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장. 무당(武當)-자객이 친구가 되다
왕부로 돌아온 지도 보름이 되어가던 시점, 고덕이 소흥왕을 찾았다.
“어서 오게.”
소흥왕의 환대에 고덕은 포권을 취했다.
“잠시 여쭐 게 있어 왔습니다.”
“그냥 왔더라도 무방하네.”
“죄송합니다.”
고덕의 사죄에 소흥왕이 흐릿한 미소를 그렸다.
“그래, 물을 것이 무언가?”
“잠시 왕부를 떠나 있을까 합니다.”
“왕부를?”
“예.”
고덕의 답에 소흥왕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혹 서운한 것이 있던가?”
“아닙니다.”
“한데, 왜 갑자기……?”
“잠시 강호에 볼일이 있습니다.”
다른 질문을 사절하기 위해 강호라 말했다. 예로부터 관과 강호는 서로의 경계를 넘어서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기 때문이다.
그런 고덕의 예상처럼 소흥왕은 더 이상 깊게 파고들지 않았다.
“오래 걸릴 일인가?”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고덕의 답에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소흥왕이 의외의 말을 꺼냈다.
“차라리 이참에 휴가를 다녀오게.”
“휴… 가요?”
“그러하네. 지친 심신도 잠시 쉴 겸 내 한 달의 말미를 줄 터이니, 돌아볼 곳도 좀 돌아보고 오게.”
소흥왕의 말에 불현듯 형 내외의 모습이 눈에 밟혔다.
“그럼, 그리하겠습니다.”
“그래. 내 준비를 갖춰줄 테니 그리하게.”
“달리 신경 쓰실 것은 없습니다.”
“그게 그런 것이 아니지. 나와 문정이 자네에게 입은 은혜가 작지 않은 것을…….”
소흥왕의 말에 고덕은 그저 미소를 지어 보였을 뿐이었다.
소흥왕을 만나고 나온 고덕은 곧바로 왕팔을 찾았다.
“부르셨어요?”
“그래. 떠날 준비를 좀 해둬라.”
“떠나요? 여길 말입니까?”
“그래.”
고덕의 말에 잠시 의아해하던 왕팔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잊을 건 빨리 잊는 게 좋지요. 알겠습니다. 곧바로 떠날 차비를 하겠습니다.”
무언가를 오해한 왕팔에게 고덕이 서둘러 말했다.
“한 달이다. 한 달 후 다시 돌아올 것이니 그리 알고 준비해라.”
“예? 다시 돌아온다고요?”
“그래.”
고덕의 답에 왕팔이 측은한 표정을 지었다.
“대협…….”
“쓸데없는 말은 그만하자. 준비나 해둬.”
“예…….”
풀 죽은 왕팔이 나가자, 고덕은 이내 문정 군주의 처소로 발길을 옮겼다.
그녀에게도 자신의 여행 사실을 알려야 했기 때문이다.
고덕의 말을 들은 문정 군주는 놀란 표정이 역력했다.
“한 달이나요?”
놀라는 문정 군주에게 고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강호의 볼일도 보고 사가… 에도 다녀올 생각입니다.”
“사가……. 그렇다면 붙잡을 수도 없군요. 조심해서 빨리 다녀오세요.”
“그리하겠습니다. 그럼 강녕하십시오.”
“마치 다시 보지 못할 분처럼 말씀하시네요.”
불안해 보이는 문정 군주의 음성에 작게 미소를 그려 보인 고덕이 다시 인사했다.
“다시 뵐 때까지 강녕하십시오.”
“그래요. 한 달이 빨리 지나가길 기다릴게요.”
문정 군주의 말에 고덕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 * *
다음 날 새벽, 작은 봇짐 하나를 멘 왕팔을 앞세운 고덕이 왕부를 나섰다.
“어디로 가실 겁니까?”
왕부를 벗어나자 관도의 갈림길에서 왕팔이 물었다.
“호북으로 가자.”
“호북이요? 복건이 아니고요?”
예상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왕팔에게 고덕이 답했다.
“그래, 잠시 무당에 들를 것이다.”
“무당은 왜요?”
이미 혈마를 통해 고덕의 실체를 알게 된 왕팔이 불안하게 묻자 고덕이 혀를 찼다.
“쯧, 그냥 가자면 가라.”
“아, 예.”
당황해 답하는 왕팔을 이끌고 고덕은 길을 나섰다.
소흥 왕부가 있는 절강에서 호북은 멀지도 않지만, 가깝지도 않았다.
이미 한 달이라는 말미를 받은 고덕은 서두르지 않았다.
그 탓에 경공과 도보를 섞어 움직인 여정은 왕팔에게도 여유로운 편이었다.
그렇게 왕부를 떠난 지 칠 일 만에 호북에 들어선 고덕과 왕팔은 무당산이 지척인 균현에 도착했다.
무당산에 올라 기도를 드리는 이들을 위해 지어진 객잔들이 즐비한 균현은 조용하면서도 사람이 많아 활기차 보였다.
그렇게 많은 객잔 중 하나에 짐을 푼 고덕이 왕팔에게 말했다.
“저녁에 잠시 다녀올 곳이 있으니, 팔이 너는 이곳에서 조용히 기다리거라.”
고덕의 말에 걱정이 가득한 표정의 왕팔이 물었다.
“저기… 설마 무당을 마교처럼 뒤집을 생각은 아니시지요?”
“글쎄…….”
전체를 뒤집을 생각은 없다. 하지만 고덕 자신이 원하는 일을 마치면 무당은 벌집을 쑤셔 놓은 듯 소란스러워질 것은 자명했다.
불투명한 고덕의 답에 완전히 걱정에 휩싸인 왕팔이 고덕을 불렀다.
“대협…….”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 일을 끝내고 돌아오면 곧바로 떠날 테니 준비해두고.”
두말할 필요 없이 야반도주다.
야반도주를 해야 할 만한 일을 상상하는 왕팔의 얼굴은 점점 새카맣게 죽어가고 있었다.
* * *
해가 지고, 달이 하늘에 걸렸다.
자욱한 밤안개 속을 흐릿한 그림자가 헤집었다.
해검지를 지나 접객당, 연무장, 진무관을 지나 상청궁까지 뛰어넘었다.
찾는 곳은 하나…….
무극검이 머무는 장생전이었다.
가파른 언덕 정상, 봉우리와 봉우리를 연결한 다리를 건너자 고색창연한 전각 하나가 봉우리에 걸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장생전>
현판을 채운 고서체. 고덕이 찾던 바로 그곳이다.
다시 그림자처럼 흐릿해진 고덕의 신형이 장생전 안으로 스며들듯 사라졌다.
발소리도 없이 장생전 안을 질주하던 고덕의 신형이 그림처럼 멈추어 섰다.
알 수 없는 불쾌함이 주변을 자극했다.
평온했던 조금 전과는 달리 주변의 기감들이 한쪽으로 휘어졌다.
이런 현상은 한 가지 경우에만 나타난다. 바로 진이다.
‘진이라……. 장생전 안쪽에 진이라니, 도대체 뭘 숨기고 싶어서?’
생각을 정리한 고덕은 갈등했다.
진은 기감을 흩트리고 왜곡한다. 안으로 발을 들이미는 순간 육감 전체가 뒤틀릴 것이다.
그건 유사시에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
그렇다고 진을 부수지도 못한다. 부수는 순간 자신의 침입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왕팔이야 자신이 마교처럼 무당을 다 뒤집어놓을 줄 알겠지만, 고덕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들어갈까 말까 갈등하던 고덕이 천천히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아무 준비 없이 무조건 뛰어드느니 정보를 좀 더 모아서 내일 다시 오기로 결정한 탓이다.
그렇게 물러서려는 그때,
“무량수불. 대무화진법(大無禍陳法)까지 펼쳐 놓고 기다린 귀한 손께서 어찌 그냥 가려 하시오?”
장생전의 회랑을 울리는 큰 목소리에 고덕의 인상이 구겨졌다.
“젠장, 어쩐지 기감이 일그러졌다 했더니만…….”
대무화진법. 무당의 오래된 은신진이다.
이 진법의 효능은 적을 기다리는 우군을 완벽하게 숨기는 건 물론이고 찾아든 적이 진법에 걸렸다는 것 자체를 느끼지 못하게 만든다.
진법 안에 또 다른 진법을 구성해 이목을 그곳으로 돌려놓기 때문이다.
천천히 장생전의 기둥 그늘에서 몸을 드러내는 고덕의 시선으로 대무화진법의 중심축에서 나서는 이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오랜만이야.”
고덕의 인사에 백발을 단정히 묶은 노도사가 포권을 취했다.
“무량수불. 검마 도우를 다시 볼 줄은 몰랐소이다.”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이렇게 준비를 모두 갖춰놓고 내가 올 줄 몰랐다 그 말이야?”
“작은 말 몇 마디로 불신의 벽이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검마 도우가 올 줄은 정말 몰랐소이다.”
무극검의 말에 고덕이 불퉁거렸다.
“거 쓸데없는 말로 시간 끄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네. 애들까지 데리고 기다렸다면 만반의 준비는 갖춰졌을 터. 제대로 해보자고.”
고덕의 말에 무극검이 아닌 적미의 노도인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도우의 무명은 귀가 따가울 정도로 들었소이다. 오늘은 노부와 동료들이 나서보고자 하는데, 허락하시겠소이까?”
“내가 안 된다고 하면 안 나설 생각이야?”
고덕의 답에 겸연쩍은 미소를 지어 보인 적미의 노도인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도우를 상대할 우리는 일곱입니다. 수로 누른다 욕하실지 모르나 배운 것이 일곱으로 나뉜 것이니 탓하지 마시길…….”
“무극이를 닮았냐? 뭔 말이 그리 많아.”
고덕의 핀잔에 적미 노도인의 입에서 구령이 터져 나왔다.
“칠성검진, 개진!”
순간 하늘 가득 별빛이 뿌려졌던 것이 일제히 쏟아져 내리는 착각이 들었다.
차자자자작.
정확히 일곱의 도인들이 칠궁의 방위를 점하며 내려서자, 주변의 기가 그대로 굳었다.
“도술이 섞였군. 제법이야.”
고덕의 평에 적미 노도인의 음성이 이어졌다.
“개문 발현!”
순간, 주변의 기가 고덕을 압박하고 동시에 검진은 휘어져 세 자루의 검이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상중하 전면 전체의 공간이 칼 그림자로 뒤덮였다.
추앙-
어느새 붉은빛 무리를 이끌고 뛰쳐나온 애검 명혼이 세 개의 검을 걷어냈다.
파르르르.
처음이다. 검이 울리는 것은…….
“강하군.”
강하다. 틀리면서 묘하게 어울리는 말이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부드럽고 또 부드러워 너무 무거운 것이다.
무거운 것에 빠른 것이 부딪쳤으니 강한 반탄력이 일어남은 당연지사.
고덕이 받은 충격의 반은 자신이 만든 힘의 반작용인 셈이었다.
이화접목, 사량발천근……. 작은 힘으로 큰 힘을 움직인다는 무리와 무당이 추구하는 부드러움이 만나 이루어낸 결과였다.
검을 당겨 다시 자세를 잡는 고덕의 시선으로 둥글게 말려 오는 검진이 보였다.
사방.
작게 원을 그린 명혼이 큰 울림을 떨어냈다.
따다다당.
여기까지가 방어였다면 이제 공격이다.
사방위의 검이 튕겨 나가는 것을 따라 고덕의 신형이 강하게 앞으로 밀고 나왔다.
우우우웅.
검을 들지 않은 고덕의 왼팔이 보석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확인한 무극검의 입에서 경고성이 터져 나왔다.
“조심하라!”
경고성과 함께 보석처럼 무수히 작열하는 불빛이 검진을 파고들었다.
파바바바방.
하나하나가 강기의 덩어리다.
폭발하는 모든 것이 상대를 강하게 밀어 쳤다.
황급히 검을 휘둘러 강기의 폭발을 막아내는 칠성검수들에게 고덕이 다시 짓쳐들었다.
칠성검수들의 위기에 다른 도인들이 끼어들었다.
빙글, 슬렁, 훌쩍.
태극이다.
자신의 앞을 막아서며 돌아가는 장심마다 깊은 내력이 어렸다.
무당의 자랑 면장이다.
겉으로 보기엔 개미 한 마리 잡을 힘이 없어 보이지만, 걸려들면 거석이 가루가 된다.
상대에게 면장이 있다면 고덕에겐 유련수가 있다.
유련수, 장(掌)!
가슴 어림으로 들어올린 고덕의 손이 어느새 붉게 타올랐다.
타오르듯 붉어진 손이 허공을 기이하게 휘어 치자, 고덕을 중심으로 좁은 공간으로 끔찍하리만치 과도한 기운이 밀집되기 시작했다.
중첩되고 또 중첩되는 힘에 의해 공간이 잠시 일그러질 지경이다.
그렇게 압축된 기운이 고덕의 손짓을 따라 전면으로 폭발하듯 뿜어졌다.
콰쾅-!
기력의 충돌이라 보기 어려울 정도의 충격과 폭음이 울리고, 유련수를 막아섰던 면장의 고수들이 추풍낙엽처럼 나뒹굴었다.
동료 도사들로 인해 간신히 위기를 모면했던 칠성검수들이 그 모습에 분노했다.
“발문 개진!”
흩어졌다 다시금 모여진 칠성검진이 전력으로 부딪쳐 왔다.
그들에게 돌려진 명혼에서 파란 기운이 튀어올랐다.
강기에 뇌기가 덧씌워진 탓이다
뇌기가 일렁이는 검을 앞으로 내뻗고, 일각의 내력을 돌려 음한지기를 형성하여 진각을 밟았다.
쫘자자자작.
검의 뇌기와 땅을 타고 흐르는 음한지기 사이에 방전이 일어났다.
그 뇌기가 사방으로 번져 나갔다.
크흐흐흐악-
칠성검수들이 뇌기에 휩싸여 뭍에 오른 물고기인 양 파닥거렸다.
보다 못한 백미의 한 노도사가 앞으로 나섰다.
고오오오.
주변의 진기가 그의 장심을 중심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기범대라선공(氣梵大羅仙功).
들은 적이 있다. 주변의 기를 완벽하게 장악하여 움직이는 절세 신공.
소문으론 이미 절전되었다던 무당의 진산절기다.
사용자는 적어도 현경. 숨겨진 고수의 등장에 고덕의 시선에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에도 부드러운 힘은 강맹한 기운을 감추고 노도사의 장심을 따라 무섭게 회전했다.
휩쓸리면 아무리 자신이라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경고가 뇌리를 무섭게 울렸다.
순간의 정적.
콰앙-
폭포수 떨어지는 것 같은 굉음과 함께 노도사의 장심에서 뛰쳐나온 무섭도록 음유하고 부드러운 기운이 주변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 하나 그것도 정도가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을 부수는 힘은 부드러움을 넘어서기 마련이었다.
유련수, 섬파(閃破)!
내민 손이 기이하게 내쳐지자 고덕의 손을 중심으로 핏빛의 파도가 생겨나며 천천히 밀려 나가다 일순간 섬전을 방불케 하는 속도로 밀고 나갔다.
스팟-!
마치 천을 찢어내는 것과 같은 소음을 만들어낸 섬파가 공간에 상처를 냈다.
그리고 그 상처를 중심으로 무섭게 주변을 먹어치우던 기운이 빨려 들어갔다.
기범대라선공이 파훼되었지만, 공간을 찢어낸 섬파는 그것에서 멈추지 않았다.
“흡!”
단숨에 날아드는 핏빛 강기에 주변의 도사 하나가 다급히 검에 강기를 둘러 그 사이로 들이밀었다.
그각-
순간적으로 강기가 잘려 나갔다.
강기가 강기를 잘라내는 믿어지지 않는 괴사를 일으킨 핏빛은 이내 백미 노도사의 어깨에 피 보라를 일으키고 사라졌다.
놀란 도사들이 일제히 앞으로 달려 나왔다.
그 모습에 고덕의 입가가 비틀렸다.
“내 앞에서 머릿수만 믿고 까불면 어찌 되는지 확실히 보여 주지.”
유련수, 다강(多剛).
고덕의 음성 뒤로 보석처럼 빛나는 외팔이 그려 내는 기묘한 움직임에 따라 주변이 일그러지며, 희미한 강기 다발들이 순식간에 허공을 가득 메웠다.
고금을 통틀어 다대일 전투에서 이보다 효과적인 무술을 찾긴 어렵다.
더구나 강기를 이용하는 무공이기에 그 타격력도 만만치 않다.
아니, 가하는 내력에 따라 다르겠지만 기공창(氣攻槍) 앞에서 웬만한 바위는 순식간에 가루가 된다.
또한 제아무리 뛰어난 고수가 펼친 호신강기라도 다강이 형성한 기공창 앞에선 무용지물이었다.
잔인한 미소를 베어 문 고덕의 손이 살짝 움직여짐과 함께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던 기공창들이 흐릿한 잔상을 이끌고 달려오는 도사들에게 짓쳐들었다.
그 모습을 발견한 무극검의 경고성이 다시금 울렸다.
“피, 피해라. 기공창이다!”
전설에 회자되는 강기선공(剛氣仙功) 중 하나가 바로 기공창이다.
뚫지 못할 게 없고, 부수지 못할 게 없다는 기공창의 현신에 무극검은 물론이고 달려들던 도사들도 기함을 했다.
도사들의 전면으로 폭사되는 기공창에 무극검이 다급한 음성을 토했다.
“부디 손속에 사정을!”
무극검의 음성에 고덕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그리고 고덕의 손이 허공을 급격하게 휘어 쳤다.
이미 체외로 발출된 강기를 거두는 것은 제아무리 고덕이라도 불가능한 일.
결국 기공창들과 이어진 미세한 기력들을 이용해 도사들에게 쇄도하던 기공창들을 급격히 빗겨 쳐 바닥을 때리는 수밖에 없었다.
투두두두-
쿠왕-!
수십 개의 폭음이 회랑을 울리고, 그로 인해 벌집처럼 뚫려 버린 회랑의 청석 바닥을 바라보는 도사들의 눈엔 경악과 안도가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다급한 마음에 사정을 했지만, 자신들의 공격을 받던 이가 그 청을 들어주리라곤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무극검은 다소 얼이 빠진 표정이었다.
“가, 감사하오이다.”
무극검의 인사에 고덕이 피식 웃었다.
“말코들을 죽이면 십 년간 재수 없다는 말이 갑자기 생각났을 뿐이야!”
쑥스러운 듯 불퉁거리는 고덕에게 무극검이 포권을 해 보였다.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에게 온정을 베푼다는 것은 도를 닦은 도사들에게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 탓에 무극검의 포권은 매우 정중했다.
“정녕 감사하오. 내 검마 도우를 제대로 알지 못했던 모양이외다.”
무극검의 말에 고덕이 피식 웃었다.
“모르긴 뭘 몰라. 이미 겪어봤잖아. 그게 나야.”
여전히 불퉁거리는 고덕이었지만, 무극검의 입가에 피어난 미소는 지워지지 않았다.
* * *
자리를 옮겨 무극검과 마주 앉은 고덕은 예상외의 말을 들어야 했다.
“그럼 정말 날 기다린 게 아니란 말이야?”
“검마 도우가 올 줄도 몰랐는데 어찌 대비를 하리까?”
“흠… 그런데 서찰을 보낸 놈은 오늘 오는 것이 정확하고?”
“서찰의 말로 빌리자면 그리하였지만…….”
왔다가도 돌아갔을 가능성이 높았다. 고덕이 난리를 치는 것을 보았으니 말이다.
제아무리 무극검에게 도전하겠다고 나선 자라도 검마까지 있는 곳에 나타나긴 부담이 컸을 것이다.
“괜히 나 때문에 일만 그르친 셈이군.”
하지만 그 덕분에 무극검은 자신의 목을 지킨 셈이 되었다.
“그것도 다 인연인 게지요.”
무극검의 말에 피식 웃음을 지은 고덕이 불퉁거렸다.
“그놈의 인연 타령은 여전하군.”
“사람이 그대로인데 성정이 어디 가겠습니까?”
말을 해놓고 보니 무극검은 그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의 검마와 지금의 검마는 같은 사람이지만, 기세나 행동이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뭐랄까, 여유가 생겼다고나 할까…….
“한데 어인 일로 무당엔……?”
상념을 떨쳐 버리며 묻는 무극검에게 고덕이 답했다.
“신교 말이야.”
“신교는 이제 없는 것으로 압니다만…….”
“아니, 신교의 성전이 잠시 사라진 거지 신교는 여전히 건재해.”
하긴 눈앞에 있는 검마만 나서도 마교의 재건은 어렵지 않아 보였다.
“제게 하고픈 말씀이 무엇입니까?”
무극검의 물음에 고덕이 답했다.
“무심.”
“마교의 재건에 관심을 갖지 말라는 말씀입니까?”
“그래.”
“어려운 일입니다. 이 늙은 말코야 세상과 담을 쌓는다지만, 정천맹의 다른 이들은 마교의 재건을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건 우리 쪽에서 알아서 할 일이고.”
“하나, 피의 수레바퀴를 멈추려면 이쯤에서 마교의 역사를 끝내는 거도 나쁘지 않습니다. 검마 도우.”
무극검의 말에 고덕이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내가 정천맹 좋자고 신교를 그 짝으로 만들었는지 알아.”
고덕의 말에 무극검의 표정에 경악이 들어찼다.
“그, 그럼 마교의 일이…….”
아차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그래. 나와 마제의 의견이 갈라져 생긴 일이었다. 내가 좀 많이 흥분해서 그렇게 됐지만, 많은 수의 고수들이 빠져나갔어.”
그들을 불러 모으면 다시 마교를 일으켜 세우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니 어줍지 않은 생각을 하지 말라는 말이다.
고덕의 말에 무극검의 안색이 침중해졌다.
“정녕 그리하여야겠습니까?”
“좋은 말로 할 때 들어. 아니면 무당이나 소림을 찾아다니며 마교 짝을 낼 지도 모르니까.”
고덕의 말에 무극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멀리 마교의 일까지 갈 것도 없다. 오늘 보여 준 신위만으로도 항거 불능이라는 것은 알았으니까…….
결국 무극검이 할 수 있는 말은 한 가지뿐이었다.
“그리하지요. 하나, 다른 이들의 마음까지 내가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괜찮아. 너만 조용히 있어준다면.”
고덕의 말 속에서 마교의 재건에 다른 이를 세울 것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 무극검이 물었다.
“혹시… 혈마 도우가 건재하오?”
“역시 머리도 좋은가 봐.”
고덕의 그 말로 모든 것이 명경지수처럼 밝아졌다.
마교는 검마가 아니라 혈마가 재건할 것이라는 것을…….
그래도 바뀌는 건 없다. 검마가 혈마의 뒤에 버티고 있을 테니까…….
조용히 돌아가는 검마의 등을 무극검은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 * *
고덕이 돌아오자 객잔에서 기다리던 왕팔이 벌떡 일어섰다.
“왜?”
“어서 가야지요.”
서두는 왕팔에게 고덕이 고개를 저었다.
“안 가도 된다. 자자.”
“서, 설마 쫓아올 이들도 안 남겨 두고 다 죽인 건가요?”
왕팔의 물음에 고덕이 인상을 구겼다.
“미친……. 쓸데없는 말 그만하고 잠이나 자.”
발끈하는 고덕의 모습에 잠시 주춤거렸던 왕팔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그냥 온 겁니까?”
“그래.”
고덕의 답에 왕팔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 잘하셨어요. 무당을 건드리면 정천맹 전부가 들고일어났을 거라고요. 잘 생각하신 거예요.”
무언가를 오해한 듯한 왕팔을 바라보던 고덕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냥 오긴 했는데, 장생전은 다시 지어야 할 거다.”
“왜, 왜요?”
“왜는. 부서졌으니까 다시 지어야지.”
고덕의 말에 왕팔의 얼굴은 다시금 하얗게 질려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