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장. 분별(分別)-가려내지 못하다
그렇게 식사가 조금 진행될 즈음 갑자기 고덕이 입을 열었다.
“세상에서 가장 추잡한 것이 남 먹는 거 쳐다보는 거라던데, 배고프면 달라고 하든지.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요량인지. 참 내.”
사자후를 발한 것도 아니었건만 온 벌판에 고덕의 말이 메아리친다.
이런 현상을 보이는 것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다.
육합전성!
이미 실전된 지 오백 년이 넘었다는 절기다.
마지막 시전자가 아마 소림의 공릉 대사였던가? 그저 지나가는 말 정도로 들었던 이야기라 기억도 가물거린다.
생각을 접으며, 느닷없는 고덕의 행동에 느끼는 것이 있어 목려송이 기감을 넓혀 보았다.
휘이이잉.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깊은 적막감뿐이다.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기감을 모조리 곤두세워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목려송이 고덕에게 시선을 주었지만, 그는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다.
목려송이 발휘할 수 있는 기감 범위는 대략 백여 장. 물론 좌선을 하고 정신을 집중한 채 기감을 최대로 끌어올리면 대략 이백여 장이지만 그렇게까지 유난을 떨긴 싫었다.
천천히 주변을 둘러본다. 지금처럼 허허벌판이라면 눈으로 찾아도 이백 장은 넘어간다.
하지만 여전히 보이는 건 바람에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흙먼지뿐이다.
결국 고덕이 무언가를 느꼈다면 그 거리를 넘어섰다는 말인데, 목려송으로서는 입만 벌어질 능력이었다.
자신의 능력 밖이라 판단한 목려송이 관심을 거두려는 찰나, 고덕이 짜증을 부렸다.
“거참, 사람 되게 신경 쓰이게 하네. 안 올 거면 가던 길이나 계속 가든가, 배가 고픈 거면 체면이 좀 그렇겠지만 와서 달라고 하든가? 쥐새끼들도 아니고 엎드려서 뭐하는 짓들인지. 쯧쯧! 어쭈, 그렇게 노려보면 어쩔 건데? 이것들이 계속 신경 쓰이게 하는데 가서 확!”
역시나 육합전성.
말하다 말고 옆을 홱 하니 돌아보는 고덕의 행동에 목려송의 시선도 그를 따라 움직였다.
하지만 역시나 목려송의 시선에 들어오는 것은 허허벌판뿐이다.
그 탓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돌리는 시선에 언제 일어났는지 고덕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은 웅이의 모습이 보였다.
허겁지겁. 생각나는 건 그것뿐이었다.
정말로 마파람에 게 눈 감춘다는 말처럼 걸신들린 사람처럼 고기를 입에 밀어 넣는 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
그런 웅이의 모습에 정신이 팔려 있는 목려송에게 고덕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냥 계속 그러고 있어라, 멍청한 것들.”
역시나 육합전성이다.
신기라 할 만한 절기를 펼쳐 보인 고덕이 고개를 돌리자 치기 어린 아이로 돌아간다.
웅이와 경쟁이라도 하듯이 고기를 먹어치우기 시작한 것이다.
“네 녀석이 많이 먹게 내버려 둘 거 같아!”
연신 입으로 고기를 밀어 넣는 웅이를 따라 입이 터져라 고기를 우겨 넣는 고덕의 모습에 목려송은 고개를 저어버렸다.
아마도 긴장감 때문이리라.
물론 적들에 대한 긴장감은 아니다. 원래 그런 게 없는 사람이니까.
그럼에도 긴장감을 느낀다면 그건 다른 이의 손에 맡겨진 문정 군주의 안위 때문일 것이다.
그 탓에 힘든 길을 택한 것이고…….
그 생각에 슬쩍 측은한 시선으로 고덕을 바라보았다.
그런 자신의 눈길을 느꼈던가? 눈을 맞춘 고덕이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 * *
그렇게 고덕과 일행이 머물러 있는 곳으로부터 삼백여 장 밖.
막 몸을 일으키려는 추겸을 막리가 잡았다.
“사부님, 왜 말리십니까? 감히 저자가 우리를 쥐새끼라 하지 않습니까?”
잔뜩 흥분한 추겸에게 막리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지금 들리는 저 음성이 어떤 것이라 생각하느냐?”
“예?”
“모르겠느냐? 방금 우리 둘의 귀가 호사를 했느니라. 실전된 지 수백 년이 지난 육합전성을 들었으니, 그런 능력을 지닌 이의 무력을 생각해보아야지 않느냐?”
“하오나 제가 알고 있기론 육합전성은 화경이면 사용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겨우 그 정도에 겁을 먹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겁이 아니다.”
“하오면 무엇입니까?”
“실전된 무엇인가를 되살리려면 그 이상의 능력이 필요하다.”
“그야……. 하지만 그래봐야 현경입니다. 이미 저자의 능력이 현경인 것은 알고 있던 사실이 아닙니까?”
“맞다. 문제는 너와 나도 현경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걱정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있고 또 사부님까지 계십니다. 저자가 아무리 강하다 한들 무슨 걱정이냔 말입니다.”
추겸의 말에 막리가 걱정 어린 음성을 토했다.
“만에 하나, 만에 하나 말이다.”
“말씀하십시오.”
“저자가 육합전성을 복원한 것이 아니라면?”
“예? 그게 무슨……? 방금 전엔 육합전성이라 하셨지 않습니까?”
고개를 갸웃거리는 추겸에게 막리가 설명을 이었다.
“네가 잊고 있는 것 같다만, 생사경에 들어가면 육합전성은 절로 쓸 수 있게 된다. 우리 주군처럼 말이다.”
주군, 멸천주를 말함이다.
“그거야……. 하지만 설마 우리 천세삼천(千歲三天)도 아니고, 하천(下天)에 생사경이라니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 그렇지만 왠지 느낌이 좋지 않다. 주의해서 나쁠 건 없어.”
자고로 고수의 직감은 무서운 법이다. 그것을 가장 잘 아는 자가 또한 추겸이었다.
사부인 막리의 말에 추겸의 얼굴에 불신과 두려움이 적당히 버무려진 감정이 떠올랐다.
제자가 알아들은 듯 조용해지자 막리는 목표들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 다가가 보자꾸나.”
“괜찮을까요?”
“이백여 장 밖이면 무난하지 않겠느냐.”
현경의 기감 범위는 대략 삼백 장이다. 그러니 자신들을 찾아낸 것일 테고.
이미 알고 있는 거, 더 들어간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고 느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앞장서지요.”
그 말을 끝으로 추겸이 조심스럽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백여 장으로 접근했지만, 여전히 명확한 기세를 읽기엔 부족한 거리였다.
“조금만 더 일찍 저들을 발견하여 경공을 펼치는 모습을 볼 수만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막리의 탄식대로다.
만약 그랬다면 대략적인 능력도 파악되었을 테고, 지금처럼 바닥에 엎드려 궁상을 떨고 있지만은 않을 터였다.
“어찌할까요? 사부님.”
“기세가 마음에 걸린다.”
“왜요. 지금 정도라면 현경이 분명한 거 같습니다만…….”
“생각해보거라. 삼백 장 너머에서도 현경 같았다. 그리고 지금도 현경 같다. 기세가 닿은 거리가 다른데 느낌은 같다니, 이상하지 않느냐?”
사부의 말을 들으니 의심이 들긴 했다. 결국 추겸이 의견을 냈다.
“조금 더 다가가 보죠. 만에 하나 백 장 안에서도 같은 느낌이라면…….”
두말할 나위 없는 생사경이다.
그땐 무조건 도주해야 했다. 아무리 현경이라도 생사경 앞에선 고양이 앞의 쥐인 까닭이었다.
“네 말대로 조금 더 다가가 보자. 다만 기어서 가야 할 듯싶구나.”
막리의 말에 추겸이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부님의 말씀대로 저자가 생사경이라 한들 저와 사부님이라면 최악의 경우 도주만이라도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굳이 기어서까지 이동할 필요가…….”
사부인 막리를 바라보는 추겸의 시선은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멸전에선 일인 군단이라고까지 불린다.
그뿐이 아니다.
멸천에서도 일백의 천상천 고수 중 당당히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사람이 바로 추겸이다. 그런 자신이 상대가 두려워 기어가다니, 도저히 있을 수 없다고 강변하고 있었다.
아무리 사부의 말이라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이다.
반감이 가득한 제자의 눈을 들여다본 막리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어찌 제자의 기분을 모르겠는가?
제자이긴 하지만 이미 홀로 설 수 있을 정도로 훌쩍 커버린 고수였다.
몇 년만 지나면 사부인 자신과도 어울릴 만한 무력을 갖추게 될 제자였으니, 그 마음을 어찌 모르겠는가?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했던가? 결혼한 적이 없는 막리로서는 하나뿐인 제자 추겸이 그런 느낌일지도 몰랐다.
피식 웃어 보인 막리가 말했다.
“그래. 나도 그것만은 못하겠구나. 어디 한번 부딪쳐 보자꾸나.”
“예, 사부님.”
사부의 호기 어린 목소리에 역시나 사부라는 눈빛을 빛내며 추겸이 일어섰다.
뒤이어 일어난 막리의 앞에서 길잡이가 되어 당당히 앞장서는 추겸이었다.
적어도 적의 공세가 시작된다면 사부를 지켜 방패막이라도 하겠다는 그의 순수한 애정의 발로였다.
그런 제자의 등을 바라보는 막리의 눈에는 엷게나마 뿌듯한 자부심이 떠올랐다.
“어쭈, 저것들이 걸어오는데? 배가 어지간히 고프긴 했던 모양이네.”
그제야 목려송은 상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발견한 현린과 현화의 표정이 밝아지는 것이 상당한 고수라 짐작되었다.
때문인가. 목려송이 슬며시 둘의 곁으로 다가앉았다.
한데, 다가오는 사람들의 모습을 확인한 웅이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도망을 치는 게 아닌가?
하지만 도주는 채 세 발걸음을 떼기 전에 무산되었다.
고덕의 손에 뒷덜미가 낚아채인 탓이었다.
“놔요! 놔달란 말이에요. 저자들에게 잡히면 안 된다고요! 그, 그건 증조부님께 잡히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일이라고요. 제발, 아저씨! 아니, 멋있는 무사님, 제발!”
“어쭈! 급하긴 되게 급한가 보다, 너? 안 하던 아부도 하고. 혹시 저놈들한테 죄지은 것 있냐? 그리고 증조부라……. 너 사고 치고, 가출했구나. 그렇지?”
“아, 아니에요. 사고는 안 쳤다고요. 그저 밖에 나오고 싶어서…….”
“으하하하! 그놈, 결국 가출한 놈이구먼. 하하하!”
그렇게 고덕이 웅이란 청년과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막리와 추겸, 둘은 어느새 고덕 일행에게 다가와 있었다.
‘제길! 기어서 조금만 더 접근했어야 했어.’
‘이런! 사부의 말씀이 옳았군.’
막리와 추겸은 웅이를 잡아 모닥불로 다가앉는 고덕의 기세에서 절망감을 느껴야만 했다.
아까는 분명 기세가 느껴졌었는데 지금 느껴지는 기세는 무(無).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더욱 나쁜 경우였다. 자신들이 기세도 읽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구 척은 훌쩍 넘길 정도의 커다란 몸집을 가진 웅이의 뒷덜미를 잡고 장난스럽게 구는 고덕의 외관은 이제 갓 약관을 넘긴 정도.
그런 자가 육합전성을 시전했을 리는 만무했다.
그러니 답은 하나, 환골탈태!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최소 세 번이다.
약관의 모습을 가지려면 그뿐이니까.
자신들이 걱정하던 생사경이 확실했다. 그것도 초입이 아니라는 직감이 들었다.
이미 자신들과는 차원이 다른 고수였던 것이다.
그것은 엄청난 기도를 흘리고 있어서도, 무지막지한 신위를 보여서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와 반대. 어떠한 기도도 보이지 않는다. 아니, 일말의 내력조차 흘러나오지 않는다.
무위자연. 도가의 도사들이 그리도 원하는 경지를 이룬 사람을 마주한 막리의 목으로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이 넘어갔다.
“누, 누구냐?”
기왕 내친걸음, 기세라도 부려 보자는 마음인지 추겸이 호통을 내질렀다.
하지만 일인 군단이라 불릴 정도의 막강한 무력만큼이나 자신감 넘치던 제자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더구나 더듬거리기까지. 아마도 사부인 막리 자신이 느끼는 충격보다도 더한 모양이었다.
“웃기는 놈들이네. 지들이 다가와 놓고 묻기는…….”
거구를 가진 청년의 뒷덜미를 잡은 자가 그대로 돌아서며 묻는다.
그로 인해 잡혀 있는 큰 청년의 몸이 마치 짚단처럼 손쉽게 돌려세워졌다.
“여, 여기는 우리의 영역. 감히 천마신교의 영역에 들어섰거늘, 어디서 굴러먹던 작자인지 어서 신분을 밝혀라.”
비록 처음엔 더듬긴 했으나 조금씩 찾아가는 신색. 아마도 마교의 영역이라는 말을 하며 어느 정도 자신감을 찾은 것이리라.
“천마신교라…….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군.”
잠시 과거의 기억을 회상하던 고덕의 표정에 웃음기가 번져 갔다. 마치 오랜만에 잘 걸렸다는 느낌이다.
아무래도 잘못 걸린 것 같다는 느낌과 함께 위험신호가 머릿속을 온통 휘젓는 막리였다.
이대로는 위험하다는 경고가 전신을 조여 왔다.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감은 이제까지 틀린 적이 없었다.
이 인간은 진짜라고 감은 말하고 있다.
온몸이 무(武)로 뭉친 듯한 느낌! 자신의 주군인 멸천주를 대할 때 느끼던 기분이 그대로 전해졌다.
이런 이와 손속을 섞는다면? 그것은 상상도 하기 싫었다.
더 이상 기다릴 것도, 잴 것도 없었다.
“추겸은 말을 삼가라! 죄송합니다. 아직 철이 없는 제자인지라……. 제자를 잘못 가르친 제가 대신 용서를 빕니다.”
갑작스런 반전에 고덕의 넋이 나가버렸다.
“으, 응?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뭐…….”
갑작스런 변화!
긴장한 채 뒤에 서 있던 자가 갑자기 앞으로 나서기에 목려송도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나서려는 찰나였다.
그 순간에 상대가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사과해왔다.
막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듯한 표정으로 다가서던 고덕마저 그 모습에 갑자기 멈춰 서며 어정쩡한 대답을 하니, 목려송도 놀란 얼굴로 멈추어 설 수밖에 없었다.
놀란 얼굴로 치자면 이젠 뒤로 처진 추겸이 최고였다.
왕방울만 해진 눈은 튀어나오기 직전. 마치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을 보았다는 얼굴이다.
아니, 자세히 보니 가장 놀란 이는 고덕의 손에 뒷덜미를 잡혀 있는 웅이란 청년이다.
그의 얼굴은 허옇다 못해 이젠 푸르뎅뎅하기까지 했다.
마치 어린아이가 경기를 심하게 일으키는 모습이랄까? 그러고 보니 미세하게나마 몸까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사, 사부님, 어찌…….”
“어허, 어찌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느냐? 어서 고인께 사죄를 드리지 못할까!”
“하, 하지만.”
“무슨 말이 그리 많더냐? 어서 사죄를 드리지 못할까!”
서슬마저 퍼런 사부의 닦달에 추겸이 당황한 얼굴로 막리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떠오른 감정은 가부를 구분할 수 없었다.
결국 사부의 노호에 입술을 깨물며 허리를 숙이는 적검마 추겸이었다.
하기야 사부마저 허리를 숙인 마당에 자신이 숙이지 못할 것도 없었다.
“죄, 죄송합니다.”
“이놈이! 내 사죄를 그리하라 가르쳤더냐!”
또다시 터져 나오는 혈사검 막리의 노호. 반복되는, 이해할 수 없는 사부의 노호에 자세히 살펴보니 사부의 언사는 진정이었다.
순간 스치는 것은 자신이 미처 느끼지 못하는 무언가 있다는 생각이었다.
사부의 직감을 믿은 추겸은 자세를 바로잡았다.
“소인, 동도들이 적검마라 부르는 추겸입니다. 감히 눈이 있어도 제대로 보지 못하였습니다. 삼가 용서를 바랍니다.”
생각이 들자 지체 없는 행동에 들어간다. 어지간한 결단력으로는 어림도 없다.
더욱이 추겸과 같은 무력과 자존심을 가진 무인으로서는.
하기야 그것은 사부인 혈사검 막리에 대한 절대적인 신임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기도 했지만…….
“뭐, 그렇게까지 이야기한다면야. 방금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은 없던 걸로 하지.”
교주가 염려했던 것보다는 괜찮은 놈들을 거둬들인 모양이라는 생각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생각이 그에 이르자 어쩌면 마제를 의심하는 일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도 싶었다.
“감사합니다. 고인께서 그리 너그러이 용서해주시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저는 신교에서 멸전을 맡고 있는 막리라 합니다. 혈사검이라는 무명으로 불리지요. 결례가 안 된다면 어디로 가시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뭐, 어려운 건 아니니까. 신교로 들어가는 길이야.”
“신교로 가시는 길이시라고요?”
“왜? 안 되나?”
“아, 아닙니다. 어찌 고인께서 가시겠다는 것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다만, 뭐?”
은근히 말을 끄는 막리에게 확실한 대답을 요구했다.
“그것이… 무사들의 경비망을 지나가야만 도착하는 곳이 신교입니다. 그러다 보면 제 제자 녀석처럼 버릇없고 눈 얕은 아이들이 결례를 저지를지도 모르는바. 저희 영역을 편히 지나실 수 있게 아예 공표를 하는 게 옳은 일일 것 같습니다만…….”
예전에도 홀로 움직이던 고덕이다.
알릴 필요도, 생각도 없었지만 지금은 외부인으로서 가는 길이니 마땅히 따라야 하는 규칙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고덕의 답에 막리가 말을 이었다.
“그러나 송구하게도 그런 결정은 제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어렵지 않으시다면 먼저 제자를 보내 웃전에 그 허락을 구하고자 합니다만…….”
막리의 물음에 고덕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리되었으니 그렇게 하지.”
고덕의 긍정적인 답변에 막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러나 그 화색은 잠시 후 터져 나온 처절한 고함에 이내 묻혀 버렸다.
“아악! 안 돼! 절대 안 돼. 이대로 교로 다시 끌려갈 수 없어요. 난 나갈 거야. 중원으로 나갈 거란 말이에요!”
청년의 고함에 혀를 찬 고덕이 그의 아혈을 짚어버렸다.
“그놈 시끄럽긴… 누군지 아시오?”
고덕의 물음에 막리가 답했다.
“좌호법의 손자입니다.”
그제야 생각이 났다. 버릇없기로 소문난 좌호법의 손자가…….
“그놈이로군…….”
나중에 좌호법에게 데려다줄 심산으로 아혈을 제압한 웅이를 목려송에게 넘겨주었다.
“잘 보관해. 들어가서 전달해줘야 하니까.”
“예, 대협.”
답과 함께 웅이를 받은 목려송이 그의 마혈을 제압해 현린의 옆에 주저앉혔다.
서로의 말이 어느 정도 끝났다고 생각한 고덕이 모닥불로 다가가 앉자 막리가 추겸을 이끌고 한쪽 구석으로 물러났다.
고덕의 시선에서 벗어나자 추겸은 곧바로 사부에게 심어를 보냈다.
[사부님, 왜 이렇게 저자세로 나가야 하는지요?]
[추겸아, 지금은 그런 이야길 할 시간이 없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두었다가 반드시 명하는 대로 하여라. 알겠느냐?]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부.]
[네 궁금증을 풀어줄 시간이 없다. 잘 들어두어라. 우선 교로 들어가거든 소주께 명왕의 검이라는 말을 전하여 올리거라. 그러면 소주께서 물으시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러거든 네가 느낀 것보다 배로 답을 드리거라. 반드시 배로. 그러면 소주께서 네가 할 일을 알려 주실 것이다. 이 사부 걱정은 말고 그 명에 충실히 따르거라. 알겠느냐?]
[명은 알겠습니다만, 도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다른 무엇보다 이 사부가 말한 대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른 것은 나중에 모두 이야기해주마. 일단은 사부를 믿고 따르거라.]
[예, 사부님.]
추겸의 확답에 막리가 고덕에게 다가왔다.
“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데?”
“다름이 아니오라 이제 제자를 보내려 합니다만…….”
저쪽에 뻘쭘히 서 있는 추겸을 확인한 고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내시구려.”
고덕의 답에 막리가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감사합니다. 추겸이는 어서 교로 들어가 고인을 맞을 채비를 서두르도록 하여라.”
“예, 사부님. 그럼 제자, 먼저 교로 돌아가겠습니다.”
“오냐, 어서 가거라.”
막리의 말에 추겸은 즉시 경공을 펼쳐 자리를 떠났다.
“그럼 우린 편히 쉬고 내일 일찍 출발한다.”
고덕의 말에 목려송이 고개를 조아렸다.
“예, 대협.”
잠자리를 준비하는 벌판에 점점 어둠이 깔려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