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45장 (46/129)

제45장. 해후(邂逅)-만남 이후

공포의 전이는 무서웠다.

검풍에 휘말려 죽은 사람보다 밟혀 죽은 이들이 더 많았다.

수만의 적이 흩어졌고, 수천이 죽었다. 그리고 내 동료가 죽어 있었다.

밟히고 찢긴 시신을 찾아 땅에 묻는 시간은 괴로웠다.

곱은 등을 펴고 살게 해주겠다는 약속도 지키지 못했다.

더럽혀진 명예를 찾아주겠다는 말도 이젠 허공에 흩어졌다.

강호십대고수라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작고 보잘것없는 육신을 지난 추억과 슬픔에 담아 깊고, 또 깊게 묻었다.

주변을 돌아보니 남은 건 하나도 없다. 건물도 제대로 서 있는 것이 없고, 성벽 위의 누각도 무너졌다.

그 속에 자신을 죽이라고 손가락질하던 마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긴 그의 경지로 검풍에 휘말려 죽었다면 오히려 믿지 않았을 터…….

상념을 물리고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를 실행했다.

기울고 무너진 건물 아래를 뒤졌다.

반나절, 하루, 이틀, 사흘… 신강의 차가운 바람에도 시신이 진물을 토해놓았다.

나흘, 닷새, 엿새, 이레… 살아 있을 거란 신념이 무너져 가던 그때 비로소 그녀를 찾았다.

오물과 토사물이 엉켜 있는 작은 공간에 그녀가 고단한 몸을 누이고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맑은 물을 입에 흘려 넣고, 무너진 건물로 좁아진 창을 넓혔다.

비릿하지만 훨씬 많은 공기가 들어왔다. 몇 번 크게 쉰 그녀의 숨이 안정을 찾았다.

그녀를 업어 입고 있던 장삼으로 묶었다. 그리고 다시 움직였다.

다행히 소흥왕은 그녀의 옆방에 누워 있었다.

노인이었지만 그래도 사내라고 여전히 눈을 뜨고 숨을 쉬고 있었다.

“늦었습니다.”

고덕의 인사에 소흥왕이 소리 없이 웃었다,

“무, 문정이 반드시 오, 올 것이라더니 정말 와주었군…….”

갈라지는 음성이 기쁨에 넘치고 있었다. 그에게 물을 주고 조용히 안아들었다.

그렇게 위로 올라 마을을 찾아 신형을 날렸다.

* * *

강호를 충격적인 소식이 휩쓸었다.

마교의 붕괴, 괴멸.

술렁이는 강호는 그 놀라운 소식에 집중했다.

백도는 필생의 적에 대한 확인으로, 마도는 그들의 기둥을 잃은 상실감으로…….

사도는 여전히 갈 곳을 잃고 묶여 있었다.

서녕. 청해의 성도인 이 도시는 바람이 거칠고 풍광이 차가웠다.

하지만 사람들이 따뜻했고, 정이 많았다.

그 서녕의 한 의원에서 노인과 젊은 소저가 치료를 받고 있었다.

“몸은 많이 좋아졌소.”

늙은 의원의 말에 고덕이 물었다.

“얼마나 더 치료를 받으면 되겠소.”

“이제 충분히 움직일 만하니 의방을 비워주는 것도 좋겠소이다.”

의원의 말에 고덕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고맙소.”

의원의 진료실에서 나온 고덕이 의방들 중 한 곳으로 들어섰다.

“고 무인.”

앉아 있던 문정 군주가 들어서는 고덕을 맞았다.

“왜 일어나 계십니까?”

“답답합니다.”

수척해져 있었지만, 이곳에 처음 온 오 일 전보다는 훨씬 안정된 모습이었다.

“이제 조금만 참으시면 됩니다. 내일은 이곳을 떠나 귀로에 오를 생각입니다.”

고덕의 말에 문정 군주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정말 밖으로 나갈 수 있나요?”

“예. 그러니 오늘 하루만 참으십시오.”

그 말에 문정 군주가 미소를 지었다.

“믿고 있었어요.”

“무엇을 말입니까?”

“우릴 찾으러 올 거라는 거요.”

문정 군주의 말에 고덕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어렸다.

그녀가 기억하지 못하는 그때 이미 어디에 있더라도 찾아갈 거라던 약속을 해주었었기 때문이다.

“약속했었으니까요.”

“우리가 그런… 약속을 했었나요?”

기억에 없는지 조금 당황하는 군주에게 고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했었습니다.”

“그랬군요. 기억나지 않는데……. 그래서 저도 모르게 그런 확신을 가졌던 모양이군요.”

“어떤 확신 말입니까?”

고덕의 물음에 문정 군주가 살포시 웃었다. 과거처럼 아름답게 빛나는 그 웃음에 고덕은 슬펐다.

“고 무인이 반드시 올 것이란 확신이요.”

문정 군주의 말에 고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고덕의 신념 어린 음성에 문정 군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럴 것이라 믿어요.”

문정 군주의 음성이 달콤한 꿀 같았다.

오랜만에 고덕의 입가에 깊은 미소가 자리를 잡았다.

* * *

다음 날, 의원에 부탁해 구한 마차에 소흥왕과 문정 군주를 태운 고덕이 귀로에 올랐다.

왕과 군주의 행렬이었지만 시종도 없고, 기치도 없었다.

그렇게 마차를 따르는 군병 하나 없었어도 소흥왕과 문정 군주는 불편하거나 두렵지 않았다.

마부석에 무표정히 앉아 있는 고덕 때문이었다.

그렇게 여로에 오른 마차는 문정 군주의 청과 소흥왕의 묵인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풍광 좋고 이름 있는 명승을 따라 움직이는 마차는 더디고 느렸지만, 그만큼 포근하고 즐거웠다.

여정 내내 군주는 즐겁게 지저귀는 종달새 같았고, 고덕은 그것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지빠귀 같았다.

그 둘을 바라보는 소흥왕은 갈등 어린 표정이 깊었다.

두 달이 걸린 여정의 끝에 마차는 절강성에 들어섰고, 얼마 안 가 소흥에 들어섰다.

시내가 흐르는 수로를 따라 이동한 끝에 소흥 서쪽을 막고 들어선 왕부에 다다랐다.

소흥왕과 문정 군주의 귀환에 장수들과 군병들의 환호가 터져 나왔고, 황제의 명으로 나온 환관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소흥왕과 문정 군주가 처소에 든 것을 확인하고 돌아서는 고덕을 어느새 돌아와 있던 호철랑이 반겼다.

“귀환을 환영합니다, 고 무인.”

“그렇게 떠나와서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그 결과가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이니 다행이지요.”

“그리 생각해주시니 고맙습니다.”

고덕의 답에 호철랑이 비켜섰다.

“만나볼 이들도 많고, 쉬기도 하셔야 하니 전 나중에 다시 뵙겠습니다.”

“그러지요.”

고덕의 답에 호철랑이 떠나가자 혈마를 비롯한 이들이 다가왔다.

“어찌 되신 겁니까?”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그런데 목 대협은 어디 간 겁니까?”

중구난방 한 번에 쏟아지는 이들의 물음에 고덕은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야기가 길다. 그리고 목려송은 신강과 내 가슴에 묻었다.”

고덕의 답에 사위가 조용해졌다. 고덕의 말대로 그 안에 든 길고 슬픈 이야기를 느낀 탓이다.

“쉬시게 해드리지.”

혈마의 음성에 사람들이 물러섰다.

작은 미소로 혈마의 어깨를 두드려 준 고덕이 천천히 자신의 숙사로 발길을 옮겼다.

오랜만에 돌아온 숙사에서 익숙한 의자에 등을 기대자, 집이 그리웠다.

돌아온 이에게 칼을 들이밀던 그런 집이 아니라 주름 가득한 형수가 문 앞에서 기다리던 그리운 내 집이…….

똑똑.

“패주.”

“들어와.”

고덕의 허락에 혈마가 들어섰다.

“찾으셨습니까?”

헤어지기 전에 조용히 숙사로 오라는 전음을 남긴 탓이다.

“할 말이 있어 오라 했다.”

고덕의 음성에 혈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신… 교의 일입니까?”

“그래.”

“설마… 패주가 하신 일이었습니까?”

잘게 떨리는 혈마의 물음에 고덕의 고개가 작게 끄덕여졌다.

“그래.”

“흐음…….”

수많은 생각이 몰려드는지 혈마는 깊은 신음을 흘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작은 명패와 피 묻은 비단 한 조각을 내밀었다.

“무엇… 입니까?”

“교주가 네게 남긴 것이다.”

고덕의 말에 고개를 숙인 혈마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보… 셨습니까?”

“그래. 다만 너무 가슴 아픈 모습이었다.”

고덕의 말에서 무언가를 느낀 혈마가 고개를 들었다.

“혹시… 정말로 변고가 있었던 겁니까?”

“비파골이 뚫려 지하 뇌옥에 갇혀 있었다.”

고덕의 답에 혈마의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휴, 흉수는…….”

“나도 싸움이 시작되기 전에 한 번밖에 보지 못했다. 나로서도 그가 진짜 교주인 줄 알았다.”

완벽한 모습에 음성이었다. 지금 눈앞에 데려다놓는다 해도 고덕은 구별할 자신이 없었다.

“어디의 누구랍니까?”

이를 악문 음성… 복수를 다짐하는 것이다.

그런 혈마에게 고덕은 고개를 저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나도 알지 못한다.”

고덕의 답에 혈마의 안색이 흐려졌다. 그런 그에게 고덕이 권했다.

“비단을 펼쳐 보거라.”

고덕의 말에 피 묻은 비단을 펼쳐 본 혈마의 표정이 굳었다.

승(承)

피로 쓴 한자가 가진 의미가 태산처럼 다가왔다.

“이, 이게…….”

“짐작하겠지만 교주는 네게 신교의 명맥을 이어달라고 부탁했다.”

물론 처음에 그 부탁의 대상은 고덕 자신이었다.

그날, 군주를 찾으며 온 마교의 지하를 모두 뒤지던 중간에 발견한 진짜 마제의 모습은 참경 그 자체였다.

비파골을 뚫고 들어간 쇠고리와의 연결 부위가 파랗게 일어서 있었다.

쇳독에 옮아 살이 썩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교, 교주……?”

“클클클… 이제나저제나 기다렸더니 너무 늦게 오셨네… 쿨럭쿨럭…….”

기침에 섞여 튀어나오는 피와 내장이 검다. 대라신선(大羅神仙)이 오더라도 되돌리긴 늦은 것이다.

“이게 무슨 꼴이요?”

“무슨 꼴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까불다 벼락 맞은 꼴이지……. 클클클.”

회한 가득한 마제의 음성에 고덕이 눈살을 찌푸렸다.

“후회라니… 교주답지 않소.”

“나다운 거……? 뭐, 자네에게 내 자리를 빼앗길까 봐 전전긍긍했던 거?”

“교주…….”

“다 내가 부른 화일세. 후회는 해도 서운할 것도, 억울할 것도 없지.”

“…….”

차마 뭐라 대꾸하지 못하는 고덕을 바라보며 교주가 말했다.

“여기, 흐음… 이거…….”

자신의 아랫배를 손으로 뚫어 끄집어내는 금패가 보였다.

“이, 이게…….”

“클클클, 놈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삼켰거든… 쿠, 쿨럭.”

이전과 달리 붉은 피다. 아랫배를 건드린 탓에 속이 완전히 망가진 것이다.

이젠 죽어가는 속도가 빨라질 터였다.

“교주…….”

“시간이 없네. 부탁하네. 교를… 신교를 이어주게.”

처절한 교주의 부탁이었지만 고덕은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정에 이끌려 고개를 끄덕이면 피의 길을 다시 걸어야 했다.

그렇게 되면 이제 간신히 찾아가고 있다고 느끼는 소소한 일상은 영원히 멀어지게 될 것이다.

그것은 원하지 않았다.

어렵게 고개를 젓는 고덕의 모습에 교주의 눈이 절망에 찼다.

“대신 혈마에게 전하겠소.”

고덕의 답에 죽어가던 교주의 눈이 살아났다.

“고, 곡우가 자네에게 가 있던가?”

“교주가, 아니 가짜가 검존을 죽이라 보낸 걸 가로챘소.”

“크크크, 내 그놈의 일이 잘되지 않을 거라 했었지… 클클… 커헉, 쿨럭.”

“교주…….”

“괜찮아, 괜찮아. 늦게 온다고 저승사자가 자꾸 재촉하는 것이니…….”

말하는 마제의 모습이 허허로웠다.

그런 자신을 처연하게 바라보는 고덕에게 마제가 말을 이었다.

“그런 눈빛으로 보진 말게. 바보 같았다는 경멸은 해도 불쌍하게 보진 말아.”

“…….”

차마 아무 말도 못하는 고덕의 모습에 피식 웃어 보인 마제가 말했다.

“그럼 성화령과 이걸 곡우에게 전해주게.”

자신의 옷자락을 찢어, 자신의 피로 한 글자를 적었다.

승(承)

피 묻은 성화령과 비단 조각을 손에 쥔 고덕에게 마제가 웃어 보였다.

그대로 미동조차 하지 않는 마제를 바라보는 고덕의 눈에서 눈물 한 줄기가 흘렀다.

천하오존으로 강호인들의 우러름을 받던 무인의 결말치고는 너무 잔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마제가 떠났다.

그리고 그렇게 맡겼던 것들을 혈마에게 전해주었다.

자신이 건넨 성화령과 마제의 유언이 적힌 비단 조각을 받아들고 부들부들 떠는 혈마에게 고덕이 말했다.

“깨어져 흩어진 이들을 모으려면 고생이 많을 것이다. 거기에 백도의 추격이 벌어질 수도 있고.”

“무극검만 나서지 않는다면 자신 있습니다.”

의지를 불태우는 혈마에게 고덕이 작은 힘 하나를 실어주었다.

“무극검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그 말은 움직이지 않게 하겠다는 뜻이다.

고덕의 말에 혈마가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패주.”

함께 교를 세우자는 말은 하지 않는다. 혈마 그도 교주의 의지가 고덕이 아닌 자신에게 이어진 이유를 짐작하기 때문이다.

“언제 움직일 생각인가?”

“가라 하시면 지금이라도 가겠습니다.”

“조금… 조금만 기다리게. 잠시 숨을 고르고 무당을 다녀올 테니…….”

무당, 무극검의 일을 해결하려 가는 걸 말함이다.

“예, 패주.”

다시금 고개를 숙이는 혈마의 손에 성화령과 비단 조각이 굳게 쥐어져 있었다.

* * *

소흥 왕부의 일상은 예전으로 돌아갔다.

이미 황실의 지원을 받아 습격으로 입었던 상처는 모조리 복구가 된 상태, 주변을 둘러봐도 작은 상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 왕부의 정원을 고덕이 문정 군주와 함께 걸었다.

“되살린 정원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 같군요.”

문정 군주의 말에 고덕의 시선이 정원 구석구석을 훑었다.

그녀의 말대로다. 작은 잔디 하나, 꽃나무 하나 섬세하게 모두 예전처럼 되살아나 있었다.

“그렇군요.”

“사람도 정원처럼 추억이라는 걸 이렇게 까맣게 잊을 수도 있을까요?”

문정 군주의 물음에 고덕의 눈에 작은 슬픔이 스쳐 지나갔다.

“글쎄요…….”

“하아~ 난 추억이 잊히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문정 군주의 말에 고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을 바라보는 고덕의 눈에 갈망이 어려 있다는 것도 모르는 문정 군주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탄성을 터트렸다.

“하늘이 참 맑네요.”

그 말을 따라 고개를 든 고덕의 하늘은 뿌옇게 흐렸다. 자신도 모르게 차오른 습막이 시선을 가렸기 때문이다.

멀리 왕부의 누각에서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던 소흥왕에게 황제의 명을 받아 내려와 있던 환관 하나가 조용히 아뢰었다.

“황상께서 전하라 하신 밀의가 있사옵니다.”

“말하라.”

창밖에서 시선을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소흥왕에게 환관이 조용히 말했다.

“문정 군주님의 배필을 청하는 왕야의 상소에 황상께선 동북어위도총사(東北御衛都摠使) 척계광이 어떠한지 여쭈라 하셨습니다.”

원래 소흥 왕부에 파견될 예정이던 환관들의 임무가 바로 이것이었다.

다만 여정 중에 소흥 왕부의 비보를 접한 황제가 왕과 군주가 돌아올 때까지 돌아오지 말라는 명을 내렸을 뿐이다.

“흠… 척계광이라…….”

요녕, 길림, 흑룡강을 아우르는 동북 삼성의 총독과 병마절제사를 겸하는 군벌이었다.

“최근에 등장한 가장 강력한 군벌로, 금사 왕부가 적몰된 이후 최강의 군사력을 가진 집단이옵니다.”

힘없는 황제로서는 구미가 당기는 혼처일 것이다. 그리고 소흥왕에게도 든든한 배경이 될 테고…….

문제는 그자의 나이가 이제 쉰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돌아가 아뢰거라. 의중을 받들겠노라고.”

“예, 왕야…….”

환관의 가냘픈 음성이 돌아서는 소흥왕의 등 뒤로 남았다.

* * *

왕부로 돌아온 지 삼 일째. 호철랑이 고덕을 찾았다.

“어째 제가 궁금하지도 않으셨나요? 그 뒤로 부르지도 않으시니…….”

서운하다는 표정이 역력한 호철랑에게 고덕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미안합니다. 정신이 없어서…….”

“뭐, 사정은 아니 이번은 용서를 해드리지요.”

“고맙습니다.”

고덕의 미소에 호철랑이 바짝 다가앉았다.

“안 순무가 안부를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그 작자가 제게요?”

별로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인 고덕에게 호철랑이 말을 이었다.

“다음에 올 땐 제발 기척 좀 하고 오라고 전해달라더군요.”

안창다운 말이라 생각한 고덕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참! 창군은 어찌 되었습니까?”

“그길로 헤어졌습니다. 말로는 동북으로 간다더군요.”

“동북이면…….”

“최근에 동북 지방에 제법 커다란 군벌이 세워졌거든요.”

“어느 정도이기에 군벌이란 명칭이 붙은 겁니까?”

가뜩이나 왕부들의 거센 도전에 직면한 황제가 친위 반정을 일으킬 정도다.

그런데 자금성 바로 머리 위쪽인 동북 삼성에 강력한 군벌이라니.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은 안 순무에게 몰락한 금사 왕부의 석년과 맞먹는 세력입니다. 물론 군력만이라면 금사 왕부보다도 강력하지요.”

“얼마나 되기에 그런 평입니까?”

“우선 동북 삼성의 향방군이 각기 오만씩 십오만입니다. 거기에 우군도독부 병력이 이십만, 거기에 사병이 오만이니 도합 사십만의 대군이 그 군벌의 손에 들려 있는 셈이지요.”

호철랑의 설명에 고덕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사십만이라니, 엄청나군요.”

“엄청나죠. 더구나 그들이 모두 여진이나 거란과 전투를 경험한 정예 병력이라는 것이 더 중요하고요.”

“그런 병력을 휘어잡았다면 뛰어난 사람인 모양이군요.”

“뛰어나죠. 머리 좋고, 결단력 있고, 추진력 강하니까요.”

호철랑의 말에 고덕이 물었다.

“혹 잘 아는 사람입니까?”

“그… 뭐, 잘 안다기보다는 관심이 좀 있었습니다.”

“왜 그에게 관심을 가졌는지 물어도 됩니까?”

“언제 망할지 보려고요.”

뜻밖의 답에 고덕이 놀란 음성을 토했다.

“예?”

“제가 칭찬을 했기 때문인가요?”

“그렇습니다. 잔뜩 칭찬해놓고선 망하길 기다린다니까요.”

“훌륭한 건 훌륭한 것이고, 좋지 않은 인연은 좋지 않은 인연이죠, 뭐.”

“그와 좋지 않은 인연이 있습니까?”

고덕의 물음에 호철랑이 특유의 미소로 말을 돌렸다.

“자자, 이제 그 이야긴 그만하죠.”

하긴 남의 사생활에 깊숙이 개입할 생각이 없었던 고덕은 호철랑의 의중에 따랐다.

“그러죠.”

순순히 관심을 걷은 고덕에게 호철랑이 물었다.

“근데 언제 시작합니까?”

“뭘 말입니까?”

“왕부 군사를 확충한다는 거 말입니다.”

“그런 일이 있습니까?”

고덕의 반문에 호철랑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무리 임시라곤 하지만 왕부시위총관을 맡고 계신 분의 입에서 나온 소리라고는 믿기 어렵습니다만…….”

“그런가요……? 아마 제가 무심했던 모양입니다.”

“예. 바로 관심을 기울이셔야 할 거예요. 챙길 게 적지 않거든요.”

호철랑의 말에 고덕이 미소를 지었다.

“그럼 오늘 찾아오신 건 그걸 도와주러 오신 거로군요.”

“무, 무슨 소리를요. 전 그냥 놀러 왔다고요, 놀러.”

왠지 당황한 모습을 보이는 호철랑에게 고덕이 조금 더 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말씀대로 알아보고 도움을 청하지요.”

“흠흠… 뭐, 원하시면 돕긴 하겠지만… 여하튼 오늘은 그냥 놀러온 거예요. 정말이에요.”

호철랑의 주장에 고덕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오늘은 그저 놀러온 겁니다. 그리 이해하지요.”

고덕의 말에 얼굴에 홍조를 드리운 호철랑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럼 오늘은 다 놀았으니 다음에 또…….”

서둘러 자리를 떠나려는 호철랑을 고덕이 불렀다.

“호 판관.”

“예?”

“고맙습니다. 그리고 미안합니다.”

여러 의미가 담긴 고덕의 말에 호철랑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급히 자리를 떴다.

* * *

호철랑이 다녀간 이후 고덕은 왕부 장군부를 방문했다.

이미 습격 시에 당한 상처를 모두 치료한 이첨이 고덕을 맞았다.

“어서 오시오, 고 무인.”

“인사가 늦었습니다.”

고덕이 돌아온 이후 처음 대면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니요. 서로가 바빴지요.”

“정말 그랬습니다.”

고덕의 답에 고개를 끄덕인 이첨이 물었다.

“그나저나 어쩐 일이시오?”

“궁금한 것이 있어 왔습니다.”

“말씀하시오.”

이첨의 말에 고덕이 물었다.

“혹시 왕부 병력을 확충합니까?”

“그, 그걸 어찌……?”

상대의 반응에서 고덕은 자신이 무심해서 몰랐던 것이 아니라 고의적으로 배제되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소문이 들려서요. 혹 제가 몰라도 되는 것이었습니까?”

고덕의 물음에 이첨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답하기 곤란했던 것이다.

“그게…….”

“내가 고 무인에겐 알리지 말라 했네.”

다른 음성에 고덕과 이첨의 시선이 뒤로 돌아갔다.

“왕야…….”

황급히 일어나 군례를 취하는 이첨의 뒤로 가볍게 포권을 취하는 고덕이 보였다.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일단 앉으세.”

고덕에게 입은 은혜가 작지 않았던 소흥왕은 난감한 표정으로 자리를 권했다.

그의 말에 자리에 앉은 고덕에게 소흥왕이 설명을 이었다.

“고 무인은 야인일세. 언젠간 강호로 돌아갈 사람이겠지.”

“그야…….”

그럴 것이다. 납치 사건 이전에 이미 경비가 확충되면 떠나려고 마음을 다잡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굳이 짐을 지우지 않았네. 어차피 남은 사람이 짊어져야 할 짐, 고 무인은 있는 동안 홀가분한 마음으로 왕부를 지켜 주었으면 하네.”

말대로라면 자신을 위했다는 것인데 왠지 기분은 좋지 못했다.

그렇다고 표시도 낼 수 없다. 소흥왕의 말은 틀린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군요. 전 제가 무심해서 놓친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건 아니니 걱정하지 말게.”

“예, 알겠습니다.”

고덕의 답에 소흥왕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간혹 내게도 들러주게. 좋은 차를 대접할 테니.”

“그리하겠습니다.”

고덕의 답을 들고 신형을 돌리는 소흥왕의 표정엔 자괴감이 옅게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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