이 주는 충격 탓이었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고덕에게 쏠렸고, 그것은 회천문주인 등악보도 다르지 않았다.

그런 요주의 인물이 자신을 향해 직선으로 다가오자 등악보는 주변의 문도들을 불러 모았다.

인의 장막이 펼쳐졌고, 창칼이 뻗어 나왔다.

스걱!

광망 하나가 길게 휘둘린 속에서 터져 나온 소음은 너무나 섬뜩했다.

그리고 그 소음 뒤에 늘어진 목 없는 시신들이 그려 내는 참경은 심장이 얼어붙을 지경이었다.

단 한 번의 칼질로 인의 장막을 목 없는 시신 무더기로 만들어버린 고덕의 발걸음은 멈추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이어진 직선적인 걸음의 끝에 등악보가 걸쳐졌다.

“컥-!”

너무 놀랐던 탓일까? 등악보는 단 한 차례의 저항도 없이 목울대를 잡혔다.

“네가 우두머리?”

천천히 훑고 지나가는 고덕의 시선을 따라 싸늘한 감촉이 목 언저리를 스쳐 지나가는 기겁할 경험을 한 등악보의 입은 곧바로 움직였다.

“예, 예… 제가 회천문주입니다.”

“습격은 좋았다.”

생각지 못한 말에 등악보의 눈은 복잡한 심경을 담아 크게 뜨였다.

“예?”

“불필요한 요소는 제거하는 것이 옳다. 그런 점에서 습격은 좋은 패였다.”

무어라 답해야 할지 몰라 당혹해하는 등악보의 모습 뒤로 격앙된 음성이 튀어나왔다.

“그것은 인정할 수 없습니다.”

음성을 따라 시선을 돌린 고덕의 눈에 방금 전의 말을 절대로 수긍할 수 없다는 표정인 표고성이 보였다.

하지만 고덕은 그것을 깨끗하게 무시했다.

“가끔 저런 이들이 있다만, 그건 패자의 변명일 뿐이다.”

아픈 곳을 찌르는 고덕의 음성에 표고성은 불만스러운 표정만 지었을 뿐, 다른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 그렇습니까?”

마지못한 등악보의 답에 고개를 끄덕인 고덕이 말을 이었다.

“그렇기에 내가 끼어든 것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 그야…….”

누군지도 모르는 이다.

설사 구경하다가 흥이 돋아 끼어들었다 한들 항의조차 못할 상황이었던 것이다.

상대의 수긍에 고덕이 물었다.

“이번 싸움은……?”

“저희가 패… 했습니다.”

등악보의 말에 만족한 표정을 지은 고덕이 목울대를 놓았다.

“돌아가라. 너희의 시체로 산을 쌓은들 치우는 것만 귀찮다.”

광오한 말이었지만, 등악보는 고덕의 말에 왠지 모르게 발바닥이 쩌르르 울리는 느낌을 받았다.

불길한 징조. 상대의 신위에 완전히 제압된 것을 뜻함이었다.

입을 굳게 다문 등악보는 고덕에게 포권을 취해 보이고는 곧바로 문도들과 방수들을 추슬러 건일검문을 벗어났다.

표고성은 그렇게 물러가는 회천문도들을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하지만 갑자기 끼어든 고덕이 아니었다면 오늘 멸문을 면치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복건의 모든 눈을 잡아끌었던 건일검문과 회천문의 싸움은 그렇게 건일검문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승리한 건일검문은 그 흔한 승리의 함성 한번 질러보지 못했다.

죽거나 상한 이들의 수가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멸문 직전에 몰렸다가 외부의 도움으로 간신히 구사일생했다는 자괴감은 건일검문을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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