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39장 (40/129)

제39장. 위계(僞計)-적이 숨다

“사형, 저기 황학루가 보입니다.”

“그렇구나. 서두르자. 약속보다 반나절이나 늦었으니 실례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두 청년의 대화에 그들의 뒤를 따르던 장년인이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윤기야, 무상아. 아리따운 여협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야 알겠다만, 그렇다고 둘이 그리 서두르면 마차가 따르긴 어렵지 않겠느냐. 천천히 가자꾸나.”

사숙인 현운자의 짓궂은 음성에 말을 재촉하던 곽윤기와 무상자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죄, 죄송합니다, 사숙님. 약속에 늦었단 생각에 그만…….”

“죄송합니다.”

당황하며 고개를 숙이는 두 사질들의 모습에 현운자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고, 우리가 약속보다 늦었으니 그 마음이야 다 안다마는 그래도 조금 천천히 가자꾸나. 이 사숙이야 그리 서둘러가도 기다려 주는 여협도 없을 것이라 그런지 발이 영 무겁구나.”

자신의 놀림에 얼굴이 더욱 붉어진 두 사질을 본 현운자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부끄럽긴 한 모양이로구나. 되었다. 그만 놀릴 테니 서둘러 가보거라. 우린 천천히 따라가마. 기다리기에 지쳐 여협들이 삐치기라도 하면 어쩌겠느냐. 삐친 여인들은 무서운 법이란다.”

사숙의 짓궂은 농에 얼굴을 붉히면서도 두 청년은 서두는 것을 멈출 생각은 없었는지 서둘러 고개를 숙여 보이곤 말을 재촉했다.

그 모습에 뒤에서 현운자와 다른 제자들의 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두 사람은 그저 말의 옆구리를 한 번 더 걷어차 속도를 높였을 뿐이다.

사숙의 놀림에도 불구하고 속도를 높여 일행보다 먼저 황학루에 당도한 두 젊은이는 마중 나오는 점소이가 뭐라 말을 걸기도 전에 자신들의 말고삐를 넘겨주곤 황급히 삼 층으로 뛰어올라갔다.

그들이 그리 급하게 뛰어오른 삼 층엔 일단의 젊은이들이 모여서 그 둘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발견한 두 청년이었지만 부득이 다른 탁자부터 들러야 했다.

아무리 바빠도 먼저 인사를 드려야 하는 이들이 그곳에 앉아 있었던 까닭이다.

“무당의 속가 곽윤기가 청성과 소림의 어른들께 인사를 여쭙니다.”

“무당의 무상자가 청성과 소림의 사숙들께 인사를 여쭙니다.”

두 청년의 인사에 자리에 앉아 있던 이들 중 벽옥색 도복을 입은 청성의 유운자가 인사를 받았다.

“그래, 어서 오게. 현운자께선 뒤에 오시는가?”

그 물음에 곽윤기가 고개를 조아렸다.

“예. 사숙께선 잠시 후면 다른 제자들과 당도하실 것입니다. 약속에 늦었기에 저희를 먼저 보내셨습니다.”

곽윤기의 답에 유운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것을 더 물으려 하자, 곁에 앉아 있던 소림의 복유 선사가 그를 만류하고 나섰다.

“그만하시게. 짓궂긴 여전하시구만… 저러다 저 아이들 눈 찢어지겠네그려.”

복유 선사의 말에 옆 탁자에 앉아 있던 젊은이들을 일별한 유운자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알겠습니다. 그래, 이만 가보게. 나머진 자네들 사숙께서 오시면 이야기를 듣지.”

유운자의 허락에 그와 복유 선사에게 다시 한 번 정중히 포권의 예를 취해 보인 두 젊은이는 서둘러 옆 탁자로 향했다.

“어서 오게, 윤기. 그리고 무상자 도사님도 반갑습니다.”

일행을 대표해 두 사람을 반갑게 맞은 이는 소림의 속가이자 일행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연철웅이었다.

그는 백보신권으로 유명한 복유 선사의 속가 제자로 벌써 백보호권(百步虎拳)이란 무명을 얻고 있었다.

“예, 형님.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곽윤기의 사죄에 연철웅이 손사래를 쳤다.

“죄송할 것까지야……. 무당의 사람들이 늦었다는 것은 그만큼 특별한 사정이 있다는 의미니까.”

무당의 기조는 담담함이지만, 그 안엔 상대에 대한 배려심이 깊게 깔려 있었다.

그런 무당의 사람들이 상대를 기다리게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문 일이었던 것이다.

연철웅에 이어 청성의 속가인 현린까지 가세했다.

“철웅 형님의 말씀이 맞아. 그리고 얼마 전까진 연격권 사숙님의 권법 강론을 듣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고. 그러니 그만 앉아.”

현린의 말에 멋쩍은 표정의 두 청년이 자리에 앉았다.

“그나저나 정말 연격권 사숙께서 권법 강론을 하셨단 말이야?”

연격권(連擊拳)은 복유 선사의 무명이다.

“그래. 상당히 유익한 시간이었다.”

소림의 속가인 연철웅과 무당의 속가인 곽윤기, 그리고 청성의 속가인 현린은 나이를 떠나 막역지우의 예를 맺고 있었다.

모두가 명문 대파의 속가라는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기회를 날려 먹다니 아까운걸.”

안타까워하는 곽윤기에게 연철웅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깊은 이야기는 아니었으니 그리 안타까워할 일은 아니다. 그저 권법가에 대해 조심할 사항들을 알려 주신 것뿐이니까.”

“그게 어딥니까? 거기다 연격권 사숙의 강론이라니. 부럽습니다.”

백도 십이대파의 수좌로 거론되는 소림의 권법은 그 깊이가 깊고 기초가 튼튼하기로 유명했다.

그런 소림의 권법 고수에게 강론을 듣는다는 것은 대단히 귀하고 소중한 시간임엔 틀림없었다.

곽윤기의 말에 무상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우리 무당의 것과 다른 내용을 들어볼 기회였던 것 같습니다.”

아쉬움 가득한 무상자의 말에 연철웅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 아쉬워하시니, 내 사부를 졸라 다음에 다시 한 번 자리를 마련해보지요.”

“정말이십니까?”

“그럼요. 우리 무상자께서 그리 원하시는데 만들어봐야지요.”

무상자는 이제 약관인 곽윤기보다도 세 살이나 어리다.

곽윤기를 워낙 잘 따르는 무상자를 어린 나이 때부터 보아왔던 연철웅이나 현린은 그런 그를 매우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이 무상이 크게 감사를 드리겠습니다.”

“내 무상자 도사님의 인사를 받기 위해서라도 꼭 만들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무량수불…….”

도호를 외우며 인사를 하는 무상자를 흐뭇하게 지켜보던 연철웅이 곽윤기에게 시선을 돌렸다.

“참, 구한다던 것은 구했어?”

“아, 예. 구하긴 했는데 좀 생각보다 못했어요. 그 때문에 현운 사숙께서 많이 실망하셨지요.”

“그럼 그걸 옮기느라 늦은 거야?”

“예.”

두 사람의 대화에 현린이 끼어들었다.

“무슨 이야깁니까? 저도 좀 알죠.”

현린의 투정에 미소를 지은 곽윤기가 설명을 했다.

“실은 무당에서 필요한 암염을 좀 구했는데, 그게 품질이 좋지 않아서.”

“암염? 암염은 왜? 무당은 속가로부터 강염을 받는 걸로 아는데, 아니었어?”

“요사이 청해에서 전해지던 강염이 크게 줄었어. 그래서 급히 암염을 찾아야 했거든.”

강염은 산속에 묻힌 암염이 비에 쓸려 내려가는 것을 말려 얻는다.

주로 암염산이 많은 청해 일대에서 생산되는데, 최근에 청해 지역의 오랜 가뭄으로 인해 강염의 생산량이 평년의 절반 이하로 줄어 있었다.

“원래 무당은 소금을 잘 안 쓰잖아?”

“그게, 이번에 갑자기 필요해져서.”

무문에서 무언가가 갑자기 필요해졌다면 십중팔구는 무공에 관계된 것이다.

순간 연철웅과 현린의 뇌리로 연성 과정에 소금이 필요하다고 소문난 무당의 무공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중에서 하나를 찾아낸 연철웅의 표정에 경악이 어렸다.

“서, 설마 십단금이 다시 나오는 거야?”

십단금(十段錦)은 무당에서 가장 부드러운 동시에 가장 강력한 파괴력을 지닌 권법이었다.

연철웅의 말에 곽윤기가 미소를 띠며 답했다.

“예. 무현 사형이 드디어 입문했거든요.”

무현자. 무당이 차세대 무당제일권으로 점찍은 청년 도사였다.

“무당제일권… 그럼 무당제일검은?”

솔직히 무당제일권은 그다지 커다란 주목을 받지 못한다. 천하 무림의 종주라 불리는 소림이 배출하는 권법가가 천하제일로 인정받기 때문이다.

하지만 검은 다르다.

검에서만큼은 무당제일이 천하제일이었던 것이다.

“무율 사형은 아직… 진무관(眞武觀)에서 나오지도 않았어요.”

“너무 긴 거 아니야?”

“사부님이나 사숙님들은 길면 길수록 좋다니까, 기다려 보면 알 수 있겠죠.”

곽윤기의 답에 사람들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런 이들의 사이로 뾰족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도대체 언제까지 우릴 꾸어다놓은 보릿자루 신세로 만들 생각이야!”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곽윤기가 화들짝 놀라며 변명을 했다.

“아! 하, 하린 소저. 그, 그게 아니라 내 말은 그러니까, 이제 막 말을 시키려고…….”

연하린. 연철웅의 동생인 그녀 앞에만 서면 제대로 입이 떨어지지 않는 곽윤기의 버릇이 또 도진 것이다.

“야, 하린아, 좀 봐줘라. 윤기 땀 흘리는 것 좀 봐라. 얘가 너만 보면 맥을 못 추는데 거기다 소리까지 지르면 어쩌냐?”

연철웅의 지원사격을 받는 사형을 위해 무상자가 힘을 보탰다.

“맞습니다, 하린 소저. 우리 곽 사형 좀 잘 봐주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보고 싶었던 하린 소저 만난다고 어젠 잠도 못 잤단 말입니다.”

“야, 야아~”

당황하는 곽윤기의 모습을 슬쩍 일별한 연하린이 그 말이 싫지 않았던지 옅은 홍조를 띠우며 콧방귀를 뀌었다.

“흥.”

그 모습에 웃음을 지은 연철웅이 자신의 동생을 놀려 댔다.

“하하하, 이거 보고 싶어 했다는 한마디에 잔소리꾼의 입이 다물리다니 놀라운 일인걸.”

연하린과 곽윤기는 연철웅과 곽윤기 간의 인연이 발전해 두 집안 간 혼약이 맺어진 사이였다.

거기다 겉으론 서로 아닌 척해도 당사자 둘의 반응이 그리 나쁘지 않았기에 청년들 사이에서는 지금처럼 항상 놀림감이 되곤 했다.

“오, 오라버니!”

홍당무가 되어버린 연하린의 뾰족한 음성에 연철웅이 물러섰다.

“하하하! 알았다, 알았어. 내 입을 이렇게 닫으마.”

입을 꿰매는 시늉을 해 보이는 오라비의 모습에 연하린은 눈을 흘겨 주었다.

그 모습에 크게 웃던 현린이 조용하게 있는 자신의 동생을 흘깃 쳐다보았다.

“그 말을 들으니 우리 현화의 혈색도 아까보다 훨씬 좋아졌는데.”

현린의 말에 연철웅의 걱정스런 음성이 먼저 터져 나왔다.

“아니, 왜? 우리 현화 소저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이제야 혈색이 좋아졌다니?”

“뭐? 우리 현화 소저! 이젠 아주 드러내놓고 들이대십니까?”

곽윤기의 놀림에 현린이 가세했다.

“그러게 말이야. 현화에게 우리란 표현을 쓰는 사람이 우리 가족 말고 또 있을 줄은 몰랐는데? 뭐야, 어디까지야? 두 사람?”

“오빠-!”

“린!”

짓궂은 현린의 놀림에 현화와 연철웅의 고함이 거의 동시에 터져 나왔다.

그 모습에 능글거리는 웃음을 단 곽윤기가 의미심장한 시선을 보냈다.

“어어, 이것 봐라. 반응이 정말 뭔가 있는 모양인데. 뭡니까? 형님, 궁금합니다. 이야기 좀 해봐요. 현린이 말대로 어디까지 간 겁니까? 손목은 잡아본 거예요? 아니면 뽀뽀?”

“뽀, 뽀뽀는 무슨…….”

얼굴을 붉히며 제대로 답을 못하는 연철웅의 모습에 현린이 놀려 댔다.

“이야~ 정말인가 본데! 형님, 언제 우리 현화랑 뽀뽀까지 한 겁니까?”

“오, 오빠!”

“이, 이 친구들이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사람들의 놀림에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는 두 사람 때문에 좌중엔 한바탕 큰 웃음이 내려앉았다.

“으하하하!”

젊은이들이 한참 웃음꽃을 피울 때, 비로소 도착한 현운자가 다른 제자들과 함께 객잔으로 들어서자 그를 본 젊은이들이 분분히 일어서며 포권을 취했다.

“현운자 사숙님을 뵈옵니다.”

“강녕하셨어요? 현운자 도사님.”

“오냐오냐. 너희도 잘 있었느냐? 그래, 어른들께서도 강녕하시고?”

“예.”

“그래. 그럼 하던 이야기들 마저 하거라. 난 저쪽에 늙은이들 탁자로 찌그러들 터이니 말이다.”

현운자의 말에 젊은이들 사이에서 까르르거리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젊은이들의 웃음을 뒤로하고, 두 사람이 기다리고 있는 탁자로 다가선 현운자가 포권을 취했다.

“다시 뵙습니다.”

“어서 오시게.”

반갑게 맞는 유운자에 이어 복유 선사도 반장을 했다.

“어서 오시게, 현운자.”

전통을 자랑하는 구파일방이다. 그중에서도 권의 소림, 검의 무당과 소제갈이라 불리는 청성은 그 친분이 매우 두터웠다.

세 문파의 친분은 그 역사만도 이백 년을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깊어서, 추구하는 바가 다른 사람들이라 하나 마치 한집안처럼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현운자가 앉은 너머로 상자들을 옮기는 무당의 제자들을 바라본 유운자가 물었다.

“저것이 이번에 나올 십단금을 위해 구했다는 암염인 모양이지?”

유운자의 물음에 현운자의 시선이 친우들과 떠드느라 정신없는 곽윤기와 무상자를 일별했다.

“녀석들이 떠든 모양이로군.”

“아직 젊은 친구들이니 달리 꾸중은 마시게.”

복유 선사의 말에 슬쩍 미소를 지은 현운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을 했다.

“맞습니다. 그 암염입니다.”

“그런데 품질이 별로라고?”

“예. 십단금에 소요될 암염은 먹는 것과 달라서 조금 더 단단하고 염분이 적어야 하는데, 기대에 조금 못 미쳤습니다.”

“그럼 대성은 힘든 게 아닌가?”

“그래서 걱정입니다. 암염을 빻아 달군 것에 담금질을 해야 십단금에 맞는 손을 갖출 수 있는데, 그 암염의 질이 떨어지면 아무래도 성취도 낮을 터이니…….”

현운자의 걱정에 복유 선사가 유운자를 돌아보았다.

“이것도 다 인연인 모양이니, 유운 자네 이야길 좀 해주시게.”

복유 선사의 말에 현운자의 시선이 청성의 유운자에게 향했다.

“무슨 이야기인데 그러나?”

“실은 우리도 암염을 구했다네.”

“청성이?”

“그랬지. 문제는 그 암염이 우리가 쓰기엔 너무 단단하고 염분도 낮다는 게지.”

유운자의 말을 복유 선사가 받았다.

“그 한탄을 하는데 자네 사질들의 말이 들린 걸세. 이 정도면 인연도 보통 인연은 아니지?”

“정말이군요. 하면 유운자, 그 암염을 좀 볼 수 있을까?”

“무한에서 받기로 했는데, 한번 같이 가볼 텐가?”

“이를 말인가? 지척이 무당이니 어차피 가야 할 길이었네.”

“하면 같이 가보세.”

두 사람의 말에 복유 선사가 끼어들었다.

“그렇다면 나도 함께 가지. 모처럼의 나들이인데 함께하는 것이 좋지 않겠나.”

“그렇다면 더욱 좋겠지요. 가서 아이들에게 동호(東湖)도 보여 주고, 우린 오랜만에 곡차나 한잔하시면 어떻겠습니까?”

유운자의 말에 복유 선사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 천생이 땡중인 나야 상관이 없네만, 현운은 그 청정한 도량을 술로 채워서야 되겠는가?”

복유 선사의 말을 현운자가 받았다.

“하하하, 이미 사이비 말코라 소문이 난 것을 도량만 맑게 가진다고 되겠습니까? 걱정이야 유운자지요. 땡중과 사이비 말코에게 휩쓸려 도량을 망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현운자의 말에 유운자가 고개를 저었다.

“도량은 이미 버렸지요. 요사인 바랑 하나 주워들고 복유 선사님이나 쫓아다닐까 생각 중입니다.”

서로의 말에 세 사람은 크게 웃었다.

그렇게 무당과 소림, 청성의 사람들이 뒤섞인 일행이 항주를 출발해 호북의 무한으로 향한 것은 발길을 서두른 왕팔과 혈마 등이 이미 무한에 도착한 바로 그날이었다.

그로 인해 왕팔과 혈마, 목려송은 무한에서 발이 묶인 채 초조한 마음으로 십여 일이나 더 그들을 기다려야만 했다.

* * *

으슥한 골목길에서 저 멀리 떨어진 객잔을 흘깃거리던 이가 말했다.

“저들입니다. 소산 분타를 급습했던 이들이.”

수하의 말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용모파기를 들여다보며 확인을 마친 하오문 무한 분타주 대모슬의 시선이 오밀루(悟謐樓)를 향했다.

오밀루 삼 층 창가에 앉아 있는 두 남녀의 모습을 세심히 살피던 대모슬의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최초의 사건이 벌어진 소산 분타주의 전언에 의하면 하오문 총부의 수신호를 아는 놈의 손속이 독하고, 그 뒤를 따르는 놈들의 기세가 사뭇 대단하다 했었는데 이곳에서는 그 어떤 것도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저 사람들이 분명한 거지?”

“예, 분타주님. 확실합니다.”

확실하다는데도 불구하고 목표에서 아무런 기세가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상대가 스스로의 기세를 완전히 갈무리할 수 있을 정도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뜻이었다.

“유한, 너는 즉시 인근에 배치된 모든 문도를 뒤로 물려라.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다.”

분타주의 명에 수하 하나가 곧바로 자리에서 벗어났다.

그러자 대모슬이 남아 있던 수하에게 물었다.

“아무리 봐도 저들은 우리 같은 분타 수준에서 대할 수 있는 이들이 아니지 싶다. 총부에서 출발했다는 사람들은 어디까지 왔냐?”

“어젯밤 늦게 죽산을 지났다 하오니 오늘 오후에는 도착할 것 같습니다.”

“나비검(娜飛劍) 악고 대협이 오는 것은 정확하지?”

“예, 분타주님. 악 대협이 타각(打閣)의 고수들 십여 명과 함께 온다고 하더군요.”

“거금을 들여 영입한 인사가 뭐 이리 굼떠.”

“그래도 악 대협이 들어오고 난 이후부터 우리 문도들이 어깨에 힘을 주고 살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다만… 비용이 너무 많이 지출되니까 문제지.”

“자그마치 중원 삼대 낭인 중 한 명입니다. 그 가치를 인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다만, 입맛이 쓴 것은 어쩔 수 없구나.”

수하의 말대로다.

세가 약해 어쩔 수 없이 정천맹과 협약을 맺는 굴욕을 겪은 후에 타각을 만들고 외부 고수를 영입해 들인 결과 그나마 업신여김을 덜 받게 되긴 했다.

그것은 모두 악고의 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가 데리고 들어온 수하들과 함께 만든 타각이 생긴 이래, 하오문은 강호 정세를 좌지우지하는 대문파들은 어떨지 몰라도 웬만한 중소 문파와의 다툼에서는 밀려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그들이면 저 불한당 같은 놈들에게서 불구가 된 소산 식구들의 한(恨) 값을 충분히 받아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글쎄, 그거야 뚜껑을 열어봐야 알 수 있겠지. 한데, 저놈 말이야. 적발(赤髮)에 적미(赤眉), 어디서 들어본 적 없냐?”

“왜, 있지 않습니까? 마교의 광기 들린 붉은 대가리.”

수하의 말에 대모슬이 무릎을 쳤다.

“그래, 혈마 곡우! 혹시 관계가 있다는 정보는 없고?”

“그렇지 않아도 소산 분타의 보고를 받은 총부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 모양입니다.”

“결과는?”

“당사자일 가능성에서부터 피붙이 또는 제자일 가능성까지 다각도로 조사를 진행한 모양입니다만, 모두 가능성이 없다는 결론입니다.”

“결정적인 증거라도 있었나?”

“그게… 용모파기상 석년의 혈마보다 어리답니다.”

“흠… 이야길 듣고 보니 그렇군. 하지만 마교 놈들은 워낙 기이한 일을 많이 저질러서. 확인은 한 거래?”

“최근에 마교로 들어간 놈은 있어도 나온 놈은 없답니다.”

교주의 밀명을 받은 혈마가 워낙 은밀히 움직인 까닭이다.

“흠… 자식일 가능성은?”

“마교 출신입니다. 마교 놈들이 모두 그렇듯이 가족이라곤 가져 본 적도 없답니다.”

수하의 답에 대모슬이 고개를 저었다.

“밖에서 낳았을 수도 있잖아?”

“물론 어디서 애새끼를 싸질렀을 수도 있겠지만, 그에 관계된 일은 풍문으로도 없었답니다.”

“그거야 풍문도 없이 애가 생길 수도 있잖아?”

“그렇다면 더 말이 안 된다는데요.”

“왜 말이 안 돼?”

“마교 놈들의 특성상 자식이라 해도 교주의 허락을 받아야 무공을 전수할 수 있답니다. 다시 말해 혈마의 의발을 전해 받으려면 결국 마교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인데, 그런 정황은 포착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총부에선 혈마 정도 되는 이의 신상 정보가 누락될 일은 없었을 것이란 의견입니다.”

“비급으로 전수받았을 가능성은?”

“몇 가지 재주를 미리 남겨 놓은 비급으로 익혔더라도 그걸 사용하기 위해서는 마찬가지로 교주의 허락이 반드시 필요하답니다. 아닌 채 마공을 썼다간…….”

손으로 자신의 목을 그어 보이는 수하에게서 시선을 돌린 대모슬이 창가를 주시했다.

“결국 이곳에 있는 놈은 혈마 곡우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예. 결론은 그리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로군. 만일 혈마였다면 악고고 지랄이고 모두 죽은 목숨이었을 테니까 말이야.”

“그럼은요. 정상적인 정신으로는 절대로 건드릴 수 없는 미친놈이 바로 혈마니까요.”

수하의 답에 피식 웃어 보인 대모슬이 말을 이었다.

“그럼 우리의 보고를 받고도 이렇게 늦는 건 그것들을 조사하기 위해 걸린 시간 때문인가?”

“아무래도 이것저것 조사하고 판단을 내릴 시간이 필요했으니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대모슬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하긴 신중이 필요한 인물이긴 하지.”

혈마 곡우.

강호십대고수의 수좌니 뭐니 하는 수식어가 따라다니지만, 그보다 무서운 건 그의 별호다.

광기 들린 붉은 대가리.

미친 듯이 적의 머리를 부숴버리는 광포함은 그 무식할 정도로 과격한 저돌성과 함께 백도인들의 기피 대상 일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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