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44장 (45/129)

제44장. 섬멸(殲滅)-모든 것을 부수다

“뭣이라. 명왕의 검!”

“예, 소주. 사부께서 그리 전해올리라 하셨습니다.”

“도대체 검마의 능력이 어디에 닿아 있기에 도망치듯 돌아와 명왕의 검을 말하는가?”

“그것이 아무래도… 생사경 같았습니다.”

“뭣이라! 생사경!”

“예, 소주.”

“흐음… 분명한 것인가?”

마제, 아니 마제의 얼굴을 한 소주의 물음에 추겸은 사부인 막리의 당부가 생각났다.

‘네가 느낀 것보다 배로 답을 드리거라. 반드시 배로.’

“생사경은 분명합니다. 그것도 초입은 아닌 듯 보였습니다, 소주.”

추겸의 답에 마제는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진짜 마제가 누누이 이야기했던 검마의 능력이 생각 이상으로 높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명왕의 검은 우리의 힘이 아닌 마교의 힘을 사용하는 것. 아쉽긴 하지만 손해나는 일은 아니겠지.”

마제의 중얼거림에 추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온데 소주, 도대체 명왕의 검이 무엇입니까?”

“명왕의 검은 마교에 내려오는 하나의 암구호다.”

“암구호요?”

추겸의 의문에 마제가 답을 이었다.

“그래. 감당할 수 없는 적이 내습함을 안 경우, 미리 알려 대비케 하는 것이 바로 명왕의 검이지.”

“하면 어찌하는 것입니까?”

“마교가 가진 힘 전부를 쏟아부을 것이다.”

“전… 부 말입니까?”

놀라는 추겸에게 마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진 것 모두 말이다.”

“하오면 마교를 버리는 것이 아닙니까?”

“글쎄, 정말로 생사경의 중간이라면 다 날아간다고 봐야겠지.”

마제의 답에 추겸이 경악 어린 표정을 지었다.

“마교를 얻기 위해 들인 노력이 얼마인데, 그걸 날린단 말입니까?”

“그래도 어쩔 수 없어. 검마가 정말로 생사경의 중간이라면 명왕의 검은 필연적이야.”

“차라리 멸천주께…….”

“어림도 없는 소리! 더 이상 멸천주께 손을 벌렸다간 내 목이 남아나질 못해.”

틀린 말은 아니다. 멸천주의 성격상 아무리 피붙이라도 실수가 누적되면 결코 용서할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긴 합니다만…….”

“가서 멸전을 준비시켜.”

“설마 멸전도 투입합니까?”

놀라는 추겸에게 마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놈은 마교에서 패주라 불리던 놈이야. 놈의 정체가 드러나면 명왕의 검이고 뭐고 다 중단될 것이야. 잘못하면 마교가 통째로 놈에게 넘어갈 수도 있어.”

“하지만 소주를 교주로 착각하고 붙은 이들이 제법 많지 않습니까?”

“검마 놈이 없을 때의 얘기다. 그놈이 버젓이 모습을 드러낸 이후에도 그 충성 맹세가 지켜진다고 보기엔 어려워.”

“하면 멸전이…….”

“그래. 멸전이 검마가 자신을 밝히는 것을 가로막아야 해. 다시 말해 다른 생각을 실행할 수 없을 정도로 밀어붙여야 한다는 거다.”

“하지만 그리 몰아붙이자면 멸전의 피해도 무시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도 할 수 없어. 놈이 마교를 얻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하긴 생사경의 중간에 이른 놈이 마교까지 얻으면 아무리 천세삼천이라도 두려운 적이 될 터였다.

“알겠습니다. 준비시켜 놓겠습니다, 소주.”

“멸전은 네게 맡긴다, 추겸.”

“맡겨 주십시오, 소주.”

“좋아, 가라.”

“명!”

복명한 추겸이 나가자 마제는 군사 황준경을 불러들였다.

“부르셨습니까? 교주님.”

“넌 나를 얼마나 믿나?”

갑작스런 물음에 당황한 군사가 조심스레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군사의 의문에 교주는 조금 더 명확하게 물었다.

“내가 패주를 치겠다면 날 따르겠냐는 말이다.”

교주의 물음에 비로소 패주를 노리는 일이 진행 중이라는 것을 인지한 군사가 고개를 조아렸다.

“이미 모든 것을 교주께 바친 몸입니다. 무엇을 망설이겠습니까?”

군사의 답에 희미한 미소를 지은 교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자네를 믿지. 이제부터 내가 하는 명을 수행하게.”

“하명하십시오.”

“명왕의 검을 준비하게.”

“며, 명왕의 검을 말씀입니까?”

놀라는 군사에게 교주가 힘을 주어 답했다.

“그래. 명왕의 검을 준비해.”

“하지만 패주가 그 정도로 강하다곤 믿기 어렵습니다.”

“믿어.”

“교주님…….”

군사의 표정에 두려움이 떠오르는 걸 확인한 교주가 말을 이었다.

“진정으로 그 정도로 강하다는 게 아니야. 강하다고 믿으라는 거지.”

“그 말씀은……?”

“최대치로 놓고 단숨에 짓밟자는 말이야.”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하오나 명왕의 검은 전 교도들을 동원하는 일. 자칫 패주를 알아보는 이라도 나오는 날엔…….”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교내에서 패주의 얼굴을 아는 건 단 두 명, 나와 부교주뿐이니까.”

부교주는 교외로 임무를 받아 나갔고, 교주는 패주를 죽이려 한다.

다시 말해 밝혀질 일이 없다는 말이다.

“알겠습니다. 곧 준비시켜 놓겠습니다.”

“교내엔 강적의 내습이라고 하고.”

“미지의 세력이 급거 신교 쪽으로 이동 중이라고 공표하겠습니다.”

“좋아. 자네가 실수 없이 처리해.”

“예. 맡겨 주십시오.

“좋아, 가게. 가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기다려.”

“예, 교주님.”

복명한 군사마저 나가자 마제가 허공에 말을 붙였다.

“배신할 가능성은?”

“군사는 속이 좁지만 겁이 많습니다. 배신은 하지 않을 겁니다.”

“그래도 검마의 능력이 드러나는 순간 위험한 생각을 할 수도 있어.”

“하오면…….”

“시작과 동시에 없애줄 수 있겠나?”

“그리하겠습니다.”

허공의 답에 마제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갑자기 마교에 바람이 불었다. 미친 것 같은 광풍이…….

근방 백 리 안에 존재하는 모든 교도들이 소집되고, 장로들이 무장 부대들을 일일이 점검하기 시작했다.

중원인들이 마교라 부르며 두려워하는 철인들의 대지가 갑작스런 부산함에 깨어나며 한밤의 농도 깊은 긴장감에 휩싸였다.

* * *

신강에 들어서 죽음의 열사인 탑리목 분지를 지나면 일반인들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안개에 싸인 거대한 산맥이 나온다.

이 산맥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은 그곳을 어둠의 땅, 죽음의 산맥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곳을 강호에서 마교라 부르는 곳은 철혈의 대지, 십만대산이라 불렀다.

그 탓에 혹자는 봉우리가 십만 개가 넘는다 하여 그렇게 부른다지만, 사실 그것들은 봉우리라기보다는 절애(絶崖)들의 수였다.

한 산봉우리에도 수 개에서 수십 개에 이르는 절애들이 모여 있는 곳이 바로 십만대산이었던 것이다.

신강의 최대 산맥은 누가 뭐라고 해도 천산산맥이다.

하지만 그 험한 천산보다도 기세가 험한 곳이 바로 십만대산이었다.

수도 없는 절애와 살짝만 밟아도 무너져 내리는 절벽 위 토사들.

수많은 사람들이 올랐다 실종된 이곳에 마교라는 무림 단체가 문을 연 것은 일천 년 전이었다.

어느 날 홀연히 나타난 이 강력한 무파는 문을 연 후 얼마 있다 조용히 중원을 향했다.

그렇게 시작된 마교의 중원행은 중원 마도의 하늘이라던 마왕성을 먹어치우고, 일백만 중원 마도인의 하늘이 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가 싶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보여 준 마교의 무력과 엄청난 고수의 수는 중원 무림에 경악을 안겨 주었다.

결국 위기를 느낀 백도 무림과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결과였다.

결코 일개 무림 세력 간의 충돌이라 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양의 격돌이었다.

수만을 헤아리는 고수와 그 수만큼의 병장기의 충돌.

결국 위기감을 느낀 국가가 개입했고, 중원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제국에 의해 그들은 전투를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서로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만 남긴 채, 미완으로 남은 백마전쟁은 언제라도 다시 타오를 불씨를 남겨 둔 채로 끝이 났다.

그리고 근 오백여 년이 흐르고 나서 이루어진 두 번째 충돌.

그러나 일 차 충돌에서 나라의 간섭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뼈저리게 느꼈던 강호는 실제의 지배자인 제국의 눈을 피해 전투를 벌였다.

고수들을 나누고 지역을 나누었다. 겨우 수십에서 많아야 수백의 고수들이 서로의 신념을 위해 피를 뿌렸다.

그러나 소수란 그만큼의 정예를 뜻하는 것.

규모가 축소된 싸움의 단위 수에 비해 그 처절함은 대규모 전투에 비할 수 없이 고조되었다.

수많은 시간이 흐르고, 그 시간만큼 많은 고수들이 쓰러져갔으나 양쪽 어느 쪽도 승기를 잡을 수가 없었다.

결국 또다시 서로의 심장을 겨눈 검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수백의 백도 문파가 연합하고도 물리치지 못했던 단 하나의 문파, 그것이 바로 마교였다.

그런 마교가 자리 잡고 있는 십만대산으로 일단의 사람들이 다가서고 있었다.

* * *

멀리 보이는 것은 제법 커다란 마을을 끼고 있는 거대한 성의 모습이다.

적어도 수성을 염두에 둔 것이 분명한 형태를 띠고 있는 성의 규모는 중원의 몇몇 왕성들을 훌쩍 뛰어넘어 자금성의 규모만큼이나 거대한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활발한 느낌보다는 무엇인가 가라앉은 느낌이 강하다.

그런 느낌은 마교의 성으로 다가설수록 강하게 들었다.

제법 커다랗게 보이는 마을도 사람이 적고, 왠지 긴장감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중요한 손님을 맞는다는 자중의 분위기보다는 무엇인가 폭발하기 직전의 느낌이 더 강하게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덕은 그것을 그만 놓치고 말았다.

불현듯 찾아온 무상함에 버리듯 떠났던 옛 고향에 돌아온 감상이 감각을 무디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성 앞 마을을 지나 성문에 다다르자 커다란 성문이 거의 소리를 내지 않고 부드럽게 열렸다.

그 커다란 문을 여는 것은 팔 척 장신에 온몸을 근육으로 두른 수십 명의 역사(力士)들이었고, 그렇게 열린 성문 안에선 교도들이 나와 그들을 영접했다.

긴장감이 흐르는 것은 느껴지지만, 모여 있는 모양은 분명 영접의 형태였다.

그 탓이었다.

걱정스런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목려송의 우려를 무시한 것은…….

막리를 길잡이로 앞세우고 목려송과 웅, 그리고 인질들을 이끈 고덕이 다시 마교에 발을 디뎠다.

“흠…….”

수많은 상념과 감상이 몰려들었다.

짧은 한숨에 잔인하도록 시린 십만대산의 공기가 빨려 들어왔다.

공기에서 쇠 냄새, 땀 냄새, 그리고 철인들의 냄새가 났다.

스스로 알알이 곤두서는 힘줄이 철인들의 대지에 돌아온 것을 환영하는 것 같았다.

지그시 쥐어보는 손에 잡히는 것은 주체할 수 없는 힘!

과거 이곳에서 천하를 내려다보던 그때의 웅지가 살아나는 것 같았다.

그렇게 고덕과 일행은 마교의 문 안으로 들어섰다.

열화와 같은 환영은 아니었으나 공손히 양쪽으로 시립해 있는 교도들을 지나 중앙으로 좀 더 들어가니 커다란 광장 안쪽, 한눈에도 수뇌로 보이는 이들이 모여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을 일별한 막리가 고덕에게 양해를 구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들의 등을 바라보다가 양옆에 시립해 있는 교도들을 보니, 역시나 천마신교의 교도들이다. 모두가 적어도 일류 이상의 고수들. 아마 수련하는 하급 고수들은 부르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어림잡아 보아도 대략 삼천. 이 정도 수에 이르는 자들이 모두 일류를 상회하는 고수들이라니, 역시나 자랑스러운 천마신교였다.

뿌듯한 느낌에 가슴을 조금 더 펴고 걷는 고덕의 모습을 뒤따르는 목려송이 걱정스런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가 이들에게서 느끼는 것은 엄연한 전의. 짙은 향수와 과거의 회상이 고덕에게 겨우 긴장으로 다가오게 만든 느낌을 목려송은 전의로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가운데로 다가가자 그가 보였다.

마제… 주인이되 주인이 아닌 자.

천마신교의 반쪽 암천의 주인 마제, 또 다른 반쪽 광혈의 패주 검마.

그 숙명이 다시금 얼굴을 맞댔다.

깊고 복잡한 상념들이 쏟아져 들어오는 순간, 마제의 손이 고덕을 향했다.

그리고 들려온 한마디.

“멸!”

갑자기 고덕과 일행의 양옆에 서 있던 마교의 무사들이 검을 빼들고 사납게 달려들었다.

교주의 명에 미리 돌아와 멸전을 지휘하던 적검마 추겸도 공격에 가세했다.

뭐라 입을 열기 전에 추겸의 맹렬한 검격이 고덕을 위협해왔다.

당황과 자괴감이 물밀듯이 몰려왔다.

옛 동료라 반겼던 이들의 적의와 살의로 눈이 따가웠다.

발을 움직여 추겸의 검을 비켜났다.

짧은 움직임만으로 치명적인 공격을 피해내자, 먼저 몸을 빼냈던 막리도 공격에 가담했다.

사방에서 갑자기 몰려드는 마교인들을 맨 처음 마중한 것은 고덕이 아니라 목려송의 주먹이었다.

따당-

맑은 소리와 함께 목려송의 음양권이 사방에서 춤추기 시작했다.

강호십대고수, 화경의 경지가 노름해서 따낸 건 아니라는 것을 목려송은 전신으로 보여 주었다.

콰과과광쾅-!

음기와 양기의 충돌로 맹렬한 폭발이 일어나고, 주변에 몰려들었던 마교도들이 그 폭발에 휘말려 날아갔다.

하지만 죽어나간 마교도의 자리는 금세 채워졌다.

너무 빠른 대응이다. 순간적인 과도한 진기의 유통에 주춤거리는 목려송을 향해 수십의 창검이 쏟아졌다.

그 공간으로 화려한 점이 쏟아졌다.

어느새 고덕의 허리를 벗어난 애검 명혼이 요사스러울 정도의 붉은 점들을 토해냈다.

그와 함께 시작된 피의 향연.

붉은 점 하나에 핏방울 하나!

빠르게 펼쳐지는 고덕의 검술과 달리 점들은 너무도 조용하게 피를 머금었다.

점 하나하나가 무섭게 짓쳐드는 마교 고수들의 미간을 신기에 가깝게 파고들며 그들에게 죽음을 안겨 주었다.

그 뒤를 따른 것은 여유를 찾은 목려송의 파괴적인 장력이었다.

강력하게 몰아친 목려송의 장력에 주위 수 장이 초토화되며, 주변을 피의 웅덩이로 만들어놓는 패악함을 보여 주었다.

순식간에 주변은 피떡이 된 주검들로 가득 찼다.

빠르게 변하는 고덕의 검이 공간 자체를 허물어갔다.

피, 피, 피! 사방이 피로 채워지며, 마교의 고수들이 짚단처럼 쓰러졌다.

하지만 수가 너무 많았다. 몸을 움직일 공간을 만드는 것도 쉽지 않았다.

좌충우돌 적을 치고, 돌리고, 휘어 베고, 정신없이 적을 몰아쳐 가던 고덕의 눈에 장력을 뿜어내며 선전하는 목려송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익힌 음양혼원공의 공능으로 파괴력이 큰 권법과 장법이 주변을 압도했지만, 그것도 한계가 존재한다.

음양혼원공 자체가 단숨에 내력을 쏟아내는 무공이기 때문이다.

이런 난전에서 내력이 달리면 남은 것은 죽음뿐이다.

걱정에 서둘러 목려송에게 달려가려는 고덕의 주위로 검진이 떨어져 내렸다.

혈천마검대.

교주의 친위대다. 한때 고덕이 단련시켰던 마검대와 쌍벽을 이루었던 마교의 부대.

그들이 혈천검진을 이루고 고덕의 이동을 막았다.

순간 공기가 빨려 나갔다. 빠르게 회전하는 혈전검진이 공기를 밖으로 빼내는 것이다.

살기 위해 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부수는 것뿐이다.

사방을 빠르게 움직이던 고덕의 검이 갑자기 멈추었다. 그리고 천천히 상단에서 하단으로 내리그어졌다.

그가가가각.

철판 긁는 소리의 뒤로 피를 내뿜은 혈천마검대원 둘이 튕겨 나갔다.

슈우우우-

공기가 돈다.

혈천검진의 약점은 검진의 파훼가 어려운 대신 파훼하는 동시에 쉽게 무너진다는 것이다.

혈천마검대원이 나가떨어진 곳으로 고덕의 검이 뛰어들었다.

쾅-!

흡과 발!

순식간에 몰려든 내기를 단숨에 폭발시킨다.

검술이라 말하기조차 두려운 단 한 수에 혈천마검대 절반이 피에 잠겼다.

“크읍.”

익숙한 음성. 놀란 눈을 들어보니 목려송의 가슴과 허리에는 검이 꽂혀 있다.

검날이 장기를 가르고 지나가는 고통에 목려송의 입에서 절로 신음이 터진 것이다.

목려송이 비명을 지르며 잠시 주춤한 그 순간, 온몸에 수많은 검이 꽂혀 들었다.

찰나! 최초의 검을 허락한 후 정말 찰나의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건만, 온몸에 수많은 검들이 꽂혀 마치 고슴도치처럼 변한 목려송은 천천히 쓰러졌다.

목려송이 쓰러지자 그를 밟고 전진하는 마교의 고수들로 인해 그의 시신은 금세 인파 속에 묻혀 버렸다.

반사적으로 휘두른 명혼에 목이 잘린 마교도의 피가 얼굴에 튀었다.

섬뜩함이 고덕의 정신을 다시 현실로 데려다놓았다.

“아아악~!”

거칠게 뿜어지는 커다란 외침. 아니, 절규이리라.

고덕의 입을 열고 터져 나온 것은 완전한 적의, 강대한 살의였다.

현실로 돌아오자마자 고덕의 검이 적을 뚫고 들어가 폭발했다.

섬파(閃破)!

마교도들의 피를 머금어 핏빛으로 불타오르는 섬뜩한 파랑이 주위를 휘몰아쳤다.

핏빛 파랑이 훑고 지나가는 범위 안에 들어 있던 마교도들의 몸이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아직도 붉은 기운이 일렁이는 명혼을 거둬 허공에 뿌렸다.

적의 피가 흩날리고, 서늘한 바람이 검을 타고 휘돈다.

무너진 적을 가리키는 검에서 강력한 진기의 파장이 일어섰다.

적이 가득한 공간, 검이 가리킨 곳을 향해 강력한 진기가 뻗어나갔다.

콰과과과과광-

바닥을 포장한 청석이 두부인 양 으깨져 나가며 전면으로 치달았다.

검을 내뻗은 고덕이 자신의 내부를 터질 듯 채운 진기를 오른발로 몰아 내디뎠다.

쾅-

순간, 주변을 파괴하며 퍼져 나가는 강력한 진기.

일대의 마교도들이 폭발에 휩쓸려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뒤로 당긴 검을 다시금 앞으로 뻗는다.

검에 서린 기운이 붉은색에서 푸른색으로 바뀐다.

짜작, 짜작.

작게 튀겨 오르는 전격이 검을 타고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뇌격(雷擊)!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고덕이 내민 검끝이 가리키는 공간에서 생성된 전격은 빠른 속도로 주위를 휘돌며 터져 나갔다.

그러자 마교의 고수들이 순식간에 감전되어 뭍에 오른 물고기처럼 튕겨지며 나가떨어졌다.

그들의 모습을 일별한 고덕의 왼팔이 갑자기 반짝이기 시작한다.

유련수, 환(環)!

수백 수천의 별빛이 죽어나가는 동료를 밟고 뛰어드는 마교의 고수들에게 짓쳐들었다.

그 별빛이 고덕의 손짓과 함께 원을 그리며 순식간에 퍼져 나간다.

원형을 그리는 별빛과 충돌하는 순간, 수십 수백의 고수들이 단 일수에 나가떨어졌다.

그러나 그로 인해 비워진 공간은 또다시 뒤에서 밀고 들어오는 다른 마교의 고수들로 인해 금세 메워졌다.

그와 동시에 공간을 뚫고 들어간 명혼이 붉은 피의 광망을 쏟아냈다.

폭강(爆剛)!

명혼에 어린 핏빛 강기들이 공간을 가르고 마교 고수들의 몸을 찢어발겼다.

무더기로 무너지는 그들의 틈바구니에 밀어 넣어지는 것은 다시금 뇌기를 일으키는 명혼의 푸른 전격이었다.

그 아래로 고덕의 진각에서 발출된 강력한 진기가 청석들을 뚫고 날아올랐다.

콰과과과광- 콰광!!

* * *

다소 높은 지형에서 한창 전투가 치러지는 곳을 바라보는 교주의 시선에 경탄과 경악이 번갈아 나타났다.

검마 단 한 사람으로 인해 전투 불능 또는 사망한 고수가 이미 수백을 간단히 넘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그가 가진 힘을 두려워해 발동한 것이긴 하지만, 저 정도의 무력을 보일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단 일수에 수십 명의 고수들이 너무나 쉽게 나가떨어진다.

그렇다고 나가떨어지는 고수들이 약한 자들은 아니었다. 아니, 지나치게 강력한 고수들을 투입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던 자들이다.

지금이라도 중원에 풀어놓으면 백도 무림 전체와 충분히 맞상대할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고수들이 한 줌의 피로, 한 움큼의 육편으로 변해 무너져 가고 있었다.

뛰어난 고수들을 퍼붓고 있음에도 상대를 척살하지 못하자, 교주의 눈짓에 대기하고 있던 장로들이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이미 주력인 마세와 혈세의 고수들 절반이 날아갔고, 그들과 함께 뒤를 받쳐 주던 투마단과 만마단의 피해도 상상을 불허할 정도였다.

그런 막중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검마의 몸엔 상처 하나 남기지 못했다.

걱정이 든 교주의 손짓에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멸전의 고수들도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시작했다.

거기다 교주는 하위 무력 집단들마저 동원했다.

이젠 고수의 싸움이 아니라 숫자의 싸움으로 변질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상황에서 막리의 외침이 터졌다.

“놈이 지쳐 간다. 신이 아닌 이상 지칠 것이고, 지치면 반드시 죽일 수 있다!”

막리의 고함이 도움이 되었던지 마교도들의 공격이 다시금 파상적으로 변했다.

사방팔방십방으로 공격이 늘어났고, 상하좌우 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적의 검날이 쏟아져 들어왔다.

막리의 말대로 시간을 끌면 불리해지는 건 고덕 자신이다.

순식간에 사방을 휘둘러본 고덕이 다시 검에 힘을 실었다.

우뢰(雨雷)!

모든 진기를 뇌의 힘으로 바꾸어 검에 싣는다.

하지만 이번엔 곧바로 내뿜지 않았다. 겁을 먹고 주춤 물러서는 적을 따라 이동한 고덕의 검이 파란 광채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진기를 폭발시키지 않으니 빠져나갈 곳을 찾지 못한 뇌기들이 검면을 타고 커져만 갔다.

더 이상 뇌기들을 통제할 수 없다고 느낀 순간, 고덕은 진기의 올가미를 풀어버렸다.

쫘자자자작짝-

엄청난 굉음과 함께 수백 수천 번의 방전을 거듭하는 뇌기가 반경 수십 장을 뒤덮었다.

보기에 수백의 낙뢰가 천지를 메우는 모습이 연출됐다.

예로부터 뇌신의 강림이라고까지 불릴 정도의 강력한 무력이 그 긴 시간을 건너뛰어 다시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정녕 뇌신의 힘이라 불릴 만하달까?

고덕을 기점으로 사방 삼십 장이 말 그대로 초토화되어버렸다.

고덕과 가까운 곳일수록 숯검정처럼 새까맣게 타버린 자들이 많았고, 외부로 시선을 넓혀 갈수록 중상자들이 많았다.

간혹 절정의 고수로 보이는 생존자들도 보였으나 그들조차 낭패한 모습이 역력했다.

그 엄청난 신위에 교주는 물론이고 막리를 비롯한 멸전의 고수들도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눈앞에 펼쳐진 지옥도에 장내의 모든 이들이 넋을 잃었다.

세상에 누가 있어, 인간이 이런 능력을 펼치리라 상상이나 해보았겠는가?

지금 자신들의 앞에 한계를 초월한 최강의 인간이 서 있었다. 그것도 적으로서.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역시 막리다.

경악한 채 움직이지도 못하고 멍하니 서 있는 고수들을 향해 그가 일갈대성을 터트렸다.

“무엇들을 하고 있는 것이냐! 적도를 멸하라!”

막리의 고함이 터지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마교의 고수들이 다시 몰려들었다.

몰려드는 이들을 바라보던 고덕이 양손으로 검을 잡아 앞으로 내밀었다.

팔랑~

바람이 불었다. 차가운 냉혈의 대지, 마교에 난데없이 부드러운 봄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바람은 부드럽지만 기세는 부드럽지 않았다. 바람이 부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주변 정경이 조금씩 찢겨 나갔다.

그렇게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찢겨 나간다고…….

나무가 찢기고, 돌벽이 찢기고, 사람이 찢겼다.

불어오는 바람 모두가 검강으로 이루어진 검풍이다.

전설에서조차 전설이라 말하는 신기가 인세의 대지 위에서 피어올랐다.

수백, 수천의 사람들이 그렇게 찢겨 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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