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장. 오명(汚名)-억울함을 품에 안다
혈마와 목려송, 왕팔은 빠른 속도로 이동한 끝에 소흥으로 돌아왔다.
빈손으로 돌아온 그들을 고덕이 맞았다.
“놈들은 찾았는데 손을 쓸 수 없었다?”
“예, 패주. 죄송합니다.”
혈마의 사죄에 고덕은 그저 하늘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들과 함께 있는 건 확실하고?”
“그것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상대에 화경이 둘씩이나 있었단 말이지?”
“예. 그건 확실합니다.”
“그 자리에서 소식을 전했어도 될 텐데…….”
“떠날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뒷말을 흐리는 혈마에게 고덕이 물었다.
“뭔가?”
“하오문 무한 분타가 그들을 살피고 있습니다.”
혈마의 말에 조용히 서 있던 왕팔을 돌아봤다. 그 시선의 의미를 알아차린 왕팔이 고개를 저었다.
“저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곡 대협이 만드신 일이지요.”
차마 무한 분타와 악고 일행을 죽이지 않는 대신에 내건 조건이라곤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왕팔의 말에 고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으니 나가들 보게.”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갈 것이라 생각했던 고덕이 의외로 침착하자 사람들은 이상한 표정이었다.
그렇게 물러가는 이들 중 목려송을 불러 세웠다.
“목가는 좀 남지.”
호명당한 목려송을 남겨 둔 혈마와 왕팔이 나가자, 고덕의 담담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냥 돌아온 이유?”
“들으신 대로입니다.”
“그거 말고, 거기까지 갔다가 그냥 돌아올 사람이 아닌 걸 알아. 그러니 네가 생각하는 이유를 대봐.”
고덕의 물음에 목려송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역시 대협의 눈은 피하기 어렵군요.”
“쓸데없는 아부는 필요 없다. 본론이나 말해.”
“예. 실은… 놈들이 미끼 같습니다.”
“미끼?”
“예. 마치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목려송의 말에 과거 혈가에서 들은 말이 생각났다.
‘검마, 바로 대협을 노린 겁니다.’
인상을 구긴 고덕이 물었다.
“너무 앞서가는 건 아니고?”
“소림과 무당까지 불러들였습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해선 안 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인질을 데리고 있기 때문에?”
고덕의 물음에 목려송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인질을 데리고 있는 상황에서 소림과 무당은 걸림돌만 될 테니까요.”
“방패막이로 불러들였다면?”
“권왕이나 도왕도 아니고 겨우 연격권과 유련검입니다. 그들이 제하이십사강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고는 하나 겨우 초극입니다.”
“네 말대로 제하이십사강이야. 그들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어.”
“화경 둘을 보유한 놈들이요? 습격 때를 생각하면 그들보다 강한 수하들도 여럿 있는 놈들입니다.”
“하면?”
“아무래도 놈들의 목표는 대협 같습니다.”
역시나 대답은 하나로 연결된다.
“그래서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움직이면 대협이 찾기에 어려움이 있을 테니까요. 그러고 보면 흔적도 일부러 남겼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목려송의 말에 고덕의 인상이 잔뜩 찌푸려졌다. 생각하기 싫은 가능성이 높아진 탓이다.
“만에 하나 내가 목표라면 인질들은 그곳에 없을 가능성이 높다.”
“맞습니다. 인질을 데리고 있지 않기 때문에 소림과 무당을 불러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거 자체로 인질을 데리고 있지 않은 것을 가리는 연막일 수도 있지요.”
“우리의 시선을 분산시켰다 말하고 싶은 건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일부는 성공했고요.”
혈마나 왕팔이 알아차리지 못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네 생각은?”
“반대로 갑니다.”
목려송의 답에 고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반대?”
“예. 오히려 이쪽이 느긋해지는 것입니다. 천천히 저들의 간을 졸이는 거지요.”
목려송의 말에 고덕이 고개를 저었다.
“시간이 길어지면 군주의 신상에 가해지는 위험이 높아진다.”
소흥왕은 거론조차 하지 않는다. 고덕의 심중이 어떤지를 단편적으로 드러내는 말이었다.
“힘드시겠지만 위험하진 않을 것입니다.”
“어째서?”
“대협이 잡히지 않거나 충분한 타격을 입히지 못하는 한 군주께서는 가장 확실한 방패막이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목려송도 소흥왕을 거론하지 않았다는 것에 고덕의 표정에 이채가 어렸다.
“혹시 들은 게 있나?”
“군주님과 대협의 관계를 들었습니다.”
출처는 분명했다. 이들과 왕팔이 함께 있었으니…….
“문제는 그들도 그걸 알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랬다. 알고 있다면 목려송의 말대로 힘들어도 안전은 하겠지만, 모르는 상태에서 이쪽이 느긋해지면 불필요해졌다고 오판하여 제거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모르는 상태에선 납치할 이유가 있을까 싶습니다만…….”
“알고 있었다면 소흥왕은 납치할 필요성이 없었다.”
고덕의 말에 목려송이 설명을 이었다.
“저도 그것을 생각해보았습니다. 답은 한 가지뿐입니다.”
“뭔가?”
“소흥왕은 군주님에 대한 인질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고덕의 물음에 목려송이 조금 더 다가서며 말했다.
“만에 하나 우리 쪽이 자신들의 생각과 다르게 움직여진다면 그들은 아마도 소흥왕을 먼저 내세울 것입니다.”
“군주가 아니라 소흥왕을?”
“예. 군주님은 더 깊이 숨겨 놓겠지요. 함께 납치된 이들 중 한 명만 꺼내놓아도 우린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소흥왕이 또 다른 미끼가 될 것이다?”
“예. 바로 그렇습니다.”
고덕이 목려송의 의견을 귀담아듣는 것은 사람들은 잘 모르는 그의 지략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던 탓이다.
홀로, 그것도 지독한 악명을 안고 강호를 헤쳐 나가는 것은 어지간한 머리로는 턱도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군주가 위험해지기 전에 소흥왕으로 경고할 것이다 그 말이로군.”
“맞습니다. 그만큼 우리에겐 시간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느긋하게 움직여라?”
“예. 어려우시겠지만 당황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줘야 합니다. 더구나 그들은 시간이 없습니다.”
“시간이 없다니?”
“청성 본산에서는 그들이 실종 상태랍니다.”
“실종?”
“예. 아마도 자유롭게 움직이기 위해 임의적으로 통제를 벗어난 모양입니다만, 그로 인해 청성에서는 일단의 수색대를 내보낸 듯합니다.”
“하지만 수색대가 그들을 못 찾으면?”
“단지 청성의 탈을 쓴 놈들뿐이라면 은닉이 가능하겠습니다만, 머리를 쓴답시고 소림과 무당을 불러들인 것이 악수가 됐습니다.”
목려송의 설명에 고덕이 볼을 긁적이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소림과 무당, 그러니까 연격권과 유련검은 드러난 이들입니다. 그들의 위치는 언제나 개방에게 포착될 수밖에 없지요. 지금쯤 청성 본산에서 나온 수색대는 무한으로 움직이고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시간은 우리 편이라는 뜻이지요.”
“그럼 언제 출발하자는 말이야?”
“출발은 내일 바로 하셔야 합니다. 도착도 빨라야지요.”
“느긋하라며?”
“도착해서 느긋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의 느긋은 다른 생각을 할 시간을 주지만, 눈앞에서 느긋하면 애만 태울 테니까요.”
“아무리 애가 타도 우리의 의도를 모를 것 같진 않은데?”
“알 겁니다. 그러니까 더 애가 타겠지요. 저들로서는 절대로 쪽박을 깰 수 없으니까요.”
목려송이 말하는 쪽박은 문정 군주를 뜻함이다.
그녀가 해를 입으면 고덕이 자신들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일까지 출발을 미룰 필요 없다. 바로 가지.”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고덕의 행동에 목려송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고, 곡 대협에게 통지하겠습니다.”
“필요 없다. 너와 나만 간다.”
“예? 상대는 약하지 않습니다.”
“나도 약하지 않다.”
“하지만 구출이라면 그 강함 이상의 것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목려송의 말에 고덕이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혈마를 너무 믿지 마라.”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마제가 불안한 상태에서 혈마를 믿는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마제의 의중에 의해 조정될 가능성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네가 내 의중에 따라 움직이는 것과 같다.”
고덕의 말에 목려송은 입을 닫았다. 그 정도 관계라면 충분히 위험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알겠습니다. 따르지요.”
목려송의 답에 희미하게 웃어 보인 고덕이 곧바로 방을 나섰다.
나중에서야 남겨진 사람들은 왕부의 수문 장수들로부터 고덕과 목려송이 여로에 올랐다는 통보를 받았다.
물론 모두 왕부를 지키라는 별도의 통보도 빠트리지 않았다.
그 탓에 혈마와 왕팔의 입맛이 썼다. 마치 신임을 잃은 듯한 느낌 때문이었다.
소흥을 떠난 고덕은 목려송의 뒷덜미를 낚아채 달렸다.
이미 화경에 올라 강호를 내려다보던 목려송이었지만, 고덕의 이동속도엔 기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만 하루 만에 수천 리 길을 주파한 고덕이 무한에 들어서고 있었다.
“이제부턴 느긋하게 움직여야 합니다.”
목려송의 말에 주먹을 불끈 쥔 고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한에서 시간을 때우기엔 동호 꽃놀이 이상이 없지. 가자.”
앞서가는 고덕을 목려송이 조용히 따랐다.
* * *
동호는 절강의 서호, 호남의 동정호와 함께 중원 삼대 호수로 불릴 만큼 풍광이 좋았다.
물론 혹자는 강소성의 홍택호를 동호와 바꾸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동호를 선택한다.
그 동호의 밤에 꽃배들이 늘어섰다.
호수에 꽃배를 띄우는 것은 호수 변에 꽃나무가 많았던 서호가 시작이었다.
그것이 퍼져 동정호도, 그리고 이곳 동호에도 꽃배가 만들어졌다.
다만 서호의 꽃배와 다른 것은 서호는 주변이 다 꽃이지만 동정호와 동호의 꽃배는 배에 꽃을 장식해 만들었다는 점이었다.
그 꽃배 중 하나에 고덕과 목려송이 앉아 있었다.
“우리가 온 것을 알까?”
“대협이 없는 시기, 우리가 나누어 나간 때를 노려 습격을 한 놈들입니다. 정보 체계는 갖추어진 놈들이 아니겠습니까?”
“하면, 알 것이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어쩌면 소식이… 아니, 벌써 왔군요.”
목려송의 말에 고개를 돌리던 고덕의 시선에 젊은이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한 꽃배 하나가 다가서는 것이 보였다.
“놈들과 같이 있던 아이들입니다.”
그 말에 상대를 살피던 고덕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재미있는 놈이 타고 있군.”
“예? 누구 말씀이십니까?”
목려송의 물음에 고덕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러고 보니 놈이 아니군.”
“예?”
목려송의 의문엔 아무 답도 안 한 고덕이 사공을 불렀다.
“사공.”
“예, 공자님.”
“저 배로 좀 가까이 붙일 수 있겠소?”
“그러믄입쇼. 잠시만 기다리세요.”
뱃삯을 후하게 준 덕인지 사공은 즉시 배를 후기지수들이 타고 있는 배 쪽으로 몰았다.
“대협, 어쩌시려구요?”
“저쪽에 인질이 있다면 이쪽에도 있는 건 나쁘지 않잖아.”
“그게 바로 노림수가 아니겠습니까?”
“노리고 있다면 놀아주는 것도 도리야.”
“하오나 그리되면 소림과 무당과는…….”
“그들을 두려워해본 적이 없는데, 새삼 신경 쓸 것도 없다.”
고덕의 답에 목려송은 그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천천히 상대 쪽 배가 다가오자 고덕이 말을 붙였다.
“내 좋은 술이 있는데 함께 어울려 보지 않겠습니까?”
고덕의 음성에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곱사등의 하인과 젊은 청년이 보였다.
아마 자신들의 배에 아리따운 여인들이 있기 때문에 치근대는 것이라 생각했던지 거절의 말이 튀어나왔다.
“다 인연이 있으니 따로 즐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곽윤기의 거절에 고덕이 미소를 지었다.
“다른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홀로 보내기엔 외로워서 하는 말이요. 다른 뜻 없이 그저 비슷한 연배끼리 술이나 하자는 말씀이오.”
자신의 말에 젊은 놈들 중 하나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는 것을 고덕은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다시금 거절하려는 곽윤기를 연철웅이 막아섰다.
“그리 박하게 굴게 뭔가? 새로운 인연과 함께하는 것도 좋은 일이지. 더구나 좋은 술을 가지고 계신다지 않는가?”
연철웅의 말에 고덕이 얼른 술병을 흔들어 보였다.
“여아홍입니다. 사위에게 내주는 새로운 인연의 술입니다. 깊고 맑은 인연이 서린 술이니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고덕의 말에 흥취가 동했는지 연하린이 배시시 웃으며 거들었다.
“말씀을 잘하시네요.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요?”
연하린의 말에 반대하던 곽윤기는 금세 찬성으로 돌아섰다.
“뭐 다들 이리 말하는데 그리합시다. 건너오시오.”
곽윤기의 말에 미소를 지어 보인 고덕이 일어섰다. 그에 목려송이 함께 일어서자 고덕이 고개를 저었다.
“배로 천천히 따라와.”
그 말을 남기곤 술병 몇 개를 들고 상대편 배로 넘어가는 고덕을 목려송은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침주에서 온 고덕이란 사람입니다.”
고덕의 인사에 연철웅이 포권을 취했다.
“반갑습니다. 등봉의 연철웅이라 합니다. 이 아이는 제 여동생이랍니다.”
역시 명문인가. 상대에게 부담을 안 주려는 듯 연철웅은 사문인 소림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에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고덕에게 연하린이 나긋한 음성으로 인사를 전해왔다.
“연하린입니다.”
“아름다운 분이시군요.”
고덕의 칭찬에 활짝 웃는 연하린과 달리 곽윤기의 인상은 잔뜩 구겨졌다. 고덕이 치근댄다 생각한 모양이다.
그런 곽윤기를 바라보며 고덕이 미소를 지었다.
“좋은 인연을 두셨습니다.”
순간 곽윤기의 표정이 활짝 폈다.
“으하하하, 그런 편이지요. 형장, 생각 이상으로 좋은 분인 모양입니다.”
단 한마디로 곽윤기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고덕에게 현린이 차갑게 대꾸했다.
“말이 기름지군요.”
뜻밖에 날카롭게 대응하는 현린을 바라보는 고덕의 시선에 이채가 스치고 지나갔다.
“제가 결례를 범한 모양입니다.”
정중히 사과하는 고덕의 모습에 당황한 연철웅이 현린을 나무랐다.
“어허, 린, 자네답지 않게 왜 그러나. 오해하지 마시지요, 고 형. 저 친구가 그리 모난 사람은 아니랍니다.”
사람 좋아 보이는 연철웅의 말에 고덕이 미소를 지었다.
“괘념치 마십시오. 저라도 갑작스런 불청객에게 기분이 좋을 수는 없을 테니까요.”
“그리 이해해주시니 고맙습니다. 자, 제가 마저 인사를 시키지요. 지금 불퉁거린 친구는 도강언에 사는 현린이란 친굽니다. 그 옆에 앉은 아름다운 아가씨는 안 믿어지시겠지만 저 친구의 여동생이지요.”
연철웅의 소개에 현화가 고개를 숙였다.
“제가 오라버니를 대신해서 사과드립니다. 요새 신경이 날카로워질 일이 있어 그런 것이니 이해해주셔요.”
현화의 말에 고덕이 유난히 짙은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해합니다.”
고덕의 답에 분위기가 풀어졌다 생각한 연철웅이 나섰다.
“자- 고 형이 가져오신 술맛 좀 봅시다. 아주 술 벌레가 요동을 쳐서 못 참겠습니다.”
“하하하, 그러지요. 여기…….”
말과 함께 고덕이 술병을 내밀자 연철웅이 얼른 받아 한 모금 마셨다.
“크으… 좋구나. 내 술을 가지고 오지 않아 후회를 했었는데, 고 형 덕에 후회가 줄었습니다.”
“그렇게 되었다니 다행이군요. 여기, 좀 드셔 보시지요.”
천천히 내미는 술병을 현화가 받았다.
흠칫…….
표정이 잠깐 굳었던 현화의 얼굴에 배시시 미소가 어렸다.
“좋은 것은 역시 그냥 들어오진 않지요.”
“옳은 말씀입니다. 좋은 것이 그냥 딸려 온다면 세상이 너무 재미없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제게 해당하는 말만은 아닌 듯싶은데요?”
술병을 마주 잡은 두 사람의 대화에 다른 이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손을 놓아주시겠어요?”
“놓으면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겠습니까?”
고덕의 물음에 현화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건 어렵다는 걸 아실 텐데요?”
“버텨서 좋을 것이 있답니까?”
조금은 차가워진 고덕의 말투에 현화는 환한 미소로 대응했다.
“설마 이곳에서 시작하시려구요?”
“뒤에서 노려보고 있는 친구들을 방패 삼으시려는 거라면 별로 안 통한다고 말해주고 싶군요.”
고덕의 말에 현화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천천히 사라져 갔다.
“절 알아보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고약하게 나올 줄은 몰랐군요.”
“내 소문은 들었을 텐데요?”
“그야…….”
소문이 가리키는 검마는 삼두육비(三頭六臂)의 괴물이다. 더구나 광폭(狂暴)하기론 따를 자가 없다고 했다.
“이제야 생각나는 모양이군요. 불행히도…….”
“불행히…….”
조금 더 경직된 현화의 손에서 술병이 산산조각 났다.
순간 뱃머리를 박차고 오른 현화의 움직임에 맞춰 현린의 허리에서 검이 빛살처럼 뿜어졌다.
고덕이 눈을 부릅떴다. 그 즉시 시간이 천천히 흐르기 시작했다.
아니, 시간은 그대로지만 고덕의 신형이 빨라졌다.
팔을 뻗어 검을 튕겨 내고 왼손으로 현린의 허벅지를 두들겨 정강이뼈를 부쉈다.
“크악-!”
피와 함께 현린의 비명이 터지는 것을 밟고 날아오른 고덕이 허공에 몸을 띄운 현화의 멱살을 잡아 사정없이 바닥에 내리꽂았다.
쾅-!
배 바닥이 일부 부서져 구멍이 뚫릴 정도의 맹렬함이었다.
부러진 코에서 피가 나고 얼굴은 엉망이 되었다. 그런 현화를 고덕이 자신의 얼굴로 끌어당겼다.
“나와 놀자고 계획을 했다면 이 정도는 각오했어야지.”
“크흡… 생각 이상이라는 것은 인정하지요. 하나,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아시나요?”
피를 흘리는 와중에도 현화, 아니 암혼은 비릿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뭐, 저들을 생각하시오?”
고덕이 가리키는 이들은 어느새 날아든 목려송의 손속에 모조리 꿇려 있었다.
“저들이 문제가 아니라 저들의 뒤를 생각해야죠.”
“상관없소. 예전부터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살았으니까.”
능글거리는 고덕의 답에 현화의 미소는 점점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대협, 배가…….”
고덕이 현화를 내리꽂은 탓에 부서진 배가 가라앉는 중이었다.
“우리 배로 가지.”
현화와 현린을 집어든 고덕이 배를 옮기자, 목려송의 눈짓에 나머지 사람들도 배를 옮겨 탔다.
뱃놀이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배를 호수 변으로 댄 고덕과 목려송이 일단의 사람들을 이끌고 인근의 객잔으로 들어서자, 몇몇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호수 변에서 사라진 눈동자의 연통을 받은 유운자는 즉시 그 사실을 복유 선사와 현운자에게 전했다.
대노한 두 사람은 곧바로 함께하고 있던 다른 제자들과 곽윤기 등이 끌려갔다는 객잔으로 몰려갔다.
그들의 뒤에서 청성의 유운자는 하얗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미처 알지 못했다.
현화, 아니 암혼이 정체가 들통 난 채 강제로 끌려갔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