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장. 자객(刺客)-사람을 얻다
고덕이 안창의 군영에 머문 지도 열흘이 넘어갔다.
그동안 고덕은 안창이 하는 행동들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병사들을 토닥이고, 살피고, 간간이 위로의 말을 전하고, 때론 무섭게 야단치고, 윽박지르고, 화를 냈다.
그 절묘한 시점은 지켜보는 고덕마저도 탄성을 자아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렇게 사람 다루는 일을 어깨너머로 배워가던 고덕의 시선이 어느 때부터인가 안창을 떠나 그늘에서 책을 읽거나 냇가에 발을 담그고 있는 호철랑에게 향했다.
그것은 새로운 느낌이었다.
자신이 감탄해 마지않던 안창이 호철랑에게 병사의 일을 묻고 탄성을 터트리거나, 곤란한 송사에 대해 자문을 얻고는 크게 기뻐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고덕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그렇게 안창과 호철랑을 살피며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밤이었다.
갑자기 일어난 고덕이 안창의 천막으로 내달리자, 뒤늦게 일어난 호철랑도 뒤적뒤적 옷을 갖춰 입고 그 뒤를 따랐다.
호철랑이 황급히 안창의 천막으로 들었을 땐 조금 복잡한 상황이 연출되어 있었다.
그걸 설명하자면 우선 창군의 날카로운 창이 안창의 목에 겨누어졌고,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진 창군의 목엔 고덕이 검을 들이밀고 있었다.
“별로 좋은 해후는 아니구나.”
“대, 대협…….”
“일단 창부터 치우지.”
고덕의 말에 안창의 턱밑에 바짝 들이밀어져 있던 창을 창군이 천천히 거뒀다.
“휴~ 십년감수했네. 왜 이리 늦은 거요?”
안창의 투덜거림에 고덕이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조금 많이 늘었지 뭐요.”
그 말은 창군의 침입을 알면서도 적당한 시기를 기다리다 예상외로 빠르게 움직이는 것에 놀라 달려왔다는 뜻이었다.
“그러다 내가 죽었으면 좋았겠소?”
“뭐, 나쁠 것도 없다는 생각은 드오만…….”
“체, 도대체 내가 뭘 어찌했다고 그리 미워하는 건지…….”
안창의 투덜거림을 슬며시 무시한 고덕이 창군에게 겨누어져 있던 검을 거두며 말했다.
“정말 많이 늘었구나.”
“가, 감사합니다. 대협.”
“감사는 무슨……. 네 노력으로 실력이 늘었는데 내게 감사할 게 뭐라고.”
“제 목표가 대협이었으니까요.”
“목표? 뭐, 나중에 내 목을 베려고?”
고덕의 물음에 창군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어, 어찌 감히 제가 은인께…….”
“은인?”
호철랑의 물음에 창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쪽이 안창 순무인 건 알겠는데 저치는 누굽니까?”
“아, 내 길동무.”
“길동무요?”
“그래.”
창군 묵린은 고덕이 누군가를 동무로 표현했다는 것에 크게 충격 받은 얼굴이었다.
그 모습을 살피던 호철랑이 물었다.
“혹시 고 무인은 동무란 표현을 달리 쓰는 건 아니겠지요?”
“달리라면 뭐로 말이오?”
“뭐 이것저것…….”
“쓸데없는 소린 그만하시오. 다른 뜻은 무슨…….”
고덕의 불퉁거림에 슬쩍 미소를 지은 호철랑이 다시 물었다.
“무슨 은인을 말하는지 아직 답하지 않았소만…….”
“선친과 내 생명의 은인이오.”
“생명의 은인……?”
호철랑의 의문에 고덕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원래 이 친구 부자를 죽이러 갔었거든.”
“고 무인, 혹시 전직이 자객이었습니까?”
호철랑의 물음에 슬쩍 째려봐준 고덕이 불만 어린 음성으로 답했다.
“아니었소!”
‘뭐, 하는 일은 비슷했지만…….’
속의 말은 목 안으로 삼켰지만, 그런 고덕을 바라보며 빙긋이 웃는 호철랑은 마치 그 말을 아는 것같이 보였다.
“젠장… 완전히 틀린 건 아니었소. 비슷한 일들을 좀 했었으니까.”
“흠… 하긴 강호인들은 살인을 밥 먹듯 한다고 듣긴 했습니다.”
이해한다는 말인지 아니면 살짝 비꼬는 말인지 도무지 분간이 안 가는 호철랑의 말에 고덕이 불퉁거렸다.
“밥 먹듯이 살인했으면 살아 있는 사람이 있을 턱이 있겠소?”
“그런가요? 흠… 그도 그렇겠군요. 한데, 죽이러 갔다는 창군이 살아서 은인이라 하는 걸 보니 살려 준 겁니까?”
“죽일 이유가 없었소.”
“자객이 이유 따져 가며 죽입니까?”
“거참, 자객 아니었다니까!”
“아! 그렇죠. 자객 비슷한 일을 했다고 했습지요. 그래서 살려 준 거군요.”
뭔가 묘하게 비틀린 결론이었지만, 자객에 대해 더 이상 논하고 싶은 생각이 없던 고덕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후후… 재미있는 길동무를 얻으셨습니다. 대협.”
“글쎄, 이게 재미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
고덕의 투덜거림에 웃음을 지어 보인 창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데, 이쪽에 서신 겁니까?”
“누구? 저 밥맛없는 인간 편? 말도 안 돼!”
“그런데 왜 저를 막으신 겁니까?”
“저치를 보호해주기로 약속한 사람이 있어서.”
정확히 말하면 청을 하나 들어주기로 한 약속이었지만, 그 청이 안창을 지켜 주는 것이었으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누구와 한 약속이었는지 여쭈어도 됩니까?”
“황제.”
“예? 누구요?”
“황제라고.”
“말도 안 됩니다.”
당황하는 창군에게 호철랑이 미소 띤 얼굴로 설명을 하고 나섰다.
“안 대인의 목을 베라고 명한 것이 황제이기 때문인가요?”
“어, 어찌 알고 있는 겁니까?”
“실은… 창 대협, 이게 맞는 표현인가요?”
“아! 내 이름은 묵린이오. 창군은 그저 강호 동도들이 붙여 준 무명일 따름이오.”
“그렇군요. 그럼 다시 설명하지요. 묵 대협을 동원한 건 사실 황상이 아니라 장안 왕부입니다.”
“그거야… 하지만 명은 황제에게 직접 받았소만…….”
“황상께서는 다른 이들의 눈치를 보느라 그럴 수밖에 없었지요. 망극한 일입니다만…….”
“다른 이들의 눈치를 봤다면 왕야들을 말하는 거요?”
“그렇지요. 당금의 대명은 중원 각지에 나눠진 왕야들의 세상이나 다름없으니까요.”
“소문이 사실이었던 모양이구려.”
강호인들의 귀는 관부로는 유달리 닫혀 있는 형편이었다.
오죽하면 황제가 바뀐 것도 모른 채 평생을 살다 가는 강호인들도 적지 않았다.
“근거 없는 소문은 좀처럼 없는 법이니까요.”
“그런데 반란을 일으킨 자를 살려 주려는 황제의 의도는 뭐요?”
“친위 반정이기 때문입니다.”
호철랑의 답에 대강의 사정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그에 고개를 끄덕인 창군 묵린이 고덕에게 물었다.
“하면 절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뭘 어째. 지켜 달래서 지켜 줬으면 됐잖아.”
“하지만 전 죽이라는 부탁을 승낙했습니다.”
창군의 말에 호철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남아일언중천금 뭐 그런 걸 숭배하십니까?”
“숭배가 아니라 그건 진리요, 진리. 남자가 한 입으로 두말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그 덕에 묵 대협이 살아 있는데도 말입니까?”
“그건 또 무슨 소리요?”
“애초에 고 무인이 묵 대협 부자를 죽이라는 약속을 그대로 이행했다면 살아 있을 턱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 그건…….”
호철랑의 말에 자신이 생명의 은인을 이부지자로 만들어버렸다는 걸 자각한 묵린의 당황한 시선이 고덕에게 향했다.
“괜찮아. 난 가끔 거짓말도 해. 이부지자? 그게 뭐. 필요하다면 난 삼부지자 사부지자도 한다고. 내 아버지만 하나면 됐지, 그런 말에 휘둘릴 생각은 없어.”
생각 외로 깔끔한 고덕의 말에 가슴을 쓸어내린 묵린이 포권을 취해 보였다.
“그리 이해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창군의 인사에 고덕은 그저 어깨를 으쓱해 보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묵 대협은 그럴 생각이 없겠죠?”
얄미운 호철랑의 물음에 고덕의 눈치를 흘깃 본 창군이 주춤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소.”
“흠… 문제로군요. 가만 있자. 그럼 우리, 그 약속이라는 걸 좀 뜯어보죠.”
“약속을 어찌 뜯는단 말이오?”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니 그리 발끈하지 마시죠.”
“험험…….”
헛기침을 하는 묵린을 직시하며 호철랑이 물었다.
“혹시 그 약속에 시간제한이 있었습니까?”
“시간제한?”
“예. 대부분의 살행이 우습게도 언제까지 죽여주겠다는 약속이 빠져 있다더란 말이지요.”
호철랑의 말에 자신의 기억을 더듬던 묵린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보니 언제까지 죽이겠다는 말은 없었소만…….”
“그러면 되었네요. 오늘은 그만 돌아가시고, 나중에 안 대인이 죽기 전에 연통을 좀 보내주세요. 그때 묵 대협이 와서 안 대인이 편안하게 가도록 도와주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이론상으론 그럴싸한 말이다.
“그, 그러면 되긴 하겠지만… 저기, 내 연락처를 그럼 매번 남겨야 하는 거요?”
어수룩한 표정으로 묻는 묵린을 호철랑이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보며 말했다.
“그냥 그렇게 위안을 삼으라는 말이지요. 사람이 융통성이 그렇게 없어서야…….”
“아, 그, 그렇다면야…….”
엉겁결에 수긍하는 창군에게 고덕이 물었다.
“정말 그래도 되겠나?”
“그, 그게…….”
“어! 방금 전에 그렇게 할 것같이 말해놓고 말을 바꾸는 겁니까? 지금.”
호철랑의 말에 창군이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요. 이 묵린이 한번 뱉은 말을 바꾸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오.”
“그럼 해결된 거지요.”
“그, 그런 셈이긴 한데…….”
“뭔가요? 확실하게 말씀을 해주셔야 우리도 어찌할지 답을 내리지요.”
호철랑의 다그침에 고덕의 눈치를 살피던 창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겠소. 그리하리다.”
“자- 모든 일이 해결되었군요.”
유난히 밝은 음성을 토하는 호철랑을 바라보는 세 남자의 표정이 마치 뭐에 홀린 듯했다.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당면한 문제가 해결되자 안창이 조촐한 술상을 내밀었다.
“언제 준비한 거야?”
고덕의 물음에 안창의 시선이 호철랑에게 향했다.
“호 판관이 오늘내일 사이에 손님이 올 테니 준비해두라고…….”
안창의 말에 고덕과 창군의 시선이 호철랑을 향했지만, 정작 두 사람의 시선을 받은 호철랑은 술잔을 홀짝이며 홀로 신나 있었다.
그런 호철랑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지어 보인 세 사내도 함께 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술이 들어간 탓일까. 서먹했던 사이는 금세 풀어졌다.
소소한 이야기부터 시작해 심도 있는 대화로 옮겨 가던 대화는 새벽까지 이어졌다.
* * *
다음 날 아침, 지난밤의 과음이 주는 불쾌함을 털어내며 일어서는 고덕의 천막으로 사색이 된 호철랑이 들어왔다.
“무슨 일이 있소?”
“그, 그것이…….”
무슨 일인지 좀처럼 답을 하지 못하는 호철랑의 모습에 고덕의 음성에 걱정이 어렸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는 것이오?”
“와, 왕부가…….”
“왕부? 무슨 왕부가 뭐?”
고덕의 다그침에 호철랑의 말이 이어졌다.
“우, 우리 소흥 왕부가 스, 습격을 받았답니다. 수많은 이들이 죽고 와, 왕야가 나, 납치를…….”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는 호철랑의 멱살을 쥐어튼 고덕이 다그쳤다.
“군주는? 문정 군주는?”
“구, 군주마마도 왕야와 함께 흉수에게 납치를…….”
호철랑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람이 된 고덕의 신형이 천막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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