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장. 은신(隱身)-모든 것을 뒤지다
서변 객잔에 자리를 잡은 고덕은 다른 이들은 목려송에게 맡겨 옆방에 둔 채 현화, 현린과 함께 마주 앉았다.
“이제 대화 좀 해볼까?”
“검마의 대화 방식이 이런 건 줄은 미처 몰랐군요.”
현화의 말에 고덕이 피식 웃었다.
“원래 이런 건 아니야. 대충 뼈 한두 개는 발라놓고 이야길 시작하는 게 내 방식이지.”
고덕의 말에 현화는 가볍게 웃었다. 마치 해보려면 해보라는 듯이…….
“안 믿는 눈친데?”
“검마가 고문을 즐긴다는 말은 못 들어봤답니다. 차라리 목을 꺾을지언정…….”
“흠… 생각보다 많이 아나 봐, 나를?”
“많이 안다기보단 많이 아는 이의 이야기를 들었죠.”
그 말에 고덕의 눈에 작은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역시 문제가 생긴 모양이군. 언제 손을 쓴 거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현화의 답에 고덕이 미소를 지었다.
“서로 시간 낭비는 하지 말자고. 마제가 이상하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는 거니까 말이야.”
“이상하다……? 재미있네요. 바로 곁에 있는 이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수천 리 떨어진 검마는 이미 눈치채고 있다니 말이에요.”
“원래 세상은 그래. 가까이 있을수록 보이지 않는 법이니까.”
고덕의 말에 현화가 작게 웃었다.
“그렇다면 아시겠군요. 원하는 것이 어디에 있는지쯤은…….”
“원래는 몰랐는데 지금은 알겠군.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실수하는 거야.”
“실수를 하며 살아가는 게 인생이니까요. 문제는 그 실수를 누가 저질렀느냐는 것이겠지요.”
너무 담담한 상대의 모습에 고덕이 눈살을 찌푸렸다.
“문제가 생기면 넌 제일 먼저 죽어.”
“그런 걱정을 했다면 이리 나서지도 않았답니다.”
“그 용기가 계속 남아 있길 빌지.”
고덕의 말에 현화의 입가에 미소가 다시 피어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잠시 후, 문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대협, 접니다.”
목려송의 음성에 고덕이 답했다.
“들어와.”
자신의 허락에 방으로 들어선 목려송을 바라보며 고덕이 물었다.
“무슨 일이야?”
“기다리던 이들이 찾아왔습니다.”
“어찌 됐나?”
“일단 잡아서 기다리던 악고에게 부탁해놓았습니다만…….”
“문제가 있나?”
“그의 입장상 길게 잡고 있진 못할 겁니다.”
“하오문이기 때문에?”
“그도 그렇습니다만, 오늘 손님 중에 유운자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물론 곡 대협이 상대했던 놈도 보이지 않았고요.”
청성의 놈들이다. 잡혀 있는 현화나 현린과 한통속인 놈이 보이지 않는다니, 다른 속셈이 있는 것이다.
“다른 일을 벌이기 전에 움직이는 게 좋겠군.”
“그리 생각됩니다. 이제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신강으로 갈 생각이야.”
“신강이요……?”
신강.
마도의 대지, 마교가 웅크리고 있는 거친 대지다.
“그래.”
“설마 그곳으로 옮겨진 것입니까?”
목려송의 놀람에 고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간혹은 설마가 사람을 잡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는 고덕의 신형에서 무시무시한 기세가 흘러나가기 시작했다.
“가보자고. 내 옛집으로…….”
고덕의 음성에서 진한 그리움과 함께 싸한 피 냄새가 동시에 풍겨 나왔다.
* * *
조용한 실내, 여러 개의 커다란 창을 통해 실내를 비추는 따스한 햇볕, 그 모든 것들과 어울리는 단아한 모양의 가구들과 집기들.
그러한 실내와 묘한 조화를 이루는 커다란 향로에서 퍼져 나가는 맑고 산뜻한 향이 커다란 대전을 가득 채웠다.
더구나 한쪽 벽면을 가득 차지하고 있는 수려한 신선도는 대전의 주인이 간직한 고고한 기품을 잘 나타내고 있었다.
하지만…
끼익!
정적을 깨는 소음과 함께 들어선 인물로 인해 그 모든 것이 일그러졌다.
날카롭고 강인한 인상의 사내는 보는 것만으로도 전신을 짓누르는 것 같은 패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가 대전의 태사의에 몸을 싣자, 그동안 있는지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있던 이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여 왔다.
“만마의 주인이신 교주를 뵈옵니다.”
천천히 손을 들어 수하들의 배례에 답한 마제가 입을 열었다.
“오늘은 여러 말 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군사만 남겨 두고 모두 물러가라.”
마제의 명에 수하들 사이에 작은 동요가 있었지만 불복은 없었다.
그들의 사전에 불복이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작은 발소리와 함께 다른 이들이 물러가자 마제가 태사의에 깊게 기댔다. 그와 함께 사위를 질식시킬 것 같은 마기가 주위를 잠식했다.
순간, 이전까진 빛을 발하지 못했던 무기들이 신선도 맞은편의 검대에서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더구나 검대 옆엔 거대한 중원 전도가 한쪽 벽면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다가오라.”
마제의 명에 어둠 속에 몸을 웅크리고 있던 군사가 조심스럽게 태사의 쪽으로 나섰다.
구 척 장신에 엄청난 거구다.
군사란 이름이 아니었다면 무지막지한 외공을 익힌 무인이라 철석같이 믿었을 외모였다.
“황준경, 삼가 교주님의 존체를 뵈옵니다.”
군사의 인사에 교주는 그저 고개를 까닥거렸을 뿐이다.
“이야기해봐.”
교주의 명에 군사의 보고가 시작되었다.
“실은 며칠 전부터 비마대로부터 패주로 의심되는 이에 관한 정보가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습니다.”
“패주라……? 그렇게 판단한 근거는?”
“이동속도, 경로 모두가 과거 임무를 마친 패주가 귀환하던 방법 그대로입니다.”
교주의 명을 받아 외부로 나갔다 돌아오는 길은 언제나 한길이었다.
일반인은 물론이고 어지간한 무인들도 살아남지 못할 곳을 느긋하게 움직이는 것이 검마의 귀환 방식이었다.
“다른 이들도 알고 있나?”
“아직은…….”
알고 있다면 이리 조용할 마교가 아니다. 패주가 돌아온다고 난리가 났을 테니…….
인상을 찌푸린 교주가 물었다.
“소식 없던 이가 갑자기 왜?”
“그것까지는 알 수 없사옵고, 다만 혼자가 아닌 것만은 확인이 되었습니다.”
“혼자가 아니다? 그 독불장군이?”
“예, 교주님.”
“함께 있는 이들의 신상은 파악되었나?”
“그것이, 다가갈 수 없어서…….”
예전에도 그랬다.
검마는 이름은 있되 얼굴 없는 이였다.
오죽하면 그의 직계 수하인 호법들마저 얼굴을 몰랐을까?
알고 있다면 교주와 검마 본인이 키웠던 마검대, 그리고 참마대뿐이었다.
“그렇다고 신교에 다가서는 이들을 그냥 놓아둔단 말인가?”
“만에 하나 패주의 귀환이라면 건들지 않는 것이……?”
“확실한 게 아니라면서?”
“그야 그렇습니다만, 이동 경로나 귀환 방법은…….”
“그걸로 어찌 확신을 해. 더구나 다른 이를 달고 있다면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걸 모르나?”
“송구합니다, 교주님.”
황급히 고개를 조아리는 군사에게 마제가 명했다.
“사람을 보낼 것이다.”
“누구를…….”
“멸전에 명할 테니 그리 알라.”
멸전은 최근에 교주가 외부에서 영입한 고수들로 구성한 곳이었다.
특이한 건 그곳에 거주하는 고수들이 이전부터 마교에 머물던 이들보다 월등히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특히 최근에 들어온 이들 중 몇몇은 임무를 받아 교를 떠난 부교주 혈마를 능가하기도 했다.
“하오면 비마대는 어찌하올까요?”
멸전이 나서면 모든 것은 그들에게 맡겨 온 것이 최근의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속부(速部)는 뭐하나?”
“이미 붙여 두었습니다.”
“그런데도 확실한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인가?”
못마땅한 음성의 교주에게 군사가 다시금 고개를 조아렸다.
“속부의 대원들도 함부로 접근할 수 없었기에…….”
아무리 발이 빠른 속부의 대원들이라 해도 검마의 권역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죽은 목숨이다.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이를 살려 두는 법이 없는 것이 검마이기 때문이다.
태사의에 파묻혀 있던 마제가 등받이에서 상체를 들었다.
“속부를 철수시켜. 이미 말한 대로 멸전에 일임할 것이다.”
마제의 명에 군사가 복명했다.
“존명!”
군사를 내보낸 마제가 허공에 대고 물었다.
“설명해.”
“아직 실체를 잡지 못하였습니다.”
“탐밀이 모르는 일도 있나?”
비아냥대는 마제의 물음에 허공의 음성이 말을 이었다.
“속도가 너무 빠릅니다.”
“탐밀이 속도 타령이나 하고 있다니, 혼천주께서 너무 낮은 이들을 보내신 게 아닌지 걱정이 드는군.”
마제의 핀잔에도 불구하고 음성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암혼의 상태는?”
“마찬가지로 확인 불가입니다.”
“그가 고의로 사로잡힌 것이 아닐지 모른다는 의견은 유효한가?”
“예. 주변의 목격담, 정황 등을 추리면 정말로 사로잡힌 것으로 보입니다.”
“암혼을 너무 우습게 보는 것 같군.”
“아무리 암혼이라도, 멸천으로 보면 어린아이이니까요.”
음성의 대꾸에 마제가 인상을 찌푸렸다. 마치 자신마저 아이 취급당한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쓸데없는 말은 사절이야.”
“기분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됐어. 그나저나 멸전에서 누굴 내보내야 한다고 보지?”
“최소한 멸전 일호는 되어야 합니다. 거기에 막리를 얹는다면 확실할 것입니다.”
“누구, 추겸? 거기다 막리 장로까지?”
“예, 멸천 소주.”
“미친……. 추겸은 둘째 치고 막리 장로라면 나조차 장담할 수 없어!”
“그래서 그를 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검마를 너무 높게 보는 게 아닐까?”
“어설픈 실패보다는 확실한 성공이 좋습니다, 멸천 소주.”
“그놈의 호칭은 바꾸랬지. 여기선 교주야, 교주!”
“죄송합니다, 멸천 소… 교주님.”
음성의 답에 마제의 명이 떨어졌다.
“일단 멸전에 기별 넣어.”
“무어라 전하올지……?”
음성의 물음에 얼굴을 찌푸린 마제가 답했다.
“추겸과… 막리를 보내.”
“명!”
음성이 사라진 대전에 남겨진 마제의 표정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 * *
일인 군단!
멸전에 속한 이들 중 한 명에게 부여된 명칭이다.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이 명칭을 부여받은 이는 추겸이란 자였다.
그는 갑자기 교주에 의해 마교로 들어온 외부 영입 고수로, 마교의 마도 일통에 반기를 들고 있던 홍마련을 단 이틀 만에 몰살시킨 장본인이었다.
원체가 무를 사랑하고 싸움을 즐기는 그는, 나이 사십에 멸전주를 맡고 있는 자신의 사부 막리를 제외하곤 멸전에서 가장 강력한 고수로 인정받고 있었다.
“제길, 도대체 누구를 상대하기에 나를 보내는 거지? 다른 곳도 아니고 교의 앞마당 같은 신강에서 다른 이를 상대하기 위해 내가 나서야 하다니, 자존심이 상하는군. 소주께서는 아직도 내 진가를 모르시는가?”
여기서도 소주란 직함이 거론되고 있었다.
“어허, 그놈, 말을 조심하라는데도.”
갑작스런 음성에 놀란 추겸이 고개를 돌리자 그의 사부인 막리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헉! 사, 사부님! 그, 그간 별래무양(別來無恙)하셨습니까?”
“그래. 교내에 있으면서도 나를 찾지 않는 네놈을 이렇게라도 보니 그나마 상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풀리는구나.”
“죄, 죄송합니다, 사부님.”
적검마 추겸이 사부로 부르는 이는 오직 하나.
멸천주의 친우인 혈사검(血邪劍) 막리였다.
일설로는 순수한 무력에선 오히려 멸천 소주를 능가하나 그의 주군인 멸천주의 적통이기에 양보하고 있다는 말도 돌고 있는 자였다.
더욱이 칼 같은 성격과 잔인함은 오히려 멸천 소주를 능가한다고 소문이 난 탓에 멸천의 무인들도 그를 매우 두려워했다.
그것은 멸천 소주의 간곡한 청으로 멸천을 떠나 마교로 자리를 잠시 옮긴 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그 탓에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교도들에게도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외부에서 다수의 고수가 영입된 마교가 그다지 커다란 사고 없이 안정되어 있는 것이었다.
오죽하면 ‘죄를 지었을 때 그 치죄를 교주가 하면 무조건 최선을 다해 빌어서 구명하고, 멸전주가 하면 제발 편히 죽게 해달라고 사정하라.’는 말이 돌았다.
그런 막리가 하나뿐인 제자를 구박했다.
“죄송한 줄 알거들랑 자주 찾아오너라.”
“아, 알겠습니다, 사부님.”
아무리 제자라도 사부의 칼 같은 성격은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제자라 하여 봐주는 사부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쩔 땐 오히려 자신의 제자일수록 정확해야 한다며 사소한 실수조차 단죄를 해대었으며, 그 단죄는 추겸 같은 고수로서도 감수하기 쉽지 않은 것들뿐이었다.
그런 악연들이 쌓여 추겸조차 사부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하곤 사부의 거처 쪽으로는 발길도 잘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나저나 사부께서 이곳까진 어인 일이신지요?”
제자의 말에 막리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네 녀석과 같은 이유다.”
“예? 설마… 정말이십니까?”
놀라 묻는 추겸에게 막리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그럼 내가 너와 무슨 농이라도 하는 줄 아느냐.”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저만으로도 모자라 사부님까지 나서셔야 한답니까?”
“검마와 관련되어 있나 본데, 소주의 마음을 잘 모르겠다.”
그도 검마의 이야기는 귀가 따갑게 들어왔다.
하지만 천세삼천의 고수들이 모두 그렇듯이 하천의 강호인들과 자신들을 비교하는 것을 상당히 불쾌해했다.
그 탓에 막리도 검마를 상대하기 위해 자신이 동원되는 것에 굉장한 불쾌감을 가지고 있었다.
“겨우 검마 따위에 사부님을 내세운단 말입니까?”
“어찌하겠느냐. 그것이 소주의 명이니.”
“하오나 어찌…….”
추겸의 불퉁거림에 막리가 고개를 저었다.
“소주의 명이니라. 아마도 암혼의 안위가 걸린 탓인 모양이니 쉽게 생각하지 말거라.”
“암혼이 그의 손에 있는 겁니까?”
“그런 모양이다.”
평상시 소주가 암혼에게 가진 감정의 편린을 알고 있었던 추겸이 입을 다물었다.
그런 제자를 보며 막리가 말했다.
“소주께선 암혼이 무사히 귀환하길 바라신다. 하니, 각별히 신경 쓰거라.”
“예, 사부님.”
못마땅한 음성으로 답한 추겸이 천천히 움직이는 막리의 뒤를 따랐다.
* * *
곳곳에 묻은 세월의 흔적이 건물의 연대를 짐작하게 하는 커다란 전각. 현판엔 호법원이라 쓰여 있는 그곳에서 일갈 대성이 터져 나왔다.
“무슨 소리냐? 그 아이가 숙소에 없다니?”
“그것이,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그만……. 죽여주십시오, 좌호법님.”
“이… 후~ 되었다. 네게 무슨 잘못이 있겠느냐. 오냐오냐 감싸고도는 내 잘못인 것을.”
잠시 마음을 가라앉힌 좌호법이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지금처럼 교주의 파벌과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때 그 녀석이 사고를 치면 걷잡을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을 터. 내 그것이 걱정스러워 그리도 잡아놓았건만. 어서 찾아보게. 이번엔 말을 안 들으면 쥐어 패서라도 내게 데려오고.”
지금 이야기를 듣는 사내는 그 녀석이라 불리는 자의 경호 겸 감시를 맡은 자오라는 호법원 무사였다.
호법원이 보유한 유일한 무력 집단인 사신단의 단원인 그는, 좌호법이 말은 항상 저렇게 해도 실제로 손을 댔을 시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을 뻔히 알고 있었다.
저번에도 저 말에 속아 오지 않겠다고 반항하는 것을 몇 대 패서 끌고 왔다가 죽다 살아나지 않았던가.
오래전에 부모를 모두 잃고 혼자 남은, 그것도 오로지 가족이라고는 하나뿐인 독자인 증손자를 애지중지하는 마음이야 알겠지만 그 정도가 심하기에 호법원에선 좌호법의 손자를 작은 좌호법이라 부를 정도였다.
오죽하면 우호법이 술 취한 녀석에게서 ‘나이 먹은 늙은이가 죽지도 않고 한자리에서 너무 오래 버틴다.’는 욕을 먹고도 좌호법의 ‘미안하이. 저 녀석이 조금 취해서 그러는 것이니 한 살이라도 더 먹은 자네가 참게.’ 하는 말로 넘어가야만 했을 정도일까.
물론 그때 우호법이 그 말로 인해 그냥 넘어간 것이 아니라, 혹시라도 손자에게 위해를 가할 경우 사생결단도 불사하겠다는 의지가 확연히 비치는 눈빛으로 말하는 좌호법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후일담이 돌기도 했었다.
옛말에 정승집 개는 정승이라던 말이 맞는 상황이었지만, 교주의 파벌과 첨예한 대립으로 어려운 시기였기에 가능한 조용히 넘어가려 하는 우호법의 배려였던 것이다.
물론 과거 검마 대호법이 있을 때는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만, 대호법이 갑자기 교를 떠난 이후론 호법원이 좌호법을 중심으로 돌아가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런 사고뭉치 녀석의 이름은 딴엔 멋있다고, 제가 스스로 지은 별호까지 합해 섬수옥랑(纖手玉郞) 사웅이었다.
교내에서 호와 그 생김새가 가장 맞지 않는 이가 둘이 존재하는데, 그중 하나였다.
다른 하나는 대호법의 출교 이후 교주에게 홀랑 넘어간 군사 황준경이다.
황준경은 군사라기보다는 철혈의 장수 같은 구 척 거구의 장대한 체격을 지녔으나 무공은 단 한 수도 할 줄 몰랐다.
또한 섬수옥랑이라고 자신의 호를 지은 사웅은 황준경보다 머리 하나 정도가 더 큰 거구였다.
더구나 우락부락한 전형적인 산적형의 외모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은 스스로를 천하제일의 미공자쯤으로 치부하고 있었다.
그러니 자신의 그 솥뚜껑만 한 손을 가리켜 섬수라 하고, 퉁방울만 한 눈과 아귀 입처럼 커다란 입과 더벅머리의 외모를 옥랑이라 부르는 것이다.
하여튼 지금 그 녀석이 사라졌고, 현재의 호법원 최고위자가 찾아오라니 자오는 다시 그 녀석을 찾아 움직여야만 했다.
“옛, 좌호법님. 속히 찾아 대령하겠습니다.”
“그럼 수고해주게.”
* * *
황량한 벌판. 기댈 작은 언덕 하나 없는 이런 벌판에서 노숙이라니. 무슨 심보인지 모르겠지만 고덕은 이곳에서 노숙을 하자고 고집을 피웠다.
그나마 조그마한 냇가라도 있는 곳이니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하지만 주변에서 음식이 될 만한 건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 탓에 현화를 인질로 잡고 현린에게 음식이 될 만한 짐승을 잡아오라며 풀어주는 어이없는 짓도 했다.
그렇게 두 시진 전에 저녁거리를 찾으러 나간 현린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걱정 어린 시선으로 현린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는 목려송의 귀로 격타음이 들려왔다.
퍽!
“악! 왜 때려요!”
“이 자식이 뭘 잘했다고 소리 지르고 지랄이야. 네가 어제 건량만 다 먹지 않았어도 오늘 이렇게 배곯아가며 기다리지는 않았을 것 아니냐?”
“그게 왜 나 때문이에요. 건량도 먹을 만하다며 다 먹은 사람이 누군데요.”
“이놈이 이거 아주 나쁜 놈이구만. 내가 언제 그랬어. 엉? 증거 있어? 증거 있음 대봐.”
“뭔 증거가 필요해요.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 증인인데. 어제 아저씨가… 윽!”
기습적인 고덕의 손찌검에 뒤통수를 어루만지며 주저앉은 청년은 다시 거세게 항의하기 시작했다.
“아우, 씨! 무지하게 아프네. 왜 때려요! 증인들 이야기 나오니까 꿀리나 보죠.”
“야, 이놈아! 내가 어디를 봐서 아저씨야. 엉? 너 이렇게 젊은 아저씨 본 적 있어? 앙!”
“그럼 뭐라 불러요. 연세도 육십이 넘으셨다면서요. 할아버지는 늙어 보여서 싫다고 거절하고, 영감은 죽으려고 환장했냐며 걷어차고, 형이라고 한다니까 맞먹으려 든다며 패고, 대협은 간지러워서 싫고, 소협은 싸가지 없다고 때리고……. 그럼 도대체 뭐라 부르냐고요?”
“그거야 위대하신 고덕 님이라고 하면 되잖아.”
“누가 유치하게 그렇게 불러요. 컥! 아! 때린 데 또 때리는 게 어디 있어요. 얼마나 아픈데!”
“아프라고 때리지, 그럼 간지러우라고 때리냐? 앙!”
사 일 전쯤이었다.
고덕의 주장에 못 이겨 음식이 될 만한 것들이 들어 있던 등짐을 버리고 이동을 시작한 것이.
연후로 고덕의 주장처럼 속도는 올랐지만 당장 먹을 것이 귀해졌다.
그 탓에 요 사 일, 오죽 고생을 했으면 화경의 경지에 선 목려송의 얼굴이 먼지와 피곤함에 뒤덮여 부랑아를 방불케 했다.
더구나 땀과 먼지에 찌든 옷은 이미 거무죽죽한 넝마가 다 됐다.
여하튼 그렇게 죽자고 달려오길 삼 일째 되던 날.
자신들이 달리던 길목에서 한 청년이 고기를 굽고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아마 근처를 지나던 주인 잃은 양을 잡은 것 같아 보였다.
연유야 어떻든 삼 일을 건량만 먹으며 달리던 고덕이 그 냄새에 혹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결국 청년은 음식을 강탈당해야 했다.
문제는 그 뒤였다. 일반적인 사람 같으면 음식을 빼앗긴 연후 도망갔어야 하건만, 청년은 예상외로 음식을 뺏어먹었으니 자신을 책임지라고 뻗댄 것이다.
물론 고덕이 그 청년을 받아들이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을 비웃듯이 고덕은 청년을 일행에 끼워 넣어주었다.
물론 그 때문에 업고 뛰어야 하는 사람이 생긴 목려송은 딱 죽기 전까지 혹사당해야 했지만…….
그것도 청년의 덩치가 엄청난 거구라서 그 고생은 말할 수 없이 심했다.
하여간 자신의 출신지와 집도 모른다고 우기는 청년을 일행에 합류시킨 것이 고덕이었기에 목려송은 별다른 항변도 하지 못한 채 묵묵히 속으로 삭이고만 있었다.
그런데 이 청년이 하는 짓이 여간 웃기는 게 아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접근도 하지 못할 고덕에게 투정을 부리고 땡깡도 핀다. 가끔은 대들기도 하니, 목려송으로서는 그저 대단하다고 할 뿐이었다.
이상한 건 고덕이 그런 청년의 반항을 웃으며 받아준다는 것이었다.
지금도 청년과 고덕은 티격태격하며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시작된 고덕의 폭력에 청년이 항복함으로써 막을 내릴 것이 뻔했다.
“그래도 사내라면 상대를 때릴 때도 예의는 지켜야지요!”
“헛! 이놈 이거 아주 웃기는 놈이구만. 마, 때리는데 무슨 예의가 있어! 넌 그럼 상대를 때릴 때 실례합니다, 먼저 우측 옆구리를 가격하겠습니다, 하면서 때리냐. 이놈아.”
“악! 진짜 때리면 어떻게 해요! 아이구, 아파. 제길, 숨도 잘 안 쉬어지네.”
“하도 어이가 없어서 때렸다. 왜, 꼬워! 꼬우냐고, 이놈아.”
“내 참, 도대체 나이가 육십이 넘었다면서 그게 육십 먹은 노친네가 할 소립니까!”
“노친네? 이게! 이리 와, 인마. 오늘은 아주 죽여주마.”
“미쳤습니까? 내가 오란다고 가게. 가면 얻어터질 게 뻔한데. 내가 영감님처럼 뭐 바본 줄 아시나 보죠.”
“뭐? 영감? 어쭈! 너 오늘은 아주 죽으려고 작정을 했구나. 그래, 소원대로 내가 네놈 명줄을 따주마. 이리 와. 어쭈, 안 서! 엉? 아쭈, 요게!”
고덕을 피해 미꾸라지처럼 이리 돌고 저리 돌아 빠져나가는 것도 잠시다.
목려송의 예상대로 이내 고덕의 손에 붙들린 청년은 관절꺾기에 걸려 살려 달라고 아우성쳐야만 했다.
아무래도 어제보다 강도가 센 것이, 아마 내일 아침까지 못 일어날지도 몰랐다.
그렇게 화기애매한 장면이 펼쳐지는 곳을 향해 현린이 어디서 구했는지 양을 한 마리 들쳐 메고 나타났다.
아무리 다시 붙이고 금창약을 사용했다지만 부러졌던 허벅지 때문인지 그의 움직임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어디서 난 건가?”
목려송의 물음에 현린이 마른 음성을 토했다.
“근처에 유목민의 천막이 있었소.”
훔치거나 강탈해왔을 양을 받아드는 목려송이 답답한 듯 말했다.
“오늘도 역시나 민폐를 끼친 모양이군. 설마 그들을 어떻게 한 건 아니겠지?”
목려송의 물음에 현린이 고개를 저었다.
“피 냄새를 풍겨 일을 그르치고 싶은 생각은 없소.”
“그렇다니 다행이군.”
돌아선 목려송이 받아든 양의 껍질을 벗겨 내기 시작하자, 현린은 꽁꽁 묶여 있는 현화의 곁에 앉아 지친 몸을 쉬었다.
잠시 후, 목려송이 손질한 양이 모닥불에 걸리자 고덕과 자신을 웅이라 소개했던 청년의 드잡이질이 끝났다.
완전히 뻗어버린 채 가쁜 숨을 몰아쉬는 청년을 뒤로하고 고덕이 고기가 익어가고 있는 불가에 앉자, 뒤에서 웅이의 볼멘 음성이 들려왔다.
“아그그, 조금 이따 먹을 거니까 다 먹으면 안 돼요. 에구구!”
그 소리에 사납게 돌아가는 고덕의 고개. 더 이상 소란이 이어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던 목려송이 그 모습을 못 본 척 얼른 답을 했다.
“알았네. 남겨 놓을 터이니 나중에 먹도록 하게.”
“고맙소. 에구구!”
목려송의 답에 안심했는지 얼른 고덕의 눈길을 피하며 돌아눕는 웅이었다.
“저런 놈은 굶겨야 되는데.”
고덕이 못마땅한 듯 말하긴 했지만 결코 주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원체가 다혈질이고 직선적이라 말을 꺼내놓고 나면 그대로 행하지만, 이렇듯 중간에 적당한 선에서 다른 일행이 결론을 도출해놓으면 별로 싫어하는 기색 없이 동조해주는 고덕이었다.
그런 고덕을 바라보며 목려송은 사납기만 하던 그가 많이 변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