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장. 와신상담(臥薪嘗膽)-준비를 갖추다
남평의 외곽 지역에 위치한 소산(燒山) 자락으로 이동 중인 일단의 사람들이 목격된 것은, 한도회가 광한문에게 공격당한 날의 늦은 오후였다.
서너 대의 수레에 태운 부상자들을 고칠에게 맡겨 그의 사가로 보낸 것은 사실 고덕이라는 인물의 개입을 바란 설지평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곧바로 달려올 줄 알았던 고덕은 좀처럼 소식조차 없었다.
그런 와중에 한도회는 심각한 내홍을 겪었다.
회주인 예자문을 비롯한 거의 모든 수뇌부 고수들이 내력을 상실한 채 삼류 무사보다 못한 꼴이 되었다는 소문이 중원 전역으로 퍼져 나간 탓이었다.
소문을 접한 복주상단은 그간의 연합을 끊었고, 그로 인해 수익원이 완전히 사라지자 많은 수의 무사들이 한도회를 떠났다.
대부분은 칼 위에 사는 것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한도회를 꺾고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광한문으로 고개를 숙이고 들어간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 일련의 상황에 예자문을 비롯한 한도회의 수뇌들은 피눈물을 흘렸다.
그뿐이 아니다. 예자문을 비롯한 주요 고수들이 모조리 내력을 상실했다는 소문 때문에 군소 사파들이 끈질기게 한도회를 괴롭혀 왔다.
그들에겐 반신불수가 된 한도회라도 이겼다는 작은 명성이 필요했던 것이다.
때론 죽을힘을 다해 맞서 쫓아도 보내고, 때론 허리를 숙여 안위를 보존하기도 했다.
그런 일이 반복될수록 남아 있는 무사들의 수는 자꾸만 줄어들어갔다.
그런 오욕의 시간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청류에 위치한 건일검문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우리와 연합을 맺겠단 말입니까?”
“예. 애초에 그러려고 파견되었으니까요.”
건일검문에서 왔다면서 자신을 혜린검(慧麟劍) 능파라 소개한 자의 답에 예자문이 수치심에 벌겋게 변한 얼굴로 물었다.
“우리의 사정을 잘 모르시오?”
“출발할 때는 몰랐다가 이곳에 와서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우리와 연합을 맺겠단 말씀이오?”
“그것이 저희 문주님의 명이었으니 저는 그대로 좇을 뿐입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건일검문이 인근의 회천문과 골이 깊어져 전쟁을 앞두고 자신들을 도와줄 만한 강력한 문파를 찾은 것이었다.
그 탓에 복건에서 가장 강력한 세를 자랑하던 한도회를 찾아왔던 것인데, 그사이 그만 일이 터지고 말았던 것이다.
건일검문과 충돌을 일으키고 있는 회천문은 건일검문과 같은 백도였다.
하지만 그 문주인 회천신군(懷天神君) 등악보의 성격이 매우 호전적인 터라 작은 감정싸움도 크게 벌이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그렇게 하는 이유는 상대를 집어삼켜 회천문의 규모를 키우는 데 목적이 있었다.
회천신군으로서는 언젠가 회천문을 한도회를 능가하는 복건성의 패자로 키우겠다는 원대한 포부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첫 번째 목표로 지목한 곳이 바로 청류에 위치한 건일검문이었다.
회천문의 위협에 직면한 건일검문은 자신들의 두 배가 넘는 회천문의 공격에 풍전등화의 위기를 맡고 있었다.
그 탓에 건일검문은 인근의 여러 무문에 도움을 청했지만, 회천문의 방해에 매번 실패만 거둬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마지막 희망이었던 한도회에 자파의 주요 고수인 능파를 보내 도움을 요청하려던 것이었다.
그것이 건일검문에게 남은 유일한 기회이자 희망이었다.
그런 이유로 연합을 모색했던 것인바, 이미 가진 힘이 없음이 여실히 드러난 지금의 한도회는 연합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결국 연합의 사절로 왔던 능파는 그냥 돌아가야 옳았으나, 골수까지 정파였던 능파는 차마 무림의 문파라 부르기 어려울 정도로 추락한 한도회를 외면하고 돌아갈 수가 없었다.
이렇게 불필요한 연합을 맺고 돌아가면 문주에게 호된 꾸중을 들을 것은 명약관화였지만 말이다.
그것은 어려움에 처한 한도회가 건일검문과 연합을 맺게 되면 그나마 어줍지 않은 사파들에게 조금이라도 시달림을 덜 받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야 고마울 뿐이오만…….”
“그럼 연합을 맺는 것에 이의가 없으신 것으로 알겠습니다. 여기, 양 문파가 서로 어려운 때 한 가족처럼 돕겠다는 내용의 협정서입니다. 저희 문주님의 수결은 이미 찍혀 있으니, 내용에 별다른 이의가 없으시다면 이곳에 수결을 놓아주십시오.”
능파가 품에서 조심스럽게 꺼내놓은 두 장의 협정서를 읽어본 예자문은 설지평이 내미는 인주를 묻혀 건일검문 문주의 수결의 옆에 자신의 수결을 찍었다.
“고맙소, 능 대협.”
“서로가 돕고자 하는 것을 어찌 고맙다 하십니까? 받잡기 민망합니다.”
능파의 정중함에 그간의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기 때문인지 눈물까지 나는 예자문이었다.
예자문이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전하려는 찰나, 오막의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궁금함 때문에 능파와 예자문이 오막을 천천히 나섰다.
오막을 나서는 그들의 시선엔 아직 부상이 완쾌되지 않은 한도회의 무사들이 사방에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런 그들의 앞엔 한눈에도 사파의 무사들로 보이는 이들 오십여 명이 늘어서 있었다.
그들을 보자 예자문은 손님 앞에서 당하는 수치에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내력이 이어지지 않는 예자문은 붉어진 얼굴로 이를 악물 뿐이었다.
그런 예자문의 반응에 대충 사태를 파악한 능파가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감히 건일검문의 형제 문파인 한도회에 와서 시비를 거는 그대들은 누구인가?”
몰락한 것으로 소문이 자자한 한도회를 상대로 자신들의 힘을 시험하러 왔던 오주의 태광파 무사들은 갑작스런 말에 놀랐다.
“서, 설마 청류의 그 건일검문을 말하는 거요?”
“그럼 감히 건일검문의 이름을 사용하는 곳이 더 있더란 말인가?”
능파의 호통에 놀란 태광파 문주 북소일은 눈에 띄게 떨며 물었다.
“우, 우리는 한도회가 건일검문과 연관이 있다는 소리를 처음 들었소. 정말 사, 사실이오?”
“그대는 누구인데 감히 건일검문의 행사에 사실 유무를 묻는 것인가?”
사나운 기세를 담아 소리치는 능파의 외침에 놀란 북소일은 흠칫 놀라며 한 걸음 물러섰다.
전형적인 사파의 모습에 능파의 눈살이 더욱 찌푸려졌다.
건일검문이 회천문에겐 작을지 몰라도 태광파에겐 커다란 문파다.
문도 수가 일백 명을 조금 넘는 소문파였지만, 문주인 건검(乾劍) 표고성과 건일오검수라 불리는 상승의 고수들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들 같은 사파의 작은 문파는 그들 건일오검수만 보내와도 순식간에 피에 잠길 정도의 힘을 가진 곳이 바로 건일검문이었다.
하지만 부하들이 다 보고 있는 상황에서 겁을 먹고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난 것을 깨달은 북소일은 최소한 사실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상대가 누군지는 확실히 알아야 부하들에게서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도대체 당신은 누, 누구요?”
제대로 떨어지지도 않는 입을 열어 묻는 북소일의 물음에 능파는 차가운 목소리로 답을 했다.
“강호의 동도들이 혜린검이라는 과분한 칭호를 붙여 준 능파라 한다. 그러는 그대는 누구인가?”
“허억-!”
북소일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혜린검 능파의 경지는 절정. 건일오검수 중에서도 실력이 높기로 유명한 자였다.
때문인지 북소일은 급히 표정을 풀고 헤픈 웃음까지 지어가며 말을 이었다.
“아이고, 능 대협이셨군요. 저는 오주의 태광파를 이끄는 북소일입니다. 그럼 정말 한도회와 건일검문이 형제지간이 된 모양이군요. 저희는 그것도 모르고……. 이만 물러가고자 하니 허락하시겠습니까?”
“모르고 하였다니 더 이상은 따지지 않겠소. 하나, 다시는 한도회에 나대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오. 그땐 태광파와 건일검문이 시시비비를 가려야 할 것이오.”
“알겠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 가자.”
혹시라도 능파의 마음이 바뀔까 저어한 북소일은 휘하의 부하들을 이끌고 황급히 사라졌다.
멀어져 가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능파가 뒤에 서 있던 예자문에게 포권을 취했다.
“한도회의 행사였으나 감히 이 능 모가 나섰으니 예 회주께 사죄를 청합니다.”
능파의 사죄에 예자문이 손사래를 쳤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대협이 계셔서 수치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제가 감사를 드려야겠습니다.”
예자문이 마주 포권하며 감사를 전하자 능파는 더욱 미안해했다.
그 후에 같이 식사라도 하자며 권하는 예자문에게 문파의 사정이 여의치 않다며 능파는 부득불 거절하고 그길로 귀로에 올랐다.
사정이 어려운 한도회가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 무리수를 두지 않게 하려는 순수한 배려에서였다.
능파가 돌아간 이후로 태광파가 소문을 냈기 때문인지 중소 사파들의 도발은 사라졌지만, 한도회 무사들의 치료는 좀처럼 진도가 없었다.
* * *
그렇게 한도회가 소산에 오두막을 짓고 머문 지 한 달 만에 고칠을 앞세운 고덕이 도착했다.
인연이 연결된 이들의 일이라 모른 척할 수 없어 달려온 고덕이었지만, 그렇다고 직접 이 사태에 개입할 생각은 없었다.
예자문과 마주 앉은 고덕은 붕대로 배와 어깨를 감싼 그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단기 과정이오. 내게 고수들을 맡겨 준다면 제대로 닦아주리다.”
고덕의 제안에 예자문은 실망했다. 사실 그가 직접 개입해주길 기대했었기 때문이다.
초극의 극의로 알려진 고덕만 도와준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광한문을 짓이기고 떨어졌던 한도회의 명예를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생각이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예자문에게 고덕이 말했다.
“자신의 힘이 아닌 타인의 힘으로 찾은 한도회의 명예가 과연 오래가리라 생각하시오?”
고덕의 말에 충격을 받은 예자문은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아마도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화두였던 모양이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예자문이 고개를 숙였다.
“저와 한도회의 모든 고수들의 처분을 대협께 맡기겠습니다.”
그의 답이 얼마나 어려운 결정인지 잘 아는 고덕이 담담히 답했다.
“후회하지 않게 만들어주겠소. 대신 쉽지 않은 시간이 될 것이오.”
“지금처럼 이렇게 치욕스러운 숨을 쉬고 있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런 결심이면 되었소.”
그날 오후 고덕은 소흥 왕부로 전갈을 띄웠다.
일정이 늦어져 두 달 정도의 기간이 더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소흥 왕부의 일을 일단 마음에서 놓자, 고덕은 현실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예자문에게 말해 끝까지 남아 있던 고수들을 모조리 집결시킨 고덕이 그들을 훑어보며 말했다.
“육체의 한계를 넘나드는 고단한 일정이 될 것이다. 어쩌면 인명 피해를 감수해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믿고 따라만 준다면 두 달 후엔 달라져 있는 자신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한도회의 고수들은 고덕이 초극의 극의에 이른 고수라는 말에 그에게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그 희망이 음성이 되어 나왔다.
“따르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
확고한 의지가 담긴 눈빛과 결연한 표정들을 확인한 고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두 달 후에 난 너희를 건일검문과 회천문의 싸움에 투입할 것이다.”
갑작스런 고덕의 말에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그는 천천히 마치 한 자 한 자를 씹어뱉듯이 말을 이었다.
“연합이란 그런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연합하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아니, 몰랐다 해도 상관없다. 지금이라도 알았으니까.”
고덕의 말에 예자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전투에 나가라 하심은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 그때까지 몸들이 어찌 회복될지는…….”
모두가 경락이 잘리거나 상해 제대로 내력을 돌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내력만 제대로 돌아간다면 그깟 회천문, 건일검문이 나서지 않아도 자신들만으로 풍비박산을 내줄 수도 있었다.
예자문의 말에 고덕이 말을 이었다.
“그렇기에 훈련 방법은 실전이 될 것이다. 막힌 혈도는 사람의 치유 능력의 극대화로 푼다.”
말투가 달라졌다. 가르친다고 말한 순간 이전의 예우는 사라졌다.
“그, 그것이 말이 됩니까?”
마찬가지다. 예자문은 가르침을 받는다고 말한 순간 자신의 스승으로 고덕을 대했던 것이다.
그런 예자문의 의문에 고덕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직접 경험한 것이다. 믿어도 좋다.”
영약이 있다면 영약으로 다스렸을 것이다. 하지만 영약도 없기도 했지만, 있다고 해도 이 많은 이들을 치료할 만큼 확보하기도 어려웠다.
광한문은 후한을 없애기 위해 한도회 고수들이 재기할 수 없도록 경문만 파괴했던 것이다.
잔혹한 손속이었지만 또한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도 했다.
고덕의 말에 예자문을 비롯한 이들의 얼굴에 반신반의한 표정들이 떠올랐다.
그에 고덕이 말했다.
“아니라면 내 목을 내놓는다.”
그제야 사람들의 얼굴에 확신이 어리기 시작했다.
초극의 극의에 이르렀다는 사람이 할 일 없다고 자신들을 모아놓고 저리 말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믿겠습니다.”
사람들의 답에 고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믿어라. 그리고 매달려라. 두 달간의 훈련이 그대들의 목숨을 구해줄 유일한 기회가 될 것이다.”
그 말을 마치고 돌아서 오막으로 들어가는 고덕을 바라보는 이들의 눈에 결의가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 * *
다음 날부터 시작된 훈련은 상상을 초월했다.
아무리 고덕의 경고로 각별한 각오를 다지고 있던 한도회의 고수들이었지만, 새벽같이 시작된 고덕의 훈련은 그런 그들의 각오를 손쉽게 부숴버렸다.
체력 훈련과 무술 훈련을 개별로 시킬 시간이 없다고 전제한 고덕은 훈련에 참가하는 각자에게 모두 다섯 근(斤, 3킬로그램)에 달하는 모래주머니를 양발과 양팔에 하나씩 매달게 했다.
그 상태에서 소산을 뛰면서 각자가 가지고 있는 무술을 정확한 투로에 따라 펼치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그다지 힘들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체력이 떨어지며 발은 잘 떼어지지도 않았고, 팔은 아래로 처져 도무지 올라가려 하지 않았다.
거기에 각자가 가진 무술의 투로를 정확히 지켜 펼치라는 것은, 처음에 체력이 남아 생생할 때도 다리와 팔에 가해지는 모래주머니의 압박으로 불가능했다.
그렇게 훈련을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하는 그들의 뒤를 몽둥이를 든 고덕이 쫓으며 무작위로 구타해댔다.
그 훈련과 고덕의 구타에는 회주인 예자문조차 제외되지 않았다. 아니, 예자문 스스로 그 훈련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기본은 생명이다. 검을 쓰든 도를 쓰든 적을 베는 무기술은 상하 베기, 좌우 베기, 그리고 중앙 찌르기의 기본기에서 시작된다.”
고덕의 강론에 한도회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경지가 높은 이의 강론은 어디서 돈을 주고도 듣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의 열의 속에 강론이 이어졌다.
“하지만 지금 그대들의 모습을 보면 그런 기본기들이 모두 결여되어 있다. 때문에 매일 저녁 식사 후엔 앞에 열거한 기본기들을 모두 만 번씩 반복하여 연무를 한다. 그리고 잊지 마라. 저녁 운공을 마쳐야만 취침할 수 있다. 물론 취침 때에도 모래주머니는 풀지 않는다. 그리고 기본기 훈련 시에는 숫자를 셀 것이다. 괜한 꾀는 부리지도 마라. 꾀를 부려 수를 줄이는 자가 발견될 시에는 기본기 훈련을 두 배로 늘릴 것이다.”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저녁 식사를 마치자마자 모아놓고 선언한 고덕으로 인해 한도회의 무사들은 근 두 시진을 또다시 헉헉대야만 했다.
이로써 한도회의 무사들은 하루 열두 시진 중 열 시진을 혹사시키는 두 달간의 지옥 훈련에 빠져 허우적대기 시작했다.
너무 무리한 훈련이었기에 부상자와 탈진하는 자가 속출했으나, 그런 그들도 약간의 휴식과 간단한 치료 이후에 바로 훈련에 재투입되어 그날 훈련을 모두 마쳐야만 쉴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었다.
훈련 초기엔 작은 부상이나 탈진의 고통을 호소해 두 시진을 넘게 휴식을 취하는 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이들은 휴식이 끝나자마자 중단되었던 훈련에 재투입되어 남은 모든 일정을 완벽히 소화해내느라 한잠도 못 자고 다음 날의 훈련 일정에 바로 투입되었다.
그것을 본 한도회의 무사들은 그 뒤로 웬만하면 다치거나 탈진하지 않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을 했고, 어쩔 수 없이 부상이나 탈진 상태에 놓여도 가능한 한 최단 시간 안에 훈련에 복귀하려고 애를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몰아붙이길 한 달.
이제 한도회의 무사들은 체력적으로나 기본기적으로나 예전의 기량을 회복해가고 있었다.
그에 고덕의 명으로 모래주머니가 무사들에게서 떼어졌다.
모래주머니의 압박에서 벗어나 빠르게 달리며 휘두르는 무사들의 검과 도에 정확한 투로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 한도회 무사들을 두 패로 나눈 고덕이 말문을 열었다.
“오늘부터는 인원을 지금처럼 홍군과 청군으로 나눈다. 양측은 한 시진 동안 자유롭게 훈련 코스를 돌며 상대를 격파한다.”
고덕이 정한 훈련이었다.
상대의 격파는 심한 부상을 방지하기 위해 비무 수준으로 한정했다.
단, 둘이나 셋이서 한 명을 공격해도 무방하다고 선언했다.
맥없이 당하기 싫으면 혼자서 다니지 마라는 말도 했다. 사람들은 서로 짝을 지었고, 언제나 긴장을 유지했다.
긴장의 시간이 길어지자 혈맥에 탄력이 붙기 시작했다.
혈맥에 탄력이 붙자 굳어졌던 경문이 서서히 풀려 나가고 있었다.
그것을 느낀 한도회의 사람들은 고덕의 훈련을 군말 없이 따랐다.
그들의 혈도가 점차 회복되고 내력이 서서히 돌기 시작하자, 그것을 더욱 부추기기 위해 고덕은 그들과 집단 대련을 했다.
고덕과 그들의 대련은 실전을 방불케 했다.
고수와의 대결은 긴장도를 대폭 상승시킨다. 그만큼 자극받는 혈도와 혈맥의 범위가 넓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은 화살처럼 흘러, 계획된 두 달이란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 * *
훈련이 마무리된 밤에 오막의 앞마당에 모인 한도회 무사들의 기세는 예전보다 상당히 거세져 있었다.
아직 온전한 내력을 되찾은 건 아니었지만 분명 내력이 깨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도 기세는 바짝 날이 선 칼과 같이 곤두서 있었다.
그런 한도회 무사들을 한번 훑어본 고덕이 말문을 열었다.
“그동안 고생이 많았다. 하지만 그만큼 각자 성과가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오늘부터 사흘간 간단한 몸 풀기 외에는 휴식을 취한 후, 청류로 출발할 것이다.”
그간 모아온 정보에 의하면 청류에 위치한 건일검문과 회천문은 얼마 안 있어 본격적인 충돌이 벌어질 것 같았다.
고덕이 말을 끝내자 한도회의 무사들이 천천히 흩어졌고, 예자문만이 고덕과 몇 마디 이야기를 더 나누다 그도 오막으로 들어갔다.
모든 이들이 흩어지자 고덕이 왕팔을 불렀다.
정보가 필요해진 고덕이 그를 하포의 사가에서 얼마 전에 불러올렸던 것이다.
“나흘 후에 출발하면 다시 사흘 정도가 걸려야 청류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 괜찮겠나?”
“예. 괜찮을 것 같습니다. 정보대로라면 건일검문하고 회천문의 전투는 최소 열흘은 더 있어야 벌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라도 있나?”
“그것이, 회천문에서 다른 문파에 요청한 고수들이 그 시간은 되어야 도착할 것 같습니다.”
“회천문에서 다른 문파에 도움을 청했단 말이냐?”
“예. 청하기야 엄청나게 많이 청했는데, 응한 곳은 형산파하고 응천보(應天堡)뿐입니다.”
왕팔의 답에 고덕이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곳들이 회천문과 무슨 관련이 있는 모양이지?”
“예. 형산파엔 회천문주인 등악보의 친우인 청로검(靑露劍) 사진하가 장로로 있습니다. 그가 직접 참가하는 모양입니다. 그러고 응천보는 등악보의 처가지요.”
“흠… 가뜩이나 전력이 부족한 건일검문이 힘에 부치겠군.”
“원래 절반도 안 되는 전력이었으니까 지금은 더 심각해진 셈입니다.”
왕팔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인 고덕이 지시했다.
“알았다. 너는 예 회주에게 건일검문과 회천문의 전력을 다시 한 번 자세히 설명해주어라.”
“예, 대협.”
답을 한 왕팔이 오막으로 향하는 것을 확인한 고덕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요사이 이상하게 소흥 왕부의 그녀가 눈에 밟혔다.
“이것도 병인가.”
깊은 한숨이 고덕의 입을 빠져나왔다.
다음 날은 휴식이라고 말했지만, 두 달간의 생활이 몸에 밴 한도회의 무사들은 새벽같이 저절로 떠지는 눈에 할 수 없이 평소처럼 아침 운공을 마치고 이른 아침 식사들을 먹었다.
그리곤 빈둥빈둥 할 일이 없자 하나둘 오막을 나온 그들은 이전의 훈련처럼 사방을 뛰어다니며 칼질을 하다가는 서너 명씩 짝을 지어 편을 갈라 흩어지더니 서로를 추적, 격파하던 기존의 훈련을 다시 하는 것이었다.
결국 저녁나절엔 모든 한도회의 무사들이 이전처럼 홍군과 청군으로 나누어 자율적으로 완벽하게 훈련을 재현하고 있었다.
그렇게 휴식 기간 삼 일을 보낸 한도회의 무사들은 거의 되돌아온 자신들의 내력을 느끼며 함박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고덕은 그런 그들을 일별하며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가지.”
왕팔을 앞장세운 오십여 명의 한도회 고수들이 청류를 향해 출발했다.
* * *
남평의 외곽에 위치한 한도회의 모옥을 출발한 지 삼 일 만에 청류에 도착한 한도회 일행은 왕팔의 안내로 바로 건일검문으로 향했다.
커다란 장원을 향해 이동하자 정문에 푸른색 글씨로 쓰인 건일검문이란 커다란 현판이 눈에 들어왔다.
반가운 마음에 빠르게 다가가자, 정문에 서 있던 수문 무사들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말을 건네왔다.
“무슨 일이오?”
“이곳이 건일검문이 맞습니까?”
예자문을 대신해 나선 설지평의 물음에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은 수문 무사가 답을 했다.
“그렇소. 이곳이 건일검문이오. 한데, 무슨 일이시오?”
무사의 물음에 설지평이 답했다.
“귀문의 문주께 한도회의 형제들이 건일검문을 돕기 위해 왔노라고 전해주시오.”
“한도회? 그대들이 한도회란 말씀이오?”
의심스러운 눈길로 자신들에게 되묻는 수문 무사의 질문에 설지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남평에서 온 한도회요!”
남평에서 쫓겨나 외곽의 오두막에 살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설지평의 답에도 불구하고 건일검문 수문 무사의 눈에서는 의혹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소문에 한도회는 중소 사파들에게도 쉽게 업신여김을 당할 정도로 철저히 몰락한 문파라고 들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주저거리는 수문 무사들에게 설지평이 다시 말했다.
“문주께 알리기 어렵다면 혜린검 능파 대협에게라도 한도회에서 왔다고 알려 주시오.”
능파를 직접 거론하고서야 수문 무사는 움직였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수문 무사 중 한 명이 기별을 넣기 위해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는 한도회의 사람들은 수문 무사들의 결례를 문제 삼지 않았다.
어차피 전쟁이 목전인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무장 집단을 쉽게 안으로 들여놓지 않을 터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기다리길 잠시, 사라졌던 수문 무사와 능파가 황급히 달려왔다.
한도회 사람들을 발견한 능파는 놀란 표정으로 그들을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여러분. 이런, 예 회주께서도 직접 오셨군요. 저희를 도와주러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능파의 인사에 예자문이 앞으로 나서며 마주 포권을 취했다.
“별말씀을. 연합한 형제 문파로 어찌 고단함을 모르는 척하리까. 미력하나 힘이 닿는 데까지 돕겠습니다.”
성치 않은 몸으로 불원천리 달려와 준 이들이 능파는 너무나 고마웠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건일검문에서 혜린검 능파의 위치는 결코 낮지 않다.
아니, 서열이나 무위로도 고위층에 속하는 자였다. 그런 그가 직접 안내할 만큼 감복해 있었다.
정중한 능파의 안내를 받은 한도회의 사람들이 몇 개의 방을 배정받아 쉬게 되자, 능파는 예자문을 문주의 거처로 안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