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49장 (50/129)

제49장. 자립(自立)-일어서다

잠시 몇 개의 전각을 지나 내전으로 든 그들은 현판에 건관(乾館)이라 씌어진 전각 앞에 멈추어 섰다.

전각 앞에는 수신 위사들로 보이는 무사들이 서 있었으나 능파는 그들과 상관없이 전각 안에 대고 말을 했다.

“남평의 한도회에서 오신 예 회주님을 뫼시었습니다.”

“안으로 모시게.”

자신의 전갈에 전각 안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울려 나오자 능파가 손을 뻗어 전각의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드시지요.”

작지 않은 전각 안에는 건일검문의 문주로 보이는 오십대 초반의 사내와 세 명의 무인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예자문이 들어서자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은 예전의 내력을 모두 잃고 문파도 몰락했다고는 하나, 한땐 자신들이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던 이의 방문이었기 때문이다.

“어서 오십시오. 건일검문을 맡고 있는 표고성입니다.”

힘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강호에선 사라진 옛 영광은 과거의 것일 뿐이다.

하지만 표고성의 예우는 매우 정중했다. 그런 그에게 예자문도 마주 포권을 했다.

“한도회의 예자문입니다. 반갑습니다.”

예자문의 인사가 끝나자 표고성이 주변에 서 있는 사람들을 소개했다.

“저희 문파의 기둥들입니다. 강호의 동도들은 능파와 함께 건일오검수라 하지요.”

표고성의 말을 이어 한 사람씩 돌아가며 인사말을 전했다.

“지다검(智多劍) 요문성입니다.”

“절파검(折破劍) 나림입니다.”

“투검(鬪劍) 한백입니다.”

세 사람의 인사가 끝나자 예자문이 그들에게 일일이 포권을 취해 보이며 인사를 건넸다.

“한도회의 예자문입니다.”

서로의 인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표고성이 말을 이었다.

“능파는 이미 아실 테고, 나환검(娜幻劍) 석모강은 지금 외부에 나가 있습니다. 이들 다섯이 저희 문파의 핵심 인물들입니다.”

표고성의 말에 예자문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을 했다.

“모두 헌앙하신 분들입니다. 표 문주님이 덕이 많으신 모양입니다. 경황이라 저 혼자 왔으니, 제 수하들은 나중에 기회가 닿으면 인사를 시키겠습니다.”

“그러시지요.”

과거였다면 한 번만이라도 만나고 싶었던 쟁쟁한 무인들이 여럿 있던 한도회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나락으로 떨어진 이들뿐이다. 그런 이들을 보는 건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그 탓에 그다지 필요 없다는 말을 표고성은 목 안으로 삼켰다.

인사가 얼추 마무리되고 서로 자리에 앉자, 표고성이 천천히 감사의 말을 전했다.

“어려운 시기에 이렇게 달려와주시니 뭐라 감사의 말씀을 전해올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건일검문을 대표해서 예 회주님과 한도회에 감사를 드립니다.”

“아닙니다. 우리가 어려울 때 외면하지 않은 건일검문을 도울 수 있어 기쁩니다. 미력하나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은 먼 길을 오셨으니 피곤하실 터. 편히 쉬시고 본격적인 이야기는 내일 나누시지요.”

표고성의 말에 예자문은 그저 배려려니 생각하고 능파의 안내를 받으며 물러나왔다.

그렇게 예자문을 안내하고 능파가 다시 건관으로 돌아가자, 표고성이 차가운 얼굴로 그를 힐책했다.

“쓸데없는 일을 만들어 지금 같은 시기에 문을 소란스럽게 하는가?”

문주의 힐난에 능파는 별다른 대꾸를 할 수 없었다.

그다지 전력에 도움이 되지도 않는 인원의 합류는 오히려 전력이 약한 건일검문에게 짐이 될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곤혹스러워하는 능파를 바라보던 지다검 요문성이 문주를 달랬다.

“그래도 모두가 외면하는 시기에 돕겠다고 온 성의가 고맙지 않습니까? 능파가 사람들은 제대로 본 모양입니다.”

요문성의 말에 문주인 표고성은 더 이상 능파를 힐책하지는 않았다.

그의 말대로 건일검문의 패배를 확실시하는 강호의 분위기로 그들을 돕고자 하는 곳은 단 한 곳도 없는 실정이었으니까 말이다.

한도회가 아무리 힘이 없어졌다 해도 그런 것을 모르지는 않을 터.

그럼에도 도우러왔다는 것은 신의는 확실하다는 말이었다.

도움이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지만, 고마운 것은 고마운 것이었다.

더 이상 문주가 그에 대해 다른 말이 없자 능파는 건일오검수의 대형 격인 요문성에게 감사의 눈길을 보냈고, 요문성은 장난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일 뿐이었다.

“우선 중단된 이야기부터 마무리를 짓지. 회천문이 도발할 때까지 기다릴지, 아니면 형산파와 응천보의 고수들이 보강되어 전력이 강화되기 이전에 우리가 먼저 치고 들어갈지를 결정해야 할 것이네.”

문주의 말에 모여 있던 네 사람은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먼저 도발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쓰면서 공격을 가해도 건일검문이 회천문을 이길 공산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아니,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물론 회천문에게 상당한 피해는 입힐 수 있겠지만 그게 다일 것이다.

그렇다고 형산파와 응천보의 고수들이 도착하여 증가된 회천문과의 전쟁은 말 그대로 지리멸렬할 게 분명할 터였다.

둘 다 선택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선뜻 문주에게 무엇을 선택하라고 간언하기는 힘들었다.

결정을 해야 할 문주 자신도 섣불리 결정을 못 내리고 있었기에 문에 남아 있는 건일오검수들을 불러 모아 의견을 물은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이래도 어렵고 저래도 어렵습니다. 이왕 그런 상황이라면 마지막 가는 길에 오명까지 쓰고 싶지는 않습니다. 기다리지요.”

의외로 건곤오검수의 막내이며 제일 호전적인 투검 한백이 입을 열어 의견을 내놓자 좌중이 싸늘하게 식었다.

한백은 이미 이번 싸움에서 죽음을 말하고 있었다.

호전적이고 투기가 강한 그다운 말이었지만, 싸우기 전부터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마음에 드는 사람은 없었기에 좌중의 분위기는 좋지 못했다.

하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기에 잠시 후, 문주인 표고성이 피식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투검다운 이야기군. 좋아. 마지막 길인데, 오명은 쓰지 말도록 하자. 다른 의견이 없다면 기다리기로 하지.”

자신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하자 문주가 말을 이었다.

“우리의 각오를 내일 이야기하고, 가능한 한 한도회를 돌려보냈으면 하네. 그래도 의기가 좋은 사람들인데 굳이 저승길에 끌어들일 필요야 있겠는가.”

자신의 앞날도 캄캄하건만, 돕겠다고 온 자들의 미래를 생각해주는 이런 문주가 좋아 곁을 떠나지 않고 최후를 같이하려는 것이란 생각을 능파는 해보았다.

문주의 말에 요문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러는 것이 좋겠군요. 그리고 그에 하나 더, 소공자를 그들과 함께 내보냈으면 합니다. 의기로 보아 그냥은 물러나지 않을 터이니, 그들도 소공자의 안위를 지켜 문의 후계를 잇고자 한다면 반대하지 않고 물러설 것입니다.”

겸사겸사 문주의 대를 잇고자 하는 요문성의 의도를 다른 사람들도 알 수 있었다.

요문성이 거론한 소공자는 나환검 석모강과 몇몇 무사들과 같이 전위로 나가 있는 소문주의 아들이자, 문주인 표고성의 여덟 살배기 손자를 말함이었다.

요문성의 말에 표고성이 고마운 빛이 역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적몰될 무가의 자식은 살아남아도 하루하루가 고통일 터이나, 그래도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손자가 살아 있길 바라는 것은 할아비로서 당연한 욕심이었던 것이다.

손자가 촌무지렁이로 그저 숨만 쉬고 살아도 하늘에 감사할 것 같은 것이 표고성의 마음이었다.

* * *

대접은 소홀하지 않았다.

내력을 잃었다고 소문난 무인들과 몰락한 한도회의 위상으로는 분에 넘칠 정도의 호의를 받았다.

어제저녁과 오늘 아침 음식은 모두 정갈하고 맛있는 것으로 제공되었고, 밤을 보낸 숙소들도 좋은 곳들을 배정받았다.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강호의 생리를 뼈저리게 느꼈던 한도회의 무인들은 건일검문이 얼마나 신경 써서 대접을 하고 있는지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아침 식사를 마친 예자문은 문주가 뵙기를 청한다는 전갈을 받고 조극동과 묵광겸, 그리고 고덕과 함께 건관으로 향했다.

잠시 후 일행이 건관으로 들어서자, 어제보다 두 명의 인원이 늘어난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맞았다.

“편안하게 주무셨습니까?”

“덕분에 편히 쉬었습니다.”

예자문의 답례에 미소를 지어 보인 표고성이 자신의 옆에 서 있던 중년 사내를 인사시켰다.

“제 아들 녀석입니다. 인사드리거라. 어려움에 처한 우리를 돕고자 달려와 주신 한도회의 예 회주이시다.”

어제는 속으로라도 경멸하는 구석이 있었으나, 자신의 손자를 맡아줄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오늘 표고성이 한도회의 사람들을 대하는 것은 진실한 모습이었다.

그것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기감이 발달한 고덕에게 상당한 호의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었다.

“표모인이라 합니다. 도움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예자문이라 합니다.”

둘이 인사를 나누자 구레나룻이 인상적인 장정이 포권을 취했다.

“어제는 문을 나가 있어 뵙지 못했습니다. 나환검 석모강이라 합니다.”

“예자문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어제 못 봤던 사람들과 인사를 다 나누자, 이번엔 예자문이 사람들을 소개했다.

“잠시 회를 돕고 계신 고 대협과 제 수하들입니다.”

“고덕이오.”

예자문의 소개에 고덕이 가볍게 포권을 취해 보이자 그 뒤를 칠파도 묵광겸이 이었다.

“묵광겸입니다.”

건일검문에서는 제일 덩치가 큰 절파검 나림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 보이는 거구에 표고성이 탄성을 터트렸다.

“이 표 모가 평소에 흠모하던 묵 대협을 뵙습니다.”

칠파도라면 복건성을 아우르던 최강의 무인 중 하나다. 그의 기개를 표고성은 평소에 흠모해 왔었다.

“다 사라진 거품 같은 허명입니다.”

자괴감 가득한 묵광겸의 말에도 불구하고 표고성은 알 수 없는 묵직한 기세를 느꼈다.

‘모두가 내력을 잃었다더니, 썩어도 준치란 말인가?’

의아해하는 표고성에게 조극동이 인사를 건네왔다.

“조극동입니다.”

“육웅도?”

“과거의 이름입니다.”

조극동의 겸손에 표고성의 얼굴에 아쉬움이 지나갔다.

이들이 예전만 같았다면 회천문은 아무런 걱정이 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에 조극동을 살피던 표고성의 시선에 이채가 어렸다. 그에게서도 묵광겸처럼 묵직한 기세를 느꼈기 때문이다.

예자문의 소개에 인사를 건네는 한도회 사람들을 바라보는 건일검문 쪽 사람들의 얼굴에 의외라는 표정이 깃들었다.

과거처럼 확연한 기세는 아니지만 분명 적지 않은 내력이 느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탓에 문주와 의형제들에게서 질문이 섞인 눈길을 받은 능파는 당황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도 미처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제는 생각지도 못했던 갑작스러운 방문으로 경황이 없던 터라 제대로 살피지 못해 한도회 무사들의 기세를 읽지 못했던 것이다.

의문을 느낀 능파가 조용히 물었다.

“그간 좋은 일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묵 대협이나 조 대협은 물론이고 예 회주님의 신위도 많이 좋아 보입니다.”

“고 대협의 도움에 약간의 발전이 있었습니다만, 아직 완전치 않습니다.”

예자문의 답에 능파가 마치 자신에게 좋은 일이 생긴 듯 기쁜 표정으로 축하의 말을 건넸다.

“그렇습니까? 모두 예 회주님의 덕망 덕분일 것입니다. 감축드립니다.”

“고맙습니다, 능 대협.”

능파와 예자문이 인사를 주고받는 사이, 묵광겸과 조극동을 조심스럽게 살펴본 지다검 요문성이 나서며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 자신과 건일오검수들을 소개했다.

그들의 인사가 다 마무리되고, 모두가 자리에 앉자 입을 열려는 문주에 앞서 요문성이 말문을 열었다.

“저희는 회천문이 도발해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조금 답답한 처사일지는 모르겠으나, 상대가 도발하기 전까진 기다리는 것이 정도라 생각됩니다. 아마 회천문은 형산파와 응천보의 고수들이 도착한 뒤에야 움직일 것 같습니다. 한도회와 예 회주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젯밤에 논의된 말과는 전혀 다른 말을 하는 요문성을 건일검문의 다른 사람들이 의문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도 잠시, 지혜로운 탓에 군사의 역할을 하고 있는 그에게 별도의 생각이 있을 것이라 믿고 저지하지는 않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를 고덕을 비롯한 한도회의 사람들도 느꼈으나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저희야 도우러 온 입장이니 건일검문의 결정에 따라 미진한 힘을 보태겠습니다.”

예자문의 답에 표고성이 웃는 낯으로 말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예 회주. 그럼 그때까지 내 집이라 생각하시고 편하게 쉬십시오. 필요한 것이나 불편한 점이 있다면 아무에게나 말씀하시면 바로 처리해드리겠습니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그 말에 예자문이 다시 한 번 감사를 전하자 표고성이 여전히 웃는 낯으로 말을 이었다.

“감사야 저희가 드려야 옳은 일이지요. 그럼 장원을 한번 둘러보십시오. 무사들이 몸을 풀려면 연무장도 사용해야 하실 터이니, 둘러보시고 원하시는 곳을 고르셔도 무방합니다. 능파, 자네가 안내를 좀 해드리게.”

표고성의 말에 능파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읍을 해 보였다.

“알겠습니다, 문주님. 자- 가시지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능파의 말에 예자문을 비롯한 일행이 일어서자 건일검문의 사람들도 배웅하기 위해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시 양측이 가볍게 포권을 취해 보이곤 능파의 안내를 받은 한도회의 사람들이 나가자, 표고성이 요문성에게 물었다.

“갑자기 무슨 말이었나?”

“묵 대협과 조 대협, 두 사람의 기세는 절대 저희의 아래가 아닙니다, 문주님.”

그거야 모두가 함께 느낀 바가 있으니 반론이 있을 수 없었다.

“그거야 나도 느꼈네만. 소문엔 그들이 모두 내력을 잃었다고 하지 않았나?”

“그랬죠. 그리고 실제로 그랬을 것이고요.”

“그게 무슨 말인가?”

“그렇지 않았다면 중소 사파들에게 그런 수모들은 당하지 않았을 터이니 말입니다.”

지다검 요문성의 말에 표고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군. 그러면 최근에 호전을 보이고 있는 것이라 생각해야겠군.”

“그렇겠지요. 아마 고 대협이라는 사람이 열쇠인 거 같습니다.”

“고덕이라 했던 사람 말인가?”

“예. 그의 도움을 받아 조금 좋아졌다 했으니까요.”

“하지만 그에게선 아무런 기세도 느껴지지 않던데.”

표고성의 말에 지다검 요문성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마도 의원이 아닐까 싶습니다.”

“의원이라……. 그렇군. 그렇다면 저들의 회복도 이해가 되지.”

“맞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오십 명 정도로 이루어진 한도회의 전력은 어쩌면 우리 건일검문의 것을 상회할 수도 있습니다.”

요문성의 말에 좌중의 얼굴이 단번에 굳었다.

저들이 회복되고 있다면 다른 무사들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쉰 명으로 줄었다고는 해도 최고수들만 남은 셈이다.

예전의 내력을 찾는다면 그 힘은 감히 건일검문이 논할 것이 아니었다.

드디어 요문성이 하고자 하는 말뜻을 알아들은 표고성의 눈이 커졌다.

“그렇다면…….”

“회천문과 한번 붙어볼 만하지요.”

투검 한백의 말에 방 안의 긴장이 잔뜩 당겨졌다.

두 사람의 말을 들은 요문성은 빠르게 달아오르는 좌중을 가라앉혔다.

“우선 한도회의 전력이 정말 우리가 생각하는 정도인지 파악하는 것이 선결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어제의 계획처럼 소공자를 그들에게 맡겨 떠나보낼지, 아니면 힘을 합쳐 회천문과 결사의 항전을 벌일지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요문성의 말에 문주인 표고성은 물론이고 다른 이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여태 아무런 소리도 없던 절파검 나림이 말문을 열었다.

“길게 본 것은 아니지만 한도회의 무사들을 보고 느낀 것인데, 숨기고 염탐하는 것보다는 우리의 입장을 솔직히 말하고 이해를 구하는 것이 좋아 보입니다.”

“저도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들이 힘을 가지고 있든 그렇지 않든 어려운 싸움인 줄 알면서도 달려 와준 그 의기를 보아선 저도 그렇게 하는 것이 도리라 생각합니다. 아버님.”

소문주인 표모인까지 나서자, 표고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예 회주에게 나와 둘이 저녁 식사를 함께하자고 전하게. 내가 허심탄회하게 말을 한번 건네 보겠네.”

“알겠습니다, 문주님.”

표고성의 결정에 요문성이 밝은 음성으로 답했다.

표고성으로부터 저녁 식사에 초대된 예자문은 숙소로 찾아온 무사의 안내를 받으며 건관으로 향했다.

“어서 오십시오, 예 회주님.”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표 문주님.”

두 사람이 인사를 마치고 자리에 앉자, 준비하고 있던 하녀들이 식사가 될 요리들과 청류의 자랑인 삼화주를 내놓았다.

먼저 천천히 신변잡기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던 표고성이 예자문에게 삼화주를 권했다.

그렇게 둘 사이에 두어 순배 술이 오간 후, 표고성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예 회주님, 솔직히 말씀을 드릴 것이 있어 청했습니다.”

“말씀하시지요.”

“실은… 솔직히 어제만 해도 저희는 한도회의 무위를 그다지 신임하지 않았습니다. 해서, 제 손자 녀석을 보호해 이곳에서 벗어나주시길 요청할 생각이었습니다. 저희는 죽음을 각오한 상황이었으니까요. 애꿎은 생명을 덧없이 지게 할 수 없다고 생각했었지요.”

표고성의 말을 예자문은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그런 예자문의 눈을 잠시 바라본 표고성이 말을 이었다.

“한데, 오늘 예 회주님과 함께 본 묵 대협과 조 대협을 보고는 생각을 달리하였답니다.”

“기세를 느끼신 것 때문이겠군요.”

“맞습니다. 저희가 느낀 두 사람의 기세는 저희 건일오검수에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거기에 다른 이들도 이전의 경지를 찾아가고 있다면 충분히 회천문과 결전을 벌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답니다. 해서 어제 결정된 대로 통보치 않고 한도회를 붙잡아두는 잔머리를 쓴 것이지요. 면목이 없습니다.”

“아닙니다. 괘념치 마시고 말씀하십시오.”

예자문의 이해에 표고성이 말을 이었다.

“해서, 저는 예 회주님께 저희의 추태를 정중히 사과를 드리고 협조를 여쭈려 합니다.”

표고성의 물음에 잠시 생각을 가다듬은 예자문이 말문을 열었다.

“솔직한 말씀 감사합니다.”

진정이었다.

원래 도와주러 온 자신들이니 구태여 이런 것을 밝히지 않고 이용해도 될 문제였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전력을 가늠하는 것이야, 어차피 싸움을 앞둔 건일검문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럼에도 미리 밝히고 묻는다는 건 자신들을 진심으로 대하기 위해서라는 결론뿐이 남지 않았다.

어떠한 상황이건 상대가 자신들을 진심으로 대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정말 기분 좋은 일이었다.

예자문은 조용히 비어 있는 표고성의 잔과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곤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원래대로 돌아가지는 못했습니다. 천천히 나아지고는 있으나 그에 미치지는 못했지요.”

예자문의 말에 표고성은 그 뒷말을 기다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예자문이 말을 이었다.

“지금의 경지는 대략 절정의 마지막입니다. 조 전주와 묵 전주도 그렇지요. 나머지 회의 식구들 가운데 절정에 오른 이는 없습니다. 다만 상승의 일류에 오른 이들이 더러 있고, 나머진 다행스럽게 모두 일류를 회복한 상태지요.”

다시 말해, 절정 셋과 상승의 일류가 포함된 일류 고수들만 오십 명이라는 이야기다.

그것은 건일검문이 보유하고 있는 일류 고수의 수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때문에 예자문의 말을 들은 표고성의 눈은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그런 그의 눈을 바라보며 예자문이 다시 말을 이었다.

“저를 돕고 계신 고 대협의 수하가 정보를 다룹니다. 그자의 말에 의하면, 회천문을 돕기 위해 오는 형산파의 무리에 초절정의 고수가 포함되어 있다더군요.”

생각지도 못했던 한도회의 전력으로 간신히 해볼 만한 전력이 갖추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다시 전력의 차가 현격하게 벌어져 버렸다.

더구나 초절정의 고수가 등장한다면 대적마가 없는 이상 필패였다.

그 탓에 표고성의 표정에서 놀람이 사라졌다. 단념을 한 이상 놀랄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최악의 경우 어제 마음먹은 대로 죽기뿐이 더하겠는가 말이다.

표고성의 표정 변화를 유심히 지켜보던 예자문이 눈빛을 빛냈다.

“다시 어제의 마음으로 돌아가신 모양이군요. 하지만 아직 단념하긴 이릅니다. 저희가 죽기 살기로 덤빈다면 가능성이 있습니다.”

자신의 말에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표고성에게 예자문이 말을 이었다.

“고 대협은 저희 한도회 부각주의 숙부가 되십니다.”

“그 젊은 나이에 숙부라고요?”

표고성의 물음에 예자문의 미소가 짙어졌다.

“젊어 보여도 이미 육십을 넘긴 분입니다.”

순간 표고성의 표정이 굳었다.

나이를 그리 먹고도 젊음을 유지하려면 그에 상당한 내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럼.”

“초극의 극의라 하더군요.”

초극도 아니고 초극의 극의다. 그 말은 제하이십사강이 이쪽 편에 선 것과 같았다.

표고성의 표정이 다시금 활력을 머금었다.

그런 표고성을 바라보며 예자문이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가볍게 생각하지도 마셔야 합니다.”

“왜요? 그분이 있는 한 회천문은 아무런 어려움이 안 됩니다.”

“물론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이 나섰을 경우지요.”

예자문의 말에 표고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실은 그분은 이번 일에 나설 생각이 없다고 못을 박으셨습니다.”

예자문의 말에 표고성의 얼굴에서 활기가 바람처럼 빠져나가 버렸다.

그 현란한 변화에 미소를 지어 보인 예자문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나 아까 말씀드린 대로 한도회가 사력을 다하면 그 말이 무용화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알아들을 수 있게 말씀해주실 순 없겠습니까?”

표고성의 말에 예자문이 한자 한자 힘줘서 답했다.

“다시 말씀드리지요. 그분은 우리 한도회 부각주의 숙부입니다. 그리고 그 부각주는 우리와 함께 와 있답니다. 당연히 전투에 나섭니다.”

순간 예자문이 하고자 하는 말을 알아들은 표고성이 무릎을 쳤다.

“위험을 두고 보지 않을 것이다!”

“맞습니다. 조카가 위험에 처하는 순간 그분은 개입합니다. 문제는 그 조카만을 구해 돌아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잔머리로 그분을 끌어들이기보다는 정말 사력을 다해 싸우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그분을 움직이는 것이지요.”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건일검문은 어차피 죽기로 각오했습니다. 진정성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표고성의 다짐에 예자문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도회도 이번 싸움에 정말 목을 걸고 처절하게 임할 것입니다. 아니, 상대의 강함에 의해 분명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회천문과 그를 돕는 이들의 몰락과 건일검문의 건재로 귀결될 것입니다. 믿으십시오.”

“고맙습니다, 예 회주님. 이 은혜, 내 죽어서라도 반드시 갚겠습니다.”

결연한 표고성의 음성에 예자문이 작은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그것은 이미 갚으셨습니다.”

“예?”

무슨 소린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는 표고성에게 예자문이 답했다.

“우리가 어려웠을 때 건일검문은 이미 손을 내밀었으니까요.”

예자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은 포고성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그런 표고성에게 예자문이 말했다.

“우린 형제의 문파 아닙니까! 제가 배운 형제는 궂은일이든 좋은 일이든 함께하는 것이라 배웠습니다. 자, 내일 한번 죽도록 함께 싸워봅시다.”

말과 함께 예자문이 잔을 들어올리자 표고성도 잔을 들어올리며 답했다.

“우리 건일검문의 미래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항상 한도회와 함께할 것입니다.”

“좋습니다. 한도회도 그리할 것입니다. 건배합시다!”

“건배!”

두 사람의 의지가 술잔에 넘치는 술처럼 방 안을 가득 채웠다.

5권에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