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40장 (41/129)

제40장. 색출(索出)-적을 찾다

그렇게 대모슬과 수하의 입에 오르내리는 혈마는 오밀루 삼 층에 앉아 창밖을 살펴보고 있었다.

“앞으로 이틀. 그 안에도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리가 소산에서 알아냈던 정보가 잘못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그럼 우린 빈손으로 돌아가야 해.”

찻잔을 내려놓으며 오랜만에 말문을 여는 혈마의 음성에 마주 앉아 차를 마시던 왕팔의 검미가 바르르 떨렸다.

이렇게 빈손으로 돌아가면 고덕이 받을 충격이 고스란히 눈에 보였던 것이다.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아니… 없겠군요. 저기 청성의 의복을 입은 자들이 들어오니 말입니다.”

왕팔의 말에 시선을 옮기는 혈마와 목려송의 눈에 청성의 표식이 선명한 옥색 무복을 차려입은 일단의 사람들이 무한 시내로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그들을 바라보는 혈마와 목려송의 귀로 왕팔의 음성이 들려왔다.

“소림과 무당의 사람들도 섞여 있군요.”

왕팔의 말에 행렬을 훑던 혈마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 둘, 담황색과 붉은색 두건을 두른 놈.”

혈마의 말을 좇아 사람들을 살피던 왕팔이 말했다.

“청성 놈들이군요.”

왕팔의 답에 혈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친 기운. 절대로 도가 쪽 놈들이 아닌데.”

“그래도 복식은 청성의 도복이 확실합니다. 한데, 저들이 왜요?”

“문제가 되겠어.”

“담황색 두건은 몰라도 적색 두건은 그럴 만한 사람은 아닌데요?”

“아는 놈인가?”

“예. 나름 유명한 놈입니다. 유운자라고 청성의 장로거든요.”

왕팔의 답에 혈마가 물었다.

“담황색 두건은?”

“모르겠는데요? 별로 알려진 인물은 아닌 듯합니다.”

“저 중에서 가장 문제가 바로 저놈인데…….”

혈마의 말에 왕팔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 겁니까?”

왕팔의 물음에 대한 답은 혈마가 아니라 목려송에게서 나왔다.

“쉽지 않은 자야. 솔직히 붉은 두건을 쓴 놈은 어찌어찌 해보겠는데 담황색 두건을 쓴 놈은 난 자신 없군. 곡 대협은 어떻습니까?”

목려송의 물음에 혈마가 눈을 가늘게 뜨며 답했다.

“진신 무공을 모두 드러내는 걸 가정하더라도 제압에 확신이 없어.”

목려송과 혈마의 말에 왕팔의 눈에 경악이 가득 들어찼다.

“저, 정말입니까?”

“허튼소리 따위 지껄일 시간이 없다. 분명 쉽지 않아.”

“도대체 어느 정도이기에……?”

왕팔의 의문에 혈마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저 두 놈이 본모습을 제대로 드러냈다면 강호 십이대고수가 되어 있겠지.”

“그, 그럼!”

혈마의 답에 왕팔의 표정에 어린 경악이 더 커졌다.

그 말은 지목당한 두 사람이 모두 화경의 고수라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나머지 놈들 중에서도 두 놈이 걸려.”

혈마의 말에 왕팔이 신색을 추스르며 답했다.

“아마 연격권과 유련검일 겁니다.”

“아는 놈들인가?”

“제하이십사강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이들입니다.”

솔직히 처음부터 알아봤다.

하지만 이쪽엔 십대고수가 둘씩이나 되기에 별로 걱정하지 않았던 건데, 상대에 화경이 둘씩이나 있으면 제하이십사강에 이른 고수도 치명적인 무기가 될 수 있었다.

그 탓에 왕팔의 표정은 크게 가라앉았다.

“그리 낙담할 건 없어. 이미 우리 힘으로는 안 된다는 걸 알았으니까. 문제는 이제 어떻게 할까 하는 거지.”

혈마의 말에 왕팔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옳은 말씀이군요. 하면, 이제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목표를 찾은 이상 이제부턴 자신이 아니라 혈마와 목려송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역시 쉽지 않아. 청성이라는 말에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 말에 목려송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왕팔이 물었다.

“혹시 제압이 아니라 격살로 가시면……?”

왕팔의 물음에 혈마의 얼굴에 갈등이 어렸다.

“격살로 가면 소란이 커진다. 다른 놈들이 개입할 텐데, 괜찮겠어?”

절대로 괜찮지 않다.

그저 그런 무문도 아니고 소림과 무당씩이나 된다.

더구나 상대는 제하이십사강이 아닌가? 자칫 잘못하면 빼도 박도 못하는 신세가 될 수도 있었다.

뿐인가. 성공한다고 해도 자칫 이번 일로 백마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건 안 됩니다.”

“역시 그렇겠지.”

“예. 소란은 절대로 안 됩니다.”

“그렇다면 미련을 버려야 해. 저들을 소리 없이 제압하려면 패주께서 오셔야 한다.”

불러오는 건 상관없다.

문제는 그때까지 인질들이 무사한가와 과연 저 안에 정말로 인질들이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일단 인질들이 있는지부터 확인하죠.”

왕팔의 제의에 목려송과 눈으로 의견을 나눈 혈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 괜한 호들갑을 떠는 건 나도 바라지 않으니까.”

혈마의 동의에 왕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안에 잠입해서 확인하나요?”

“방법은 그뿐이니까. 조용히 들어가서 확인하고 나온다.”

혈마의 답에 목려송이 이의를 제기했다.

“기왕 들어갈 거면 차라리 시도를 해보는 건 어떻습니까?”

“시도를?”

“예. 어차피 확인을 하려고 해도 접근해야 하는 게 아닙니까?”

목려송의 말을 들으니 그도 맞다. 하지만 그러다 양측의 충돌이 격화되면……?

걱정된 왕팔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다 잘못되면 어쩌시려구요?”

왕팔은 걱정으로 한 소리였지만, 듣는 혈마의 입장은 달랐던 모양이다.

그 말이 오히려 자극이 된 것이다.

“좋아, 시도하지. 하긴 그냥 돌아선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어.”

혈마의 말에 목려송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포기란 말은 나중에 해도 되겠지요.”

“옳은 말이야. 포기는 나중에, 죽은 후에 해도 늦지 않아.”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철렁거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두 사람에게 왕팔이 맹렬하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안 됩니다. 그러다 인질에게 위험이라도 생기면요.”

“뭐, 어쩔 수 없는 거지.”

아무것도 모르는 혈마의 답에 그래도 그동안 보아온 것이 있었던 목려송이 반대를 했다.

“그건 조금 곤란한데요.”

“왜?”

“문정 군주가 잘못되면 아무래도 대협한테 욕을 먹을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대협이면 누구? 패주?”

“예.”

“뭐, 최선을 다하고 잘못되는 건 그다지 따지지 않는 분인데?”

위험스런 두 사람의 말에 왕팔이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세상에 마누라가 잘못됐는데 그냥 있을 사람이 어디 있어요!”

왕팔의 외침에 혈마와 목려송의 시선이 그에게 몰렸다.

“마누라? 누가?”

“아, 저, 그, 그게…….”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왕팔이 얼버무리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혹시 문정 군주가 대협의……?”

역시 보아왔던 게 있던 목려송이다. 제대로 짚어내는 그에게 왕팔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맙소사.”

“세상에!”

놀란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다시 생각해보지.”

혈마의 말에 목려송의 고개가 맹렬하게 끄덕여졌다.

그 뒤, 한참의 격론을 거친 혈마와 목려송은 그래도 시도해보기로 결정했다.

단, 발각되면 한번 어울려 봤다 안 되겠다 싶으면 뒤도 안 돌아보고 줄행랑을 놓기로 했다.

세상 천지에 혈마와 음양괴가 상대를 앞에 두고 도망갈 구상부터 했다는 것이다.

강호인들이 알았다면 기절초풍했을 이야기였다.

모든 걸 정리한 혈마가 계획을 되짚었다.

“나는 북으로, 자넨 남으로 침투하는 거야.”

혈마의 말을 목려송이 받았다.

“침투 후 사방을 살피고 인질이 갇혀 있을 만한 마차를 수색합니다.”

“마찬 안에 없다면?”

“방으로 옮겼을 것을 가정하여 방들을 수색합니다.”

목려송의 말끝을 혈마가 이었다.

“만에 하나 발각되면?”

“제압을 시도합니다.”

“제압이 불가능할 경우?”

“소리 없이 격살을 시도합니다.”

“그게 막히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주한다.”

혈마의 말에 목려송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전 뭐하죠?”

왕팔의 물음에 혈마가 당연하다는 듯이 답했다.

“망봐야지.”

* * *

다행히 청성의 일행은 왕팔 등이 머물던 오밀루의 별관에 자리를 잡았다.

일을 결행하기 위해 기다리던 왕팔과 혈마, 목려송은 날이 저물고 밤이 깊어지자 자신들의 방을 나와 조용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시작하자.”

별원이 빤히 내려다보이는 본관 지붕 위에서 멈춘 혈마의 말에 왕팔이 고개를 끄덕였다.

“망을 보다 위험한 상황이 도래하면 제가 휘파람을 불겠습니다.”

“좋아. 그리고 만에 하나 우리가 찾던 것을 확보하면 던질 테니, 뒤도 보지 말고 뛰어.”

“저 혼자 말입니까?”

“그래. 대충 뒤를 막다 따라갈 테니까 다른 건 걱정 말고.”

혈마의 말에 왕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경공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왕팔의 답에 서로 시선을 마주쳤던 혈마와 목려송이 본관 지붕을 박차고 올라 깃털처럼 별원의 지붕 위로 내려앉았다.

본관 지붕 위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는 왕팔은 혀를 내둘렀다.

‘보법들은 정말 최고로군.’

왕팔의 찬탄을 뒤로한 혈마와 목려송의 신형이 별원으로 스며드는 순간이었다.

와지끈-

혈마와 목려송이 스며든 방향과 다른 쪽 창문을 박살내며 난입한 이들이 있었다.

“뭐, 뭐야!”

놀란 왕팔이 휘파람을 불기도 전에 그를 향해 그림자들이 들이닥쳤다.

투다닥.

상대와 순간적으로 붙었다 떨어진 왕팔의 눈에 자신을 반원형으로 둘러싼 이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누구냐?”

“빚을 받으러 왔소.”

“빚? 나 빚진 적 없는데?”

“들을 것 없다. 쳐라!”

고개를 갸웃거리는 왕팔을 향해 그를 둘러싸고 있던 이들이 다시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쏟아지는 공격을 요리조리 빠져나간 왕팔의 손에 어느새 짧은 기형도가 들렸다.

“어디 한번 놀아보자꾸나.”

말과 함께 상황이 바뀌었다. 왕팔이 먼저 달려든 것이다.

철썩, 철썩-

“어이쿠!”

왕팔을 둘러쌌던 다섯은 멀쩡한데, 얼굴을 부여잡은 왕팔이 바닥을 굴러 나왔다.

“역시 무공은 안 되나……?”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주변을 살피던 왕팔의 눈이 별원으로 향하는 순간이었다.

쾅-

별원의 벽이 터져 나가며, 몇몇 사내가 무더기로 엉킨 채 벽을 뚫고 튀어나왔다.

“웬 놈이냐?”

다섯에게서 동시에 터져 나온 고함에 서로가 서로를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대체 뭐하는 자들인가?”

유운자의 고함에 생전 처음 보는 사내, 나비검 악고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감히 너희 연놈들이 하오문을 건드리고도 무사할 줄 알았더냐?”

“하오문? 하오문이 왜?”

유운자의 의문에 나비검이 다시 고함을 질렀다.

“그것을 몰라서 하는 말… 으응? 청성?”

놀라 동그랗게 눈을 뜨는 악고의 시선에 유운자의 도복 가슴에 새겨진 청성 두 글자가 선명하게 다가들었다.

그런 악고에게 유운자가 따져 물었다.

“도대체 하오문이 청성에 무슨 감정이 있다는 것인가?”

유운자의 물음으로 상황은 더욱 선명해졌다.

곤혹스러운 표정이 된 악고의 귀로 무언가 부서지는 소음이 들렸다.

쿠당당탕- 콰장-

문과 창문들이 깨져 나가며 악고와 함께 뛰어들었던 수하 다섯이 피투성이가 되어 튕겨 나왔다.

그 뒤를 따라 나온 것은 복유 선사와 현운자를 비롯한 세 문파의 후기지수들이었다.

그들의 복색을 확인한 악고의 입에서 신음이 절로 흘렀다.

“소, 소림에 무당! 맙소사…….”

무언가 잘못됐다고 느낀 악고의 시선이 유운자를 거쳐 자신들과 함께 튕겨 나온 이들을 찾았지만, 혈마와 목려송은 언제 내뺐는지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유운자도 강적들의 기세가 어느새 사라진 것에 놀랐으나 지금 당장은 알고 있는 티를 낼 수 없었다.

그 탓에 분노는 애꿎은 악고에게 모두 쏟아졌다.

상대가 기세를 일으키며 자신을 쏘아보자, 자신에게 책임이 쏟아질 수 있다는 걸 느낀 악고가 검을 거꾸로 잡고 자세를 풀었다.

“이거, 뭔가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오.”

“오해? 난데없이 창문을 깨고 난입한 것이 오해라!”

“난, 동도들이 나비검이라 부르는 악고라 하오. 하오문의 악적들을 쫓던 와중에 뭔가 오해가 생긴 모양이오.”

“그대가 나비검이라고?”

“그렇소.”

얼굴을 가르고 지나간 깊고 기다란 자상. 외모만으론 소문의 악고가 분명했다.

뒤에 서 있는 현운자나 복유 선사를 비롯한 후기지수들의 눈만 없었다면 단칼에 베어 죽이고 싶었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악 대협이 우리 청성에 감정이 있었는지 미처 몰랐소이다.”

“가, 감정이라니 그 무슨……. 아무리 하오문이 배운 것 없다 하나 어찌 청성과 척을 지으려 했겠소이까? 그럴 생각은 절대로 없소이다.”

“하면 이 상황을 어찌 설명하실 생각이오?”

“그, 그게… 이미 말했다시피 하오문의 적을 쫓아온 것이 그만……. 우리가 오해했소. 내 정중히 사과하리다.”

포권을 해오는 악고를 바라보는 유운자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설마 하오문이 우리가 이곳에 묵고 있었다는 걸 몰랐다고 말하고 싶으신 게요?”

개방과 함께 강호의 양대 정보 단체로 소문난 하오문이 몰랐을 리 없다.

단지 악고가 그 정보를 귀담아듣지 않았을 뿐이다.

“내가 무지했던 까닭이오. 쫓는 자에만 신경을 썼더니 그 정보를 제대로 듣지 못한 모양이외다. 내 이리 사과하리다.”

의외일 정도로 숙이고 들어오는 악고의 모습에 유운자도 더 이상 추궁만 할 수는 없었다.

“악 대협이 그리 말하니 내 믿어보겠소.”

기세를 거두는 유운자의 말에 나비검 악고가 다시 한 번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고맙소. 이 악고가 실수를 했소.”

“이 유운의 운이 그리 없는 것은 아닌 모양이오. 나비검께 빚을 지웠으니 말이오.”

상대의 말에 악고의 눈이 커졌다.

“흐음… 빚이라……. 그렇구려. 이 악고가 청성에 빚을 지었소이다.”

마지못한 악고의 답에 뒤에 있던 복유 선사가 나섰다.

“다 오해에서 비롯된 일인 듯한데, 잘 해결되었으니 다행이로세.”

앞으로 나선 이를 바라보던 악고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연격권?”

“예. 동도들이 그리 불러주지요.”

“이거 반갑소이다. 내 대협의 무명을 평소 흠모해왔는데 이렇게 뵙게 되는구려.”

“하하하, 무명이라면 악 대협의 나비검이 더 유명하겠지요. 우스운 초면이 되었으나 반갑소이다.”

복유 선사의 인사에 악고가 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나도 반갑소. 또 이렇게 만나니 더 기억에 오래 남지 않겠소.”

“그건 그렇겠구려. 하하하!”

두 사람의 대화로 분위기가 애매해져 버렸다.

그 탓일까. 서로 무기를 맞대고 대치하던 이들이 엉거주춤 무기를 거두고 뻘쭘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술이라도 한잔 나누고 싶지만,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으니 우린 이만 물러가리다.”

악고의 말에 주변을 둘러본 복유 선사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군요. 다음에 다시 봅시다.”

복유 선사의 말에 악고가 유운자에게 가볍게 포권을 했다. 그러자 유운자도 마지못한 표정으로 악고에게 포권을 해 보였다.

그렇게 인사를 마무리한 악고가 수하들을 이끌고 돌아갔다.

상황이 모두 끝나자 현운자가 다가왔다.

“그냥 보내시는 겁니까?”

“저자의 말이 틀리지 않을 것일세. 그렇지 않았다면 그냥 물러가지 않았을 테니까.”

복유 선사의 말에 유운자가 고개를 저었다.

“악고가 이름이 높다 하나 저들로 인해 저희가 어려움을 겪었을 것 같진 않습니다만…….”

“그렇지 않아. 악고와 함께 들어왔던 저들의 동료는 분명 내 윗줄이었네.”

잠시 대치했던 이들. 유운자는 그들이 진짜배기 손님이라 믿고 있었다.

천방지축 끼어든 악고만 아니었다면 자신의 계획대로 진행되었을 것이란 생각에 땅을 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는 척을 할 수 없었다.

“그런 이가 있었습니까?”

“두 사람이나 있었네. 자넨 못 느꼈는가?”

복유 선사의 물음에 유운자가 고개를 젓자 현운자가 끼어들었다.

“어쩌면 오늘은 우리가 운이 좋았던 게 아닌가 합니다.”

현운자의 평가에 청성의 유운자, 아니 암전 이수(二手)가 속으로 비웃음을 머금었다.

‘감은 제대로군. 악고만 아니었으면 명년 오늘이 네놈들의 제삿날이었는데, 아깝게 되었다.’

유운자의 속마음도 모르고 서로 안부를 확인한 복유 선사와 현운자가 후기지수들을 데리고 들어갔다.

뒤에 남겨진 유운자는 곁에 서 있던 담황색 두건을 두른 청성의 제자에게 다가갔다.

“들어가시지요.”

낮엔 분명 자신의 명을 듣던 이에게 공대를 한다.

정상적으로 본다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사실 그가 암전 일수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상대는 제대로 봤나?”

“둘 중 제게 달려들었던 이는 확인했습니다.”

“누구였나?”

“화경에 곱사등…….”

“음양괴로군.”

“예. 다른 이는 누구였습니까?”

“광기에 들린 붉은 대가리.”

자신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인상을 찌푸리는 사내에게 유운자가 놀란 음성으로 물었다.

“설마, 부상을 당하신 겁니까?”

“호들갑 떨지 마라. 살짝 스친 것뿐이다.”

그렇게 살짝 스친 기세에 아직도 어깨가 저렸다. 그것이 사내의 뒷목을 시리게 만들고 있었다.

“치료를…….”

“두어라. 천하의 혈마를 만나 얻은 것인데 기념이 되겠지.”

사내의 답에 유운자가 고개를 조아렸다.

“예. 나중엔 더 큰 걸 돌려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유운자의 말에 피식 미소를 지은 사내가 답했다.

“아니다. 그때도 내가 얻을 것이다.”

“예?”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유운자에게 사내가 재차 답했다.

“그땐 혈마의 목을 얻을 것이니까…….”

“아! 예. 반드시 그리될 것입니다.”

유운자의 수긍에 사내가 조용히 말했다.

“들어가 사람들을 다독여라. 아직은 이곳을 떠날 수 없다.”

“알고 있습니다. 놈들은 다시 올 테니까요.”

“그래. 기다린다.”

사내의 말에 유운자는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남겨진 사내의 시선이 검은 하늘로 향했다. 검고 검어 온통 혼란스런 그곳으로…….

* * *

난감한 표정으로 무한 분타로 돌아온 악고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분노가 극에 달한 혈마의 야차 같은 모습이었다.

“크헉-”

들어서기 무섭게 목줄을 내어준 악고의 두 눈엔 강한 공포가 자리했다.

자신과 상대의 차이를 현격하게 인지한 까닭이다.

“감히 내 앞을 가로막다니, 죽고 싶은가?”

“그, 그게… 혀, 형제들의 일로 무, 묻고 싶은 게 있어서…….”

말도 안 되는 말이었지만, 악고의 머릿속에서 생각해낼 수 있는 최고의 변명은 그것뿐이었다.

“그걸 믿을 거라고 생각했나?”

“저, 정말입니다.”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던 상대의 눈빛이 누그러지려는 찰나, 찬물을 끼얹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대장을 내려놔라, 빨간 대가리!”

황당한 표정으로 수하를 돌아보았던 악고의 고개가 원래로 돌아갔다.

“헉-”

이젠 틀렸다. 상대의 눈에 불타오르는 불길을 확연히 느낀 탓이다.

퍽-

까무룩하게 꺼져 가는 의식 너머로 수하들이 하늘을 나는 장면이 보이는 것 같았다.

하오문 무한 분타를 박살내고, 막 돌아오던 악고와 수하들까지 피떡으로 만들어놓은 혈마가 멍하니 서 있던 왕팔에게 물었다.

“누군가?”

“나비검 악고입니다. 중원 삼대 낭인 중 하나죠.”

왕팔의 말에 혈마의 검미가 찌푸려졌다.

“감히 낭인 따위가…….”

분기가 아직도 남았는지, 꿈틀거리는 악고를 향해 발을 드는 혈마를 왕팔이 잡았다.

“여기서 죽이시면 말이 남습니다. 그 때문에 죽인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흐음…….”

분에 겨워 부들부들 떨다 간신히 발을 내린 혈마가 신형을 돌렸다.

“돌아간다.”

“그냥 이렇게 말입니까?”

놀라는 왕팔에게 혈마가 말했다.

“별수 없어. 상대는 잔뜩 긴장하고 경계하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제대로 붙지도 않았지 않습니까?”

왕팔의 물음에 혈마가 고개를 저었다.

갑작스런 악고의 출현으로 공격 방향이 뒤틀리며 슬쩍 스치기만 했지만, 그 정도라면 상대는 분명 자신의 능력을 알아볼 수 있었을 터였다.

“돌아간다.”

한층 차가워진 혈마의 음성에 왕팔은 잔뜩 목을 움츠렸다.

“아, 알겠습니다.”

왕팔의 답에 혈마가 발길을 돌리자 그 뒤를 목려송이 조용히 따랐다.

더 이상 머물러봐야 얻을 것도 없이 미련만 길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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