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장. 혼담(婚談)-달을 보고 눈물을 흘리다
다음 날, 뜬눈으로 밤을 새운 왕팔과 함께 객잔을 나선 고덕은 복건으로 길을 잡았다.
집을 나온 지 반년이 넘어서야 다시 돌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고덕이 무당의 일을 마무리하고 복건으로 향하던 시각, 소흥 왕부에선 갑작스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오라버니, 이게 무슨 소리예요. 제가 성혼을 한다니요?”
놀라서 달려온 문정 군주에게 소흥왕이 자리를 가리켰다.
“우선 앉거라. 앉아서 찬찬히 이야기하자꾸나.”
“오라버니!”
“앉으라는데도.”
거듭되는 소흥왕의 권유에 마지못해 자리에 앉은 문정 군주가 여전히 흥분한 음성으로 물었다.
“제가 성혼한다는 말이 정말인가요?”
문정 군주의 물음에 소흥왕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황상께서 배필을 정해주셨다.”
“화, 황상이요?”
당황하는 문정 군주에게 소흥왕이 말을 이었다.
“그래. 황상께서 동북어위도총사인 척계광 대장군에게 하가하는 것으로 정하셨구나.”
소문은 들었다. 당금 황제보다 강력한 군권을 가진 북방의 호랑이.
“그, 그에게 간다고요?”
“그래. 너도 알겠지만 황실의 안위가 풍전등화이니 그 배경을 든든히 할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 되면 더 할 말이 없어진다.
나라와 황실을 위해 가라는데 뭐라 한단 말인가?
검게 죽어가는 동생의 안색을 바라보며 무너지려는 마음을 소흥왕은 모질게 다잡았다.
“황실은 물론이고 네게도, 또 우리 소흥 왕부에도 좋은 혼처구나.”
권력을 최우선 혼인 조건으로 따지는 황실의 관례상 그 말은 옳았다.
지금 같은 난세에서 척계광 정도의 인물을 잡았다는 건 오히려 축하해야 할 일인지도 몰랐다.
다만, 다만 문정 군주의 마음에 그가 들어서지만 않았다면…….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다가 힘없이 일어나 돌아가는 문정 군주의 뒷모습에 소흥왕은 슬픈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이것을 위해 고덕에게 한 달의 휴가를 제의했다.
동생의 마음이 어디로 기우는지 알고 있었기에 서둘렀고, 흔들릴까 봐 눈앞에서 치우기까지 했다.
작지 않은 은혜를 입었다곤 해도 고덕은 야인. 한낱 야인에게 보내기엔 동생의 가치가 너무 컸다.
혼담은 생각 외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황실은 실질적인 힘이 필요했고, 척계광은 황실의 부마도위라는 명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분주하게 일이 돌아가는 시점에 고덕은 하포에 도착하고 있었다.
* * *
고즈넉하고 조용한 집을 기억하던 고덕에겐 조금 낯선 광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일이야?”
“아, 덕이 왔냐?”
“어마, 도련님 오셨어요. 저기 좀 앉아서 쉬고 계세요.”
그게 인사의 전부였다.
나머진 붕대를 감고 여기저기 드러누워 있는 무인들 사이를 바쁘게 오가며 간호하는 형과 형수의 모습이 남았다.
“뭐냐?”
고덕의 물음에 왕팔도 놀라긴 마찬가지다. 더구나 고덕은 아는 체라도 했지, 왕팔은 아는 체도 없었던 것이다.
“자, 잘 모르겠는데요.”
“모른다는 말만 하지 말고 상황 좀 알아와 봐.”
고덕의 호령에 놀란 왕팔이 부상자들 사이로 들어서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돌아온 왕팔은 놀란 소식을 전했다.
“한도회 무사들이랍니다.”
“한도회 애들이 왜 여기서 저러고 있어?”
고덕의 물음에 왕팔이 설명을 이었다.
“그게, 최근에 새로 문을 연 문파와 전쟁이 벌어졌는데 호되게 당한 모양입니다.”
“도대체 상대가 누구였기에 한도회가 당해?”
대문파는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복건성의 패자라고 자처할 만큼 내실이 있었던 한도회였다.
특히 회주인 예자문을 비롯해 칠파도 묵광겸과 육웅도 조극동은 초절정에 이를 만큼 뛰어난 무인이었다.
그 정도면 고덕이 보기에도 복건성에선 도전자가 없을 정도의 능력이었다.
“광한문이랍니다.”
“광한문?”
“예.”
왕팔의 답에 먼저 조카 내외와 조카 손자들이 생각났다.
“칠이와 아이들은?”
“무사하답니다.”
“한데 왜 안 보여?”
“칠이는 제수씨와 아이들을 데리고 음식물을 사러 시전에 나갔답니다.”
왕팔의 설명에 우선 마음을 놓은 고덕이 말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소상히 좀 알아봐.”
“알겠습니다.”
답을 한 왕팔이 집을 나서자, 고덕은 잔뜩 찌푸린 눈으로 여기저기서 신음하는 한도회 무사들을 둘러보았다.
날이 저물어서야 돌아온 왕팔은 생각보다 세세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 이야기를 종합하면 이러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두 달 전…….
복건성 남평현 중심의 거대한 장원에서 달포 전쯤 한 문파가 개파식을 했다.
주변 문파들에 초청장조차 전하지 않은 채 이루어진 개파로 장원의 정문엔 광한문이란 현판이 내걸렸다.
원래 수백의 인원이 머물던 대상가였던 장원을 어찌 구입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장원엔 겨우 서른 안팎의 무사들이 머물기 시작했다.
크기에 비해 적은 인원이 기거하는 터라 장원은 휑하니 빈 곳이 많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장원의 중심이 되는 서너 개의 전각에 모여 살았다.
그리고 며칠 후, 광한문은 같은 남평에 둥지를 틀고 있던 한도회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게 뭐라는 소린가?”
도전장을 바라보던 예자문의 물음에 군사인 설지평이 답했다.
“글자 모르십니까?”
“쓰읍…….”
일그러지는 예자문의 인상에 설지평이 재빨리 답했다.
“자금원인 기루와 전장을 넘기라는 말이군요. 한마디로 한판 뜨자는 소리네요.”
설지평의 말에 예자문이 그를 노려보았다.
“누가 그것을 몰라서 묻냐? 언제 남평에 다른 문파가 들어섰느냔 말이다, 내 말은.”
그러고 보니 도전장으로 보낸 배첩(褙貼)의 정면엔 복건성 남평의 광한문이라 쓰여 있는 것이 보였다.
남평은 바로 자신들의 안마당.
그런 곳에 언제 다른 문파가 기어들어왔는지 알지 못했다는 것은 문의 정보를 함께 책임지고 있는 군사에겐 심각한 문제였다.
때문인지 질문의 요지를 파악한 설지평의 고개가 잔뜩 수그러들었다.
“최대한 빨리 알아봐.”
“아, 알겠습니다.”
서둘러 답한 설지평은 꽁지가 빠져라 정보를 얻기 위해 움직였다.
그렇게 움직인 덕에 반나절 만에 예자문은 광한문이라는 문파의 정보를 손에 넣을 수가 있었다.
“광한?”
“예, 문주의 이름입니다.”
그 이름 아래로 달린 설명에 예자문의 시선이 머물렀다.
광한.
광권(狂拳)이란 별호를 가진 그는 원래 강족 출신으로, 산적 두목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보고 배운 것이라고는 남의 것을 빼앗거나 죽이는 것뿐이 없었기에 성격 자체도 그것에 맞추어 특화되어버렸다.
때문에 그에겐 베푼다는 것은 아예 개념 자체가 없었고, 원하는 것은 좋게 말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힘으로 빼앗는 것이라는 특이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의 성격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것을 챙길 때 간혹 남겨 놓고 오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을 그는 땡값이라 불렀다.
땡값이란 말은 원래 산적들이 많은 재물을 가진 상인들이나 행인들을 톡톡 털고 미안한 마음에 여비조로 쥐어주는 약간의 돈을 뜻했다.
그런 산적 나부랭이에 불과했던 광한이 문파를 열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광한의 아비 덕이었다.
선천적으로 장사(壯士)였던 광한의 아비는 대물림되는 가난을 견디다 못해 집을 뛰쳐나와 산서성 오태산에 있는 작은 산채에서 산적이 되었다.
그렇게 십수 년을 산적질을 하다가 납치된 여인을 맞아 살림을 차리고 아이를 본 것이 바로 광한이었다.
원래 촌무지렁이 상민이었던 터라 성이 없어 그저 아들의 이름만 광한이라 지은 그는, 광한이 다섯 살이 되던 해에 우연히 홀로 산을 타다 작은 오솔길을 지나던 남루한 차림의 선비와 마주치게 된다.
특별히 영업(?)을 나선 것은 아니었으나 직업이 병이라고,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선비를 덮쳤다.
그리고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라며 울며불며 매달리는 선비를 쥐어 패고 얻은 것이 광한이 익히게 된 광무라는 비급이었다.
당시 선비를 쫓아 보내고, 예전에 어깨 너머로 배운 글재주로 어설프게 읽어보아도 비급이 상당히 수준 높은 무공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 광한의 아비는 그길로 돌아가 가족들을 데리고 산채를 빠져나왔다.
그 뒤로 그는 오태산 줄기 한쪽에 자리를 잡고 있는 또 다른 산채로 스며들어 광한에게 그 비급을 익히게 했다.
녹림에 들지도 못하는 풀뿌리 산적들이 모인 산채에 든 광한의 아비는 산적이라는 자신의 직업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화적에 가까운 작은 산적인 까닭에 좋은 약재를 접할 수 없었던 그는 아들을 위해 오태산 구석구석을 뒤져 영약이랄 수는 없지만 귀한 약초들은 보이는 족족 거둬들여 광한에게 먹였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광한이 열일곱 살이 되던 해, 산채에서 자신을 따르던 산적 패거리 일부를 이끌고 그는 가족들과 함께 광서성 평남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아들을 위해 작은 흑도 문파를 세운 것이 바로 그의 아들인 광한의 이름을 딴 광한문이었다.
흑도였기 때문에 같은 흑도인 뒷골목의 왈패들과도 잦은 다툼을 벌여야 했다.
하지만 곧 광무를 대성한 광한의 능력으로 광한문은 크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광한문이 커갈수록 흑도의 이름 있는 고수들이 광한문으로 귀의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광한문이 무림의 정식 문파로 거듭나는 초석이 되었다.
그렇게 십 년의 세월이 흐르고, 광한의 나이 이십칠 세에 흑도 최고의 문파 중 하나가 된 광한문은 평남에 자리를 잡고 있던 사파의 군소 방파였던 적혈파를 멸문시키며 꿈에도 그리던 강호에 정식으로 진출하게 된다.
하지만 평남에선 여전히 건달패인 흑도의 이름을 지울 수 없었다.
그 탓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움직인 것이 바로 복건의 남평이었다.
이름이 비슷하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남평을 택했을 정도로 무지했지만, 광한의 능력은 절대로 무시할 것이 아니었다.
글을 다 읽은 예자문이 물었다.
“군사.”
“예, 문주님.”
“이걸 보고서라고 올린 건가? 아예 이자가 뭘 먹고 언제 싸는지까지 적어 올리지 그랬나?”
“혹시 필요하십니까? 그렇다면 곧바로…….”
“장난 그만하지.”
“예, 회주님.”
설지평이 답에 예자문이 다시 물었다.
“능력치는 어때?”
“조사된 바에 따르면 문도 수는 서른 남짓, 하지만 능력들은 모두 뛰어납니다.”
“얼마나?”
“우선 광한의 무위는 초절정으로 예상됩니다. 일전에 초절정으로 분류되던 모용세가의 장로와 싸워 반 초 차이로 이긴 전적이 있으니까요.”
“그럼 초절정도 아래는 아니라는 말이겠군.”
“예. 어쩌면 초극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돕니다만…….”
“초극이 그렇게 쉬운 이름이었다면 따로 모아서 제하이십사강이라 부르지도 않았겠지.”
“맞습니다.”
설지평의 맞장구에 슬쩍 미소를 지은 예자문이 물었다.
“유념해야 할 이들은?”
“부문주인 세절검 여평과 사각의 각주들입니다.”
“사각?”
“예. 동서남북 네 개의 각을 마련하고 각각마다 각주를 두었더군요.”
설지평의 답에 예자문이 물었다.
“우리 오각과 비슷한 모양이지?”
“그렇게 보입니다.”
“그런데 뛰어난 고수들을 보유했다는 놈들이 왜 일반 무사들의 수가 그리 적은 거지?”
“원래 평남에선 일천 가까운 수의 무사들을 거느렸다는데, 이전하면서 다 내보냈답니다.”
설지평의 말에 예자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군. 원래 새로운 자리로 이동할 때 오히려 세력을 키워 안전성을 노리는 거 아닌가?”
“그것이 맞습니다. 다만 광한문은 너무 자신감이 크지 않았나 합니다.”
“자신감인지 자만심인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 대결 방식은?”
“그들은 고수들 간의 싸움을 원합니다.”
“무사의 수가 적으니 머리를 쓰는 것이겠지. 원하는 대로 해준다.”
예자문의 말에 설지평이 반대하고 나섰다.
“그리해줄 이유는 없습니다, 회주.”
“그렇다고 머릿수로 밀어서 자리를 지켰다는 말을 들을 순 없어. 가뜩이나 혈가에 당한 일 때문에 흠집이 많이 났는데, 그런 소문까지 나면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다.”
예자문의 말에 육웅도 조극동이 끼어들었다.
“그건 회주님 말씀이 맞습니다. 그럴 순 없지요. 힘으로 깨어주면 됩니다.”
“옳은 말일세. 조 전주의 말대로 힘으로 깨면 될 일. 그들의 제의를 수락한다고 전하게.”
예자문의 말에 설지평은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예…….”
* * *
한도회가 광한문의 도전에 대한 분석으로 시끌벅적할 때, 광한문도 한도회와의 싸움을 앞두고 분석에 몰두해 있었다.
“철검마 예서경이 세운 문파라…….”
광한의 중얼거림에 부문주 여평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백 년이나 됐다는데요.”
“애들 수준은?”
“남평의 흑도를 장악하고 있는 천하파 애들의 말로는 한가락 한답니다.”
“한가락? 한가락이면 어느 정도?”
“회주하고 두 전주의 능력이 초절정, 거기에 절정 고수도 셋이나 있답니다.”
“그 정도면 별문제 없겠네.”
“아무래도 그렇게 보입지요. 네.”
광한 앞에서는 간신배같이 보이는 여평이었으나 흑도에서 세절검(細切劍) 여평 하면 하나의 전설이었다.
흑도에 몸담고 있을 때, 이미 혼자서 사파의 절정 고수 둘을 박살낸 것이 바로 그였으니까 말이다.
그런 그가 광한에게 도전했다가 무릎을 꿇고 그의 휘하가 된 것은 흑도의 유명한 이야깃거리 중 하나였다.
지금은 사파의 고수 중에서도 초절정에 속하는 자로 바뀌었으나 태생적으로 그도 광한과 같은 부류였다.
때문에 무식한 문주와 간신 같은 수하였으나, 둘은 서로를 형제 이상으로 믿고 의지하는 사이였다.
“그렇다면 차라리 계획을 바꿔서 쓸어버릴까?”
“그것은 아무래도……. 그래도 명색이 복건성의 패자 아닙니까? 정상적인 방법으로 접수해야 그 명성이 고스란히 우리에게 옵니다. 우리가 보낸 배첩대로라면 사흘 후이니 그다지 멀지도 않습니다.”
“흠, 그래. 자네 말이 맞는 것 같군. 그럼 그렇게 하지. 앞으로 애들 단속 잘하고, 놈들과 마주하면 정중히. 알지?”
“예, 문주님.”
* * *
그로부터 삼 일 후, 배첩대로 광한문은 한도회에 도전을 해왔다.
활짝 열린 정문으로 당당히 들어선 그들은 사백에 달하는 한도회의 문도들과 마주해 있었다.
“그대가 한도회의 회주인가?”
중앙에 내어놓은 태사의에 의젓한 모습으로 앉아 있던 예자문에게 질문을 던진 자는 광한문의 무리들 중 맨 앞에 서 있던 광한이었다.
“그러하네. 내가 바로 한도회의 회주인 예자문일세.”
예자문은 상대들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위엄이 자못 심상치 않은 것이 마음에 걸렸으나 자존심을 꺾을 수 없었다.
더구나 사백의 문도들 앞에 선 무리는 겨우 서른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난 광한문의 문주 광한이다. 약속대로 대결을 청한다.”
광한의 도발에 고소를 지은 예자문이 답했다.
“그래, 도전을 한다는 것은 잘못되었을 때 내걸 만한 것이 있다는 이야기일 터. 무엇을 걸 생각인가?”
정파에겐 조건 없는 비무행이라는 것이 있지만, 사파나 마도를 대할 때는 도전에 대가가 따른다.
내걸 것이 없다면 목숨이라도 걸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약육강식의 법칙이 통용되는 강호의 규칙이었다.
“무엇을 원하지?”
여평의 물음에 피식 웃어버린 예자문이 답했다.
“뭐, 무림의 문파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겠나? 지면 장원을 내놓고 남평에서 물러나게.”
“흠, 장원을…….”
하긴 지리라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만에 하나 지기라도 한다면 장원이 무슨 소용일까? 생각을 다잡은 광한이 답을 했다.
“좋다. 그렇다면 너희가 지면 너희도 이 장원을 내놓고 남평에서 물러나라.”
“그야 당연히…….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너희가 우리 한도회를 쓰러트려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라.”
“후후, 당연한 말. 오늘부로 우리 광한문이 복건의 패자가 되는 것을 보여 주마.”
광한의 장담에 인상을 구긴 예자문이 말했다.
“위 각주, 한도회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거라.”
“예, 회주님.”
복명한 위각의 각주 팔방섬도가 나서자 그에 맞서 광한의 고함이 터져 나왔다.
“어디 그 잘난 실력을 보자. 여평, 저놈을 내 앞에 무릎 꿇려라.”
광한의 고함에 그의 곁에 서 있던 여평이 나서려는 찰나, 근처에 있던 다른 문도가 나서며 말문을 열었다.
“문주님, 어찌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쓰려 하십니까? 저놈은 제가 잡아 올리겠습니다.”
말을 하며 나선 자는 광한문의 수뇌부 중 한 명으로 남각의 각주인 회류도(回流刀) 후암이었다.
광한문은 문주전과 부문주전의 이 전과 동서남북의 사 각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하위의 세력이 바로 남각이었다.
그리고 그런 남각을 맡고 있는 후암은 광한문에선 서열 칠 위, 무력만으론 오 위에 거론되는 자였다.
후암이면 앞서 나온 자의 기세와 크게 차이 나지 않겠다고 생각한 광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좋아. 후암! 네가 나가 저놈을 끌어다 내 앞에 무릎을 꿇려라.”
“예, 문주님!”
문주의 허락이 떨어지자 답을 한 후암이 자신의 애도를 뽑아들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문의 평가로는 무력 서열 오 위라고 하지만, 후암 본인은 적어도 문주와 부문주인 여평을 제하고는 자신의 위에 적수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번 기회에 그것을 보여 주어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려고 나선 것이다.
때문에 팔방섬도와 마주 서는 후암은 각오를 단단히 다지고 있었다.
“나는 회류도 후암이다. 잘 기억해두어라.”
“팔방섬도라 불리는 관길이오. 잘 어울려 봅시다.”
관우의 후예라 자처하는 관길은 그 탐스러운 수염을 휘날리며 날아올랐다.
추라라랑.
맑은 소리와 함께 관길의 언월도가 그의 무명처럼 후암의 팔방을 점하며 떨어져 내렸다.
순간 풍차처럼 회전하며 후암이 허공으로 도약했다.
자신이 서 있던 곳을 휩쓰는 언월도의 첨두를 살짝 밟고 다시 날아오른 후암의 도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관길의 목을 향해 날았다.
복잡하고 화려한 변식은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지독한 실전 무술이다.
내뻗었던 언월도를 당긴 관길이 후암의 도를 차단했다.
창-
도가 막히자 관길의 언월도가 다시 회전을 시작했다.
상단을 가르고 떨어지는 언월도를 막아서는 후암의 표정에 이채가 깃들었다.
육중한 언월도의 힘치고는 너무 가볍기 때문이다.
후암은 조금 당황스런 표정으로 도를 휘둘러 언월도를 걷어내곤 곧바로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상대의 기세와는 다르게 충격이 예상외로 적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강호에선 대부분 실초로 위장한 허초이고, 그 뒤에 진짜배기가 따라오기 마련이었다.
그 판단이 적절한 것이었다는 반증이 곧바로 드러났다.
걷어져 올라가는 듯했던 언월도가 방금까지도 후암이 서 있던 자리를 맹렬하게 후려쳤기 때문이다.
쾅-
후암의 재빠른 판단력으로 인해 애꿎은 땅만 파헤친 꼴이 된 관길의 언월도가 다시 수평으로 베고 들어왔다.
잔뜩 기세를 일으킨 후암도 마주 달려 나가면서 전력을 다해 검을 뻗어냈다.
챙! 차장, 창창창-
수차례 도와 언월도가 부딪치며 허공에 불꽃을 만들어냈다.
상대의 짧은 검격에 공간을 잡아먹힌다고 생각한 관길이 언월도를 크게 휘두르며 뒤로 물러섰다.
순간 후암의 눈이 번쩍였다. 기다리던 기회였기 때문이다.
낙섬회도(落閃回刀)!
손안에서 빠르게 회전하는 도가 머리 위에서부터 강하게 내려쳐졌다.
당연히 관길의 언월도는 내리꽂히는 후암의 도를 막아섰다.
하지만 그것은 후암이 노리던 것이었다.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는 후암의 도가 일으키는 도풍이 관길의 언월도를 삽시간에 부수며 날아들었다.
“흡!”
놀란 관길이 뇌려타곤의 수법으로 빠져나왔지만, 거머리처럼 달라붙은 후암의 도는 그를 악착같이 따라붙었다.
절체절명의 위기. 관길의 위험하다고 판단한 강태명이 끼어들었다.
까깡-
강태명의 패도에 막혀 튕겨 나간 자신의 도를 잡고 자세를 바로잡는 후암에게 강태명이 포권을 취했다.
“불필요한 살생은 없을수록 좋은 것이라 부득이 손을 썼소. 무례를 용서하시오.”
강태명의 말에 후암이 비아냥거렸다.
“한도회는 일대일 대결에 끼어드는 것으로 실력을 보이는 모양이오.”
“흐음… 다시 한 번 사과하오. 대신 내가 상대해주겠소.”
강태명의 말에 광한문의 여평이 끼어들었다.
“확실히 할 건 확실히 해야죠. 첫 대결은 우리 측의 승리입니다.”
여평의 말에 예자문은 인상을 구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와아아아~
첫 승리에 광한문 쪽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서른 명뿐이라고는 하나 승리에 취한 이들의 함성은 크고 우렁찼다.
함성이 잦아들자 다시 앞으로 나서는 강태명이 자신의 도를 역수로 잡고 포권을 취했다.
“동도들이 철추도라 불러주는 한도회의 강태명이오.”
강태명의 소개에 여평이 광한에게 속삭였다.
“회주와 두 전주를 제외하고는 가장 강한 자입니다.”
“후암으론 어려운가?”
“예. 어렵습니다.”
“하면 누굴 내보내는 게 좋겠냐?”
“동각주면 좋은 적수가 될 겁니다.”
문주와 부문주를 제외하고 가장 강한 이가 바로 동각주인 해세천이었다.
“좋아. 그렇게 하지.”
광한의 동의에 여평이 후암을 불러들이고 해세천을 내보냈다.
“광살부(狂殺斧)라 불리는 해세천이오.”
“좋은 승부가 될 것이오.”
강태명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짓쳐든 해세천의 무공도 앞선 후암처럼 완벽히 실전에 입각한 무술이었다.
천하의 강태명이 정신없이 밀릴 정도로 해세천의 실전 무예엔 특별함이 있었다.
두 자루 소부가 온 공간을 점하며 사방팔방을 찍어내는 동안, 강태명은 자신의 특기인 강공은 제대로 발휘해보지도 못하고 이리저리 방어에 급급했다.
공세와 방어의 연속기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이루어졌다.
일방적 공세와 일방적 방어로 이루어진 싸움이었지만, 생각 외로 결전은 용호상박의 팽팽한 싸움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강태명이 조금씩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이점을 빼앗기고 방어로 일관하게 된 폐해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자신마저 무너지면 한도회의 명예가 땅바닥에 떨어진다고 생각한 강태명은 분명한 열세 속에서도 몸을 빼지 못하고 악착같이 버텼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그것이 결국 그에게 중한 상처를 입혔다.
악착같이 버티는 강태명의 손속이 엉키는 순간, 해세천의 소부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파고들었던 것이다.
퍽-
피가 튀고 옆구리에 소부를 머리까지 박아 넣은 강태명이 도를 휘둘러 상대를 떨어트리고 뒤로 물러났다.
“으윽.”
물러나는 것도 잠시, 균형을 잃고 무릎을 꿇는 강태명을 향해 해서천이 달려들자 다급해진 조극동이 나서서 그를 뒤로 물렸다.
상황이 그리되자 광한의 비틀린 음성이 허공을 울렸다.
“이것이 한도회의 본모습인가? 으하하! 이런 것들이 무슨. 얘들아- 쳐라!”
느닷없는 광한의 외침에 사방 담을 넘어 수백의 무사가 들이닥쳤다.
거기에 미리 들어와 있던 고수들이 전면으로 달려들자 이내 한도회는 혼전으로 가득 차버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도회는 광한문에게 철저하게 패했다.
원래 광한문은 광서의 평남에서 데리고 있던 문도들을 흩은 게 아니라 몰래 복건으로 이동시켜 왔던 것이다.
애초부터 한도회 자체를 부수고 차지할 욕심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처음부터 전면전으로 가자니 한도회의 전력이 부담스러워 대결을 요청해 정문을 열고 고수를 한도회 내부로 진입시키고 일제히 무사들을 투입하고자 계획했던 것이었다.
그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예자문은 광한에게 반 초 차이로 패했고, 칠파도 묵광겸은 여평과 평수를 이뤘다.
조극동만이 해세천에게서 약간의 이득을 보았지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진 못했다.
그사이 다른 주요 고수들은 모조리 광한문의 각주들에게 제압되거나 죽임을 당했다.
그것이 한도회가 무너진 결정적 원인이었다.
그렇게 여유를 가진 광한문의 고수들이 광한과 고수들을 도와 예자문을 비롯한 한도회의 고수들을 철저히 짓밟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장원을 빼앗기고 도망치듯 퇴각한 한도회는 중요 수뇌들만 남평 인근에 남고, 대부분의 부상자들은 고칠에게 맡겨 이곳 그의 사가로 보냈던 것이다.
왕팔의 설명이 끝나자 고덕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강태명이 중상을 입었단 말이야?”
“예, 대협. 너무 심해 이곳까지 옮기지도 못하고 남평 인근의 의원에서 치료 중이랍니다. 그뿐이 아니라 살아남은 다른 이들도 너무 중한 상처들을 입어 내력을 거의 상실했답니다.”
왕팔의 말에 고덕은 고칠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어둠이 내리고, 식량과 약초들을 마련해 돌아온 고칠을 막무가내로 앞장세운 고덕이 다시 집을 나섰다.
이번에 향한 곳은 남평 방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