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장. 상실(喪失)-군주, 납치당하다
고덕은 광서에서 절강까지의 거리를 하루 반나절 만에 주파해내는 무시무시한 능력을 보여 주었다.
정말 단숨에 날아왔다는 말이 어울리게 소흥 왕부에 도착한 고덕의 시선에 부산한 소흥 왕부의 모습이 들어왔다.
소흥 왕부에 도착한 고덕은 곧바로 문정 군주의 처소로 달려갔다.
처소에는 눈물을 찔끔거리고 있는 시비들뿐이었다.
벌컥 문을 열어보았지만 차가운 정적만 남아 있었다.
그런 고덕을 향해 사람들이 몰려왔다.
“대협.”
이젠 대형이 되어버린 대치를 비롯한 이들과 목려송을 비롯한 인연들이 보였다.
“오셨습니까? 대협.”
“어찌 된 거야?”
사납게 으르렁거리는 고덕에게 목려송이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답했다.
“유인책에 걸렸습니다.”
“유인책이라니?”
“그것이… 습격이 한 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세 단계로 나뉘어 벌어진 탓에 사람들이 흩어졌었습니다.”
“설명해봐.”
고덕의 재촉에 목려송의 설명이 이어졌다.
“처음의 적은 꽤 강력한 놈들이었습니다. 저와 혈마, 그리고 협련 셋이 모두 나서야만 했을 정도로 말입니다.”
목려송의 말에 과거에 부딪쳤던 몇몇 복면인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서?”
“몇 번의 충돌이 벌어졌고, 백중세라 보였는데 갑자기 놈들이 도주를 택했습니다.”
“설마 쫓아간 거야?”
“조력자를 데리고 다시 오면 상대하기가 더 어려울 것 같아서 그만…….”
안 봤어도 모든 정황이 눈앞에 그림처럼 그려졌다. 전형적인 유인 작전인데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다음은?”
누구를 향한 분노인지 모를 고덕의 분노가 음성에 가득 담겼다.
그 탓에 잔뜩 고개를 조아린 목려송 등을 대신해 대치가 입을 열었다.
“목 대협을 비롯한 이들이 적을 따라나선 연후, 두 번째 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놈들의 실력은 상당해서 외곽을 지키던 왕부 병사들을 단숨에 무너트리며 진입했습니다.”
“대응은 누가 했나?”
“저희가 했습니다.”
“그래서.”
“실력들이 좋은 건 둘째 치고, 자꾸 왕야의 숙소를 노려서… 갑자기 물러났는데, 아무래도 그냥 돌려보내면 다시 들어올 것이 확실해 보였기에 추적에 나섰습니다.”
“그럼 너희 모두가 자리를 비운 연후에 세 번째 습격이 이루어졌다는 건가?”
“그리되었소.”
갑작스런 음성에 뒤를 돌아보니 붕대로 도배를 한 이첨이 보였다.
“설마 장군부가 나섰으면서도 잃은 거요?”
“면목이 없소.”
이첨의 답에 곁에 있던 대치가 작게 속삭였다.
“장군부도 피해가 컸습니다. 장수 수십이 죽고, 병사도 이천이나 상했습니다.”
아무리 강호 무인들에 비해 실력이 떨어진다고는 해도 그 정도 수의 관병을 도륙내자면 세 번째 습격에 나선 무리들도 적지 않은 실력과 수를 보유했다는 의미였다.
“완벽하게 당했군.”
고덕의 말대로다. 이쪽의 성향, 예상 대응 방법을 확실히 알고 시작한 것이다.
“뒤를 밟아봤나?”
“그것이, 흔적이 미미해서…….”
목려송의 답에 고덕은 한 통의 서찰을 써 신허에게 주었다.
“가장 가까운 전서구점에 가서 이것을 특급으로 보내라.”
고덕의 명에 신허가 물었다.
“받을 곳은 어디입니까?”
“복건성 하포의 고 씨네다.”
고씨 성이 거론되자 신허가 고개를 숙였다.
“다녀오겠습니다.”
급히 나가는 신허를 바라보는 고덕의 눈에서 거친 불길이 일렁이고 있었다.
* * *
서찰을 받은 왕팔이 소흥 왕부에 도착한 것은 거의 사흘 만이었다.
두 지역의 거리를 생각한다면 엄청나게 빠른 것으로, 그 시간에 도착하기 위해 왕팔은 고덕에게 배운 경공을 죽어라 펼쳐야만 했다.
“대, 대협,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문정 군주 실종, 급래 요망.
단 몇 글자만 적힌 통문을 받고 무섭게 달려온 왕팔은 문정 군주의 정체를 생각하며 측은한 눈빛을 던졌다.
그런 왕팔의 물음에 고덕이 말했다.
“어서 오너라. 다른 말을 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네가 해야 하는 일은 말 안 해도 알겠지?”
자신을 찾을 때부터 무엇을 원하는지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예. 가시지요.”
곧바로 따라나서는 고덕을 목려송이 잡았다.
“대협.”
“무언가?”
“추적이라면 제가 가겠습니다. 이곳에 계십시오. 왕야를 납치한 이들입니다. 혹시 정치적 목적이라면 반드시 연락해올 것입니다.”
아예 틀린 추정은 아니다.
문정 군주만 납치했다면 자신을 노린 것이 확실하겠지만, 굳이 소흥왕까지 납치한 걸로 보아선 의도가 불분명했던 것이다.
갈등하던 고덕이 왕팔을 바라보았다.
“상관없겠느냐?”
“추적이야 누구와 함께 가든 상관이 없습니다만, 찾았을 때 제대로 대응이 되겠습니까?”
왕팔의 걱정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들은 고덕이 물었다.
“목려송이 나설 게다. 어렵겠느냐?”
하오문에서 잔뼈가 굵은 왕팔이다. 목려송이라는 이름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모를 인사가 아니었다.
“시, 실력이야 충분합니다만, 혹시 상대가 꼬리 자르기라도 시도한다면……?”
몇몇을 보내 뒤를 자르고 흔적을 감출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그 말에 혈마가 나섰다.
“제가 함께 가지요.”
혈마를 바라보던 고덕이 왕팔에게 물었다.
“음양괴와 혈마다. 그래도 부족하겠냐?”
고덕의 물음에 왕팔의 눈은 방금 전 음양괴 목려송의 이름이 거론될 때보다 훨씬 크게 부릅떠졌다.
“혀, 혀, 혈마 대협을 뵙습니다.”
왕팔의 말에 주변 사람들의 눈도 화등잔만 하게 변했다.
강호십대고수 중 수좌와 함께하고 있었으면서도 몰랐으니 놀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주변의 소란에 눈살을 찌푸린 고덕이 왕팔에게 재차 물었다.
“되겠냐고 물었다.”
“여, 여부가 있겠습니까.”
여전히 놀람을 제대로 가라앉히지 못한 왕팔의 답에 혀를 찬 고덕이 목려송과 혈마에게 시선을 주었다.
“추적에 있어서는 내가 아는 한 팔이가 최고다. 이쪽이 빠를 수도 있다.”
“걱정 마십시오. 만에 하나 저들의 뒤를 잡으면 목숨을 걸고 군주마마를 구출하겠습니다.”
목려송의 답에 주변 사람들의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중요도로 보았을 때 군주보다는 소흥왕이 앞서기 때문이다.
하지만 답하는 고덕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말은 다른 이, 다시 말해 소흥왕의 신변에 위협이 발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군주를 빼내오라는 말이었다.
“명심하겠습니다.”
고덕과 문정 군주 사이를 어느 정도 짐작하는 목려송이었기에 가능한 답이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팔아.”
“예, 대협.”
“내 마음은 네가 잘 알 것이다.”
고덕의 눈에 가득한 걱정, 분노, 후회를 읽은 왕팔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죽을힘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부탁하마.”
그길로 왕팔을 앞세운 목려송과 혈마가 왕부 앞에서부터 추적을 시작했다.
* * *
추적은 지루했지만, 다행히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그렇게 추적에 나선 지 오 일. 소흥의 북쪽 소산이라는 도시 인근의 야산에서 왕팔이 헤매기 시작했다.
나무 아래를 뱅뱅 도는 왕팔을 지켜보던 목려송이 물었다.
“뭔가. 설마 놓친 건가?”
목려송의 물음에 나무 아래를 유심히 바라보던 왕팔이 입을 열었다.
“예. 이곳에서 그들의 흔적이 끊어졌습니다. 시일도 시일이지만, 이곳에서부턴 추적을 당하지 않기 위해 초상비(草上飛) 부류의 경공을 사용했습니다.”
자신들이 추적하다 놓친 이들의 능력을 상기해보건대 초상비가 아니라 답설무흔(踏雪無痕)을 썼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어 보였다.
“하면, 이대로 끝인가?”
목려송의 물음에 왕팔이 어두운 표정으로 답했다.
“더 이상은 흔적으로 찾기엔 무리입니다.”
왕팔의 답에 당혹한 표정의 목려송과 혈마의 시선이 부딪쳤다.
“이대로 돌아가기엔 억울하지 않습니까?”
“두말하면 잔소리. 어찌 빈손으로 돌아가 패주를 뵙겠나?”
“하면?”
“인근의 정보 단체를 뒤져 보세.”
정보 단체는 여러 개다. 백도의 개방부터 시작해서 마도의 야령, 사도의 하오문까지.
거기에 돈을 받고 정보를 거래하는 곳들까지 거론하면 그 수는 더욱 늘어났다.
“어디를 생각하십니까?”
목려송의 물음에 혈마가 답했다.
“야령이 있다면 편하겠지만 남부 쪽엔 그들의 근거지가 없어. 그렇다고 개방을 들쑤셨다간 정천맹과의 일에 시간을 다 빼앗길 터. 남은 건…….”
하오문뿐이다.
사도에 속한 하오문의 지금 형편은, 안창의 난으로 봉문 아닌 봉문 상태인 사패련으로 인해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 때문에 어르고 치기에 좋았다.
두 사람의 결론이 하오문으로 나자 왕팔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저기… 하오문을 어찌 찾으시려고요?”
“의심 가는 곳을 두들겨 봐야겠지.”
혈마의 대답에 왕팔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간 시간도 늦어지고, 이쪽에서 얻은 정보가 확실한지 확신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면 어쩌자는 이야기인가?”
“제게 하오문과 연락을 취할 방도가 있습니다.”
“자네에게?”
의외라는 표정의 혈마에게 왕팔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제가 하오문 출신입니다.”
“호오~ 그으래.”
“예. 비문을 찾아 인근에서 가장 가까운 분타를 찾아내겠습니다.”
“그렇다면야…….”
결정은 그렇게 내려졌다.
곧바로 왕팔은 주변을 뒤져 하오문의 비문을 찾아냈다.
하오문도들이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한 가지씩 남긴 비문들이 워낙 많았던 까닭에 이렇게 약간만 뒤져도 어렵지 않게 비문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비문은 세 가지 정보를 담는다.
전하고자 하는 정보와 그 정보가 전달되길 원하는 분타의 위치다.
물론 정보가 만들어진 때도 비문 안에 들어간다.
뒤늦게 비문을 발견한 하오문도가 쓸데없이 중복하여 정보를 전달하지 않게 하기 위한 배려였다.
그 비문을 따라 왕팔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문이 가리키는 분타의 위치는 수도 없이 변했다.
여타의 강호 문파에 비해 힘이 모자란 하오문의 특성상 분타의 위치를 자주 이동시켜 만약에 대비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비문을 아는 왕팔은 비문 안에 기록된 시간과 분타들의 위치를 파악해 지금 분타가 있을 만한 지역을 정확히 짚어냈다.
그렇게 왕팔을 앞세운 혈마와 목려송이 찾아든 곳은 소산 시내의 주루였다.
서호연우예고금(西湖烟雨譽古今)이라는 말이 전해질 정도로 유명한 서호가 지척이고, 인세 무릉도원이라 불리는 항주가 바로 그 서호를 끼고 앉아 있었다.
그곳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곳이 바로 소산이다.
작은 규모에 비해 사람이 많고, 물산의 이동이 빈번한 곳이 또한 소산이다.
그에 따라 도시는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소산 시내에 위치한 천일루란 기루로 왕팔을 앞세운 혈마와 목려송이 스며들었다.
기루의 외관을 무시한 채 비문를 좇아 지하로 스며든 세 사람을 발견한 한 하오문도가 놀란 음성을 토했다.
“누, 누구냐?”
경호성에 주변에서 바쁘게 움직이던 하오문도들의 시선이 세 사람에게 모여든 순간, 붉은빛이 세상을 가득 채웠다.
사뿐히 휘어 차고, 가볍게 흩뿌리는 가벼운 한수 한수에 하오문도들이 이리저리 날려 다니며 처박히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한때는 자신의 형제들이었던 이들이 피를 흘리며 나가떨어지는 모습에 매번 움찔거리면서도 왕팔은 섣불리 나서서 말리지 못했다.
그것은 혈마의 무시무시한 무위 때문이 아니라 노심초사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 고덕의 마음을 가슴 깊이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이들을 죽여야만 문정 군주를 찾을 수 있다면 왕팔은 자신이 직접 손을 써 이곳에 있는 하오문도들의 씨를 말릴 수도 있었다.
그런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사방을 휘젓던 혈마의 행동이 멈췄다.
손을 탁탁 털며 물러나는 혈마의 뒤로 사십여 명에 이르는 하오문도들이 모조리 사방으로 널브러진 모습이 보였다.
혈마란 이름과 연결하여 모두 죽은 게 아닌가 하는 걱정에 재빨리 그들을 훑어보던 왕팔의 표정에 안도감이 스쳤다.
쓰러진 이들의 가슴이 작게 기복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다행이군요.”
왕팔의 말에 혈마가 물었다.
“뭐가?”
“살아 있어서요.”
그의 답에 혈마가 당연하다는 듯이 답했다.
“죽어서 답하는 놈을 보지 못했으니까.”
그 말은 물을 것이 없었다면 살려 두지 않았을 것이란 말이었다.
혈마의 말에 잠시 어깨를 떤 왕팔이 이리저리 널브러진 하오문도들을 추스르기 시작했다.
그러던 왕팔의 신형이 딱 멈추었다.
“물을 만한 사람이 있군요.”
왕팔의 시선이 향한 곳엔 홍대로 허리를 감은 늙은 하오문도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그를 일으켜 벽에 기대앉힌 왕팔이 품에서 작은 약병을 꺼내 상대의 코밑에 가져갔다.
“흐으으음…….”
천천히 눈을 뜨는 노인을 확인한 왕팔이 아깝다는 표정으로 황급히 약병의 마개를 닫아 다시 품에 넣었다.
“기환향(氣還香)이라. 귀한 걸 가지고 있구나.”
혈마의 음성에 왕팔은 조금 더 깊숙이 약병을 갈무리했다.
“누, 누구요?”
정신을 차린 노인의 음성에 왕팔이 차가운 미소를 그렸다.
“노인장에게 알고픈 것이 있는 사람.”
“나, 나는 그저 허드렛일이나 하는 늙은이일 뿐이오. 아는 것이 없소.”
노인의 말에 왕팔의 미소가 짙어졌다.
“노인장이 허드렛일이나 하는 사람이었다면 저들은 뭘 하는 사람이려나 몰라?”
능글거리며 자신의 허리에 매인 붉은 천의 끝을 손가락으로 감아 보이는 왕팔의 행동에 노인은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러면서도 뻗댄다. 최후까지 부정하려는 것이다.
“나, 나는 도대체 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소!”
노인의 말에 왕팔이 피식 웃었다.
“그러셔요, 분타주 나리.”
왕팔의 말에 노인의 표정이 검게 죽었다.
사실 하오문의 직급 표시는 하오문도가 아니라면 알아보지 못한다.
그것은 하오문도들이 지부 밖에서 표식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부 안에서는 다르다.
지부에 있을 땐 편의를 위해 허리에 자신의 직급을 나타내는 색의 천을 매도록 정해진 탓이었다.
“이, 이것은 그, 그저 허, 허리띠 대신에 맨 것이오.”
여전히 버텨 보려는 노인에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인 왕팔이 고개를 바짝 들이밀었다.
“그렇게 의뭉을 떨지 않아도 된다우. 우린 그저 질문 몇 개만 던져 답만 들으면 아무런 일도 없이 물러갈 테니까.”
왕팔의 말에도 불구하고 노인은 도리질을 쳤다.
“왜, 왜 이러는지는 몰라도 난 아무것도 모르오.”
여전히 버티는 노인에게 왕팔이 수신호를 보냈다.
그 수신호를 알아본 노인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변했다.
“누, 누구요?”
“말했잖소. 몇 가지만 알아보고 나갈 사람이라고.”
“도대체 누구요? 누구기에 그 수신호를 알고 있는 거요?”
방금 전 왕팔이 보인 수신호는 절대로 가벼운 것이 아니다.
이유는 분타주급은 되어야 알 수 있는 신호가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수신호를 알고 있는 사람 중에 변절한 이가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는 점이었다.
사실 분타주가 아니었던 왕팔도 원래대로라면 알지 못했을 신호였다.
하지만 하오문에서 왕팔의 임무는 추적. 추적을 하자면 기밀 정보도 필요한 법이다.
그 탓에 분타주나 접근할 수 있는 정보에 다가갈 수 있도록 특별히 하오문의 수뇌부가 왕팔에게 수신호를 공개했던 것이다.
그러니 소산 분타주인 노인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단지 우리는 정보가 필요할 뿐이라고.”
하지만 노인에겐 왕팔이 누구인지가 중요했던 모양이다.
“비열하게 문을 배신한 것이냐?”
아마도 배신한 분타주 정도로 짐작한 듯했지만, 걸리는 것이 있었던 왕팔은 말을 하지 못했다.
자의는 아니었지만 고덕의 강압에 못 이겨 하오문을 등지고 떠난 것은 맞았기 때문이다.
왕팔은 이내 신색을 바로 하고 고개를 저었다.
“헛다리 그만 짚고 묻는 거나 이야기하지?”
왕팔이 다시 다그쳤지만 이미 그의 반응에서 변절자라는 걸 알아차린 노인의 입은 이전보다 더 꽉 다물렸다.
결국 왕팔은 임무 도중 우연히 알게 된 한 가지 수신호를 더 해 보였다.
그 수신호를 본 노인의 눈이 부릅떠졌다.
“저, 정말 누구요? 누구인데 총부의 수신호를 아시는 게요?”
왕팔이 사용한 것은 하오문 총부의 수신호다. 그것도 고위급 인사나 알 법한 것이었다.
하지만 노인이 알기로 왕팔 같은 외모의 총부 고위 인사는 없었다.
“당신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소. 도대체 누구요?”
노인의 의문에 왕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젠 신호만으론 통하지 않나?”
왕팔의 의문에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신호만으로 신분을 증명하던 것은 과거의 일이 되었소. 그나저나 대체 누구요?”
과거엔 철저한 점조직으로 운용되던 하오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서로의 얼굴을 모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로 인한 문제를 타파하고자 만들어낸 수신호가 존재했다. 방금 전, 왕팔이 사용한 수신호가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언제부터 바뀐 거요?”
이것도 정보를 묻는 말이다. 하지만 노인의 답은 의외로 순순히 나왔다.
“지난해에 폐지되었소.”
“그럼 요샌 어떻게, 얼굴도 보는 거요?”
“그렇게 되었소. 분타주들은 의무적으로 일 년에 두 번 총회에 참석해야 하오.”
“총회? 그런 것도 생겼소?”
“정천맹과의 협약을 맺은 이후 생겼소.”
노인의 답에 왕팔의 표정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사패련을 탈퇴한 거요?”
“아니요. 그저 잠시 협약을 맺었을 뿐이오.”
노인의 말에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결국 버티지 못한 거요?”
“사패련이 봉문 상태가 되며 무력 지원을 받을 수 없었소. 그 상태에서 활동 영역이 정천맹의 개방과 겹치는 우리에게 압박이 너무 심해서…….”
노인의 답에 왕팔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미 떠난 곳이지만 지금의 처지가 예전만 못하다니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한데, 그렇게 기분이 좋지 못한 사람이 또 있었던 모양이다.
두 사람의 대화가 길어지자 기다리기 답답했던 혈마가 끼어들었던 것이다.
“시간 없으니 내 방식대로 하지.”
혈마의 말에 왕팔의 표정이 허옇게 바랬다.
얻을 것을 위해 혈마가 취할 방도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십시오.”
앞을 가로막는 왕팔을 지그시 바라보던 혈마가 마지못한 표정으로 물러섰다.
“일각이야.”
“아, 알겠습니다.”
혈마의 말에 가슴을 쓸어내린 왕팔이 노인에게 윽박을 질렀다.
“노인장 조상이 도운 줄 아쇼. 여하간 내가 한 신호는 알아보았다는 게 맞소?”
“그거야 당연히…….”
고개를 끄덕이는 노인에게 왕팔이 물었다.
“하면, 그 신호가 묻는 걸 숨길 수 없다는 것쯤은 알겠구려?”
“규칙은 여전하니…….”
한발 물러나는 노인의 말에 왕팔이 반색을 했다.
“그럼 된 거 아니오. 노인장은 규칙을 따르고, 난 노인장과 저기 널브러진 이들의 목숨을 구해주는 거.”
그제야 방금 전 장년의 사내가 나서려던 이유를 알아챈 노인이 잠시 갈등하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문규에 따르는 거니… 일단 말씀해보시오. 말해줄 수 있는 것이라면 알려 드리리다.”
문규를 들먹인 자신의 설득이 먹혔는지 상대가 그런대로 협조적으로 나오자, 왕팔의 얼굴에 안도의 표정이 지나갔다.
“천만다행이오. 지금 그 결정에 여기 널브러진 이들과 노인장의 목숨을 건진 줄 아시오.”
“그들의 목숨은 이미 죽었소. 살았다고 다 산 게 아니니 말이오.”
하오문을 지키던 문도들이 소임을 다하지 못했음을 자책하는 말이다.
“그렇다고 진짜 죽는 것보단 낫지 않겠소?”
“그거야…….”
말을 잇지 못하는 상대에게 피식 웃어 보인 왕팔이 말을 이었다.
“우선 내가 알고 싶은 것부터 물읍시다. 최근에 소흥 왕부에서 두 사람이 납치되었소. 아시오?”
“지척에서 벌어진 일을 모를 만큼 눈과 귀가 어둡진 않소.”
노인의 답에 왕팔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좋소. 그럼 이것도 알겠구려. 그들을 데리고 있는 이들을 말이오.”
“청성 사람들이었소.”
예상외의 이름이 나오자 왕팔을 비롯한 이들의 눈에 경악이 깃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